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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창문의 오후 / 김흥현

 

 

한 사람이 지나간다

 

나는 안쪽에서 네모를 집어

눈앞까지 끌어당긴다

네모가 커졌는데 모르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다시 네모에 넣고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도

마찬가지다

 

움직이는 사람들을 빼면 움직이는 것이 없는데

나는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본다

 

햇빛의 끝이 뾰족해진다

눈이 찔려서 움직이는 것들이 흐릿해진다

네모에서 보푸라기가 일어난다

보푸라기를 컵에 주워 담아도

솜사탕이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네모의

왼쪽을 늘리고

오른쪽을 늘렸는데

하나로 만나 점이 된다

 

사람이 계속 지나가서 사람들이 된다

네모 안에 사람들을 모아도

아무 말 없이 지나간다

 

나는 시작은 했는데 끝이 없는

쳇바퀴처럼 원을 그리고

네모는 덜커덩 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당선소감]

 

저는 라보로 퀵서비스를 합니다.

 

2010년에 순경에서 경사까지 20년 재직하였던 경찰직에서 해임되면서 공장 일용직, 대리운전을 하다가 2018년에 상처를 하여서 그동안 살아왔던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나날이었습니다.

 

사람들과 인연을 끊고 마음을 닫고 살다가 SNS에 글을 쓰면서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산지역대 지평 동아리를 청강생으로 찾게 되면서 시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꼴찌 언저리를 맴돌았던 선린상고가 최종학력이라서 입학을 주저하고 있을 때 포기하지 않으면 졸업한다라고 말을 해준 선배로 인하여 국어국문과에 용기를 내서 입학하였고 본격적으로 시 창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작이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피해자 진술서나 보고서 정도만 써 왔고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아서 맞춤법, 문장의 주술 관계부터 배우게 되었는데 시를 빨리 써보겠다는 생각과 다르게 이것을 왜 배우지하는 회의를 가졌던 부분이 결국은 저의 내면을 넓히고 글을 쓰는데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3년 동안 시를 많이 찾아 읽어야 했습니다. 방송대 중앙도서관을 경유 RISS에서 9MB 분량의 시 등 자료를 찾아서 읽고 1주일마다 1편씩 시를 써 온 결과물이 문학상인데 방송대 학생이라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첫발을 내딛게 해준 유병근 선생님, 면도칼로 구석구석 해부를 해서 벽을 마주 보게 하다가 곧 대상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뛰고 있는 심장을 마주하게 된다라며 독려해 준 조말선 선생님 고맙습니다.

 

학교생활과 시 창작에 도움을 준 선배님, 쇼핑백 가득 시집을 챙겨 준 학우, 함박웃음을 짓게 하는 학우님들, 응원해 준 딸과 아들 모두 고맙습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작년 방송대 문학상과 문예지 2곳에 응모했다가 낙방한 사실이 있습니다.

낙담하고 포기하려던 저에게 문학상이 다시 일어나라고 합니다.

힘껏 다시 써보겠습니다.

 

올해 태어난 손녀가 자라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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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칼 세이건, 리처드 도킨스, 그리고 나 / 남택규

 

 

숭고함은 어디서 올까

누군가 나로 하여금 닭을 잡게 한 한다 난생처음 배를 가르게 한다

 

오밀조밀 장기들을 맨손으로 매만진다 미끌미끌 따뜻하다 의사가 나의 심장을 만져도 이럴까

 

그만 나는 막막해져 얼른 배를 닫는다 속울음을 들었다 그것은 비릿함 가까운 데다

 

아무렇게나 내장을 꺼내는 손으로 인삼 대추 쌀을 차곡차곡 채우는 칼날 위 아슬아슬한 식() 풍경, 순간 뇌우가 들이친다 식탁에 칼이 꽂혀 부르르 떨고 맨발로 황급히 빗물이 차오르는 거리로 뛰어드는 이도 있겠지, 그래 삶은 누군가의 온기를 끊임없이 배반한다

 

현실에서 가능한 답을 찾아가는 나에게도 한 가지 궁금한 건 혹 내가 개복한 상태에서 의료진도 없이 나 홀로 남겨질 때 과연 웃을 수 있을까, 수술대에도 기대지 않고

