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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행 야간열차 / 손현승

서울 올라오는 아버지

머리칼 베어 기차표 끊으시네

배가 고파 주먹 두 개와 바꾼 삶은 계란에

목이 메네

창밖의 어둠 삽으로 퍼올려 겨우 밝힌 불씨 하나

시러펀 손바닥을 적시네

숨조차 아까운 토막잠 너머 창밖에

아버지 두 주먹 같은 밤

아빠,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어릴 때부터 아빠의 직업은 겨울이라고 적었던걸요

겨울은 꼭 수정 구슬 같아서

뽀득뽀득 닦으면 바닥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하죠

한 장씩 넘어가는 이야기 속에

눈에 익은 골목이 보이고

닳고 닳은 저녁들이 있고

골목 끝에서 과자처럼 부서지던 아빠의 어깨가 있고, 서울 올라오는 아버지

기어이 그림자를 열차 안에 떼어 놓고 내리시네

오랜 후에 부는 바람을 아버지는 알고 있네

겨울은 이제 막 시작되었네

잘 가라, 힘없이 손 흐드는 그림자가

주머니를 뒤적여 찾아낸 옛날 노래

카테리나 행 열차는

8시에 떠나네

11월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얘야, 어쩌면 그날

열차에서 내린 건 그림자였을지도 모른단다

이렇게 나는 날마다 희미해지고 있지 않니?

그러나 어쩌면 추위와 배고픔이

나의 구원이었을지도 몰라

해마다 봄이 오면

멀리서 열차는 돌아오네

서울 올라오시는 내 아버지

꼭 쥔 주먹 같은 어깨뼈 같은

목련, 목련

* 미키스 데오도라키스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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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공직문학상 영예의 대상으로 서울시 공무원 손현승씨가 낸 시 ‘목련행 야간열차’가 선정됐다.

 

인사혁신처와 공무원연금공단은 2022년 공직문학상 수상작 47편을 발표하고, 누리집(홈페이지)에 공고했다고 4일 밝혔다.

 

이들 입상한 작품들은 전자책(e-book)으로 제작해 인사처 및 공무원연금공단 누리집에 게시될 예정이다. 

 

올해 출품된 작품은 시, 시조, 수필, 단편소설·희곡 등 8개 부문에서 2058편으로, 이 가운데 대상인 대통령상은 1명, 국무총리상 6명, 인사혁신처장상 20명, 공무원연금공단이사장상 20명 등이 선정됐다.

 

대상인 대통령상을 받은 목련행 야간열차는 세월과 가장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낸 아버지라는 존재를 되새겨보게 하는 작품으로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잘 그려냈다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금상인 국무총리상에는 시 부문 이나연씨의 ‘열역학 제2법칙’ 신정모씨의 시조 ‘도요(陶窯)’ 김윤서씨의 수필 ‘양철나무꾼의 심장’최은경씨의 단편소설 ‘잔여물 관리센터’ 정경봉씨의 동시 ‘일기장은 냉장고’, 이상백씨의 동화 ‘비밀 친구’가 수상했다.

 

수상작 대부분이 표현기법 등에서 문학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은상인 인사혁신처장상에는 시 부분에서 박한을씨의 ‘레테’와 오현춘씨의 ‘오먹가을 앞의 자화상’ 시조 ‘빅뱅’, 수필 ‘강담이야기’와 ‘선택’ 등 20편이 선정됐다.

 

동상인 공무원연금공단이사장상에는 시 부문에서 장미영씨의 ‘피카소의 연인이 되고 싶어요’ 등 시 7편과 시조 1편, 수필 4편, 단편소설 2편, 동시 3편, 동화 2편, 공직공감 1편 등이 수상했다.

 

노창수 심사위원장(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은 “코로나와 경제 불황 등 여러 현실적 난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가 담긴 작품들이 많았다”며 “공직사회의 문학적 저력과 성취력을 가늠할 수 있었고, 구성과 표현에 있어 신춘문예에 버금가는 작품도 있었다”고 총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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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무수한 건너편들 / 윤계순

 

 

고층빌딩의 창문을 닦는

로프공들은 만나는 창문마다

그 안쪽의 자신을 만난다

몇 개의 매듭을 풀고 나니 또 몇 개의

매듭이 묶이는 외줄이 되었다

공중을 닦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마리오네트쯤 될까

햇살의 찡그린 얼룩들을 지워나가면

선명하게 나타나는 무수한 건너편들

별들이 밤하늘의 창문들이라면

저 무중력의 희미한 사람은

늘 자신의 앞을 닦고 또 닦는 사람,

그도 한때 저 안쪽에서 일하고 싶었던 사람

수십 갈래로 번지던 생각들이

팔을 뻗어 햇빛의 너비를 가늠해 볼 때

하늘 사다리처럼 난간을 내어준 순간들

아찔한 일들이야 저 아래쪽에서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

누군가 튼튼한 동아줄을 내려 주듯

천품을 살펴 내려 준 천직

이쪽을 닦아 저쪽을 선명하게 빛내는 일

아래로, 아래로 닦다 보면 어느새 바닥

문득 무수한 창문의 안쪽에서

아직 나오지 못한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지만

이미 노을이 거울 속으로

안과 밖의 하루를 편입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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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당신의 가토 인비저블* / 주향호

 

 

나는 민원인을 응대하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늘 케이크를 만든 답니다. 부드러운 쉬폰케이크만큼 사람도 얇아서 저마다 구멍 하나씩은 지니고 있기에 쉬폰케이크를 전문적으로 만들었어요.

 

재난지원금이 생긴 후부터는 가토 인비저블이라는 특별한 케이크에 관심을 가졌어요. 세상에도 구멍이 났기 때문인데요. 재앙이 닥칠 때 우리의 답은 늘 하늘이어서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나요?”하고 묻게 되고 나는 오존층에서 쏟아지는 자외선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사실은 내 탓이어서 빛에게 부끄럽다고 고백하게 된답니다. 하늘의 답도 역시, 지상에 사는 우리여서 빛은 우리의 구멍을 층층이 엮어서 원래의 방향을 따라 하늘로 되돌아가는 것이 본연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지요. 무작정 기다려야 했거나 평등하지 않다고 느꼈거나 가난했던 마음을 과일과 채소 슬라이스로 층층이 쌓아 올릴 때 보이지 않게 반죽하여 굽는 방법은 무척 매력적 이었어요.

 

까마득히 먼 번호표를 뽑아 들고 다가와 다짜고짜 화를 내는 민원인이나 온종일 말동무가 필요한 민원인에게는 달콤한 재료, 까칠한 동료와 무서운 상사에게는 달지 않은 재료를 고르지요. 케이크를 만들 준비가 끝나면 나는 손에 밀가루를 가득 묻히고 잠시 눈을 감아요. 내 손을 잡고 끝도 없이 달려서 바다에 닿은 타인이 새하얀 케이크를 내밀던 날을 떠올려봐요. 입으로 바람을 일으켜 촛불을 끄는 것은 누구나 좋아하니까, 나를 여기까지 데려 왔겠지 이해하면서요. 심술궂은 바다가 달려와 나를 끄고 도망치고 또 끄고 도망치네요. 나는 심지에 맺힌 촛불이 타인의 눈물이라서 내가 후-하고 날려준 후에야 비로소 희망을 맛봤답니다. 빛이 잘 

돌아가고 있을 거라는 상상이 허락된 순간이었어요.

 

케이크는 어쩌면 당신의 구멍 난 날들을 밀가루 속 글루텐 성분으로 엮어 초를 꽂게 하려고 만들어지는 건지도 모르지요. 살다 보면 당신도 응원을 받아야 할 때가 있을 테니까요. 굽기가 끝난 가토 인비저블을 당신께 드리겠어요. 맛있게 드시려면 보이는 곳에 놓아둔 채 미룬 일을 하면서 가토 인비저블을 일단 까맣게 잊어보세요. 곧, 한적한 순간이 와 옳거니 하는 박수 한 번에 한 가지를 깨닫고 아차 하는 박수 한 번에 잘못 하나를 인정하게 될 때 겹겹이 쌓인 높이 그대로 한입에 넣지 말고 포크로 조금씩 떼어 혀끝으로 음미하는 것이 좋겠어요.

 

제빵사가 되지 그랬냐고요? 과일과 하나가 된 반죽은 다 구워지면 

거의 보이지 않게 되는데 나도 보이지 않게 살고 싶을 뿐이어서요.

 

* 가토 인비저블 : 보이지 않는 케이크라는 뜻.

 

 

 

 

 

[은상] 바지랑대의 꿈 / 황성관

 

 

사너멀 기와집 앞마당에 바지랑대는 하늘이었다

 

빨강고추가 멍석에 널리고 기와집 용마루에 거문고 걸리면

중년의 여인은 떨리는 손끝으로 여섯줄 현을 탄다

뒤뜰 대숲 따라 골바람이 불면 파도소리 귓가에 맴돌고

돛단배 무리지어 쪽빛으로 물 드릴 때

마당에 홀로선 아낙은 지그시 눈감고 어깨춤을 춘다

 

처서處暑를 갓 넘긴 들판에 벼이삭 부비는 소리

참새 떼 쫓는 깡통소리에 짝 이룬 메뚜기는 화들짝 놀라 뛰고

논두렁 서리태는 속적삼 쌈짓돈 되어 개다리소반에 올랐다

 

기와집 고명딸 사주단자 오가고

앞마당에 먹물먹인 차일遮日 높게 치던 날

초례청醮禮廳 기러기는 소곡주 합환주에 날개 짓을 한다

 

소복 입은 여인의 버선인양 백설기 같은 눈은 쌓이고

동네우물 가는 길에 차가운 발자국

손바닥은 쩍쩍, 이마에 주름살은 늘어만 가는데

우체통 빛바랜 고지서에 십년 묵은 신경통은 깊어만 간다

 

기관지 고질병에 검게 멍든 기왓장은 층층이 기침을 뱉어내고

장독대 정한수에 영정사진 드리우면 여든아홉 어머니는 망부석이 되었다

장군봉 넘어온 아침 햇살은 기와집 앞마당에 가득한데

수줍은 바지랑대 오월 목단꽃 붉은 꿈을 꾼다 

 

 

 

 

[은상] 나를 보다 / 한숙희

 

 

긴 겨울속으로 숨은 너는

다시 읽는 詩

잃어버린 글자들이

푸르스름한 어둠속에 웅크린 채

시간을 기억한다

묵은 서랍에 저녁을 넣어둔다

어젯밤은 투명하고

불빛에 묻어버린 적막이

눈물로 차오르고

나는 텅빈 항아리가 된다

널브러져 지친 기억은

움켜진 손아귀에

붉은 자욱으로 남아

그 시간 끝에서

다시 마주할 너의 길위에 서있다 

 

 

 

 

[은상] 사월 / 심진경

 

 

떨어진 꽃잎을 세다가

밥을 굶었다

매해 사월에는 바닥을 본다

사월의 마른 바람은 꽃잎을 날리고

찢어진 대기 틈으로 사라진 꽃잎은

다음 사월에 다시 나타난다

줄지도 않고 틀림없이

마른 바람이 잦아들어

비가 내리길 바란다

꽃잎을 모아 묻어주고 싶다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없이 사월만 담은 꽃잎에게

자연의 성숙과 노화와 죽음을 알려주고 싶다

사월에는 꽃잎을 세어야 한다

바닥을 보고 밥을 굶어야 한다

아무래도 봄비는 쉬이 내리지 않으려나 보다

그러니 여전히 꽃잎은 나타난다

그러니 반드시 보아야 한다

적어도 사월에는 그렇게라도 하여야 한다

어느덧 노란 나비가 날아오를 때까지 

 

 

 

 

[은상] 우리 동네 정육점 / 박형식

 

 

일주일에 세 번

주인이 정한 수 금 토요일은

우리 동네 정육점 소 잡는 날이에요

유난히 많은 눈이 예보된 주말 날씨에도

언제부턴가 지도에서 슬쩍 사라진 외진 골목에도

환한 눈을 넉넉하게 재어놓은 도심에는

선홍빛 육질이 좋은 어린 소가 되새김질한

붉은 달이 어김없이 뜨지요

한쪽으로 빗질을 잘해 넘긴 새벽 공기는

붙임성 좋게도

비릿한 우유가 살얼음처럼 얇게 부서지는 논둑을

새벽마다 살짝 밟고 넘어서요

밤새 꼬깃꼬깃한 어둠을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헛간에선

건초가 누가 지켜보지 않는데도

밤마다 훌쩍 참 고맙게도 자라주어요

어느새 검붉게 물든 하늘은 차라리 너무 밝아

함박눈은 정말이지 깜빡 잠들었다 깨도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데

채식으로 밝아진 눈엔

더 이상 뜯어 먹을 풀이 보이지 않죠

정육점 주인이 보기 좋게 썰어놓은 한 접시의 달이 뜨면

꼬르륵 들리나요

간도 보지 않고 삼킨 달은 여태 식지 않고

녹말 덩어리처럼 허옇게 굳어

논두렁을 따라 끝없이 흐르고 있어요

잠시 걸음을 멈추면 선명해지고 깊어지는 마블링

밤하늘 구석진 곳마다 조금씩 자라나는 붉은 살점 하나

살짝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혀요

저 멀리 호주에도 청정한 달이 뜬다는데

이번 달 주문량을 맞추지 못할까 하는 조바심에

연료를 가득 채운 보름달은

막상 구름에 가려서는 항구에서 연일 불법체류 중이에요

불판처럼 붉게 달궈진 정육점 냉장고에 누워

일광욕을 느긋하게 즐기는 소 혓바닥은

 

아직 할 말이 남아있을 거예요

신기하게도 발음기관이라고 적당히 구부러져 있어요

막상 혀뿌리를 무겁게 놀려

접시에 들러붙은 발음기호를 꺼내려고 하면

접시 한가득 흥건하게 침부터 고이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소 혓바닥이 건네는 진솔한 말엔 시큰둥하던 손님은

정작 부위마다 붙은 터무니없는 가격표에는 혀를 내두르다간

잠시 딴청을 피워요

역시나 눈치가 빠른 주인은 식감이 좋은 부위로 시식을 권할 줄 알죠

특보를 낼 정도로 눈을 많이 품어

주둥이가 거뭇한 구름을 뚫고 이제 막 도착한 포화지방산은

예상은 늘 빗나가지 않아

밤하늘 가득 불꽃놀이처럼 폭죽을 터뜨려 주어요

혀를 말아 올리면 그에 질세라 입꼬리가 먼저 올라가며

입안 가득 부챗살처럼 퍼지는 육즙으로

혀는 누가 지켜보지 않는데도

입속에서만 어물어물

옆구리가 결리도록 혀뿌리만 연신 꼬아대기 바쁘죠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과분하게도 너무나 고맙게도 잘 대접받은 오늘이

안타깝게도 최후의 만찬일이래요

거세된 수소의 눈은 너무 순박해

단골을 오래 기다렸다 덤으로 따라나서죠

완전하게 익히지 않아도

눈가에 습기를 품은 미디엄 달빛도

조악하게 만져 놓은 구름이 먼저 채가며

날 것으로 꿀꺽

낮부터 어스름 미리 나와 낯을 유난히 가리던 붉은 달도

순식간에 판매 완료

갑작스런 폭설과 교통체증에도

셔터를 내리는 주인의 손놀림은 날아갈 듯 가볍기만 해요

대놓고 호객행위를 하는 이벤트 언니들도 없고

요란한 광고판 없이도

우리 동네 정육점에 다시 올 주말은

입소문만으로도 즐거운 달구경 제대로 하는 날이에요

 

소 엉덩이에 악착같이 붙어있는 배설물 위로

착 감기는 꼬리뼈가 만들어낸 바람은

오늘따라 더욱 매섭기만 해요

 

 

 

 

 

[은상] 색즉시공 / 이정원

 

 

1.

날마다 팔레트에 물감을 섞는다

비가 오는 날에는 블루와 레드를,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날에는 그린과 블루를 섞는다

기억이 임계점을 향해 달려갈 때는

블루와 그린과 레드가 한꺼번에 섞여 백색이 되기도 한다

 

거울 앞에 선 물체의 색은 같은 방향을 유지한다

마이크로폰이 처음 목소리를 이탈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는 색만이 아니다

음성이 벽에 부딪쳐

난반사되어,

블루로 변하기도,

블랙으로 변하기도 한다

 

어떤 마음들은 부딪치다가

블랙아웃되기도 한다

 

2.

어둠이 오면 색의 경계가 사라지고 너머의 광장으로 걸어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창밖 어둠속에

익숙한 얼굴이 어제처럼 다가온다

지나간 것들은 무슨 색으로 정의될까

나만의 방식으로 색을 입힌다

 

그리움에는 또 무슨 색을 칠해 놓을까

레드, 그린, 블루, 옐로, 화이트, 블랙...

그대로 놓아둘까

도화지를 찢어 버릴까

점점 줄어드는 나의 여백에,

점점 넓어지는 너의 부재에

 

3.

검정색 새 한 마리가 허공으로 날아간다

찰나에서 찰나로

 

 

 

 

[은상] 설렁탕집 반딧불이 / 하재분

 

 

혼자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다가

멀리서 불빛이 글썽이는 것을 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 말없이 밥을 먹는 몇 사람이 보였다

수어를 하며 밥을 먹는 그들의 눈동자에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손 마디, 마디에서 작은 반딧불이가 태어난다

 

뚝배기를 비우며 그들은 눈 앞에 떠오르는

반딧불이를 보고 있는 것일까?

