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대상] 함소입지 / 정두영

 

 

젖 불기 기다리던 포대기 속 울음이

기다 걷다 발서슴해도

돌아오지 않았다

무젖은 달 마르도록 손금 다 닳리도록

다랑논 어느새도

장돌림 어지간도

어쩌다 사기막도

어차피 갖바치도

다시금 애옥살림 누게막에 돌아오지 않았다

거시기고 아무개라 사초마저 뭇풀인데

죽기야 하겠나

주기밖에 더 하겠나

한목숨 시위에 걸고 왜바람 가로질러

다시 보는

다시 봄에

김치 치즈 스마일

웃음보 터트리는 걸음나비 포인트로

돌아온

봄의 씨앗 무명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수상] 뼈들이 전하는 말 / 박복영

 

 

허허벌판 꽃 무덤아래

알 수 없는 뼈들이 엉켜 있다

돌멩이를 파헤쳐 열수록

지층이 물고 있는 뼈 조각들

이름 없는 목숨들이 층층으로 덮여 있었다

누군가는 동물 뼈라 했고

어떤 이는 나뭇가지라고도 했다

손가락뼈들은 주먹을 쥔 듯 말려 있었고

머리뼈는 앞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붓으로 꺾인 무릎 뼈에 쇠구슬이 박혀 있었다

어느 연대의 시간을 관통했을

쇠구슬은 녹슬어 삵아 붉었다

빗소리와 눈보라를 삼키며 연명했을 뼈들

침묵으로 견뎌온

슬픔의 역사를 물고 있다

열면 열수록 뼈들의 전언처럼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개미떼가 의병 같았다

한 방향으로 돌진했을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너진 뼈 조각이 물고 있는 함성이

단번에 흘러나오듯

드러나는 무릎 뼈에 박혔을 총성

부를 이름조차 사라진 자리에

그날들이 발굴되는 동안

저쪽의 꽃 무덤이 흔들리며 또 붉어지고

겹겹이 묻힌 그 날의 항전은

뼈 조각으로 열리고 있었다

 

 

 

 

 

 

728x90

 

 

[대상] 순의비를 읽다 / 박수봉

 

 

돌이 찢어진 비문을 꽉 물고 있다

입술을 다문 침묵을 쪼아

빗돌의 늑골에 문신을 새긴 사람은

붓을 챙겨 떠나버리고

깨진 돌만 남아서 그때를 증언한다

돌은 침묵을 가장하고 있지만 돌에는

임진의 여름 풀꽃들이

폭풍우에 쓰러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스며있다

비문의 진술을 딸가 보면

북채를 쥔 사내 따라 삽을 놓고

기꺼이 졸이 된 사람들

탕, 타탕, 터지는 화구를 몸으로 막아

무명천에 펄럭이는 의를 몸뚱이에 감았다

돌의 찢어진 흉곽에서 진물처럼

마지막 비명이 묻어 나온다

지은 죄가 두려워 빽빽한 돌의 진술을

찢어버리고 황급히 꼬리를 감춘

섬나라 살쾡이들

아직도 속내를 해무에 감춘 채

호시탐탐 내륙을 훔쳐보고 있다

조각난 뼈를 맞추고 피부를 꿰맨

비의 깨진 이마에 순의가 선명하다

군데군데 뜯겨나간 살점은

돌의 심장으로도 차마 발설할 수 없어

시멘트로 봉해버린 상실의 시간이다

 

 

 

 

편안한 잠

 

nefing.com

공모전 당선자의 시집을 소개합니다.

 

 

 

[당선소감]

 

거대한 암벽을 타고 오르는 능소화 줄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수백 미터의 암벽을 덮으며 기어오르는 능소화에겐 두려움이란 없어 보였습니다. 암벽에서 품어내는 어마어마한 냉기와 폭염의 열기를 다 받아내며 한 땀 한 땀 오르는 지칠 줄 모르는 집념 앞에서 나는 알지 못하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두리번거리지 않고 망설이지도 않고 오로지 오르기만 하는 거대한 오체투지, 깎아지른 벼랑에 써 가는 능소화의 육필을 나는 눈이 부셔 제대로 읽지 못하였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장면을 떠올리며 나태해지는 나 자신을 다잡아 보곤 합니다.

