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사막화 / 김충만
모래언덕같이 내려앉은 흰 눈들
높다란 선인장들이 황량한 도심 속에 가시처럼 박혀있다
내일은 퍽석한 모래벌판 위가 아니라
촘촘한 유리 창문 속에 들어앉을 수 있을까
실눈으로 창틈의 간극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걸음이 무거운 한겨울 낙타들
불안으로 가득 찬 혹을 등에 업었지만 목만은 빳빳이
세웠다
부푼 기대로 따라가던 앞선 발자국들 어느새 보이질 않고
어제까지 따라오던 하룻길도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비쩍 말라 쩍쩍 갈라진 낭만의 틈새로 자리 잡은 하루
이만 원 못 되는 생활비와 삼십만 원 남짓 월세
두 쪽 난 발굽 사이로 아지랑이는 금세 흩어진다
한낮의 추위를 피해 대학 식당을 찾은 배고픈 낙타들
그 어느 때보다 사막화沙漠化 진행 속도가 빠르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작은 봉오리들, 한 줌 비구름처럼 웅크린 밥을 먹는다
무릎도 모래바람에 긁힌 주름을 먹으며 혹처럼 뭉툭하게
배가 불렀다
밤이 되면 소곤소곤 모래알처럼 속삭이는 별들의 눈
그중 하나처럼 반짝여 보고 싶다고 두 눈썹을 끔뻑거린다
낮은 천장에 적막의 길고 축축한 혀가 내려온다
작고 외로운 입술을 이불처럼 훑는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한 말을 가져간다
침묵만이 말하고 있다
모래 늪같이 가라앉는 사막의 밤
사막의 꽃은
하현달의 눈꺼풀처럼
저무는 법을 먼저 배우는 것이다
사막화沙漠花는 이렇게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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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5월, 이팝나무 / 이규상
따뜻한 밥한공기 먹여서
보낼 것을 그랬다
새벽이 오면
차디찬 손으로
뺨 한번 어루만지지 못할 것을
온기를 밥공기에 담아
먼 길 떠나는 네게 밥심으로
잘가라고 인사라도 할 것을 그랬다
그때부터였을까
어머니는
마당 한구석에
이팝나무를 심기 시작하더니
오월이면
보이는 땅한뼘이라도
배고픈 그 나무를
뜨거운 눈물로 꽃피우셨다.
싸래기같은 그 꽃이 지면
바람에 훨훨
산너머까지 밥짓는 연기처럼 흘러가
논두렁에 바짓가랑이 적시며
놀던 개구쟁이 아들을
다시 불러 주길 바랐다
다시 오월이 오고
어머니는
이팝나무가 되어
볍씨같은 꽃잎과 함께
어린 아들을
부르러 산너머로
흩어져 갔다.
쌀밥보다 따뜻했던
오월, 이팝나무는
마당 한가득
밥짓는 열기로
여름을 불러온다.
[은상] 물밥 / 강경순
물을 드시는지 밥을 드시는지 어머니는 부엌에 서서
휘휘 밥 한 술 풀은 대접에 얼굴을 묻고는
숟갈을 쥔 채로 후루룩 밥을 드신다 아침을 마신다
훌훌 넘기는 밥, 숟갈이 무슨 소용이랴
둘러앉은 자식들 숟가락에 반찬 얹으시곤
살며시 물러나 앉으셨지
어찌 맛난 것을 모르고 배고픈 줄 모르시랴
자식들 입에만 넣어 주시며 그저 흐뭇해 하셨지
피어오르는 향냄새에 자분자분 어머니가 걸어오신다
나물 반찬도 아끼시느라 못 드신 어머니께 수저를 올린다
낡은 스웨터처럼 끼니 걱정에 구멍 숭숭 뚫린 마음을 깁던
한평생 밥상을 차리며 모서리조차 앉지 않으셨던 어머니께
일 년에 한 번 차려 드리는 밥상
당신의 기일마저도 물밥을 드시는 어머니
이젠 숟가락으로 소고기 국도 떠드시고
발라낸 생선 살도 드시고
생전 못 드신 음식 상 한 가운데 앉아서
울먹이는 내 등을
어머니는 굽은 손으로 가만히 쓰다듬으신다
어미는 아까 많이 먹었다 어여 먹어라
초승달이 처연히 가슴에 와 박히는 어머니의 제삿날
밤바람이 자못 시린 날이다
[동상] 까막눈 / 김형성
아버지 눈에 눈이 내렸다.
