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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실감 / 임정민

   

캠핑이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후원자에게도 시민에게도 역할이 있었다 검은 원피스를 입은 자들은 어느 쪽에 앉습니까 두건을 쓴 자들과는 어떤 언어로 말합니까 묻자 공중에 먹구름이 있소……하고만 답했다 임신한 자들이 무전했다 자전거를 끄는 자들이 나중에 트로피를 들 것이오

 

공중에 먹구름이 있소……의 포스터가 붙었다 천막을 가리는 자들은 항상 천막의 반대편을 가리킨 채 서 있었다 아기에게 따뜻한 입김이 있는 것을 알고 밤에 후원자는 아기를 들고서 비를 맞는다 침대를 가져다 놓는 일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가구상들은 죽었고 해부되었다 국적이 있는 자들 또한 해부되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가 해부되는 일은 묘한 회화성을 가진다네 너희만 남은 야영에 파문이 있을 너희만 남은 야영에

 

천막의 안에 불이 켜졌다 동경의 문제가 남았다 천막의 안은 벽과 바닥이 같은 색으로 칠해질 것이라 했다 페인트를 든 자들이 들어온 문으로 나갔다 여전히 동경의 문제가 남았다

천막의 안에서 태어난 여자들이 처녀가 되어서 나올 것이며

힘줄과 살로 움직일 것이 예정되었다 공중에 먹구름이 있소……의 포스터처럼

 

관목과 관목 중간에 관목을 심는 자들이 있었는데 백일 된 아이들과 백일에 며칠을 더한 아이들이 그들을 지목했다 그들은 빗속에서 지목당했다 그들이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차분히 말했다 탑과 탑 중간에 탑을 쌓읍시다 후원자가 말했다 우리는 환호 대신에 무엇을 합니까 그들이 말했다 환호 대신에 간격이오 후원자가 말했다 환호 대신에? 그들이 말했다 환호 대신이라면 굴삭기의 동작이오

 

술에 취한 자들은 숨었거나 애초에 없었다 아무도 그들을 경멸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았지만 처음부터 없었다 캠핑은 여전히

코너이므로

술에 취한 자들을 모두 그리워했다

양손에

찌그러진 자비를 들고

할멈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자비를 손에 든 할멈들이 모르는 언어로 아름다운지를 묻고 그것을 모두에게 건네며 이미지의 주머니랑 바꿨다

맨 마지막에 검은 원피스 입은 자들만 남았다

굴삭기의 소음 앞에서 공중에 먹구름이 있소……의 포스터가 지켜보는 가운데 실제로 먹구름이 있었다 후원자는 지쳤다 자러 갔다

 

할멈들은 아름다운지 묻지도 않고

검은 원피스 입은 자들을 빼앗았다

그들은 찌그러진 자비를 남기고 떠났다

지팡이가 없었으므로

외국이나 다름없는 야영장을 걸어서 나가진 못했을 것이고

근처에 남았거나

탈 것이 있었다

 

전차의 안이 파멸의 안은 아니지요? 여기에 모인 자비들이 찌그러진 가마솥은 아니지요? 하고 묻는 어디에나 있는 어린 사냥꾼들

 

야영장의 그림자마다 각자의 차양이 있었다 아기를 들고 선 자들과 무거운 물체들 간에 갈등이 있었다 청년들은 물체의 편에 섰다 물체의 편에 서는 일은 환호를 대체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변하기 쉬웠고 단지 지목을 피해 갈 뿐이었다 비가 그치면 재주 있는 자들은 캠핑하지 않는다 비가 그치면 캠핑은 사라진다 포스터를 가리는 자들이 포스터의 귀퉁이가 되었다 비가 그치면 사냥꾼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천막의 안과 자리를 바꾼다

 

포박당한 자들이 문을 열고 나왔다

묶인 손을 푸는 동안 처녀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농담을 주고받고 난 다음 청년의 편에 섰다

처음으로 물체의 편에서 생각하기로 했지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쓰임새였다

 

반지를 낀 자들이 미로 속에서 뒷걸음을 쳤다 하나의 반지를 나눠 낀 자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벽돌 이상으로 무거운 자들이라고 불렀다

예외 없는 기다란 울음의 입에 벽돌 이상으로 무거운 입을 맞췄다

미로 속에서 입맞춤이

방향을 모르고 떠다녔다

 

전차의 안으로 흘러 들어간 입맞춤을 전차가 토해 낼 때까지 그랬다

어린 사냥꾼들이 숲을 만들었고

숲에서 야영장이 자랐다 밤에

아기를 들고서 비를 맞는 사람들 앞에 야영장이 자랐다

숲은 물체의 역할이었다

자비를 남기고 간 할멈들은 끝없이 어두운 숲 속에 숨어

주머니를 쪼아 먹고 있었고

입맞춤은 그자들의 입술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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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 강지혜

 

유리부는 사나이가

대롱에 숨을 밀어 넣었다

행성처럼 부푸는

 

이윽고 사내가

숨을 들이마시자

따뜻한 유리물이

식도를 타고

 

흘러 갔다

 

폐와 혈관에 맺히는 성을 바라보며

 

박수를 치는

쥐 떼

 

들이시면 들이쉴수록

사내의 볼을 뚫고

 

유리가락이 흘러 나왔다

음악처럼

고양이 수염처럼

 

외부인의 그림자가 스치는 공방의 밤

 

종종 떠나지 않고

 

내부가 유리로 된

사내들이

조심조심 가마 옆으로 모인다

 

기적처럼 해가 뜰거야

 

스노볼을 부풀려 줄게

 

박제된 기관지로

 

그리고 키스를 나누는 몇 사람

 

신장이나 고환에서

교회와 해변이

태어나고

 

벌려진 입술 사이로

떠도는

따옴표들

 

미로를 얻은 사내들이

소리를 듣는다

 

어디에도 간 적 없는

 

어디로도 온 적 없는

 

 

 

 

 

[수상소감]

 

시 쓰는 일은 힘이 듭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의 힘에 매료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것이 힘이 됐을 줄은 몰랐습니다. 힘을 나눠 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아름다운 아빠, 엄마, 경구. 시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 주는 나의 상현. 심재휘 선생님, 이영주 선생님, 시를 만나고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셔서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고개를 들고 조금 더 걸을 수 있게 해 주신 김행숙 선생님, 이원 선생님, 서동욱 선생님, 고맙습니다. 대진대 문창과 선후배들, 힘을 가진 것들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습니다. 꿈을 향해 간다며 대단하다 말해 주는 친구들, 이 비루한 시대에서 우리 힘을 잃지 말자. 그토록 바라던 일이 생겼는데 저는 이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 내야 하나, 다시 힘이 듭니다.

