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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민턴을 치다 / 김월수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각도의 귀퉁이에

제도기를 갖다 대듯 꽂히는 스매싱

셔틀콕이 떨어지는 딱 소리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저려 오는 다리의 감각을 곧추 세우고,


호루라기의 경쾌한 음을 따라 가듯

넘기고 넘어오는 포물선 한쪽 끝이 있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넘고 넘김이 지연되는 순간

간격도 멀어진 그와 나 사이

꼭꼭 숨어 있는 그리움을 찾아

클리어로 힘껏 쳐 넘기면

다시 찾아온 기회를 잡을 수는 있을까?


빠른 셔틀콕처럼 깃털을 달고

풀벌레 울어대는 언덕으로 날아가듯

반딧불이 무성한 골짜기 끝을 지나

자박거리던 다랑이 논을 찾아갈 수 있을까?


앨보가 잡아끄는 오른손을 뻗어

네트 바로 위로 터치할 그리움의 투시도를 그려본다

이별도,

뿌리 깊은 아픔의 관성을 깨는 것도

포물선 한쪽 끝의 몫이라며

큰 가방 한 짐 지고 그가 떠난 그곳으로


나는 움직인다

복식을 단식처럼 치고 있는 당신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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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속의 얼굴  / 김인숙

 

꽃을 들곤

다음 생으로 건너갈 수 없다는데

꽃 속에 묻혀 있는 저 여인은

지금 어느 세상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걸까

 

조화(弔花)와 조화 사이,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불의 통로에서

오직 망자(亡者)만이 바쁘고

망자만이 웃는다

슬픔은 남겨진 자의 몫이라는 걸

꽃들도 이미 아는지

저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웃는 영정 앞에서

울음마저 태워 보내야 하는 게 삶이라면  

몸속 깊이 각인된 저 화농은

어쩌란 말인가

 

이미 세상 밖으로 엎질러진 슬픔인데

화장의 시간은 왜 자꾸 밀리나

 

저승길, 지루한 낙화처럼 정체되고

꽃 속의 여인은 상주의 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토록, 몇 년 전의 얼굴로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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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도 /

 

동안거를 끝냈는가

한 벌 옷이 외출을 하네

저당 잡힌 묵언수행과 가압류된 묵은 소유

한 덩이 달 반죽 속에 훌훌 날려 버린다

 

소몰이 창법으로 쏟아내는 들숨날숨은

팔천 가닥 자비면발을 실실이 뽑아낸 것

늪보다 어두운 숲길을 허기지게 걸어가네

귀를 끌어당기는

꿀벌 색 날갯짓의 처음과 끝 그 사이 길로

네발 달린 짐승이 되어 마침내 기어가서

들꽃 같은 세속의 말 담담히 베고 누워

몇 과 사리로 영근 나뭇잎 경전을 덮는다

 

어디쯤인가

빙하기 살찐 보름 한 입 베어 물고 잠이 들면

바깥을 닫은 거기서부터 벌써

묽다

 

* 천이화멸: 깊은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쓰러져 나뭇잎을 긁어 덮는 고승의 죽음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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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재봉틀 / 임미리

   

엄마는 재봉틀로 무엇을 적고 싶었을까.

방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얌전한 고양이

시간이 흐르고 엄마가 재봉틀을 열고

무엇인가를 만들어 우리에게 줄 것이라는

작은 바램이 점점 차갑게 식어갔지.

또 몇 년의 세월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지.

무엇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작은 바램은 기억 속에 남은 한 마리 고양이

어느 날이던가 창고에 숨어들어 갔는데

그곳으로 이사 간 잊어버린 재봉틀이

드르륵 드르륵 내게 말을 걸어왔다.

화들짝 놀랐으나 호기심이 발동한 고양이

손끝으로 만져보다 바늘에 손끝을 찔렸다.

붉은 핏방울이 꽃잎처럼 떨어져 내릴 때

엄마가 차마 피우지 못한 꽃말들을

재봉틀이 알고 있지 않을까 궁금증이 도발했다.

며칠을 아무도 몰래 창고를 들락날락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받아 적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인가 꿈속에 고양이 같은 재봉틀이

창문을 열고 꽃잎처럼 날아 들어와

내 머리맡에서 노트북 자판기처럼 드르륵 거린다.

재봉틀은 튜닝을 하여 노트북이 되었을까.

노트북 화면을 열고 붉은 언어들이 날아다닌다.

