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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읽기 / 박순남

봄이 점령한 마을은 꽃상여다
밖이 화려할수록 내부가 슬픈.
마을이 온통 꽃으로 덮일 때
듬성듬성 섞여 있는 폐가와 빈집은 마을의 상징이다
시작이 어디고 끝이 어딘지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알 수 없는 마을은 뫼비우스의 띠.
인가 사이 빈집과 별장이 간간이 별자리로 박혀 비어있다
주인 없는 마당마다 봄이 살림을 차렸다
미친 여자의 알쏭달쏭한 표정처럼 알 수 없는 집
사람들이 빈집을 외면하는 까닭은 기억을 불러내지 않기 위해서지만
외면은 적막이 번식하기 알맞은 조건이다
녹슨 당초무늬 철문조차 내력을 함구하지만
붉은 녹은 손닿지 않는 시간을 셈하고 있다
삐걱이는 대문을 열면 풀들이 놀라 일어섰다 주저앉는다
몇 번의 봄을 더 맞을 수 있을까
누구도 돌아오지 않으리란 체념이 단단한 집
집 안에서 필사적으로 담을 넘으려는 장미덩쿨의 오체투지와
집 밖에서 봉두난발 기어오르는 담쟁이가 만나는 지점이 빈집의 화두다
봄의 빛깔로 마모되어 해체되는 기억들
어지러운 마당에 뒹구는 코끼리를 담장위에 올려놓는다

노인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요양병원으로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을의 주인이 자꾸 줄어들었다
말의 온도가 사라지고 체온의 부피가 빠져나간 빈집의 망연자실
집은 더 이상 대를 물리는 곳이 아니다
마을은 더 이상 뼈를 묻는 곳이 아니다
버려진 의자에는 빛과 어둠이 교차되고
이제 나뭇잎 몇 장도 앉힐 수 없어 고꾸라져 있다
바람이 빈집의 행간에서 길게 머물 때
낡은 집으로 늙은 어머니가 헛헛하게 들어서고 있다
손을 덥석 잡아끄는 망령들
있을 것 같지 않은 마을을 기웃거리다
바람의 혼령에 떠밀려 쫓겨날 때
눈 마주친 꽃들이 유령처럼 웃는다
화답하듯 온몸에 우툴두툴한 소름이 돋는다

 

 

 


심사평 박형준(시인)
새로운 기법으로 현실의 대상들과 사물들을 묘사


시를 쓰는 데 있어 편견이나 의식을 배제하기란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니다. 시적 자아라는 시인의 모습을 시 안에서 철저히 억제하면서 그것을 시적 형상언어 속에 숨겨두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사물을 되풀이해 관찰하고 거리를 두고 겨냥함으로써 얻어지는 시적인 이득은 크다. 시인이 어떻게 사물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는 한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어떻게 객관적으로 묘사된 사물로 변해 가는지와 긴밀한 연관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물을 보는 방법, 그것이 사물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며, 시인은 그 이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왜곡 없이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쓰려고 하는 사물에 대해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관념으로 말하려고 하기 보다는 ‘사물들과 함께 대화’하는 상상력이 중요하다. 그럴 때 시인은 관습적인 언어와 문체를 떠나 새로운 기법으로 현실의 대상들과 사물들을 묘사할 수 있는 언어의 모험가가 된다.
제36회 방송대문학상 심사에서 선자의 마음에 최종까지 남은 분들의 작품은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킨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장수남의 <식탁 이야기>는 일상의 작은 사물에서 끌어내는 상상력의 결이 자연스럽고 안정감이 있다. 주방에서 낡은 식탁을 들어내며 한 때는 숲의 일부였을 나무의 습성과 가족의 일상들을 결합하는 추억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장여록의 <미역 서리>는 대상 자체에 집중하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특히 바다 속에서 미역을 뜯는 이미지가 객관적으로 사물을 묘사하는 가운데 신선하게 살아나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현장감을 자아낸다. 박순남의 <빈집 읽기>는 ‘감정의 소재’이기 쉬운 ‘빈집’을 거리를 두고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고백을 시 안의 구조 속에서 녹여낸다. 다시 말하면 빈집과의 대화를 통해 시인의 고백이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때문에 “집은 더 이상 대를 물리는 곳이 아니다/마을은 더 이상 뼈를 묻는 곳이 아니다”라는 관념적인 진술이 관찰과 묘사의 토대 위에서 하나의 고백으로서 울림을 획득하고 있다.
오래 고심 끝에 <식탁 이야기>의 시인이 안겨다주는 식물적 상상력의 고요함을 아쉽게 제외하고 <미역 서리>를 가작으로, <빈집 읽기>를 당선작으로 정한다. 이 세 분의 시들은 시가 기능적인 조립이나 감정의 나열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을 사물과의 대화를 통해 관찰과 언어로 풀어내는 것임을 진정성 있게 보여주었다. 다만 선자가 보기에 작품의 완성을 향해 가는 작은 밀도의 차이 때문에 순위가 정해졌을 뿐이다. 박순남 씨의 당선을 축하하며, 방송문학상에 투고한 모든 분들의 정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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