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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서 사슴까지 / 김중일

 

 

어느 날 내 가슴이 불타면 어쩌나.

 

내 사슴은 어쩌나.

 

깡마른 사슴. 비 맞는 사슴. 눈물 맺힌 사슴. 다리 부러진 사슴. 멍 투성이 사슴. 땅에 파묻힌 사슴. 아빠 없는 사슴. 엄마 없는 사슴.

 

폐에 바닷물이 찬 사슴. 바다가 된 사슴. 자식 잃은 사슴.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어김없이 마중 나온 사슴. 폴짝 내 가슴 속으로 뛰어드는 사슴. 잠 못 드는 사슴, 때문에 점점 커지는 가슴. 점점 자라는 사슴이 사는 사람의 가슴.

 

온몸에 멍이 든 알몸의 네 살배기 아이가 제 손을 과자처럼 선뜻 내민다. 사슴은 잘도 받아먹는다. 꽃잎보다도 작은 나뭇잎 한 장 남김없이, 내 가슴팍에 앉아 사슴은 다 먹어치운다. 그렇다고 이 계절이 오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가는 걸 붙잡아 놓을 수도 없다.

 

이 계절에 일어난 참혹한 사건으로 사슴은 태어났다. 누군가는 죽고, 사슴은 태어났다. 나는 죽은 이의 가슴을 사슴이라고 부른다.

 

사슴은 태어나자마자 눈 뜨고, 일어섰으며, 매일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 한다. 나는 그 여정을 가슴에서 사슴까지, 라고 한다.

 

무너진 내 가슴에서 태어난 사슴 한 마리가, 자란다. 내 가슴은 사슴 따라 점점 커진다. 계속 커진다.

 

어느 날 가슴이 터지고 불타면 내 사슴을 어쩌나.

 

한순간 구름처럼 하얀 재가 된 내 사슴을 어쩌나.

 

사슴 한 마리 사슴 두 마리 사슴 세 마리…… 아무리 백까지 백번을 헤아려도 잠이 오지 않는다.

 

 

 

 

가슴에서 사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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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학교(총장 김혁종) 문예창작과 김중일 교수가 시집 가슴에서 사슴까지로 제19회 지훈문학상을 수상했다.

 

지훈문학상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고결한 정신을 기리고자 제정된 상이다.

 

김중일 교수의 수상작 가슴에서 사슴까지는 부조리한 삶의 면면을 섬세한 이미지와 담담한 언어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교수는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신동엽문학상과 김구용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편 재19회 지훈문학상 시상식은 오는 27일 나남출판사 창립 40주년 기념식과 함께 경기도 포천시 나남수목원 책박물관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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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일 장석남 시인(53)이 제18회 지훈상을 수상했다. 수상작은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창비). 지훈상은 조지훈(19201968) 시인을 기리기 위해 2001년 제정됐다. 올해 타계 50주기를 맞은 조지훈은 한국 현대시의 경지를 넓힌 시인이자 문화사와 민족운동사 연구를 선도한 학자다.

 

18회 지훈상 심사위원회는 김기택·나희덕·이영관 시인이 맡았다. 심사위원단은 장석남 시인의 시적 관심사는 자연, 인생, 사랑의 사건들에 더해 예인(藝人)의 감흥과 선취(禪趣)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면서 지훈 시의 고아한 탈속과 미당 시의 분방한 초월 사이 어디쯤에 그의 노선과 정처가 있을 듯하다고 했다.

 

장석남 시인은 인천 덕적도에서 출생했다. 서울예대, 방송통신대, 인하대 대학원(박사 수료)에서 수학했다. 계간 황해문화편집장을 지냈다. 한양여대에서 교수로 후학을 양성한다. 김수영문학상·현대문학상·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의 수상 소감이다.

 

지훈상의 과분한 명예와 숙제를 안겨준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는 공교롭게도 제가 시를 발표한 지 30년째 되는 해의 그것이다. 시의 궁극에 충실한 것인지, 우리말의 원천을 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속된 욕망에 좌고우면하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보기도 했다. 부끄러움과 외로운 감이 왜 없었겠습니까만 지훈 선생이 지향했던 것의 희미한 한 가닥이라도 붙들고 있었다면 참으로 다행일 것이다."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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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는 시인 장석남(52)은 얼마나 조심스러운 사람인가. 최근 새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창비)를 낸 장석남 시인을 지난 15일 서울 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시집 제목은 입춘 부근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끓인 밥을/창가 식탁에 퍼다놓고/커튼을 내리고/달그락거리니/침침해진 벽/문득 다가서며/밥 먹는가,/앉아 쉬던 기러기들 쫓는다//오는 봄/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발이 땋에 닿아야만 하니까”(‘입춘 부근전문)

 

창가에 앉아 홀로 밥을 먹었습니다. 쓸쓸함이랄까, 원초적인 질문이 떠올랐죠. ‘삶이 뭐지’. 입춘 부근이라는 것은 겨울이 가는 것이잖아요. 기러기들은 떠나온 나라로 가는데, 봄이 오면 꽃이 피죠. 그러다 꽃 밟을 땐 열매 맺는 시절로 넘어가는 걸 의미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호시절도 가는구나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꽃길은 보통 축복의 이미지이지만, 그 꽃길에서 근심하는 시인. 그는 이번 시집이 시간으로나 공간으로나 좀 멀리 보려고 했던 시집이라고 했다. 그리고 시인은 순리에 대해 생각했노라고 말한다. “어느 정도 살면 아프게 되고 죽게 되고, 제 나이도 그렇고 그런 면들을 자꾸 보게 됐습니다. 시에서도 표시가 나지 않을까요.”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은 섬세한 감성과 감각적인 시어로 장석남표 시 세계를 일궈왔다. 이번 시집은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이자 2012년 김달진문학상 수상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 이후 5년 만에 펴낸 시집이다.

 

소매 끝으로 나비를 날리며 걸어갔지/바위 살림에 귀화(歸化)를 청해보다 돌아왔지/답은 더디고/아래위 옷깃마다 묻은 초록은 무거워 쉬엄쉬엄 왔지/푸른 바다에 허기져 돌아왔지/답은 더디고”(‘소풍전문)

 

시집의 첫 시는 소풍이다. “인생은 신명나는 소풍과 같은 것이긴 하나 영원성(‘바위’)에 관해 물어보면 답은 더디다. 지난 5, 시인의 어머니가 연로한 기간이었다.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다 드리면서 보내드려야 할 때가 됐나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저편은 뭘까, 출발에 대해서 생각했고요. 우리가 온 자리가 곧 갈 자리일 텐데 그 자리엔 뭐가 있었을까, 그런 생각들을 좀 쓴 것 같아요.”

 

시인 장석남은 얼마나 소년다운 사람인가. 문학평론가 장석주 시인은 <장석주가 새로 쓴 한국 근현대문학사>(2017)에서 장석남을 두고 “‘순진한 눈의 시인이라 평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군불을 지피는 집, 굴뚝 위로 날아가는 연기, 그 집을 둘러싸고 있는 적막을 단순하고 간결하게 그려내는시인이다. 시인은 바람과 바위와 꽃, 모과와 더덕, 물미역 씻는 소리에도 눈 마주치고 귀기울여 이름을 지어주듯 시를 써왔다. 이번 시집에도 모닥불’ ‘눈사람’ ‘악기’ ‘등을 소재로 한 여러편의 시를 선보인다.

