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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정리해고 / 김종찬

 

사철 푸르기만 한 쥐똥나무

가을이 되자 줄기와 잎이 무성해진다

사내가 전기톱을 들고

나무의 가지와 목을 쳐 내려고 한다

나무들은 타워크레인으로

몇몇은 장갑을 벗고 공구를 팽개친다

회사의 울타리가 되어 준

나무들의 키를 한순간에 낮추려 한다

키를 30센티를 낮추면

30퍼센트 이상 순이익이 생긴다는 회사 측

반발하는 나무들의 뺏빽한 스크럼이

배수의 진을 친다

쥐꼬리만한 급여에도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줄기와 잎을 키우며 회사의 울타리 역할을

충실히 해냈던 나무들

보도블럭 위에는 웃자란 가지와 목이 뒹굴고 있다

바닥에 떨어진 흰 꽃을 사내가 밟고 간다

짓이겨진 꽃 냄새를 바람이 안고 부르르 몸을 떤다

 

톱바람에서 한발 비켜선 나무들은

저마다 쥐똥 같은 눈물을 달고 있다

단단하고 까만

 

 

 

 

 

 

 

[은상] 빈 집 / 남태현

 

문풍지 사이로 가난이 샌다

마당 한족 유산한 유물

탯줄 자른 두레박에는 야윈 집 한 채 웅크려 있고

낮잠 밀린 마루 달게 잔 기억까지

훅하고 불어 내면 어머니 인기척 빠져나온다

잉크처럼 번지는 가난이 싫어 훌쩍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고 싶었던 그때

지붕까지 자라나는 배고픔이 내 키를 누를 때마다

새파란 양심으로 가출을 키웠던 그 집으로

고소한 햇빛이 마루 끝까지 밀려와

유년의 수위만큼 복사된다

누적된 그리움이 시렁에서 나오고

어머니 잔소리만큼 쌓인 먼지 툭툭 털어 내면

건넛방 아버지 영혼이 필사된 영정 사진에서

오래된 가난이 뭉툭하게 떨어진다

굴뚝으로 저녁을 먹는 연기

가마솥에 쇠죽 쑤는 송아지

어머니 온기 빠진 그 집에

귀뚜라미 소리 묵힌 담 너머로 부름이 온다

나를 닮은 아버지

기침 소리 도배된 방을 나와 옆집으로 건너가신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조문을 간다

 

 

 

 

 

 

 

 

[은상] 열리지 않는 문 / 남호순

 

무너진 담장 너머 발을 들이며

헛기침으로 인기척한다

폐업된 공장 입구는 빚 받으러 온 사람에게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마당 귀퉁이를 놓고 영역 싸움이 한창인 이끼와 잡초는

한 자리씩 진급하려던 상사들로 보이고

허공을 죽 찢어 오르려던 칡넝쿨은

의욕에 앞서 잎으로 틈새 메우는

젊은 용접공의 파란 불꽃으로 보인다

연기의 살랑거림이 귓속말처럼 피어올라도

소문으로 퍼지기도 한 생산 현장,

어둠에 감전되어 멍하게 있는 형광등은

거미 사슬에 돌돌 말린 기억이다

스위치를 켜면 확,

빛의 파편처럼 흩어졌던 사람들이 달려와 저마다 불빛을 발산할 것인데

그들은 한쪽을 검게 멍들이고 다른 한쪽으로

흐릿한 감도를 조절하며 일자리를 찾고 있다

그들 손에 기술을 습득했던 공구들만이 제 역할을 잊은 채

사방 퍼질러 기다릴 뿐, 녹슬어 가는 삶의 무게가 무겁기만 하다

 

바람이 창문 갉아먹는 소리에

먼지 부스러기들이 햇살을 글어들인다

드리워진 그림자는 밀린 월급에 배고 푼 이들의 얼룩이다

얼룩진 신음 듣지 못하는

정문 악물고 있는 자물쇠의 힘,

절제되지 않은 잔업 일보처럼 긴 기다림은

수당 없는 잔업 시간이다

 

속 타는 벚꽃이 황당 당황 진저리치며 지고 있다

 

 

 

 

 

 

 

 

 

 

[동상] 손톱 / 김면수

 

손에 핀 달빛을 잘라 낸다

속손톱 어딘가에 내 어머니 푸른 초원이 있을 것 같아

손가락 끝 마디마디 돌며 초침 아래 세운 빛의 조각들

째깍째깍

엄지손가락에서 상현달이 뜨고 새끼손가락에서 그믐달이 뜬다

열 달 이름 속에 스민 유년의 추억이 빛을 겨워 낸

빈터마다 선홍빛으로 다시 살고

어머니 그 따스한 숨결에 밀려, 단 한 번도 피지 못한 채

사그라지던 손톱 생채기

오늘도 기우는 달빛으로 와 열 손가락 끝에서 영근 달이 되면

 

내가 잘라낸 손톱을 딛고 그대 그 젊은 여인 오롯이 서 있다

 

 

 

 

 

 

 

 

[동상] 별자리 정비소 / 김민철

 

철거를 앞둔 미아 지구 재개발 현장에도

마을버스 노선이 있죠

두 가닥의 레일이 아닌

푸릉푸릉 콧김을 뿜고 있는 작은 돛배죠

짤랑거리는 입금 통은 언젠 가벼워

제비 새끼처럼 쫑알거리고요

예전에 데리고 오던 항로를 종종 잃어버려요

이 돛배는 짤랑거리는 소리를 좋아하죠

이따금 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솟구쳤다가 내려오는 파도의 이랑을 삼키죠

물결무늬처럼 달리는 돛배가 버스 정류정에

설 때마다 간판은 귀를 열고 먼 시간을 엿보죠

반환점을 돌 때마다 불빛 없는 집들이

그 소리가 너무 반가워 등불을 켜기도 해요

길처럼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돛배,

그때마다 나른한 여름 저녁의 별이 마중 나와요

봉제 공장의 언덕으로 심부름 나온 바람과

막걸리 한잔 걸친 달빛을 태우고 우주로 가죠

당신의 마음 속에는 마을버스 노선이 있나요?

별자리 정류장을 지날 때마다 지상의 외딴 마을이

금성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걸 아나요?

