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 미사일 / 김영승
나는 이제
느릿느릿 걷고 힘이 세다
비 온 뒤
부드러운 폐곡선 보도블록에 떨어진 등꽃이
나를 올려다보게 한다 나는
등나무 페르골라 아래
벤치에 앉아 있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등꽃이 上下로
발을 쳤고
그 揮帳에 가리워
나는
비로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미사일 날아갔던 봉재산엔
보리밭은 없어졌고
애기똥풀 群落地를 지나
롤러스케이트장 공원
계단 밑 老人들 아지트는
멀리서 보면 慶會樓 같은데
내가 그 앞에 있다
명자꽃과 등꽃과
가로등 雙 수은등은
그 향기를
바닥에 깐다
등꽃은
바닥에서부터 지붕까지
垂直으로 이어져
꼿꼿한 것이다
虛空의 등나무 덩굴이
반달을 휘감는다
急한 일?
그런 게 어딨냐
[수상소감] 예? 왜요?
수상소식을 전하는 전화를 받은 저의 제일성(第一聲)은 “예?”였고 그리고 동시에 “왜요?”였습니다. 그러나 그 “예?”라는 말과 함께 동시에 튀어올랐던 그 “왜요?”라는 말은 나오다가 말고 곧 목구멍 속으로 도로 쏙 들어갔습니다. 그 “왜요?”가 왜 도로 쏙 들어가 버렸는지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물론 전혀 몰라도 좋습니다. 또 물론, 그 “왜요?”가 왜 도로 쏙 들어가 버렸는지는 그 “왜요?”만 압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나오려다가 자기가 도로 쏙 들어가 버렸으니까요.
조지훈과 김영승. 또는 김영승과 조지훈. 잘 매치가 안 되는 조합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매치가 잘 되는 조합임을 저는 잘 압니다. 융(C. G. Jung)이 말하는바 저의 아니마, 즉 저의 ‘진정한 내적 자아’(true inner self)가 조지훈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분명 조지훈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저의 아니무스이기도 합니다.
저는 고1 때인 1974년 《현대시학》에 시 〈거리〉를 발표했고 고2 때인 1975년에는 역시 《현대시학》에 김악당(金?堂)이라는 필명으로 시 〈봄〉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 말은 제가 일찍이 문학을 했다는 말이 아니라 저는 글을 그때부터,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중2 때인 1972년부터 쓰되 아주 본격적으로, 물론 자발적으로 아무도 모르게, 썼었다는 말을 하기 위함입니다. 저의 에세이집 《오늘 하루의 죽음》(문음사, 1989)에 수록된 당시의 일부 일기엔 고교시절 당시 여러 문예지 등등에 시와 평론을 투고하며 갖는 소회와 그 고민의 편린이 도처에서 산견됩니다.
고1 독일어 시간 첫 시간에 당시 독일어 선생님이셨던 정서웅(鄭瑞雄) 선생님(숙대 독문과 교수로 정년하심)께서는 다음과 같이 판서를 해주셨습니다.
¨Ubung macht den Meister!
연습이 대가(大家)를 만든다!
그렇듯 스승은 그 제자의 가슴 속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후 선생님께서는 토마스 만, 하인리히 하이네, 하이데거, 고트프리트 벤 등등 독일 철학과 문학에 대해서 많은 독일어 원문과 함께 저에게는 등대와 북극성 같은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조지훈이 〈승무(僧舞)〉를 쓸 때의 일화를 읽던 바로 그 고교시절 저도 분명 그 같은 시수(詩瘦)?시를 너무 고민하여 피골이 상접할 만큼 수척해짐?의 과정을 겪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도 오래도록 그러한 과정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술을 많이 마시고 제 시가 정리된 대학노트 몇 권 분량의 초고집(詩稿集)을 잃어버려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었는데, 그것은 마치 바둑의 복기(復棋)처럼 좀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아주 간단히 그리고 토씨 하나 빠짐없이 그야말로 일점일획도 가감 없이 그대로 완벽히 복원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가령 토마스 칼라일이 쓴 《프랑스혁명》 원고가 친구의 실수로 소실되었을 때 그것을 도로 복원한 것을 전혀 신기해하지 않았었습니다. 즉, 저는 그만큼 제 시를 놓고 소위 여절여차여탁여마(如切如磋如琢如磨)의 과정을 겪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역시 고교시절 읽은 무수한 일화 중 조지훈의 가훈인 ‘삼불차(三不借)’를 놓고도 당시는 오래도록 고개를 끄떡였었습니다. 삼불차, 즉 자식을 빌리지 않고 돈을 빌리지 않고 글을 빌리지 않는다 … 그런 일은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에 여전히 제 고개를 끄떡이게 합니다. 제가 그 무엇인가를 빌리다니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겠습니까?
