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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새벽 강구항 / 이영옥


강구항에는 그날 따라 해가 뜨지 않았다

골목 안에 숨어 있던 겨울 바람만이

받침 떨어진 여인숙 간판을 할퀴며 지나갔고

그때마다 낡은 간판 불은 정신을 놓아버렸다

강구항의 불빛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그것은 내가 먼 곳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항구에는

장기 숙박하고 있는 눅눅한 바람만이

여인숙 창문을 들락거렸고

털실 뭉치같은 안개에서도 비린내가 났다

커다란 전구를 매단 통발선 한 척이

색색의 깃발을 꽂고 항구로 들어왔다

잠을 못 잔 선주의 눈알만 붉어져 있었고

해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내 삶을 건져보기 위해

먼 바다에 나가 통발 한번 힘껏 던져두지 못했다

이곳에 와서도 강해지거나 무디어지지 않고

몸을 녹이려고 낯선 방에 들어섰다

형광등 불빛이 빤히 내 감정을 들여다본다

접혀 있던 군용 담요를 펼치자

젊음을 탕진해버린 노름꾼 같은 야윈 화투짝들이

아직 냉기 돌고 있는 내 삶의 웃목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밖으로 나가자 어둠이 물러선 자리에 늙은 선주가 서 있고

주름이 깊게 패인 그가 빈래로 돌아왔다며

묻지도 않은 말에 스스로 대답했다

나는 침묵에 길들여진 넙치처럼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멀찌감치 쭈그리고 앉아 아침해를 기다렸다






[금상] 슬픈 풍경 / 한칠석

- 폐광촌



갈대가 갈대를 안고 쓰러지는

허기진 유년의 새벽강

물안개의 풍만한 젖가슴에 얼굴을 가리고

버들피리 구멍구멍 흐느끼는 바람을 따라

식구들은 고향을 떠났다


2

누구도

바람의 고향을 묻지 않았다

검은 강의 상류로 거슬러온 바람은

세상에서 적당히 실패한 사람 몇을 데려와

식구들의 마지막 기착지

지금은 폑항촌이라 불리는 마을에

짐을 풀었다

거기에도

새벽강엔 안개가 내렸고

안개가 걷히면

강바닥은 시커멓게 떠오르고

갈대는 갈대를 찾아 헤매고 있었지만

그림자도 없이 탄맥의 나이테를 찾아가는 광부들이

막장에서 돌아와

식구들의 그리운 이름을 불러줄 때까지

안개는 좀체로 걷히지 않았다


3

광산촌의 밤은 참으로 길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라도 잠결을 스치면

젊은 아내는 올빼미처럼 잠들지 못했다

을방 혹은 병방 작업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어째서 이 마을엔 과부들이 많은 지를 

젊은 아내는 새삼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꿈의 슬픈 음계를 밟으며

속살을 헤집고 들어온 바람이

어디론가 하나씩 빠져나가던 날

기어코 갱도의 천판은 무너져 내리고

사고가 났다

반 주검을 들쳐 업고 읍내 병원으로 달렸지만

왠종일 동구 밖을 서성이던 바람의 어깨는 무너져 내리고

끝내 선산부 김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들 눈물로 빚은 술을 마셨다

더러는 쓰려져 울고 더러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지만

식구들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것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안개가 걷힐 때까지

마을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잘 길들여진 가축들처럼

다시 갱 안으로 돌아갔고

김씨의 젊은 아내는 읍내로 떠나

김씨의 죽음으로 지불된 돈으로 식당을 차렸다

"바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의 피곤한 등줄기와 마른 허벅지

그리고 가려운 겨드랑과 충혈된 눈빛을 떠나

바람은 자꾸만 어디로 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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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연극배우 / 최영자

 

 

얼굴에 맞는 베약 가지고

탯줄을 자른 지가 언제더라 아득하다

울어야 하는 장면에서

연습도 없이 실습으로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고향과 책가방을 잃어버리고

 

세상은 넓은데 무대는

왜 이리 좁냐고

앙탈부려도

한번 맡겨진 것은 절대로 바꾸어지지 않는다

달아나 보아도 그곳이 그곳이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완벽한

연기자가 되겠지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서

얻어질 수 있는 거라면

애시당초 잃어버린 것이 없을 거야

 

퉁퉁 불은 국수 그릇 안에까지 따라와

출렁거리는 바람

그래도 떠나지 못한 푸른 잎 하나

슬그머니 끌어넣는다

불빛 놓치지 않으면

잃어버린 것 다시 찾을 수 있을지 몰라

 