별똥별 노는 은하수를 가로질러 가

빈 마을버스의 재생 타이어 같은 행성을 툭툭 차 봐요

빛이 꽃피는 별자리 정비소에도

때 절은 목장갑을 낀 정비사가 있고요

별의 눈망을처럼 지워졌다가 사라지는 노선이 있죠

나는 오늘도 작은 돛배를 타고 우주로 날아가죠

 

 

 

 

 

 

 

 

 

 

[동상] 그림자를 업다 / 박성우

 

아버지의 얇고 긴 그림자가 

작음 그림자 하나를 업고 내를 건너고 있다

물결에 살랑 작은 그림자자 흔들리자

긴 그림자는 애윈 두 손으로 탁탁

몸을 추스르며 다시 제자리를 찾고 있다

순간 나는

바람이 지나는 뒤란을

말없이 지켜보시던 어머니를 생각하였다

다시 수저를 놓으며

스르르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날의 저녁 풍경을 생각하였다

긴 그림자는 저 야윈 두 손으로

세월도 저렇게 다독였을 것이다

어린 동생의 길었던 병원비며

입술이 파랗게 물든 어머니의 야윈 얼굴이며

끝내 내려놓지 못한 그 많은 슬픔들을

야윈 두 손으로 저렇게 다독이며 건넜을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깊은 골에서 

뿌리째 흔들리며 무너져 내릴 때

길을 내고

불을 밝히고

향기 짗은 꽃그늘 아래에

우리들의 지친 몸을 누이며

괜찮다 괜찮다

몇 번이고 가슴을 슬어내렸을 것이다

 

아버지의 얇고 긴 그림자 하나가 나를 업고

말없이 내를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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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매바위 전설 / 방승길

        - 제부도에서

 

발길 돌리지 않겠다

빈 갯벌에 홀로 서서

저 일몰 바다를 향해

미어지는 가슴 열어두겠다

 

바다는 나를 가만두지 않고

매 발톱처럼 움키며 파고들지만

휘청거리지 않겠다, 나는

여기가 내 자리임을 알기 때문에

 

자꾸만 깎여나가는 내 몸뚱아리

굳은살처럼 풀어지면서

내 그림자 밑으로 다가앉는 푸석들

 

내 전생은 더돌이 얼바람둥이

불과 얼음의 형벌을 받고 바위가 되어

매들이 짝지어 보금자리 꾸몄을 때는

제법 날개짓 하듯 푸득거릴 줄도 알았었는데

 

매들이 떠나버린 어느 날부터

침묵만이 가장 뜨거운 외침이라는 걸

고독만이 바다와 맞서는 힘이라는 걸

몸으로 알기까지 나는 너무 외로웠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찾아와

내 모습에서 제가금 보고 싶은 걸 담아가곤 했다

 

바다에 와서

바다의 몸짓으로 출렁이는 사람들

바다의 일몰처럼 붉게 타오르고 싶은 사람들

제가끔 모자라는 가슴을 채우고 돌아간 뒤

 

내가 또 홀로 어둠 속에 섰을 때

 

내 주름살 속으로 파고들어 내 살 저며내는

파도와 바람과 염분은 차라리

얼마나 눈물겹도록 시원한 통증인 것이냐

 

저 푸석돌 내 살점 아니랄가봐

얼바람둥이 옛 끼를 살려

파도에 밀리는 척

모시조개를 툭, 치며 작업을 걸고 있다

 

 

 

 

 

 

 

[은상] 미옥 씨 야근 일기 / 이승우

 

메운 숨을 들이마시며 궁시렁대는 환풍기가

연기를 밖으로 토하며 멀미를 한다. 그 아래엔

납땜할 전자 부품들과 구석으로는

인두공의 잦은 빈혈의 조각처럼 납품할 제품들이 쌓여 있고

허술한 맨살을 밟고 가는 연기가 바퀴벌레처럼 스멀댄다

 

가끔은 일탈을 꿈구며

바람 한줄금에도 깔갈대던 미옥 씨,

땜 작업의 감정으로 퇴색되어 깃판을 무덤덤히 살핀다

완장 찬 사내는 공장을 어슬렁 돌며

서슬 퍼런 혀 안에서 아줌마들을 쏘아댄다

처진 눈꺼풀을 썰어내며 미옥 씨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여자는 첫 팬티를 잘 벗어야 돼, 첫 팬티를'

 

그는 비전이 없는

과거로 눅눅하게 돌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자신의 미래를 손금으로 펴본다

 

며칠 전 미옥 씨가 납댐하는 인두에

손바닥 3도 화상을 입는 일이 있었다

인두를 플러그에 꽂아둔 채 졸았기 때문이다

그 후 거울을 보듯 감시가 심해졌다

아줌마들의 입에서는 야근을 하지 말자는 말이

호적도 없는 새벽 안개처럼 부풀어 갔지만

목구멍이란 처절하고 질긴 외길,

재래시장 만 원자리 상품권 세장, 입들을 다독거려

공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창문 찾아 오래 걸린 조각 달만 칭얼거린다

 

지글대는 납 덩어리 같이

흔적만 남은 파마머리 정수리로 드러나는 반백의 미옥 씨,

행여 각질 같은 거친 길 되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찍어온 발자국을 걷어들이며

사십 길에서 오십 길로 납땜을 한다

 

 

 

 

 

 

 

 

[은상] 옹이 속에 어머니를 묻다 / 김면수

 

모관에도 꽃이 핀다

가장 단단한 살짐을 헤인 자리마다

내 어머니의 보드란 젖가슴살 같은

눈빛으로 서 있는

 

하마 

꽃을 심고 돌아오는 낡은 신작로엔

함께 노닌 추억이 우수수 쏟아진다

봄바람에 이는 황사처럼 끝내 개화하는 슬픔을

본다

 

사계절 시계 추마다 초침으로 빛을 발하던

슬픔엔 중력이 없어 더는 가지 못하고 안은

길, 우에 모로 와 깊이 박힌 옹이 하나

 

들리시나요? 어머니!

내 가슴마다 막 피기 시작한 꽃의 노래를

 

 

 

 

 

 

 

 

 

 

 

[동상] 핸드폰 / 한인석

 

핸드폰을

빨래처럼 짜 보니

무수한 번호들이

쏟아진다

 

기분 좋은 번호와

언짢은 번호가

뒤엉켜

작은 모래성을 만든다

 

긴긴 세월만큼이나

오래된 번호에 애착을

설레이는 얼굴이

오버랩으로 대신한다

 

익숙한 목소리들이 항상 나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주지만

뢘지 모르게 아쉽다

 

내 유년의 추억을

든든한 기억으로 재생해

오늘밤은

머언 세상에 계신 어머니와

통화를 하련다

 

 

 

 

 

 

 

 

 

 

 

 

[동상] 억새 / 금응종

 

유배지 꽃이 피었다

억새 피는 언덕에 서면

바람의 길 쪽으로 마음이 눕는다

 

억새는 글 솜씨는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처럼

만경창파 한을 품은 억새꽃 서체로

가시처럼 눈을 찔러 와도

글 쓰고 남은 먹물 억새꽃에 뿌려진 유배지

학문의 분노는 맹렬하였다

머리 하얘지도록

억새꽃은 늘 그리운 쪽으로 날리다가도

꼭 한번은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

 

파도가 절벽을 후벼파듯

없는 아이 소풍 돌아오듯

새들을 그 가지에서 떠나게 하고

바람을 사신으로 삼아도

바람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고개 숙여 잘못을 비는

그의 기도로 들판을 잠재우고 있다

 

 

 

 

 

 

 

 

 

 

 

 

[동상] 헌화가 / 리규상

 

꽃이 피려나 보다

한참을 보고 있을 땐

미동조차 하지 않더니

여린 잎사귀에 잠시 눈길이 가 있는 사이

꽃봉오리 움찔거린다

그 하늘거림보다

향기가 먼저 터져나온다

 

꽃이 되려나 보다

들판에 아무 이름없이 버려져

잡초라 불리던 내 작은 꽃송이가

당신을 만나 꽃이 되려나보다

내 앞에 아무렇지 않게

쪼그려 앉아 사랑을 이슬ㅊ처럼 내려주던

당신 때문에라도

꽃이 되어야 하나 보다

 