……

이것이군요. 시의 힘이란. 두려움을 짓밟는 언어의 능력. 그 힘을 갖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겠습니다.

 

 

 

 

 

돌고래 선언문 / 최지인

  

   손과 죽음을 사슬이라 부르자. 그들이 손가락을 걸고 있는 모습을 엉켜 있는 오브제라 부르자. 그들은 손가락을 쥐고 엄지와 엄지를 마주한다. 구부러진 몸이 손을 향해 있다. 손이 죽음을 외면하는 것을 흔적이라 부르자. 빠져나갈 수 없는 악력이 그들 사이에 작용한다. 손이 검지와 중지 사이 담배를 끼우고 죽음은 불을 붙인다. 타오르는 숨김이 병원 로고에 닿을 때 그들의 왼쪽 가슴은 기울어진다. 손에 입김을 불어넣어 주자. 손이 기둥을 잡음으로써 손은 기둥이 되고 그것을 선(善)이라 부르자. 죽음이 선의 형상을 본뜰 때, 다리를 반대로 꼬아야 할 때, 무너질 수 있는 기회라 부르자. 사라진 손을, 더듬는 선을, 부드러운 사슬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들의 호흡이 거칠어지면 담뱃재를 털자. 흩어짐에 대해 경의를 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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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의 경우 (외 4편)

 

   안미린

 

 복제되고 다음 날 같다

가가 다에게 고백을 했다

전생에 나는 너를 잡아먹은 적이 있어

나는 외계인이 아니었어?

아니었어

아니었어?

어른이었어,

여자애라면 머리를 돌돌 말아 고정시켰지

 

노을과 환타가 동시에 쏟아졌을 때 가는 울었어,

다가 나에게 고백을 했다

강제적인 첫 경험들 말야

목이 부러진 인형에 얼굴을 붙여 주는 시간

내와 네의 발음을 구분하는 숙제

색연필을 쏟은 와락 같은 거

색깔이 덜 마른 벽에 대한 불안 같은 거?

옷핀의 구조 같은 거

셀 수 있는 모서리

잔디로 결정된 풀들의 길이

여름의 정글짐

겨울의 정글짐

물을 먹지 않고 마시는 감각과

씨앗 근처의 눈부신 맛

팔을 벌려 납작해지며 벽을 안아 봤던 날

나도 몰래 홀수로 얼음이 얼고

무수해졌어

자기 이외의 생명?

자기 이외의 생명,

메롱하는 것

 

나는 라에게 거짓말을 했다

네 키와 같은 사람은 거리에 가까워

너와 마주 댄 등은 깊이에 가까워

라는 흔들릴 만큼 웃었다

나는 제외될 만큼 웃었다

꽉 쥔 주먹만 들어가는 장갑이 일곱 개 완성되었다.

 

 

 

 

흐린 기린

 

 잠시 진화가 멈췄다

 

얼굴에 남겨진 코를 눌러 봤다

돼지 코가 되었지만 웃지는 않아

동물원이 무너져서 다행이다

동물원이 사라져서 안타까워

어째서일까 아무도 기린을 훔치지 않아

방을 지어 올린다면 방의 가능성

얼룩을 따라 살살 자라날 얼룩이들

천장이 동물원이 될 텐데

천장을 만질 수 있는 건 여전히 강제적인 것과

그 색이 싫어서 불어 터뜨린 풍선

 

옛날 기린들이 기어올 텐데

흰 색소의 솜사탕을 물고 흐려지면서

다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가까운 동물원에서

가까운 너희 집으로

멀리서 보면 아름다워서 아무도 몰라보겠지

안녕 안녕 손을 흔들면 내 팔이 아니었다고 내가 흔드는 지진

 

진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기린 없는 높이로 방의 전등을 갈고

나는 완전한 키가 될 거야

너는 조금씩 네가 될 거야

기린들이 전부 진화했을 때

목은 무늬였다니

 

 

 

우산의 안

 

 

 

깨끗하게 잘린 샴쌍둥이가 가볍게 다툰 후

거울을 반으로 가른다

다른 나라와 틀린 나라 사이로

눈이나 새가 내린다

 

왼쪽의 아이가 팔을 박박 긁으면

오른쪽의 아이가 잃은 팔에 놀라 알약을 토해 낸다

흔한 종교들은 여름에만 믿고

왼쪽의 아이가 좀 더 건강해진다

 

일기장은 어쩌지?

오른쪽을 잘라 내며 오른쪽의 아이가

 

~척하는 습관을 들여야 해

등을 넓게 계산한 스웨터를 뭉치면

둥근 무기들이 감춰질 거야

멀리 피가 묻은 건?

삭제될 거야, 서로의 소매에서 한 명처럼 기도한다면

지도 같은 손금을 겹쳐 미지근한 차원을 만든다면

 

우리가 악수한다면?

지도 같은 손금을 겹쳐 푸른 미로를 만든다면?

머리와 어깨를 부드럽게 끼워 맞추고 깔깔 웃는 왼쪽

 

우리는 올 풀리는 시간과

리본을 묶어 주는 기계

녹스는 손톱들을 조심해야 해

겉과 끝의 우산살들

아이의 오른쪽이 시험 삼은 우산을 착 접으면서

 

 

 

멀리의 감각

 

 

 

그 순간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너희 집 변기가 무릎부터 뼈가 되는 장면

 

잘린 나무와 나무 밑동이 동시에 의자가 되었지만

모두가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모두가 의자에 앉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의자의 그림자가 사람의 뒷면에 가까워졌다

식탁 의자들은 떼를 지으며 발랄해졌고

흔들의자의 곡선은 안쪽으로 휜 종아리를 달달 외웠지

 

그네는 의심스러울 만큼 견고했지만

오늘도 세계를 부드럽게 밀어 올렸지만

줄을 잡았던 손바닥에선 철철 흐르는 피 냄새가 났다

끊기는

무너지는

쏟아지는

가라앉는

착지한 순간

 

 

 

반투명

 

 

 

스무 살의 신이 있다

거울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결과물

 

갓난애 눈물을 굳혀 만든 양초를 잃어버렸어

꿈속의 나와 꿈 밖의 내가 동시에 울기로 한다

눕혀진 거울을 세우던 최초의 시간

한번쯤 울어 보려고 퇴화하는 마지막 감정

나는 꿈 밖의 내게 이름 불렀지

나 자신을 전부 만져 봤던 감각을 기억해?

