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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사막화 / 김충만

 

 

모래언덕같이 내려앉은 흰 눈들

높다란 선인장들이 황량한 도심 속에 가시처럼 박혀있다

내일은 퍽석한 모래벌판 위가 아니라

촘촘한 유리 창문 속에 들어앉을 수 있을까

실눈으로 창틈의 간극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걸음이 무거운 한겨울 낙타들

불안으로 가득 찬 혹을 등에 업었지만 목만은 빳빳이 

세웠다

 

부푼 기대로 따라가던 앞선 발자국들 어느새 보이질 않고

어제까지 따라오던 하룻길도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비쩍 말라 쩍쩍 갈라진 낭만의 틈새로 자리 잡은 하루

이만 원 못 되는 생활비와 삼십만 원 남짓 월세 

두 쪽 난 발굽 사이로 아지랑이는 금세 흩어진다

 

한낮의 추위를 피해 대학 식당을 찾은 배고픈 낙타들

그 어느 때보다 사막화沙漠化 진행 속도가 빠르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작은 봉오리들, 한 줌 비구름처럼 웅크린 밥을 먹는다

무릎도 모래바람에 긁힌 주름을 먹으며 혹처럼 뭉툭하게 

배가 불렀다

 

밤이 되면 소곤소곤 모래알처럼 속삭이는 별들의 눈

그중 하나처럼 반짝여 보고 싶다고 두 눈썹을 끔뻑거린다

낮은 천장에 적막의 길고 축축한 혀가 내려온다 

작고 외로운 입술을 이불처럼 훑는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한 말을 가져간다

침묵만이 말하고 있다

 

모래 늪같이 가라앉는 사막의 밤

사막의 꽃은

하현달의 눈꺼풀처럼

저무는 법을 먼저 배우는 것이다

사막화沙漠花는 이렇게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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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5월, 이팝나무 / 이규상

 

 

따뜻한 밥한공기 먹여서 

보낼 것을 그랬다

새벽이 오면 

차디찬 손으로 

뺨 한번 어루만지지 못할 것을

온기를 밥공기에 담아 

먼 길 떠나는 네게 밥심으로 

잘가라고 인사라도 할 것을 그랬다

 

그때부터였을까

어머니는 

마당 한구석에 

이팝나무를 심기 시작하더니

오월이면 

보이는 땅한뼘이라도 

배고픈 그 나무를 

뜨거운 눈물로 꽃피우셨다.

 

싸래기같은 그 꽃이 지면

바람에 훨훨

산너머까지 밥짓는 연기처럼 흘러가

논두렁에 바짓가랑이 적시며

놀던 개구쟁이 아들을 

다시 불러 주길 바랐다

 

다시 오월이 오고

어머니는 

이팝나무가 되어 

볍씨같은 꽃잎과 함께 

어린 아들을 

부르러 산너머로 

흩어져 갔다.

 

쌀밥보다 따뜻했던 

오월, 이팝나무는

마당 한가득

밥짓는 열기로 

여름을 불러온다.

[은상] 물밥 / 강경순

 

 

물을 드시는지 밥을 드시는지 어머니는 부엌에 서서

휘휘 밥 한 술 풀은 대접에 얼굴을 묻고는

숟갈을 쥔 채로 후루룩 밥을 드신다 아침을 마신다

 

훌훌 넘기는 밥, 숟갈이 무슨 소용이랴

둘러앉은 자식들 숟가락에 반찬 얹으시곤

살며시 물러나 앉으셨지

어찌 맛난 것을 모르고 배고픈 줄 모르시랴

자식들 입에만 넣어 주시며 그저 흐뭇해 하셨지

 

피어오르는 향냄새에 자분자분 어머니가 걸어오신다

나물 반찬도 아끼시느라 못 드신 어머니께 수저를 올린다

낡은 스웨터처럼 끼니 걱정에 구멍 숭숭 뚫린 마음을 깁던 

한평생 밥상을 차리며 모서리조차 앉지 않으셨던 어머니께

일 년에 한 번 차려 드리는 밥상

 

당신의 기일마저도 물밥을 드시는 어머니

이젠 숟가락으로 소고기 국도 떠드시고 

발라낸 생선 살도 드시고

생전 못 드신 음식 상 한 가운데 앉아서

울먹이는 내 등을

어머니는 굽은 손으로 가만히 쓰다듬으신다

어미는 아까 많이 먹었다 어여 먹어라

 

초승달이 처연히 가슴에 와 박히는 어머니의 제삿날

밤바람이 자못 시린 날이다 

 

 

 

 

[동상] 까막눈 / 김형성

 

 

아버지 눈에 눈이 내렸다.

 

무릎이 닳아 너덜해진, 

수 번은 덧댄 작업복이 정갈히 걸려있다

삶의 궤적은 입꼬리 따라 행복을 그리는데, 

아버지의 입꼬리 끝엔

커가는 새끼의 암팡진 몸이라도 매달려 있는가

 

낮에도 밤을 품은, 

어둠이 지나쳐 글조차 담을 수 없던

잿빛 도료 가득 머금은 우주

고개 하나 넘으면 고개 하나 꺾이던 시절

몽당연필 값 세멘보다 무거워

배운 것은 삐뚤빼뚤 나뭇가지로 쓴 이름 석 자

 

내 눈물을 돋보기 삼아

어릿어릿 읽어내린 글자, 백내장 

세월이 아버지의 눈에 눈을 내렸다

 

생의 무게 둘러메고 오르내렸던 삶의 계단들 

이제는 문턱도 홀로 넘지 못해

앙상한 겨울나무가 되어버린 아버지 

지문 지워진 손끝처럼 맨들맨들한 골방의 문지방

 

서글퍼진 나는 밖으로 나서는데

아버지 눈에 내렸던 것, 내 정수리 위로 툭- 툭

차고 시린 것 멎는 날 오면

기어코 나는 까막눈 당신과

새 계절 하나 둘 찬찬히 읽으러 가리

 

 

 

 

[동상] 인력시장 김씨 / 양동진

 

 

먼동 어스름 활활 타오르는 드럼통 난로 가에 

뒷짐 지며 둥그렇게 서있는 그림자들

잠과 피로의 사이, 오도 가도 못하는 눈꺼풀처럼

엉거주춤한 기다림이 웅성거린다.

가끔 불티가 정적을 깨뜨려도

호명하는 이름에 토끼처럼 귀를 세우고

아무도 말을 쉽게 던지지 않는 적막

침묵을 오글거리며 

이글거리는 꽃불에 시선을 쏟아 넣는다.

사람들은 바람에 불려가는 낙엽처럼 

어디론가 떠나는데 

마지막 부름은 끝내 오지 않고

꺼져가는 불쏘시개처럼 가버렸다

선택받지 못한 누추한 안전화는

빈속을 훑는 갈퀴 같은 

날선 하루의 쓰라림 안고

진공청소기처럼 부르르 떨면서 간다.

날품팔이 연명하는 쪽방 속에 

덕지덕지 붉은 경고장

찌든 생활고는 점점 달아올라 발화점에 다다르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울음처럼 

먹먹한 심장이 덜컹거린다.

잉걸불처럼 타오를 그의 불꽃은 

잠시 잿더미 속에 

숨을 멈추고 웅크리고 있다

내일 새벽의 간택을 

간절한 목숨처럼 기다린다

 

 

 

 

[동상] 신발의 재발견 / 이정원

 

 

1.

신은 완성되지 않았고, 발은 여전히 자라고 있었다

 

벌어진 생각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모아져 갔다

 

신이 언제부터 발의 보호대가 되었을까

신의 품질보증서는 발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과 발의 관계성과 유용성에 대하여 

증명하려 노력했지만 의존성을 찾아내는데 그쳤다

 

신은 무슨 색일까

레드, 그린, 블루, 블랙, 화이트...

또 발은 무슨 색일까

 

신의 색에 발을 맞추는 것이 옳을까

발의 색에 신을 맞추는 것이 좋을까

난해한 철학적 질문은 유보하지만

 

오랫동안 바라보고 가까이 하면 색과 모양이 바뀔 것 같

은 예감이 든다

 

2.