수상 소식을 접하는 순간 한 노시인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석가헌 앞뜰에 연꽃을 심어놓고 바람을 가두어 여름을 출렁이던 시인의 웃음 띤 얼굴이 새삼 그리워집니다.‘繪事後素’를 강조하시던 선생님, 돌아가실 때까지 시를 놓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연못에 지금쯤 푸름이 범람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르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벼랑을 잡고 있는 가늘고 거친 줄기에 꽃 한 송이 피게 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박토에 시의 싹을 가꿀 수 있게 문학의 토양을 제공해 주시는 (사)중봉조헌선생선양회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리고 항상 저를 응원해주시고 격려히 주시는 오산 문인협회 문우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더 열심히 노력하여 부끄럽지 않은 작품으로 만나 뵙겠습니다.

 

 

 

 

 

 

[우수상] 풍란의 발 / 임송자

- 중봉 조헌선생의 동상 아래서

 

한 번 먹은 마음으로

돌에다 뿌리를 내리는 목숨이 있다

사람의 가슴으로 뻗어오는 천년의 뿌리

거친 바람 천길 벼랑도 두렵지 않다

바람의 상소를 움켜 쥔 한 사내가

허공에 발을 내딛고 있다

높고 순결한 저 보폭의 음계는

어느 가파름으로 깃드는 붉은 목청일까

상한 시절을 쳐내는가

우국충정 뜨거운 가슴 부셔내며 퉁퉁 부르튼 발 아래로

푸른 촉이 돋는다

지부상소

닷새장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북변동 가운데 서서

철물점 도끼를 무심히 들여다보시겠지요

오늘은 낙조청강*에 내리는 빗소리 함께 데리고

그냥 시인으로 오시면 포장집 술잔에서도 살구꽃이 필테지요

그런 날에는 봄볕에 그을린 당신의 그림자 곁에서

꽃씨처럼 포슬포슬 꿈을 꾸는 일도 괜찮겠다

장터의 소란이 사그라들면

버들가지에 간고등어 한 손씩 꿰어들고 들판의 실핏줄같은 논두렁길을 따라

감정리로 스며들어도 좋은 저녁

비는 그치고 어둠이 어둠을 덧칠해나가는 시간

새로 돋는 별들이 차례로 다녀가고

당신은 풍란 꽃 희디흰 함성으로 오시어

길눈이 어두운 계절의 한복판을

들었다 놨다

 

* 낙조청강 - 조헌선생 시조의 한 구절 

 

 

 

 

[당선소감]

 

늙었으나 수형이 아름다운 뒤안 감나무 위에서 아침부터 뻐꾸기가 울었습니다. 자주 감자가 막 꽃대를 밀어 올리는 오월 끝자락 푸른 소식을 접했습니다. 오래 아주 오래 시를 외면하고 살았으며 그럴수록 정신은 가난하고 아팠습니다. 집안 곳곳에 자리한 석부작을 보다가 문득 선생을 떠올렸습니다. 여문 것을 피하여 살아온 제가 한없이 부끄러운 풍란의 계절입니다. 늘 갈증이던 문학의 갈피를 접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의 글 올립니다. 초록을 따라 가 봐야겠습니다.

 

 

 

 

[심사평]

 

2021년 제15회 중봉조헌문학상에는 시 955편(194명), 수필 193편(97명)이 도착하였다. 모두 291명 문사(文士)들이 자그만치 1,148편의 작품을 정성껏 보내주었다. 작년인 2020년과 비교해보면, 참여인원은 약 50명, 작품 수로는 대략 220편 정도가 증가한 것이다. 중봉문학상이 전국적인 관심이 된 지는 오래되었다. 이를 반증하듯 서울부터 제주까지 전국 각지에서 빠짐없이 작품을 보내주었다. 미국은 물론 연길시와 흑룡강성, 길림성 등 중국에서도 여러 작품이 도착했다. 이 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할 때 걱정스런 여러 목소리를 이 같은 관심과 성원으로 잠재울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문학상의 제정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는 자평을 하게 되었다. 전국의 문사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렇다고 책임감의 무게가 적어지는 것은 아니다. 피할 수도 없다. 중봉문학상에 응모하는 작품들의 모양새가 해가 다르게 매력적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매력적인 작품들을 모두 소개하여 기쁨을 공유하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이다. 중봉문학상의 틀을 확대할 필요성이 매우 심각하게 제기된다고 하겠다.