 

나는 천천히 둥글게 몸을 만다 얼굴이 배에 닿지 않는다 잠깐의 열패감, 이런 기분일까 다시 추스르며 손가락으로 위 창자가 있을 배 이곳저곳을 꾹꾹 눌러간다 센서등은 복도에만 있는 게 아니다

 

기도는 사절, 다만 낮아서 아름다웠으면,

 

 

 

[가작] 울음의 질량 / 이정미(이마리)

 

비가 허공을 딛고 안전하게 내려와요

머리맡으로 옮겨온 하룻밤의 오아시스도 담겨있어요

고무장갑 손끝으로 물방울이 속눈썹처럼 떨어져요

예전의 것은 아니에요

여전히 지금도 외줄을 타고 내려와요

창밖 난간에 유리알들이 매달려있어요

떨어지면 산산조각 날 쏭알쏭알 벌레알들,

저것들은 누가 분실한 노래일까요

사내가 추락하면서 남겨진 코팅장갑 한쪽이 보여요

몸보다 먼저 떨어진 비명도 그를 지켜주진 못했나 봐요

사내의 아내는 박보살이에요

알아요, 자신의 운명까지 점칠 순 없었다는 것

그런 것쯤 이 골목에선 이미 단물 빠진 소문

낮달이 아라비안나이트의 단검처럼 우윳빛 조등을 걸었네요

주방 한 켠에 방치된 나는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싱거운 침묵이라도 조리할까요? 당신의 입맛에도 단물이 빠진 것을 알아요

다시 비가 와요

비는 질기게 시간을 밀봉하고

오후는 하얗게 질식된 사체에요

움직이던 모든 순간들이 창백하게 지워져요

당신은 어느 별에서 지워졌나요?

고무나무 숲에서 맨발로 나를 받아내던 거친 손등

그녀도 무중력 속으로 풍선이 되어 떠올라요

슬픔에도 세금이 붙는 세상을 아세요?

카드 한 장으로 울음의 질량이 입력되는 그 마을은 여기서 멀죠

죽은 코팅장갑 속으로 걸어 들어간 고무나무 숲이

지하 울음들을 모조리 삼킨다고 중얼대는 흰 소리가 들려와요

나는 이제 습기 찬 소리들을 받아낼 수 있지만

내 몸으로 흡수 시킬 수는 없어요

어둠이 코팅 된 시간을 낮이라고 부르자

태양이 나를 녹이네요 나의 붉은 계절은 모두 밖에 있어요

내 심장은 곧 낡을 거예요

발뒤꿈치까지 끌려오듯 그림자를 키우는 여자를 알아요

인대가 늘어진 여자, 누군가 뱉은 껌처럼 던져졌어요

수술방 차가운 침대에

수술 장갑을 온몸에 껴입은 누군가 들어와요

소독약 냄새가 구겨진 나를 뒤덮어요

고무나무 숲으로 빗소리가 천천히 걸어와요

나는 오래도록 썩지 않는 나무의 혈흔이에요, 붉고 질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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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대나무 / 김명숙

 

 

빈 속인 것이

촘촘한 촉수로 허리를 세웠다

 

흰 눈발이 대숲에 날려

우 우 바람소리 거센 날엔

서로 휘청대면서도 넘어지지 않는다

 

대숲의 푸른

틈 사이로 바람과 햇볕이 드나든다

빼곡한 틈새지만 서로 날은 세우지 않는다

다만 서로의 중심을 지키기 위해

더 깊숙이 뿌리 내린다

 

밖은 허공,

의지할 것은 서로의 균형뿐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있다

 

바람이 분다, 세상사

얽히고설켜도

함게 가야하는 길, 대나무처럼

그 만큼의 거리에서 서로 바라보면서

 

가지 사이로

폴폴 날아다니는 새들의 비상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으리

 

 

 