입에 넣어 봤던 꼬리의 길이를 가늠해?

투명의 반대말이 뭐게?

 

스무 살의 신이 있어

빛으로 빛을 비추는 짓 한다

그림자가 검정색 인형에게 이름을 줬다 빼앗았을 때

눈물처럼 눈알이 떨어졌을 때

다음은 네 차례야

충분해진 촛불을 끄고

케이크에 얼굴을 푹 박아 줄 차례

 

 

 

〈당선소감〉

 

 

   어쩌다 오물이 묻으면 두 번 반 절하고 싶던 시집들, 다시 읽고 싶어서 잊고 싶던 시들, 시가 좋았지만 저 자신이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외계인의 가능성을 흠모하지만, 외계인의 피부를 가질 수는 없듯이 말이에요. 밤중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스스스 일어나 묘지로 향했습니다. 맨손으로 비석에 쌓인 밤 먼지를 털어 냈습니다. 12시였으니까 그들 중 두 명쯤 부스스 일어나 스르르 축하해 주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여기는 미국이지만, 언어를 배우기보다 어떻게 하면 계속 모를 수 있을까 골몰해 왔습니다. 모르는 언어란, 알아듣지 못한다는 묘한 안도감이란, 오래도록 앓고 있던 이명을 마침내 잠재워 주었으니까요. 이 시들은 겨우 고요한 시간, 오전의 생생한 묘지에서 쓰인 것입니다. 혼잣말을 해도 손끝은 언제나 따뜻했습니다. 없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살아 있었어도, 우리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묘지의 외국인들에게 고맙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겐 살아 있으므로 한 명 한 명 만나서 감사를 드릴게요.

   계속 시를 쓰겠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매끄러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계속계속 시를 쓰겠습니다. 외계인의 완성된 눈망울을 가질게요.

 

————

▶안미린 / 1980년 서울 출생.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

 

   "안미린의 시들은 자유로운 어법 그 자체였다. 과감하게 생략하고 비약하고 가로질렀다. 말맛이 탱글탱글 살아 있었다. 시선은 다이내믹하게 줌인과 줌아웃을 했다. 그럼에도 행간에 계절의 지나감과 경험했던 감각들의 애틋함이 다소곳이 숨겨져 있었다. 언어로는 힘주지 않아 경쾌했고 감수성에는 깊이가 있어 묵직했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구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풀처럼 심어 두곤 했다. 신뢰감 이상을 맛보았달까. 이런 신인이 이제 새로이 시인의 세계에 진입하여 우리의 동료가 된다는 사실에 설렜다."

      ―심사위원 김소연 시인 심사평 중에서

 

▶ 심사위원 _ 김소연・김수이・김행숙

 

 

〈심사 경위〉

 

   올해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향한 응모자들의 뜨거운 열의와 성원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해를 거듭할수록 응모작의 수가 급증하여 《세계의 문학》 편집진들은 그 양적, 질적 성장으로 인해 어느 때보다 큰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심사에 임했다. 2012년 제6회 <세계의 문학 신인상〉 시 부문에는 275명의 응모자가 2967편의 작품을, 소설 부문에는 350명의 응모자가 786편의 작품을, 평론 부문에는 5명의 응모자가 10편의 작품을 투고하였다. 심사 진행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예심과 본심위원의 특별한 구분 없이, 심사위원들의 1차 독회를 거쳐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다시 교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응모 편수가 적은 평론 부문은 바로 본심으로 넘겼다. 소설 본심은 2월 6일, 시 본심은 8일, 그리고 평론 본심은 14일에 민음사 회의실에서 진행하였다.

 

   예심을 통과하여 본심에 오른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시 부문

김 선_ 「우리들의 회의」 외 9편

김해선_ 「꼽추」 외 9편

박수지_ 「개의 날」 외 10편

안미린_ 「라의 경우」 외 9편

이경진_ 「수사반장」 외 9편

이상협_ 「사진 감광사」 외 9편

임지은_ 「토요일의 지느러미」 외 9편

임 현_ 「벌레들」 외 9편

정 순_ 「참새」 외 9편

조다희_ 「뒤뜰에 뱉어 놓은 신드롬들의 악상」 외 14편

최형욱_ 「연주가 시작되려는 순간」 외 9편

한인준_ 「게스트 하우스」 외 9편

 

 

                                          —《세계의 문학》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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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 성동혁

 

정물화는 형이 몰래 움직여 실패했다

 

우린 나란히 앉아 닮은 곳을 찾아야 했는데

 

의자에 앉아

의자 위에 있는 우리를

보는

의자들 의사들

 

세모로 자라는 지문을 사포질하고

 

형과 함께 뱃속에 있었다 생각하니 비좁았다

엄마는 괴물 같은 새끼가 두 개나 있을지는 상상도 못했다

구멍을 나갈 때 순서를 정하는 것 또한 그러했다

 

우린 충분히 달라 더 잘할 수 잇을 것 같았는데

나만 주목받는 것 같다

그는 여전히 중환자실에 누워 병신같이 나를 올려 본다

 

나란히

함께

 

그것은 월식에 대한 편견이다

 

모르핀을 맞지 않아도

 

불을 켜면 자꾸 형이 보인다

 

 

 

 

 

촛농

 

그네를 타는데 자꾸 발이 끌린다

이제 휘파람이 나오지 않는다

나무가 바람을 흩날리며

휠체어를 끌고 가는 가을

너 없는 정원은 허물어졌으면 좋겠어

카나리아는 그림자 없이도

벤치를 떠나고

나무들의 엇나간 손뼉이 아스팔트에 쏟아질 때

구름이 너무 선명해 플라스틱 같을 때

형광펜으로 몰래 표시해 둔 네가 앉을 자리

후회가 북극에서 해결되었다면

북극은 특별시가 되었을 텐데

지금은 장갑을 끼면 견딜 만한 추위

서랍을 열면 지구본처럼 동그랗게

얼굴이 안으로 뻗어 간다

새벽은 스모키를 짙게 하고

창문을 활짝 열어 내 영혼이 갈 수 있게 해 줘요

다들 영원히 살 것처럼 바쁘게 오가네요*

카나리아소리도 물소리도 아닌 것이

하얀 그림자를 가지고

 

 

———

* 로스비타 파흘레크(~2003.3.5)

“기다려요 로스비타 파흘레크. 모르핀이 없는 곳에서 들으며 예쁜 무덤.”