토방으로 나가 마루밑에서 오래된 신발 하나를 꺼냈다

그가 들어 올려진다 

그의 흔적들이 들어 올려진다 

찢어진 그의 신이 올려진다

신발 바닥을 돋보기로 확대해 보았다

신발 앞쪽 어두운 곳에 숨어있던 알들이 발각되었다

저 알들은 지금껏 무엇을 먹고 살아 왔을까 

 

떠나버린 그의 흔적이 

마음를 마구 휘젓다가 발까지 내려가

먹이가 되었을까

 

아니면

늘어진 넥타이를 매고 이리저리 일자리를 찾아 굴러다니느라 맺힌

발바닥의 혈흔이 먹이로 변했을까

 

그는 신발을 부여안고 꺼억꺼억 울어댄다

 

3.

배율을 높이자 알속에서는 

일곱 살 소년이 아버지의 상여를 절룩거리며 따라가고 있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동상] 억새 / 전경호

 

 

떠받치는 공간 보다 밀려간 날이 잦은

수평선에 걸려도 

바람을 잡으며 단단해지는 자성自省

눕지 않는 뒤축에 탄성을 키운다

 

측편으로 휘갈기는 운율에 벼려지는 기울기

홀로 바람의 악보를 필사하며 

숨 가쁜 몸살을 부린다

한쪽 어깨로 다른 어깨를 지탱하며 

온몸으로 고요를 잠재우고 

허공 절편을 맞추며 

무언가를 읽는 중일까?

 

거침없이 끄덕이는 생의 표본 

바닥의 고집을 흔들고 있다

갯내를 가까이 

공중을 더 가까이 

바람 품어 풍문으로 

갯내 품어 향내로

천공의 획을 그은 세월

어디쯤 가닿을 수 있을까

 

넘어가다 일어선 표정에

샛길이 비치면

질펀한 낯빛이 달랐다

밭은 숨 

몰려드는 생각에 

억세게, 나래짓한다

 

중력을 놓친 공간에는 

궁극으로 

머무르지 못하는, 빼곡한 요란搖亂들 

언제쯤 정박할 수 있을까

 

 

 

[심사평]

 

시는 화자의 소재가 무엇이든 화자의 거울이다.

 

제42회 근로자문화예술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제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제이어서 많은 작품이 왔고 작품의 수준도 시원하다.

 

시詩<사막화>는 현실과 도시 속에서 만나는 사막화, 화자 자신의 현실과 꿈에서의 자세를 화목으로 간다. 타자의 관점인 표현으로 시는 존재에 대한 내밀한 이미지를 시적 은유 세계로 간다. 현실을 넘어서 꿈을 확인하는 플롯이나 전개가 머뭇거리지 않고 싱싱해서 시의 힘을 보여준다. 꿈과 이상은 투명한 빛의 유리성이지만 현실은 갈라진 발굽 사이로 흩어진 아지랑이의 봄으로 잡히지 않는다는 시詩<사막화>는 자신의 실제 환경과 도시 속의 불안감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절망의 일상화는 상상력의 꽃으로 시의 키를 키운다. ‘불안으로 가득 찬 혹을 등에 업었지만 목만은 빳빳이 세웠다’ 전망이 전제된 시이다. 

 

시<5월, 이팝나무>는 어머니 사랑이다. 시는 내용 전개가 산뜻하다. 띄어쓰기가 몇 번쯤 문제가 있지만 시는 수준이다. 시<물밥>, 세상에서 가장 쓰기 어려운 시가 어머니를 소재로 쓰는 시라고 한다. 어머니의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시이다. 그러나 어머니 시에도 나는 들어갈 틈이 있어야 한다. 시의 주인은 어머니가 아닌 나이기 때문이다.

 

시<까막눈>의 시작이 아버지의 역사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는 돌고 돌다가 역전을 한 화자의 눈엔 모든 게 아름다워 보인다. 역전을 한 자의 수확이다. 역전을 못 했다면 아버지의 과거는 누더기뿐 이리라. 시<인력시장 김씨>는 매일 하루하루 품팔이를 하는 사람 매매시장이다. 사람도 근로 조건도 매매 대상이 되어 갑의 선택에 꼬리를 흔들고 따라가는 슬픔이다. <신발의 재발견>시는 신神과 신발을 그린다. 신은 신의 의미와 신발 의미로 중의적 의미, 시의 영역을 넓게 한다. 신이 질주의 본능을 숨긴 채 거친 숨을 쉬는 신발을 그린다. 마루 밑에서 들어 올린 신발에 그의 영적 은밀이 감추어져 있음을 감지한다. 

 

<억새>시는 중심의 중력을 그린다. 싱싱한 언어의 집합이어야 하는 문제도 있다. 시는 화자의 소재가 무엇이든 화자의 거울이다.

 

- 심사위원 박남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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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나팔꽃 / 김희정

 

 

스물보다 몇 해 더 산

어린 시동생은

나를 잉태해 불어난 엄마의 배를 보며

조카를 얼른 만나고 싶다고

형수님 배 만져봐도 되냐고

담벼락의 붉은 나팔꽃처럼

수줍게 얼굴 붉히며 물었다지

 

아마 그즈음에도 이렇게

가금 바람 불고 비 내리고

해가 쨍쨍했겠지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 살

엄마 뱃속에서 몸집을 키워나갈 동안,

육사에 막 입학한 삼촌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거지

시집살이에도 도시락 싸주며 공부시켰던,

착하기만 했다던 시동생을 떠나보내며

엄마는 뱃속에 나를 이유로

양껏 울 수도 없었다지

 

형수님 많이 울지 말라고 그때 떠난 건지,

매번 궁금했다는 걸

아무도 모르지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매년 현충일 국립묘지를 찾을 때면

내 일 년 치 생활과 갖은 상념 젖은 편지

가족 몰래 묫자리 위에 올려놓고

삼촌이 다 읽겠지, 뒤돌아보며

매번 구원받았다는 걸

아무도 모르겠지

 

그가 떠난 계절에 피는 나팔꽃 꽃말은

기쁜 소식, 결속, 덧없는 사랑

꽃말 따라 살다 간 것 같은 삼촌

매해 이 계절에는 그의 나이 세어보며

흑백 사진 속 얼굴에 주름 하나 더 새겨넣네

창틀에 심어 놓은 나팔꽃 화분에는

어느새 새싹이 피었다지

 

 

 

 

 

[금상] 외포리 요양원 / 송순애

 

 

바닷가 모로 누운 폐선 한 척

뒤척일수록 마른기침 흘러나온다

창가의 휠체어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노인이 자꾸만 한쪽으로 저문다

갈매기가 바람 다발을 뱃전으로 물어 나를 때

성한 데 없는 이음새가 삐걱거린다

더는 조일 수 없는 나사처럼

노인의 관절은 오래전부터 녹슬어 있다

누군가 찾아와 주었으면

어스름 속으로 길이 보일 텐데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는

파도를 따라 졸음이 밀려온다

가는 귀먹은 텔레비전에서는

입만 벙긋하는 가수가 콧줄에 걸려나온다

식도 어디쯤 가보았던 것인지

바람 소리가 목선을 휘감고 쿨럭인다

한때 해상을 횡단하던 선박이었던가

물살이 커튼처럼 접혀오는 저녁,

이곳의 문은 여전히 밖으로 잠겨 있다

바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잔잔할 것이다

갯벌처럼 드러난 병상에서

폐선 하나 쓸쓸히 밀물을 끌어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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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새 벽 / 허영자

 

새벽이 새 벽일 때가 있다

날이 밝아도 잡고 늘어지는 아침잠에

떨어지지 못하는 눈꺼풀처럼

쉽게 걷히지 않는 안개 속 새벽은

넘어야 할 하루의 벽이다

 

마음 놓고 기대던 든든한 기둥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허정거리며 밖으로 나간 거리는 황량한 벌판

갈 곳이 없다

기둥 대신 기댈 곳을 찾느라

공부하듯 훑어 내려간 구인 광고지

키를 키우듯 점점 높아지는 벽 앞에 주저앉으면

갚아야 할 대출금과 자식 대학등록금이

삼킬 듯 넘실거리며 다가온다

 

새벽 인력시장 헛걸음질 하는 사람들 뉴스를 보며

나만 힘든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드나무 가지처럼 처진 어깨를 추스려

새 벽이 새벽이 되는 날을 향해

주저앉았던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은상] 김일순 사원 / 김환철

 

“클스마아스 이일해 헤이헤이 슁엉

오능 추엉 따등히 임꼰 이일 해양영“

“어제 왜 나오지 않으셨어요?”