 

제15회 중봉조헌문학상 응모작품들의 내용과 형식이 매우 다양해졌다. 중봉 조헌 선생의 삶과 사상을 형상화한 것과 일반적인 작품들이 골고루 응모되었다. 중봉 선생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이전 작품들에서는 그와 의병의 삶을 의지와 희생의 관점에서 형상화한 것이 많았다면, 올해는 중봉과 의병, 당시의 상황을 현재의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작품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모두 나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만, 중봉에 대한 접근이 다각화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다. 또한 일반적인 작품들의 수준도 상당했다. 이전에는 소재 중심의 습작들과 성긴 문학성을 노출하는 작품들이 경험의 차원에서 제출된 느낌이었다면, 올해는 그 어떤 것도 그냥 넘기기 힘든 문제성을 지니고 있었다. 중봉조헌문학상이 진화하고 있는 현상이고 그의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예심을 거쳐 본선에 올라온 작품은 시 4편과 수필 3편이다. 시에서는 최교민의 <사당에서 내리지 않고 버틴다>, 박수봉의 <순의비를 읽다>, 김종빈의 <목이 먹으로 갈려져>, 임송자의 <풍란의 발>이고, 수필에서는 김소희의 <자연의 물산을 소모하다>와 이정희의 <눈 오는 밤, 새 한 마리 때문에>, 황진숙의 <호위무사>이다. 모두 일정 이상의 수준과 새로움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어서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해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모두 의식의 단단함과 형식의 세밀함을 보여준 작품들이었다. 그만큼 심사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숙고 끝에 최종 선정한 작품은 대상에는 박수봉의 시 <순의비를 읽다>이고, 우수상에는 황진숙의 수필 <호위무사>와 임송자의 시 <풍란의 발>이다.

 

박수봉의 <순의비를 읽다>는 금산 칠백의총 안에 있는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를 소재로 하였다. ‘순의비각’이라는 이름 아래 찢긴 채 놓여 있는 비석의 역사, 즉 “깨진 돌만 남아서 그때를 증언”하는 것을 듣고 있다. 북채를 쥔 사내와 그를 따른 백성들 그리고 치열한 전쟁을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는 항쟁의 뜨거운 역사만 증언하지는 않는다. 해무 속의 몸을 숨긴 어두운 세력들, 무엇보다 “돌의 심장”으로도 말할 수 없는 “상실의 시간”을 증언하고 있다. 이 시는 감정 분출이 일부 과한 측면도 있지만 크게 거슬리지 않고, 깨진 순의비각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소환하고 해석하는 참신한 상상력을 보여줘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황진숙의 수필인 <호위무사>는 인생의 굴곡을 여러 신발들을 통해 속도감 있게 들려주고 있다. 다소 뻔한 갖가지 사연들이 가진 기억과 자랑 속에서 새롭게 들린다. <규중칠우쟁론기>도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체와 현실과 사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이 읽는 맛을 더하고 있다. 임송자 시 <풍란의 발>은 ‘중봉 조헌선생의 동상 아래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김포시 북변로 거리에 서 있는 중봉의 동상을 올려다보며 과거의 그를 현재로 불러내고 있다. 공교롭게도 입상작으로 선정한 시 두 편이 모두 중봉을 매개하는 유적과 유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동상이라는 상징물이 갖는 권위와 목적성과는 대비되는 지점의 상상력을 함께 드러내 절묘한 균형을 이룬 작품이라 하겠다.

 

이번 제15회 ‘중봉조헌문학상’도 열성적인 참여로 풍성하게 만들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내년의 ‘중봉조헌문학상’은 수많은 관심과 성원에 화답할 수 있도록 좀 더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앞으로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의 문학적 역량이 더욱 발전하기를 바란다. 문운과 함께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한다.