간혹, 묵은지 같은 웃음들이 배시시 공중으로 번졌다

침묵에는 허기를 채울 수 없는 속앓이가 있다

죽은 후에야 허기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열병에 걸려 목소리를 잃어버리신 큰 아버지

입안에서 나오지 못한 말들이 고인 채,

끝내 방 한가운데서 고목처럼 구부러지셨다

내가 모르는 설움을 가슴에 묻은 채 떠났다

 

입관을 하러 가기 위해

그의 가슴을 열었을 때,

사람들은 반딧불이가 큰 아버지의 가슴 바깥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 식당에서 혼자 먹는 저녁은

멀리서 보면 모두가 반딧불이들 같다

깜박이다가 사라지는 상처처럼

 

반딧불이는 맑은 상처 속에서만 살다 간다

 

 

 

 

[동상] 달팽이 / 유효정

 

 

담벼락 사이 상처가 있는 곳,

뭉글대는 달팽이 무리 신기해 반짝이던 나는

저 멀리 호박넝쿨 위에서 또깡또깡

곡괭이질 하는 어머니 간간이 확인해보곤 하였는데

쓸데없이 흙 속에서 무엇 하는 짓이냐!

얼굴 붉어진 아버지의 엄포가 바람에 실리면 어쩌나

어머니의 마른 등살을 치고 가면 어쩌나

여섯 살의 나는 쪼그려 앉아

달팽이를 보며 시간을 세고 있었다

그만 밝은 곳으로 나와 주면 좋으련만

몇몇은 회오리치는 얇은 껍질 속에서 비밀같이

꽁꽁 박혀있고 몇몇은 흐물텅 흐물텅

어둠을 뭉치고 있었는데,

첫째는 도망치듯 시집을 갔고

달러 빚 삼부이자 얹어서 짜낸 대학 등록금

둘째, 셋째, 넷째가 일수 찍듯 줄을 섰던 그 시절

방 한 칸에 빨래처럼 널려있던 오 남매의 내일은

땀으로 흥건했던 어머니의 속옷처럼 마를 줄을 몰랐다

새벽을 보고 밤의 별을 얹어서 이고 가도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 이런다 달팽이는

강낭콩 꼬투리도 담고 까끌까끌한 콩잎까지 엮어 넣어

자신만 없는 빈집을 사연 많은 소설집처럼 등에 메고

기우뚱 기우뚱 꿈틀거리는데,

종아리 사이에 노을처럼 걸린 시간을 저릿저릿하며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그 무리 속으로

던졌다 돌을 던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뭉그러진 가계(家系)를 짊어진 얼굴 하나가

벽을 타고

 

오른다 

 

 

 

 

[동상] 투명한 길 / 김일하

 

 

창문에 난 길을 들여다본다

초록의 풀밭이 투명하게 일렁이는 길 위에서

길잡이 개미가 표시해둔 페로몬 향을 따라

한 행렬이 고요히 흘러간다

개미처럼 걸어다니고

개미처럼 살아내면서

누군가의 무사한 걸음을 위한

길 하나 내어놓지 못하고

나를 위해서만 나를 부려먹었는데

앞서간 개미의 걸음이 창에 매달려

다른 개미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저 긴 행렬이 한 몸이다

 

얼마나 많은 길이

허방 같은 창을 무사히 다녀갔을까

 

 

 

 

 

[동상] 느린 걸음 / 정호석

 

 

어차피 멈추어 설 시계바늘을 왜 자꾸 돌리시나요?

제자리걸음 일거라는 소아신경과 교수의 진단 후

아기 엄마의 시간은 맥없이 내려앉았다.

 

일곱 달을 채 품지 못한 엄마의 마른 눈물이

시계의 투명한 살결 위에 떨어지고

파문에 갇힌 시계바늘은 부르르, 털썩 주저앉는다

 

엄마의 손길이 닿으면 발가락에 힘을 주는 시계바늘

몇 번의 까치걸음은 하나의 반경으로 귀결되고

얼마 가지 못하고 엄마의 품으로 들어와 박힌다

중력을 거스르고 열두시를 향해 올라가 보지만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여섯시로 회귀하는 시계

결국 오른쪽으로만 돌고 돌아 제자리인걸까

 

한걸음 가고 비틀, 또 한걸음 가다 멈칫

초침의 힘겨운 걸음을 바라보다

엄마가 알아차린 것은

시계바늘이 걷는 길이

동심원을 그리는 제자리걸음이 아니라

매순간 새로운 직진의 연속이었다는 사실

세상이 규정해 놓은 열두 개의 숫자 대신

엄마의 간절한 눈빛을 이정표 삼아

넘어져도, 멈췄다 천천히 가도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두려울 리 없는 시계는

끝없이 전진을 하고 있었나보다

 

언젠가, 돌돌말린 고무나무 어린잎 같은

앙상한 시계바늘에도 살이 차오르는 날

째깍째깍 아기의 옹알이

마디마디 연결되어 단단한 문장으로 뻗어 오를 테지

잃어버린 시간이라도 찾은 듯

 

 

 

 

 

[동상] 無窮花 / 김경미

 

 

오랫동안 그 나무에 무엇이 피고 졌는지 알지 못했다.

비바람에 휘청이지도 않았고, 붉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그 나무 아래 앉아 촉촉한 눈시울을 훔치고는

막차에서 내린 나를 맞아

된장국에 불 켜러 잰걸음으로 앞서곤 했다.

이내 돌배처럼 작아지는 그녀의 길은,

수없이 국을 데우고, 나물을 무치고, 깨를 뿌리는,

그건 무슨 신념처럼 보였다.

 

가을비는 나를 이곳에 데려왔다.

이곳은 생각의 끝과 시작

빛바랜 꽃나무 아래, 때 묻은 무지개색 보료

꿈을 꾸다가 울던 곳

무지개색 보료 앞에 어머니가 신념처럼 상을 들인다.

가을비를 맞아 붉은 어머니

젖은 무궁화처럼 앉아 손을 흔든다.

 

 

 

 

[동상] 버드나무 / 이정행

 

 

첫 봄비가 오는 날이었다

나는 투명한 몸이 되어 버드나무의 뿌리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바닥이라고 생각했더니

더 깊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한때 구름 속에 있을 때

바닥의 세계가 훤히 보이는 듯한 착각도 했지만

여기서는 옅은 구름만큼 부질없는 것이었다

사방은 어두운 공허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흘러내리고 마는 것이

길을 걷는 자의 여행법일지도 모른다

공허 속에 어두운 방이 보이기도 하지만

문을 쉽게 열어주지 않아 머무를 자리 없다

머물 곳 없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더 깊은 바닥으로 내려가는데

갑자기 바닥에서

얇고 부드럽기만 한 손가락 같은 것이

나를 끌어올린다 강한 힘에 이끌려 올라가는 동안

고개를 들어 나보다 앞서간 것들을 본다

햇빛을 받으면서 끌어올린 손가락이 끝나는 지점에는

허공에 연둣빛 줄기가 그려지고 있다

바닥으로 떨어진 것들도 자리가 있었다

저마다 아름답고 싱그러운 자리가 있었다 

 

 

 

 

[동상] 또 다른 나를 위하여 / 김병철

 

 

나뭇가지가 철컥 부러지며 통증을 호소했다.

바람은 잠자코 있고 풀잎은 거꾸로 드러눕는다.

앙상한 슬픔, 해를 향해 휘어지고 있다.

붉은 혀가 지평선과 은밀하게 입맞춤하는 사이,

강바닥은 메말라가고 죽은 넋 위로 모래가 쌓여갔다.

 

그때 거침없이 나는 사막을 걷고 있었다.

바오밥나무는 넌지시 나에게 소곤거린다.

<성령에 이르기 전 눈을 감아선 안 된다>

모래바람에 묻힌 미라도 눈꺼풀이 열려있다.

혼돈의 길을 따라 눈 부릅뜨고 사막을 걷는다.

기나긴 여행의 끝은 집을 바꾸는 일일 뿐이라며

새들은 날아간다. 아!

부끄러운 눈물을 훔치고 있는 내 곁에

다가와 쌓이는 청춘의 잔해들,

끈덕진 불면증은 밤새도록 늙지 않는다.

 

내가 비로소 어둠의 잠을 접고 일어선 날

꿈은 낭자한 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갔다.

꿈이 동강난 허수아비가 우리가 사랑하는 것과 같이

바람처럼 일어나 외친다.

<허튼 맹세의 어둠에서 깨어나라>

 

이제 나는 낼 새벽녘 머언 바다로 나가

초록의 물고기를 잡아와야 할 것이다.

뜨거운 사막 위를 걷던 부릅뜬 눈으로 가장 낮은

땅으로 걸어 들어가 아름다운 아라비아 처녀의

그 짙은 눈썹을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동상] 아마조네스의 변 / 김래연

 

 

그랬다.

세상은 질서정연하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원주에 가까웠다. 서슬 퍼런 칼날을 움켜쥐고 언제건 내리치겠다는 묵직한 의지가 모래바람에 끊임없이 실려 왔다. 모근까지 쭈뼛서는 몇 번의 경험을 하고 나서야 발밑에 드리운 건 평지가 아닌 나락인 걸 깨달 았다.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작태로 위태로이 외발을 서는 일뿐임을 알고야 말았다.

 

바스락,

오른쪽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파도처럼 몰아치던 날 밤에 여자는 달빛으로 벼린 칼끝을 

제 심장에 겨누었다.

 

활쏘기가 불편해 오른쪽 가슴을 도려냈다는 그리스 신화 속 아마조네스처럼,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 바위에 제 발톱을 간다는 매처럼. 살기 위한 희망으로 가득 찬 절망의 쇳조각이 살갗을 누빌 때 한껏 여윈 얼굴의 달이 정갈한 빛깔로 결의의 장면을 목도했다. 달빛을 빚어 만든 시위로 쏘아 올린 활이 원주의 끝에 걸렸다.

 

푸우,

일그러지는 원주는 질박한 달항아리. 고아한 자태 앞에선 불균형한 몸체도 예술에 가까웠다. 날선 세상은 무뎌졌지만, 여전히 견고한 성이었다. 한쪽 가슴을 도려낸 채 외발로 선 여자는 나락을 등지고 섰다. 뱃고동처럼 온몸을 둥둥 울리는 맥박이 성난 활시위를 당겼다. 한껏 기울어진 세상을 향해 여자가 쏜 건 서러움, 절박함, 그리움, 혹은 그 어디에도 닿지 못한 깊은 우물 속 언어들. 

 

달이 푸른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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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창문에 드러나는 것들 / 조정희

 

 

유리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속살을 모두 보여준다

빛이 출렁일 때 유리는 자기를 자신있게 나타낸다

유리는 부끄러움이 없다

 

검정색 투명 스타킹을 신고

살이 비치는 시스루 원피스의 그녀가 화이트 와인을 즐긴다

공원 귀퉁이의 수은등 불빛이 차갑다

보도블럭에는 깨지고 금이 간 것들이 더러 보인다

수레가 골목길 한가운데서

바퀴 하나를 수렁에 파묻고 길을 막고 있다

빠져나오지 못하는 건 바퀴만의 일이 아니다

 

커튼으로 차단되어 노래도 햇빛도 들어가지 못하는 방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서지만 닿지 못하는 손잡이가 있다

안이 어지러운 서랍은 혼돈이 새나가는 것이 두려워

밖을 꽁꽁 닫아버릴 때 많았다

 

새벽안개는 가도 가도 흐릿해서 앞날을 만질 수가 없다

소통은 너무 깊어 손닿지 않는 곳에서도

내일과 악수를 청하는 일

일상을 열어 낯선 세계 속으로 걸어가는 것은

불안을 밀어올리며 언덕을 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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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수채 / 김현욱

 

 

여기 모였구나, 우리 네 식구

머리털과 거웃들이

참으로 사이좋게 뒤엉켜 있구나.

눈곱이며 코딱지며 온몸의 각질이

양수(羊水)처럼 끈적끈적 엉겨 붙었구나.

단칸방 한 이불 속에서 깔깔깔

옆구리 간지럽히던 그 모습이구나.

어버이날 처음 받은 손편지에

구불구불 지렁이 글씨 같구나.

코끝 거뭇거뭇해지더니 가슴 부풀어 오르더니

안방에서 작은방까지 이역만리(異域萬里)가 됐구나.

안으로 잠긴 문은 열쇠 구멍이 없구나.

같이 밥 먹는 게 식구라는데

몰랐구나, 저 녹슬지 않는 목구멍으로

다행히 한솥밥을 먹고 있었구나.

거머리처럼 징글징글 한 집에 산다는

은장(銀裝) 가족관계증명서였구나, 저 아득한 물구멍!

거룩한 구멍에서 태어나

세상에 숨구멍 하나 뚫으려고 아득바득 살아도

서로 마음구멍은 맞추고 살라고

그래야 콸콸콸 잘 흘러간다고

기어이 모여 역류(逆流)의 물감을 풀었구나.

수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이냐.

여기밖에 또 어디 모일 데가 있었으랴.

붓질하듯 낡은 칫솔로 네 식구를 거둔다.

고여 있던 탁한 말들이 엉긴 마음들이

수채를 지나며 맑아진다.

후련해진다.

 

 

 

 

[은상] 해양조사연보의 빛깔 / 김관섭

 

 

국립수산과학원 도서관 안 쪽

등록문화재 제554호 해양조사연보, 해양조사요보에

햇살이 닿아 시간이 열린다.

백년의 말을 걸어 인사를 한다.

그날들의 기록은 쿨럭쿨럭 바람도 토닥이고

수산과학자들의 해양연구일지가 되살아난다.

 

젊은 수산과학자들이 시간을 넘어

교신을 한다. 여전한 해양강국의 꿈은

백년, 오십년 전에도 현재에도

무전처럼 온라인처럼.

 

눈인사를 한다.

너의 시대에도. 나였던 시대에도

대한민국 해양강국 우리는, 꿈의 기록을

젊은 수산과학자들이 바다를 밝힌다.

 

단순하지만 선명한 책임

기록을 햇살이 어루만지는 5월,

목시조사와 동물플랑크톤과 양식수산물들과

희생된 영혼을 위한 기도가 분주한 지금

 

국립수산과학원 도서관 안 쪽

등록문화재 해양조사연보와 해양조사요보가

늙은 옷가지로 오늘을 말한다.

햇살에 주름을 펼친다. 다독다독 인사를 전할 때

인사를 받는 우리는, 빛깔은. 푸른 빛 바다에서.

 

 

 

 

[은상] 배추적/ 이상재

 

 

함박눈이 내내 고양이 걸음으로 내렸다

감나무 줄기를 칭칭 감고 오르던 흰눈은

수북하게 쌓였다 허물어지고 있었다

마당에서 장독대까지 묶여있던 발자국들과

가난도 스며들어 시들어갔을 골방 어디쯤

배추 한 포기, 어머니 손끝에서 푸르렀다

고쿠락 속 콩들이 가마솥을 두드려주는 저녁

어둠을 환하게 밀고 나온 밀가루 한 됫박이

눈처럼 부풀려져갔다 아버지 술 장단에 맞춰

가마솥엔 돼지비계가 솔잎사이로 녹아들었다

밀가루풀에 적셔진 배춧잎들은 부풀어 익어갔고

막걸리잔 부딪치는 틀니사이로 아버지, 환하다

칠남매의 입마다 배추적이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은상] 보원사지 / 이준복

 

 

홍수 때 가슴에 둘러붙었던

검불들도 떼지 못하고

갈대는

곯은 배 허리띠 조여 버텨 세우던

작년 세상의 아버지 어머니 모습으로

서걱댄다. 밥 칭얼대는 아기를 구슬리던

풀벌레 소리를 다시 낸다.

메마른 등뼈 몸이 바래고 바래어서

백탑이다.

가쁘던 숨 고비가 마디마다 매듭 되어

고이고 밀어 올린 꽃이

보주쯤의 높이에서

아들 딸의 경전을 바람으로 읊는다.

둘레바람 천지 들판일 때

넘어지지 마라! 서라, 서라! 빌어주는

두 손 비빔이 당간지주 공명하는

보원사지 갈밭머리.

갈꽃 씨앗 하나가 노을 미립자 하나 데리고

빈 큰 석조 바닥에 이슬로 앉는다.

 

 

 

 

 

[은상] 물 잡은 논 / 이용심

 

 

모내기 하려고 곱게 써레질 해놓은 논마다

물이 가득 잡혀 있다

물 잡은 논은 하늘을 한껏 담고 있고

땅에 내려온 그 하늘 안에도 구름이 흐른다

하늘의 하늘은 하나인데

논에 담긴 하늘은 조각보처럼 나눠 있다

달리는 열차에서 본 물 잡은 논은

파노라마다

낮에는 하늘도 품고 저 산의 그림자도 품다가

저녁이면 서녘으로 길게 키가 자란 햇살도 품는다

 

물 잡은 논은 작은 바다다

바람이 바다마다 가벼운 물결을 만든다.

깊어야 내 종아리 깊이인 그 바다는

고요한 밤에는 깊이를 가늠 못할 만큼 엄숙해진다

물 잡은 논의 밤바다에는 별과 달이 뜬다

이 계절, 물 잡은 논은 하늘과 바다가 공존하는

거대한 화폭이다

화가 없이도 그려지는 수채화다

 

 

 

 

[은상] 플로라의 반짇고리 / 이기석

 

 

봄이 오기를 기다려 꽃을 피운다

 

몸 생채기야 기다리면 된다지만 마음에 상처가 났으니

 

땅속 헤쳐 돋아난 것들로만 무더기로 쥐여줘 봐도

무덤덤해 하니

 

플로라는 반짇고리를 이고 나온다

갖가지 색깔의 실로 채워진

 

가장 고운 자줏빛 실을 바늘귀에 꿰고

깊은 상처는 긴 바늘로 옅은 상처는 작은 바늘로

골무 끼고 수놓던 정성으로

 

한 끝 두 끝 상처를 깁고도 모자라

모아 둔 헝겊을 겉에 대서라도 한 올 두 올 깁는다

 

아픔이 아물어야 새살이 돋는데

돋은 살이 굳어야 사는 것인데

 

그래야만 끼리끼리 모여서들 산뜻한 웃음기 보인다면야

 

아픔을 깁는 거라면

삶에 애착을 피울 거라면

 

잘 풀어진 실뭉치 아끼던 골무 뭐든지 언제라도 준다

 

기꺼이 내어놓는다

플로라의 반짇고리

 

봄꽃과 함께

새살도 같이.

