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이 웃는다 / 백숙현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담배를 돌렸다
담배에서 녹차 맛이 났다
가볍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다 연기처럼 가벼워지고 싶었다
외투를 벗었다
양말을 벗었다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스카프를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친구들이 킥킥대며 웃어댔다
그들을 향해 탁자에 있던 귤을 던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머리에 명중하자 웃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벽이 눈물을 흘렸다
깨진 귤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창문은 창문
탁자는 탁자
술잔은 술잔
귤은 귤
그러므로 나는 나
브래지어를 벗어 던졌다
도마와 밥솥을 집어 던졌다
저울과
모래시계와
금이 간 거울
때 묻은 경전과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던졌다
담배 한 개비 다 타들어 가도록
나는 던져버릴 게 너무 많았다
* 가브리엘 가르세아 마르케스의 소설
- 에드픽 제휴 사이트로 소정의 수수료를 받습니다.
[당선소감]
시를 사랑했다.
시의 언저리에서 오래 서성거렸다.
시의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은 채.
베란다 빈 화분에 씨앗이 날아와 뿌리를 내렸다.
싹이 나고 줄기를 세우고 잎이 자랐다.
남천이었다.
폭염에도 혹한에도 끄떡없었다.
키를 높이며 푸른 그늘을 드리웠다.
남천이 오고, 씨를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날마다 썼다.
시 쓰는 아침이 얼마나 황홀한지
아침을 기다리며 잠자리에 누웠다.
매일 그 순간을 위해 사는 것 같았다.
사흘간 내린 눈이 하얗게 덮어버린 두타산 골짜기
작은 오두막에서 당선 전화를 받았다.
와닿지 않은 현실에
조금 멍했고, 몹시 기뻤고, 전화를 끊고 나선 가슴이 뛰었다.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을까.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을까.
두려운 일이다.
부족한 제 시를 읽어주시고 뽑아주신 큰 격려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글과 사람과 삶이 다르지 않은 시를 쓰고 싶습니다. 파킨슨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친구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싶습니다.
일 년에도 몇 번씩 집을 나서, 바닷가로 산속으로 모래 들판으로 유목민처럼 떠도는 나를 언제나 자유롭게 보내주고 맞아주는 남편에게, 늘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발랄한 두 딸 예인과 예지, 무심한 듯 다정한 아들 진우에게 감사합니다. 계속 시를 쓰도록 이끌어주신 이성미 선생님 고맙습니다. 은빛 머리카락 소년에게도 감사합니다.
[심사평]
올해는 응모작의 편수도 역대급이었고. 당선작으로 선정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들 또한 그 어느 해보다 많았다. 특히, 오랜 수련을 보여주는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많아 심사위원들을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윤계순의 「계량」, 서희의 「침전의 방식」, 원미소의 「원룸」, 김송리의 「카블」, 백숙현의 「귤이 웃는다」 등이었다. 「계량」은 폐지 트럭의 무게를 재는 계량에 대한 묘사를 통해 삶의 고단함과 “헐값의 부피”를 그려낸 작품으로, 리얼한 현장성과 빈틈없는 직조 능력이 돋보였다. 「침전의 방식」은 감자 전분을 내리는 과정을 통해 “평생 고름 쏟던 마음을 치마폭에 담아/ 어레미로 감자 전분 내리던 어머니”와 가계를 그려낸 작품으로, 제목처럼 잘 ‘침전’된 비유가 빛을 발했다. 「원룸」은 “듣지 않아도 들리는 것이 있는 원룸”에서의 일상을 묘사하면서 관계와 외로움을 그려낸 작품으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젊은 감각이 돋보였다. 「카블」은 제목 그대로 아프카니스탄의 수도 카블에 대한 상상을 통해 전쟁의 상처와 전장 같은 삶을 그려낸 작품으로, 숨가쁜 리듬과 강렬한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최종에 오른 작품들은 각각의 장점과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동시에 너무 잘 짜인 작품이 주는 익숙함 때문에 미래에 대한 설렘을 감소시키는 면이 있었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백숙현의 「귤이 웃는다」는 무엇보다 자유롭고 생동감 넘치는 상상력과 전개가 돋보였다. 이러한 활달함 속에서도 “그러므로 나는 나” “나는 던져버릴 게 너무 많았다” 등의 구절을 뽑아내는 힘이 있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장점들이 풍요롭게 펼쳐지고 있어 최종에 오른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앞날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이 설렘이 이어질 수 있도록 당선자의 정진을 빈다.
- 심사위원 : 이문재·이홍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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