지훈문학상 역대 수상자들의 면면을 보니 그냥 준 것 같습니다. 물론 저한테도 그냥 준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역대수상자 12명은 심사위원들이 그냥 준 것 같은데 저는 특별히 조지훈 선생님께서 너 가져라 하고 그냥 준 것 같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냥 받았습니다. 조지훈 선생님께서 특별히 왜 그냥 주셨는지 역시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겁니다. 그리고 그것 역시 전혀 몰라도 좋습니다.
이런 말을 했다고 그 12명의 시인들이 나를 안 본다면 나도 안 봅니다, 본 적도 없지만.
조지훈 하면 〈지조론(志操論)〉이 떠오르는데 ‘지조(志操)’하니까 ‘지조(鷙鳥)’가 동시에 자유연상됩니다. 물론 그러한 자유연상은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이기 때문만이 아닌 제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의 표상으로서의 자유연상일 것입니다. 그 ‘지조(鷙鳥)’는 물론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중 〈이소(離騷)〉라는 시의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입니다.
지조지불군혜 鷙鳥之不群兮
자전세이고연 自前世而固然
하방원지능주혜 何方圓之能周兮
부숙이도이상안 夫孰異道而相安
매나 수리 같은 새가 무리 짓지 않음은
예로부터 정해진 일
어찌 둥근 구멍에 네모가 맞으랴
서로 가는 길이 다른 것을
어찌 함께 어울리랴
굴원(屈原), 〈이소(離騷)〉, 《초사(楚辭)》중에서
저에게는 태반이 자호(自號)인 무수한 호(號)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삼이당(三異堂)입니다. 나는 세 가지가 다르다, 즉 노는 물이 다르고, 가는 길이 다르고, 꾸는 꿈이 다르다, 그래서 나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할 수 없다, 그런 뜻으로 삼이당(三異堂)이라 자호하고 이 인터넷 시대에는 그냥 32dang이라고 표기도 하고 그럽니다.
저는 분명 무리 짓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친구나 문도(門徒)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제 주변에는 언제나 인산인해(人山人海)입니다. 그래서 조지훈의 ‘지조(志操)’는 저에게는 ‘지조(?鳥)’로 받아들여지고 의미 부여됩니다.
골수 유림(儒林)을 자처하면서도 저는 서양철학을 전공했습니다만, 저는 어릴 적부터 기독교적인 세계관의 영향권 안에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인천의 내리교회(1885년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교회)를 제 발로 찾아간 이래, 한창 고교 입시준비가 치열했던 중학교 때는 역시 자발적으로 기독교 통신강좌를 신청해서 수료했고, 이후 성가대 지휘자 생활을 5년 동안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심야산책 중 무심결에 흥얼거리는 노래의 태반이 찬송가거나 복음성가, 흑인영가 등입니다. 또한 20대 초에는 신구약 성서 66권을 영문 번역본, 문화사, 역사서, 지리서, 주해서 등을 옆에다 놓고 정말 처절할 정도로 고통스럽게, 그러나 재미나게, 명랑하게 연구한 바도 있습니다. 고교 시절엔 특히 금강경 등 불교경전에도 심취한 바 있는데 그 불교적 존재론과 인식론이 쇼펜하우어의 사상과도 일치한다는 생각을 갖고는 역시 고개를 끄떡인 바 있습니다.
그러한 사상적 편력 역시 조지훈 선생과 비슷하다면 비슷합니다. 한 가지 다른 것은 조지훈 선생께는 유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역시 키르케고르나 니체 식 생각에 의하면, 아니 아까 말한 융이나 그 전의 프로이트 등에 의하면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표리(表裏), 그게 그거라는 말입니다. 저에게는 넘치는 유머가 있습니다만 그 저변엔 슬픔이 깔려 있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그러한 슬픔은 불교식으로 하면 촉목상심(觸目傷心), 즉 눈이 닿는 곳마다 슬프다 하는 자비(慈悲)의 사상의 발로임을 독자들은 다 압니다.