무릎이 닳아 너덜해진,
수 번은 덧댄 작업복이 정갈히 걸려있다
삶의 궤적은 입꼬리 따라 행복을 그리는데,
아버지의 입꼬리 끝엔
커가는 새끼의 암팡진 몸이라도 매달려 있는가
낮에도 밤을 품은,
어둠이 지나쳐 글조차 담을 수 없던
잿빛 도료 가득 머금은 우주
고개 하나 넘으면 고개 하나 꺾이던 시절
몽당연필 값 세멘보다 무거워
배운 것은 삐뚤빼뚤 나뭇가지로 쓴 이름 석 자
내 눈물을 돋보기 삼아
어릿어릿 읽어내린 글자, 백내장
세월이 아버지의 눈에 눈을 내렸다
생의 무게 둘러메고 오르내렸던 삶의 계단들
이제는 문턱도 홀로 넘지 못해
앙상한 겨울나무가 되어버린 아버지
지문 지워진 손끝처럼 맨들맨들한 골방의 문지방
서글퍼진 나는 밖으로 나서는데
아버지 눈에 내렸던 것, 내 정수리 위로 툭- 툭
차고 시린 것 멎는 날 오면
기어코 나는 까막눈 당신과
새 계절 하나 둘 찬찬히 읽으러 가리
[동상] 인력시장 김씨 / 양동진
먼동 어스름 활활 타오르는 드럼통 난로 가에
뒷짐 지며 둥그렇게 서있는 그림자들
잠과 피로의 사이, 오도 가도 못하는 눈꺼풀처럼
엉거주춤한 기다림이 웅성거린다.
가끔 불티가 정적을 깨뜨려도
호명하는 이름에 토끼처럼 귀를 세우고
아무도 말을 쉽게 던지지 않는 적막
침묵을 오글거리며
이글거리는 꽃불에 시선을 쏟아 넣는다.
사람들은 바람에 불려가는 낙엽처럼
어디론가 떠나는데
마지막 부름은 끝내 오지 않고
꺼져가는 불쏘시개처럼 가버렸다
선택받지 못한 누추한 안전화는
빈속을 훑는 갈퀴 같은
날선 하루의 쓰라림 안고
진공청소기처럼 부르르 떨면서 간다.
날품팔이 연명하는 쪽방 속에
덕지덕지 붉은 경고장
찌든 생활고는 점점 달아올라 발화점에 다다르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울음처럼
먹먹한 심장이 덜컹거린다.
잉걸불처럼 타오를 그의 불꽃은
잠시 잿더미 속에
숨을 멈추고 웅크리고 있다
내일 새벽의 간택을
간절한 목숨처럼 기다린다
[동상] 신발의 재발견 / 이정원
1.
신은 완성되지 않았고, 발은 여전히 자라고 있었다
벌어진 생각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모아져 갔다
신이 언제부터 발의 보호대가 되었을까
신의 품질보증서는 발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과 발의 관계성과 유용성에 대하여
증명하려 노력했지만 의존성을 찾아내는데 그쳤다
신은 무슨 색일까
레드, 그린, 블루, 블랙, 화이트...
또 발은 무슨 색일까
신의 색에 발을 맞추는 것이 옳을까
발의 색에 신을 맞추는 것이 좋을까
난해한 철학적 질문은 유보하지만
오랫동안 바라보고 가까이 하면 색과 모양이 바뀔 것 같
은 예감이 든다
2.
토방으로 나가 마루밑에서 오래된 신발 하나를 꺼냈다
그가 들어 올려진다
그의 흔적들이 들어 올려진다
찢어진 그의 신이 올려진다
신발 바닥을 돋보기로 확대해 보았다
신발 앞쪽 어두운 곳에 숨어있던 알들이 발각되었다
저 알들은 지금껏 무엇을 먹고 살아 왔을까
떠나버린 그의 흔적이
마음를 마구 휘젓다가 발까지 내려가
먹이가 되었을까
아니면
늘어진 넥타이를 매고 이리저리 일자리를 찾아 굴러다니느라 맺힌
발바닥의 혈흔이 먹이로 변했을까
그는 신발을 부여안고 꺼억꺼억 울어댄다
3.