꽃으로 피어 웃을 때마다

같이 흔들리고

눈들 때 꽃봉오리를 열러야 한다

당신 가슴에 깊이 뿌리내리고

몇 년이고 겨울이 와도

숨가뿐 구근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밀어올려

언제든 꽃을 피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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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내 삶은 수평선이 없다 / 안국훈

 

내 바다에는 외로운 섬이 없다

조각배 옆에 도 하나의 배, 그리고 또 하나의 배

끝없는 그리움이다

파도는 삶을 쓰다듬는 은유

물고기가 꿈 찾아 하늘을 날기 위해 

지느러미에 날개 달고 땀방울 뚝뚝 쏟아낸다

바다는 하늘이 되고 하늘이 바다가 되니

가슴은 그리움의 허공이다

 

내 하늘에는 슬픈 별이 없다

산개 옆에 또 하나의 새, 그리고 또 하나의 새

지독한 보고픔이다

구름은 추억 따라 흐르는 세월

땅에서 발을 떼지 않고 땅을 디디려니

가슴속에 그대 위한 꽃밭조차 가구기 힘들구나

꽃씨 하나 삭 틔워 붉은 꽃 피우는데

저 숨결은 꽃잎의 흔들림일까

 

내 삶은 수평선이 없다

편하다고 단추만 누르려 말라

둥둥 허공에서 떠다닐 수 있거늘

가끔은 전원 플러그를 확인해야 한다

서로 존중하고 위로하며 살아도 아쉬운 게

어디 낲익은 봉분 하나뿐이던가

문득 바라본 산 너머 산

산줄기는 늘 그리운 쪽으로 뻗는다

 

 

 

 

 

 

 

[금상] 자동차! 그 아름다운 꽃 / 황의률

 

뜨거운 쇳물 용광로에서 프레스길ㄹ 거쳐

너의 운명은 결장된다고 했다

아픔 속에 탁마되어 잔 부스러기는

압축 고철로 다시 보내지고

너의 몸매는 용접으로 반짝반짝 문질러지고

드디어 페인트로 예쁘게 단장한다고 했다

 

무려 2만 가지 부품으로 이어진 몸체

서로가 만나는 것은 진정 위대하다고 했다

도로를 굴러서 비록 말 못하는

쇳덩이에 불과 할지라도

 

경쾌하게 굴러가는 소리가 거듭할 때

너의 원형은 아름답고 견고해 보이면

너의 위치는 더욱 화려하다고 했다

 

세상을 사는 순간에 이승과 저승이

매번 오르내리는 순간 일지라도

너의 생활은 이기라고 했다

언제나 아름다운 꽃이라고 했다

 

 

 

 

 

 

 

 

[은상] 앉은뱅이 저울 / 봉윤숙

 

나는 다리가 짧고 몸은 가분수다

허리는 없으며 아주 뚱뚱하다

보다 멋진 친구들이 생기면서

내 친구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난 정확하고 예민한 가슴엔 촉수가 있고

빙그르르 회전이 가능하며

당신이 원하는 특별한 날에는

당신의 무게를 측정해 낼 수 있으며

또한 원상회복 능력도 아주 뛰어나다

어느 날 당신이 내게 기대어 왔지

그대가 움직여 온 무게만큼

수직의 힘으로 나는 움직이곤 해

그러나 당신 나에게 온 몸을 맡기진 마

완전한 당신을 받아줄 능력이 없어

내가 그만큼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너무나 완벽한 당신을 난 원하지 않아

그러나 가끔씩 들리는 건 잊지마

마음 한 칸의 값이 얼마인지 궁금할 때

누구에겐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 머리에 올려놓은 그 무게

꼭 그만큼만은 반드시 돌려줄게

 

 

 

 

 

 

 

[은상] 휴일 / 문호곤

 

창밖 뒷산에 쌓인 눈은 어제보다 많이 야위었다

지난밤 눈과 함께 어둡게 쌓여가던 아내와 나의

근심도 휴일 아침 졸음에 야위어간다

 

침대에 귀를 기울이면

아내의 온기를 따라 따뜻한 수맥이 흐른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지만 어느 늪에서 고이는 것이다

 

볕이 들지 않는 신산한 늪지

죄가 없는 새는 더이상 울지 않는다

습윤에 번뜩이는 정막을 헤치고

며칠전 곁을 떠난 동료가

추상처럼 꿈결인 듯 들어서 소스라쳤다 

 

초점없는 그의 눈은 무엇인가 말하는 듯 하는데

귀를 기울이면 늪지 가운데에서 전해온 파문은

어느새 내 눈을 윤색하고

 

파문이 전해올 때마다 휴일의 말랑하고 매그러운 졸음에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친구는 그런데 이 겨울을 잘 나고 있을까

 

토막난 휴일을 맞추면 일상은 내일 다시 찾아오지만

아내여, 창밖에 봄은 아직 지척에 있지 않구나

 

 

 

 

 

 

 

 

 

[동상] 낡은 수레 옆에서 / 김춘희

 

수레바퀴는 굴러가기 위해서 태어난 목숨이다

무거운 눈꺼풀 밀어올리는 아침 해 앞세워

개미 더듬이의 촉각이 예사롭지 않다

무엇인가 채워주길 넌지시 바란ㄴ 빈 박스가 기다린다

주인의 온기 채 가시지 않은 미싱다리

녹슬고 싶지 않아 바람결에 간간히 흔들린다

닳아진 운동화 뒤축 끌고

개미허리로 개미의 검은 눈동자를 가진 

옆집 노인의 폐품 줍는 일이 시작된다

하마입을 하고 버티고 앉아

넣어주는 대로 척척 받아먹는 늙은 수레

취한 듯 스러져 있는 술병을 일으켜 세운다

환하게 웃고 있는 여배우 얼굴이 구겨진다

오 분 전에 내어놓은 밀감 박스

개미 손이 낚아채 갔나 보다 행방이 묘연하다

빈 것들은 이 땅에 발붙일 수 없다는 말인가

잠시 목축이고 하늘 한번 쳐다볼 겨를이 없다

구르지 않으면 삐걱이는 관절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없으니까

낡은 수레바퀴 몸 일으켜 세우며 안간힘이다

 

 

 

 

 

 

 

 

[동상] 곱창집 골목 / 강수덕

 

바짝 달궈진 철판 위를 지글지글 뛰어다니다 보면

너무 익어 밑이 까맣게 타버린 저녁이

움막 같은 곱창집 문을 밀고 들어온다

 

흐린 불빛아래 질긴 내일을 기다리며

연탄화덕에 둘러앉은 사람들

쓴 잔을 부딪치고 다시 채우며

매운 설움 한 가닥 쭉 뽑아 불 위에 올려놓는다

 

미처 통로를 빠져나가지 못한 시간이

어개 토닥이며 익어가고

누렇게 든 희망을 십는 동안

새벽은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간다

 

불에 덴 손가락 환하게 켜들고

불시 죽어가는 하늘에 슬며시 대어보면

확, 불붙는 동녘

 

 

 

 

 

 

 

 

 