 

부엌문이 열리고/솥을 여는 소리//누굴까?//이내 천천히/솥뚜껑을 밀어 닫는 소리//벽 안에서/가랑잎 숨을 쉬며 누워/누군가? 하고 부를 수 없는 어미는//솥뚜껑이/열리고/닫히는/사이에/크고도 깊은 쓸쓸한 나라를 세웠으니//국경처럼 섰는 소년이여/아직 솥을 닫고 그 자리에 섰는 소년이여/벽 안의 엄마를 공손히 바라보던 허기여//그립고 그렇지 않은 소년이여/팔을 들어 두 눈을 훔치라”(‘녹슨 솥 곁에서-古代전문)

 

어머니의 병환을 지켜보는 와중에 떠오른 어린 시절. 시인을 울컥하게 만든 시다. “소년은 없어지지 않잖아요.” 이 말을 할 때에, 그의 얼굴에 소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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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백야 / 이윤학

 

 

화단을 지키는 고양이 밥그릇에다

성견 사료 한 알 한 알 떨어뜨려줬더니

골이 났는지 눈길도 주지 않더라

 

마름모꼴 방 끝의 티브이를 켰더니

화면 중심으로 불 꺼진 성냥골이

쏜살같이 떨어지더라

 

백합이 품은 짙은 백야를

필사적으로 걸어온 자

물소리를 틀어놓고

자갈을 뒤집는 잠이 들었다

 

한 번은 열 번 백 번 천 번 만 번으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다

 

최후의 툰드라를 틀어놓고

잠이 들어버린 자

바가지에 틀니를 벗어놓고

옛날 맛 그대로인 김치 씹은 물을 오물거렸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

딱따구리조각마법사

세 시 반의 맨발을 위해

오동나무 상판에 가로의 숨구멍을 뚫었다

 

카페의 목조계단은 비좁았고, 반들거렸다

음울한 클래식이 지름길로 들어오고 나갔다

그만이 무덤에 갔다 돌아왔다

짙은 백야를 걸었다

 

천년만년 본드를 흡입하고

봅슬레이를 타고 내려갔다

죽은 자의 힘을 빌려 살지 않겠다

냉골 바닥 거대한 십자가 앞에 팽개쳐져

떨거지가 되지 않겠다

 

 

 

짙은백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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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남출판사에서 수여하는 지훈상의 제17회 수상자로 이윤학 시인과 이영미 성공회대 초빙교수가 선정되었다.

 

지훈상 심사위원들은 "신중하고 치열한 심사과정을 통해 문학·국학 두 영역에서 이같은 수상자를 냈다"24일 밝혔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문학적 업적과 한국학 연구로 보여준 고결한 정신을 기리고자 제정한 지훈상은 문학과 국학 두 부문에서 시상된다.

 

문학부문의 상인 지훈문학상을 수상한 이윤학 시인은 1965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해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등단했고 2003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작품은 지난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시집 '짙은 백야'.

 

국학부문 상인 지훈국학상은 이영미 교수가 지난해 출간한 책 '한국대중예술사, 신파성으로 읽다'(푸른역사)에 돌아갔다. 이 교수는 1961년 서울에서 출생해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지냈고 2003PAF 예술상, 2017년 노정 김재철 학술상을 수상했다.

 

상금은 각 1000만원이다. 시상식은 520일 오전 11시 경기도 포천시 나남수목원 내 나남책박물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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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지붕을 사야겠다 / 유종인

 

 

다시 양철지붕을 올려야 겠다

내게 저 들판 끝 단독의, 아니 독단으로라도

새로 지붕을 얹을 폐가가 있다면

 

빗방울이

얼어오는 몸을 부풀려

눈송이로 맘을 띄우는 겨울이 오기 전에

 

모든 소리에 성감대를 가진

양철지붕을 올려야 겠다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너도 밤나무 나무란 나무들

갈잎과 솔가리에 얹히는 된서리와 별빛 달빛마저

여줄가리 소리들로 쟁쟁하게 되비추는

거울을 눌로 입힌 양철지붕을 그믐밤 고양이가 거닐 때

그 발자국에서

꽃들이 눌러 퍼지는 소리에 소스라치는 고양이여

겨울엗 한뎃잠을 자가 깬 꽃들이

양철지붕에 꿈속의 비명을 던져 올려도 좋겠네

 

한 무덤 방에 누워

부부가 동짓달 궁금한 입 군것질거리를 구시렁거릴 때

그 소리마저 눈보라에 실려

양철지붕에 내려앉으면 그 말 서슬에 깬 아들이

그날로 때아닌 제사상을 보는 저녁도 있어

운감하시라

운감하시라

서로 마음 출출한 날이 가장 좋은 제삿날이니

 

키 높은 옆집 처마의 눈석임물이

양철북을 두드리듯

양철지붕을 두드려 먼가래 한 꽃들의 귀를 부르네

 

 

 

 

양철지붕을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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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남출판이 주관하는 지훈상의 제16회 수상자로 문학 부문에 유종인 시인과 국학 부문에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선정됐다.

 

수상작은 유씨의 시집 '양철지붕을 사야겠다'(시인동네)와 안 교수의 저서 '담바고 문화사'(문학동네)이다.

 

지훈상은 청록파 시인이자 국학자인 조지훈(1920~1968)을 기리기 위해 2001년 제정됐다.

 

상금은 각 1천만 원이며 시상식은 오는 25일 세종문화회관 세종예술동 예인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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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시인을 기리는 제15회 지훈문학상에 김사인 시인의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가 선정됐다고 상 운영위원회와 나남문화재단이 7일 밝혔다.

 

지훈국학상은 연구서적 '일화의 형성 원리와 서술 미학'을 쓴 영남대 국어교육과 이강옥 교수가 선정됐다.

 

심사위원들은 김사인 시인의 시집이 "서정시의 발상과 문법에 충실하면서도 동시대의 사람살이와 현실의 그늘지고 어긋난 자리를 비상한 애착과 필법으로 그려냈다"고 평했다.

 

이강옥 교수의 연구서는 "기존의 허구성을 전제로 하던 서사 연구 풍토에서 허구성보다는 실재성이 짙은 일화를 서사 영역에 포함시켜 서사 연구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상식은 이달 28일 오후 630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다.

 

 

 

어린 당나귀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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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시인의 <어린 당나귀 곁에서>는 창비시선 382. 2006년 무려 19년 만에 "너무 슬프고 너무 아름답다"는 평을 받은 두 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을 펴내며 문단에 신선한 감동과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후 다시 9년이라는 긴 시간 뒤에 선보이는 김사인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삶과 죽음의 갈피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여여(如如)하게, 또는 엄숙하게 수락하는' 겸허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대문자 시의 바깥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미시(微詩)의 시학'을 펼쳐 보인다. 고향의 토속어와 일상언어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빼어난 언어 감각과 정교하고 정감 어린 묘사로 '생로병사의 슬픔 일체를 간절한 마음의 치열한 단정(端正)에 담아'낸 시편들이 나직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김사인 시인은 시단에서 과작의 시인으로 손꼽힌다. 등단 34년에 이제 세번째 시집이니 마땅히 그럴 만도 하다. 2-3년이면 으레 시집 한권을 묶어내는 요즘 세태에서는 자칫 시작(詩作)에 대한 소홀함이나 게으름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인의 말대로 과작이 자랑은 아니지만 단어 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되다 만 시는 결코 장에 내지 않는 문학적 결백성을 보자면 네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더듬더듬/먼 길을 가는 한없이 느린 배밀이”(달팽이)가 오히려 믿음직스럽고 든직해 보인다. 그의 시에 대한 무한한 신뢰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천천히 꺼내놓은 이번 시집은 편편이 깊고 아름답고, 하찮고 슬프면서도 환하고 따스하다.

 

이 절망의 시대에 우리는 절망을 수락하되 절망에 투항하지 않는() 마침내 시인”(최원식, 발문)을 얻었다. 또한 허튼 책”(시인의 말)이 아니라 시인의 내공을 엿볼 수 있는 가장 튼튼하고 가장 미래지향적인, 죽음에 이르는 미학 아름다움의 슬픈 깊이를 더해가는”(김정환, 추천사) 귀한 시집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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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얼굴 / 윤제림

 

 

어떻게 생긴

새가

저렇게

슬피 울까

 

딱하고 안타깝고

궁금해서

밤새 잠을 못 이룬 편집자가

자기가 만드는 시집에는

시인의

얼굴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뒤로부터, 시집에는 으레

새의

얼굴이

실렸다.

 

 

 

 

새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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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 시인과 정병욱 교수가 각각 제14회 지훈문학상과 지훈학술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지훈상 운영위원회와 나남문화재단 측은 지훈문학상에 윤제림 시인의 시집 새의 얼굴’, 지훈학술상에 논문 식민지 불온열전을 쓴 정병욱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HK) 교수가 받는다8일 밝혔다.

 

윤 시인은 지난 1987문예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 ‘삼천리호자전거’ ‘미미의 집’ ‘황천반점’ ‘사랑을 놓치다’ ‘그는 걸어서 온다등의 시집을 냈다. 윤 시인은 동국문학상과 불교문예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현재 서울예술대학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 교수는 19992월 고려대 사학과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그해 11월부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로 근무하다가 20109월부터 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학국(HK) 교수로 일하고 있다.