그 여자의 바다

 

nefing.com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은 지난 12월 18일 오전 10시 30분부터 방송대 대학본부 본관 3층 소강당에서 제43회 방송대문학상 시상식을 개최했다. 총 551편의 작품이 접수되었으며, 뜨거운 경쟁을 펼쳤던 방송대 문학상 시 부문엔 김명숙 시인의 작품 “대나무”가 가작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방송대문학상은 방송대 학생 중 훌륭한 문학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기 위해 출판문화원이 매년 시행하고 있는 현상공모의 행사로서 평소 등단을 꿈꾸는 사람, 글쓰기에 자신 있는 사람, 내 이야기를 남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언제든 도전 가능한 문학상이다. 공모전은 문단에 등단한 문인이 아닌 방송대 학생이라면 누구라도 응모할 수 있고, 모집 부문은 시·시조, 단편소설, 희곡 및 시나리오, 에세이, 동시·동시조, 단편동화 등 총 6개 부문이다. 지금까지 ‘방송대문학상’에서 배출된 수상자들은 주요 일간지 신춘문예를 비롯한 여러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여 한국 문단의 중심에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응모 기간은 2018년 8월 5일(월)~10월 31일(목)까지였으며, 방송대문학상은 국내 대학교내의 문학상 중에서도 명실상부 전통 있고 명망 있는 문학상으로 꼽힌다.

 

시. 시조 부문 예심 심사는 11월 9일(토) 출판문화원 회의실에서 이성혁 문화평론가가 했으며, 심사기준은 ▲주제의식 ▲창조성 ▲실험정신 ▲표현력 ▲구성력에 두고 심사를 했다. 시. 시조 부문의 본심 심사는 11월 22(금)에 방송대 겸임교수로 있는 손택수 시인이 맡아했다. 

 

손택수 심사위원은 “김명숙의「대나무」는 독창성이 어떤 유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질감의 문제라는 인식을 뒷받침하는 지표다. 이 시인은 ‘시’로 규정된 기왕의 미학 체계를 단정하게 수렴하면서도 ‘시’로 명명되지 못한 ‘시적’인 것을 향해 비약하는 힘이 있다. 

 

또한 예측 가능한 사유의 흐름을 비틀어 도약시키는 마지막 연의 갈무리 솜씨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시가 지나치게 뜻에 포박되지 않도록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사유의 깊이와 명료한 이미지가 어우러져 웅숭깊은 음역을 갖게 되리라 믿는다.” 라고 평했으며 ‘예상한 변화만을 허락하는 시가 아니라 위험하지만 자유로운 곳으로 우리를 밀어가는 시인의 가능성’을 내세워 작품을 선정했다고 설했다. 당선작은 2020년 신년호부터 방송대 신문인 KNOU위클리에 소개된다.

 

한편, 김명숙 시인은 시인과 아동문학가·가곡·동요작사가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초.중학교 논술강사, 사회교육강사, 문해교육사로 후학들에게 글쓰기를 지도하고 있다.시집 

 

<그 여자의 바다>를 출간했으며, 가곡<달에 잠들다.> 외 45곡과 음반과 악보로 나온 동요 86곡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제54회, 57회 4.19혁명 기념식에서 가곡 <그 날>을 작시하여 합창곡으로 편곡돼 추모 공연된 바 있으며, 제60회 현충일 추념식에선 국가보훈처에서 의뢰한 추모곡 <영웅의 노래-충혼가>를 작시하여 서울현충원에서 연주된 이후 국가의 큰 행사에서 끊임없이 불러지고 있다.

 

또한 <새싹>은 2011년 초등학교 5학년 음악교과서(천재교육)에 등재되었으며, 2008년 국립국악원 생활음악에 공모 선정된 <화전놀이>, 제5회 BBS불교방송 동요대회 우수상<연잎에 비 내리면>, 2015년 KBS 창작동요 노랫말 <오월>, 2019 제주어창작동요제 <쇠소깍 여행>등이 우수상으로 당선되었다.