“실랑 아팡, 수울 마안이 마셩 또 아팡”

그녀가 가만히 가슴을 때린다,

 

늘 웃는 그녀

때로는 시장한구석 자판을 벌려두고

단속반 사내들의 발길질에도 당당했던

어머니였다가

 

홀로 부엌에서 군불을 때며 흐르던

그 소리 없는 아픔이었다가

 

헤어진 벙어린 장갑을 끼곤 퇴근길

내얼굴을 춥다고 만져주는 누이이곤 했다.

 

언제부터 그녀의 표준말은 천천히 오랫동안

듣고 있어야 연결되곤 했을까.

아카시아 잎처럼 정렬되지 않는 언어이면 어때

눈빛은 남루한 내 표준말보다 충분한 것을

 

점심시간마다 따뜻한 물을 떠

한 사람 한 사람 돌려주는

그녀의 손이

벌판에 남겨진 얼어버린 벼의 밑동처럼 얼어있었지만

내 떨리는 겨울의 무표정은

묶여있던 보자기 속에 햇살로 웃고 있었다.

 

 

 

 

 

 

 

 

[은상] 한낮의 퇴근 / 김장옥

 

공장 정문의 내곽

가리비 문양으로 우리는 모여있다

안과 밖의 경계에 선 경비는 이 선은 넘지 말라는 양팔의 암묵

드디어 종이 울리고

모래시계의 모래가 흘러내리듯 공장은 사람을 비워간다

새벽 출근조의 퇴근은 해방이다

비가 내려도 탓하지 않는다

한잔 술과 한큐의 즐거움 그리고 쉬고 싶다는 생각들

살과 살이 스친다

빗물이 서로 마주 본다 이별이다

머리 위로 기차가 지나가는 굴다리를 마주하기도 한다

길이 좁아지고 사람들은 자세를 낮춘다

우산이 있을 공간의 명분이 불투명하다

이제 하향의 방식을 배울 차례다

순서에 맞춰 우리는 하나둘 하나 따라 접히는 우산

주르륵 식은땀을 닦아내듯 빗물을 훔친다

장 우산 3단 우산 일회용 우산 서로 달라도

하나 된 문장처럼 반듯하다 휘어지는

골목 따라 우산의 생각도 굽어지다 활짝 펴진다

가는 손끝으로 빗물이 떨어진다

이건 노동의 내면을 이해하는 일이다

온기가 건너온다

손과 대 사이 말없이 건너오는 이마의 땀이 환하다

저 땀방울에 한 마음 닿으면 현생이

다 읽힐 거다 이젠 너의 뒤에 쉼표 하나, 툭

 

 

 

 

 

 

 

 

[동상] 마이너리티 리포트 / 박한규

 

1. 개구리밥

하마나 불려 질까 동살 속 귀 세우는

선잠깬 인력시장 들레다 잠겨 들고

날품에 헤진 물갈퀴 허방 속을 떠돈다

 

2. 무화과

너볏이 대궁 올려 꽃등 걸고 싶었지만,

꽃받침 갈채 속에 만발한 꿈 그렸지만,

가슴속 씨오쟁이엔 거먕빛만 번진다

 

3. 달맞이 꽃

글러진 이생의 꿈 가슴에 묻었건만

언저리 외진 기도 해쓱히 벙근 걸까

달빛이 낭창한 꽃잎 신열 자꾸 도진다

 

4. 거미

빈 하늘 움켜쥔 채 나달대는 실타래

손끝이 다 닳도록 생의 솔기 기워간다

뒷등이 흠뻑 젖도록 빌딩 벽을 타면서

 

 

 

 

 

 

 

 

[동상] 집으로 오는 길 / 이창우

 

식전에 일 나가신 아버지께 가는

이랑 길은

검정 고무신의 맨 발목을

촉촉한 콩 풀들이 반가이 비벼대는

이슬 길이다.

 

어머니가 일러주신

이렇게 이렇게 하라던 얘기를

꼬깃한 메모처럼 자꾸 중얼거리면

기다란 두렁 길 어디서 나왔을까

흰 나비와 민들레가

손을 잡아 이끈다.

 

아부지, 어무니가

진지 잡수시러 들어 오시래요

또박또박 일고여덟 애 같지 않은 말투가 부끄러워서

작은 소리에 못들으셨나

아부지, 엄마가 밥 먹으래 외치고

냉큼 되돌아

그래, 가자는 뒤통수로 들으며 내달려

집으로 오는 길

 

옆집 마당

커다란 누렁소가 송아지 옆에 달고

쩔렁쩔렁 나서며

고단하게 울음 우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노래하는 내 친구

삼용이가

마루 끝에 앉아 하품 어린 눈 비비며

나를 보고 웃는다.

 

 

 

 

 

 

 

[동상] 사랑은 / 최지연

 

눈 밑을 찌르는 듯한 여름날

 

어미 개 한 마리가 흙바닥에 엎드려

다리에 난 생채기를 핥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동네를 어슬렁거리던

수캐 한 마리와 싸움이 붙은 것이다

 

8월의 햇살 사이로 포화 같던

매미들의 울음소리

 

한참 동안 보이지 않던 새끼 두 마리가

어디선가 슬금슬금 나타나

상처로 가득한 어미를 연신 핥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금세 더러워진 새끼들의 주둥이를

어미는 목장갑 같은 혀를 내밀어

쉴새 없이 닦아내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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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물렁물렁한 뼈 / 김태숙

         - 상훈이에게

 

잠든 아이의 발을 살며시 만져 보았다

낮에 갖고 놀던 고무공을

몸 속 깊은 곳에 감추었나보다

군데군데 물렁물렁한 것이

잘 익은 복숭아 같다

아이의 가는 발목이

어디 너른 들을 달리고 있는지

쌔근쌔근 가쁜 숨을 쉬며

내 손을 뿌리치고 있다

아직 여물지 않은 몸

어린 새가 상처를 몸에 새기며

너른 하늘을 혼자서 찾아 가 듯

단단히 여물어 가는 시간들을

온 몸으로 새기며

세상을 천천히 배워갈 것이다

그렇게 물렁물렁한 뼈들을

하나 둘 단단히 맞추며

내 품을 천천히 벗어 날 것이다

온 몸으로 새겼던 그 많은 아픔들을

어ㄴ날 지나가는 시간들 틈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슬며시 끼워 놓고

너른 들로 성큼성큼 내려 설 것이다

 

 

 

 

 

 

 

 

[은상] 젠트리피케이션* / 이만영

 

발단은 바닥이었다

낡은 시간을 뒤집어엎는 공사가 한창이다

 

무늬가 깔리고 있다

발설한 발자국과 말라가는 낙서들 누군가

그려놓고 간 모눈종이 칸과

밤새 페인트로 휘갈긴 몸의 음화들

 

해체 직전의 주유소 간판이 덜컹이고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취객의 손과 무릎이 꼬인다

 

함부로 떨군 독촉장 절취선과 기호

아침으로 달려가는 공기는 불규칙하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어둠

낯선 시간이 개어나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멈췄던 구름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고화질로 전광판에 광고가 채워지는 시각

 

믿을 수 없는 건 소음의 방향

바닥에 뒹구는 스프레이 통과 녹슨 난간들

소멸 그 다음을 생각한다

 

한대

주유소였던

편의점이었던

원룸이었던

 

그 단단했던 기억 안쪽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휘발된 유증기와 잠재된 불빛

뒤돌아 보는 순간 나는

어떤 눈빛으로 희미해질

 

누군가는 수건으로 코를 틀어막고

누군가는 비명같은 비상벨을 누르겠지만

그건 모두 네모 안의 일

지면 혹은 모니터 속에 채록된 일

 

공사가 끝난 보도블록

누군가 흘리고 떠난 눈물자국을 세며 걷는다

모눈종이마다 숫자가 찍힌다

 

매장된 모서리가 흥건하다

 

 

 

 

 

 

 

 

 

[은상] 며느리 풀 넝쿨 / 신영순

 

봉제공장 담벼락 끄트머리

납작 올라앉은 며느리 풀 넝쿨

어젯밤 남편에게 얻어맞았나

물 오른 불 따귀 멍 자국 퍼렇다

비 오는 날도 꿈적 않고

재봉틀 돌리는 현장 안을

훔쳐 보다 두 볼이 발그레 하더니

 

