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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골 여인  /  김지녀

 

    태엽을 감아요 어떤 예감처럼 팽팽한 느낌이 나쁘지 않죠 누군

가 벽을 타고 오르고 있어요 그리다 만 벽화 같아요 내 얼굴은 밟

고 지나간 발자국 같아요


    부풀어 오르는 나무들 몸속으로 수혈되는 그늘 조금씩 깊어지는

눈 그늘 그 속에 고여 있는 떨림 울림 당신과 나는 바람이 가득한

상자랍니다


    당신의 소리는 날마다 아름답군요 스스로 돌고 있는 지구에서

나는 중심을 잃어요 한 발로 디딘 세계는 어지러워요 오른손 왼손

을 번갈아 가며 땅의 흔들림을 짚어 보고 일 년이 지나도


    나는 가벼운 뼈를 움직여 오래 걸었어요 밤 깊은 곳으로 달아나

는 달과 숲의 함성을 기억해요 나는 당신과 밤의 태엽을 감고 있

어요




큰파란바람의 저녁  /  김지녀


바람은 쉽게 땅에 발을 내려놓지 못하고 달아난다

강을 지나 일 년 내내 눈 쌓인 계곡을 지나

그러나 간단하게 뭉쳐지는 구름들 사이로

무섭게 직진하고 있는 태양의 기둥을 지나

벽을 뚫고

천 년 전에 만났다 헤어진 사람의 눈동자를 핥으며

지구를 만 년쯤 돌고 있는 바람이 이마에 와 닿을 때

국경을 넘어온 얼굴처럼 얼어 있는 저녁을 바라볼 때

나는 기둥, 이라는 제목의 나무

활엽에서 침엽으로 옮아가는 숲의 그늘

절벽 위에 서 있으면 어느 고원을 떠돌다 사라진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맴돈다

입술 튼 바람은 서로를 끌어당기며 전진하거나 융기하는

대륙의 저 끝에서 잠시 날개를 접고

녹아내리는 얼음을 밟고 며칠 밤낮을 걸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함께 울었을 것이다

몇 달이 지나도 눈이나 비가 오는 숲에서

알을 품은 적 있는 둥지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잎사귀가 다 떨어진 저녁

바닥에 누워 영원히 눈 감는 자의 호흡은

처음 비행에 나서는 새의 눈빛처럼 새까만 것이어서

수없이 흔들리며 가라앉아 간다

입 벌린 채 마른 강을 건너가듯이

나는 갈증을 느끼며 파랗게 변해 가는 피부 속에

활공하는 바람의 말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바람이 데리고 온 먼 곳의 먼지들은 낮게 휘돌다 단단해진다



밤과 나의 리토르넬로  /  김지녀

 

 

 

어젯밤은 8월이었어요 날마다 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 사람들의 등 뒤로 여름이 가고 있지만 가을은 오고 있지만

나는 아직 한 장의 얼굴을 갖지 못한 흉상

여름과 가을 사이에 놓인 의자랍니다


나는 체스의 규칙을 모르지만

우리를 움직이는

밤과 낮의 형식을 좋아해요


눈을 감았다 뜨면

감쪽같이 비가 오거나 목소리가 변하거나

나무들이 푸르러졌어요


누군가 피를 토하면서도 다리를 꼬고 있다면

그건 죽음에 대한 예의일 것이고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면

그건 나에 대한 의심일 테지만

나는 너무 조금밖에 죽지 못했다*고 말할 거예요


사소한 바람에도 땅을 움켜잡는 나무가

의자에 붉은 잎사귀 몇, 뱉어 놓는 밤에

나의 입 안에선 썩은 모과 향이 꽃처럼 확, 피었다 지고 있어요




칙칙과 폭폭 그리고 망상  /  김지녀

    나를 위해 노래해 줘 뱃속에서 잠자는 망상을 깨워 줘 기차는 또

달리지 같은 레일 위에서 칙칙, 사람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있지 칸

과 칸 사이를 폭폭 질주하지 몽유병을 앓는 것처럼


    달려야 해 용기가 필요해 칙칙한 노래는 듣기 싫어 나를 폭폭, 갉

아먹는 망상은 희망이야 터널을 뚫는 힘이야 역마다 잘 가뀌진 꽃

나무가 꽃을 버리기 위해 흔들려


    한 병의 소주와 갈기갈기 찢어진 오징어 다리 사이에서, 내 이름

은 너무 고유해서 고유할 뿐 그렇지만 칙칙, 아무도 나를 불러 주

지 않네 내 노래는 오래전부터 무감각해 여긴 어디야? 이곳은 ......

폭폭,


    누구나 가슴속에 새장은 있다네 밤마다 새장을 칙칙, 쪼아 대는

새를 키우고 있다네 등에는 화살에 찔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

지 살짝만 건드려도 비명이 폭폭, 나올지 모르지


    아까부터 머리가 아파 나를 위해 노래해 줘 흘러 다니는 의자를

위해 소주를 따라 줘 난 오징어의 눈을 찾을게 사람들의 수다를 치

료해 줘 그리고 달려 줘,




쓰다듬는 손  /  김지녀

    그의 손은 검은 강을 지나 푸른 나뭇가지를 지나 내 얼굴을 지나

잔디를 쓸어 본다, 보이지 않는 손에 묻은 얼굴이 푸른 나뭇가지를

지나 검은 강으로 그를 따라간다 나를 보며 웃는


    거대한 먹구름, 비명이 오래될수록 울음이 작아질수록 먹구름은

커진다 모든 것은 흡수된다 소용돌이치는 얼굴, 그의 등에 업힌 나

는 울고 있다


    몇 개의 이력이 검은 강을 건넜다 잔디 위에 남은 자리는 이미

식어 있다 그곳에 앉아 나는 잔디를 쓸어 본다, 손에 묻어나는 이

력들 뭉그러지는 검은 잉크 자국들


    먹구름은 모양을 바꾸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나의 손을 잡

고 있다 조여지는 손목이 잘려 나가기를 그의 손에서 푸른 가지가

솟아나기를 나의 비명이 먹구름을 통과해 주기를


    그는 등 뒤에서 언제나 나를 훔쳐본다 어디선가 먹구름을 이끌

고 잔디를 쓸어 가며 보이지 않는 손이 나의 얼굴을 지나가고 있다




A 그리고, a  /  김지녀


에이, 라는 점에서 그들은 동일하다

낮에도 밤 같은 방에서

작은 여자 A는

밥 먹고 잠잔다 그리고 가끔, 웃는다

아직 오지 않은 애인을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

요리를 한다 매일

작은 여자 A와 무관하게

큰 여자 a는 계란을 삶는다

아직 떠나지 않는 애인을 위해

고개를 숙이고

흰자에서 노른자를 골라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러나 웃는다 가끔,

초인종이 울리기도 한다

작은 여자 A와 큰 여자 a는

말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문을 열거나 열지 않는다

그들은 에이, 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작은 여자 A와 큰 여자 a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덜컹거린다

서로를 알아채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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