 

수상으로는 부천예술상, 한국동요음악대상, 창세평화예술대상, 문예마을문학상, 도전한국인상, 제5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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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탈 / 오금님

 

몰라봐서 미안해

국보인 줄 모르고 여태 내가 쓰고 다녔어

'

하회 별싯굿 탈놀이에 등장하는 아홉 개 탈 중

유일하게 턱이 어뵤는 이매탈

실눈 웃음이 턱없이 슬퍼 보이는 탈

 

허 도령 꿈에 나타난 산신령이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려면 아무도 모르게 탈을 만들어

춤추어 노여움을 풀어주라 했다는데

짝사랑한 이웃 처녀가 엿보는 통에

미처 다 만들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지

 

꼽등이처럼 휘어진 콧날 아래

드러난 입술과 턱선으로 표정을 읽을 수 있지

초랭이가 놀려도 웃기만 하는 너를 보고

착한 것도 병이라고 수군거려

 

탈은 이미 굳어버린 내 얼굴도장

그 뒤에 숨겨진 익살을 알아주는 이가 있을까

 

한쪽 다리를 절며 슬금슬금 다가와

돈 많은 가짜 양반 흉도 보고 스님 연애사도 얘기하지

네거 웃으니 너를 보는 관객들도 웃어

웃을 일 없는 탈놀이 밖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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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배 / 김해리

 

고향 빈집을 찾았을 때

마루 밑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굴던 검정 고무신

 

밤이면 헐렁해진

아버지의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채마밭 귀퉁이에 오줌을 누곤 했다

찔끔거리던 오줌이 신발 속으로 파고들어도

이웃집 셰퍼드가 칠흑처럼 캉캉거려도

오줌에 젖은 발이

신기하게 포근했다, 무섭지 않았다

 

아버지의 발자국만 따라갔다

흔들리며 굽어가는 등을 보고

이유도 모른 채, 뒤뚱뒤뚱 뒤를 따랐다

그렇게 아버지는 똥오줌을 받아내며

우리의 영토를 다져놓고

평생 한 번뿐인 여행을 떠나는데

그 여행길에 구두 한 켤레 준비하지 못했다

 

오종종히 화인처럼 찍힌 상처 위로

말없이 먼지를 뒤집어쓴 저 빈 배

늘 삐걱거리던 노는 멈추었고

꿈꾸듯

망초꽃 출렁이는 긴 강을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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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직광고 / 김윤아   

 

선 아침

살에 취한

저 사내

어디로 가나

 

첫 새벽부터 파한 인력시장

멀쩡한 사내들도

담배연기 뿜으며 돌아선

뒷걸음의 시간을

짧은 왼쪽 다리에 위태롭게 걸치고

막걸리 한 사발, 김치 한 쪽으로

염치없는 시장기를 숨겨

불과해진 얼굴로 뒤돌아가는

저 사내

발밑을 비추는 그림자 숨은 대낮은

기우러진 어깨 위에

위태로운 사선을 긋고

천만 번을 짓눌려도 고개를 쳐들어

끈질긴 꽃대를 기어코 올리는

민들레처럼

누렇게 뜬 생계를 짊어진 채

 

절룩절룩

 

낮술로 취한 태양이

이죽거리는 거리에 멈춰 서서

멍한 시선으로 하늘만 바라보는

저 사내

 

어디로 가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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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끓어 오른다 / 문현숙

 

하루 종일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이런 날 저녁이면

된장국을 끓이고 싶다

한결같은 마음닮은 뚝배기를 준비하고

밥 벌어먹고 사느라

정처 없이 떠돌았을 두 발을 씻겼다

그중, 왼쪽 정강이뼈 하나 뚝 떼어

뭉근하게 다싯물을 우려낸다

늙은 호박에 새겨진 주름처럼

당신 눈가 주름 두어줄

놀빛처럼 젖어들던 그윽한 눈빛 한 줌

머릿결 쓰다듬으며 세상 가장 예쁘다고 말하던

달착지근한 입술 반 모와

품에 안아 포근하게 데워주던

참갈비뼈, 그 중 삼 번과 사 번 두 대

당신 또한

내가 그리웠을 마음과

내 그리움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즈음

첫 만남, 두근대던 심장 통째로 넣고

나만의 손맛 비밀스레 꺼내

한 큰술 반 넉넉히 풀어 넣으니

뚝배기 속, 당신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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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냄새 / 전영아

 

엄마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계시다 가셨다

집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코를 싸쥐고

지나가며 우리 집에서 생선 썩는 냄새가 난다고 했다.