 

*플로라 : 로마 신화에 나오는, 꽃과 과실과 풍요와 봄의 여신

 

 

 

 

 

[은상] 꽃다발과 포승줄 / 이순호

 

 

꽃다발의 리본을 푼다

접힌 종이 위로 푸른 줄이 꽉 매어져 있다

꽃에게서 햇빛을 억지로 떼어 낸 줄과 종이가

몇 겹으로 둘려있다

 

이 꽃들의 죄는 무엇일까

포박의 자국이 분명한 곳에 줄기는 이미 기능을 상실했다

포승줄의 권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꽃은 알지 못한다

 

이제 막 봉오리 올리는 어린 꽃대를 붙잡아 매고

넓어지는 바람의 품을 휘감아 길들이던 줄들은

평소에는 늘 하우스 안에서 대기중이었다

줄의 강력함에

하우스를 기웃거리던 찬 바람은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었다

 

가위는 포승줄에 조였던 줄기를 잘라내고

시든 꽃송이를 골라낸다

햇빛도 바람도 어쩔 수 없었던 꽃은

향기를 탐한 죄가 있다

 

꽃잎들이 안간힘으로 남은 물을 올린다

올리는 물의 속도보다 시드는 속도가 빠르다

어쩌면 꽃은 빨리 마르는 방법으로

시간이 걸어놓은 포박을 벗어나려는 건지도 모른다

그때 물은 어떤 도주가 가능할까

 

힘겹게 수액을 올리던 물관을 닫고 꽃은 탈주를 시도한다

색은 바람이 되어 가볍게 몸을 빠져나가 보기로 한다

 

꽃은 슬쩍, 햇빛의 부축을 다시 받고

오래된 뿌리의 기억에 불끈 힘을 준다

 

 

 

 

[은상] 바람도서관 / 주향호

 

 

달과 별도 숨을 멈춘 숲속 깊은 밤

혼자인 줄 알고 산 민들레 한 송이

바람의 가슴 안쪽 책갈피처럼 꽂힌다

이달의 추천 도서가 되어 북 수레에 실린 바람 따라

오늘은 민들레도 떠날 결심을 한다

얼굴을 들어 북 수레 너머 세상을 본다

두 발이 흙 속에 묶여 있을 때처럼

정지된 모든 것이 지나간다, 돌이킬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에 뿌리가 있었으므로

떠나고 잊은 것은 민들레였을 가능성이 있다

잠시일지라도 머물다 간 새와 나비 그리고 구름

민들레의 심장을 두드리던 간절한 기척들이

적막만을 남겨두고 떠나던 날마다

해가 지고 꽃이 피고 별이 뜨는 곳에서

바람이 태어난 것이라는 서평을 읽는다

청구기호를 받은 바람이 서가에 가지런히 꽂히고

허공을 가르며 번개가 번쩍 빛나는 순간

불 켜지며 존재를 드러내는 바람도서관

민들레를 읽어 줄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어디에서 나서 어디로 갈지 모르는 누·구·나

허공에 흩어진 홀씨처럼 바람도서관으로

입장한다; 검색어를 정돈한 하늘이

검색창에 ‘나’라고 치자, 사서 제한이 풀린 ‘너’의 얘기가

비로소 열람 가능해진다 

 

 

 

 

[은상] 잠깐만요 / 이청우

 

 

약수터에 가면요 빛바랜 산수유나무. 꽃송이 몇

연두 빛 새 잎 뒤에 아직도 숨어 있고요

어제 온 비로 젖은 돌 틈엔 알 듯 말듯 꽃들이 배시시 웃어요!

물통에 물이 차기를 기다리며 아래로 눈을 돌리면

이상해요 숲을 이룬 고층아파트단지 흰 모서리가

저녁 어스름에 스며들어요! 문득

밑에서 들리지 않던 소리에 동공이 더 커지기도 하지요

잠깐이죠. 잠시 그 본모습을 드러내는 황금빛 모서리. 소란스러워요

둥지로 돌아오는 산새. 덤플 속 토끼나 들쥐. 새끼들

밥투정에 하늘도 저물어 가요

물통의 뚜껑을 닫으며 낮과 밤의 경계를 정해요

잎만 흔들리던 갈참나무가 몸 부풀려 하늘로 오르려하고

멋모르고 하산하다 치어죽는 날 숲의 가족들의 장례는

쥐 죽은 듯 고요해요. 낮은 오래 꽃피고 일몰은 길게 이어져요

서방정토 아미타불 반가사유 하는 곳으로

조금씩 다가가는 달같이 대한항공 A433기

서쪽으로, 서쪽으로 날고 있지만요

 

 

 

 

[은상] 2월의 골목 / 이남호

 

 

고모는 골목입니다

 

덜 마른 빨래 냄새가 서성이는 담벼락으로 바람이 넘을 때마다

동네 개들은 떫은 소리로 짖어댑니다

 

오래된 이웃들이 떠났지만 낮은 지붕은 더 낮아지지 않았고

전봇대에 붙은 셋방 전단지처럼 술 취한 남편을 기다립니다

 

그늘보다 먼저 늙은

그녀의 등줄기로 울퉁불퉁 겨울이 지나갑니다

 

이제는 걸음 뜸해진 길

며칠을 붙여 냄새 빠진 파스처럼

볕이

창문에 머물다 갔습니다

 

머잖아 봄일 텐데,

병상의 고모는

골목 깊은 곳에서 삭지도 않는 2월입니다

 

 

 

[동상] 지금 당신과 나의 거리 / 송남순

 

 

겨울의 끝자락에서 가장 뜨거운 기침이 터져 나온다

 

우리는 한 뼘 마스크 안에서

한 뼘보다 넓은 표정으로 거리를 두리번거린다

 

입을 가리고 새로운 호흡법을 익힌다

입술이 사라진 자리에서

더운 숨은 갈 곳을 잃고

 

나는 매일 당신의 안부가 궁금한 사람

당신의 안부를 묻는 가장 먼 이웃이 된다

 

한 손을 뻗어 당신에게 소식을 전할 때

푸른빛이 감도는

작은 화면은 우리 앞에 놓인 유일한 창이 된다

말들이 빗방울처럼 또렷한 무늬를 그리고

 

당신과 나의 거리는

매일 닦아내는 물의 양

 

한 조각 휴지를 흠뻑 적시는 물기가 마음이라면

우리의 마음은 쉽게 휴지통으로 버릴 수 없는 온기

 

맑은 날이 올 것이다

우산처럼 둥근 간격을 언젠가 고이 접어둘 날이

 

봄이 오고 가로수가 울창한 그늘을 심는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무한한 가지를 뻗는

가로수의 간격으로

푸른 포옹으로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다.

 

 

 

[동상] 소라의 빈소 / 임승환

 

 

비가 그친 하늘에 썰물이 무너뜨린 낮달의 어깨가 보입니다 뻘에 발자국을 남기고 소라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그때 소라는 나선형으로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소라의 발자국은 어머니의 내비게이션이 됩니다 소라 같은 주먹을 쥐고 사는 어머니는 늘 나를 찾고 있었습니다

 

밀물에 휩쓸려 달려갔던 새끼는 뻘에 쳐둔 그물에 갇혔다고 했습니다 그물 밖에서 어미가 낮달 같은 얼굴로 바라보다 쓸려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어부는 동네에서 자비로운 사람이었으면, 알맹이가 빠진 낮달이 물결 위에서 일렁입니다 점점 커지는 파도소리는 껍데기만 남은 어미의 귓속으로 걸어 들어간 새끼들의 발자국 소리입니다 희미해진 낮달이 마침내 그물처럼 잡고 있던 바다를 놓치고 밀려오는 구름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바구니에 담겨 있는 바지락처럼 달그락거립니다 모든 게 쓸려갔는데 소라는 아직 뻘에 박혀 있을까요 구름을 흉내낸 포말의 시간입니다

 

소라를 줍던 갈매기들이 공중에 떠 있는 한낮, 어머니가 낮달을 물에 헹굽니다 쪼그리고 앉아 햇볕에 갇혀 있던 나는 그제야 어머니를 부르며 달려갑니다 귀퉁이가 깨진 소라 주먹을 잡자 어머니의 얼룩진 어깨에서 쏟아진 물결이 해반닥거립니다

 

 

 

 

 

[동상] 어머니의 가을 / 김진희

 

 

어머니는 집에 없었다

조용한 대문간

삭은 감나무 어깨 슬쩍 건드려만 보고

뒤안 언덕배기로 곧장 올라서는

어머니에게는 늘 지나가는 바람

 

- 아랫집 누구네가 죽었단다

아프다 하더니만

글쎄 그래 금방 갔네

저어기 저기가 그 집 밭인디

사람 맴이 참 이상도 하지

밭고랑에 서 있으믄

흰 수건 감은 머리를 이쪽으로 돌려

무어라 아득하게 부를 것만 같어

내 이 밭에 혼자 오기 겁이 난다

 

고구마 줄기는 치렁치렁 넝쿨지고

마른 대궁들 사이 흰 도라지꽃 드문드문 일어섰는데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와

어머니 머릿수건이 잠깐 들린다

 

- 이런 바람이 불믄

저 아래 논배미 가진 사람이 부러워 야

그 맴이 오죽 든든할까

저 누런 것들을

다 내 것이다 품고 있으믄

하루 세 끼 밥 안 묵어도 배부르겄다

 

고요한 산그늘

아랫논에는 맴맴 도는 잠자리

 

- 그만 내려가자

느그들도 왔으니

일찌감치 저녁이나 해 묵어야제

 

또 바람이 분다

아무렇게나 구겨 신은 낡은 뒤축에서

툴툴 털려나는 흙먼지

머릿수건으로 훔쳐내는 골 패인 얼굴 위로

오늘은 뉘엿한 가을 햇볕 한 조각 얇게 펴진다

 

 

 

 

 

[동상] 소래포구에서 / 김대환

 

포구에 갇힌 바다는 오랫동안 안개를 끓이다 식으면서 강이 되어간다

안개와 비린내가 비벼진 갯 펄이 고깃배를 묶어두고 있는 사이

밧줄을 지팡이 삼아 찾던 것은 강일까 바다였을까

 

포구에서 시간은 수직으로 흐른다

가라앉은 모든 것들은 이미 경계를 잊은지 오래다

물은 바닥을 보일 때 가장 깊이 흘렀음을

갯펄이 바다의 손을 놓을 때쯤 강의 이름으로 살아갈 뿐임을 안다

 

포구에서 추억은 젓갈과 함께 삭아간다

유년시절을 닮은 작은 꽃게들이 튀겨져 집게등에 걸린 오후

이제와 파도의 무덤곁에서 팽팽히 울던 바람을 붙잡고

내청춘의 실향민 같은 멸치떼들에게 다시 묻는다

강에서는 어떻게 파도를 숨기며 살아가야하는지를

숯불에 등 지지지다 은빛 날개까지 태워버린

전어의 냄새가 그물처럼 퍼지는 어시장

 

강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염전위에 남은 한줌 소금을

기억속에 차근차근 녹여내는 일이 아닐는지

낯달을 데리고 나온 갈매기들이 자맥질하며 터진 그물을 깁고 있다

협궤열차는 바퀴없이 그곳에서 사는 법을 알 듯이 통통배가 들어오기 전

먼저 바다가 만선이 었음을

강이되어서야 알것같다

새처럼 앉아 지저귀던 나무 이파리들이 소래철교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동상] 엄마의 버스정류장 / 조기봉

 

 

무거운 그릇 보따리를 

훈장처럼 이고 산 엄마 

 

그 보따리를 자전거에 싣고 

나는 뒤뚱뒤뚱 정류장으로 나섰다

 

보따리를 사람처럼 태우고 

짐짝처럼 실려 장터로 떠난 엄마

 

나는 엄마가 떠난 빈자리에 서서

다시 올 버스를 기다린다 

 

 

 

 

[동상] 갈치와 장미 / 암영희

 

 

갈치 트럭이 확성기를 켜고 장미 울타리를 돌고 있다

안 사요 안 사 우리 손녀는 가시에 잘 걸려요

 

그렇지, 갈치는 가시의 편이고 헤엄치고 어울려 사이가 좋지

갈치는 핑계대기 좋은 가시를 뼛속 깊이 사랑하지

 

뱉어내고 피해야 했던 뾰족한 것들의 오랜 버릇

찬물을 끼얹을 때마다

스티로폼 박스 안의 갈치는 칼날처럼 떨고 있다

가시는 겁에 질린 무른 무른 살이 녹을까 봐 촘촘히 붙들고 있다

 

갈치와 장미가 섞이기 좋은 오후 다섯 시

핑계대기 좋은 가시와 체념하기 좋은 가시가 서로 찌르더니 이내 

농담하고 위로한다

 

아마 내가 당신의 풀덤불을 지나갈 때

넘겨다 볼 수 없었던 굵은 가시도

실은 그냥 가시

오래 아프지 않을, 삼키면 삼켜지는 것이었는지도

 

가시에 걸려 울먹이는 나에게

할머니는 밥숟가락 위에 취나물을 두툼하게 올려주셨지

 

 

 

 

 

[동상] 봄을 기다리는 병실 / 김두길

 

 

누군가의 울퉁불퉁한 발소리가

병실의 문 틈으로

신문지처럼 얇게 접힌 새벽을 밀어 넣는다

 

두꺼운 잠을 덮지 못한 환자들은

살아 있는 분량만큼만 눈을 뜬다

 

벌써부터 상반신을 벗은 만년필이

환자의 몸 속에

문장보다 긴 통증을 받아 적고 있는 아침

아침 식단은

씹을 것도 없이 잘게 토막 낸 차가운 수액이다

 

병실 안은 해열제 몇 알과

봄과 겨울의 체온이 뒤섞여 미지근하지만

온통 겨울투성이인 환자들의 날씨

면회객들이 돌아간 뒤에도

아직 떠나지 않고 창에 모여 있는

핏기 없는 햇살의 발목들이

아직 춥다

 

‘쾅’ 해머처럼 어디서 떨어지는 걸까 아니면 그놈의 봄은

도둑처럼 살며시 스며드는 걸까

최근에는 수족냉증 환자의 몸 밖에 있는 꽃도 가끔 기침을 한다

 

오랜만에 빵처럼 잘 부풀어 오른 오후였지만

환자의 기분을 찔러버린 주사 바늘

기분이 정상치 이하로 떨어지면 위험한 환자에게 처방했다

파릇파릇한 인턴이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봄을

빌려서

 

 

 

 

 

[동상] 다 망쳤다 / 강우성

 

 

우리 집 마당 앞산에는

진달래, 개나리, 벚꽃, 배꽃 가득하다

참새, 까치, 까마귀, 꿩, 딱따구리 찌르레기 운다

 

비 오면 한 폭의 그림 같다

 

언제부턴가 송전탑들이

까만 줄을 늘어뜨린 채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쭈그리고 앉아도

까치발을 들어도

허리를 숙여봐도

 

시커먼 줄들이

좌-악, 좍 그어져 있다

 

예쁜 그림 다 망쳤다

 

 

 

 

[동상] 외줄 타는 사내들 / 허석천

 

 

황사처럼 뿌연 아침안개 속

높은 고층건물 외벽에

두 사내가 외줄 하나씩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다.

페인트통 두 개 차고앉아서

큰 괘종시계의 추처럼

슬픈 곡예사의 외줄 인생을

묵묵히 타고 있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회색의 콘크리트 외벽에

레몬색깔 행복을 그려가고 있다.

오르려

오르려 하는 오늘만의 세상에서

내일의 희망을 꿈꾸며

외줄 타는 사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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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천상열차분야지도 / 김경태

 

태초에 파문(破文)이 있었고 너는 태어났다

울음은 별이 되고 광활한 대지가 되고

말없이 허공을 뚫고

사라진 별똥별 하나

 

갈대밭을 지나는 저 은하수의 숨결이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풀어놓은 달그림자

망망한 바다를 건너 수평선에 스며든다

 

먹먹한, () 하나하나

손끝을 대어본다

별자리를 읽다가 흐르는 이 눈물은

초겨울 빙점 아래로

퍼져가는

강줄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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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백일홍 / 박상미

 

어머니는 백일홍을 파종하셨다

그러곤 아침마다 흙의 얼굴을 문지르며 쭈그려 앉아 계셨다

어머니, 뭘 그렇게 맨날 들여다 보고 계셔요?

이것 봐라, 온힘으로 뒤집고 박차고 나올 준비를 하잖니?

싹이 나오면 어머니는 보름달처럼 벙글벙글 웃으셨다

그리고 이내 모종을 옮겨 심으셨고

앙앙 우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젖을 물리셨다

백일홍의 가는 허리에 살이 붙어 갔다

봉우리가 맨처음 꽃잎을 하나 열었을 때

어머니는 동그란 얼굴로 내려다보고 계셨다

어머니의 검버섯도 하나씩 사라져갔다

주위에 불순한 것들은

공포가 느껴질 때마다 잘라 버리셨고

태양의 가시를 등에 꽂고 여름내 곁을 서성거리셨다

이윽고 이파리에 얼룩이 지고 꽃잎이 바래지고

백발 같은 서리가 내리면

두 손으로 긁어 씨를 받으셨다

쇠락하며 잉태한 것은 겨우내 안으로 야물어갔다

 

올해도 어머니는 파종을 하실 것이다

그리고 기특하다시며

또 다시 모종을

옮겨 심으실 것이다

 

 

 

 

 

 

 

[은상] 집배원2 / 이잠춘

 

그는 꿈꾸는 제비다. 날마다 일몰이면 살구 씨를 물어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는 청춘에 불 밝힌다

초가 제 몸을 태워 빛을 내듯 공복의 향기를 날마다 전할 수 있는

제비가 좋다고 함박꽃이 활짝 핀다. 그 얼굴에

꽃샘추위 시샘하여 눈이 내리면 눈송이 꽃을 배달한다고 한다

그런 날이면 고객들은 어김없이 눈길 빙자한 과부하를 부르는 오후

시간의 허리춤을 잡고, 허기를 벌컥벌컥 마시는 새 울음은

그의 또 다른 애칭, 다문다문 빌라의 계단을 오를 때 소리 나는 관절이

초인종 앞서 문을 두드릴 때는 이런 , 실소(失笑)를 머금는다

잠시 앉았다 떠나는 그 자리, 등기의 쾌도 속에서 생신이라 금전 받아 든,

노모의 호흡 먹먹함을, 때 묻은 얼룩들 견지(見地) 한다고 한다

살 에는 바람도 시종여일 춥지 만은 않은 것,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존재가 되길 희망하는 행림의 길에

나이테 또 하나 그리며, 삶의 한창때를 오토바이 적재함에 싣는

그는 창공을 비상하는 대한의 제비다

시절이 동에서부터 서까지 변화는 있어도 변함이 없는 사계

천일염에 들이치던 삭양빛처럼 맛과 질에 걸 맞는 심부름 군이 되어간다.

