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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사에서 길을 잃다 / 유금숙

 

 

대웅전 뜨락에 그림자 벗어놓고
해가 산을 넘고 있다
도향당 지붕 단청이 불타고 있다
느린 몸짓으로 저녁 공양을 알리는 북소리
몸을 낮춘 채 기어와 고막을 두드리다
이윽고 심장에 닻을 내리는 저녁
객(客)이 하나 고양이처럼 공양간으로 스며 들어
극락과 지옥을 잇는 구불구불한 행렬틈에
그림자를 슬쩍 집어 넣고
무표정하게 서 있다
건너편 관음전 뜨락에 어둠이 펄럭인다
극락도 지옥도 가지 못한 채
달빛이 깔린 언덕길을 내려오다 그만
일주문 근처에서
발아래 밟히던 그림자를 잃어 버렸다
어둠속에서 그림자가 실타래처럼 얽히고, 그때
섬광처럼 먹장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길 하나를 보았다


 

 

 

<시부문 심사평>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진지한 성찰 평가

 

해마다 발표되는 시편만도 실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시의 독자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는데도 시를 지망하는 사람의 수는 늘어가고 있는 이 기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문학예술이 사람들의 관심권으로부터 멀어지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무엇보다 그것이 환금성의 가치와 거리가 멀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문학예술보다 더 자극적이고 흥미 있는 문화 예술의 장르 예컨대 영화 만화 게임 등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학예술은 지난 연대의 호황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일찍이 맞닥트리지 못한 불리한 여건과 환경에 직면하여 존재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문학예술의 위기가 전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깥의 달라진 현실에서 기인하는 것뿐일까. 물론 그것은 분명 급격한 시대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렇게 그 혐의를 바깥에 두고 뒤로 물러앉아 관망하는 태도는 온당한 것도 아니거니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불행한 처지로 전락한 시의 위상 회복을 위해서 그 이유를 시 안의 현실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엄밀히 말해서 그간 우리의 문학예술은 시대의 발 빠른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는 혜안과 촉수를 갖지 못하였다. 한 시대 전위의 역할을 자임했던 문학예술은 이제 뒷전으로 물러나 팔짱을 낀 채 변화하는 시대 현실을 수수방관해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우리 시단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이런 변화에 대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응전의 태도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자의식이 전제되지 않은 글쓰기의 관성은 무책임을 넘어 부도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나는 왜 문학예술의 여러 장르 가운데 시를 선택하여 쓰고 읽고 있는 것인가, 하는 자문 없이 너무 많은 시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나만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예심을 거쳐 선자의 책상에 놓인 작품은 총 24명의 118편이었다. 그 가운데 이경희와 유금숙의 시편들이 선자의 주목을 끌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현재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다루기보다는 지난 일을 회억하는 것에 바쳐져 있고 현실을 다룬 것들도 그 현상 너머의 이면을 꼼꼼하게 읽어내려는 투시력이 부족했다. 글쓰기란 말의 선택과 배열이다. 즉 매순간 대체 불가능한 최상급의 언어 선택으로 가장 효율적인 배치가 이루어질 때 글쓰기는 완성되는 것이다. 대상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이러한 피땀 어린 정성이 가미될 때 좋은 글은 얻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투고된 것에서 이러한 글쓰기의 기본 원리에 충실한 작품이 그리 눈에 띄지 않아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이경희의 <꽃들이 당겨 핀다>는 무너진 자연 섭리에 대한 안타까움을 피력한 시편이다. 시 속의 현실은 인위적으로 자연의 운행질서를 재편해온 근대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무리와 불행이 들어있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 삶의 법칙에까지 악성 종양처럼 침투해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이는 우리가 당면한 현실에 대한 꼼꼼한 읽기에 해당된다. 하지만 그 예사롭지 않은 발견이 울림이 큰 언어를 통해 직조되지는 않고 있어 가작으로 선정한다.

유금숙의 <구인사에서 길을 잃다>는 무엇보다 시가 언어를 날줄과 씨줄로 엮어 형상미학의 쾌감을 안겨주는 장르라는 것을 예증하는 시편이라서 우선 믿음이 갔다. 가령 “북소리가…심장에 닻을 내리는 저녁” 같은 시 구절은 사물에 생동감을 부여한 미학적 표현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시편들은 대체로 단아하고 정제된 특장이 있다. 또한 자기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어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그러나 형식에 사유가 갇힌 느낌이 없지 않다. 요컨대 사유의 그늘이 깊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좀 과감한 실험의식과 문제의식을 갖기 바란다. 또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자본의 현실에서 그것의 부정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막 물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싱싱한 언어를 빚어내길 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말씀을 낙선자들에게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시인 이재무

 

 

 

<당선 소감>

함께한 분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어

집을 나서 학습관으로 가는 길에 가을 내내 노란 칸나가 피었다 지곤했다. 계절이 깊어지면서 조금씩 시들어 가는 꽃대의 모습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꼭 닮았다. 평생을 다락논배미에 거름을 져 올리다 노란 칸나 꽃대처럼 시들어간 아버지의 청춘…. 해마다 오월이면 소도시엔 강물에 꽃등을 띄워보내는 축제가 시작되고 시집간 딸네 집에 다니러오신 아버지는 오월 그 눈부신 강가에 아득한 기억 저편의 청춘을 펼쳐놓곤 하셨다. 막내딸이 이다음에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던 그 아버지가 이 가을 너무 그립다.

그해 여름. 나는 여행 중이었고 저녁 무렵 구인사를 지나게 되었다. 절은 하안거 중이었고 때마침 저녁공양을 알리는 북소리가 경내를 울리고 있었다.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신도들의 줄에 스며들어 저녁공양을 받아먹고 서둘러 언덕길을 내려왔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낯선 곳에서 일몰을 만나면 느닷없이 몰려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저 아뜩하고 서늘한 느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번번히 길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울음이 차 오르곤 했다. 그날도 나는 명치끝을 치며 올라오는 슬픔 때문에 어두워진 길 위에 오래오래 서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무래도 너무 어린 나이에 오래 집을 떠나 있었던 까닭이리라.

무조건 칭찬해주고 응원해주는 남편과 두 아들에게 이 영광 고스란히 돌립니다. 불신으로 가득 찬 세상과 화해하는 법을 가르쳐준 K선생님께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학보사와 당당하게 시 공부를 할 수 있게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사랑하는 학우들, 문우들과 이 기쁨 함께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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