 

 

 

 

728x90

 

[대상] 팔월의 당신 / 최형만

 

서쪽 하늘이 한 시절 떨어드려도

눕지 못한 갈대처럼

활을 잡으면 팽팽해지는 불꽃

팔월의 꽃도 몽땅 붉어지고 있다

 

발목부터 올라온 뿌리의 함성은

어디로 갔을까

붉은 깃발에 꽃잎 날리면

꽃대 밀어 올린 그 힘으로 돌아오라고

사람들은 북을 두드리고 징을 친다

 

밭을 일구던 어미의 가슴이 납작해질 때

갓난이도 칼날 같은 허기를 견뎠을까

한 번의 옹알이도 없는 밤마다

오래된 길목에 서면

무명으로 살다간 한때가 보인다

 

비린 땅을 지키러 눈 뜨면

초록으로 일어서던 임진의 여름

 

칼의 무게를 견딘 계절이 지던 날

투구와 휘장은 어느 고개를 넘어갔을까

피 냄새를 맡던 새들의 날갯짓도

숨은 바람에 만장처럼 펄럭이고 있다

 

허공을 달군 쇳내에 버려지는 팔월

그을린 당신이 먼빛으로 오는 중이다

 

 

 

 

 

 

728x90


[대상] 도리뱅뱅이 / 김영욱

 

진눈개비 흩날리는 저녁                   

불판 위로 쓰러지고 엎어지는 피라미들

낮에 본 솥바위 나루터의 의병(義兵)이었다

 

어중이떠중이는 입만 열면

가뭄에 두고 온 처자식 걱정이라지만

제 이름은 쓸 줄 몰라도 하늘의 때를 읽고

농기를 앞장세워 돌격한 맨몸뚱이들

 

골내미 백정 따라 버드내 물길 건너온

대둔산자락 어느 고을 노비라던 천 서방도

땡볕 아래 뜨거운 맹세로 울었겠다

 

등뼈 오그라든 이름 모를 물고기들도

마지막 곱사춤을 추고 있는데

어느새 눈발은 굵고

혀는 벌써 꼬부라져 흰소리만 쏟아내는데

 

스스로는 쓴 적 없어도 부끄럼이 없는 이름들

불구덩이로 제 몸 던진 순절(殉節)이라지만

한 주검을 덮는 다른 주검은 두려웠겠다

 

하늘에는 만장도 상여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백의(白衣)의 장렬(葬列)

 

연탄불로 조등을 밝힌 포장마차

펄럭이는 휘장 아래 둘러앉은 넥타이 부대

꾸벅, 묵념하는 얼굴들이 벌겋게 취해있겠다





 

 

<당선 소감> 시종일관하는 전심


어른이 없는 세상이란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스승이 없는 세상이란 생각도 가끔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번 죽음이 있을 뿐, 구차하게 살 수는 없다’며 7백 명의 의병과 함께 한 날 같은 전장에서 최후를 맞이한 중봉 조헌 선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께서 우리 역사에 계셔준 것이 제게는 커다란 위안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봅니다. 명성이 큰 사람들의 그림자를 봅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실망만 커집니다. 천근만근 무겁고 중하다는 그들의 말은 이내 그 속내와 다르다는 것이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그들이 외치는 대의와 그들의 사적인 삶은 별개입니다. 귀를 막습니다. 사람을 다시 생각합니다. ‘전심(全心)’만이 진심(眞心)이고 전심(傳心)입니다. ‘전심(全心)’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전심은 결코 요란하지 않습니다. ‘전심’은 초심(初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중심(中心)을 잃지 않았던 중봉의 중심(重心)이었습니다. 그의 충심도 그러했습니다. 하여 ‘도끼’같은 직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의 초상화를 봅니다. 눈빛이 그윽합니다. 그의 삶도 그러했을 겁니다. 눈을 감습니다. 욕심이 앞섰던 제가 보입니다. 저는 그의 뜻을 받아 적고 싶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제 시에 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아둔함은 살피지도 않은 채, 중봉조헌문학상에 몇 차례 응모하고 번번이 수상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당연히 답은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 분께 닿기 위해 제 전심(全心)을 다했다고 보기엔 제 삶과 시에 쏟은 정성이 부족하단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깨어났습니다. 위내시경을 받고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연락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작품을 큰마음으로 읽어주신 심사위원분들과 진정한 어른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실 기회를 마련해주신 <중봉조헌선생선양회>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 시 로 그 분을 모시기엔 여전히 부족하지만, 계속 정진하여 중심에 닿으라는 격려로 받아들이겠습니다.