 

 

 

 

 

여름 정원 

 

 

누가 내 꿈을 훼손했는지

 

하얀 붕대를 풀며 날아가는 새떼, 물을 마실 때마다 새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림자의 명치를 밟고 함께 주저앉는 일 함께 멸망하고픈 것들

 

그녀가 나무를 심으러 나갔다 나무가 되어 있다

 

가지 굵은 바람이 후드득 머리카락에 숨어 있던 아이들을 흔든다 푸르게 떨어지는 아이들

 

정적이 무성한 여름 정원, 머무른다고 착각할 법할 지름, 계절들이 간략해진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정원에 있다 슬프고 기쁜 걸 청각이 결정하는 일이라니 차라리 눈을 감고도 슬플 수 있는 이유다

 

정원에 고이 잠든 꿈을 누가 훼손했는지 알 수 없다 눈이 마주친 가을이 담을 넘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고 걸쳐 있다

 

구름이 굵어지는 소리 당신이 땅을 훑고 가는 소리

우리는 간헐적으로 살아 있는 것 같다

 

 

 

 

 

 

당신이 날 재앙으로 인정한 날부터 언덕마다 달이 자라났네

 

슬리퍼는 낙엽을 모방하며 흩어지고 모이고 계절은 용서까지 치달았다

 

창세기를 여러 번 읽어도 나는 가위에 눌렸다

난간에 심은 바람에 대해 변명하지 못했다

신앙과 종말을 함께 배워 불안하진 않았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나오는 허밍은 나의 궤도이다 입을 닫아야 들리는 곡선

죄가 유연하고 둥그렇다

달이 찰 때마다 미안한 것들이 생긴다

 

죄를 앓고 난 뒤 쿨럭쿨럭 보라색으로 자란 바람이

살 나간 우산 안의 그림자를 밀쳐 내고

몸을 디밀며 안녕?

 

당신이 옆집에 살았으면 좋겠다

종량제 봉투 안에 가득 찬 악몽을 들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눈인사를 할 수 있도록

새벽 기도를 나가지 않고도 자라난 달을 버릴 수 있도록

동글네모스름한 초인종을 달고

 

 

 

 

 

퇴원

 

   우린 깨진 컵으로 만들어진 구름, 호수 위를 날아가는 새의 얼굴이 보인다 아이들은 바람의 맛을 닮고 계단을 디딘다 날 수 있을 것 같다

 

   뜨개질을 해 놓으면 아이들이 뛰어온다 침대 위에서 전나무를 오래오래 키운다 전구로 익어 가는 아이들, 우린 울리지 않는 종을 매달고 즐겁게 메리크리스마스! 아름답게 이불을 덮는 날

 

   눈이 부셔 낮이라 불리는 과일, 레몬을 짜는 시간, 눈을 감고 문을 연다 놓아줄게 베개 옆으로 기운 연못, 동그랗게 떠나는 나의 작고 시큼한 아이들

 

   거대하게 부푸는 의자 공장으로 가는 길, 너희들만 웅성거리는 골목을 찾는다 어느 곳에 앉아도 용서받을 수 있는 마을, 깔깔대며 떨어지는 너희들의 스케치북

 

   너희들의 섬은 욕조 안 두 개의 무릎이다 물에 사다리를 빠뜨린다 다리 사이로 디곡신*을 길어 올리는 사람들, 디곡신 디곡신, 이것은 백 년 만의 폭설입니다 식탁 위에 하얗게 쌓이는 눈눈,

   눈이 녹고 손목이 가늘어진다 혼자 어른이 되는 게 죄를 짓는 일 같다 유리 가득, 울지 않는 아이들의 발꿈치

 

 

———

* 디곡신(digoxin) : 강심제.

 

 

 

 

 

그녀가 죽고 새벽이 십 센티미터 정도 자랐다

 

 

서랍을 여는데 서랍이 깁니다 차곡차곡 바람을 꺼내어 헝클어, 떨어뜨립니다

 

누나는 오랫동안 럭비공 흉내를 냅니다 출렁출렁 굴러다니는 비밀

 

투명한 커튼 앞에서 훌렁 그림자를 벗었습니다 누나와 나는 그때부터 그림자가 없었습니다

 

이름과 지름을 몰라 떠다닌 그때 누나와 나는 그림자를 벗고 키가 자라기도 했지만

 

다시 그림자를 가질 수 있다면 손으로 검은 나비를 골목마다 떨어뜨려 봐야지

 

깊은 풍선을 가지고 나의 길 밑으로 당신의 길을 빠뜨리며 가야지

 

(이이이이만치) 손가락을 벌리면, 보이세요? 당신이 세상에 낸 구멍 그곳으로 키가 자란 새벽

 

달이 자라고 있습니다

 

 

 

 

 

6

 

   발가벗겨도 창피하지 않은 방에서

   나의 지루한 등을 상상한다 사내들이 아이의 배를 때리는데 여전히 아이가 죽는다

 

   마스크를 오래 보고 있으면 마스크 뒤의 얼굴 그 얼굴 안의 얼굴

   보인다

   친구가 없는데 친구 목소리가 들리는 방 대답하지 않는데 손뼉 치는 방 낮과 밤이 없는 방

   침대 밑에 강이 흐른다 더 무거워지면 익사할 수도 있겠다 풍덩 당신의 본명은 성경이었는데 이름값 못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때렸다 분명

   난센스라 했다 너는

 

   그녀가 현관 밖에 사 일 동안 서 있고 나는 현관 안에서 죽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왜 만날 나만 잔다 하시니) 살았다 어제, 어떠한 신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린 서로 믿지 않는다

 

   나의 구멍이 도넛 같다면 얼마나 달콤하게 죽을 수 있을까 헤드폰을 껴도 밀려오는 반투명의 소리들을 모른 척하고 달콤한 입체를 찾는다 긴 이름들이 비뚤어진다

 

   여섯 번째 일들이 오고 있다

 

 

 

 

식빵

 

   나는 손금엔 없는 사람이 돼요 그러니까 엄마, 바람 속에 이스트 오 그램을 넣어 주세요 블라인드를 올리고 십자가에 걸린 토끼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이 病이 사라진다면 깡충깡충 회개의 어조도 귀여운 의성어 정도로 해결된다면 나는 오랫동안 일곱 살일 수 있어요 배꼽은 원죄의 표시이었나 봐요 밟은 사람도 없는데 배꼽이 부어올라요 전 기도만 하고 싶은데 금식을 하라는 사람들 때문에 깊어지는 링거를 보며 금식 기도를 시작해요 걷지 않아도 기계가 나의 창법을 따라 해도 띠띠 그림자의 무게를 느낄 수 있어요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아이를 보는 것만으로 나는 쉽게 어른이 되는 기분이지요 면회가 미뤄지고 오랫동안 천장이 가까워질 때 나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나는 모르핀 앞에서도 식빵처럼 자라나는 외출을 상상해요 숨 쉴 때마다 부푸는 기척 면회 시간이 오고 뚱뚱한 바람이 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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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동혁 / 198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진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문창과에 재학 중이다.