 

시상식은 오는 2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다.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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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남문화재단(이사장 조상호 나남출판사 대표)이 경북 영양 출신의 문인 지훈 조동탁(1920~1968)을 기려 제정한 지훈상의 열네 번째 시상식이 이달 22일 오후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서 지훈문학상은 시집 새의 얼굴을 낸 윤제림 서울예술대 교수가, 지훈국학상은 역사서인 식민지불온열전을 펴낸 정병욱 고려대 교수가 각각 수상했다.

 

이배용 지훈상 운영위원장은 윤제림 교수의 시집 새의 얼굴의 시적 성취가 지훈 선생의 문학 정신을 계승하고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고, 정병욱 교수의 연구서 식민지불온열전은 지훈 선생의 국학정신을 계승하고 우리의 국학 연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고 선정 배경을 설명했다.

 

이날 문학상을 받은 윤 교수는 시인으로 살아가는 시간들이 지상의 모든 맨손, 맨발, 맨몸으로 이 부박(浮薄)하고 포악한 세월과 맞서는 동업자들의 나날처럼 뜨거운 순간들의 연속이었으면 좋겠다면서 간절한 소망은 제 시의 값이 제 밥값에 부족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또 국학상을 수상한 정 교수는 일제 말기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보통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심정으로 책을 냈다면서 이름 없고 역사 없는 사람들에게 제 이름과 역사를 찾아주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날 시상식에는 조지훈의 두 아들인 조학열, 조태열 씨와 수상자 가족, 문인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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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 미사일 / 김영승

 

 

나는 이제

느릿느릿 걷고 힘이 세다

 

비 온 뒤

부드러운 폐곡선 보도블록에 떨어진 등꽃이

나를 올려다보게 한다 나는

등나무 페르골라 아래

벤치에 앉아 있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등꽃이 上下

발을 쳤고

揮帳에 가리워

나는

비로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미사일 날아갔던 봉재산엔

보리밭은 없어졌고

애기똥풀 群落地를 지나

 

롤러스케이트장 공원

계단 밑 老人들 아지트는

멀리서 보면 慶會樓 같은데

내가 그 앞에 있다

 

명자꽃과 등꽃과

가로등 수은등은

그 향기를

바닥에 깐다

 

등꽃은

바닥에서부터 지붕까지

垂直으로 이어져

꼿꼿한 것이다

 

虛空의 등나무 덩굴이

반달을 휘감는다

 

한 일?

그런 게 어딨냐

 

 

 

 

흐린 날 미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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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 왜요?

 

수상소식을 전하는 전화를 받은 저의 제일성(第一聲)?”였고 그리고 동시에 왜요?”였습니다. 그러나 그 ?”라는 말과 함께 동시에 튀어올랐던 그 왜요?”라는 말은 나오다가 말고 곧 목구멍 속으로 도로 쏙 들어갔습니다. 왜요?”가 왜 도로 쏙 들어가 버렸는지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물론 전혀 몰라도 좋습니다. 또 물론, 왜요?”가 왜 도로 쏙 들어가 버렸는지는 그 왜요?”만 압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나오려다가 자기가 도로 쏙 들어가 버렸으니까요.

 

조지훈과 김영승. 또는 김영승과 조지훈. 잘 매치가 안 되는 조합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매치가 잘 되는 조합임을 저는 잘 압니다. (C. G. Jung)이 말하는바 저의 아니마, 즉 저의 진정한 내적 자아’(true inner self)가 조지훈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분명 조지훈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저의 아니무스이기도 합니다.

 

저는 고1 때인 1974현대시학에 시 거리를 발표했고 고2 때인 1975년에는 역시 현대시학에 김악당(?)이라는 필명으로 시 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 말은 제가 일찍이 문학을 했다는 말이 아니라 저는 글을 그때부터,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중2 때인 1972년부터 쓰되 아주 본격적으로, 물론 자발적으로 아무도 모르게, 썼었다는 말을 하기 위함입니다. 저의 에세이집 오늘 하루의 죽음(문음사, 1989)에 수록된 당시의 일부 일기엔 고교시절 당시 여러 문예지 등등에 시와 평론을 투고하며 갖는 소회와 그 고민의 편린이 도처에서 산견됩니다.

 

1 독일어 시간 첫 시간에 당시 독일어 선생님이셨던 정서웅(鄭瑞雄) 선생님(숙대 독문과 교수로 정년하심)께서는 다음과 같이 판서를 해주셨습니다.

 

¨Ubung macht den Meister!

연습이 대가(大家)를 만든다!

 

그렇듯 스승은 그 제자의 가슴 속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후 선생님께서는 토마스 만, 하인리히 하이네, 하이데거, 고트프리트 벤 등등 독일 철학과 문학에 대해서 많은 독일어 원문과 함께 저에게는 등대와 북극성 같은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조지훈이 승무(僧舞)를 쓸 때의 일화를 읽던 바로 그 고교시절 저도 분명 그 같은 시수(詩瘦)?시를 너무 고민하여 피골이 상접할 만큼 수척해짐?의 과정을 겪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도 오래도록 그러한 과정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술을 많이 마시고 제 시가 정리된 대학노트 몇 권 분량의 초고집(詩稿集)을 잃어버려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었는데, 그것은 마치 바둑의 복기(復棋)처럼 좀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아주 간단히 그리고 토씨 하나 빠짐없이 그야말로 일점일획도 가감 없이 그대로 완벽히 복원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가령 토마스 칼라일이 쓴 프랑스혁명원고가 친구의 실수로 소실되었을 때 그것을 도로 복원한 것을 전혀 신기해하지 않았었습니다. , 저는 그만큼 제 시를 놓고 소위 여절여차여탁여마(如切如磋如琢如磨)의 과정을 겪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역시 고교시절 읽은 무수한 일화 중 조지훈의 가훈인 삼불차(三不借)’를 놓고도 당시는 오래도록 고개를 끄떡였었습니다. 삼불차, 즉 자식을 빌리지 않고 돈을 빌리지 않고 글을 빌리지 않는다 그런 일은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에 여전히 제 고개를 끄떡이게 합니다. 제가 그 무엇인가를 빌리다니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겠습니까?

 

지훈문학상 역대 수상자들의 면면을 보니 그냥 준 것 같습니다. 물론 저한테도 그냥 준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역대수상자 12명은 심사위원들이 그냥 준 것 같은데 저는 특별히 조지훈 선생님께서 너 가져라 하고 그냥 준 것 같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냥 받았습니다. 조지훈 선생님께서 특별히 왜 그냥 주셨는지 역시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겁니다. 그리고 그것 역시 전혀 몰라도 좋습니다.

 

이런 말을 했다고 그 12명의 시인들이 나를 안 본다면 나도 안 봅니다, 본 적도 없지만.

 

조지훈 하면 지조론(志操論)이 떠오르는데 지조(志操)’하니까 지조()’가 동시에 자유연상됩니다. 물론 그러한 자유연상은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이기 때문만이 아닌 제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의 표상으로서의 자유연상일 것입니다. 지조()’는 물론 굴원(屈原)초사(楚辭)이소(離騷)라는 시의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입니다.

 

지조지불군혜 鳥之不群兮

자전세이고연 自前世而固然

하방원지능주혜 何方圓之能周兮

부숙이도이상안 夫孰異道而相安

 

매나 수리 같은 새가 무리 짓지 않음은

예로부터 정해진 일

어찌 둥근 구멍에 네모가 맞으랴

서로 가는 길이 다른 것을

어찌 함께 어울리랴

 

굴원(屈原), 이소(離騷), 초사(楚辭)중에서

 

 

저에게는 태반이 자호(自號)인 무수한 호()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삼이당(三異堂)입니다. 나는 세 가지가 다르다, 즉 노는 물이 다르고, 가는 길이 다르고, 꾸는 꿈이 다르다, 그래서 나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할 수 없다, 그런 뜻으로 삼이당(三異堂)이라 자호하고 이 인터넷 시대에는 그냥 32dang이라고 표기도 하고 그럽니다.