너무나 가까운 일상이어서 나는 그 냄새를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

엄마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젊디젊은 나이에 방바닥을 짊어지고 있으라는 형벌을 받으신 걸까

내장이 서로 다 통해버려 끊임없이 밑으로 오물이 흘러나왔다

몸은 말할 수 없이 망가졌어도 정신만은 초롱같아서

자리 밑에 비닐을 덧씌우고 당신 손수 기저귀를 갈아 받치면서도

한 번도 내게 몸을 보이지 않으셨던

엄마

 

유방과 자궁이 온전해야 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딸은 엄마의 유전자를 빼닮는다는데

엄마가 겪은 그런 고통은 결코 겪지 않으려고

조그만 근종 하나에 나는 지레 겁을 먹고 여자를 버리고 말았다

저승은 몸이 망가져야만 갈 수 있는 곳일까

 

어젯밤 꿈엔

담벼락에 기대서서 엄마를 기다리며 웅크리고 섰던 어린 내가

저만치서 다라이를 이고 오는 엄마를 보고 쪼르르 달려가고

삼랑진 오일장 초라한 생선장수 좌판에서 허옇게 소금에 절여진 엄마를 만났다

뒤죽박죽 정리되지 않은 꿈에서 깨어난 아침

냉장고에서

사다 놓은 지 한참 지나 살이 물러 물컹거리며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생선 한 토막을 발견했다

삼십 년 전에 엄마에게서 났던 그 냄새를 만났다

지독한 냄새는 길잡이인양 죽음을 데려왔다

 

 

 

 

 

 

[당선소감] 내 삶의 슬픔이 내게 詩를 쓰게 합니다

 

어제는 대설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대설은 첫눈을 선물로 가져와 온 세상을 새하얗게 덮어 놓았더군요.

눈을 치우느라 반나절을 땀을 흘리고 잠시 따사로워진 햇살아래 커피를 한 잔 하고 있는데 당선전화를 받았습니다.

오후 내내 가슴이 두근거려 진정이 되지 않더군요.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났습니다.

벌써 하늘나라 가신지 삼십년도 더 지났고 내가 엄마 보다 더 나이를 먹었네요.

시인이라는 슬픈 이름표를 달겠노라고 스승을 모신지 올해로 십 년째입니다.

혹독하게 혹평을 하시며 첨삭지도를 해주신 황봉학 시인님께 큰절을 올립니다.

시인님은 그동안 제 글을 보아 주실 때마다

이것도 빼고 저것도 빼라고 하시며 다 사족이라며 지우곤 하셨지요.

그러면 끝내는 단 한 줄이 남기 힘든 날들의 연속이었어요.

그럴 때마다 글이 되지 않는 내 자신이 안타까워 울곤 하였어요.

서로 어깨를 겯고 이 길을 걸으며 격려를 아끼지 않는 『작가사상』 문우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함께 기쁨을 나누겠습니다.

아직 설익은 작품에 눈맞춤 해주신 심사위원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 詩가 나를 부릅니다.

오늘밤을 또 꼬박 셀 것만 같습니다.

 

 

 

 

[심사평] 

 

제38회 방송대문학상 시 부문의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었다. 시 창작의 경험이 많지 않은 분도 있었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단련된 분도 있었다. 좋은 시는 과연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 것인가를 새삼스레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좋은 시는 열어젖히고 확장하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한다. 뭉클한 감동을 통해서나 분열 혹은 충격을 통해서 좋은 시는 이러한 일을 하는 게 아닐까 한다. 열어젖히고 확장한다는 것은 한 편의 시 속에서 시상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움직인다는 뜻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시는 시상의 율동을 통해 이 세계를 다른 위치에 옮겨놓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마치 물건을 들어 다른 곳에 내려놓듯이. 시를 창작할 때 이점을 유의했으면 한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6월14일」외 4편은 자신만의 독특한 생각의 끈을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좋았다. 발상도 신선했다. 다만 시「6월14일」은 직유의 과잉을 제한하고 조절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고백체로 일관해서 쓸 필요가 있었을까도 싶었다.