 

 

 

 

제5회 <세계의 문학 신인상>_ 시 부문 수상소감 / 성동혁

  

   수술실을 들어갈 때마다, 나보다 병이 길까 봐 걱정됐습니다. 외롭고 두려운 나를 위해 수술대에 함께 누워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모든 문장 뒤에 아멘을 붙이는 꿈을 꿉니다.

   수술실 밖에서, 나 없는 식탁에서, 오래오래 기다려 준 아버지 어머니 누나 사랑합니다. 나를 위해 헌혈을 하고 기도를 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나는 당신들로 흐릅니다.

   시는 나중에 써도 되니 항상 건강하라고 말씀하시는 서범석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집 밖의 아버지이십니다. 시 앞에서 항상 설레게 해 주신 이원 선생님, 그리고 김행숙 선생님, 서동욱 선생님, 감사합니다.

   나의 심장과 폐는 다섯 번을 버텼습니다. 우리가 병보다 세고 아름답다는 걸 증명하겠습니다. 별나고 연약한 아이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덤으로 얻은 삶, 소중히 숨 쉬겠습니다.

 

                        

   —《세계의 문학》201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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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달 씨, 램프를 끄며 / 심지아

 

지구에 태어나 얻게 된 건 현기증이에요 수달씨 둥근 이마로

포물선을 그으며 종종 졸도합니다 아름답게 쓰러지기 위해 물가에

살아요 물고기의 머리를 뜯으며 어린 무용수의 발끝처럼 포즈를

고심합니다 머리 뜯긴 물고기들은 지느러미를 파닥여요 열렬한

격렬함입니다 날마다 나는 더욱 날카롭게 안을 수 있어요

깨지 않는 악몽을 물고 물고기들 내게로 와요 병신들, 큭큭 웃는

우리는 병신입니다 나는 어두운 것에 쉽게 매료됩니다 엄마가 남긴

유산은 악습이에요 구멍 속에 꼬리를 넣어야만 잠들던 엄마의 낮과 낯들,

낮과 낯은 같은 말이었을까요 어둠을 오래 바라보느라

내 눈은 검은 돌멩이처럼 반짝이는 줄도 몰라요 붉은 수초를 등에 감고

물방울을 높이 던집니다 내게 말을 걸 땐 물속으로 들어와요

기괴한 몸짓도 이곳에서는 물의 동작이 됩니다

물결에 지문을 풀면 녹슨 안개가 피어나요

 

 

 

 

편지들의 이스파한* / 안웅선

 

그러니까, 눈동자를 채워 넣어야 한다면 이스파한

 

이라고, 부신 눈이 감길 때 세계의 절반이 보인다고, 바랜 길들이 모인 곳, 하늘을 찢어 담을 올리고 훈증한 장미를 바른 집이라고, 주소를 알 수 있다면 낡고 흠집 난 트렁크 하나 먼저 보내 놓아도 되겠느냐고, 쓴다

 

장미의 계절이 오고 있다고,

그러니까, 잘못 배달된 편지를 발송함에 넣어 주고도 돌아서기 힘든 시간이 온다고

그러니까, 눈동자가 까매지는 계단

태울 것은 어둠만 남은 사막과 도시, 숨겨진 무덤들 위로 새벽이 유형(流刑)되었다고

 

장미들은 내 눈동자에서 길을 잃은 상단이 지나온 밤들을 훔쳐보게 될 것이다

 

자물쇠가 달린 트렁크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잠들기 전에 꺼내 놓은 눈동자를 숨겨야 하기 때문

 

흘러간 꿈을 읽어 내기 위해서는 돋보기가 필요하지 블록하게 부푸는 투명들을 모은다

 

점자로 쓰여 밀봉된 주소가 도착했으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새로운 안경을 사러 가야지

기도의 체온으로 서로가 눈꺼풀을 쓸어주는 새벽, 입술을 모은 장미들에게 다가가는 방법

그들은 유독(幽獨)의 가장자리에서 나를 원하고 있어

 

늙은 사도는 텅 빈 눈에 세계의 절반을 담고서도 계시록 위에서 쓰러진다 그의 눈빛을 궁금해 한다면 인편에 내 트렁크와 열쇠를 전해 둘게요

 

그러니까, 까만 눈동자가 비어 간다면 이스파한 옛 길을 걸어 반송되는 편지들이 모이는 곳

그러니까, 이스파한, 장미들의 계절

 

 

* 사산조 페르시아의 옛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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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체 / 김상혁

  

 내가 죽도록 훔쳐보고 싶은 건 바로 나예요 자기 표정은 자신에게 가장 은밀해요 원치 않는 시점부터 나는 순차적으로 홀홀히 눌어붙어 있네요 아버지가 만삭 어머니 배를 차고 떠났을 때 난 그녀 뱃속에서 나도 모를 표정을 나도 몰래 지었을 거예요 어머니가 그런 아버지 코를 닮은 내 매부리코를 매일 들어 올려 돼지코를 만들 때도 그러다가 후레자식은 어쩔 수 없다며 왼손으로 내 머릴 후려칠 때도 나는 징그럽게 투명한 표정을 지었을 거예요 여자에게 술을 먹이고 나를 그녀 안으로 들이밀었을 때도 다음날 그 왼손잡이 여자에게 뺨을 맞았을 때도 내가 궁금해한 건 그 순간을 겪는 나의 표정이었어요 은밀하고 신비해요 모든 나를 아무리 잘게 잘라도 단면마다 다른 표정이 보일 테니 나를 훔쳐볼 수만 있다면 눈이 먼 피핑톰(peeping Tom)이 소돔 소금기둥이 돼도 좋아요 거기, 거울을 들이밀지 마세요 표정은 보려는 순간 간섭이 생겨요 맑게 훔쳐보지 않는 한