 

저는 분명 무리 짓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친구나 문도(門徒)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제 주변에는 언제나 인산인해(人山人海)입니다. 그래서 조지훈의 지조(志操)’는 저에게는 지조(?)’로 받아들여지고 의미 부여됩니다.

 

골수 유림(儒林)을 자처하면서도 저는 서양철학을 전공했습니다만, 저는 어릴 적부터 기독교적인 세계관의 영향권 안에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인천의 내리교회(1885년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교회)를 제 발로 찾아간 이래, 한창 고교 입시준비가 치열했던 중학교 때는 역시 자발적으로 기독교 통신강좌를 신청해서 수료했고, 이후 성가대 지휘자 생활을 5년 동안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심야산책 중 무심결에 흥얼거리는 노래의 태반이 찬송가거나 복음성가, 흑인영가 등입니다. 또한 20대 초에는 신구약 성서 66권을 영문 번역본, 문화사, 역사서, 지리서, 주해서 등을 옆에다 놓고 정말 처절할 정도로 고통스럽게, 그러나 재미나게, 명랑하게 연구한 바도 있습니다. 고교 시절엔 특히 금강경 등 불교경전에도 심취한 바 있는데 그 불교적 존재론과 인식론이 쇼펜하우어의 사상과도 일치한다는 생각을 갖고는 역시 고개를 끄떡인 바 있습니다.

 

그러한 사상적 편력 역시 조지훈 선생과 비슷하다면 비슷합니다. 한 가지 다른 것은 조지훈 선생께는 유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역시 키르케고르나 니체 식 생각에 의하면, 아니 아까 말한 융이나 그 전의 프로이트 등에 의하면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표리(表裏), 그게 그거라는 말입니다. 저에게는 넘치는 유머가 있습니다만 그 저변엔 슬픔이 깔려 있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그러한 슬픔은 불교식으로 하면 촉목상심(觸目傷心), 즉 눈이 닿는 곳마다 슬프다 하는 자비(慈悲)의 사상의 발로임을 독자들은 다 압니다.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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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문학상 수상 소식을 전해들은 직후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지훈 선생과 저의 인연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17년 전 이맘때쯤 작가와 함께 떠나는 여행 프로그램인 KBS-2 TV 그곳에 가고 싶다촬영 팀과 함께 조지훈 선생의 고향인 경북 영양, 그 일월산(日月山) 산록(山麓)에 있는, 조지훈 선생님이 공부를 한 월록서당(月麓書堂) 일대를, 당시 숙대 국문과 4학년 남모 양과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허리에 무선마이크를 차고 그 월록서당 경내에 서 있는 조지훈 시비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가며 동행한 그 남모 양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찍는데, 그 남모 양이 선생님, 저게 뭘까요? 저리 한번 가 볼까요?” 하니까 제가 아 저기 조지훈 선생님 시비가 있군”(책을 읽듯) 하다 보니 몇 번이나 컷! ! NG가 났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돌연 아주 강력하고 단호히 촬영을 중단시키고 담당 PD한테 앞으로는 대본과 대본에 있는 장면과 동작 설명 등등 일체의 언급을 나한테 하지 말고 그냥 나의 움직임대로 찍으라 하고는 저건 또 뭐야? 웃기게 생겼군등 제멋대로 하다 보니 담당 PD 등 촬영 팀 전원의 입이 아 하고 벌어져 다물 줄을 몰랐었습니다. 그들은 저의 그 탁월한 연기력에 탄복을 했던 것이지요.

 

조지훈 선생이 계셨던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精寺)에 가서는 오대산 월정사만 잠깐 생각하고 왔었습니다. 그러나 그 저변엔 조지훈 선생에 대한 생각이 지하수로 흐르며 변주된 만감은 언 강()에 쌓인 눈/ 해발 1563m 비로봉 정상에서라는 시로 쓰여져 창간호인 포에지(2000년 여름호)에 발표되고 이후 시집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나남, 2001)에 수록됩니다.

 

이번 지훈문학상 수상으로 인하여 향후 저의 저다움, 이 불기(不羈)의 시인인 저 김영승의 김영승다움이 왜곡되고 변질된다면 저는 이 지훈문학상을 저 스스로 반납할 것입니다. 물론 지훈상운영위원회가 아닌 조지훈 선생님께 직접 반납할 것입니다. 물론 상금은 반납 안 합니다.

 

끝으로 역시 지훈문학상을 수상과 동시에 연상된 천상병의 다음과 같은 시를 인용하며 제 소감을 마치고자 합니다.

 

 

편지 / 천상병

 

 

1.

 

아버지 어머니, 어려서 간 내 다정한 조카 영준이도, 하늘나무 아래서 평안하시겠지요. 그새 세 분이 그 동네로 갔습니다. 수소문해 주십시오. 이름은 趙芝薰 金洙暎崔啓洛입니다. 만나서 못난 아들의 뜨거운 인사를 대신해 주십시오. 살아서 더없는 덕과 뜻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주 사귀세요. 그 세 분만은 저를 욕하진 않을 겝니다. 내내 안녕하십시오.

 

2.

 

아침 햇빛보다

더 맑았고

 

全世界보다

더 복잡했고

 

어둠보다

더 괴로웠던 사나이들,

 

그들은

이미 가고 없다.

 

천상병 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오상사, 1984) 중에서

 

 

제가 생각해도 저도 분명, 아니 저는 분명, ‘어둠보다/ 더 괴로웠던 사나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全世界보다/ 더 복잡했던 사나이임도 맞습니다. 그리고 암만 생각해도 아침 햇빛보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어쩌면 훨씬 더, 맑았던 사나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조지훈 선생님께서도 저를 욕하진 않을 것입니다.

 

끝으로 이번 상 때문만이 아니라, 이 어리석은 시인을 장장 12년 동안 기다려주신 조상호 사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가장 고귀한 것은 가장 오래 기다린 것이다라는 앙드레 지드의 말을 생각하면 조상호 사장님과 김영승 누가 고귀한 것인지? 헷갈리지만 그 기다림은 독자들을, 인류를 고귀하게 할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또한 당연히, 심사를 해주신 문학평론가 이남호 교수님과 너무나 훌륭한 두 분 시인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조상호 사장님과 세 분 심사위원, 그 네 분들이 제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받을 분들도 아니지만 저는 여하튼 인사를 했으니 됐습니다. 그 인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니까요.

 

진짜 끝으로, 지난 2년여 동안 몇 차례의 대수술을 의연히 견딘 제 아내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시인으로서의 김영승의 일생엔 영광이란 존재치 않으나 이 수상이 작은 영광이 될 수 있다면, 줄 것도 없는 시인이니 이 영광을 아내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 이제 ?”“왜요?”는 여러분들이 가지십시오.

감사합니다.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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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심사위원들은 지난 1년 동안 출간된 시집들을 검토하여 각자 2~3권의 시집들을 추천하였고, 그것들을 다시 한번 돌려 읽은 후에 최종 심사에 임했다. 심사위원들이 뽑은 1차 선정 시집들이 대개 중복되었고, 독후 소감들이 비슷하여 최종 선정은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조지훈 선생님의 올곧은 인품과 높은 문학적 향기를 기리는 조지훈 문학상의 제13대 수상자와 수상 시집은 김영승 시인의 흐린 날 미사일이 만장일치로 선정되었다.

 

최근 우리 시단에는, 어떤 면에서, 두 가지 종류의 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일상의 체험에서 얻어진 세상과 삶에 대한 인식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드러내는 시들이고, 다른 하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나 생각의 조각을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언어로 드러내는 시들이다. 전자는 어쨌건 로고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후자는 로고스와 현실의 틈새를 후벼 파고 있는 듯하다. 우리 시단의 젊은 시인들이 대체로 후자 쪽으로 쏠림이 심한 것에 대해서, 또 후자의 시들이 보여주는 로고스적 의미의 파탄에 대해서 심사위원들은 한마음으로 우려를 표했다. 이런 우려가 김영승 시인의 흐린 날 미사일을 다시 한번 눈여겨보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김영승은 시와 삶이 하나인, 드문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도시의 은둔자이고 산책자이고 또한 강력한 아웃사이더이다. 누추한 일상에 대한 미시적 관찰과 문명의 문맹에 대한 거시적 비판을 함께 보여주는 그의 시집은, 살을 내주고 뼈를 얻으려는 수행의 소산으로 보인다. 그의 시는 사소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시작부터 그의 언어와 태도와 사유는 비틀거린다. 때로는 과장이고 때로는 넋두리고 때로는 유머다. 그런가 하면 어떤 대목에서는 놀랍게 지적이고 또 어떤 대목에서는 치사찬란하고 또 어떤 대목에서는 선적인 초월이나 방탕의 자유가 제멋대로다. 그러나 그런 과잉과 현학과 치사와 방종의 소란함 밑에는 고요한 슬픔이 있고 모멸적 삶을 따뜻하게 붙잡는 비관도 낙관도 아닌 악수가 있다. 욕망과 물질의 적빈(赤貧)에서 비롯된 천진함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김영승의 시는 한계 없는 욕망으로 썩어 문드러진 오늘의 문명적 삶에 대한 모종의 정신적 출혈이라고 할 수도 있다.