728x90


[대상] 맨드라미의 열전 / 서김상규

 

족보 없는 혈통이 대물림되었다

붉은 수은주 눈금이 체온으로 치솟은

적도의 온도로 한여름이 닥쳤다

 

가문 뿌리에 외줄기 수맥이 끊겼다

갑골문을 새긴 지표 위에서

초록 수액이 마르는 줄기, 타는 녹색 잎

태양의 노략질이 한층 잔인해졌다

 

지열이 물관을 달구는 피돌기로

심장이 비등점 상승으로 끓어오르고

뼈가 삭정이로 잉걸불에 휩싸이듯

 

초본식물로 목숨을 붙이고 사는 게

임진왜란 아닌 때가 있었는가

장례 치르며 대를 이은 호적초본에서

이름을 꽃대로 일으켜 세웠다

 

은빛 별이 빛나는 사막을 걸었다

물병자리에서 물집 잡히며 길어 내린

첫새벽 이슬로 잎줄기를 적셨다

 

탯자리에서 혈족을 지키는 결기로

생명의 제사를 극진히 올리는 꽃자리

중심에 세상 빛이 몰려 꽃을 피웠다

 

족보 없는 의병들이 쓴 열전으로

맨드라미에 높고 낮은 신분이 없다

조헌 선생이 지부상소*를 올릴 때

머리맡에 놓은 붉게 날선 도끼다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머리를 쳐 달라’는 뜻으로 도끼를 지니고 올리는 상소

 




<수상소감>

 

봄이 지나는 길목에 수국과 함박꽃이 활짝 피었다. 부처 머리 같은 수국이 화두의 깨우침으로, 함박꽃이 지혜의 웃음으로 난세인 작금을 살아가는 가르침을 준다.

이제 곧 임란 같은 여름이 닥칠 것이다. 태양이 노략질할 때 식물은 광합성 하는 의지로 초록을 녹음으로 물들일 것이다.

이런 때 맨드라미는 피를 달궈 붉은 꽃을 피운다. 땡볕 속에 절정으로 치닫는 붉음은 조헌 선생의 충절을 닮아있다. 그리고 맨몸으로 왜적과 맞선 의병들이 선혈을 흘린 빛깔이다.

맨드라미를 보라. 조헌 선생이 상소를 올릴 때 머리맡에 놓은 도끼이며, 의병들이 굳은살 박인 손아귀에 움켜쥔 도끼 형상이다.

아름다움만이 꽃이 아니다. 감히 목숨을 내놓는 기개로 조헌 선생과 의병들의 강건한 정신을 마음속 깊이 품는다.

이번 수상은 나약한 시적 정신에 가하는 채찍질이다. 백척간두에 선 듯 더욱더 치열하게 창작할 것을 명하는 조헌 선생의 준엄한 호령이 아닌가,

부족한 작품을 대상으로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귀한 상을 제정하여 어지러운 세상에 고귀한 정신을 전파하는 관계자 분들께 진심 어린 머리를 조아린다.









[우수상] 불망기不忘記 / 이미영


얼어붙은 바람에 물보라가 튀는

모슬포 나루에 배가 옆구리를 댄다

마중 나온 포교가 내민 거친 손이

대정현 검은 하늘같다

 

탱자가시에 둘러싸였어도

봄에 피는 꽃향기가 그만이라며

그가 웃는다

온몸으로 앓았던 곤장 서른여섯 대가 여전히 푸른데

 

냉골인 그의 방이

저고리만 입은 그의 얼골을 닮았다

찢어진 문창지 새로 허옇게 갯바람이 몰려들고

한양에 남은 가족얘기는 그저 시루에 얹어두었다

 

문구멍을 메울 창호지를 당부했는데도

차를 마시러 들른 방은 찢어진 창호문이 그대로

해가 고개를 틀고 시들 때까지 쪽마루에 앉아있던

그의 그림자가 객창에 돌아와서도 떠오른다

구멍은 문창지에만 난 게 아닌 모양이다

 