 

 

 

  이사

  일상 집들이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모든 가족에겐 아이가 필요합니다

  엄마는 재혼을 포기하셨지요

  집을 바꾸고 학교를 아빠를 바꾸는 일

  뭐 대수라구요

  낯선 장소가 그립습니다만 언제나처럼

  다락방 하나 긴 마당이 하나 그리고 공터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하나

  다락방에는 가족들이 꺼리는 사진과 내가 있습니다

  긴 마당에서는 밤마다 나무 사이로 자전거를 타야 하고요

  공터는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피 묻은 아이들이 뛰어나오는 곳

  이번 공터도 엄말 닮았어

  나에게 짖던 강아지들은 쥐약을 먹고

  놓아기른 병아리들은 식탁에 올랐습니다

  곧 떠날 동네에는 작은 무덤이 남고 우리는 다른 집을 찾습니다

  나무가 꺾인 자리

  불모의 터에서는 왜 같은 냄새가 날까 이사 갈 때마다

  내 살갗 위로 눈알이 하나씩 늘어야 합니다

  가까이서 냄새를 맡는 건 천박한 짓이야

  자꾸만 혀로 입술을 핥지 말래두?

  버릇이 없어 나는 해변으로 자주 보내졌습니다

  엄만 죽어서 인공위성이라도 될 테지요

  가족들 무덤 위에 말뚝이라도 심어 두려구요

  친구를 만들지 않는 일이 코 막고 연애를 하는 일이

  뭐 대수랍니까 나는 안목이 재주를 초과하는걸요

  낙서 같은 조감도는 묻어 두고 짐을 꾸립니다

  손금이 복잡한 손은 깨지기 쉽습니다

 

 

 

 오늘의 편지

 

  손톱이 깨지면 아침이 와요. 야구공이 무서워요. 요즘도 나는 발야구를 해요. 오른발잡이 1번 타자. 동생이 의심해요. 당신이 내 어머닐 닮았대요. 발각되면 이별을 고할래요.

 

  청첩장을 받았어요. 슬슬 취직도 하려고요. 나는 집주인을 이모라고 불러요. 죽어 버리겠다던 당신이 멀쩡해요. 내 친구는 전처럼 자기 사촌을 사랑하고 있어요.

 

  1루 주자가 2루 주자를 앞질러요. 몇 명쯤 남아도 괜찮아요. 나는 진지하게 오른발 축구화를 신었어요. 어젠 여자 친구가 아이를 지웠어요. 반지를 팔아 같이 광어를 먹었어요.

 

  한겨울의 결혼식. 비슷한 사정이 있겠지요. 치매증 할머니가 당신을 기억해요. 내일은 홈런을 치려고요. 수염이 난 건 나 혼자뿐이에요. 나는 기도원으로 곧 여행을 떠나요.

 

  겨울이 무서워요. 야구공처럼 그래요. 부업(副業)이라도 배우려고요. 안전하다면 무엇도 괜찮아요. 2번 타자도 괜찮아요. 다시 당신도 괜찮아요. 더 추워지면 미리 병원에 가려고요.

 

 

 

  홍조

 

  똑같아 지려고 교회를 다닙니다 주보로 비행기를 접으면 엄만 속상해하셨지만요 거기 적은 소원은 지킬 만한 비밀 치마를 뜯어 만든 내 바지엔 주머니가 없습니다

 

  붉은 얼굴로 손에 쥘 수 있는 것들만 생각합니다 소문은 허기를 감추지 못해서요 버짐이 정오 수돗물로부터 집요하게 전염됩니다 아이들은 돌려 말할 줄을 몰라 나를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언 손으로 책장 넘기며 그립던 빼빼한 여름, 종이마다 손때는 내가 넘어진 자리구요 저녁 어스름 악어 눈을 뜰 때까지 나는 구름 쳐다보는 일을 그만두지 못했습니다 엄마가 술을 파는 이유도

 

  무서우니까 오늘 밤에도 기도를 해야지 종일 정글짐이나 오르내리면 아무리 추워도 죽을 만한 겨울은 없고 운동장은 왜 얼지 않을까, 혼자 소매로 모래를 쓸며 궁금합니다 미친 여자 가랑일 봤어, 낄낄대는 소년들 나는 문득 태어난 일이 쑥스럽습니다 

 

 

 

  호랑이 엄마

 

  엄마가 젖에 바른 호랑이 연고

  얼마나 매웠는지

  두 살이 되도록 젖을 못 떼던 내가

  그 젖통만 보면 도망을 가더란다

  멋들어진 훼미닌 83호 머리

  엄마는 눈이 매섭고 손이 억셌다

  자세한 내막은 몰랐으나

  아버지는 쫓겨난 것이었고

  거짓말쟁이였다 콧등이 길어서

  나는 자주 꾸중을 들었다

  까맣게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나에게 글을 가르쳤고

  부종(浮腫)에 효과 빠른 라식스에 대해

  달마다 일러 주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만큼

  엄마 몸이 붓는 게 무서웠다

  부어오른 건 단단하고 굵었다

  여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이런 말로 뺨을 맞으면 내 주머니엔

  오백 원 정도가 들어왔고

  나는 길쭉한 마당 허리가 잘린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내 고추를 꼬집었다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몽

 

  기울어진 벽을 넘었습니다. 주름진 구름이 묵은 발톱을 털어냅니다. 피가 고인 벌판, 귀를 대고 어떤 소문을 들었을까. 차마 둥근 발이 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바퀴 소리가 나면 마지막을 준비해. 언니의 쪽지를 주웠습니다. 비린 바람이 불고 코끝이 빨개집니다.

 

  급히 뛰지 마세요. 손발이 더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지나간 날짜를 지우는 게 일과입니다. 맨발에 차이는 살점들 아직 따뜻합니다. 생은 제비뽑기 같은 거야. 또 다른 언니의 쪽지입니다. 발끝에 힘을 줍니다. 이쯤에 내 무릎을 묻어야겠습니다.