배율을 높이자 알속에서는
일곱 살 소년이 아버지의 상여를 절룩거리며 따라가고 있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동상] 억새 / 전경호
떠받치는 공간 보다 밀려간 날이 잦은
수평선에 걸려도
바람을 잡으며 단단해지는 자성自省
눕지 않는 뒤축에 탄성을 키운다
측편으로 휘갈기는 운율에 벼려지는 기울기
홀로 바람의 악보를 필사하며
숨 가쁜 몸살을 부린다
한쪽 어깨로 다른 어깨를 지탱하며
온몸으로 고요를 잠재우고
허공 절편을 맞추며
무언가를 읽는 중일까?
거침없이 끄덕이는 생의 표본
바닥의 고집을 흔들고 있다
갯내를 가까이
공중을 더 가까이
바람 품어 풍문으로
갯내 품어 향내로
천공의 획을 그은 세월
어디쯤 가닿을 수 있을까
넘어가다 일어선 표정에
샛길이 비치면
질펀한 낯빛이 달랐다
밭은 숨
몰려드는 생각에
억세게, 나래짓한다
중력을 놓친 공간에는
궁극으로
머무르지 못하는, 빼곡한 요란搖亂들
언제쯤 정박할 수 있을까
[심사평]
시는 화자의 소재가 무엇이든 화자의 거울이다.
제42회 근로자문화예술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제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제이어서 많은 작품이 왔고 작품의 수준도 시원하다.
시詩<사막화>는 현실과 도시 속에서 만나는 사막화, 화자 자신의 현실과 꿈에서의 자세를 화목으로 간다. 타자의 관점인 표현으로 시는 존재에 대한 내밀한 이미지를 시적 은유 세계로 간다. 현실을 넘어서 꿈을 확인하는 플롯이나 전개가 머뭇거리지 않고 싱싱해서 시의 힘을 보여준다. 꿈과 이상은 투명한 빛의 유리성이지만 현실은 갈라진 발굽 사이로 흩어진 아지랑이의 봄으로 잡히지 않는다는 시詩<사막화>는 자신의 실제 환경과 도시 속의 불안감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절망의 일상화는 상상력의 꽃으로 시의 키를 키운다. ‘불안으로 가득 찬 혹을 등에 업었지만 목만은 빳빳이 세웠다’ 전망이 전제된 시이다.
시<5월, 이팝나무>는 어머니 사랑이다. 시는 내용 전개가 산뜻하다. 띄어쓰기가 몇 번쯤 문제가 있지만 시는 수준이다. 시<물밥>, 세상에서 가장 쓰기 어려운 시가 어머니를 소재로 쓰는 시라고 한다. 어머니의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시이다. 그러나 어머니 시에도 나는 들어갈 틈이 있어야 한다. 시의 주인은 어머니가 아닌 나이기 때문이다.
시<까막눈>의 시작이 아버지의 역사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는 돌고 돌다가 역전을 한 화자의 눈엔 모든 게 아름다워 보인다. 역전을 한 자의 수확이다. 역전을 못 했다면 아버지의 과거는 누더기뿐 이리라. 시<인력시장 김씨>는 매일 하루하루 품팔이를 하는 사람 매매시장이다. 사람도 근로 조건도 매매 대상이 되어 갑의 선택에 꼬리를 흔들고 따라가는 슬픔이다. <신발의 재발견>시는 신神과 신발을 그린다. 신은 신의 의미와 신발 의미로 중의적 의미, 시의 영역을 넓게 한다. 신이 질주의 본능을 숨긴 채 거친 숨을 쉬는 신발을 그린다. 마루 밑에서 들어 올린 신발에 그의 영적 은밀이 감추어져 있음을 감지한다.
<억새>시는 중심의 중력을 그린다. 싱싱한 언어의 집합이어야 하는 문제도 있다. 시는 화자의 소재가 무엇이든 화자의 거울이다.
- 심사위원 박남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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