 

흐린 날 미사일에서도 예전의 김영승 시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짧게 토막 친 시행들과 힘차고 변화무쌍한 시적 사유는 비애와 농담의 들판을 뱀처럼 꿈틀대며 나아간다. 뒤통수를 후려치는 엉뚱한 은유의 힘도 여전하다. 또는 행간을 타고 오르는 나팔꽃 줄기가 되어 인간의 우매와 생의 질곡을 아우르는 상징의 꽃을 허공에 피워내기도 한다. 죽음과 악취의 계곡에서, 강풍과 지진의 언덕에서 그는 여전히 반성하는 폐인이다. 거기에 때로는 환자의 신음이, 때로는 교사의 훈시가, 때로는 피에로의 농담이 들어 있다. 이런 점에서 흐린 날 미사일에는, 칭병을 선용하여 법을 설한 유마힐의 아우라가 들어 있기도 하다. 다들 돈 벌러 가고 잘난 척하러 갈 때, 시인은 동네 공원을 맴돌며 그들이 헌신짝처럼 버린 가치들을 줍는다. 문명과 욕망의 미사일이 떨어진 곳이 어떻게 달라졌고 무엇이 남았는가 넝마주의처럼 기웃거린다.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가장 정직한 우리 시대 시인의 한 사람인 김영승을 수상시인으로 정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상복이 적은 사람에게 돌아가는 상이라는 사실도 다행이다. 더 큰 다행은 조지훈 선생님이 지니셨던 어떤 결벽과 고집 그리고 정신을 김영승에게서도 다른 무늬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엇이건 바뀌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세상에서 김영승 시인은 내내 바뀌지 말았으면 좋겠다. 적절한 수상자를 내어 기쁘다.

 

심사위원장 이남호 장석남 이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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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얼굴  / 오정국

 

 

기꺼이 무릎 꿇고 절을 하듯이, 머리를 진흙 속으로

들이밀고, 벌거벗은 궁둥이만 보여주시는

나의 어머니, 저렇듯 얼굴을 뭉개어

진흙이 되셨으니, 그 기쁨 홀로 누리시도다

진흙을 쳐발라 출구를 봉해버린

참나무 불길을 견디시고 이기셨으니

그 고통 세세연연 당신 몫이옵니다

  

타관을 떠돌던

낡은 가방 내려놓고

露宿의 험한 망치와 목장갑을 등 뒤로 감추고

이마에 재를 바르듯, 당신께 나아가

두 볼의 눈물을 경배하고자 하오나

얼굴을커녕 발가락마저

궁둥이로 눌러서 감추어 두셨도다

  

진흙 속으로 캄캄하게 묻어 버린 눈, 눈꺼풀을

어떻게 열고 계신지, 진흙을 눌러 붙인

사방의 손자국을 둘러보는 것인데,

오, 엉덩이로만 빛의 윤곽을 느끼시는

니의 어머니

 

 

 

파묻힌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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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야생의 허기, 야생의 꽃

 

이윽고 날이 저물고 밤낚시를 시작했을 때, 뜻밖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상의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통보였습니다. 처음엔 얼떨떨했는데, 낚시터의 물결처럼 출렁거리는 기쁨과 흥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저기 전화를 하느라고 대물 붕어를 몇 마리나 놓쳤는지 모릅니다. 저 혼자 새벽녘까지 술을 마시며, 몽롱한 취기 속의 찌불을 바라보며 아득한 감회에 젖어들었습니다. 이미 알고 계신 분도 있겠지만, 저는 경북 영양 출신입니다.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는데, 초등학교 시절 읍내에서 시오리를 걸어서 멱을 감으러 다녔습니다. 그곳은 산그늘이 시원하고 너럭바위가 있고 물이 깊어서 소년들이 재주를 넘듯 다이빙을 하기에 그만이었습니다. 그땐 몰랐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바로 주실마을 조지훈 선생님 생가 앞을 흐르는 시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상 통보를 받으면서, “그때 멱을 감은 효험을 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조지훈 선생님이 태어나신 곳이라고 말합니다. “거기가 어디냐?”고 되물으면, 속으로 이런 무식한!”이라고 중얼거립니다. 그만큼 저에겐 크나큰 산이었고, ‘큰바위 얼굴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내려주신 상을 받게 되었으니, 이보다 과분한 일이 그 어디 있겠으며, 이보다 겁나는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산간벽촌의 소년이 시인으로 자라나서 이런 글을 쓰게 됐지만, 저의 첫 장래희망은 트럭운전수였습니다. 무료한 한낮이면 감나무에 올라가서 마을 앞의 신작로를 바라보던 소년은 신작로 저 끝의 세상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트럭운전수가 되면 넓은 세상 어디든 가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장래희망은 상점 간판을 그리는 간판장이 화가였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을 겁니다. 하교하면 곧장 동양미술사의 털보아저씨에게로 갔는데, 페인트 물감이 서로 엉기고 번지는 게 너무나 신기했고 붓끝에서 생겨나는 글씨와 그림이 놀라웠습니다. 털보 아저씨는 당시 군청에 다니시던 우리 아버지를 안다고 했고, 물감통이나 붓을 전해주는 조수 일을 잘하면 십 원짜리 한두 장을 주기도 했습니다. 제가 최초로 알바를 해서 돈을 번 것인데, 그 찐빵 맛이 그렇게 달콤하고 따뜻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저 혼자 먹었습니다. 방천길을 걸으면서 오래오래 씹었습니다. 아버지나 식구들에게 들키면 그딴 짓을 하고 돈을 받았다고 혼쭐이 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고향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때까지 야생의 산과 강을 쏘다니던 헐벗은 생명이었습니다. 페인트 색상들의 변화를 자못 신비롭게 생각했던 순진무구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대구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소년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외따로 친척집에 맡겨졌는데, 그때부터 헛바람이 들었습니다. 마루의 서가에 꽂혀 있던 장식용 세계문학전집들을 빼보며 놀다보니, 그것보다 흥미진진한 성인의 세계가 없었습니다. 그리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미궁의 세계로 빠져들었던 겁니다. 그것이 바로 문학이었고, 시였습니다.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기는커녕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문예창작학과로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가난과 굶주림, 제 속에서 들끓는 그 어떤 원초적 허기에 헐떡거리며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부터 40대 후반까지 신문기자 일을 했습니다. 그때도 이상한 허기들이 들끓어 올라 저를 괴롭혔습니다. 대학은사이자 평생의 스승이셨던 구상 선생님의 질책과 독려로 등단을 했지만, 주위에선 저를 시인이라기보다는 기자라고 불렀습니다. 그게 마음 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얼마나 속이 쓰렸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앙심을 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렇게 낚시터에 혼자 앉아 있었듯이, 저에겐 문단의 벗이나 선후배가 별로 없습니다.