 

 

 

 

 

 

[은상] 응애 / 윤계순

 

힘껏 밀친 세상 밖으로

첫울음을 터트리는 아가

꽉 쥔 주먹이 명랑하다

탯줄보다 질긴 사랑

심장으로 전해 듣던 작은 숨소리

응애를 외치기까지

삼백예순다섯 날 돋아나는 소망은

게으르지 않았다

자전과 공전 사이의 어둠과

창을 두드리던 별자리의 시샘과

알파고에 무릎 꿇고 끌려가던

인간의 눈물을 태교의 문장으로 새기며

단단히 버텨낸 것이다

응애는

청춘 남녀의 행복이 철들어 갈 때

유전자 짙은 제 그림자를 바라보며

등 뒤의 부모처럼 부모가 되어가는

인연의 소리

골목의 적막을 물어뜯는 옹알이의 합창이

글 밭 이랑에 누워 구르는

바둑알의 굴절된 암호를 해독하는 시간

꽉 쥔 주먹을 펴

훼손된 지구에 햇살 당기는 웃음이

창밖으로 울려 퍼지면

우리는 새봄을 함께 노래하는

따뜻한 가족이 된다

 

 

 

 

 

 

 

[은상] 박심리 / 박수옥

 

손에 닿을 듯 하늘만이 열려있는

병풍처럼 에워 쌓인 해발 980미터

경계도 알 수 없는 싸리 울타리가 전부인

탄광촌 작은 마을, 내 고향 박심리*

 

콜타르 지붕을 씻어낸 빗물이 쓸려

실뱀처럼 발 뒷 꿈치 물던 옛길에

발목까지 석탄가루 새까맣게 동무하던

단발머리 친구들 고향을 잊었을까

 

물장구치던 앞내 개울가에

까만색 냇물 웃음은 푸르게 흐르고

십 여리 등굣길 하늘 오르던 재 너머

재잘거리던 진달래 웃음처럼 주절이 피었다

 

활활 타던 연탄불이 풀썩 꺼지듯

폐광으로 하나둘 떠나간 마을 

쿵쿵 울리던 아버지 힘찬 굴착기 소리

용사처럼 삼백 예순 나날 잊지 못해

더러 진폐병동에서 홀로 어둠을 캐고 있고

다문다문 부고로 전해지던 고향, 박심리

 

어느덧 친정엄마보다 더 세월을 품은 나이에

시간을 거슬러 허기진 기억을 채우려 찾은 그곳엔

스몰카지노 낯선 불빛이 추억을 배신했지만

 

백운산 끝자락에

엄마 닮은 곱게 핀 각시붓꽃 한송이에

내고향 박심리는 거기 있었다.

 

* 박심리 : 정선군 고한읍 고한4리의 옛 지명

 

 

 

 

 

 

 

[동상] 날개 / 서정석

 

구직 광고가 수족관 위로 걸려있다

해가 떨어진 바닷가 모퉁이

무거운 모자를 눌러쓴 청년이 서 있다

 

텅 빈 고깃배가

잔파도의 빛에 걸려 허기처럼 찰랑이고

한쪽으로 휘청거리는 사내의

붙박인 머리 위로

고시촌이 불에 탔다는 비보가 새떼처럼 날아왔다

 

사각진 벽으로 바람을 구겨 넣고

등을 곧추 세우기 위해 무던히도 날개를 부비던 친구의 온기가

하얀 부고장에 실려 공중으로 흩어졌다

 

흔들리는 눈물을 꾸덕하게 누르며

쉬지 않고 껌뻑이는

충혈된 등대의 눈이 바다만 바라보다

구부러진 어깨를 퍼덕이는 사내의 자리까지

밀고 들어온 한파

 

계절이 몰고오는 휑한 바람에

찢긴 날개를 고치는 사람들이

먼 도시의 변방으로 미끄러지고 있다

 

 

 

 

 

 

[동상] 부드러운 경전 / 서해웅

 

선암사 해우소에 앉았다가 보았다

나일론 끈에 매달린 두루마리 화장지

혀를 쑥 내밀고 중생을 놀리고 있는 것을

아랫배를 부여잡고 막 들어섰을 때만 해도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한숨 돌리고 나니 화장지가 내 흉을 보고 있는 듯하다

어찌하여 가여운 중생을 놀리십니까 물어도

묵언수행, 대답 없는 혓바닥

미뢰처럼 촘촘히 박힌 동그란 무늬들

한자 한자 새겨 놓은 두루마리 경전

둘둘 풀어내어 뒤를 닦는다

혓바닥이 뒤를 훑고 지나간다

바지를 추스르고 막 나서려는데

뭔가 들켜버린 것처럼

뒤가 개운치 않다

식탁 위에도 화장실에도

놓여 있는 두루마리 화장지

욕망이 지나간 자리마다 묵묵히 훔쳐내고 있었다

번민이란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닦아내는 것!

거친 종이 한 장이 고행을 지나

날카로움을 잃고 나면 도리어

못 닦아낼 것이 하나 없다

문득 왜 스님들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경전을 외고 또 외는지 알 것만 같다

해우소 담장 위 매달린 금낭화

꼭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내 뒷모습 같다

 

 

 

 

 

 

[동상] 무지개 폭포 / 황명훈

 

학업성취도 평가가 있는 날은

일찍 집에 갈 수 있어 좋다는 아이들

2교시 수리 영역 시간

맘 편하게 3번으로 몰아서 찍고

햇살처럼 환하게 잠이 들면

그 햇살들 창밖으로 불러내어

덕계* 상설시장 앞에서 5-1번 마을버스를 탄다

왕복일차선 낮은 돌담 사이로

이무기처럼 꾸물거리는 길은 어느새

잎새 가득 초록 향기 품고

찰방찰방 물길을 건너

넓적바위 몇 개씩 훌쩍 뛰어넘으면

빨.주.노.초.파.남.보.

전설로만 남아있는 무지개폭포**

 

첨벙, 첨벙

폭포 속으로 사라진다

아이들은 어느새 무지개가 된다

 

* 덕계 :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지역 명.

** 무지개폭포 : 경상남도 양산시 동쪽의 천성산 기슭에 있는 폭포.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햇빛을 받아 아름다운 오색무지개를 형성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

 

 

 

 

 

 

 

[동상] 골목 / 심영호

 

밤이 촘촘한, 골목에 들어서면

어머니 자판소리 별빛으로 떨어진다

별 헤는 밤, 만학의 어머니는

거친 손으로 동주의 시를 가로등에 내걸었다

타닥타닥 점멸하는 언어들

어머니는 처녀 시절 어떤 문장들을 꿈꾸었을까

십 리도 더 되는 길을 걸어

어머니는 모국어를 만났으며

가난한 세간의 낙엽들은 자주 바람에 흔들렸다

어머니가 교문을 일찍 나오던 날

세상의 모든 골목들은 적막했으리라

그때 어머니가 헤던 별들은

이제 청춘을 훌쩍 지나고 있는데

추억의 모퉁이에서 서성이고 있는 문장들을 가져와

나는 어머니의 별들과 그 슬픔을 헤아려 본다.

 

 

 

 

 

 

 

[동상] 까막눈 고등어 / 정은숙

 

아버지 밥상에 올려진 고등어에는

치열한 생(生)이 절여져 있다

 

가난을 땀으로 막던 아버지에게

고등(高等): 어(語)는 사치다

 

태양을 친구삼아 바다를 이불삼아

서슬 퍼런 세상에 모진 칼질 당하며

겨우내 오른 밥상

 

새벽 찬바람 맞으며 처절하게 외쳤다

가난은 죄인가

단근질로 가슴이 재가 되고

표박 끝에 머리와 꼬리가 으스러져

허기에 배를 질끈 묶어도

가난은 죄였다

 

제 한 몸 다 내어주고 난 후

희끗해진 등껍질과

앙상한 뼈마디 붙들고

다시, 집을 나서는 죄인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농익은 땀방울에 흠뻑 절여진

고달픈 고등(孤燈) : 어(圄) 하나

 

 

 

 

 

[동상] 아비와 아들 / 김기성

 

아비는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은 또 아비를 낳는다.

 

검붉은 툇마루가 낯설던 아들의 어릴 적은

그가 낳은 아비의 젊은 날에 지운다.

 

 

 

 

 

 

[동상] 아버지 / 안안미

 

해가 나의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아버지는 삐걱대는 문을 조심히 열고 새벽을 찾았다

어스름한 골목길을 돌고 돌아 빗자루를 쥐러가는 아버지

은행나무가 내려다보는데도 아버지는 고개를 젖히지 않았다

실밥 터진 모자를 귀까지 눌러쓰고 묵묵히 나뭇잎을 쓸어 담는

아버지의 등에 작은 별 하나가 반짝 박혔다

햇살로 만든 실을 부여잡고 나는

나무향이 묻어나는 아버지의 별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거리를 뒹구는 나뭇잎에 맞춰진 아버지의 늙은 눈이

순간, 희붐한 새벽하늘로 올라갔다

한참을 은행나무처럼 서 있던 아버지가

힘찬 손길로 나뭇잎을 다시 쓸어 모으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하늘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동상] 용역직원 k/ 김홍엽

 

컴퓨터 수리공 용역직원 K씨

그는 분명 책상 밑에 신을 모시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일 같이

무릎을 꿇어 책상 밑으로 들어가

바짓단이 날강날강 해지도록 백팔배를 들일 이유가 없다

나는 그가 모신 신이 궁금해서

책상 밑에 그의 경전을 엿본 적이 있다

엷은 어둠속에는 여러 선들이 실핏줄로 뻗어서

손가락에 붕대를 감은 채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자세히 귀 기울이면 신전에서는

나지막한 독경 소리 흘러 나온다

어느 날 내 발이 신전을 잘못 건드린 적이 있다

더 이상 독경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책상 위의 모니터는 맥없이 꺼졌다

다시 K씨가 합장을 하고

책상 밑의 스님에게 웃음같은 곡차를 건네자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맑은 독경 소리가 흘러나왔다

컴퓨터 수리공 용역지원 K씨

비정규직이라 최저임금을 받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성불을 꾀하기 위해

오늘도 가슴에 커다란 부처를 안은 채

사무실로 이동하고 있다

그의 바짓단이 탱탱하다

 

*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 경전

 

 

 

 

 

 

[동상] 물의 나사 / 김미연

 

반신욕을 하고 나와 욕조를 본다.

내 몸이 빠져 나온 자리가 아물고 고요로 팽창한다.

사십 여 년 다니며 앉았던 내 직장의 의자들은 벌써

다른 물이 차올라 팽팽한

수평을 이루었겠다.

 

바다로 가는 거북이 뒤돌아보듯

여름 막바지 달리던 느티나무가 물끄러미 뒤돌아본다

물길이 지나간 허벅지와 사타구니에 모래톱이 생겼다

 

여름 계곡에 붉고 푸른 사람소리, 물소리

울긋불긋 단풍이더니

어제는 하얀 바위와 기다란 계곡의 고요만 반짝였다.

눈 내리면 두둑하고 하얀 평온이 깔리겠지.

 

막아둔 배수 구멍을 뺀다

물은 부정맥처럼 벌떡이다가 스스로 나사를 만들며

빠져 나간다, 누가 순서를 정한 것도 아닌데

질서정연 다투지 않고 나가는 물,

창으로 들어선 햇발에 별들의 알갱이가 인다.

 

 

 

 

 

 

[동상] 부고 / 전인배

 

 

시간의 틈에 곰팡이가 자란다

티브이에선 총각무를 팔고 있다

클로즈업 된 쇼호스트의 입술을 보다가

와삭, 침이 고인다

망가진 시간이 덜렁거린다

벽시계를 떼어내자 곰팡이가 얼룩져있다

얼룩은 사람의 표정 같아서

귀를 닦아내고 눈매를 다듬자

표정이 녹아버린다 울상이 된다

곰팡이가 자란다

몸은 죽음을 배웅하지도

신변을 정리하지도 못했다

사후경직으로 리모컨 전원을 누르지 못해

육체가 있었던 자리에 너저분한 소리가 날린다

그는 유모차를 끌고 골목을 돌며

쓰레기통을 뒤지고

먹다 남은, 쓰다가 만, 덜 부서진

것들을 실어와 방에 부려놓고

다시 그 틈에 누웠다

커튼과 벽지, 천장에도 시취가 스며들어

이웃이 문을 두드렸다

옷이 썩었다 부패한 몸이 녹아서

구더기가 득시글거린다 백골화가 진행중이다

부고를 품고 잠든 그의

장판을 뜯어내고 바닥을 긁어낸다

시멘트에 눌러붙은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그의 밑을 닦으며 부언(附言)을 전한다

 

 

 

 

 

 

[동상] 새는 자신의 무게를 감당할 날개를 가졌다 / 하재분

 

 

새의 날개는 울창한 숲이다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가야 한다

 

숲을 이룬 거목들의 그늘에서 잃어버린 깃털을 찾는것처럼

묘연함에 대하여 꿈틀거리고

날개는 이름없는 풀들로 돋아난다

 

새는 자신의 무게를 감당할 날개를 가졌다

꿈의 조각을 맞추면서 남은 한 조각을 찾기 위해

무성한 넝쿨 속을 기웃 거린다

 

힘을 잃은 새는 잠시 추락한다

발자국의 끝을 보며

숲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는다

 

폐에 금이 가도록 새벽공기를 들이 마신다

나의 숨은 새의 부리가 되어 거목들을 자르고 있다

나무의 숨 소리가 새의 부리를 지나는 동안

나는 아이를 생각한다

 

 

 

 

 

 

[동상] 오십견 / 강경식

 

날개가 돋으려는지 어깨가 아프다

걸어도 날듯이 훨훨 뛰던 몸이

반나절 좀 넘은 나이 탓인지,

가족들 내려놓고

잠시 숨 고르고 쉬었다 남은 길 편히 가라는 듯

저녁마다 파스냄새 자욱하다

 

아버지는 허리 시위를 잔뜩 당기셨다

하루하루 온힘으로 둥굴어 지신다

날개를 달아 우화하는 아들을

팽팽한 활시위에 올리시고

지난 세월을 향해 쏘려하신다

 

출근하는 쉰 넘은 아들 약을 챙기신다

제가 곧 날 수 있을 것 같아요

힘겨운 시위를 놓으세요, 아버지...,

그리고, 자꾸 형님이라 부르시면

막걸리 따라 드리는 제 손이 울어요

동사무소 등본 떼볼 필요도 없이

저절로 알아서 오십견이 오네요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사람이 가면 추억이 온다잖아요

이제

날개위로 아버지만을 업고

아버지를 위해 날아볼게요

곧 날개가 피려는지 요즘은

약 효력도 없어요, 아버지

 

면회도 안 되는 중환자실에 누워

몸의 고통까지 놓으시려는 아버지

내가 나왔던 소변 줄 끝으로

남은 여생이 힘겹게 떨어진다

 

 

 

 

 

[특선] 접붙이기 / 고경수

 

[특선] 유령글씨 / 고석규

 

[특선] 국밥집에서 / 이상재

 

[특선] 빙벽 / 전종신

 

[특선] 긴급처분 / 박일규

 

[특선] 비오는 퇴근길 / 신소희

 

 

 

 

[입선] 목련 / 장오수

 

[입선] 덕산 양로원 / 박청환

 

[입선] 과메기 오브제 / 박하성

 

[입선] 그림자 / 김지은

 

[입선] 단추구멍 / 김기홍

 

[입선] 봄에 쓰는 겨울 시 / 장혜식

 

[입선] 사라진 아빠 / 박천국

 

[입선] 잘 구워진 밥상 / 이효정

 

[입선] 아스팔트 위의 죽음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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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모래의 문장 / 최수안

 

낙타

그 순한 정강이를 세울 때부터

부신 태양 아래 발바닥은 단단해지죠

모래 바람이 만든 결 고운 문장을 따라가는 일이라

등뼈보다 큰 사구들을 마다하지 않았죠

 

바람이 던진 베일이 사막을 훑고 

몽롱한 동공 속 푸른 호수가 깊어지면

소금빛 머금은 속눈썹이 서서히 열려요

발자국 사이 느릿한 관절을 끌고

가시가 지은 묘비를 지나 

현기증 이랑을 몸속에 새겨요

 

터번 쓴 선인장이 생채기를 부르는 오후

갈라진 혓바닥 틈으로 이국의 문장이 버석거리

혈맥을 타고 흐르는 글자들이

침 없는 나침반을 쥐어주면

낙타, 혹 속에 뜨거운 매듭들이 

풀고 엮고 손톱 긁어 모래경을 또 만들어내요


누천년을 모래에 파묻힌 얼굴

해부되지 않는 내가 그 속에 

산다는 걸 알게 된 날부터

꿈틀거리며 돋아나는 뒤꿈치가

걷고 걷는 일이 길의 끝이라는 듯


모래 언덕 너머 저 끝도 없는 여백을 더듬어가요

은하가 찰방이며 떨군 받침들 이마에 받으며

 

 

 

 

 

 

[은상] 출석부를 넘기며 / 최정삼

 

그 수많은 날들이 네모 칸으로 들어선

씨줄과 날줄의 사이에서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그어진

작대기들을 건너뛰며

죽어있음도 때로는 아름다운 법이라고

지울 수 없는 시간들을 스스로

다독이며, 앞날을 가늠하듯

출석부를 넘긴다.