행간을 정리해 문장을 토해내는 고양이 한 마리

아직 못다 한 이야기 어디에 숨겨두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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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밥 / 정영희

 

 저녁밥 대신 기체와 액체만 마시는 샘이 있다 샘의 말을 빌리면 액체는 술이요 기체는 담배다 술이 밥이라면 담배는 반찬이다

 

샘과 마주앉아 꾸벅꾸벅 밥을 먹다보면, 내가 꼭 한 마리 짐승 같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가령, 샘의 가슴에 말갛게 씻긴 쌀 한 움큼 있다고 하자, 액체는 물이요 기체는 불이라 하자, 샘이 짓는 밥은 물 자주 들이는 만큼 불 지피는 일도 여러 번, 바다와 해가 한데 얼크러지는 난맥상이랄까

 

허기 채워줄 따끈따끈한 말씀 술술 퍼내고 이내 밑바닥 긁는 소리, 집없는 새끼들에게 둥지를 내줬더니 개개비 무리 속 뻐꾸기새끼더라는 서린말에 꼬리를 무는 매운 말 휑하니 가슴 뚫린 말

 

 

어둠에 쫓겨 돌아가는 샘의 뒷모습 바라보면, 시詩를 등에 업고 갈지之 자로 걷는 넋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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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난 그냥 앉아있기만 했다 / 이초우

 

둥근 것은 언제나 돌고 싶은 근성이 있다

운전석 옆 자리에 든든하게 누워있던 작은 페트병

가득 담긴 물 한 모금 했더니 수위가 꽤 내려갔다

내가 놀라 급브레이크를 밟으니

저 둥근 것이 얄밉게, 목마르게 기다렸다는 듯

, 튀며 깔판 바닥 위에 통쾌하게 떨어졌다

 

그때서야,

고르지 않은 깔판 위에서 제 근성을 맘껏 부리는 물병

저 아랫도리도, 몸통도 입술하며

둥글지 않은 데가 없다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고

굴곡진 길을 내가 돌면 함께 무거운 엉덩이부터 휘익 돌며

곡예를 하고,

잔뜩 신이 났다

 

제 뱃속에 채워진 물, 차가 정지해 있을 땐 참 싫은가보다

온 몸에 소름이 도는 지 미세하게 몸을 떨며

질겁을 하고, 물의 조상도 일러두길

그냥 있지 말고 움직여야 산다고 했던가

출렁출렁, 물병이 신이 나니 함께 춤을 추는 물

그렇게 취한 듯 춤추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페트병이 떼굴떼굴 제아무리 굴러도

간지럼만 잔뜩 탈 뿐 함께 돌지 않고 출렁이기만 하는 물

 

바람에 부대껴

어머니가 몇 차례 넘어졌어도

양수에 떠 있던 나는

금방 생긴 눈만 말똥거렸을 뿐, 돌지 않고 그냥 앉아있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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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퍼의 뼈 / 권성훈

 

수동식 입은 닫힐 때 마다 생각한다

내가 말할 틈도 없이 네가 열리는지도 몰라

여백에 갇혀 있다 맥없이 풀어지는

은밀한 기호의 숨결을 머금고

양 방향으로 길들여진 행간과 행간 사이

숨겨진 꽃술 붉은 혀가 기어 나온다

사방으로 연결된 행간의 혈관을 핥아봐

견고한 문장은 표피를 걷어내고

욕망의 내장을 느린 속도로 보여주잖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닫혀있는 촉수를 밀고 당겨

이제 날 허물어지는 문맥에서 찾아

너의 오감으로 뜸드는 육감을 적셔봐

스스로 열지 못하는 문자의 혓바늘로

자음과 모음이 맞물려 있는 압축된 가슴을 풀고

수백 개의 뼈로 관절 마디마디를 꺾어봐

이제 네가 들어올 깊은 바닷길이 열린다

가벼운 비명소리로 나를 열고나면

등골 빠진 몸은 버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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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43 / 최한선

― 가을의 소리

 

우주율의 깊이로 벌레가 운다

구절구절 인생인 냥 부산히 운다

 

이맘때면 짠한 것이 한 둘 이랴만

맨 몸으로 구르는 낙엽 속이 아린다

 

얼마를 울다가 이내 잠들 것인가

떠미는 바람인들 어찌 무심히 불랴

 

가지 하나 가지고도 행복한 새 울음

가을 속에는 팔만대장경이 있다

 

 

― 시집『사랑 그리고 남도』(태학사, 200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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