 

  육식을 삼가세요. 악몽이 전염될지 모릅니다. 결심이 선다면 침대도 준비하세요. 나는 수평이 간절합니다. 밤낮도 없이 붉기만 한 세계, 견디는 게 만만치 않겠습니다. 마른 달을 볼 수만 있다면

 

  비탈로 그리운 혀 하나쯤 굴러 오겠지요. 말라빠진 그 혓바닥을 삼키겠습니다. 귀신을 보는 유년도 좋습니다. 입술을 맞대고 기억이나 나누겠지요. 찬바람을, 고양이를 조심하세요. 가슴이 불고 목뼈가 간지럽습니다. 한 개의 입으로 우리는 문을 나서고 싶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세 자매 그라이아이(Graiai)는 태어날 때부터 백발 노파였다. 아틀라스산맥의 동굴에 살았으며, 그들은 하나의 입을 서로 돌려 가며 사용했다.

 

 

 

 내일도

 

 

  그날 누런 금목걸이 건네지 말고 내게 악수를 청했다면 어땠을까 따뜻해서 무서운 등짝 말고 차비 말고 추우니까 조심히 가라, 내 옷깃 한 번 세워 주었다면 이불 아래를 뒤지는 청소 말고 내 방문 조용히 잠가 주었다면 나는 웃고 싶지 않았는데 간지럼 말고 칭찬 말고 저는 무사합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셀프서비스입니다, 편지 부쳤을 때 답장도 전화도 말고 돌아오라, 비행기 표를 보내 주었다면 이모도 형제도 말고 죽었다던 아버지 전화번호도 말고 코가 기다란 새 구두 양 두 마리 노는 목도리 말고 하얀 종이 한 장만 펴면 세계가 참 좁았던 날 티브이도 말고 인형도 말고 칼로 뾰족이 긁은 연필 하나 내 귓등에 얹어 주었다면 여백마다 빽빽이 적은 내 이름 딱히 미워할 사람 떠오르지 않아 잠이 많았고 나는 길몽을 감추는 습관이 생겼는데 늙은 가족들은 곧 죽을 것인데 엿보는 거 냄새 맡는 거 말고 통성기도하는 거 말고 어쩌면 내일은,

 

 

 

 

  묵인

 

 

  아직 젊었던 술집 여자의 등을 당신께 보냅니다 그 등에서 참았던 내 겨울도 보냅니다 나를 아들이라 부르던 손님들의 택시비와 이국땅에서 일요일마다 내게 주어지던 몇 푼의 돈도 함께 보내지요 나는 꼭 저금을 하는 기분입니다 당신이 남기고 간 기록들을 한 줄 한 줄 짚어 봅니다만 아마 실수로 빠진 내 이름이 오늘도 없습니다 요즘 당신은 통 편지를 보내지 않지요

 

  어릴 적 공터에 뛰던 플라스틱 말들을 당신께 보냅니다 그 위에서 견디었던 내 예감도 보냅니다 먼 나라에서 한 번 당신을 본 적이 있지요 새벽이었고 당신은 내 가슴을 열고서 울기만 했습니다 결국 유사한 아침을 맞이하며 나는 사과나무 사이를 뛰어다녔습니다 종종 나무의 배후에서 당신을 봅니다만 그것은 비밀에 부칩니다 나는 말을 못하는 일에 익숙하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금방 비밀로 삼았습니다

 

  당신 것을 당신께 보냅니다 당신은 아무리 짊어져도 무거울 리 없지요 봄이면 문설주에 피를 발랐다는 동화처럼 행운을 위해 가족들이 당신을 찾습니다 안부를 물으며 모두가 붉은 손으로 뛰어나오는 골목 나는 잠잠한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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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의 라라 / 송기영

부평역 뒷골목에서
밤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라라
혼자 자신을 게우고 있는 당신들에게서
대당 천 원을 받고 등을 쳐 드리지
라라, 열 대 정도면 당신들은 게울 만한 자기를
다 게우고, 계산을 치르고
타인이 되어 돌아갈 테지만
뒷골목에서 퍼엉, 퍼엉, 퍼엉하고
가슴께 뭉쳤던 것들이
골목을 걸어 나가는 소릴 좀 들어봐
그날은 눈이 왔고, 술을 마셨고
혼자 그 남자의 뒷골목에 들어왔던, 라라
랄라라 그날은 눈이 왔고, 새해를 기다렸고
쉰 대, 하루 일당분을 혼자 맞고도
자기를 게워 내지 못해서
라라의 무릎 위에서 퍼엉,
퍼엉 소리를 내며 기절한 남자
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라라, 밤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혼자 게우고 있는
쓸쓸한 당신의 등을 쳐 드리지, 라라
랄라라




사춘기 분재

무화과 나무가 저질러 놓은 가지 끝에
작은 꽃이 달렸다
액자 밖으로 비집어져 나온
살 한 덩이
벙어리 계집애가 무화, 무화 웃는다
못 들은 척
혀만 날름거리고 있을 뿐인 꽃
주인이 돌보지 못한 사이

바람이 잎겨드랑이를 파고들어 와
깍지벌레의 속삭임을 까 놓았나
가위를 꺼내 든 주인 남자가
자신의 형(形)을 집행하려고
문 손잡이를 돌렸을 때
마침내 폭발하는

꺄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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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작가세계』신인상의 시 부문에는 800여편에 이르는 많은 작품이 투고되었다. 전
체적으로 일별할 때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문제의식과 시적화법이 표나게 드러나고 있었다.
2000년대도 벌써 5년이 지나면서 전통적인 시의 관습과 제도를 탈피하여 당대적 시대정신을
섭수하면서 새로운 시적 감성의 언어를 연마하는 연금술사들이 경향 각지의 도처에 산재하
고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선자들의 분주한 손길을 거쳐 최종심에 오른 작품으로는 배두순의 「고로쇠」외 10편, 이인
주의「茶山에 기대어」외 10편, 송기영의「실험실에서 보낸 한 철」외 9편, 천서봉의「그리운
습격」 외 9편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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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골 여인  /  김지녀

 