「여름」외 6편은 상큼하고 발랄한 언어 감각과 시상의 전개를 자랑하는 작품들이었다. 생각의 탄력도 좋았다. 사색의 통로를 따라가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감정의 노출이 과도하게 있었다. 일상의 입말과 대화가 시구로 그대로 활용되는 것에 대해서도 신중한 판단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였다.

「기우제」외 4편은 시행이 진행되면서 가장 고조되는 지점이 뚜렷하지 않아 아쉬웠다. 전반적으로 평면적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다만 시 「하이테크빌딩 복도에서」는 여러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개인과 개인의 단절과 불통의 초상을 자연물을 빌려 발언하는 수사가 새롭고 산뜻했다. 가령 “우연히 눈길이 부딪치면 벌레가 떨어진 듯 소스라친다”와 같은 시구가 그러했다. 이러한 장점을 계속 이어가길 바란다.

고심 끝에 제38회 방송대문학상 시 부문 당선작으로 전영아 님의 「죽음의 냄새」를 선정했다. 함께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도 고르고 안정적이었다. 특히 시「죽음의 냄새」는 체험의 몸이 실려 있어서 묵직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엄마’의 늙고 병든 몸을 일상으로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슬픔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특히 “삼랑진 오일장 초라한 생선장수 좌판에서/ 허옇게 소금에 절여진 엄마를 만났다”는 대목에서는 생전 엄마의 퇴모한 몸이 함께 겹쳐지면서 비통에 빠지게 했다. 수상을 축하드리며 앞으로의 정진을 당부 드린다.

-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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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통장 속의 오후 /  정순


잔고가 얼마 남지 않은 통장을 들고서
현금코너에 들른다
곧 새로운 무게로 모였다 헤쳐질 숫자들이 짐작되는
그짧은 동안에 통장을 넘겨다보며
나는 왜 세상의 부적절한 관계들을 생각했을까
내 통장 또한 너무 일찍
주는 사랑에 주저앉고 말았음일까
입금되기만 하면 신기루처럼 어디론가 출금되고 말 사연들
늘 뻘 밭처럼 강팍한 아들의 통장이 잠깐 떠올랐고
한 번도 대면한 적 없는 유선비와
어디에 쓰이는 지도 모를 이름들의 납부고지서들이
뇌리를 스쳐갔다

 

날마다 땀에 전 통장과 함께 현금코너를 들른다
재래시장 한켠 생선 냄새 나는 궤짝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하루치의 푸른 목숨 대신 넘겨받은 구겨진 지폐 몇 장을
내 안의 숫자들이 동의해 주지 않는 용건들을 향해 날린다
골목 저쪽의 절약과 봄날 한때 절반의 외출로 견뎌낸
햇살들을 날리는 것이다
애써 편식을 변명으로 대며 그들의 외식 한 켠에서
소금처럼 찍어 먹던 저녁 한 끼와
몇번이나 집었다 놓았던 새 옷 한벌을 송금하는 것이다
철컥, 또다른 가난의 분량이라도 검증해 주듯
기계음이 울리고 몇 개의 알리바이 숫자들과
아직은 유효하게 남아있는 찌거기 잔액들을 헤아리며
365코너를 나서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
팔월 중순의 가난한 구름 몇 점 서풍에 밀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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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읽기 / 박순남

봄이 점령한 마을은 꽃상여다
밖이 화려할수록 내부가 슬픈.
마을이 온통 꽃으로 덮일 때
듬성듬성 섞여 있는 폐가와 빈집은 마을의 상징이다
시작이 어디고 끝이 어딘지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알 수 없는 마을은 뫼비우스의 띠.
인가 사이 빈집과 별장이 간간이 별자리로 박혀 비어있다
주인 없는 마당마다 봄이 살림을 차렸다
미친 여자의 알쏭달쏭한 표정처럼 알 수 없는 집
사람들이 빈집을 외면하는 까닭은 기억을 불러내지 않기 위해서지만
외면은 적막이 번식하기 알맞은 조건이다
녹슨 당초무늬 철문조차 내력을 함구하지만
붉은 녹은 손닿지 않는 시간을 셈하고 있다
삐걱이는 대문을 열면 풀들이 놀라 일어섰다 주저앉는다
몇 번의 봄을 더 맞을 수 있을까
누구도 돌아오지 않으리란 체념이 단단한 집
집 안에서 필사적으로 담을 넘으려는 장미덩쿨의 오체투지와
집 밖에서 봉두난발 기어오르는 담쟁이가 만나는 지점이 빈집의 화두다
봄의 빛깔로 마모되어 해체되는 기억들
어지러운 마당에 뒹구는 코끼리를 담장위에 올려놓는다