지훈문학상 수상 소식을 전해들은 직후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지훈 선생과 저의 인연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17년 전 이맘때쯤 작가와 함께 떠나는 여행 프로그램인 KBS-2 TV 〈그곳에 가고 싶다〉 촬영 팀과 함께 조지훈 선생의 고향인 경북 영양, 그 일월산(日月山) 산록(山麓)에 있는, 조지훈 선생님이 공부를 한 월록서당(月麓書堂) 일대를, 당시 숙대 국문과 4학년 남모 양과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허리에 무선마이크를 차고 그 월록서당 경내에 서 있는 조지훈 시비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가며 동행한 그 남모 양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찍는데, 그 남모 양이 “선생님, 저게 뭘까요? 저리 한번 가 볼까요?” 하니까 제가 “아 저기 조지훈 선생님 시비가 있군”(책을 읽듯) 하다 보니 몇 번이나 컷! 컷! NG가 났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돌연 아주 강력하고 단호히 촬영을 중단시키고 담당 PD한테 앞으로는 대본과 대본에 있는 장면과 동작 설명 등등 일체의 언급을 나한테 하지 말고 그냥 나의 움직임대로 찍으라 하고는 “저건 또 뭐야? 웃기게 생겼군” 등 제멋대로 하다 보니 담당 PD 등 촬영 팀 전원의 입이 아 하고 벌어져 다물 줄을 몰랐었습니다. 그들은 저의 그 탁월한 연기력에 탄복을 했던 것이지요.
조지훈 선생이 계셨던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精寺)에 가서는 오대산 월정사만 잠깐 생각하고 왔었습니다. 그러나 그 저변엔 조지훈 선생에 대한 생각이 지하수로 흐르며 변주된 만감은 〈언 강(江)에 쌓인 눈/ 해발 1563m 비로봉 정상에서〉라는 시로 쓰여져 창간호인 《포에지》(2000년 여름호)에 발표되고 이후 시집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나남, 2001)에 수록됩니다.
이번 지훈문학상 수상으로 인하여 향후 저의 저다움, 이 불기(不羈)의 시인인 저 김영승의 김영승다움이 왜곡되고 변질된다면 저는 이 지훈문학상을 저 스스로 반납할 것입니다. 물론 지훈상운영위원회가 아닌 조지훈 선생님께 직접 반납할 것입니다. 물론 상금은 반납 안 합니다.
끝으로 역시 지훈문학상을 수상과 동시에 연상된 천상병의 다음과 같은 시를 인용하며 제 소감을 마치고자 합니다.
편지 / 천상병
1.
아버지 어머니, 어려서 간 내 다정한 조카 영준이도, 하늘나무 아래서 평안하시겠지요. 그새 세 분이 그 동네로 갔습니다. 수소문해 주십시오. 이름은 趙芝薰 金洙暎崔啓洛입니다. 만나서 못난 아들의 뜨거운 인사를 대신해 주십시오. 살아서 더없는 덕과 뜻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주 사귀세요. 그 세 분만은 저를 욕하진 않을 겝니다. 내내 안녕하십시오.
2.
아침 햇빛보다
더 맑았고
全世界보다
더 복잡했고
어둠보다
더 괴로웠던 사나이들,
그들은
이미 가고 없다.
천상병 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오상사, 1984) 중에서
제가 생각해도 저도 분명, 아니 저는 분명, ‘어둠보다/ 더 괴로웠던 사나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全世界보다/ 더 복잡했던 사나이’임도 맞습니다. 그리고 암만 생각해도 아침 햇빛보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어쩌면 훨씬 더, 맑았던 사나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조지훈 선생님께서도 저를 욕하진 않을 것입니다.
끝으로 이번 상 때문만이 아니라, 이 어리석은 시인을 장장 12년 동안 기다려주신 조상호 사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가장 고귀한 것은 가장 오래 기다린 것이다”라는 앙드레 지드의 말을 생각하면 조상호 사장님과 김영승 누가 고귀한 것인지? 헷갈리지만 그 기다림은 독자들을, 인류를 고귀하게 할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또한 당연히, 심사를 해주신 문학평론가 이남호 교수님과 너무나 훌륭한 두 분 시인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조상호 사장님과 세 분 심사위원, 그 네 분들이 제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받을 분들도 아니지만 저는 여하튼 인사를 했으니 됐습니다. 그 인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니까요.
진짜 끝으로, 지난 2년여 동안 몇 차례의 대수술을 의연히 견딘 제 아내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시인으로서의 김영승의 일생엔 영광이란 존재치 않으나 이 수상이 작은 영광이 될 수 있다면, 줄 것도 없는 시인이니 이 영광을 아내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자, 이제 “예?”“왜요?”는 여러분들이 가지십시오.
