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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푸른 감자 / 윤영규


햇감자를 덮어 둔 신문지에는

뜨거운 날들의 기록들이 구겨져 있다

까막눈이 부끄럽다던 어머니에게

신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덮는 것이다

읽지 못하는 세상의 소란을 들추고

푸른 색이 도는 감자를 고른다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고

햇빛을 타박하면서 알아차린 것은

감자에게 번진 몽고반점

감자는 아무도 몰래

빛줄기가 만든 요람에 누워

옹알이를 했나보다

촉이 낮은 알전구 불빛에도

감자는 옴팡눈을 뜨고 있다

어머니가 읽지 못하는 활자들이

으깨지면서 파열음을 내는지

감자의 옹알이가 자꾸 들린다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호외다






[은상] 봄호수 / 구서영


봄호수가 햇살을 만나면

크리스탈 부딪치는 소리를 낸다


겨울 묵은 이불홑청 털어 말리듯

차르르 차르차르 속을 뒤집으면


내 깊은 꿈에서 푸른 잠자던 잉어가

뽀그르르 하품하며 깨어나고


꿈결인 듯 그대 머리결인 듯

능수버들 보슴보슴 솜털 보듬는 소리


묵은 벚나무 가려움에 투둑-툭

꽃망울 터트리는 소리


예전에 내가 알지 못했던 봄은 물가로 먼저 와서

환희의 교향악을 울리나니


부지런한 아들은 함빡

개나리꽃 웃음 흘리며 몰려 나와


폴리프로필렌 등산바지 무르팍 언저리

걸을 때마다 삐익삐익 스치는 소리


이 봄 한 무리의 종달새 된다







[은상] 할미꽃에게 길을 묻다 / 이규환


과수원에 탱자나무 울타리 가시에 부고장이 걸렸다

집에 들인 객에게는 야박하게 굴지 말라시며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내어 주시던

속 깊은 마음씨를

가시 숲 헤집고 참새 떼가 물어 나른다

대청마루에서 목침을 베고 길게 누운 그림자는

할머니의 유품을 챙겨 펄럭이는 만장을 끌고

상주가 되어 산으로 간다

평생을 베풀며 살아 온

풀려나온 정 넘치는 이야기가 아지랑이 등에 올라타고

따사로운 햇살의 추모 속에

상수리나무 옆에 걸터 앉은 바람이 곡을 한다. 후두둑 후두둑

꽃상여 스친 자리

부풀은 홀씨가 떠돌다 정착하는

지천으로 널린 야생 풀꽃의 자서전처럼

다채로운 참살이로 힘겨워 할만도 하지만

세상살이 경험 많은 꽃들은 피었다 지고

마지막 가는 길에

문늑 고개 들어 할미꽃에 길을 묻는다

"이 길이 그 길이요?"







[은상] 빈집 / 정혜찬


소리를 잃은 워낭은 텃밭에 묻히고

주인을 잃은 자전거는 녹이 슬어 잠든 탓에

삐걱거리는 녹슨 양철 지붕만이

아기를 대신해 울음을 울건만

메아리 쳐 오는 것은

텅 빈 툇마루에 올려진

몇 장의 통지서


목마름을 잃은 수도꼭지는 침묵에 잠기우고

손님을 잃은 대문은 마당에 누운 탓에

마른 잎 몇 개 남은 감나무만이

쓸쓸한 엽서를 붙이건만

바람 불어 가는 곳은

텅 빈 그리움에 익어간

새까만 장독대







[동상] 가을 오후 2시 / 김여선


가을 하늘

푸른 병 속의

소주들이 넘실거린다

갈 곳 없는 바람만

빈 테니스장

철조망 사이로 들락거리고

모두들 단풍구경에 바쁘다

가끔 쳐다본 하늘엔

아직도 어제 마신

파란 소주의 숙취로

머리가 푸르도록 어지럽다

바람도 걸리지 않는 철조망에

어깨를 기댄 애기똥풀

씨앗도 맺지 못한

노란 똥꽃 하나

바람에 흔들린다

사랑도 가끔은

철 늦은 애기똥풀

노란 똥꽃처럼

열매를 맺지 않아도 좋으리







[동상] 나이 서른 / 김봉대 


나이 서른은

남자는 가장이

여자는 엄마가 될 나이다


나이 서른은

청춘도 아니고

기성세대도 아니다

스스로 독립을 해야 하는 시기이다


나이 서른은

후배도 되고

선배도 되는

처신이 애매한 때이다


나이 서른에는

아버지'어머니의

삶도 팍팍했을 것이다


나이 서른은

어느 날 

갑자기

뛰어 넘고 싶은 개울이다


나이 서른은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못하는

삼불 시대의 갈림길에서 서성거린다


나이 서른은

치열하게 살아야 할 시간이지만

어느 듯 빈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시간이다


나이 서른에

무엇이라도 해야 할 때이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갈 길을 잊은 돌아가지 못하는 철새가 된

나 자신을 본다







[동상] 아이스크림이 녹는 시간 / 이용주




[동상] 꽃 핀 것이 좋은갑다 / 김형만

[동상] 갈대 / 심상대

[동상] 문고리 / 곽향련

[동상] 블루(부제: 파도와 소녀) / 노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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