 

옹색한 종이의 면마다에서

해가 뜨고 날이 저물 때, 세월은

더불어 갈 동무가 없어 외로운 길을

구획하고, 우리들의 삶이 박제처럼

표정 없는 기록으로 남아서, 얼마나

아쉬웁게 살았는가고 물을 때 그러나

소리는 아무데도 없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우수수우수수 해먹은 오늘 위로 떨어져 내리는, 희어서

가지런한 기억의 껍질들.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그리움

들을 페이지 책장 구석구석에 깊이 묻은 채로

이제는 내 갈 길을 가야겠다고

쓸쓸히 기록의 시간들을 돌아 나올 때

신호처럼 불이 나가고, 어둠 속에서

나는 출석부를 덮으며 정말로 방을 나섰다. 그때

별들이 하늘에서 빛나고, 내가난한 삶이

그 별빛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은상] 별들의 비행 / 이초롱 

 

술병 속에서 떠오르는 말벌집이 있다

잠들어있던 벌들이 은빛 날개를 털고 일어서면

한 잔의 맑은 물이 출렁거리고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울음소리가 제 몸에 깃드는 줄도 모른 채 눈물을

눌러 담는 벌떼들이 있다 라디오 잡음처럼

 

방 안을 진동하는 날갯짓

오래 틀어놓은 음악과 침묵이 두 귀를 접고 웅크리고 있어

 

유리병 속에서 벌 몇 마리가 사력을 다해 눈 뜬다

부드러운 흙을 털고 날아오르는 빈 몸들,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거품을 따라

 

숲을 떠돌던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별들이 두 눈에 박히는 순간,

벌들이 한 바퀴를 돌면 저녁이 깊어진다

 

물의 지느러미가 흔들리고

빛을 움켜쥔 다리들이 하나 둘 떠오르는 동안,

빈 벌통에서 바닐라 냄새가 풍겨 나오고

 

버둥거릴수록 차오르는 어둠이 눈앞에 당도한다

궤도를 그리며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

흘러넘치는 지문이 입 안 가득 고인다

 

이름을 버린 몇 개의 영혼이 눈발처럼 휘날리는 새벽,

뚜껑을 열자 벌떼가 날아오른다 온몸에 박힌 심장들이 두근거린다

 

 

 

 

 

 

[은상] 무화과에게 쓰는 편지 / 이옥래

 

꽃 없이 피어 익어가는 것들에게 쓴다

나는 당신의 속내를 알 수 없었지

가지 끝에서부터 초록세포 몇 바람에 부풀리던

꽃도 없이 말이야, 지나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열매를 달고 서있던

당신, 나는 열매를 한바구니 담아 그저

떫고도 달콤한 생을 음미할 뿐이었지

물관을 타고 흐르는 골 깊은 말들은

붉은 가르마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을까

주름 켜켜이 희고 작은 과육들이

언제부터 지고 피고 영글기 시작했는지

이 촘촘히 박힌 기억들이 입 속에서 희미해지는 동안

펴 본적 없는 꽃잎들이 이미 구름보다

높은 곳을 날고 있는 걸 상상해

그래, 바깥을 모르는 거야말로

꽃 같이 아련한 웃음을 가져다 준 걸지도,

기억장치 무너져 달콤해져가는 무화과 하나

가끔 검은 태풍 사이로 낙과되고 싶었을 테지

이제 하늘 길 몇 갈래 매듭짓는 아침이 오고

 나는 무화과를 씹으며 당신을 생각하다

잊어버리다 하지, 안으로만 폈구나 꽃은

흰 과육이었구나, 되뇌며

시간을 더듬어 내 안에서 말랑해지는 당신

욕심 없이 고고히 매달린 무화과를 올려다본다

어머니, 농익어가는 어머니

 

 

 

 

 

[은상] 지구에 사는 화성인 / 엄정은

 

나는

지구에 사는

화성인.

 

나는

단지 몸만 불편할 뿐인데도

당신들은

나를

같은 지구인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말은

장애우(障礙友)

 

현실은

이방인(異邦人).

 

나의 친구는

오로지

나의 어머니뿐.

그런데도

당신들은

나를

탓한다

 

지구에

적응하지 못한다며.

 

다가오라 말하면서

정작

다리(橋)는 만들지 않는

정 상 적 인

지구인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이 사는 땅을 밟지 못한다.

 

몸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불편해서.

 

다리 하나를 놓으려면

나의 어머니가

무릎 정도는 꿇어줘야 하기에.

 

나는

지구에 살지만

아직도

지구에 사는 법이 서툰

화성인.

 

오늘밤

나의 고향

화성으로 가기 위해

난간에 오른다.

 

그러나

눈을 감고 생각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이미

쉬어터진 목소리로

피맺힌 절망만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것은

 

온몸으로 외쳐도

 

지구인들에게는

결코

들리지 않을

 

소리 없는 비명.

 

그러다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보았다.

 

내 다리를 붙잡고

 

지구인들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을

 

피눈물을 쏟고 있는

나의 어머니를.

 

하지만......

 

죄송해요. 

 

내가

허공에

몸을

던지자

 

어머니가

나를

꼬옥

감싸안으며 속삭였다.

 

아니야.

엄마가

미안해.

 

오늘밤

우리는

화성으로 갔다

 

아니

 

쫓겨났다.

 

 

 

 

 

 

[동상] 흙손 / 정수경 

 

만져줘야 마무리되는 세계가 있었겠다

 

흙과 나무의 손놀림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겠다

여백은 안타까움이었겠다

지친 어깨 다독여주던 손, 지금은 없고

무덤덤하게 외면되는

 

그런 손 말고

 

없거나 무딘 거기를 예리하게 세워

사과를 깎으면

껍질은 섬세한 길을 만들어낸다

후에

계단을 만들고 계단을 구겨 꽃을 피우고

 

지칠 때 손은 층층이꽃처럼 생겨난다

 

입술 너머

 

손끝이 거기에 닿을 때

발견된 적 없는 꽃으로 예리한 국경을 만들었겠다

 

구석에 걸린 그림처럼 만져줘야 살아나겠다

다소 뜨거워 넘어갈 수 없었겠다

 

결국 그런 추측의 세계가 있었겠다

 

껍질을 깎던 손이 마무리되는 세계가 있었겠다

 

 

 

 

 

[동상] 장마전보 / 김유리

 

그리고

투명의 교신이 시작되었다

 

방울방울 맺혀

후득후득 떨어지는

비의 부호에는 쉼표가 가득하다

 

어느 어린 여름날

축축히 잠든 이마와

곰팡이 핀 벽지 너머로 들었던

쉼표, 쉼표들

 

그 때 너와 내가 썼던 시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제 나의 우편함에는

숫자들만 꽂힐 뿐

그 어떤 말들도 찾아오지 않는데

 

해독할 수 없는 장마의 편지들만이

빈 지붕을 두드린다

 

-여보세요, 내 슬픔이 아직 거기에 사나요

 

나는 아직 여기에

우산 없이 서 있다

 

여름이 보낸 수취인불명의 편지들을 흠뻑 안고

 

꼬리 잃은 나의 쉼표들과

헤엄치고 있다

 

 

 

 

[동상] 과매기 / 이영원

 

총망중, 수화기를 내려놓고

사방으로 튄 혈흔을 주워 밖으로 나선다

담벼락 아래 얼굴을 숨긴 사람들, 자욱한 연기

그보다 스무 발자국 쯤 양지바른 곳에 서서 

보이지 않던 총구의 방향을 가늠해본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숙고하는 법의관처럼

선의인지 악의인지 아니면 무지인지

선혈이 튄 방향으로 방아쇠의 의지를 따져 묻는다

만일 사출구가 나침반처럼 떨리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그의 혐의를 입증할 텐데

일소란 얼마나 멀고도 가까운 경지일까

악력(惡力)기라고 부르며 쥐어짜던 

악력(握力)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한겨울 공기가 스며들 때

언젠가 다큐에서 보았던 컴컴한 우주가 온다

‘차가움이란 열의 부재일 따름이라

-273도인 절대온도 아래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친절한 해설을 분수처럼 뒤집어볼 때

이 生의 다정은 얼마나 거대할 수 있을까

젖어드는 미열에 눈을 감으면

가본 적 없는 구룡포 앞 바다

나를 민물로 끊임없이 헹궈주는 풍경

내일의 비린내를 없애려면 

오늘의 핏물을 잘 씻어야한다는 속삭임

발을 동동 구르며

어제와 같은 평행봉 위에 오르면

저 먼 수평선

유구한 해풍을 온몸으로 맞는다

날이 차가우면 단단하게 얼어붙고

날이 풀리면 기름기를 뚝뚝 흘리기를

다시 날이 차가우면 더 단단하게 얼고

다시 날이 잦아들면 더 많이 흘리기를

그렇게 무수히 반복되다가

어느새 담백해질 체질

아마도 그러할 미래

감히 서둘지도 분주하지도 않기로 한다

폭력, 권력, 알력이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중력은 조용히 속삭이기에

온 겨울 내 평행봉 위에 걸려있었다

길쭉한 봄의 그림자를 그리며

 

 

 

 

 

 

 

[동상] 보수동 헌책방 / 박지영

 

추억을 사러가고 싶어졌다.

 

책곰팡이 냄새

쾌쾌한 나무 냄새

물떡

찹쌀도너츠...

 

난해하기만한

고향 부산의 도로 가운데

어느새

짜증 가득한 표정의 여행객이 되어 앉아있다.

 

덥고 차는 막힌다.

 

다닐뻔한 직장도

버스창 너머로 보이고..

 

내가 탄 81번 버스는 정거장마다 추억을 지나간다 

 

부산역.

중앙동.

국제시장.

 

버스 방송이 알린다.

다음 정류장은

보수동 헌책방골목

 

설레는 마음에

피식 웃으며

부저를 누른다.

 

 

 

 

 

 

[동상] 먹똥 향기 / 김영희 

 

거실창문 열면 노란수선화 향기 날아오고

어머님이 차신 기저귀 열면

먹똥향기 코끝에 스며든다

 

엄니, 쌌어요?

아니! 안 쌌어

냄새가 난디?

 

당신이 주고 싶어 하는 그리움의 향기!

내 가슴 깊숙이 애잔하게 퍼진다

 

어느 자식에게도 당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혼자 살겠다고 고집하시더니

떠나시기 전 꼭! 셋째며느리에게만 주고 싶었을까?

먼 여행길 보내드리기 전 꼭! 받고 싶었을까...

 

하루해가 까매지는 줄도 모르고

당신의 향기에 중독 될 때

미안해하는 눈빛으로 이 뿌리 보이며

초승달의 미소를 띤다

엄니, 웃는 모습이 예뻐서 수선화도 시샘을 한다

 

그리운 나의어머님!!!

당신이 주신 먹똥향기는

당신이 떠나신 후에도

커피 잔에 눈물방울 뚝뚝뚝......

 

 

 

 

 

 

[동상] 채식주의자 / 엄영희 

 

붉은 것을 좋아할수록 송곳니가 자라는 꿈을 꾸었다

 

피가 도는 봄날

할머니는 흐르는 물에 나물을 씻으며

애야 푸성귀는 눈이 없어 좋구나

나는 눈이 없어 조금은 덜 아프다는 말처럼 들렸다

 

폭풍우를 이겨내고 자란 몸의 푸른 멍

산나물은 묶은 머리를 풀고 물의 방향으로 맑아졌다

나는 무방비로 탈진했다

할머니는 풀물 든 뭉툭한 손으로 내 눈꺼풀을 열어 보셨다

 

명이 나물을 먹고 귀가 밝아지거나

방풍 나물을 먹고 바람을 이기는 꿈은 전설에서나 가능해요 할머니

모르겠어요 이제 와 봄까치풀처럼 개명을 꿈꾸어도 좋을지

 

애야 다 지나간다 엎드리면 등을 타고 다 지나간다

봄이 오면 할머니는 늘 푸른 밥상을 차리셨다

몸 푸른 것들을 더 푸르게 뿌리째 비비고 버무리는 동안 나도 물이 들었다

 

나는 내가 먹은 이름의 전부이니

나는 내가 아는 눈빛의 전부이니

나물죽 한 그릇이 등을 타고 통과한다

 

충혈된 것들을 흔들어 흘려보낸다

 

 

 

 

 

 

 

[동상] 늦여름의 레시피 / 박형식 

 

양파껍질 같은 얇은 하늘을 창가에 가지런하게 걸어놓으면 한 동안 마른 햇빛 냄새를 맡을 수 있겠지 투명한 하늘은 건더기 없이 국물을 낼 수 있어 좋아 먹기 좋게 발려놓고 썰어놓으면 기름 범벅 밀가루 범벅 갑자기 터지는 웃음소리 까르르 네 목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져 까르르

 

금방 만져 놓은 구름 반죽이 완성이 되면 프라이팬이 달궈지기 전 이상하게도 그늘 한 장 없는 대낮의 운동장을 냅다 달리고 싶어져 괜히 허벅지에 힘이 고이고 아이라인 같은 레일이 운동장에 능숙하게 그려지지 애초부터 심판은 필요 없어 무작정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 큰 나무가 그려져 있어 그곳으로 그냥 달리면 돼 어느 새 기름을 잘 두른 프라이팬이 달궈지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운동장 한 곁에 틀어놓은 수도 속으로 뜨거워진 머리를 내밀지 가물어 눌러 붙은 쌍가마 국수 면발처럼 풀리며 다시 터지는 웃음소리 까르르 다음부터는 절대 봐주지 않을 거야

 

기름진 육즙이 씻겨 내려가면 야채는 겹겹이 밀가루 옷을 입고 쉽게 몸집을 부풀릴 수 있지 다시 양념을 뒤집어쓰고는 균형을 못 잡고 데구루루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시 운동장 한 바퀴 어느새 담벼락이 노릇노릇 하게 익어갈 때면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던 뜀박질도 이내 시들해지지 시 부문 57 시 때마침 운동장 구석에서 귀에 익은 사이렌 소리 길게 두 번 짧게 한 번 다시 이유 없이 바빠지는 손놀림 주방 천정에 매달린 백열등이 밀가루처럼 환하게 켜지면 타닥타닥 조명 빛에 잘 익어 숨넘어가는 소리 아직 식지 않은 늦여름 햇살이 철봉을 녹아내릴 듯 두드리는 소리 소사 아저씨 손에 들린 열쇠 꾸러미가 지들끼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 모래를 등에 진 바람에 눈물이 먼저 반응하는 소리 문풍지 끝에 옮겨 붙은 곤로의 심지가 석유 냄새에 물소리처럼 번지는 소리 아이들이 엄마손에 이끌려 하나둘씩 멀어지는 소리

 

오래된 굴뚝은 검은 가루가 섞인 쉰 소리를 뿜어내고 불 조절에 실패한 약간의 방심은 모서리가 심하게 그을린 햇살을 한 접시 구워낸다 뒤늦게 게양대에서 내려지는 헝겊처럼 후줄근해진 어느 여름 오후 자 이제 수척해진 멸치는 뭍으로 나와야지 육수처럼 번지는 웃음소리

 

 

 

 

 

 

[동상] 푸른 봄들에게 보내는 편지 / 우상범

 

뽀오얀 배 쓸어주던 엄마의 손길 같은 봄볕

따사로운 손길에 이끌려 꼼지락거리는 아기 싹들

연둣빛 사이사이 소녀들의 웃음처럼 피어나는 꽃들

환한 웃음꽃 위로 춤추듯 팔랑거리는 나비들

그 풍경 속으로 소풍 도시락 매고 가는 사람들

 

그렇게 봄은 살짝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봄 봄 봄, 이름만 불러도

통 통 통, 튀어 오를 것만 같은데

늘 봄날로만 여겨지는 너희들의 봄은

사실 불안하리만큼 변덕스럽지 않았던가

 

꽃 피지도 못한 채 후두두 작달비에 떨어지는 겨우내 기다림

피자마자 몰아치는 돌풍에 꽃비 되어 흩날리는 비늘 같은 연약함

다 피어난 꽃 위로 때아닌 봄눈 내려 묻혀버린 서러운 아리따움

온 세상 덮어버리는 느닷없는 미세먼지에 숨 막히는 봄의 정령들

 

돌이켜보라

너희들의 봄이 봄날이었던 적이 얼마나 되었던가

이 짧은 봄날로 너희들의 봄을 기억하는 것은

한순간을 영원으로 피었기 때문이니

봄날 같은 봄이 사라져간다 해도

 

기억하라

숱한 나날의 변덕스러운 불안이 아니라

단 하루의 피어난 봄날로 봄이 기억된다는 사실을

아침에 핀 꽃이 저녁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너희들의 봄을 힘껏 피어 올려야 하는 이유를

 

 

 

 

 

 

[동상] 곱슬머리 / 이순남 

 

엄마의 엄지를 꼭 잡은 작은 손

손금으로 실개천이 흘렀습니다

 

그 아이의 이마에는

해당화 붉은 꽃잎 피어 있습니다

 

숨결 따라 흔들리는

노란 배냇머리털이

바닷가 갯풀같이 흔들렸습니다

 

옹아리속에서 들려오는 해조음

짭조름한 갯내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시아버지의 고향이

실핏줄을 따라 왔습니다

 

 해당화가 지천인

원산 명사십리

 

대대로 내려온 유전의 내력이

시간의 사행천을 따라 흘러 흘러

우리 아기에게도 왔습니다

 

 

 

 

 

 

[동상] 박사장의 몽블랑 만년필 / 조성대 

 

만년필은 자신의 내부에서

묽게 응고된 잉크를,

되살리고 싶어 몹시 울먹인다

신천 하류를 이리저리 떠돌다

부패되어 가는 들고양이의

내장에 걸려 있다 곧

모두 부패되어 함께

어디론가 떠내려갈 것이다

 

대구 대원섬유 박사장은 지난주 화요일,

愛馬 뉴그랜저 V6 3000과 신천으로 뛰어들었다

전날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한 자괴감을

만년필은 그의 포켓 속에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막진 못했다

외국바이어의 황금빛 계약서에

자랑스럽게 서명되던

자신의 옛모습을 추억할 뿐이다

박사장의 유품이 되지 못함이

無明이 되어 버림이

못내 서럽다

 