감사합니다.
제13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심사위원들은 지난 1년 동안 출간된 시집들을 검토하여 각자 2~3권의 시집들을 추천하였고, 그것들을 다시 한번 돌려 읽은 후에 최종 심사에 임했다. 심사위원들이 뽑은 1차 선정 시집들이 대개 중복되었고, 독후 소감들이 비슷하여 최종 선정은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조지훈 선생님의 올곧은 인품과 높은 문학적 향기를 기리는 조지훈 문학상의 제13대 수상자와 수상 시집은 김영승 시인의 《흐린 날 미사일》이 만장일치로 선정되었다.
최근 우리 시단에는, 어떤 면에서, 두 가지 종류의 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일상의 체험에서 얻어진 세상과 삶에 대한 인식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드러내는 시들이고, 다른 하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나 생각의 조각을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언어로 드러내는 시들이다. 전자는 어쨌건 로고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후자는 로고스와 현실의 틈새를 후벼 파고 있는 듯하다. 우리 시단의 젊은 시인들이 대체로 후자 쪽으로 쏠림이 심한 것에 대해서, 또 후자의 시들이 보여주는 로고스적 의미의 파탄에 대해서 심사위원들은 한마음으로 우려를 표했다. 이런 우려가 김영승 시인의 《흐린 날 미사일》을 다시 한번 눈여겨보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김영승은 시와 삶이 하나인, 드문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도시의 은둔자이고 산책자이고 또한 강력한 아웃사이더이다. 누추한 일상에 대한 미시적 관찰과 문명의 문맹에 대한 거시적 비판을 함께 보여주는 그의 시집은, 살을 내주고 뼈를 얻으려는 수행의 소산으로 보인다. 그의 시는 사소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시작부터 그의 언어와 태도와 사유는 비틀거린다. 때로는 과장이고 때로는 넋두리고 때로는 유머다. 그런가 하면 어떤 대목에서는 놀랍게 지적이고 또 어떤 대목에서는 치사찬란하고 또 어떤 대목에서는 선적인 초월이나 방탕의 자유가 제멋대로다. 그러나 그런 과잉과 현학과 치사와 방종의 소란함 밑에는 고요한 슬픔이 있고 모멸적 삶을 따뜻하게 붙잡는 비관도 낙관도 아닌 악수가 있다. 욕망과 물질의 적빈(赤貧)에서 비롯된 천진함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김영승의 시는 한계 없는 욕망으로 썩어 문드러진 오늘의 문명적 삶에 대한 모종의 정신적 출혈이라고 할 수도 있다.
《흐린 날 미사일》에서도 예전의 김영승 시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짧게 토막 친 시행들과 힘차고 변화무쌍한 시적 사유는 비애와 농담의 들판을 뱀처럼 꿈틀대며 나아간다. 뒤통수를 후려치는 엉뚱한 은유의 힘도 여전하다. 또는 행간을 타고 오르는 나팔꽃 줄기가 되어 인간의 우매와 생의 질곡을 아우르는 상징의 꽃을 허공에 피워내기도 한다. 죽음과 악취의 계곡에서, 강풍과 지진의 언덕에서 그는 여전히 반성하는 폐인이다. 거기에 때로는 환자의 신음이, 때로는 교사의 훈시가, 때로는 피에로의 농담이 들어 있다. 이런 점에서 《흐린 날 미사일》에는, 칭병을 선용하여 법을 설한 유마힐의 아우라가 들어 있기도 하다. 다들 돈 벌러 가고 잘난 척하러 갈 때, 시인은 동네 공원을 맴돌며 그들이 헌신짝처럼 버린 가치들을 줍는다. 문명과 욕망의 미사일이 떨어진 곳이 어떻게 달라졌고 무엇이 남았는가 넝마주의처럼 기웃거린다.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가장 정직한 우리 시대 시인의 한 사람인 김영승을 수상시인으로 정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상복이 적은 사람에게 돌아가는 상이라는 사실도 다행이다. 더 큰 다행은 조지훈 선생님이 지니셨던 어떤 결벽과 고집 그리고 정신을 김영승에게서도 다른 무늬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엇이건 바뀌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세상에서 김영승 시인은 내내 바뀌지 말았으면 좋겠다. 적절한 수상자를 내어 기쁘다.
심사위원장 이남호 장석남 이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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