노인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요양병원으로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을의 주인이 자꾸 줄어들었다
말의 온도가 사라지고 체온의 부피가 빠져나간 빈집의 망연자실
집은 더 이상 대를 물리는 곳이 아니다
마을은 더 이상 뼈를 묻는 곳이 아니다
버려진 의자에는 빛과 어둠이 교차되고
이제 나뭇잎 몇 장도 앉힐 수 없어 고꾸라져 있다
바람이 빈집의 행간에서 길게 머물 때
낡은 집으로 늙은 어머니가 헛헛하게 들어서고 있다
손을 덥석 잡아끄는 망령들
있을 것 같지 않은 마을을 기웃거리다
바람의 혼령에 떠밀려 쫓겨날 때
눈 마주친 꽃들이 유령처럼 웃는다
화답하듯 온몸에 우툴두툴한 소름이 돋는다

 

 

 


심사평 박형준(시인)
새로운 기법으로 현실의 대상들과 사물들을 묘사


시를 쓰는 데 있어 편견이나 의식을 배제하기란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니다. 시적 자아라는 시인의 모습을 시 안에서 철저히 억제하면서 그것을 시적 형상언어 속에 숨겨두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사물을 되풀이해 관찰하고 거리를 두고 겨냥함으로써 얻어지는 시적인 이득은 크다. 시인이 어떻게 사물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는 한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어떻게 객관적으로 묘사된 사물로 변해 가는지와 긴밀한 연관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물을 보는 방법, 그것이 사물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며, 시인은 그 이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왜곡 없이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쓰려고 하는 사물에 대해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관념으로 말하려고 하기 보다는 ‘사물들과 함께 대화’하는 상상력이 중요하다. 그럴 때 시인은 관습적인 언어와 문체를 떠나 새로운 기법으로 현실의 대상들과 사물들을 묘사할 수 있는 언어의 모험가가 된다.
제36회 방송대문학상 심사에서 선자의 마음에 최종까지 남은 분들의 작품은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킨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장수남의 <식탁 이야기>는 일상의 작은 사물에서 끌어내는 상상력의 결이 자연스럽고 안정감이 있다. 주방에서 낡은 식탁을 들어내며 한 때는 숲의 일부였을 나무의 습성과 가족의 일상들을 결합하는 추억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장여록의 <미역 서리>는 대상 자체에 집중하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특히 바다 속에서 미역을 뜯는 이미지가 객관적으로 사물을 묘사하는 가운데 신선하게 살아나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현장감을 자아낸다. 박순남의 <빈집 읽기>는 ‘감정의 소재’이기 쉬운 ‘빈집’을 거리를 두고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고백을 시 안의 구조 속에서 녹여낸다. 다시 말하면 빈집과의 대화를 통해 시인의 고백이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때문에 “집은 더 이상 대를 물리는 곳이 아니다/마을은 더 이상 뼈를 묻는 곳이 아니다”라는 관념적인 진술이 관찰과 묘사의 토대 위에서 하나의 고백으로서 울림을 획득하고 있다.
오래 고심 끝에 <식탁 이야기>의 시인이 안겨다주는 식물적 상상력의 고요함을 아쉽게 제외하고 <미역 서리>를 가작으로, <빈집 읽기>를 당선작으로 정한다. 이 세 분의 시들은 시가 기능적인 조립이나 감정의 나열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을 사물과의 대화를 통해 관찰과 언어로 풀어내는 것임을 진정성 있게 보여주었다. 다만 선자가 보기에 작품의 완성을 향해 가는 작은 밀도의 차이 때문에 순위가 정해졌을 뿐이다. 박순남 씨의 당선을 축하하며, 방송문학상에 투고한 모든 분들의 정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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