 

저는 변방의 북소리였습니다. 그렇게 시의 수자리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저는 시를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계와의 화해나 해석이 아닌, 이 지상의 형상이나 관념과의 싸움이지요. 주위에서 도시의 블랙홀’, ‘서울지옥의 묵시록이라고 칭한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을 낸 이후 틈만 나면 낚시터와 산, 계곡을 떠돌았습니다. 직장을 대학으로 옮긴 뒤엔 방학을 맞으면 사막이나 오지를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물질의 도시물화(物化)되는 인간을 못견뎌했고, 어떻게든 저를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거칠고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저는 야생의 허기를 보았고, 제 생명의 허기를 보았고, 생식(生殖)의 굶주림을 보았습니다. 그게 바로 시의 빛이며, 저의 숨구멍이란 걸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유년시절의 원초적 허기들이 핏줄처럼 살아있었던가 봅니다. 그게 이번 시집 파묻힌 얼굴진흙들연작에 파묻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는 이번 시집을 보고 무슨 제목이 이렇게 끔찍하냐?”고 했습니다. 시집 제목을 피 묻힌 얼굴로 잘못 읽은 것인데, 그렇게 한바탕 웃고 나니, 정말 시란 피 묻힌 얼굴일지 모른다고 여겨졌습니다. 생의 처연한 허기들이 거기서 꽃처럼 피어나고, 저는 그것을 훔쳐먹고 훑어먹고 퍼먹고 파먹는 몸 하나였습니다. 애당초 저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조지훈 선생님의 풀잎 단장(斷章)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란 구절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이 글을 쓰는 초저녁, 봄꽃은 만개했고 바람이 참 시원합니다. 이제 곧 산책을 나설까 합니다. 저는 최소 하루 한 시간은 걷고자 합니다. 북한산 둘레길이나 시장바닥을 걸으면서 혼 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절름발이 흉내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면 뭔가 달라집니다. 제 몸의 호흡에 발맞추어 이상한 리듬이 찾아옵니다. 그걸 잽싸게 느끼고 받아 적습니다. 외부에서 밀려들어오는 숨결과 제 호흡이 하나의 박자를 이룰 때, 거기서 시의 리듬을 느끼고자 합니다. 헛소리를 하듯 자꾸 말을 중얼거리다 보면, 또 다른 말이 불려나옵니다. 구상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언령’(言靈), 그러니까 언어의 영혼인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사용했던 무수한 이들의 귀신이 거기에 달라붙어서 자신의 목소리도 한번 불러내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걸 또 잽싸게 받아 적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스승께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신, 불교에서 말하는 십악(十惡) 중의 하나인 기어(綺語)의 죄를 경계해야 합니다. 저는 가끔씩 장님처럼 눈을 감고 걸어보기도 합니다. 눈을 감은 뒤의 이미지, 그게 참 재미있습니다. 저는 북한산 야간등산을 하기도 했는데, 시야가 지워지는 대신 청각과 후각, 촉각이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날 줄 몰랐습니다. 그 언제나 찰나에 불과했지만, 이 세상이 저에게 안겨준 생의 감각들이 눈부시고 아프고 처연했습니다.

 

이제 또다시 장엄한 허기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유년시절 이 세상을 향했던 호기심과 시인이 되고자 했을 때의 초발심을 되짚어봐야 할 때입니다. 방학이 되면 백담사 만해마을이나 원주 토지문화관의 창작실을 찾았듯이, 또 다시 저를 유폐시켜야 합니다. 이즈음에 와서 자못 안타깝게 생각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제 시가 왜 아직도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현대시이면서 현대시가 아닌 시, 이를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요? 이런 질문이 또 저를 괴롭힐 것 같습니다.

 

정말 과분하고 영광되고 겁나는 자리입니다. 수염을 쓰다듬으시며 허허허 웃으시는 구상 선생님의 얼굴을 오늘따라 너무 뵙고 싶고, 큰 절을 올리고 싶습니다. 고향의 까마득한 후학에게 이토록 커다란 격려를 내려주신 조지훈 선생님, 우러러 존경해온 심사위원 선생님들, 그리고 나남출판사와 지훈상 운영위원회에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저에게 여러 차례 창작공간을 내준 백담사 만해마을과 원주 토지문화관 측에도 감사드리고, 제 삶의 허기진 시의 길을 묵묵히 믿어주고 받들어준 아내와 가족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끝으로, 저보다 앞서서 이 상을 받으신 시인들의 존함과 이 문학상의 정신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눈먼 자의 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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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지훈문학상의 심사규정에 따라 지난 2년간 출간된 성과들 중에서 심사위원 3인이 추천한 시집들은 다음과 같았다. 고진하 거룩한 낭비, 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조용미 기억의 행성, 오정국 파묻힌 얼굴, 김진완 모른다, 장석원 역진화의 시작, 김선우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위의 시집들은 지훈문학상의 수상후보로 손색없는 개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2주간의 검토를 거친 후, 수상작을 선정하는 회합을 따로 가졌다. 이 자리에서 고진하, 조용미, 오정국 세 시인의 시집으로 범주가 좁혀졌고, 다각도로 의견을 교환한 끝에 오정국 시인을 수상자로 결정하였다. 거룩한 낭비는 시인의 자의식이 선명한 진정성과 만나고 있다는 점에서, 기억의 행성은 삶의 기미(機微)들을 풍경의 굴곡으로 섬세하게 표현해내었다는 것으로 탁월한 시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파묻힌 얼굴이 수상시집으로 결정된 것은 시집 전체를 긴장시키는 주제와 언어의 치열성이 고려된 까닭이었다.

 

그동안 오정국 시인은 실존의 불가지적 형상들을 시로 간파하려는 의욕을 실천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시학적 성취로도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었다. 특별히 파묻힌 얼굴에서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것은 진흙이라는 무정형의 대상을 통해 존재와 만나려는 그의 끈질긴 집중력이 시의 세계를 한층 심화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은폐된 실체에 가 닿으려는 시인의 열의만큼 뜨겁고 통절한 무엇이 있었다. 결핍과 헐벗음뿐으로 세계와 조우하려는 그의 힘겨운 고투는 마침내 실존의 근거를 돋울 새기고, 근원의 자리로까지 독자들을 안내한다. 한국 현대시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도 그의 사색은 의미가 깊다.

 

심사위원 성석제 황동규 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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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천국 / 이영광

 

 

101동과 103동 사이 탄환처럼 새들이 빠져나간 자취가 몇 가닥 활로活路 같다.

 

세 들어 사는 자의 까칠한 눈으로, 나는 내가 먼 빛의 명멸을 봤다는 생각이 든다. 쨍한 무심결의 일순, 아연실색할 악착이 유리 같은 불안이 심증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깃털처럼 파란이 남아 아물대는 허공.

 

눈 그친 뒷산 잡목 숲이 생가지 분지르는 소리 이따금씩 들려오고 놀던 아이가 별안간 넘어져 크게 울고,

 

젊은 어머니가 사색이 되어 뛰어나오기도 한다. 다친 몸을 더 다친 마음이 뜨겁게 여미어 안고 간다.

 

실직과 가출, 취중 난동에 풍비박산의 세월이 와서는 물러갈 줄 모르는 땅,

 

고통과 위무가 오랜 친인척 관계라는 곤한 사실이야말로 이 생의 전재산이리라. 무릎 꿇고 피 닦아주던 젖은 손 우는 손.

 

사색死色이란 진실된 것이다. 아픈 어미가 그라했듯, 내 가슴에도 창백한 그 화석 다발이 괴어 있어 오그라들고 까무러치면서 한 잎 두 잎 쉼 없이 꺼내 마침내 두려움 없는 한 장만을 남길 것이다.

 

이 골짜기에는 돌연이었을 건축들 위로 출렁이는 구름 전함들이 은빛 닻을 부리고 한 호흡 고른다. 깨뜨리고 싶은 열투성이의 의식 불명을 짚고 일어나, 멀고 높은 곳에 불현듯 마음을 걸어 두는 오후.

 

저 허공은 한 번쯤 폭발하거나 크게 부서지기 위해 언 멈 가득 다시 청색의 피톨들을 끌어 모으는 중이지만, 전운戰雲이란 끝내는 피할 수 없다는 것, 다만 무성한 속절의 나날에 대하여 나는

 

괴로워했으므로 다 나았다, 라고 말할 순 없을까.

 

살 것도 못살 것도 같은 통증의 세계관世界觀 가지고 저 팽팽한 창밖 걸어가면 닿을까, 닿을 것이다. 환청처럼 울리는 하늘의 먼 빛.

 

가시 숲에 긁히며 돌아오는 지친 새들도, ‘아까징끼바르고 다시 놀러 나온 아이도, 장기 휴직중인 104동의 나도 사실은 실전의 정예들,

 

목숨 하나 달랑 들고 참전 중이었으니.

아픈 천국의 퀭한 원주민이이었으니.