새벽, 박사장의 공장 담벼락에

기대어 핀 나팔꽃 하나

때늦은 弔花로 바쳐지고

만년필은 부활을 꿈꾸며 묵묵히

신천 하수종말처리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동상] 개망초 / 전혜진

 

돌틈 사이에 봄이 온다

나라 망한 게 내 탓도 아닌데

나는 개망초

하나님이 나를 지으실 적에는 깜빡 졸으셨나

망초 망초 개망초

 

골목 골목

미소를 나르는 벚꽃

눈꽃 휘날리는 목련꽃

달큰한 내 퍼지는 라일락

오색영롱 형형색색 꽃 중에

나는

왜 나는

스팸조차 못 된 계란후라이 계란꽃

이럴거면 정말 풀때기로 태어나지

꽃도 아닌 풀도 아닌

망할 놈의 개망초

 

두둥실 날아오르는 민들레홀씨마저

어여쁜데

하늘보며 땅보며

에휴

나를 향한 계획이 있긴 할까

전지전능한 주께서는 왜

 

손틈 사이로 봄이 내린다

눈이 시리다

서러운 햇살이 온다

 

 

 

 

 

 

[동상] 이천일십칠년 군중 / 김향숙

 

살찐 달덩어리 움푹움푹 갉아먹은 아침이 낮을 데리고 왔어

몰래 떼어놓은 어둠 한 움큼 책상 위에 앉히고 정오의 태양을 구겨 넣어버렸지

책갈피 속에서 태양은 말라가고 그렇게 낮을 가두어 외면해버리기로 했어

주인 잃은 정오와 검은 바다를 유영했지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끝없는 좋아요의 향연에 나는 그만 길을 잃어버렸어

망망대해 그물 속 좋아요가 너무 많아 나는 나의 좋아요를 찾을 수가 없더라

수십 번 던진 그물에 나를 소비한 나는 빈 그물 깊은 바다를 조심해야 했어

설익은 형용사를 삼키며 문장이 번식하는 바다가 퍽이나 낯설더군

나도 내 껍데기를 사랑스럽게 벗기기로 했어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때로는 네가 나인 것처럼 벗기고 또 벗겼지

한 번씩 출처예의 없이 다른 사람의 껍데기로 나를 감싸기도 했어

비밀도 아닌 것을 비밀스럽게 말이야

내 껍데기를 계속 내 놓아야 하기에 좋아요는 필수조건으로 만들었지

심연의 깊이까지 알 필요도 없었어

가끔씩 찾아오는 솔직한 직선은 감내해야 할 부끄러운 신경증이었지

백만 개의 너울 위로 자발적인 좋아요와 강요받은 좋아요가 하나인 듯 흘러

다녔어

희극적이었어 말하자면 미세한 행간은 비극적이었던 게지

그마저 지독한 의무였기에 하루 수십 번의 형식적인 사랑이 필요했어

백만 개의 좋아요는 그러니까 시간이 준 덤의 외로운 발자국이었던 거야

바다가 쓸쓸해진 좋아요는 다른 영혼에 섬을 만들더라

나의 섬도 외로워지기 시작했지

나 또한 다른 섬을 기웃거려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돼버렸어

일천구백오십년 리스만이 이천일십칠년 군중을 명명했데

고독한군중1)이라고 했다던가?

난, 돌아가야겠어 시퍼런 잎사귀 너울거리는 숲으로 말이야

정오의 태양이 친절한 동굴에서 잃어버린 나를 헤엄쳐야겠어

 

*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만(David Riesman)이 1950년에 출간한 <고독한 군중(Lonely Crowd)>에 등장하는 용어

 

 

 

 

 

 

 

[특선] 각설이 / 고승영

 

[특선] 창문 밖 풀꽃 / 김금숙

 

[특선] 미완성 유년 / 오재희

 

 

 

 

 

[특선] 이름들 / 류상헌

 

어떤 단어를 보면 어떤 이름이 생각난다

어떤 이름을 되뇌어 보다가 나지막이 한 번씩 불러보고 싶을 때가 있다

불러도 대답 없을 이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그 이름이 다시 사물이 되고 만다

마음속 다락방을 들여다보면 풍경처럼

다리가 짧은 책상 위에 잡동사니들이 놓여있다

견출지에 써 붙여도 잘 떨어지는 이름도 있고

대충 손가락으로 써도 지워지지 않는 이름도 있다

새벽 세시에 이름들이 내게 주는 무게를 생각하면

책상 다리가 툭하고 부러질 것 같고

눈을 뜨면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일어나자마자 나지막이 불러보았던 몇 개의 이름들

 

 

 

 

 

[특선] 어머니의 다듬이질 / 김광용

 

 

 

 

 

[특선] 자동기술법 / 최지용

 

소설은 정말 어렵다

문예대전 마감이 코앞이다

아직도 쓰고 있다

수십 페이지를 다시 썼다

조금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저장을 깜빡했다

몇 페이지가 날아갔다

클라이막스였는데

그걸 어떻게 다시 써

이때다 싶어 시 부문으로 갈아탄다

근데 시는 처음 써본다

그런데 자동기술법이란 게 있다고 한다

의식의 흐름대로 적는 작법이라고 한다

그냥 막 써본다

이게 정말 시란 말인가

아무래도 크게 혼날 것 같다

시는 진정 어렵구나

건방진 녀석!

다시 소설로 갈아타야겠다

이런, 곧 마감이다

마누라! 미안해!

 

 

 

 

 

[특선] 개수대 / 노순미

[특선] 나에게 이름이 없을 때 / 조희애

 

 

[특선] 십 삼월의 바다 / 윤빛나

 

십 삼월, 달력 하나를 더 그려놓는다.

의사는 십 삼월의 바다를 처방했다.

노동의 붉은 철책 넘어, 십 삼월의 갯바위에 걸터앉은

당신은 십 삼월의 주주(株主).

한 마리 행복동 고등어를 건져

잠시 멈추어 서야할 십 삼월.

십 삼월의 부두 냄새

십 삼월의 아이들을 위해 빵을 굽는 빵집들.

안개의 풍경 안에

십 삼월에 실려 온 약속이 접안한다.

십 삼월의 오선지 위로 그려진 너의 방법이 있었음을.

십 삼월의 사람을 인정하는

어느 자유의 바다가 안경을 내리면

금방 들키고 말 아름다운 위선(僞善).

십 삼월의 뭉게구름 언덕

친절한 세상, 공짜 커피 한 잔에 취하여

빨간 십 삼월의 주소를 적어 보낸다.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은 십이월 전장(戰場)의 모퉁이

핑계가 보이는 거울 속에 큰 입을 벌리고

씹어 삼키던 안개의 성역에서

젖은 지느러미를 털어 말리는 십 삼월의 바다

십 삼월의 어미 소 한 마리 종나무 쟁기를 끌어

워낭소리 피워대던 채마 밭 이랑

할머니 늙은 빨래 소리 흘러가는 하늘.

갓 건져 올린 시름 한 솔박.

먼지 나는 이승, 계동(季冬)과 맹춘(孟春) 사잇길에

출렁이는 십 삼월, 훌쩍 도망쳐버린 가슴으로

옛 일들을 비겁하게 용서하던 날

저 창호지 문을 열고 뛰쳐나오면

십 삼월의 주인(主人).

파도는 여전히 상냥하고

위대한 기적의 좌표 위에 십 삼월의 바다.

기계 소리 들리지 않는 사람의 시간.

낡은 미닫이를 삐걱거리며

삼월의 평화가 흘러가는 길.

노동의 총소리 들리지 않는 하늘과 땅에

의사는 십 삼월의 바다를 처방했다.

 

 

 

 

 

[입선] 밤하늘의 위선 / 전유진

 

[입선] 아버지를 품은 사람 / 김도연

 

[입선] 막걸리 판타지전 / 길균아

 

[입선] 너에게 닿지 못할 시 / 성미소

 

[입선] 12월의 서재 / 임정태

 

[입선] 봄! 바람 / 김세리

 

[입선] 향 / 정정현

 

[입선] 울고 싶은 저녁 / 박민경

 

[입선] 청춘경매 / 박소정

 

[입선] 저녁 달 / 안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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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순천만 맛조개 / 김경태

 

맛조개를 캐는 일은

법당에 공양하듯 공손해지는 일이다

반나절 웅크린 고양이처럼

몸을 돌돌 말아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길이다

태양 아래 아무 것도 없는 허허 개펄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할머니

안동에서 순천으로 시집을 온 후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 속에서 혼자

거친 숨을 쉬었던 할머니

오늘도 맛조개를 캐러 순천만으로 나가신다

맛조개 하나에 시집살이 하나 맞바꾸며

한 세월 모두 바다에 공양하신다

맛의 힘으로 숨어있는 맛조개를 캐는 일은

인생의 쓴맛 단맛 가득 담은 손으로 세상을 캐내는 일이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갈대숲처럼

어쩌면 한없이 낮은 몸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권태와 설움을 개펄에다 풀어놓는 일이다

개펄이 곧 세상이었으므로 할머니는

광주리에 인 모든 질퍽한 것들을

맛조개가 먹으라고 밀려오는 바닷물에 풀어놓은 것이다

초겨울의 햇살은 오래 전 돌아가신 증조모의 잔소리처럼 간지럽고

방파제에 한가득 맛조개를 풀어놓으면

순천만은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개펄을 솜이불처럼 다시 덮어 놓는다

 

 

 

 

 

 

[은상] 이순신 / 김양채

 

1

그냥 눈물 나는 사람

생각 없이 길을 걷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앉아

통곡하는 사람

외면할 수 없고

외면해야만 하는 현실

술 한잔에 날려버리고

앞으로 간다 기어서 간다

길이 없는 곳에도

풀을 베어 넘기며 앞으로 간다

살고 싶지 않아도 살아지는 생

아직도 살아서 영원히 살아서

혼자서 가야할 길

통곡하며 간다

기다려 줄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

아득한 바다에 홀로 남아

눈물꽃이 된 사람

 

2

하늘도 울고 땅도 울어

잡초도 피지 않을 땅에

꽃 한송이 피운다

쳐 내고 또 쳐 내고

짓밟아 만신창이 되어도

일어나 꽃을 피운다

불가능과 가능의 사이에서

불꽃으로 피어나

스스로 꽃이 된 사람

그냥 눈물 나는 사람

아득한 바다는 끝없이 아득해서

아득하게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눈물겹다

통곡의 피눈물로 꽃이 된 사람

 

3

모르는 적들이 흩어져 있는

아득한 바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새벽 닭 우는 소리에

술 한잔 시름을 달래며

동쪽 하늘에 뜨는 샛별 바라보았다

마쳐야 할 일들이

마쳐지지 않아 힘겨웠고

끝없이 다가오는 일들이 두려웠다

바다는 말이 없고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도 말이 없었다

몸에서 일어나는 병들에 짓눌렸고

병든 땅과 하늘에 짓눌렸다

마지막 바다는 오로지

어머니의 품에서 만들어진다고

화약냄새 진동하는 새벽 바다에서

그리운 어머니 얼굴 떠오른다

 

 

 

 

 

 

[은상] 처마 밑 고드름 / 김정식

 

저 얼음꽃들

좀 봐

마음

꽝꽝 언 채

거꾸로 매달려 있어

 

처마 밑

곶감처럼

한 실에 꿰어져

줄줄이

옆으로 나란히

달려 있네

 

기와 속

숨겨진 비밀

오금

검은 눈물

울 

떨구고

 

회초리 든 햇빛에

이실직고 반성문 쓰며

거짓된 몸

연결고리 문

식은 땀

처마 밑에서

투... ...

 

 

 

 

 

 

[은상] 학교에서 / 정기원

 

이층 끝 계단 첫 방은 교장실이다.

문을 열면 스무 평 남짓한 공간이 들어와 있다.

책상과 의자는 창문을 등에 진다.

언제나 밖은 엎치락뒤치락한 방대한 꿈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정면으로 마주하면 눈물이 난다.

35년을 걸어왔지만 창밖 풍경의 운동장은 공급 받으려는 특별한 자리다.

아이들로부터,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와 백일홍으로부터,

미끄럼틀과 시이소와 하늘사다리로부터.

 

아이들은 언제나 푸드덕 날개 짓을 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날아오르기 위해 제법 긴 시간을 뛰어다니며

넘어지면 일어서는 정교함을 배운다.

내가 가르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궁금함을 품을 때까지.

목표는 가까이에서 허락되는 자신의 방법으로 날아올라,

극복하고 증명하며 인식하는 역사를 만든다.

그것은 꼭꼭 씹어 삼키는 운동장의 언어다. 전교생 85명이

무한동력이다.

 

수직으로 솟아오른 느티나무가 있는가하면 몸을 웅크린 은행나무 둘레로

백일홍이 후렴처럼 맴돈다. 거기, 높고 행복한 하늘이 있다.

한 계절이 지고 한 계절이 피어날 때마다 아이들은 웃고 웃는다.

울고 우는 아이들은 서로를 억압하지 않고 감성에 상상력으로

발돋움한다. 창밖은 한 폭의 초심이다.

미래와 온기가 담장을 새어나가지 않게 끊임없이 여민다.

 

하늘 사다리는 자유를 닮았다.

철봉을 옮겨 잡을 때마다 마음속에 고여 있는 격렬한 실재를 만나기 위해

놓치지 않고 전진한다. 여전히 목표를 향하여 전하고자하는 아이들의

몸짓은 시작되었다.

시이소는 정직을 닮았다.

한사람의 무게가 진실을 입증하며 어디가 처음이고 끝인지 알 수 없는

약속, 기우뚱거릴 때마다 혹은 떨려나오는 무게의 목소리. 미끄럼틀에서

스르르 미끄러진 아이들이 창밖 운동장에 가득하다. 멈추지 않기를.

 

 

 

 

 

 

[은상] 가장자리 / 박청환

 

중앙은 항상 고요했다

무거웠고 깊었다

가장자리는 항상 번잡했다

가벼웠고 얕았다

중앙은 항상 먼저 채워지고 먼저 녹았다

나머지가 가장자리 몫

큰 고기들은 중앙으로 몰려들었고

크고자 하는 고기들도 중앙으로 향했다

중앙이 때로는 첨벙 튀어올라 파문을 만드는 것은

가장자리의 플랑크톤을 약탈하려는 교묘한 술

중앙을 키운 것도 먹여 살리는 것도

가장자리다

중앙은 망각의 장소다

치어들은 커서 중앙으로 향했고

중앙에 도착해서는

가장자리를 잊었

그러고도 뻔뻔한 중앙은 때때로 가장자리를 찾아와

입 안 가득 먹이를 훔쳐 돌아갔다

그러나 가장자리는 

중앙을 미워하는 법이 없다

언제나 먼저 마르고 먼저 얼지만 

가장 늦게 녹고 가장 늦게 채워지지만

비 온 다음 날처럼 연못이 벙벙해지면

중앙으로 떠난 치어를 생각하며

철벙철벙 뒤척일 분이다

갈대를 부여잡고

그리움을 숨기려

스멀스멀 안개를 피울 뿐이다

 

연못의

가장자리는 

자리다

 

 

 

 

 

 

 

[동상] 북한강에서 / 이상재

 

물뱀이 고요를 물고 나아간다

햇볕과 바람이 말려진 그물마다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의 그림자만

어부의 손끝을 따라 엮어져 있다

강어귀에 전설이 닿았던 나무들도

그 속을 비워내다 쓰러져 가면

강은 터전으로 일군 사람들 차지다

나무의 빈 곳을 두드려 만든 배는

강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왔으므로

익숙한 안개의 군무를 지나

물고기의 이동을 따라 갈 것이다

 

달빛은 칡꽃향기를 따라 번져갔다

말질을 하던 사람들이 그물을 거둔다

비린 생선들이 살을 허물어 익어갔고

굴뚝연기는 별을 향해 내뿜었다

강에 흩어져 있던 소문을 물어

수다스러운 새들이 돌아오는 동안

늙은 잉어들은 강을 뒤집으며

거친 숨으로 안개를 끌고 갈 것이다

사람들이 다시 강에 기억을 내리고

강이 터전을 거둬가기까지

강은 언제나 고요하다

 

 

 

 

 

 

[동상] 졸업사진 / 김종범

 

그대들 떠남을 준비하세요

이제 당신들은 은유 따위는 필요 없는 세상에

내동댕이 쳐질 것입니다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그렇죠!

연못을 가로지른 징검다리와

여러분들은 훌륭하게 조우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얼 했나 하는 자의식 따윈

중심선에서 살짝 비낀 전신 프로필 사진 속에 던져버려요

 

지나간 날들이 두려운가요, 그럼 이쪽을 보세요

지금 이 순간 영원히 그 시간을 잡아드리죠

혹 나중에라도 이 사진을 보면 당신의 웃는 모습 너머

사진 속에 가두어 놓은 두려움을 깨우지는 마세요

좀 더 발전적으로

그런 후회 따윈 다시 하지마세요

긴장하지 마시고 살짝 웃어요

여러분들의 모습이 인화되어 규격화 되는 때

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할 것이므로

함부로 앨범 따윈 들추지마세요

 

꾹 꾹 눌러놓았던 지난날의 두려움이 당신들을 어떻게 습격할지

안전을 보장 못 합니다

 

그냥 이 순간에 존재하세요 넥타이를 고쳐 메고, 자 찍습니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동상] 오두막집의 겨울밤 / 장민석

 

깊은 겨울밤

뒤란 대숲에서 사그락 거리며

댓잎 부딪치는 소리

짙은 어둠속에서

소름 돋는 소리로 달려온다

 

이따금 부엉이가 서럽게 울면

이름 모를 산새들 추위에 떨다가

애처롭게 우는 소리들이

무서움 다닥다닥 붙여서

찬바람 뚫고 오는 밤

 

식어가는 구들장에 몸을 웅크리고

무거운 솜이불 뒤집어 쓴 채

겨울밤 슬픈 가락을 엿듣는다

 

먼 곳으로부터 출발한

찬바람이 산등성이를 훑고

강을 따라 내달리다가

산골마을까지 들어와 가쁜 숨 내뱉으며

먼 곳의 겨울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사뿐 사뿐 대숲에 눈 내리는 소리에

산새들 잠드는 시간

어둠을 눈 속에 하얗게 묻어두는

겨울 대숲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안고

산골의 긴 긴 겨울밤을

홀로 무서움 떨쳐내고 있는 아이는

부엉이만큼이나 서러움 속에서도

햇볕 받는 꿈을 꾸며 잠이 들던

 

아주

오래 전 그 겨울 대숲 속의

오두막집이 그리운

오늘!