일인 삼역을 가지고

관객의 눈빛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비틀거리면서 신발을 벗어 던진다

늘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연극은

 

세상에는 없는 길 하나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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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은림에 가면 / 김대호

 

 

은림에 가면

큰 고개 아래 버스가 서고

나물 보따리와 도시로 나가 자취하는 아이들 내린다

때로는 서울로 도망간 옛날 머슴 빌린 양복으로 돌아와

몰락한 늙은 주인 무릎에서 목을 놓기도 한다

쪽문으로 담배만 팔던 가게

선거 끝나도 몇 년씩 붙어 있던 벽보

시어머니 굶겨 죽인 덕군마누라

농약 먹고 죽은 이발관 춘석 아저씨,

이제 담뱃집은 객토 사업하는

둘째 아들네 새집 지어 살고

소먹이던 아이가 군대 갈 때까지 붙어 있던 벽보는 보이지 않는다

우물가 아낙들 모이면 수다밥이 되던 덕군마누라

의심받던 정신병 커져서 어느 날 집 나갔고

그 후 소문은 무성했지만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다

백 가구 남짓 동네에 이발관 있던 그 시절

도살장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눈물 찔끔거리며 머리털 뽑혔는데

참외 농사로 대부분 부농의 자식이 된 아이들

한 시간 넘게 잡는 도시로 나가 이발하고 온다

 

고생했지만 아들 공납금이 더 무겁던 논농사 왕골 농사에서

고생은 하지만 통장이 늘어나는 참외 노사로

이곳 은림의 경작 풍경이 바뀌고 난 뒤,

제사 지내면 집집마다 음식 나누던 풍습

겨울 사랑채 모여 동치미 국물 떠먹고

뒤란 묻어둔 김치 무 서리하던 시절은 가고

화면 앞에 말없이 앉아 졸다가 잠이 들고

큰 힘이었던 소 종일 갖힌 채 사료 먹고 비육된다

 

은림에 가면,

빈 집이 늘고 남은 집들은 무너져

옥상 가진 양옥으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금상] 달동네 / 우분숙

 

 

바람의 어깨너머 살며시 고개 내미는

코스모스, 지친 나를 반긴다

좁은 골목 사이로

누이의 코고무신 같은

달님만이 비치고 있다

어둠을 몰고 온 거리에서

아이들의 딱지 치는 소리 들린다

짝 잃은 고무신 한 짝

희미하게 웃고 있다

골목 어귀 숨어 핀 맨드라미

붉은 목젖이 서럽다

어두운 달동네

코흘리개 두고 떠난

어미가 미워

혼자 울고 있는 아이,

돌아서는 그림자 속으로

달님만이 숨어 울고 있었다

 

 

 

 

[당선소감] 

 

지금까지 걸어온 길들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 순탄한 길들만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르막길을 오르고 때로는 돌부리에 채이기도 하면서 문학이란 길을 걸어온 지 4년, 앞으로도 이 길을 꾸준히 걸어갈 것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대구 여성 예지 대학에서 시인 서지월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면서 조금씩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항상 좋은 시들만 엄선하여 열정적으로 가르치며 늘 문학의 정도를 일깨워 주시는 선생님께 큰 감사를 드리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목요일마다 시 창작에 몰두하는 <대구시인학교> 회원들- 이미 당당하게 등단한 이은림, 정이랑, 이향희 등 뜻을 같이한 문우들과도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부모님 그리고 동생들과도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심사위원님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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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회복기의 노래 / 명호연

 

 

겨울이 서둘러 밤도망을 쳤다

지루했던 부채를 탕감하고

움츠렸던 막대온도계의 먼지를 닦는다

선명한 각혈

바람난 화초들이 화장을 한다

날 선 바람, 그 헛기침에도

묶인 팔들을 풀지 않던 고집센 뿌리들

저마다 제 살들의 안부를 묻는다

한 두릅의 햇살과 물의 화답

어지럼증, 아! 산들이 쓰러지고

침묵한다

뒤척이며 빈혈처럼 깨어나는

갈증난 목젖들의 거듭나기

비 갠 아침

시멘트 허기진 틈새로

식솔을 늘려가는 풀새들의 문안인사

아내의 손을 따라

소스라친 빨래들이 널려간다

 

 

 

  • 명호연 시집 <내 안에 그대가 갇혀있다>(좋은땅)
 

내 안에 그대가 갇혀있다

 

de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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