[동상] 이런 세상에서 난 살고 싶다 / 이남석

 

이른 아침 앞 뜰

흔들의자에 몸을 얹고

진한 차 향기 내음새 위로

맑게 타오르는 태양 빛에

이슬 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보릿대 모자를 쓴 채

소담스런 밭 언저리 이랑에서

못난 잡초를 골라가며

소채들이 자라는 싱싱함을 보고 싶다

 

정감 있는 광주리에

사랑하는 이가 들고 온

따스한 먹을거리로 속내를 채우고

알맞게 그늘진 풀밭 위에

사랑하는 이의 팔을 배게 삼아

한낮의 꿈을 즐기고 싶다

 

석양이 너울너울 가라앉으면

괭이 호미 들고

담쟁이 넝쿨 우거진 울타리를 지나

사립문도 없는 집에 돌아와

은은하게 자리 잡은

안온함을 맛보고 싶다

 

별빛 아래 풀벌레 울음들과

깊어가는 밤 향기에

하루를 취하게 하고 싶다

 

철따라 오는 기쁨이

생의 하루하루를 살찌우며

내일의 낙을 꿈꾸는

이런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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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가로등이 눕는 길 / 김수구

 

길눈이 어두워지는 날에는

가로등이 굽어 눕는다

눈이 내릴 것 같은 찌뿌등한 밤도

날밤 하얗게 지새우던 철길에서도

가로등은 굽어 있었다

한가위 보름날 숙맥같이 봇짐 지고 달밤을 등질 때도

서늘한 불빛을 부비며

나를 바라보는 파르스름한 눈빛이 굽어 있었다

환하게 웃다가 찡그리다가 겁주는

어두운 골목에서 장승처럼 버텨주던

대설대처럼 곧기만하던 할배 가로등은 가고 없지만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슬픈 것은

이 밤을 홀로 태우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바닥에서 고독을 키우는 일이다

철길에 서서 백발 길게 늘어트리던

동네 어귀 할매 가로등이 뽑혀 상여 지고 가던 날

어머니는 등이 굽어 미라처럼 빠시시 말라있었다

풀밭에 귀뚜라미 소리조차 가을 언덕을 찾아가건만

눈물이 있어도 떳떳이 드러내 보이지 못하는 얼굴

이 세상 어디에다 대놓고 실컷 울 수 있으랴

 

 

 

 

 

 

 

[은상] 옥탑방에 사는 그 노인 / 남태현

 

햇빛이 창틀에 자글자글

파리떼같이 들끓고 있다

일감이 떨어진 지 꽤 오래일거라는

생각이 들 즈음

독촉장, 고지서 이런 것들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겨울 왔다고 부고장처럼 알린다

방 한 켠

노인의 행방이

발 묶인 신문지 활자 속으로 겹겹이 포개져있고

누군가 수소문한 흔적이 도배지에

문신처럼 박혀 있다

 

일감을 구하러

문을 열고 나갔을 때

문틈으로 들어 온 세상의

바람과 함께 돌아 온

그 노인의 옥탑방에

불빛이 들 즈음

나는 어둠을 밀고 나오는

등 굽은 개똥벌레 한 마리 보았다

 

 

 

 

 

 

[은상] 장미꽃의 절정 / 이형철

 

늦은 오후를 구워낸 석앵이 누워있다

핑크빛 가슴이 뭉게뭉게 올라와

몸체 향기 따라서

마음의 살을 섞었다

 

온몸의 물기는 아래로 밀어붙이고

빨갛게 익은 입술을 문지르자

선홍색 부끄러움이 하얗게 피었다

 

나무로 옮겨가던 새 한마리

말없이 화단에 내려와

긴 그림자 숨기고서

촉촉한 사랑까지 가슴에 담는다

 

꽃술에 향기가 베어난 곳

원형의 미끄러운 액체가 스며들 때

통통하고 키가 큰 잠자리는

좔좔 흐르는 물속에

단단한 몸체를 밤개워 담근다

 

 

 

 

 

 

 

 

[동상] 빈 집 / 이미화

 

하기 싫은 이애기가 하고 싶어질 때면

누구나 꼭 한번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떠나온 첫사랑에게 때늦은 사과를 하려는 듯

빗장 걸어둔 문을 서성이다

언젠가 심은 나무의 그림자가 벽을 넘어

발끝에 닿았을 때까지도 몰랐습니다

 

작은 문틈 사이를 비집는 햇살

늘 그 안에 있는 듯 훔쳐보다

먼저 열어 줄 어떤 이를 한참을 기다려 보지만

끝내 하고 싶었던 이야기조차 잃어버리고

두드리지도 못한 채 돌아서는 길

꽃이 진 빈 들녘만이 괜스레 야속하기만 합니다

 

왜 기다리는 것은 더디 오고 서둘러 가는지

도배지 풀물 바진 얼굴 위로

까치발 산행하던 봄꽃은 지고

오래된 도마의 등짝같이 움푹 패인 가슴에는

마르지 않는 빗물만 고입니다

 

그 집에 동거하던 사람들의 문패를 떼어내고

낡은 벽장에 남겨둔 새 한마리마저 날려 보내고서야 알았습니다

꽃은 봄에도 진다는 것을

 

 

 

 

 

 

 

[동상] 이발 / 문호곤

 

양철세숫대야 온천수처럼 뜨뜻미지근한 물이 고이면

할아버지는 살구빛 보자기를 펼쳐 소년의 목에 두릅니다

 

아이의 심장은 붉은 색 달맞이 꽃으로 밤에 다시 피어나 파닥거리고,

낮동안 잠들었던 청각은 할아버지의

물살 젖는 소리를 낚시하듯 숨죽여 따라갑니다

 

졸음에 겨운 소년의 머리가 스삭스삭 가위질의 리듬을 맞춰

연신 아래로 방아를 찧을 때 달빛을 오려내던 가위질 소리에

감나무잎 하나 조용히 잘려나가 소년의 어깨 위에 살며시 내려앉지요

 

커피전문점의 풍만하고 부드러운 생크림마냥 소년의 목덜미에

비누거품이 철퍼덕 발라지고 할아버지의 새치머리를 닮은

낡고 무디어진 면도날이 눈위를 달리는 자전거가 되어

유연하게 길을 만들어 낼 때

 

아이야 잠들었다간 너의 고운 핏방울이 하얀 눌길 위에

향긋한 쑥처럼 돋아날지 모르잖니

 

할아버지, 소년의 머리를 구슬을 빚어내듯

둥글게 둥글게 감겨줄 때 아이는 세숫대야에 머리를 묻고

엄마의 뱃속에서 아늑하고 포근한 양수를 유영하다, 이내 꿈을 꿉니다

 

비눗방울을 머금고 다시 태어난 아이 할아버질 보며 생긋 웃네요

 

 

 

 

 

 

 

[동상] 막차, 잠의 구간 / 이종숙

 