 

 

 

 

아픈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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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시 원고를 마무리해 막 잡지에 보내려던 참에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혼자 놀고 있는데, 누가 잘 놀고 있다고 말해준 것 같아 당황스러웠습니다. 시 쓰기는 혼자 열렬한 시름으로 노는 일일 텐데, 과연 힘을 다해 놀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고심 끝에 저는 우선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상에는 원래 상의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라는 숙제가 들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오랜 시간을 두고 알아내어 한 번의 기회로 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진심을 다해 열심히 놀면 알게 될 것이다.”

 

저는 학창시절을 지훈 선생님의 절조와 시혼이 숨 쉬는 캠퍼스에서 보냈습니다. 그분은 그때 이미 거기 계시지 않았으나 교정 곳곳의 돌비()들이며 여러 기념노래 속에, 학교 앞 술청의 때 절은 탁자와 벽에, 그리고 수업에서 전해 듣던 숱한 회고와 인용의 갈피에 마치 빛과도 같은 그늘로 살아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분의 부재를 아는데 아무도 그분의 부재를 느끼지 못하던 이상한 배움터를 떠올리자니, 높은 정신과 섬세한 감성의 한 자락이나마 현장 취득한 행운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곳에서 배우고 헤매면서 작은 뜻을 세워 지금에 이르렀기에 저에게는 이 상이 각별하고도 무겁습니다.

 

저는 지훈 시의 고전주의적 기품과 세심한 언어 조형, 애수 띤 낭만적 감수성에 눈길이 가면서도, 초기작인봉황수(鳳凰愁)나 나중의 한국전쟁 종군시편들, 그리고 병고를 의연히 생의 일부로 거두어들이는()에게와 같은 작품에 특별히 끌렸습니다. 그 시편들에는 여지없이 몸의 깊은 주름을 비집고 나온 불가피한 정념의 일렁임이 있고, 시의 얼굴과 인간의 얼굴이 한데 겹쳐서 생겨나는 떨림이 있고, 그래서 시와 인간이 동시에 간절하고 위태로워지는 어떤 뜨거운 순간들이 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이 육성 아닌 육성들은 가누기 힘든 것을 가누어내는 영혼의 품위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길지 않은 저의 시력에도 지훈 시의 이 힘센 맥락이 저류의 하나로 흘러왔지만, 때로 제 시작(詩作)의 난맥상을 확인하는 날이면 등골에 흐르는 식은땀을 감추기가 어렵습니다.

 

말의 계획적인 운용에서 생겨나는 낯선 느낌을 시의 본래 효과로 생각하던 데서 낯선 느낌 자체에 말과 의식을 개방하자는 쪽으로 움직여온 것이 제 시의 역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근자에는 이 계획성을 표 나게 누르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과도기적 혼란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된 것이 이번 시집이 아닌가 합니다. 마음의 어두운 충동들을 따라다니다 보니, 모르는 사이에 혼란과 우울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낳은 힘은 뚜렷하지 않은 데 반해 그것이 나와 남에 대한 낯선 적의로 드러났을 때가 이 시집에서 가장 낯이 뜨거워지는 부분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무의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의식이 뭘 말하려고 하는지 더 귀 기울이다 보면, 인간의 결여와 세상의 결핍에 대한 애타는 말들이 새롭게 태어나지 않을까, 자신은 없지만 그렇게 기대를 걸려고 합니다.

 

시에는 내일이 있어도 시인은 내일이 없어야 한다고 여기기에 저에게는 쓰다가 쓰러질 일말의 각오가 없지 않습니다만, 품은 역량이 미미하여 혼란과 몽매에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인생이 약해지고 마음에 기갈이 드는 것은 어쩌면 제가 아직도 시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곤 합니다. 시에 몸을 내어주는 순간의 괴로운 희열에도, 시를 의지하여 환영인 듯 악몽인 듯도 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인간 수업에도 용맹하게 젖지 못했음을 털어놓아야겠습니다. 하지만 이 정체와 두절의 시간에 지훈의 이름으로 저에게 내려지는 상이 방법이 아니더라도 지침이, 지도(地圖)가 아니라면 원기가 되어 주리라는 생각에 여러 날을 마음이 떨렸습니다. 그래서 이 상이 고맙습니다.

 

업적을 칭찬하는 일에도 괴력이 필요해진 세태에 하물며 미흡을 격려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몸부림을 애씀으로, 헤맴을 모색으로 헤아려주신 최승호, 이남호, 김기택 선생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지훈상 운영위원회나남문화재단의 관계자분들을 비롯하여, 그것이 무엇이든 다른 인간에게 뭔가를 주려고 애쓰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놓지도 주지도 않고, 심지어 받지도 않는 것이 현실의 도덕이 된 메마른 곳에서 이 아름다운 행사가 길이 의연하길 바랍니다. 아름다운 건 대개 선한 법이고, 언제나 선한 영혼이 삶을 더 깊이 향수합니다. 나는 과연 살 만한 인간인가,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곳인가 하는 물음을 어떻게 물을까에 대해 더 전전긍긍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늘과 사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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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지훈문학상 심사는 지훈이라는 이름이 붙은 문학상에 걸맞은 수상자를 내는 일과 가장 우수한 작품을 선정하는 일을 모두 충족시켜야 하지만, 두 조건은 서로 부딪칠 수도 있다. 따라서 수상작을 선정하는 기준은 후자에 더 무게를 두었다. 최근 2년 내에 출간된 시집 중에서 심사위원들이 추천한 7권의 시집이 심사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후보작을 수상작으로 한다 해도 좋을 만큼 모두 만만치 않은 성취를 보여 주었으므로 결정이 쉽지 않았다. 긴 논의 끝에 이영광의 시집아픈 천국을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이영광의 이번 시집이 가진 미덕은 도저히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몸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정직하게 받아쓰는 데서 나오는 강렬한 힘이다. 그의 시들은 제 몸을 억압하는 삶의 부조리한 현실과 환경을 조금도 피하려 하지 않는다. 수화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시인은 들리지 않는 몸의 말”, “터질 듯 입 다문 마음”, “대화를 포기하고 몸속으로 들어가 돌아눕는 말에 끈질기게 다가가 끝내 발설되지 않는 몸의 말을 들으려고 한다. 그래서 기꺼이 몸을 쥐어짜서 마음의 눈빛을 뽑아내고 마음을 뽑아내고 싶은 자/ 마음을 쥐어짜서 붉은 혀의 목청을 꺼내고 싶은 자가 된다.

 

그의 몸말은 제 몸을 끊임없이 닦달하여 안락과 편안함이 제 몸 안에서 드러눕지 못하게 하고, 귀찮아서라도 삶과 인간 속에 들어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대답, 끝내고 싶어 하는 대답을 끝나지 않게 만든다. 굳건하고 확고하고 당연한 듯 보이는 안전한 세상의 정답들을 들쑤셔 불안한 질문으로 만들려 한다. 다시는 질문이 들어오지 못하게 질문이 들어올 틈을 단단하게 막아놓은 정답들에게 균열을 가하려 한다. 이 정답과 질문 사이에서 과장과 왜곡, 반어와 역설이 풍부한 이영광식 유머가 나온다. 거칠고 투박해서 웃지 않을 수 없는 이 슬픈 유머는 마음에서 최단거리로 거침없이 나오는 것이기에 강렬한 힘이 느껴지게 한다. 이 블랙유머가, 마음껏 내지르는 비명과 거친 야유와 날것의 감정이 시 바깥으로 나가지 않도록, 아슬아슬하게 붙들어주는 것 같다.