며칠 후, 아이가 둘 있다고 어설프게

멋을 부린 젊은 아낙이 찾아 와

콩알 같은 눈물을 튕기며

남편이 실직한지 오래 되었다고

한 잎이라도 벌어야 한다고

가난의 덤불을 걷어보겠노라고 울먹였다

 

며느리 풀 이파리 납작납작 창문을 더듬고

젊은 아낙, 아슬아슬 재봉틀을 익혀가고

시계 한 번 쳐다보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아이들의 넝쿨 손 되어 어미가슴 키워간다

 

담벼락을 붙잡고 내려오던 며느리 풀 넝쿨

비빌 언덕이 어디냐고 소란스럽게 꽃 피우고

젊은 저 아낙, 이제 일이 조금 익숙해졌다고

해 볼만 하다고 거친 손으로 재봉틀을 닦는다

 

 

 

 

 

 

 

 

[동상] 꽃 / 유택상

        - 몽키 스패너

 

부속품에 애벌레를 심었어

등 대면 캄캄한 세상으로 빠져 나오는 볼트,

하나 둘 셋

온몸을 풀어 놓았어

반란하지 않을께요

어둠은 실어증에 시달리고 자동차에서 피가 흘려

달콤한 길 가보지도 못했어

달리고 싶어

피가 나도록 나를 고쳐다오

나의 쪼개진 발목을 붙여다오

새파란 몽티로 조여다오

목구멍에 오일이 엉켜서 핸들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어

소리를 길러 주어도 번번이 변명만 늘어놓는 맥박들

모서리의 괄약근으로 순간을 조였다 풀었지

시속 몇 킬로로 달려왔지

누가 막장 같은 속력을 붙여 주었지

바람이 등 밀어도 고장 난 것은 허물 같은 춘궁기

신화를 창조하려는 것은 부상으로 숨어사는 것

한 방울의 질료가 필요해

몇 년 동안 등짝이 가벼워진 지산의 승객을 배웅했지

하늘과 땅 매듭을 풀고 퍼즐을 맞추고

나는 산자의 손 발끝

나는 암흑 속에서 혹 하나 돋았다

 

 

 

 

 

 

 

 

[동상] 탈피 / 신승아

 

간지러운 등닥지 터져

살갗이 비집고 나올 때

가재가 안간힘을 쓰는 것은

껍질을 벗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힘 다해 몸을 접으며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것은

단단한 껍질 안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던 가닭이다

 

껍질을 벗는다는 건

한없이 약해진 자신과 만나는 일

말랑거리는 몸으로

천적들의 공격에 노출되는 건

못내 두려운 일

 

그래, 틀을 깬다는 건 온전히

자신과의 싸움이다

껍질을 벗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던 가재는 알고 있을까

가장 약해진 순간 두려움을 견뎌내야

더 크고 단단한 껍질을 갖게 된다는 것을

새로운 세상과 만난다는 것을

 

 

 

 

 

 

 

 

[동상] 아름다운 가게 / 이정근

 

가게는 시간의 입구를 가졌다

연두빛 나뭇잎이 그려진 문으로 들어서면

쓸모없는 그러나 아직은 쓸모가 남아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앉아

서글프게 모서리를 반짝이는 물건들

때 낀 크레용은 눈맑은 아이의 하늘을 메웠으리라

나는 색종이를 만지고 리코더를 만진다

누군가의 추억을 끼웠을 퀭한 액자

헐렁한 운동화와 퇴색한 구두는 깊다

더 이상 온기를 지니지 못한 집기 사이를 돌아가면

하류로 떠밀린 인형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공허하지만 평안한 진열대를 산책하면

세월의 나이테에서는 정말 나무 냄새가 난다

때로는 일본 여자가 소곤거리다 가고

때로는 필리핀 여자가 옷가지를 고른다

물길을 따라 구르며 닳은 잔돌처럼 다정하게

각자의 가방을 낀 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물건들은 약간의 떨림으로 앉아 있다

미풍이 인다 쉼없이 미세전류가 흐른다

문득 누군가의 손끝이 닿으면 짧게

저들의 모세혈관에도 피가 돌고 온기가 흐른다

문밖에서 시간은 홍수처럼 물건을 휩쓸고 간다

하지만 물건은 따뜻하고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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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장미회담 / 안미선

 

그들은 지금

식탁을 사이에 두고 밥을 먹는다

 

서로 융통성을 묻는,

눈그늘이 볼까지 내려온 한사람이

하루 한 끼만이라도 지중해식으로 먹자한다

시래기 된장국을 맏 떠 넣으려는

때다

 

서울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사이를 오가는 호흡들

식탁 유리에 번진다

 

휘어지는 식탁을 조절하며 지구본이 돌아간다

해안선이 바닷물을 끌어당기고 팽팽해진다

육지가 넝쿨이라면

나무들이 공기방울 속에 뿌리박는 방식을

그들은 모르지만 모래사장은 안다

 

스위치를 누르듯 시선을 아래로 찍어 누르던 한사람

포크보다 젓가락질을 잘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윤리적인 생활이라 믿는다

탄수화물금단증으로 다리가 저릴지도 모를 사람들이

주사위를 식탁 위로 막 던지려는

때다

 

착점에 따라 첨부되는

장미주의보

그들의 대척 시점도 안정적인 변화의 선택

 

가능하다면 혹은 불가능할지라도

식탁 위에 남아야 하는 것

마주잡은 오른손과 오른선의거리

비로소의 안녕

 

 

 

 

 

 

 

 

[은상] 바늘구멍 / 우종율

         - 낙타를 위하여

 

새벽 4시

도시락 세 개, 액봉지 혹에 넣고 낙타는 집을 나선다

때 묻은 막내아들 신발이 뒤집어진 채 걸린다

빈센트 고흐의 '구두 한 켤레'가 된 아이의 헤진 안전화

녹초가 된 아이의 희미한 미소가 따라 나온다

 

내 나이 65세, 낙타 나이 스무 살

툭툭 불거진 양 손가락 겨우 한번 밖에 펼 수 없는

눈앞에 놓인 노동 한계

발가락도 꼼지락거려 보지만 자기 위안일 뿐

낙타 한 마리 낭떠러지에 떨어졌다는 소식, 내내 발에 차인다

 

2호선 신남역에서 반월당으로

1호선 환승하여 대곡역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굳은살 박인 손아귀들

한때 조극 근대화라는 근사한 호칭으로 어깨 세우던 남자들

희끄무레한 머리카락 사이로 서릿발 같았던 눈빛 흐려진다

 

울긋불긋 낙타의 무리, 플래시 몹,

그 중에 나도 섞여 너울너울 춤추고 싶다

징이며 꽹과리 대신 나는 스웩스웩 늙은 레퍼가 되어도 좋으리

 

아파트 입구 떨어진 이파리 쓸고 돌아서면

처음으로 되돌리는 야속한 바람

낙엽에 대한 낭만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받는 이의 즐거움보다

되돌아오는 택배물건

반품 진열대에 오른 구겨진 여배우의 사진이 콜라주가 되면 툭,

휘청거리며 더 튀어나오는 낙타의 눈을 보시라

 

추락한 낙타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바늘구명 앞에서 오랫동안 부유하고 있는 가족

 

'말등에 오르면 사지 못할 곳이 없네

 말등에 오르면 죽지도 않는다네

말이 스스로 길을 찾고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준다네'

 

희붐한 새벽을 타고 마두금* 소리가 진양조로 들려오고 있다

 

* 몽골지역에서 널리 연주되는 나무와 가죽으로 만든 2줄의 악기

   새끼 낙타의 울음소리와 비슷하다고 함

 

 

 

 

 

 

 

[은상] 가물거리는 / 손숙경

 

성긴 바람이 머무는 그 마을엔 눈물뺘로 갈아 만든 웅덩이가 하나 있었다 웅덩이에는 허물이 가득 차 찰랑거렸다 달포 전에는 한 사내가 매미처럼 나무에 매달려 비명을 던지더니 어제는 술로 심장을 데우던 노인이 연못 몸을 구겨 넣었다 벌레들이 우글우글 지킨 시신엔 솔기 닳은 늙은이들이 먼 별 한 쪽이라도 더 잡으라며 허물 한 바가지씩 퍼내고 서둘러 돌아갔다 그날 밤 세찬비가 천만줄기 손을 뻗어 영혼을 오랫동안 위로했다