사내가 졸고 있다 핸들이 사내의 손아귀에서 풀려나간다 풀려나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사내는 지구처럼 오래된 핸들을 굴려 예까지 오느라 지쳐있다 이마에 주름 길을 내며 사람들을 실어 날랐을 노역의 구간, 수백 마리의 잠떼들이 버스 안으로 몰려든다 잠떼들의 날개가 사내의 속눈썹에 엉겨붙는다 사내의 눈썹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잠을 쫓아내느라 사내는 고개를 힘차게 흔든다 잠깐 동안, 사내에게 엉겨 붙었던 잠떼들이 파닥거리며 날아오른다 날아오르자마자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날개들, 순식간에 의식을 쪼아 먹느라 사방이 조용해진다 차창 밖으로 잠 보다 깊게 박힌 벼들, 버스 안의 몇몇 승객들이 사내 보다 먼저 잠 속으로 침몰한다 사내의 버스는 포박당한 듯 잠 길을 운행하고 있다 천근 무게로 내려 앉는 사내의 속 눈썹 같은 달빛, 경계를 넘어 어둠 깊이 닿았던 사내의 핸들 안에 갇혀 나는 순식간에 포로가 된다 낯선 사내가 송두리째 내 인생을 몰고간다 깜박 잠 속으로 침몰할지 모르는 막차 안에서 사내보다 먼저 눈꺼풀이 내려앉는 아찔한 밤, 내 안에서 올라오는 달콤한 죽음의 냄새, 버스는 구간마다 잠들을 쏟아놓고 경계를 넘나들며 가속도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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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그 해 겨울, 우리가 찾아 헤맨 과녁은 / 허남훈

 

서툰 한국말로 가족, 이라고 형이 말했을 때

술잔은 이미 넘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손을 거둘 수 없었다

가지는 없고 옹이만 남은 겨울의 끝

형의 손가락은 변압기 공장 어느 구석에 플러그처럼 꽂혔있을까

주머니 속에 움켜쥔 주먹은 더 작아져

어제 도망간 사장의 멱살을 잡아끌 기운도 없는데

누렇게 변색된 사진을 꺼내 보이며

소리 없이 웃는 그 표정이 싫어

형은 이제 버려진 거라고

여기에 남을 수도, 떠날 수도 없지 않느냐고

금방 후회할 말을 뱉어버린다

실내포장마차 낡은 백열등 아래

미아 찾기 전단지의 흐릿한 미소만이 떠다니는 밤

가족을 위해 더욱 한국인이 되어야 했던 형은

눈이 그치면 언제 축구나 하자며

내 어깨를 짚고 일어선다

그 텅 빈 손을 잡고서

아프가니스탄 카불 스타디움에서 어제

24년만에 FIFA 공식 경기가 열렸노라는 기사는

끝내 전해주지 못했다

 

 

 

 

 

 

 

[금상] 붉은 손톱 위로 내리는 눈 / 신민철

 

손을 펴 보면

피로 얼룩진 손톱처럼

잊힌 듯이 눌려 있다가도

어느 틈엔가

살을 비집고 나오는 거대한 몸부림

그 붉은 광주와 마주 치곤 한다

 

잔뜩 붉어진 꽃잎을 던지며

아듯히

두 손 가득 눈이 내린다

지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견고한 뱍을 뚫고 흐르는 손금

5월의 광장은 

당시 가슴 날리던 총성과

눈물처럼 쏟아진 최루탄의 최후를 기억한다

포탄을 받으면 받은 만큼

광주는 무덤을 올렸다, 무덤가 지칠 줄 모르게

엉켜 버린 띠가 증거하는 건

실핏줄처럼 터져 버릴 그리움이다

손으로 날카롭게 베어드는 내 그리운 영혼들이다

청춘은 넓은 잎을 잠시

앉았다 가는 푸른 상처지만

보라 후끈거리는 열기를

무덤가로 더운 입김을 내는 끈질긴 생명을

광주는 그저 숨 쉬고 싶은 거다. 다시는

 

연하디 연한 속살 베이지 않도록

갑옷 같은 손톱을 덮어쓰는 거다

부패된 어둠을 밝히며 붉은 꽃은

탄환 맞은 상처로 흐르고

환생의 무덤 위로 잦아든 야생의 빛

비상은 꿈꾸는 게 아니라

길이 되어 준 시간을 밟고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것이다

 

난무하는 시간은 땅위의 모든 것을 쓸어버렸지만

난 보고 있다, 두 손 가득

겨우내 긴 숨을 생명의 입술로

푸-

터트리는 꽃의 숨결을

 

세상을 가늠해 보는 손짓이

무덤 가가이서 흔들리고 있다

손가락에 각인된 붉은 손톱

손때 하나 타지 않은

12월 내 광장 위로 눈이 내린다

 

 

 

 

 

 

[은상] 11월의 오솔길 / 윤영기

 

새벽 어스름에 오솔길을 걸어갑니다

축축한 공기 속에 잠이 덜 깬 나무들은

밤새 발밑에 잎들을 수북이 쌓아놓았습니다

단풍나무는 빨갛고 노란 작은 손바닥으로

촉촉한 바닥을 쓸어보고

플라타너스도, 후박나무도 커다란 손으로

햇볕도 이슬도 더 많이 받으려고

이제는 욕심부리지 않겠다고

뼈 드러난 손등로 하얗게 널려 있습니다

 

가을의 첫 햇살이 이마에 닿았을 때

나무들은 이미 알았습니다

잎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버리지 않으면 얼룩진 손들을 매달고

찬바람 속에 수치스럽게 서 이ㅛ어야 한다는 것을

한겨울 지낼 곤충들의 이불도 될 수 없고

봄을 위한 밑거름도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가 먼저 잎을 다 떨구는지 내기라도 하듯

툭툭 잎 던지는 소리 한가득 11월의 새벽

엉킨 숨소리 고르며 오솔길을 따라가면

작은 것 하나 버리지 못하는

제 마음에도 어느새 평화가 고여 옵니다

 

 

 

 

 

 

[은상] 며느리밥풀 꽃 / 박함규

 

바람이 건넨

슬픔 빛 언어

 

며느리밥풀 꽃

치마폭 햇살에

 

앙상한 세월 담그며

온종일 비탈진 밭을 허기로 메고 있다

 

서러움 꼬옥

묶은 허리띠

 

조여 매며

굽이굽이 목이 지던

뒤척이며 잠들던 꽃

한평생 인고의 눈물 새김질 하는 생애

 

몽긋이 매달린 사랑

시리도록 환하다

 

말라버린 눈물에

수줍도록 피어나

 

어머니 가난한 뒤란 물들이던 며느리밥풀 꽃

 

 

 

 

 

 

[동상] 고향의 추억 / 이병희

 

토끼재* 가는 길

찰나를 거꾸로 되돌린다

 

흔들리며 다가오는 기적소리

허공에 시간을 풀어 놓는다

 

추억들은 조롱박처럼 매달리어

세월은 바람에 흔들리고

 

직선으로 다가와서

유유히 곡선으로 떠나가는

 

논두렁 배암 생각에

온몸이 허물을 벗는다

 

메뚜기 놀던 자리에

하늘 그림자 내려 앉고

 

새들은 부지런히

삶을 조각하고 있다

 

한일지를 수 놓으며

가슴 속에 불을 지른다

 

알랑산 넘어온 구름은

미내다리 건너면서 바빠지고

 

아버지 머리 위에선

들꽃들이 춤을 추고 있다

 