한양으로 떠나는 내 앞에 그림 한 점이 펼쳐진다

초옥 한 채와 두 그루 소나무,

눈 내린 화폭 안으로

휘어진 백송이 나를 끌어당긴다

창호문 구멍 너머로

그의 손이 내 등허리를 덮는다

그림을 앉힌 창호지가 바람에 펄럭인다

 



<당선소감>

 그건 아마도 인문학 수업을 듣던 작년 이맘때였을 겁니다. 그 때 들었던 그의 삶이 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제 가슴에 고요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시의 단상은 그 때 저에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 후로 그가 유배를 갔던 제주도 대정현 검은 대지와 검은 하늘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오도 가도 못하고 묶인 그의 외로움에 대해 자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살 수도 있었던 수백 권의 귀한 책을 유배 간 스승에게 보내던 한 제자의 마음속을 여러 날 거닐었습니다. 시는 그런 마음들을 그려냈습니다. 시 속에서 그가 그린 세한도를 건네받은 건, 그건 아마도 저인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초라한 종이에 그려진 앙상한 그림일 뿐이었던 백 년의 진실이 그렇게 저에게 다가오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삼 년 동안 소설을 쓰다 다시 시를 잡았습니다. 연민에 사로잡힌 시쓰기가 싫어 시를 떠났는데, 본령이었던 시로 다시 돌아오자 오히려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 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겠지요. 지나간 날들을 기꺼이 사랑하겠습니다.

남편은 제가 글을 쓸 때 늘 옆에서 음식을 해주었습니다. 따뜻한 사람, 감사합니다. 시의 치열함을 깨닫게 해주신 권영옥 선생님, 허형만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제 시를 뽑아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못난 저를 사랑해준 사람들, 사랑합니다.


728x90


[대상] 연고 / 육종원

- 중봉을 그리다


전사의 생무덤을 그 누가 살피는가

피 철철 흐르다 피딱지 앉은 잘린 귀에

인기척에 놀란 파리떼가

파아, 긴 한숨처럼 허공을 번진다


저만치 잘린 팔뚝은 칡뿌리처럼 근육이 남았는데

그 손끝은

들녘의 푸른 허공 한 줌을 그러쥔 채

굳어간다 아 굳어가지 전에

그 팔을 들어다 병사의 어깻죽지에 붙이고

호랑이 뼈로 고아 만든 호고를 발라준다


피가 다시 돌고 살이 살을 끌어당겨 아물고

그리고 먼동처럼 트여오는 함성 소리에

팔은 칼을 들었던, 화살통의 화살을 뽑아들던

그 잘린 손가락이

다시 저 웅숭깊은 분노를 움켜 쥐려는가


어머니, 초저녁 횟배 앓는 어린 것의 꺼진 뱃구레를 쓰다듬듯

상처를 그리듯 찾아가는 연고는

들녘의 명지바람과 푸른 하늘빛으로

그윽히 발라주는 것이다 두려움에 어눌해진 말투마저

이 산하의 불호령으로 살아나듯

사수라, 이 한 마디를 가슴에서

피 토하듯 마지막 뽑아낸 장수의 사자후는 연고다

비겁의 튼 살을 잠재우고

용맹의 푸르른 혈죽을 그 가슴에서

마디마디 불러올리는 연고, 그 형형한 눈빛은

아직도 그 몸에서 그 맘이 짜내고 있는

선열의 연고다





728x90

 

[대상] 오롯한 잠 / 송지원

- 중봉일기


산등성이에서 그만 잠이 들었다
불면증을 앓던 하늘이 소란해지고
나뭇잎들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무성한 신음소리를 몰고 촉새가 사라진 곳에서
아침 해가 뜰 때 나는
꽃으로 기억되길 기도하지 않았다
상처로 얼룩진 몸이
무명으로 잠들길 원했을 뿐
가슴을 관통한 핏물은
나무의 발목을 씻으며 논밭으로 스며들었다
잠속에서도 나는 가위에 눌려
절벽 같은 아침을 맞이했다
미명의 눈빛들이 끌고 있는 정쟁은
도끼날처럼 녹이 슬어
사부랑한 세월만 보내고 있는데
오롯한 잠은 언제 이루어지나
의를 꿈꾸며 수행하다 잠든 땅은
까마귀 떼가 몰고 오는 풍문들이
부산한 시간을 낳고 기른다
불안이 평안으로 도금되어
땅위에서 내 이름이 지워지는 날
내가 완벽한 잠에 들 수 있음으로
모든 영욕이 사그라진 무덤 안에서
세상 이쪽의 문에 걸어둔 귀로 오늘도
내 이름의 부재를 확인하는 중이다