 

어슬어슬한 침묵을 껴앉고 선 마을이 있었다 너덜너덜한 문패가 더 많은 골목에 발자국 소리라도 쩌벅거리면 심장이 쭈삣 섰고 놀란 고양이 울음이 목젖에 걸리는 밤이 있었다 차츰, 웅덩이는 방치되었고 물이끼가 갉아먹은 허물은 더 이상 허물이 될 수 없었다

 

거적을 덮어야만 떠오르는 까막거리는 고향이 있었다 새벽이면 외등을 손에 든 안개가 울상을 지으며 문패를 훑고 다녔다 가혼, 날개 없는 꽃잎이 뜬구름으로 피어났지만 집도 추억도 그리움도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동맥을 긋거나 가지런히 놓인 신발을 못 둑에서 보는 것이 흉이 아니었다

 

해 묵은 가난을 등짐 진 노인 몇몇이 오들오들 떨며 살고 있었다

노잣돈이 없어도 얼어 죽기 좋은 낡은 오두막집이 있었다 옆집이 멀어져 발목을 자른 골목이 있었다 스스로 가물어서 가물거리고 있었다

 

그 마을에서는 허물도 관심의 뿌리에서 짜낸 꽃물이었다

 

 

 

 

 

 

 

 

 

[동상] 발가락이 그린 무늬 / 정한지

 

  

땡볕 뛰어다닌 퀵서비스

페달을 힘껏 밟아도 퇴근시간은 퀵서비스 되지 않고

배달통에 숨긴 발가락 통증이 아우성을 친다

 

이파리 가득 촘촘히 박힌 매미울음처럼

반 쯤 빠진 발톱 비명이 공기를 흔드는 한 낮,

빠졌다가 다시 차올랐다가 다시 빠진 발톱이

옹이 그득한 나무처럼 아픔 무늬를 그려넣고 있다

 

핏물 배어든 양말 속

통증이 지나간 자리는 새살 돋은 자리조차 붉고

 

매매소리 따라 들어선 도시공원 한켠

직립을 잊은 늙은 나무 한 그루가 굽은 등을 내어준다

옹이로 키운 수백년 나이텔를 발목에 감은 푸조나무

수피 벗겨진 몸을 점자처럼 읽으면

500년 뿌리에 새겨진 멍의 내력을 알 수 있을까

폭우가 할퀸 자리 굳은 살 박힌 문신으로 남아도

가지 끝에 틔워낸, 아가 젖니같은 움

 

뿌리가 잎을 밀고가는 길은

발바닥 땀으로 더운 밥 끓여내는 아버지의 길이다

 

흑백 잎새 펼쳐진 그늘 아래

멧새 한 마리 제 집인 듯 날개를 접는다

마른부리 적셔주는 수액 흐르는 소리

 

밴드 붙인 자리 겹으로 다시 밴드를 붙이고

볕살 속으로 달려간다

저녁식탁에 깃든 눈망울들 위해

나는 기꺼이 아버지가 된다

 

 

 

 

 

 

 

 

 

 

[동상] 바이오밥나무 / 김정석

 

후원자님 앞으로 온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마다가르카스 바이오밥나무 아래

흑인 아이가 웃고 있다

 

전화가 왔다

누구냐고 되물었다

나도 모르냐고

저쪽에서 환장할 노릇이라는데

배고프지 않은 기억은 지워져서

미안할 따름이다

 

생전에 아버지의 소나무는

자주 진흙길에 빠졌다

그때마다 나는 황토를 반죽해서

아이티 소년처럼 쿠기를 만들었다

 

바이오밥 나무는 무자비하다

저리 멀고 막막하게 열매를 달아놓고

배고프지 말라니

이름만 밥나무인

그 아래 배고픈 바오가 산다

 

소나무 껍질 벗겨 송구죽 끓여먹던 

아버지는 한 생을 건너 아프리카에

가셨나 보다

오늘도 낯선 전화가 왔다

갔다

 

 

 

 

 

 

 

[금상] 무섬에서 / 전영임

 

한 폭의 수묵화 해 지는 뭍의 섬

도도한 강물 소리 현을 타듯 노래할 때

점점이

모래, 모래알들

깊은 잠에 

가라앉는다

 

별을 따러 가려는가

피라미 자맥질

지치지도 않는지 온몸 던져 밤을 세지만

만만한 세상은 없지

뭇별 깜짝 놀란다

 

꽃가마 타고 오던 향기로운 봄날은 짧아

자옥하게 서린 정 홀연히 사라지고

 

헌 생은 외나무다리 아래

젖어 흐른

그리운 강

 

*무섬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소재, 마을 3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는 물돌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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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부처님의 발톱깎기 / 박성우

 

아버지께서

한참을 웅크리고 발톱을 깎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우리 것이 되어 버린 것들을

그렇게 모가 난 삶의 모서리들을

딸깍딸깍 떼를 잘 입힌 봉분처럼

둥글고 매끄럽게 깎아 내고 있다

아버지 웅크린 그 모습 그대로 마른

생불이 되어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다

순간, 나는 아이처럼

깊고 고요한 바닥이 무서워 아버지 하고

그 고요를 살며시 흔들어 놓았다

아버지 대답도 없이 그저 고개만 천천히

나를 찾아 먼 길을 돌아 돌아 오신다

들일 나갔다 집에 있는 짐승들

잠시 거두러 오실 때처럼

마루에 앉은 우리들을

물끄러미 다 같이 거두시고는

다시 들로 천천히 돌아가신다

마른 등은 그믐처럼 차고 깊게 구부러지고

무른 무릎 사이로 얼굴이 천천히 묻혀 갔다

그런 순간이 내게도 올 것이다

둥글고 매끄럽게 떼를 잘 입힌 봉분처럼

삶의 모서리들을 딸깎딸깎 깍아 내며

주위의 안녕을 주섬주섬 거두어 갈 때가 올 것이다

 

 

 

 

 

 

 

 

 

[은상] 말랑한 포도 / 윤옥란

 

자르르, 살이 올랐다

벌레들이 잎을 갉아먹는 동안 나무는 굵어지고

햇볕따라 몸이 휘어진 과육

 

며칠 방안에 둔 포도

껍질 속에 담긴 햇빛과 바람은 포도밭으로 빠져 나가려고 몸부림친다

줄기를 놓친 접시에서 조금씩 시들어 갔다

 

신맛이 단맛으로 익어가던 검은 눈동자 같은

달빛에 포옥 안겼던 8월의 밤을 포도거위벌레는 기억할 것이다

 

 어제는 석양이 포도나무에 사뿐히 내리더니

오늘은 나를 키워온 시간의 나뭇가지에 앉았다

 

포도처럼 탱글탱글 단물이 고이던 시절

언니 몸에서는 풀냄새가 난다고 했다

사과처럼 이쁘다고 했다

 

이제 내 눈의 물기가 줄어든 것만큼

포도 껍질은 더 질겨져서 씨앗만 남았다

 

바깥은 절정이다

 

지구 반 바퀴 도는 동안

벌레들 울음소리와 생의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태양 황경 135도,

 

들판의 술 익는 냄새로 술렁이는 오후

몰입과 발효의 시간을 번갈아 건너는 중이다

 

 

 

 

 

 

 

 

 

 

[은상] 소금꽃 여자 / 신진련

 

바다를 입고 살았습니다

종일 아가미를 떼느라 휘어진

손가락 마디에는

따개비 같은 상처가 굳은살로 박혀 있습니다

살갗에 달라붙은 생선비늘만큼이라도

반작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속옷을 벗고 비린 몸을 문지르면

손가락 사이로 포말이 일었습니다

씻어도 씻어도 바다를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벗어둔 속옷에도 짠바람이 스며들었는지

바다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물기가 빠진 하얀 얼룩을

꽃이라 불러도 될까요

꽃을 피우는 하루를 살았으니

오늘은 낮은 파도를 베고 잘 수 있을까요

젖은 몸 다 마르면

울퉁불퉁한 손가락 마디에도

꽃이 피면 좋겠습니다

잠든 아이 챙기듯

속옷에 핀 하얀 꽃을 보듬었습니다

 

 

 

 

 

 

 

 

 

[동상] 휴일 / 이은선

 