참다운 행복은

아버지의 그 평범한

 

이웃을 위하는 마음

그냥 그 삶 속에 있음을

 

거짓없는 순박한

그 웃음 속에 있음을

 

길섶의 할미꽃들이

고개 숙여 읊조리고

 

한 마리 파랑새의 비행

둥글게 둥글게

 

거품 흘리는 황소의

수레바퀴처럼

 

 

* 토끼재 : 충남 논산시 은진면 방축리 4구의 마을 고유 이름

 

 

 

 

 

 

 

[동상] 어머니의 남해바다 / 이형철

 

1

주름깊은 얼굴에서 늙은 아침을 구워보낸

어머니의 남해바다가 택배로 보내졌다

매번 시키지도 않았던 돌출행동의 어머니

 

단단하게 묶인 끈에는 무슨 방식이 있으랴 했건만

옆에서 보다 못한 아내가 끈을 잘라야 한다며

급하게 부엌칼을 내민다

 

나는 고집스럽게 내가 꼭 풀고야 말겠다며

옹이 매듭이 어머니의

암호가 이어져있음을 알고서 그 끈을 쉽게 풀어버리자

아내는 멍하니 칼날을 쳐다본다

 

2

비린내가 풍기는 라면상자 안에는

세월의 검은 버섯같은 어머니 얼굴도 피어있고

수평선처럼 반짝반짝 빛나던 그 바다의 햇살도

고운 햇살처럼 널려져 있다

 

손목을 둥그렇게 흔들거리며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

생선비늘처럼 반짝이는 남해바다의 철벅거림

 

간간함이 뿌려진 생선의 뱃살과 아가미

가라픈 파도에 푸드덕거리는 표정과

싱싱한 횟감이 가슴에서 출렁거렸다

 

라면이란 글자가 거꾸로 씌어진 택배박스

남해바다의 풍경이 들어 올려졌다가

소리없이 내려앉는다

 

 

 

 

 

 

 

 

[동상] 봄나들이 / 문경철

 

울안 나무들이

안개의 면사포를 하늘로 날리고

알몸의 비명을 질러대는 휴일

밀린 작업복을 세탁하던 아내는

눈처럼 내릴 벚꽃의 안부를 되묻고

아이들 둥근 눈매에도

푸른 방적돌기를 거친 외출이

긴 거미줄로 뽑혀 나옵니다

일주일치 품삯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간절함 묻은 빗장을 열자

성근 움 틔우는 야생의 환호,

빈혈성 오후가 노랗게 익는

봄나들이 길 끝까지

쑥 내 나는 사랑 하나가 따라옵니다

밑불 끄지 못한

도굴 당했던 얇디 얇은 온기가

자꾸 부끄러운 몸속을 하고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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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응어리 / 김은

 

상자 안에 넣어둔 접질러진 종이 하나가 운다

흫건한 상자가 가슴의 문을 열자

눅눅한 창문에 나라는 사람이 새겨진다

김 서린 손가락으로 한 글자 서툴게 남기니

이번엔 나라는 글자 하나가 줄줄 흘러 운다

내 책 속 곰팡이를 향수병에 모두 담아

동화 속 아이처럼 하염없이 착하게 누그러진다

타다 남은 촛불 하나 생경하게 당겨진 시큰한 밤,

방이란 상자에 담겨 가슴을 톡 접질린 내가

축축한 얼굴로 그 미운 종이를 펴면서

천년 별빛을 타고 흐르고 또 흐른다

멸종하지 않는 바다처럼

멍울지는 이 더운 시간 속에

 

 

 

 

 

 

[금상] 갈고리 / 김희철

 

언제부턴가

그의 팔은 보이지 않았다

유압프레스, 밀링, 선반, 사출기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한숨소리를 삼켜버렸다

소리가 잘라버린 건

팔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소매 안에서

조심스럽게 칼을 꺼내었다

그것은 스치기만 하여도

자구만 가슴을 찌르려했기에

칼집 속에 숨겨두어야 했다

 

그는 칼을 들고 육교 위로 나갔다

사라진 팔의 빈자리는 너무 무거웠지만

행인의 시선을 단번에 베어낼 만큼

칼은 날카로웠다

바람마저 자를 수 있다는 듯이

소맷자락을 철럭였다

양은 냄비는 베어낸 소리를

쉴 새 없이 보여주고 돌려주느라

쉬이 닳아지고 찌그러졌다

구두쇠의 무딘 소리까지 베어지자

아주 쭈그렁이 되고 말았다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자 스윽 날이 보였다

 

 

 

 

 

 

 

[은상] 열망 / 황정민

 

물이 끓고 있다

단 한번도 드거움을 몰랐다는 듯,

그 열망을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렇게, 저 혼자 속으로 삼키고 있다

 

그러내는 것이 쉽지 않은 생,

조금만 넘치면 스스로도 견딜 수 없는

외부의 소란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는

절벽 같은 나날 속에서

또 다른 절벽으로 뛰어넘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을 때

물이 저 혼자서 끓고 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집

그 속에 사람이길 포기한 한 마리 짐승이

괴로워하며 물이 끓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고약한 열망이 힘겹게 그를 짓누를 때

짐승은 천천히 고개를 내밀어

끓는 물 속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본다

 

고통스러움도 모른 채 물은 끓고 있다

 

 

 

 

 

 

[은상] 윈-윈 하는 법 / 박진호

 

1

아내이 늦은 외출은 사십이 넘어서 시작된다

하루세끼 먹고사는 고만고만한 일상

딸아이는 혼자 6급한자 자격시험 준비를 하고

늙은 장모는 소파에 누워 천수경을 외운다

시방세계에는

곳곳마다 부처가 있어 몰래 연애질도 하기 어렵고

예전에 벌써 버렸어야 할 낭만콘서트의 추억 되새김질

가당찮게도 첫 월급을 작부에게 던졌던 흐린 기억 탓에

기적처럼 바라는 유치한 것들이 내겐 어디 사랑뿌이랴

아무리해도 되돌아서는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이젠 버린다, 관솔나무 마른 옹심으로 입 꽉 다물고

사리처럼 굳어진 그 욕망의 결정들을 부숴버린다

 

2

아내의 늦은 외출은 표정이 없다

카트라이더 게임을 하는 큰 놈은 제방에서 꿈쩍도 안하고

장모님 오늘밤에는 독경을 낮추세요

만만한 둘째 딸아이를 옆에 앉혀 자동차의 시동을 켠다

반즘 아카시아 숲으로 가려진 월드컵 기념공원

사바는 환청으로, 붉은 악마 가로등이 넘실거리고

달빛받아 잠든 아이의 얼굴은 사십대 중년남의 베이스캠프

검진 유소견자, 사후관리 대상으로 정밀추적 요함

파란 색깔의 건강검진 결과 통보서는 아내의 최후통첩이다

이제 쌍방과실이면 이놈의 어지럼증도 윈-윈 소리를 멈출까

쌍춘년 올 가을, 20년 장기근속으로 제주도 여행이 있다는데

사바응로 불을 밝혀 신전처럼 창백한 실내체육관 계단에서

이것저것 궁리하다 곤궁하고 멋쩍어져

나는 아내의 댄스스포츠 동호회 모임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동상] 철거 / 구기순