 

 

 

 

 

[동상] 차를 마시다 / 권덕은

 

중년의 어머니가

고스란히 상자에 담겨 내게로 왔다

 

때깔 고운 보자기를 풀자

쏟아져 나오는 찻잔들, 다구와 찻상

 

고단한 삶 속에서도 꼿꼿이 고개를 들고

친정집 진열장에서 빛을 내고 있던

어머니의 작은 조각들

 

야야, 인자 나는 다 필요없데이

차도 마실 만큼 마싰다 아이가?

찻잔도 손에 무거븐 나이가 된 기라

 

생의 허물을 또 한 번 벗고

저물어갈 채비를 하시듯

벗은 허물을 가지런히 정리하신 어머니

오목한 다기마다

고봉처럼 쌓여있는 어머니의 침묵들

또르르 찻물 따라내니

하나, 둘 깨어나 춤을 춘다

 

침묵은 혀뿌리에 걸리고,

입 속에 스미고 내 몸을 돌아

나직한 경이 되어 허공을 울리고 있다

 

다시 한 번

두 손으로 보듬어 찻잔을 든다

미련 없이 벗어 낸 어머니의 허물을 받아 든

중년의 내가 할 일이라는 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동상] 목재 파쇄기에 대하여 / 김태수

 

온몸은 쇠로 뭉쳐져 있으면서

식성은 어울리지 않게 나무의 속살을 좋아한다.

벌레들 구멍이 숭숭 뚫린 소나무 둥치를 쪼개어

입에 넣어주면 들어가기 바쁘게

몸을 부르르 떨며 씹는 소리가 땅을 울린다.

손발은 없고 입만 가지고 있어도

탈나지 않고 부지런히 먹어주는 것이 고맙다.

쌓아놓은 나무들은 많은데

소화기능이 고장이라도 나면 큰일이다.

찐득찐득한 송진이 목구멍에 붙는 것을 주의하라고

일하는 사람들끼리 무언의 눈짓을 보내기도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욕심 부리지 않고 순리대로 씹고 갈고 빻는 모습이

사람이 하는 짓 보다 낫다.

소나무만 골라 먹는 것은 좋지 않아서

가끔 수액이 많은 활엽수도 주고

냄새나는 폐기목을 주어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다.

너도 나도 골고루 잘 먹어야 서로가 잘 산다는 것을

이 외진 공터에까지 어려운 세속의 사정이 전해지나 보다.

생장을 멈춘 나무들의 나이테가 안타까워서 그럴까.

병들어 죽은 나무들의 고통을 이해해서일까.

몸은 쇳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정 많은 사람처럼 나무들의 속살을 삼키지 않고

톱밥을 만들어 내어놓는 넉넉함에

축 처진 삶의 기운이 솟아난다.

 

 

 

 

 

 

[동상] 문화 상회 / 유상록

 

난리가 나던 그 해였던가, 피난민 열차가 설 적마다 억수같은 사람들을

부려놓고는 떠났다 한다.

 

사람들이 멧새처럼 터를 잡던 그 시절에, 처녀는 장마당 한 켠에서

채소를 따듬었다.

 

이슥해져 돌아오던 날마다 봄은 자꾸 어지럽기만 해서 걸음마다 달이

울렁이고

 

그런 밤에는 우거진 복숭꽃 마다 꼭 처녀귀신이 앉았다 했다.

 

저 너머 강변에는 몇번이고 큰 물이 져나갔다.

 

손이 야물던 색시의 점빵에서 아이들은 십리 사탕을 입에 물고 십리길의

재를 넘어 학교를 다녔다.

 

가난을 감춰 쥔 조막손들이 눈치를 볼 때마다, 소같은 눈을 꿈벅이던

신랑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해마다 진 벛꽃이 문에 날아와 말라붙으면 봄비가 몇 번이고 또

씻어내렸다.

 

덧칠을 잊어버린 창살 마디에 꽃물이 때가 졌다. 사람들은 벚꽃처럼 나고

자라 떠나갔고.

 

조약돌같던 점포들은 모두 이가 빠져버린 채, 공터에 남은 슈퍼 집

미닫이가 바람에 들썩인다.

 

노인네는 오늘도 떠나버린 이를 추억하며 누군가를 맞이하듯 문창을

닦는다.

 

이른 봄볕이 정갈한 유리창을 넘어와 과자 박스의 빛을 바래고 있다.

 

 

 

 

 

 

[동상] X레이 소견서 / 강경식

 

X레이 소견서 –박보검 방사선과

 

Name : 김명신 Age/Sex : 51 Date : 2017.봄

 

이 환자의 뼈 사진을 확인한 결과 특이점이 발견됐음

뼈 속이 비어 있고 가벼워진다는 건 조류의 전형인데

파충류도 아닌 포유류에서 조류로의 진화는 학계에

보고된 적 없는 몇 안 되는 케이스임

특이변종이거나 애초 조류였음을 숨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환자의 남편에게 몇 마디 소견을 전할까 함.

이마트 계단에서 넘어졌다고는 하나 이 환자는 날 준비를 하는 것 같음

원인으로는 갈비뼈 속에 품었던 자식들 뛰쳐 나간 지 오래고

척추 마디마디에 디스크판 대신 받쳐주던 남편이 퇴행된 지 오래여서

묶여 있던 벼릿줄과 매심줄이 드디어 환자를 놓아 준 것으로 사료됨.

날개죽지뼈로 펴지는 갈비뼈가 우화등선의 초기단계를 벗어나면

날아야 하는 본능을 걷잡지 못하므로 미리미리 아내의 뼈 속을

채워 넣기 바람

참고로, 이 환자 몸 세포 구조는 현찰과 고기를 좋아하게끔 진화

되었으니 뼛속에 채워 넣을 내용물은 그 두 가지와 접착제 같은 당신의

관심이면 됨.

 

-----이 상----

 

박보검방사선과의원. 오래된 선녀 구조 전문의: 박보검

DR. PARK’S CLINIC OF DIAGNOSTIC RADIOLOGY.

 

 

 

 

 

 

 

[동상] 참나무와 주름버섯 / 안윤미

 

시들음병에도 끄덕없이 50년을 살아온 참나무를 벌목꾼이 베어버렸다.

나무 밑둥만 덩그라니 남아 겨울을 참아내더니 결국에는 말라버렸다.

참나무 썩은 등걸에서 주름 버섯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버섯은 나무를 빨리 썩게 만든다.

썩은 나무들은 또다른 거름이 되어

청설모도 주워먹지 않은 도토리에 싹을 틔운다.

 

겨울의 무서운 추위에 나뭇가지들이 말라붙었다.

말라붙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꽉 부여잡고 있는

썩은 고치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빈껍데기인줄 알고 툭 쳤더니 그 속에서

한겹한겹 옷을 벗으며 나비가 탈출을 준비하고 있다.

 

시내도로를 지나던 검은 차 한 대가 고양이를 쳤다.

무서운 타이어의 무게에 짓눌려버린 내장이 제 살갗을 빠져 나왔다.

고양이의 피가 눌어붙은 도로에 햇빛이 내려앉았다.

그곳을 지나던 굶주린 까마귀가

썩어가는 내장을 제 뱃속에 쓸어담고선 펄쩍펄쩍 날아오른다.

 

모든 썩은 것들에는 생명이 있다.

누구도 심지 않은 썩은 나무등걸에 으레 주름버섯이 자라는 것처럼.

주름버섯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듯 봄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

생명은 계절의 순환처럼 이어진다.

봄이 온다는 것을 몰라도 겨울이 지나면 으레 봄이 온다.

봄은 겨울 속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썩은 것의 아픔은 봄이 겨울을 밀어낸 힘으로 사라진다.

 

 

 

 

 

 

[동상] 아내의 장독대 / 김헌기

 

손 없는 날 아내가 장을 담근다

눈가에 잔주름이 그윽한 아내는

이제 갓 시집온 새색시처럼 맵시나는 생활한복을 입고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메주를 건져 낸다

한 뭉치 지푸라기 솔로 팍팍 문질러 닦아내어

쨍쨍한 햇볕에 메주를 말려서

정성 가득히 장을 담그는 아내

하늘 한 자락 잘 발려

새끼손가락 휘저어 입맛을 쩝쩝 다시며

꼼꼼하게 연신 장맛을 보고

햇발이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장독 항아리를 문질러댄다

우리가 함께하는 동안

행여 미쳐 내가 헤아리지 못하는 사이에

답답한 가슴을 쿵쿵 쳐대며

햇볕에 보타져 장졸아 줄 듯

해마다 아픔으로 되돌아올 기억을 쟁여두고

아내의 마음도 저렇게 타닥타닥 보타지는 것일까

나는 온기 가득한 장독대 항아리를

무심코 들여 다 보다가

훅, 순간 뜨거운 숨결이 내 얼굴에 덮치고

문득 뭉글뭉글한 함박꽃이 환하게 피어

복이라곤 일복밖에 없다던 어머니가 비치고

늘 짭조름한 인생 술에 절여 막 살다가

강물처럼 떠내려간 아버지가 밀려오고

옹알이가 한창인 큰 손주 놈

햇살이 시들 때까지 첨벙첨벙 물장구치며 놀다가고

쩌-억 쩌-억 갈라진 메주덩이 사이사이로

푸름 한 곰팡이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고스란히 삶의 깊은 손맛을 내는 아내의 장독대

이따금 어디선가 톡, 톡, 톡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

장독대에선 보글보글 장 익는 소리가 나고

어느 덧 펑퍼짐한 동네 아줌마 차림이 물씬 묻어나는 아내는

여직 아물지 않는 상처 하나 묻어두고

벅차게 차아 오르는 장처럼 아내의 삶도 저리 익어가는 것일까

오늘따라 마음속에 응어리처럼 고여 있는 신열이

저 하늘에도 푸르게푸르게 번지는 것일까

 

 

 

 

 

 

[동상] 감자탕 집엔 손님이 많다 / 김일하

 

감자탕은 등골 빼먹는 재미가 쏠쏠해

젓가락으로 후벼가며 빨아먹는 것인데

먹고 나서 구멍 숭숭한 뼈를 보면

내가 빼먹은 등골에 바람이 들어

밤마다 바람 소리로 앓으시던 어머니

굽은 등이 생각난다

 

일가의 기둥이라는 든든한 배경 앞에

나의 잘못은 묵인되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뼛속부터 가벼워진 어머니

어머니는 따뜻한 밥이었고

먹고 싶을 때 빼먹을 수 있는 등골이었기에

등이 시린 건 나이 탓이라 일축했다

 

몸꽃인양 번지던 주름

골 깊은 그 길 마디마디에

바람이 살고 있었다는 건

몸을 벗은 일생을 습골, 봉인하며 알았다

 

마주하고 앉아 저마다의 뼈를 발기는 사람들

좀처럼 숙인 머리를 들지 않는

중앙시장 끼고 돌아 허름한 감자탕 집

 

빈 뚝배기에

세상의 어머니가 중추적으로 쌓이고 있다

 

 

 

 

 

 

[동상] 콩나무 시루 / 황덕조

 

발이 시렸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구멍 난 바닥에 제각기 몸을 뉘이고

꿈꾸던 시간들이 마르지 않게

서로의 여윈 발목을 끝없이 적셔주었다.

 

쳇다리를 지나

물받이 자배기 속으로 떨어지는 물소리는

자주 꿈의 언저리를 적셨고

젖을수록 강해지는 꿈들은

조금씩 겨울의 빗장을 풀며 자랐다.

 

아무도 함부로 뿌리 내리지 않았다.

어깨에 어깨를 기대면서도

서로의 아픔과 기억을 더듬어 거리를 두고

서로가 일어서야 할 공간을 위해 몸을 움츠렸다.

 

뒤돌아보지 말고

오직 한 줄기로만 살아 오를 것

바닥을 알 수 없는 어둠의 깊이와

무거움 침묵 속에서

제각기 허공을 향해 쏘아 올리던

작은 주먹 같은 별들

 

그리하여 마침내 어둡고 무거웠던 하늘을 밀어올리고

검은 보자기 속에서 헤아리던 시간과 마주하였을 때

우리는 겨울 아침을 녹이는 국 한 그릇,

어울려 위안이 되는 나물 한 접시가 되었다.

오래도록 꿈꾸던 자들의 열망을 모아

소박한 밥상을 다독이는 샛노란 희망이 되었다.

 

 

 

 

 

 

[동상] 너희들이 내 삶의 시인 것을 / 박현동 

 

가난한 시골의 詩人 선생님을

꿈꾸었지만

학급 환경정리를 위해

시 한 편을 달라는 실장의 말에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시 한 편이 없어 못내 부끄러워

빈 교실 먼지 낀 책상 위에

그 부끄럼을 끄적인다.

괴로울 고 苦三 담임으로

입시지옥의 수문장처럼 버둥대면서

하루 종일 순종만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우리 반 아이들이 즐겁게 뛰노는 꿈이

악몽이 되는 요즈음의 나는

얼마나 또 어리석은 열심인지

그런데 아이들아

너희들이 졸리워 떨구는

그 안타까운 고갯짓이

하루에도 열두 번

절망과 희망을 반복하는

그 눈물겨운 삶의 무게도

세상 속의 나로 서기 위해

세상 속의 나로 꽃 피기 위해

가슴에 거름을 품어

아프게 움트는 것이기에

꽃 피기 직전에 내지르는

절절한 향기 같은 것이기에

그런 너희들을 일구는 내 사랑이

그런 너희들이 내 삶의 詩인 것을

난 무엇을 바라

또 다른 부끄럼을 끄적이겠니.

 

 

 

 

 

[동상] 어떤 소리 / 김희관

 

동네 정육점에 들러

돼지 목살을 사들고 집으로 오는데

고기가 담긴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꿀꿀 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아내가 달아오른 불판 위에

붉고 두꺼운 목살들을 옹기종기 눕히자

고기들은 지글지글 소리 내며

뜨거움에 마구 몸을 비틀었다

 

익고 있는 고기를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아내는 돼지처럼 먹는다고 핀잔을 준다

 

중심을 잃고 허둥지둥 살아온 흠 많은 남편임을

아내와 한편이 된 눈치 빠른 돼지도 알고

불판위로 너도 얼른 올라가야지 하며 소리칠 것 같아

 

고기 숙숙 잘 넘어가던 내 목젖은

죽은 돼지를 위해 경건하게 묵념하듯

그만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현실에 안주하며 짜부라진 내 귀와

어설프게 열려 있어 두려웠던 내 입을 자책하며

술기운에 아내에게 넋두리만 길어진

창 밖 별들에게도 부끄러워지는 밤이었다.

 

술에 취해 집으로 오던 어느 밤

늦게까지 장사를 하고 있던 정육점 앞을 막 지나는데

정육점에 걸려있던 돼지들이

여태껏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마구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로

꿀꿀! 정신 차려! 꿀꿀꿀!