나비 액자를 걸어 놓으니

쌀에 나비들이 꼬입니다

나비 가루는 눈을 멀게 한다지요, 얼른 예쁘고 파랗고 신비스럽기만 한 액자를

땅으로 내려놓습니다

어제는 산으로 도망가며 물소와 코끼리 석상을

헤치며 숲으로 내달리는 꿈을 꾸었드랬습니다

외롭고도 무서운 밤이었어요

태초의 동물들과 함께하는 세계는

도시 속에서만 산 제게는 낯설더라구요

 

어머니가 가져오신 쌀로는

막걸리를 빚었고요

저는 1874년 맥주를 들이킵니다

니체도 만나고

고흐도 만나며

술 맛은 참 좋아요

허나 내게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다가오는 이유로

그들과 작별해야 합니다

 

저는 그들과 달리 초라하기만 해서

청소를 하고

독서를 하며

담담하게 하루를 보낼 거랍니다

알아요

그들의 시간 속으로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동상] 몽땅 빗자루 / 홍영수

 

깔끔한 툇마루 끝

쓸어 담아 닳고 닳아 시린 아픔 안고

녹슨 못에 걸려 있는 때 묻은 손잡이엔

부엌 문지방 넘나들었던

세월이 지우고 간 여인의 지문 자국이 흐릿하다

 

비바람 알갱이로 슬어 놓은 먼지와

자신의 온몸 닳아가며 남긴 티끌을

티바지에 쓸어 모으다 닳아

절반을 먼저 보내고 남은

반 토막의 경전

 

뒷바라지를 치마로 두르고

엄마를 저고리로 껴입으며

허리 한 번 펴지 못하다

지팡이 손잡이처럼

절반으로 굽어 버린 기역자의 법열 등

 

서로 다독이며

좀먹은 마루판 사이를

쓸고 쓰는 만큼

헐벗고 닳아가면서 비질하고 있다

누군가 밟고 디뎌야 할

마룻바닥의 티를

 

티 나지 않게

 

 

 

 

 

 

 

 

[동상] 경제신문에 나오지 않는 장면들 / 김희원

 

동전을 쥐기에는 늦은 시간

운동화 끈이 보도블럭을 파고든다

다시 찾아온 노숙의 열대화

커피 잔을 든 사람들 속에서

사내는 땟국도 말라갔다

갑자기 운동화는 힘이 솟고

금은방 앞으로 달려간다

신문지에 덮여있는 음식들 앞에서

사내는 무릎을 꺾는다

한 젓갈의 냉면이

잔반에 섞여 다홍색으로 울고 있다

 

그들에게 오는 것들은

꼭 한 번씩은 운다

 

사내는 젓가락을 든다

떡진 머리칼이 곤두서고

면발이 들어온다

금은방 문이 열렸다 닫히고

그림자 하나가 지켜본다

한 발짝 물러나는 거리의 사람들

신문은 바람에 넘어가고

최저임금이 조정되었다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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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만월 / 김상현

 

길림성 해란 강변이나 한강변 달맞이꽃은 노랗지요

 

면 뽑을 때마다 그들도 분틍타고 기어 나와요

그녀의 젖은 손이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다지고

또 다진 물컹이는 그늘 말이지요

 

골목은 휘청대는 오줌 불러 흥건히 달빛 받아내네요

어둠이야 얼얼한 양파 삼카는 춘장만 하겠어요

손님 어깨에 희번득 묻어오는 달빛만 있어주면 되겠죠

그녀는 수십 개의 노란 달 조각을 건져 올리고

밤하늘을 한 숟갈 찍어 양파 옆 칸에 털어내지요, 툭!

그녀가 담아온 면발 모락모락 이는 김은

땡볕에 데인 손님 양 입술 끝을 잡아 올리네요

밤개 꽃 피우고 아침이면 시들어야 할 그녀는 꽃물 들여요

볶음밥 위에 계란프라이도 꽃물 들이고

짬뽕에서 건져 나오는 면발들도 노란 꽃물 들이고

짜장면도 달맞이꽃물 들었는 걸요

심야 중국집 짜우동 간판 아래 사람들은 뜸하게 오고

취해 오고 취해 나가고

염병할 옌볜 조석족이라는 소문에 단골마저 끊겨서는

양파 까는 재채기에 주방의 거미줄이 흔들리네요

돈궤 가득 채운 춘장 같은 어둠에 한 방울 이슬 떨구고

그녀가 키우는 달맞이꽃은 달빛 밖 어둠 길어다 먹고요

자고 일어나면 왜 그리 붓는 겐지 누런 얼굴만 넓어가네요

 

선술집 뒷골목에는 짜우자우 짜우동이 있고요

문 미는 뜸한 손님들이 있고요

프라이팬 속 춤추는 밥알들이 젖은 앵파와 등 두드리며

달맞이꽃으로 피어나는 기적이 있고요

툽툽한 얼굴 노르랑노르랑 익어가는

그녀가 있어요 한 석 달쯤 늙은 호박 푹 달여 먹을 거라는

부은 만월 말이지요

 

 

 

 

 

 

 

[금상] 꽃불3 / 황재윤

 

남미륵사 갔다가 본 청동대불

관광객 꽉 들어찬 그 안에서 자잘히 몰려있던

해당화들도 구석마다 줄줄줄 환한 얼굴을 내밀었는데요

12층 아파트 높이의 저 대물보다

이 꽃들이 순간, 더 장대해 보였던 건

무슨 연유인지

 

몸 안 가득 쟁이던 눈과 비, 천둥과

햇살, 멧새, 풀벌레 울음까지 자분자분

밀어 올려 솟은 저 자태!

코끝부터 안으로 번지는 이 설법 향기는

하, 마음의 흙밭에 더 튼실한 뿌릴 뻗으란 것인가요

 

나무아미타불, 조산한 스님들 곁에서

내 작열한 두 손 모으게 하는 주문

나무해당화불! 불꽃처럼 재재 퍼지며

망울 펑, 펑 터뜨려 앉으실

이 꽃불들, 허공의 사찰 안에선

적막문이 열리고 또 닫히겠지요

 

대불 옆엔 그래도 대웅전 짓기 한창입니다

뻘뻘 땀 흘리며 오가는 목재들 사이로

12층 높이 가득 올라앉은 마음들, 힘겨워

눈 내리던 청동대불.... 변비처럼 꽉 막혔던

남미륵사, 우루루 빠져나간 마음들 탓에

허리춤이 그만 헐렁해집니다.

 

 

 

 

 

 

 

 

[은상] 어느 요양원 욕실에서는 / 허지영

 

웅크리고 있는 노인의 맨살에

소금꽃이 슬었다

꽃잎 피었다 진 알몸이 고사목 같다

나는 데운 물 부어가며 노인의 몸을 불린다

거울에 피어오르는 솜구름 사이로

먼 바다가 보이고 햇살과 바람 견디며

납작 엎드려 있는 염전이 비친다

이 꽃 피우기까지 노인은 또

얼마나 먼 길 돌아 나왔을까

접질린 발목을 끌고 햇볕에 나가

주름진 꽃잎 긴 숨 쉬다 온 거라 말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려 본 사람은 알겠다

시든 잎사귀같이 핏기 없는 가슴에서

소금꽃 둘둘 벗겨내도

볼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철부지 아들의 타투

더운 물에 붉어진 노인의 생채기에

거품이 피어오른다

소금기를 그대로 물고 울어대는 건

욕조 위로 풀어지는 물안개다

 

 

 

 

 

 

 

[은상] 꽃잎 / 윤여호

 

꽃잎은 가지를 놓을 때 춤을 춘다

겉 붉어 오롯한 날들 처연히 흩어놓고

향기 털어낸 가슴 바람 채워 날은다

단열의 시도 못되고 떨어지는 이 순간

낙화하는 어떤 자잘한 인연이

내 손을 잡고 나풀이려는가

봄 몽우리 채우느라 가시만 키워놓고

거적 없어 못 가린 알몸뿐인데

아직도 꽃잎이 힘겨운 이 순간

잔바람 끌어안고 춤이라도 추어야지

헛물켜다 쪼그라든 나를 보내는

검버섯 핀 꽃대 잔명이라도 시 되게

 

 

 

 

 

 

 

 

 

[동상] 곶감 / 심은정

 