 

까치가 운다

겨우 나뭇가지 하나 들어냈을 분인데

펄쩍펄쩍 공중을 벌려대는 날갯죽지 사이로 정오의 파란 하늘이 금갔다

다시 사내의 손이 뻗치자,

이 무슨 날벼락이더냐고 생피 같이 쏟아내는 울음소리

전봇대 옆 구두 닦던 아저씨 나와 혀를 끌끌 차고

사내는 서둘러 까치집을 뜯는다

 

빈 전봇대에 집지은 괴밖에 없는 부리로 깍깍 항의하던 까지

맞은편 PC방 옥상으로 날아가

마지막 한 개비의 추억까지 똑똑히 바라보는 그 연한 눈망울 속으로

절정의 봄날이 으스러지고 있다

 

5분만에 내려온 사내는 한전 차량용 크레인 타고 부웅 떠나고

사람들은 어디로 바삐 가고들 있을까, 우리 모두는

잊는다는 것에 익숙해 바람처럼 흩어진 거리엔 금방 여름이 밀려오고

 

눈앞에서 빼앗긴 보금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허공을 빙빙 맴도는 까치여 숯으로 날아가

차압도 경매도 없는 숲으로 돌아가

다시 둥지 틀고 사랑해도 우린 아직 늦지 않다

 

 

 

 

 

 

 

[동상] 논개의 마지막 편지 / 천선자

 

어머니

엊그제부터 내린 조선 백성의 눈물같은 비가 그쳤습니다

무섭게 불어난 강물이 이따금 휘모리를 만들며 흘러갑니다

바람 한 점 불때마다

나뭇잎에 맺힌 울음 끝 여음 같은 빗방울들이

남강으로 후드득 뛰어내리고 있습니다

덕천 강을 거쳐 흘러 온 이 물속엔

어머니의 살 비늘이 섞여 있겠죠

고향집 앞산에 내려앉던 우수 깊은 구름

울타리가 앞 다투어 피던 봉숭아 붉은 속살

혓바닥이 검도록 따먹던 뒤꼍 뽕나무의 달콤한 오디

모두가 그대로인지요

 

 

 

 

 

 

[동상] 그가 짓는 집 / 김일호

 

남루한 삶의 끝자리에 그가 터를 잡은 곳은

산이 어슬 어슬한 한기를 피해 내려온

햇살이 노루 꼬리만큼 남은 서산 기슭이었다

 

언제나 기댈 데 없던 마음 한 채

들여 놀 집 생각하다가

쉰이 넘도록 꼬이기만 했던 내장 같은 줄자

잡아 마음 앉을 품을 잰다

 

평생 떨칠 수 없었던 근심 네 귀퉁이에 내려놓으며

구부러진 마음허릴 세워본다

벽돌 쌓아 바람을 막고 펄떡 거렸던 핏줄 다독여

구들장 밑에 숨죽여 깔며

숭숭 들락거렸던 생각들 앉혀 보는 것이다

혹시 근심 새어 들까 황토 흙 구석구석

채워 다지며 기왓장 한 장씩 올린다

허리에 두 손 짚고 집안 구석구석 다시 재어 보다

아무래도 마음이 외로울 거라

처마 끝 제비 한 마리 잠재울 생각도 하고

끊지 못할 세상일 궁금할 것 같아

산그늘 시작되는 곳에다

새집 닮은 빨간 우체통 세워둔다

 

 

 

 

 

 

 

 

[동상] 농막 / 금은종

 

비오는 들판을 하염없이 바라보니

아버지의 농사가 생각납니다

긴 삽자루에 밀짚모자 하나면

타고난 비옷 젖거나 말거나

마른 논에 환하게 물 들어갈 때

어린자식 입에 밥숟가락 쑥쑥 들어갈 때

황새목이 되어 입매가 귀에 걸리던 당신

하늘 울음 시작하면 물꼬터라 물꼬터라

물 묻은 목소리 내 가슴속 강물처럼 흐릅니다

 

버려진 다랑논에 삽날 깊숙이 속을 뒤집다가

이 허기진 논바닥을 어떻게 건너

칠남매를 먹여 살렸을까

진흙 속에 빠지는 발만큼 땀이 눈을 파고들어

당신의 삽질 절반도 못미쳐 허리마저 아파옵니다

툭툭 갈라진 당신의 다랑논을 생각하면

농막 안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당신의 땀인 듯

그친 비 씻어넣은 석양 속으로

긴 삽자루에 걸린 논둑길이 아물아물

황새가 된 당신의 영혼 끝내 물꼬를 터는지

청산에 묻힌 농막 안이 축축이 젖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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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생명 / 이재일


오늘 하루도 바지랑대끝에 질긴 목숨 걸었다

무리하게 당겨진 련악기의 줄처럼 긴장한 사위가

핑핑 쇠울음 운다

산다는 게 그런 게야

너무 당겨지면 줄도 푸른 날이 서서 심장 베이고

느슨하면 희미하게 녹이 슬어버리지


누울 자리 찾아 가파른 산길 오르던 아버지 헉헉 폐기종 고단한 사람 등굽은 세월을 떼까치 물고 간다 뒤를 따르던 눈에 산색이 짓물러 내려 앉았다 길이 아니었다 가시덤불, 칡넝쿨, 남은 세월 질긴 고리 시퍼런 낫날에 피 푸른 피 뚝뚝 흘리며 널부러진다 만들어진 길을 가다가 마지막으로 작은 길 하나 내는 것이다 부러진 길 이어 붙이고 패인 길 메우며 무슨 후레자식 부귀 영화 꿈꾸며 아버지는 저리도 가파른 산을 마냥 눕히려 하는가