    태엽을 감아요 어떤 예감처럼 팽팽한 느낌이 나쁘지 않죠 누군

가 벽을 타고 오르고 있어요 그리다 만 벽화 같아요 내 얼굴은 밟

고 지나간 발자국 같아요


    부풀어 오르는 나무들 몸속으로 수혈되는 그늘 조금씩 깊어지는

눈 그늘 그 속에 고여 있는 떨림 울림 당신과 나는 바람이 가득한

상자랍니다


    당신의 소리는 날마다 아름답군요 스스로 돌고 있는 지구에서

나는 중심을 잃어요 한 발로 디딘 세계는 어지러워요 오른손 왼손

을 번갈아 가며 땅의 흔들림을 짚어 보고 일 년이 지나도


    나는 가벼운 뼈를 움직여 오래 걸었어요 밤 깊은 곳으로 달아나

는 달과 숲의 함성을 기억해요 나는 당신과 밤의 태엽을 감고 있

어요




큰파란바람의 저녁  /  김지녀


바람은 쉽게 땅에 발을 내려놓지 못하고 달아난다

강을 지나 일 년 내내 눈 쌓인 계곡을 지나

그러나 간단하게 뭉쳐지는 구름들 사이로

무섭게 직진하고 있는 태양의 기둥을 지나

벽을 뚫고

천 년 전에 만났다 헤어진 사람의 눈동자를 핥으며

지구를 만 년쯤 돌고 있는 바람이 이마에 와 닿을 때

국경을 넘어온 얼굴처럼 얼어 있는 저녁을 바라볼 때

나는 기둥, 이라는 제목의 나무

활엽에서 침엽으로 옮아가는 숲의 그늘

절벽 위에 서 있으면 어느 고원을 떠돌다 사라진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맴돈다

입술 튼 바람은 서로를 끌어당기며 전진하거나 융기하는

대륙의 저 끝에서 잠시 날개를 접고

녹아내리는 얼음을 밟고 며칠 밤낮을 걸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함께 울었을 것이다

몇 달이 지나도 눈이나 비가 오는 숲에서

알을 품은 적 있는 둥지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잎사귀가 다 떨어진 저녁

바닥에 누워 영원히 눈 감는 자의 호흡은

처음 비행에 나서는 새의 눈빛처럼 새까만 것이어서

수없이 흔들리며 가라앉아 간다

입 벌린 채 마른 강을 건너가듯이

나는 갈증을 느끼며 파랗게 변해 가는 피부 속에

활공하는 바람의 말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바람이 데리고 온 먼 곳의 먼지들은 낮게 휘돌다 단단해진다



밤과 나의 리토르넬로  /  김지녀

 

 

 

어젯밤은 8월이었어요 날마다 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 사람들의 등 뒤로 여름이 가고 있지만 가을은 오고 있지만

나는 아직 한 장의 얼굴을 갖지 못한 흉상

여름과 가을 사이에 놓인 의자랍니다


나는 체스의 규칙을 모르지만

우리를 움직이는

밤과 낮의 형식을 좋아해요


눈을 감았다 뜨면

감쪽같이 비가 오거나 목소리가 변하거나

나무들이 푸르러졌어요


누군가 피를 토하면서도 다리를 꼬고 있다면

그건 죽음에 대한 예의일 것이고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면

그건 나에 대한 의심일 테지만

나는 너무 조금밖에 죽지 못했다*고 말할 거예요


사소한 바람에도 땅을 움켜잡는 나무가

의자에 붉은 잎사귀 몇, 뱉어 놓는 밤에

나의 입 안에선 썩은 모과 향이 꽃처럼 확, 피었다 지고 있어요




칙칙과 폭폭 그리고 망상  /  김지녀

    나를 위해 노래해 줘 뱃속에서 잠자는 망상을 깨워 줘 기차는 또

달리지 같은 레일 위에서 칙칙, 사람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있지 칸

과 칸 사이를 폭폭 질주하지 몽유병을 앓는 것처럼


    달려야 해 용기가 필요해 칙칙한 노래는 듣기 싫어 나를 폭폭, 갉

아먹는 망상은 희망이야 터널을 뚫는 힘이야 역마다 잘 가뀌진 꽃

나무가 꽃을 버리기 위해 흔들려


    한 병의 소주와 갈기갈기 찢어진 오징어 다리 사이에서, 내 이름

은 너무 고유해서 고유할 뿐 그렇지만 칙칙, 아무도 나를 불러 주

지 않네 내 노래는 오래전부터 무감각해 여긴 어디야? 이곳은 ......

폭폭,


    누구나 가슴속에 새장은 있다네 밤마다 새장을 칙칙, 쪼아 대는

새를 키우고 있다네 등에는 화살에 찔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

지 살짝만 건드려도 비명이 폭폭, 나올지 모르지


    아까부터 머리가 아파 나를 위해 노래해 줘 흘러 다니는 의자를

위해 소주를 따라 줘 난 오징어의 눈을 찾을게 사람들의 수다를 치

료해 줘 그리고 달려 줘,




쓰다듬는 손  /  김지녀

    그의 손은 검은 강을 지나 푸른 나뭇가지를 지나 내 얼굴을 지나

잔디를 쓸어 본다, 보이지 않는 손에 묻은 얼굴이 푸른 나뭇가지를

지나 검은 강으로 그를 따라간다 나를 보며 웃는


    거대한 먹구름, 비명이 오래될수록 울음이 작아질수록 먹구름은

커진다 모든 것은 흡수된다 소용돌이치는 얼굴, 그의 등에 업힌 나

는 울고 있다


    몇 개의 이력이 검은 강을 건넜다 잔디 위에 남은 자리는 이미

식어 있다 그곳에 앉아 나는 잔디를 쓸어 본다, 손에 묻어나는 이

력들 뭉그러지는 검은 잉크 자국들


    먹구름은 모양을 바꾸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나의 손을 잡

고 있다 조여지는 손목이 잘려 나가기를 그의 손에서 푸른 가지가

솟아나기를 나의 비명이 먹구름을 통과해 주기를


    그는 등 뒤에서 언제나 나를 훔쳐본다 어디선가 먹구름을 이끌

고 잔디를 쓸어 가며 보이지 않는 손이 나의 얼굴을 지나가고 있다




A 그리고, a  /  김지녀


에이, 라는 점에서 그들은 동일하다

낮에도 밤 같은 방에서

작은 여자 A는

밥 먹고 잠잔다 그리고 가끔, 웃는다

아직 오지 않은 애인을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

요리를 한다 매일

작은 여자 A와 무관하게

큰 여자 a는 계란을 삶는다

아직 떠나지 않는 애인을 위해

고개를 숙이고

흰자에서 노른자를 골라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러나 웃는다 가끔,

초인종이 울리기도 한다

작은 여자 A와 큰 여자 a는

말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문을 열거나 열지 않는다

그들은 에이, 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작은 여자 A와 큰 여자 a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덜컹거린다

서로를 알아채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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