깎인 언덕이 꾸덕구덕 말라가고 있다

어둔 처마 아래 일렬로 불 밝히더니

조도가 낮아질수록 단내는 늘어갔다

늘어가는 것과 늙어가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지

갈 볕에 그을린 주름이 늘어가며

매달린 세월만치 할머니는 점점 어두워졌다

낙타를 몰아 바늘귀를 통과하려 하셨고

순한 눈매의 아들을 아범이라 불렀다

어느 날은 어멈의 붉은 립스틱으로 연지곤지 찍으시곤

먼저 돌아간 신랑 사진 앞에 놓고 꼬꼬재배

할머니 참 고와요, 말씀드렸더니

누군신데 할머니라 부르냐며 되물으셨다

어느 초가을 저녁,

땡감처럼 감이 떨어지신 할머니

그 길로 캄캄해져선

병풍 뒤로 얼른 숨으신 우리 할머니

아아, 당신을 닮아 볼 붉은 얼굴들을

박하분 발라 목기 위에 앉히고서

이 세상 모든 생명의 극락왕생을 위해

동쪽으로, 물렁한 눈물 몇 방울 진설하였다

 

 

 

 

 

 

 

 

[동상] 바닷가 목재소 / 남태현

 

바다를 두툼하게 절개하는 목재소 하나 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버지 기침 소리

담 너머 마을까지 배달된다

생목 찾아 부르튼 군살 긁어낼 때

아버지 생애도 한 꺼풀 벗겨지고

그날 바다 향해 물수제비 놓던 한숨이 수평선까지 갔다가 

메아리 되어 돌아오곤 했었다

문을 열면 살아남기 위해 숨어든

파도 소리가 돌돌 말린 나무 뭉치처럼 굴러 나오고

새콤한 기계 소리 절단된 나무에서 진액처럼 흘러나와

목재소 기둥을 타고 주춧돌에 배어들면

나이테만큼 바다로 배출되는 칼날의 신음

선지피처럼 붉고 따끈하다

대패질한 자리마다 파도가 남긴 흔적

비늘 되어 출렁거리면

톱밥으로 인쇄되는 밑그림이 수북하고

삼켜버린 바다까지 다 비워내고 나면

목재소 부화되는 수풀 한 장이

식목을 막 끝낸 산판처럼 펼쳐진다

 

 

 

 

 

 

 

 

 

[동상] 오세암에서 오는 길 / 심철호

 

물은

수렴동 계곡에 들어서야 고요해졌다

마음에 구르던 돌덩이들

어떤 것은 쪼개 자갈로 만들고

어떤 것은 본래 내 것인 냥 품어

하늘을 담을 수 있는 못이 되었다

 

다섯 살 애기보살 서원이

눈처럼 업을 녹여 길을 만들고

살 오른 얼굴로 봄을 다시 만나듯

 

오세암에서 오는 길

백 개의 못에는

 

줄지도 늘지도 않는

물 그대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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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끄트머리가 아프다 / 김정미

 

끄트머리가 아프다

산목숨 묻어가는 찰나들

새끼품은 어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그것

사라져가는 내 강아지

어찌할까

내가 너이고 싶다

아가야

이제는 좋은 곳으로 가라는 말뿐

그래도 

난 너의 어미였다

사랑해

 

(새월호의 마지막 부분이 물에 잠기는 모습을 보며)

 

 

 

 

 

 

 

 

[은상] 며느리밥풀꽃 / 윤기화

 

단정한 앞가르마

귀엽게 땋아 올린 양 갈래머리

쑥스러운 듯

고개 숙인 하얀 얼굴은

좀처럼 속내를 비추이려하지 않네

 

못 먹어 말라버린 모가지 아래

한숨처럼 내려앉은 옷고름은

이제나 저제나

돌아오실 서방님 기다리다

눈물보자기 되었네

 

 

 

 

 

 

 

[은상] 5월의 담화 / 이천명

 

공장 담벼락의 장미가

점심도 잊은 채

한 번 피었으면 그냥 질 수 있냐고

땀 흘린 몇 마디 쉬고 갈만한

그늘막 하나쯤 결재해야 한다고

붉은 도장 먼저 쾅쾅 찍고는

향기의 벽돌을 쌓아 올리고 있다.

 

 

 

 

 

 

 

 

[동상] 종이꽃 / 박혜균

 

바람을 접는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바람의 뒷길을 따라가며

바람은 돌아와

사선속에 집을 짓는다

 

사선이 엇갈리고

또 다시 선이 접히고

그 속으로 바람은 하염없이 들어가고

휘어지는 꽃잎속에 바람은

끝간 데 없는 아집을 재웠다.

 

 

 

 

 

 

 

[동상] 그늘 / 이명우

 

겨울바람이 여름의 긴 혓바닥에 걸려 있다

바람에 흔들려 그늘이 부풀어 오르고

여름의 무성함에 입맛만 다신다

 

누가 저 땀들을 소복하게 걸어놓았나

여름 햇살에 꽉 물린 필체는 그늘을 풍성하게 살찌우고 있다

 

늦가을 왜 하루살이들의 눈꺼풀을 닫으려고 하는가

공사장 날림먼지를 훌훌 털어낸 바람이 눈을 움켜쥐자

할퀴고 긁힌 상처를 구만리까지 덮으며

눈이 쌓인다

 

누가 공사장 출입구에 문을 걸어놓았나

인부들이 써내려가던 땀의 문장을 눈보라가 마침표를 찍는다

 

칼바람에 허기가 싱싱하게 눕는 밤

허공의 주인처럼 바람이 굴착기처럼 허공을 파헤쳐놓는다

길들이 꿈틀거리다가 휘어지다가 막다른 길로 다다른다

국수 가락처럼 말아놓은 밤이 바람을 후르르 삼킨다

 

누가 허공에 성긴 뺘들을 걸어놓았나

 

백색 깃발을 휘날리며 밤새도록 농성을 하던 눈이

나뭇가지에 고요히 얹혀 있다

일용직노동자들의 걸음을 삼천리까지 묶어놓는다

 

탁 트인 하늘

쇠창살이 흔들흔들 내려오고 있다

모든 사물에 채워진 수갑이 풀리지 않는다

 

 

 

 

 

 

 

[동상] 햇감자 / 장월순

 

김매러 가시다 산고가 터진 어머니

 

거친 손으로  탯줄을 자르고

허기 쌓인 쌀독만 안고 있는 고방

첫 국밥은녹쌀 밥이다

 

삼베치마 끈 허리춤에 질근 꽂아 넣고

마른 미역 함지박에 치대면

뽕나무 가지에 걸려있던 녹슨 호미, 묵은 밭고랑 걱정이 숨차다

 

핏물이 선연한 저녁부은 얼굴로 논밭에 가족 걱정에

어린 햇 감자를 냇물에 헹구면

소쩍새 길길이 울고 있다

 

설익은 새벽 적 달라고 보채면

갓난이 한 손에 안고 강냉이 풀떼기를 너 한번 너도 한번

아이들 잠든 어느 날

 

둥굴레뿌리를 푹 삶아 얼마나 배가 고픈지 환장한 사람처럼

허기를 채웠는데 취해 그만 잠이 들었다

깨어나니 양지골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몸조리는 생각할 수 없고 퍼런 보리이삭을 베어내

가마솥에 볶아 저녁꺼리 준비하는데

온몸에 여주외피 구슬로 달렸다

 

허리가 휘도록 거름을 만들어 씨앗을 뿌린 밭에

새벽같이 일어나 잠 들 때까지 손톱 길 새 없이

산중 농사는 한 순간인들 편치 않으리

객지로 떠난 새끼들

 

끼니는 거르지 말아야 하는데

어머니는 오늘도 뒤란에 정한수 치성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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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파도에 그리는 편지 / 이호근

 

파도가 목구멍 문턱 넘어

솔잎 피죽 가슴 후벼 되돌아갑니다

그게 하루 이틀인가

되돌아가는 파도의 손바닥에

팔십 노모의 안부 몇 자 쥐어 보냅니다

수없이 썼다 썰물로 풀어지는

수평선 너머 흐린 글씨가 언젠가

푸른 이파리 내밀어 지족해협을 건널 것입니다

 

오늘은 우물도 파고 물 한 종지와

소금 절인 솔잎 한 움큼을 씹다

저물녘 햇덩이를 물고 있었습니다

사방 파도 소리와 바람에 맞서 보면

두 눈에 박힌 작은 모래알에서

꽃망울 먼저 드미는 세상사 주렁주렁 듣습니다

 

귀 열어 바람의 속옷을 입어봅니다

부러질 듯 휘청이다 제자리 돌아서는

대숲의 곧은 말씀의 뿌리에 온몸 기울여 싹을 틔워봅니다

 

한번 까스했다가 이내 식어버리는 아랫목보다

불 피지 않아도, 한 겨울 파도가 실컷 누웠다 가도

그대로 푸른 살 돋는 솔잎 댓잎 같은 날이 좋습니다

 

허나, 정쟁의 팽팽한 매듭 같은 들판에 서면

허기진 야생의 풀씨처럼

굳은 땅 속눈 꼿꼿이 뜨는 것을 어찌합니까

내 곧은 말 마디마디는 오늘 밤 푸른 눈 비벼

결코 눕지 않을 것입니다

수천 년 푸른 물빛지어 흐를 것입니다.