바지랑대끝 긴장한 목숨이 핑핑 현울림소리 낸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소리

떠날 자와 남아 있을 자를 구분하는 저 울부짖음에

산이 돌아눕는 사이 쨍하니 하늘에 금이 간다

위태한 목숨이 움찔 놀라 허공을 움켜 잡는다







[은상] 모슬포 기행 / 윤혁


1

5월 모슬포는 밀감꽃 머리 꽂은 열세 살 계집

눈빛 한 번에도

가슴을 다 여는 부끄러움바닥까지 누가 시켰는지 쪽빛 화장

언제부터였을까 모슬포의 첫사랑은

감귤향기 피워올려 기웃거린 한라산

제 가슴에 비치면

지난 밤

선녀가 내려 온 백록담을 살포시 껴안고

휠휠 벗어던진 비단잠옷 안개 때문에

아니다

5월에 펼쳐 찬미하는 유채꽃에 수정반지 끼워주면

안달이 난 모슬포는 하얀 물보라 일으켜

속치마 뒤집는다

변덕쟁이 제주바람도 모슬포 짝사랑에 깊이를 몰라

덩달아 포구를 갈아엎는다


은갈치 기행 때문에

마지막 일기예보 '파고주의' 설친 밤잠


모슬포에서 늦은 아침상의 칙사 대접은

하얀 면사포 쓰고

엉덩이 펑퍼짐한

다소곳 쟁반에 앉은 은갈치 뿐이라

순하디 순한 그녀 옷고름을 풀고 살맛을 보았을 때

밤새껏 풍랑과 싸운 어부의 일기 한 토막

황송스럽다

안개비는 점차 무겁게 오다가

제주 삼다와 부딪혀 외항 쪽으로 이동하더니

포구에 막대기 두 개 하나는 비스듬히 걸친다

저녁 무렵을 알 리 없는 나는

언제쯤 안개비가 한라산으로 올라갈까요

안달에

주인장의 느긋한 미소


2

통통배의 뱃길은 따로 없었다

이제부터 광대놀음 줄타기가 시작되고

파도의 골 따라 미로같이 헤맨 지 

육지는 망망대해가 삼켜 버렸는지 어둑한 자녁

어부의 넋을 찾아 헤매던 바다새도

깃을 접으려 우도로 가며

왔던 길 잊지 않으려는 박음질소리

통통거리는 발동기소리만 풍랑 위에 한 마리 새가 된다

이어도 어디쯤 생과부 애달픈 청승소리에

출항할 때 아낙이 실어준 가슴에 멍울

이끼 대신 멍울을 던질 때마다 바다가 요동쳤다

무표정한 어부의 주름살골마다 바다의 깊이가 새겨져 있어

마음 한 구석마다 바다와 닮지 않은 곳 있으랴만

은갈치의 행방은 묘연하다

만선할까요 계면쩍은 질문에

이빨에 끼인 질긴 소리로 은갈치의 혼백만 건질 때가 많지요


방랑자처럼 떠돌다 멈춘 곳

심청을 달라고 떼를 쓰는 풍랑

지난 날 대신 뛰어든 젊은 어부의 아낙만 서러운

집열등 창백한 바다 가장자리

마술하듯 집열등 선체를 감추면

삼각 파도에 숨어 붉은 눈알로 은비를 다듬다

날씬한 몸매

어부의 삶보다 더 날카로운 낚시에 걸리고

어부는 액자에 들어갈 사진이 좋아야 한다며

파도를 물고 있는 허연 은갈치를 번쩍 들어올린다

집열등 마지막 혼백이 바다에 빠지고

해신이 있기는 한 지

집집마다 매달아 논 오색 깃발 그 흔들림의 수평선에 붙박이가 된 아낙

수평선 먼동 속에 아스라한 차전이 온다

은비늘 만선

모슬포는 파시가 될 때까지 물새들 축하 비행

모슬포는 외도다

늦은 아침을 먹으면 은비늘 접시에서 내내 풍랑이 이는 것 보인다


* 갈치 : 비속어로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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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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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상] 지게 / 김기호


이젠 지게는 없다

풀벌레 밤낮으로 타전하는 헛간에도

이젠 지게는 없다

지게를 밀고 당기던 옛 산길 동무도 없다

날이 새면 몸을 맡겼던 논도 밭도 더 이상

제기를 부르지 않아

해 떨어지기 오래 전 지게는 도회로 떠났다

지게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랑이 봉천닭 같은

도회의 계단만 오르내리는 것

펜보다 강한 노동의 어깨를 찾아 다닌다

바람 부는 몸 타박타박 끌고 돌아와

나뭇단 묶듯 주발만 여섯 꿰고

외진 농업박물관에 갇혀버린 지게

다가가 몸 구부려 흙에서 잔뼈가 굵어진

내 어깨로 멜빵을 멜라치면

두 다리 힘줄이 불끈 돋울 것 같은 지게

먼저 온 쇠스랑이랑 쟁기랑 낫없이

걸어 나갈 수 없음을 알고도

마디마디 뼈마디 남은 힘주어

담벽을 움켜 잡고 부르르 떨고 있는 지게


창백한 달, 숨 몰아 쉬고 있는 갈 감나무 아래

이 땅 한번도 제대로 서 보지 못한 아버지

별밭으로 슬슬 쓸고 가다 구름 걷히자

들킨 듯 가볍게 날아가는 감잎들, 잎들




 


[금상] 갈대 / 김도선


아버지는 발목가지 젖어 있었다

친구들 대부분 도시로 터전을 바꾸어도

강어귀에서 달빛만 헛그물질하고 있었다

관에서 행하는 일에는 불만이 있어도

입 한번 열지 못했다

그런 날이면 낮은 사람은 굽실거려야만

심줄이라도 붙어 있다며

밤새도록 소주 나발만 불어댔다

바람이 불면 엎드리고

아무도 모르게 빗물에 씻어내야지

사내는 그렁 개똘철학이 싫어서 자주 대들곤 했다

사내는 될 수 있는 한 멀리 벗어나려

힘껏 발걸음을 떼었다

양복을 입고 출근하고

몸에는 행여나 물비린내가 배여 있을 세라

틈만 나면 향수를 뿌려댔다

그런데 어느 날 목욕 후 거울에 비친 등짝을 보다가

꼬리뼈가 툭 튀어나와 있음을 보았다

아버지는 한 두 사람의 관 공무원에게 굽실거렸지만

그동안 사내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아첨하며

숨겨둔 꼬리를 내어 흔들었을까

밑을 보니 아!

사내는 무릎가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속으로만 속으로만 울음 삼키는 

갈대일 뿐이라는 걸 알았다

제 스스로 몸조차 흔들지 못하는







[은상] 엉킴에 대하여 /김성현


발 밑 한번 내려보지 못하고

무엇을 위해 바쁘게 걸었을까

집에 이르러서야

구두끈이 엉켜 있다는 걸 알았다

구두도 주인을 닮나보다

진실을 얘기해도 믿지 않는 어른들을 위해

거짓말을 배우던 유년시절부터

나는 엉켜가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엉켜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바르고 곧아서

만지면 소리내어 우는

현악기의 멜로디를 들으면

엉켜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

절망의 칼로 잘라 버리는 이도 있었다

엉켜 있는 것을 애써 풀려고 하기에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엉켜 있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엉켜 보지 않고서야

엉켜 있는 것은 엉켜 있는 대로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이 없듯이

풀리지 않는 것도 없다는

먼저 간 사람들의 노래를

어찌 이해할 수 있으리오

어직 엉키지 않은 것들이 엉키지 않도록

진심으로 안아 느껴야지

엉키지 않은 것들의 맑은 소리가 가장 소중하고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엉키지 않는 것임을


눈이 마주쳐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방긋이 웃는 아이들을 보면 꿈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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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겨울공단 / 임재동


겨울 해는 

애인과의 약속을 기다리는 여공처럼

일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퇴근해 버렸다


종종종

교대 근무를 위해

어둠,

겨울엔 일이 많아

하루에 서너 시간씩 꼭 잔업을 해야 했다


지금 막

교대를 마친

가로등이

일제히 야간 작업에 들어간다


거리를 따라

실직자들처럼 고개 숙인 나무들

정리 해고 당한 낙엽들이

호호 입김 불며

구인 광고 앞을 서성이다 사라진다


이번 달엔

밀린 임금이나마 받을 수 있을런지

주택 부금이며

아이들 학비며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 짓는

공장의 굴뚝들


오랜 철야 작업으로

뿌옇게 시력을 잃은 가로등 하나가

깜빡깜빡

흐린 눈을 부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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