 

 

 

 

 

 

[입선] 노란 미소 / 윤상선

 

[입선] 얼음다리 / 차재연

 

[입선] 가라앉은 유채밭에서 / 이송이

 

[입선] 출장 가는 길 / 이건섭

 

 

 

 

[입선] 섬 아닌 섬 / 박창식

 

산길 험해 예전엔 자갈치서 기선으로 창아가던 곳

가슴 속 엉킨 실타래가 풀리지 않는 날

그대 안부가 절절한 날, 송도로 간다

 

사시사철 하얀 옷고름 풀어헤치고

푸른 젖가슴을 내놓는 그 바다

밤새 젖은 별로 깜박이던 묘박지 외항선들도 꿀잠에 빠져들고

밀물에는 끝없이 실려 온 상사가 켜켜이 쌓인 백사장에는

고운 모래가 눈물처럼 반짝거린다

 

고즈넉한 언덕바지 노송 한 그루, 해풍에 붙박인 채

굽은 등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풍파가 그은 시간의 날카로운 빗금이

나이테로 점점 둥글어지는데

언제나 올까, 등이 굽도록 기다리는임

 

파도가 쉴 새 없이 낮은 음표로 작은 모래 건반을 두드려도

납작 엎드린 밤은 불면을 뒤척거린다

 

언제나 올까

밤바다 가득 수놓은 금실 달빛을 거북섬 위에다 곱게 펴서 

그대 사뿐히 지르밟고 올 구름다리 하나 놓아볼가

 

이국정취 물신한 밤이 찾아와 꺼져가던 추억들에 불을 밝히면

섬 아닌 섬에서 손짓하는 그대

 

횟집 수족관에 갓 들어온 어리둥절한 고등어 한마리가

이 밤, 바다로 돌아가는 길을 놓치고 있다

 

 

 

 

 

 

[입선] 어떤 일출 / 최범석

 

동해의 용이 된 문무대왕이 알을 낳는다

어둠 깊은 심연에서 터져 나오는 양수가

검은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수평선 너머에 환한 얼굴 살짝 비친다

깊은 속울음으로 산란의 고통이 시작되는 순간

아이처럼 어깃장 놓던 방게도 움직임 멈추고

수증릉 수비하는 갈매기도 날갯짓 멈춘다

해변에 늘어서서 이 순간 기록하는 카메라도

숨죽인 셔터소리만 조심스럽게 쏟아낸다

드디어 전설의 용울음소리 그 파문이 밀려오고

금방이라도 단물 쏟아질 듯한 수밀도 하나

조금도 흩트림 없는 둥근 얼굴로 둥실 떠오른다

고통의 틈을 메우던 양수덩어리 흐물흐물

고빗사위에 쐐기처럼 두 손으로 떠받치다가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보고 탯줄 잘라낸다

산란이 끝나고 깊은 바다에서 솟아나는

허탈한 신음소리 출렁출렁 밀려오는데

막심 므라비치는 횟집마당에서 엑소더스를 연주하고

감은사지에서 사라진 종이 소리없이 울린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갈매기 때 일제히 날아올라

붉은 하늘에 까맣게 너울대며 축하비행을 한다

동해바다에서 용이 되어 천년을 산 문무대왕이 

이제는 눈부신 하늘의 전설이 된다

 

 

 

 

 

 

[입선] 거꾸로 매달린 사람 / 김홍기

 

[입선] 말 / 김난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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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소금꽃 / 김민규

[은상] 고드름 / 채규근

[은상] 옥자 / 선희석

[은상] 광대 / 김동현


[은상] 몽돌 / 서해웅


해안선을 따라 길게 펼쳐진 여수 몽돌 바닷가

발가락 사이로 물이 스미듯

돌과 돌 사이사이로 파도가 들어치고 있다

바위섬과 뭍을 이어주는 다리처럼

바다 위 넘실대는 윤슬

햇볕에 달구어진 돌 위에 앉아 

몽글몽글한 살결을 어루만져 본다

파도도 보드라운지 자꾸만 밀려와

꽉 움켜쥐고는 이내 다시 부서지고 만다

얼마나 견뎌야만 이토록 매끈해질 수 있을까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깎이고

거친 바람에 저네들끼리 부대끼며

모난 얼굴 동글동글해질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견뎌야

안으로 안으로 더 단단해질 수 있을까

까만 돌 위 점점이 박힌 하얀 무늬들

아픈 시간의 반짝이는 기록들

징검다리처럼 한발 한발 따라가다 보면

거기, 커다란 손 넘실대는 검푸른 바다가 있다





[동상] 풍장 -매미 탈피각 / 이호종 



[동상] 아버지의 배 / 박수찬


선창에 목줄을 메고 온종일 삐걱이는

아버지의 작은 목선은 경전이고 서당이다

이물에도, 고물에도

독해 할 수 없는 글들이 가득하다

오늘도 솜금기 가득 머금어 독 오른 해풍이

어깨동무를 겹겹이 하고 몰려와

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아버지의 팔순 주름을

갑판에 서각을 하고 돌아간다

새롭게 새겨진 글자들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눈은 회한의 글을 쓴다

너도 이제 다 늙어 가네

한 세상 산다고 고생 찬 많았데이


한국전쟁 때

포탄에 다리를 잃은 아버지

곰삭아 살이 떨어져 나간 건현에

송판을 덧대고 못질을 하신다

바람이 말벌소리를 내며

갑판에 벗어 놓은 의족 안을 기웃거려도

신경은 온통 뱃삼에 있다

9607028-6408852

연안지방 허가판을 주소처럼 달고

바다가 되어 가신다




[동상] 타카시마로 가는 길 / 박기준

[동상] 폐경 / 김형만

[동상] 산정묘지 / 정기원



[동상] 겨울 갯벌의 저녁 / 김두길


지퍼가 열린 해안선

질척한 갯벌의 내장이 쏟아진다


언제인가, 말이 통하지 않는 침묵으로부터

귀를 테러당한 적이 있는 거기,

몇 봉지 탈수가 덜 된 파도의 물집이 남아 있고

온몸에 울음의 면적이 퍼져 있는 갯바람의

희미한 궤도가 떠돌고 있을 뿐


쓰러지는 방법을 배운 겨울 갯벌은 이제

다시는 지상에서 직립하지 않을 것이다


보라,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사람들의 발자국들이

걸어온 길을 뱉어내고 있는 평면

생각하면, 끝은 시작의 후유증에 발과할 뿐

반드시 세상의 어딘가에

끝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없음에도 평면은

왜 우리의 생애처럼 항상 끝을 향애 가고 싶을까


천정이 없는 북반구 위로

대규모의 날이 저무는 시간

죽음처럼 식어버린 방파제 위에 서서 나는

어쩌면 시작보다 더 필사적인 끝을 위하여


살다가 결국 나였음이 밝혀질 그대

어느 반대편의 저녁 속에서

내 등에 기대어 슬슬이 저물고 있을

그대의 빈 몸 속으로


셀 수 없으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새떼를 날려보낸다







[동상] 저녁의 산책 / 신현숙



[동상] 자반고등어 / 박정훈


갈길 잃은 흩어짐으로 아직 남은 늦더위가

오후 두시 골목시장 좌판을 훑고 간다


비린내 가득한 좌판 위로 자반고등어가

지친 늑골의 육신을 내려놓고 외마디 외침으로

공양의 길을 가고 있다


검은 빛 감도는 허파 사이로 

오대양 심해 온갖 세월을 유영하던 움직임들이 

이젠 숨죽여 발가벗은 몸으로

미소같은

그윽한 편안함이 묻어 있다


소금에 염장되어

자신의 마지막 한 점 살점까지도

몸 보시 하는 인자한 황금빛 웃음에는


한여름 그 길고 험한 물길질 대신,

이젠 모든 생리작용을 마치고

세월의 빗장을 열어둔 채

죽음의 정원을 짓는

늙은 누에의 거룩한 영혼의 입놀림같이

자식들의 굶은 배를 위해

물배 채우시는 늙은 어매의 얼굴이 있다






[동상] 전당포 / 이희복


갚아야 할 죄 값

빚 때문에 영혼의 반을 팔았다

오른팔을 올리면 교회 탑 뾰족한 지붕이 서고

왼쪽 눈을 뜨면 사창가 울음을 핥아내는 입술이 열렸다

나는 젊음을 담보로 삶을 팔며 술로 살았다

하나 둘 늘어나는 빈병의 공간 속에

정신적 치유를 위한 고뇌를 담으나

깊어가는 상실은 막을 길 없고

살기 위해 살찌우는 빚 덤이

짙은 화장으로 잠이 든 아내,

들락거리는 푼돈은 아내의 취기에 가난만 입힐 뿐

오늘 쪽 어깨의 통증엔 아무런 보탬이 없다

뜰 때마다 쌓이는 눈꼽에 가려지던

나날이 무디어지고 낮아지는

십자가의 높이와는 아랑 곳 없이

육신을 쪼고 있는 전당포의 팻말은 지금도

부엉이 눈처럼 껌뻑거린다








[동상] 로드킬 / 심진경




[동상] 항구의 아침 / 이규준


아침마다 항구에는 비늘이 날을 세운다


오가는 파도에 몸을 싣지 못하고

그물에 갇혀 쪽잠을 잔 물고기들

밤새 접혀있던 비늘이

아침 햇살에 기지개를 켠다


사십년 전, 칡같이 질긴 보릿고개에 

모진 입 하나 덜고자

자갈밭 두 마지기 덤으로 안겨 주면서

부초처럼 떠 밀려온 시집살이

그저께 물때 보고 돛을 올린 김 영감

떠난 날이 제삿날인가, 돌아올 날 기약 없어

곱게 모은 두 손, 밤새 사발에 넘치는 기도

그 염원 결코 헛되지 않아

만선의 깃발 올린 낯익은 돛단배 하나

아낙의 아침 숨결이 길다


수평선을 허무는 아침 해가

항구의 어둠을 둘둘 말아가자

하나 둘 무게를 버리는 배들

비었던 좌판은 뜨거운 호흡으로 열이 오른다

마지막 비린내마저

싹슬이 해가는 경매사의 갑싼 흥정

아침 항구의 좌판이 식어가고 있다








[동상] 편의점 24시 / 김화숙


그녀는 마네킹처럼 유리창에 진열된다

마지막 버스가 떠나자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빛나는 순간,

열한시에 구석에서 컵라면을 먹던 남자가

열두시에 급히 와서 생리대를 챙겨 갔다

그의 다급한 발소리너머

고양이가 밤하늘을 홀리고 있다

창 쪽에 두 개 남은 사발면

붉은 눈의 노인은 올 때마다 같은 면을 선택한다

허겁지겁 건더기만 쑤셔 넣고 소주는 따로 붓는다

그는 마트에서 세끼를 산다


겨울 속에 인스턴트 그림이 부유한다

계산기 앞에 서 있는 그녀도 인스턴트 식품이다

하루와 하루가 물려 있는 시간은

마법에 걸려 영원으로 간다


하루가 어떻게 끝나는지 몰았던 날들

하루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몰랐던 날들

기억 속에서 걸어 나와 유리창을 서성이고

시간을 세고 있는 그녀는

눈동자가 뿌옇게 닳고 있다


생활이 품목으로 떠 있는 공간에서

그녀의 시간이 박제되고 있다


정거장에 깨어 날 때까지 한 세기가 왔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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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어느 저녁 반찬 / 이효조

[은상] 창 / 김태인

[은상] 꿈구는 남녀무늬 항아리 / 김일하

[은상] 어미의 돌절구 / 김기범

[동상] 대화 / 김진대

[동상] 석쇠 / 고순용 

[동상] 일상 / 문기훈

[동상] 양파 / 윤명호

[동상] 온기를 쫓아 뒷걸음치는 지우개의 순애보 / 서영호

[동상] Her / 이동백


[동상] 뽕짝의 바다 / 김미숙


수문이 열렸다

먼 바닷물이 거품을 물고 닫힌 가슴으로 온다

막혔던 숨을 내쉬며 혈색이 도는

허언구의 바다

바닷물은 돌아갈 길을 잃었고

수평선 너머를 기억하는 물고기도 사라졌다

몇 년째 갯벌에 묶여 뼈가 삭아가는 폐선

육지가 된 섬은 멀리로 비틀거리고

타관 사람들 발소리만 흥얼거리는 그곳

보름달이 떠도 마지막 씨를 뿌린다

하얀 머릿수건처럼 물이랑을 떤다니는 어선에서

종일 뽀짝의 가락

막걸리와 땀 냄새에 취한 물결이

흥얼흥얼 배를 밀고 가는데

수문이 열릴 때마다

밭은 기침을 하는 바다 위로 낮은 한숨은

유행가처럼 흘러가고






[동상] 편지-늙은 느티나무 / 이병두

[동상] 어머니와 트로트를 / 심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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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푸른 감자 / 윤영규


햇감자를 덮어 둔 신문지에는

뜨거운 날들의 기록들이 구겨져 있다

까막눈이 부끄럽다던 어머니에게

신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덮는 것이다

읽지 못하는 세상의 소란을 들추고

푸른 색이 도는 감자를 고른다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고

햇빛을 타박하면서 알아차린 것은

감자에게 번진 몽고반점

감자는 아무도 몰래

빛줄기가 만든 요람에 누워

옹알이를 했나보다

촉이 낮은 알전구 불빛에도

감자는 옴팡눈을 뜨고 있다

어머니가 읽지 못하는 활자들이

으깨지면서 파열음을 내는지

감자의 옹알이가 자꾸 들린다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호외다






[은상] 봄호수 / 구서영


봄호수가 햇살을 만나면

크리스탈 부딪치는 소리를 낸다


겨울 묵은 이불홑청 털어 말리듯

차르르 차르차르 속을 뒤집으면


내 깊은 꿈에서 푸른 잠자던 잉어가

뽀그르르 하품하며 깨어나고


꿈결인 듯 그대 머리결인 듯

능수버들 보슴보슴 솜털 보듬는 소리


묵은 벚나무 가려움에 투둑-툭

꽃망울 터트리는 소리


예전에 내가 알지 못했던 봄은 물가로 먼저 와서

환희의 교향악을 울리나니


부지런한 아들은 함빡

개나리꽃 웃음 흘리며 몰려 나와


폴리프로필렌 등산바지 무르팍 언저리

걸을 때마다 삐익삐익 스치는 소리


이 봄 한 무리의 종달새 된다







[은상] 할미꽃에게 길을 묻다 / 이규환


과수원에 탱자나무 울타리 가시에 부고장이 걸렸다

집에 들인 객에게는 야박하게 굴지 말라시며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내어 주시던

속 깊은 마음씨를

가시 숲 헤집고 참새 떼가 물어 나른다

대청마루에서 목침을 베고 길게 누운 그림자는

할머니의 유품을 챙겨 펄럭이는 만장을 끌고

상주가 되어 산으로 간다

평생을 베풀며 살아 온

풀려나온 정 넘치는 이야기가 아지랑이 등에 올라타고

따사로운 햇살의 추모 속에

상수리나무 옆에 걸터 앉은 바람이 곡을 한다. 후두둑 후두둑

꽃상여 스친 자리

부풀은 홀씨가 떠돌다 정착하는

지천으로 널린 야생 풀꽃의 자서전처럼

다채로운 참살이로 힘겨워 할만도 하지만

세상살이 경험 많은 꽃들은 피었다 지고

마지막 가는 길에

문늑 고개 들어 할미꽃에 길을 묻는다

"이 길이 그 길이요?"







[은상] 빈집 / 정혜찬


소리를 잃은 워낭은 텃밭에 묻히고

주인을 잃은 자전거는 녹이 슬어 잠든 탓에

삐걱거리는 녹슨 양철 지붕만이

아기를 대신해 울음을 울건만

메아리 쳐 오는 것은

텅 빈 툇마루에 올려진

몇 장의 통지서


목마름을 잃은 수도꼭지는 침묵에 잠기우고

손님을 잃은 대문은 마당에 누운 탓에

마른 잎 몇 개 남은 감나무만이

쓸쓸한 엽서를 붙이건만

바람 불어 가는 곳은

텅 빈 그리움에 익어간

새까만 장독대







[동상] 가을 오후 2시 / 김여선


가을 하늘

푸른 병 속의

소주들이 넘실거린다

갈 곳 없는 바람만

빈 테니스장

철조망 사이로 들락거리고

모두들 단풍구경에 바쁘다

가끔 쳐다본 하늘엔

아직도 어제 마신

파란 소주의 숙취로

머리가 푸르도록 어지럽다

바람도 걸리지 않는 철조망에

어깨를 기댄 애기똥풀

씨앗도 맺지 못한

노란 똥꽃 하나

바람에 흔들린다

사랑도 가끔은

철 늦은 애기똥풀

노란 똥꽃처럼

열매를 맺지 않아도 좋으리







[동상] 나이 서른 / 김봉대 


나이 서른은

남자는 가장이

여자는 엄마가 될 나이다


나이 서른은

청춘도 아니고

기성세대도 아니다

스스로 독립을 해야 하는 시기이다


나이 서른은

후배도 되고

선배도 되는

처신이 애매한 때이다


나이 서른에는

아버지'어머니의

삶도 팍팍했을 것이다


나이 서른은

어느 날 

갑자기

뛰어 넘고 싶은 개울이다


나이 서른은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못하는

삼불 시대의 갈림길에서 서성거린다


나이 서른은

치열하게 살아야 할 시간이지만

어느 듯 빈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시간이다


나이 서른에

무엇이라도 해야 할 때이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갈 길을 잊은 돌아가지 못하는 철새가 된

나 자신을 본다







[동상] 아이스크림이 녹는 시간 / 이용주




[동상] 꽃 핀 것이 좋은갑다 / 김형만

[동상] 갈대 / 심상대

[동상] 문고리 / 곽향련

[동상] 블루(부제: 파도와 소녀) / 노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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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도깨비바늘 / 손성태


네게 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돌무더기의 틈새라도 비집고 살아온 나날

청석에 혀 내밀어 애써 틔운 꽃향기

지독하다, 농익은 천릿길

파장의 겨울 길목이 확확 타는 독주 한 잔

허방 짚어 휘청거리고, 갈지자로 걷는 노랑나비


노랑물 들였나 샛노란 꽃잎

바람 불어도 날지 않고

비 퍼부어도 떨어지지 않는 말라깽이

살구, 박주가리, 민들레 홑씨의 생존법은 사치

스스로 뿔을 갈아 독이 오른 바늘, 검다


스치는 건 무엇이든 턱, 물고 늘어져

멀리 아주 멀리 떨어져 가는

얻는 것이라곤 '도깨비'라는 진절머리

낭떠러지로 떨쳐지면 지는 대로

가끔은 나 모르는 너를 찔러

모래밭에 내린다


불모지는 나의 땅

노랗게 물들이다가 흔들리다가 말라버리는

검은 줄기 위에서 아직도 꿈꾸고 있는

저 지독한 드라이플라워







[은상] 바다가 있는 아파트 / 이상재


확성기 안 만선의 바다

소형화물차 밖으로 울려 퍼지는

생선장수 김씨의 우렁찬 목젖이

아파트 층층마다 닻을 내린다


선상 갑판을 뚫고 솟아올랐던

물 오른 고등어며 가자미들

힘겨운 사투로 새벽을 끌고 온

굽은 새우와 속 빈 꽃게들

모두 체면을 차리느라 곱게 누워

건장한 아침을 토해내고 있다


남편의 빛 보증처럼 위태로운 직장에서

밤새 한숨을 늘어놓았던 자식의 진로까지

거센 파도 속에 헝클어진 여인들

굳게 잠겨 있던 철문을 나선다

거품처럼 일어선 엉덩이가 출렁인다


이제 김씨의 팔뚝은 바다를 움켜 쥘 태세다

마지막 몸부림으로 굳어 있던 생선은

미끈한 몸통과 지느러미를 선뜻 줄 모양이다

생선장수 김씨의 칼날이 번뜩일 때마다

여인들이 물오른 생선처럼 몸을 세운다

몇몇은 에누리에 들뜬 생선의 머리를

값싸게 쳐내는 기쁨을 함께 산다








[은상] 봄 / 조성철

[은상] 탠덤 / 김현욱

[동상] 거울 속에 내가 / 박영섭

[동상] 낡은 밥솥의 보행 / 박창식 

[동상] 다 지나가리라 / 고국희

[동상] 바람흔적미술관 / 김민규

[동상] 봄은 틀니의 마찰음을 기억하리라 / 최광진

[동상] 적석목곽분 / 조재형

[동상] 청소부 / 한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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