 

그러나 이영광의 시집은 충분히 숙성되지 않은 감정이나 정서로 크게 소리 지른다는 점과 설명이 많아 산문적이라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어 수상작으로 결정하기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함께 논의된 다른 작품들도 높은 완성도와 주목할 만한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논의는 서로 부딪치며 길어졌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그의 몸말의 진정성과 힘이 상을 받을만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여 수상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심사위원 이남호 최승호 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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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사과/ 나희덕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새가 쪼아 먹은 자리마다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

 

나는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입 베어물었다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그들이 사라진 수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그들이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 물었을 뿐인데

 

 

 

 

야생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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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어찌된 일인지 시쓰기의 어려움과 시인으로 사는 일의 고단함은 갈수록 커져만 갑니다. 시를 그만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떠올리곤 했던 지훈 선생의 말이 있습니다. “시인이 시를 버리고 무엇으로 생각하며, 시를 잃고 무엇으로 사랑하며, 시를 버리고 무엇으로 무기를 삼을 것인가.” 이 말은 도망치려는 저를 다시 시 앞으로 불러 앉혔고, 시를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되었음을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시집 야생 사과를 낸 지 꼭 1년이 지났습니다. 지훈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저는 사실 마음이 뜨끔했습니다. 과분한 격려인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어떤 불편함이 따라붙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불편함의 이유를 말씀드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수상소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되새김질하는 동안 이 상이 저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헤아려보고자 합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야생 사과라는 시집은 독자적인 새로움이나 성취를 보여주었다기보다는 과도기를 지나는 한 인간의 내면적 고백에 가깝다고 여겨집니다. 과도기란 한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자, 파괴와 혼란을 불가피하게 경험하게 되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그 시들을 쓰는 동안 저는 어떤 시를 써야겠다는 지향보다는 다른 시를 쓰고 싶다는 갈망에 사로잡혀 지냈습니다. 하지만 한 세계를 깨뜨리는 일은 그것을 축조해나가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막막한 노릇이었습니다.

 

시집을 낸 후에 저는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처한 삶의 조건이 시에 집중할 수 없도록 몰아치기도 했지만, 그것은 한편 의도적이고 긴장 어린 직무유기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시를 완전히 내려놓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 낯선 자신을 붙잡고 끙끙거렸던 것 같기도 합니다. 생각의 파편들을 받아적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일을 계속했지만, 단 한 편도 제가 시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 파편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료하는 일을, 그리고 시라는 완제품을 여기저기 납품하는 일을 제 안의 또 다른 는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거부는 완강했고, 그 앞에서 저는 무력했습니다. ‘다른 시’ ‘새로운 시를 원하고 있는 그에게 저는 예전의 타성대로 따르기를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와 함께 묵묵히 침묵의 시간을 견디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편함의 또 다른 이유는, 제 내면적 요구에 따라 전통의 자장(磁場)에서 멀어져가고 있을 때 지훈의 이름으로 다시 호명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등단 이후 제가 줄곧 속해 온 시의 영토는 지훈이 지향한 질서와 조화의 세계에 비교적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전통을 바탕으로 한 균형감각은 저에게 부정해야 할 덕목으로 느껴졌고, 재현적 언어에 대한 회의도 강해져 갔습니다. 그런 저에게 지훈상이 주어졌다는 것은 전통으로의 회귀를 환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학상의 목적은 그 상이 기리는 시인과 아류의 시인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새롭게 확장하라는 권유에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저는 지훈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지훈을 비롯한 청록파에 대한 이해는 상당부분 전통과 현대성의 도식적인 이분법에 기초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훈의 시와 시론을 읽다보면 그가 현대성에 둔감한 시인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전통과 현대성을 결합하기 위한 모험을 감행했던 흔적들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지훈이 서구사상을 받아들여 동양전통과 접맥하는 지점에서 논리의 모순을 보인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혼란을 향한 감행이 오히려 안정된 고전주의자의 신념보다 한결 시인다운 모색이라고 생각합니다. ‘芝薰이라는 풀초( )’자가 나란히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며, 그의 풀잎斷章이라는 시를 떠올려 봅니다.

 

한 줄기 바람에 조잘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이 구절을 읽으며, 풀처럼 섬세하게 흔들리는 감각이 있었기에 바위처럼 굳은 정신과 지조 또한 가능했으리라 짐작해보기도 합니다.

 

지훈 선생이 남긴 삶의 자취와 예술적 풍취 앞에서 제 문학의 자리는 아직 볼품없지만, 그 오롯한 길을 따라 걸으려는 마음만은 간절한 바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상은 저의 재능이나 성취보다는 스스로의 무력함과 싸우면서 통과하고 있는 혼란의 여정에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환절기를 앓고 있는 제 시들에게 따뜻한 격려를 베풀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나남출판사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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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지훈 선생의 시가 도달한 언어의 드높은 품격과 고아한 향기는 이후의 한국 현대시가 넘어야 할 뚜렷한 봉우리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지훈 선생의 시를 넘어설 수 있는 시가 나타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지훈 선생의 시가 보여준 품격과 향기는 재주가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뛰어난 지성인이 지행일치의 삶을 살아가며 풍기는 인품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삶의 품격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라고 생각한다. 지훈문학상 심사위원들은 지훈 선생의 시가 지닌 이같은 성격을 염두에 두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의 많은 부박한 시들이 보여주는 깊이의 결여를 걱정하면서 심사에 임했다.

 

지훈문학상 심사 위원들은 송찬호, 나희덕, 최승자, 이병률 등 6~7명의 시인들이 생산한 시집을 대상으로 삼아 논의한 결과 수상 후보자를 어렵지 않게 송찬호와 나희덕 두 사람으로 좁힐 수 있었다. 송찬호의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에서는 그의 반성적 상상세계가 이미 일정한 경지에 도달한 시어구사 능력에 힘입어 한층 자유롭게 구사되고 있으며, 나희덕의 야생 사과에서는 에 대한 응시와 에 대한 성찰로 귀결되는 고통의 시간을 팽팽한 언어로 줄기차게 형상화하는 집요함과 성실함이 들어 있다. 그래서 세 사람의 심사위원들은 이 두 시인의 시집 중 내용의 깊이와 형상화가 보여주는 미덕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쪽이 수상작이 되든 유감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송찬호의 경우 동일한 시집이 중복수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결국 나희덕의 야생 사과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나희덕의 야생 사과20여 년에 걸친 시작생활이 만들어낸 여섯 번째 시집이다. 그의 이 시집은 과거를 과거로 만들기 위한, 그러나 과거를 넘어서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건설하려는 의지가 만들어낸 반성적 언어의 집합이다. 나희덕의 그 같은 의식을 우리는 나는 바늘이다/하얀 무명의 장막 속으로/떨리는 몸을 밀어 넣기 시작한다라든가 나는 박쥐다/나는 새가 되지 못한 게 아니라/쥐가 되지 못했다라는 말 속에서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다. 나는 이미 지워졌다라는 말 속에서 과거와 결별하려는 자세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안개 속에 숨겨진 형체와 같기 때문에 완전한 결별을 손쉽게 이루지 못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읽을 수 있었다.

 

나희덕의 야생 사과는 이런 강렬한 반성적 성격 때문에 주어가 이다. 서정시의 일반적 화자인 1인칭보다 훨씬 강도 높은 주관적 1인칭으로서의 가 그의 시를 지배하는 주어이다. 그리고 이 는 반성적인 의식과 자세 때문에 긴장되어 있으며, 이 긴장은 이 시집의 미덕을 이루는 팽팽한 언어, 팽팽한 의미로 나타난다. 특히, 나희덕이 결정적 순간이란 시에서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와 빛이 절묘하게 만나는 순간을 포착해야 하듯이 결정적 순간이란 게 있다. 잎맥을 따라 흐르던 물기가 한 꼭짓점에서 일제히 끊어지는 순간,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제 발목을 내리쳐야 한다고 쓰고 있는 시구가 바로 그런 미덕의 소산일 것이다.

 

또한 나희덕은 이어지는 시구에서 그러면 짧으면서도 아주 긴 순간 한 생애가 눈앞을 스쳐갈 것이다라고 썼는데, 이 순간이야말로 그의 반성적 의식이 만들어낸 완전한 결별이며 결정적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그의 이번 시집은 이런 완전한 순간을 향해 자신의 내면을 비우고 게우는, 그리고 시간과 풍경과 삶을 재인식하고 재정비하는 줄기찬 노력의 성과이다.

 

시인 조지훈의 시와 정신과 생애에 부합하는 길을 걸어간 시인에게 이 상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지금까지 심사위원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소망은 지훈 선생이 걸어간 길을 편협하게 축자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올곧게 자신의 삶을 추스르며 최근의 경박한 시어에 대응하는 팽팽한 의미의 언어를 만드는 작업에 지훈상을 수여하는 것은 이 상의 본질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 심사위원들은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나희덕 시인에게 지훈상을 수여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시인이 희망하는 새로운 세계가 시를 통해 우리 앞에 환하게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오생근 정현종 홍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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