기억해주십시오

파도에 씻긴 세모네모 마름모 각진 돌들이 서로

이야기 둥글둥글 굴려 노도 바닷가 걸어갑니다

주름지는 기억의 수평선 위로

, 그날이 괭이갈매기처럼 날아오를 것입니다 어머니!

창 밖 파도 꿰매는 삯바느질 소리가 가랑비처럼 스며드는 밤입니다

 

 

 

- 이호근 시집 <파도에 그리는 편지>(도서출판 도화)

 

파도에 그리는 편지

 

deg.kr

 

 

 

 

 

[금상] 시골 제빵사 / 박응수

 

내 집은 순수하다. 그 어떤 데커레이션도 없다

그저 허름한 나무판대기 위 궁서체 명패가 내가 사는 곳이다

동틀 무렵 집 앞 가로등이 흐릿한 할매 돋보기를 깨끗이 닦고

이슬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일 때

그제애 아버지는 의사 마냥 순백의 가운을 걸치고

순산을 위해 자궁을 따뜻하게 데운다

자궁 옆 가지런히 쌓인 포대 속에서 내 줄기세포를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각 세포마다 수분을 넣고 혈관으로 이음새를 만들면

아버지는 밀대로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린다

 

내 외모는 순전히 그의 의지에 따라 좌우된다

그래서 그는 신이라 불린다

가볍게 손바닥을 쥐어주면 하얀 뭉개구름이 생겨나고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세상을 칠하는 분이 묻어난다

몇 번의 밀대 질과 빠른 손놀림 뒤 나는 자궁 안으로 착상된다

200도씨에서 20분간 인고의 시간을 거치면

그의 불룩한 아랫배 지방덩어리처럼 서서히 부풀어 오른다

출산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밸소리가 울리면

아버지는 분주해진다

하얀 생크림과 향긋한 초코, 딸기 시럽이 내 몸을 감싸고

그렇게, 한 생명의 탄생을 창조한다

 

어느덧 가로등 불빛은 꺼지고

그의 가운은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를 담고 있다

창문을 타고 넘나드는 빛의 떨림에

아버지의 거친 손은 흐느끼며 나를 왈칵 안는다

땅랑딸랑 종소리 울리면

달콤한 하루를 맞이한다

 

 

 

 

 

 

 

 

 

[은상] 까치집 / 문경희

 

저 막막한 허공을 다시없을 반석 삼아

누군가는 집을 짓고 삶을 의탁 했나보다

휘영청, 하늘로 부신, 생을 켜는 집어 등

 

범접 못할 시선 끝에 시렁처럼 걸쳐 놓고

남모르는 온기로 버티어 낸 시간들이

아직도 뜨시게 남아 봄을 적는 풍경 속

 

혼이 떠난 육신처럼 바람살에 위태해도

무념란 시간의 꾸리 촘촘히 되감으며

시리게 푸르던 역사 등피처럼 닦고 있다

 

 

 

 

 

 

 

 

[은상] 낙화 / 윤옥란

 

칠판에서 뼛가루 같은 백묵가루가

내 어깨에 떨어졌다

 

온 몸에 통증이 만발한 두 사람의 이름을 지웠다

삼월의 황매화로 피었던

정끝심이연손김막녀 이름들,

나는 아직도 때맞춰 물을 갈아 주면 향기를 내고

제 색깔의 꽃을 피울 거라 믿었는데 물컹하던 줄기는 꽃잎을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앰뷸런스에 실려 온 찢어진 이파리들,

마지막 예의를 갖출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곡할 자식도 없이 눈을 감는 붉은 눈동자 눈물이 울컥 솟는다 

 

시원한 그늘 밑에서 쉬어가라던 할머니도 밤새 끙끙 앓는

젊은 여자의 신음소리도 날이 새기도 전에

지우개 하나로 수장되었다

 

식물도감에는 없는

새로운 꽃들의 이름을 칠판에 꽂는다

내게 밥이 되고 향기로운 이름이 되는 체온들,

오월의 나무들처럼

칠판이 푸르게 흔들린다

 

 

 

 

 

 

 

 

 

 

[동상] 난지도 / 안민식

 

눈물로

꽃이 핀다는 말이 맞다

적어도 이곳 난지도에서 만큼은,

상처의 뿌리는 어디쯤인가

꽃들의 미소 속에 슬픔이 보인다

너무 기쁠 때 눈물이 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너무 슬플 때 왜 자꾸 헛웃음이 나는지 알 것 같다

 

한숨으로

풀이 자란다는 말이 맞다

적어도 이곳 난지도에서 만큼은,

한없이 바람 불어 흔들려도 

결코 눈물 흘리지 않는 풀들

 

사람들은 억새의 눈부심에만 환호하지

그것이 어느 날의 아픈 손인 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꽃이 가득하면

세상 모두가 행복한 줄 안다

사람들은 풀이 푸르면

어제는 쉬 잊고 내일에만 가슴 부푼다

사람들은 지난 추억은

다 아름답다고 말한다

 

난지도엔

오늘도

꽃이 피고 풀이 자란다

 

 

 

 

 

 

 

 

 

 

[동상] 어머니의 대지 / 장월순

 

김매러 가시다 산고가 시작되면 집으로 돌아오신다

아이를 낳고 당신 손으로 탯줄을 자르고

가난이 쌓인 빈곤의 시절

첫 국밥은 녹살 밥이다

광목 호청 속에 목화송이가 마틀 마틀 돌아다니는

포푸린 천으로 덧씌운 이불 한 채,

한 살 두 살 터울이다 보니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가마솥 굴뚝 연기로 피어오른다

찬바람 불던 날 카시미론 이불 한 채 사오셨다!

콧망울 아려오는 겨울밤 우리들은

장미꽃이 피어있는 정원 속에

꽃사슴이 뛰어노는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밍밍한 아랫목을 따숩게 지키는 속에서

아랫목 차지전쟁이 시작된다

머리가 나오면 지는 놀이라 심한 장난 때문에

문밖에서 벌을 서야 했다

할머니 이불 천으로 만든

옥양목 홑껍데기, 무릎과 팔꿈치는

누비기를 반복해서 유격훈련 전투복 같다

코가 빨개지고 귀가,

떨어질 듯 아려온다

다시는 장난 안친다고 하며

처마 잃은 새떼처럼 수수 알 울음을 쏟아놓는다

서로 얼굴을 보면 반은 웃고 반은 울다 방에 들어가

얼추 몸이 녹으면 또 장난을

오늘도 어머니는 뒤란에 정한수 치성을 드릴 것이다!

 

 

 

 

 

 

 

 

 

 

 

[동상] 거미 / 최광현

 

쪽방 구석구석에 거미줄이 둘러쳐져 있다

나처럼 혼자라서 외로운 줄이다

 

거미줄 틈으로 난 작은 문을 나선다

밖은 또 다른 거미줄이 총총히 자리하고 있다

나처럼 혼자라서 외로운 줄일까

그들도 그리운 날개를 기다린 걸까

 

살아간다는 것은 드러낸다는 것

세상 언저리 쳐 두었던 줄에는

날개 달린 흔적들이 걸려 있다

살아가기 위한 본능

몇 가지는 고르고 아픈 날개를 사라질 때까지 두자

 

시간이 지나면 또 새로운 날개가 들어오겠지

세월이 흐른다고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도 거미줄에는 무수한 날개들이 날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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