 

[우수상] 애기봉에서 / 송병호 

하늘 반만한 평야가
평야 반만한 바다를 이고 있다
금빛바람 초록공기 그득한
평화문화의 뜰

사각사각 가을을 베는
가위질 소리에
한 발짝 먼저 잠깬 철새들
두 물 합친 한강하류에
몸 담그고
새물로 세수한다

환청에 익숙한 텃새들, 기어이 조강의
금 없는 경계를 넘어 북으로 갔다

문화는 민심이 꽃
둥근 화원

세기를 숨 가쁘게 넘어 온 重峯선생
愛妓와 무슨 정담을 나눌까

설마
시 한 수 겨룰지도 몰라

 



728x90

백의종군 

-(중봉선생을 생각하며)

 

 

                     주석희

 

 

나는 지금 자작나무숲에 서 있다

함부로 휘지 않는 결기를 보고 있다

폭설을 딛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으며

기어이 숲을 이룬

순결한 뼈를 눈이 부시도록 바라보고 있다

가지가 잘려나간 자리마다

검은 눈동자가 훈장처럼 박혀 있다

또렷한 눈동자 쪽으로 가만히 귀를 가져가 본다

 

< 탕-탕- 필사적으로 미끄러지며 한 남자가 자작나무 숲으로 뛰어든다 사냥개들이 분홍빛 혓바닥을 늘어뜨리고 미친 듯이 그를 추격한다 숲에 박혀 있던 새들이 까마득 허공으로 뽑혀 나가고 희고 가느다란 나뭇가지들 소스라치며 어지러운 눈빛을 다급하게 장전한다 >

 

그의 신음인가

차가운 바람이 은갈치처럼 숲을 헤집고 다닌다

나이테에 박힌 총상이 바람 소리로 가벼워지는 중이다

아직도 감지 못한 검은 눈동자 앞에서

다소곳 무릎을 꿇고 있는 겨울 햇살이여!

남루하게 쓰러져 빛나는 눈동자여!

충절의 눈빛은 물관으로부터 뿌리에게

뿌리로부터 실뿌리에게 끝없이 유전된다

시린 발목부터 가녀린 목덜미까지 흰 붕대를 감고 서서

심장 깊숙이 박힌 통증의 기억으로

허공을 밟아가는 의병의 노래를 듣고 있다

한 번 죽고, 영원토록 살아서 끝끝내 백의종군하는 눈동자 앞에서

나는 새들이 돌아오는 저녁까지 서 있다 

출처 : 포엠포엠POEMPOEM
글쓴이 : POEMPOEM 원글보기
메모 :
728x90

 

의병아리랑 / 김민철

 

칡은 한때 하얀 옷을 입던 의병이었다

 

주검이 썩은 내로 봉분을 세우는 동안
어둑발을 뿌리에 단단히 고정시키는 칡,
혼불은 풀잎 뒤에 매복하고
기습적으로 두려움을 터트리곤 했다

 

밭을 가는 소리에 밀리고 밀려
무덤들의 울타리가 되어 버린 칡넝쿨아,
비석은 붓의 느낌보다 핏자국에 익숙하고
관이 없는 시신들은
어둠 밖을 향해 활시위를 당겨본다

 

그러나 구름의 화살촉을 잘못 만진
어리숙한 산새들이 많았는지
길고긴 장마와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흙속에서 버선 끈을 꽉 조이고
햇살로 나오는 칡의 검은 얼굴들을 보라
도라지꽃이 그들에게 독한
향기를 투구로 씌워주는 것도 보라

 

죽은 의병의 심장에서
자줏빛 칡 함성이
피고 지는 소리를 함께 들어보자.

 

 

728x90

 

어떤 혁명 / 천선필

- 중봉선생을 생각하며

 

북변동 삼거리에 중봉선생 동상이 서 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손바닥에 태양을 받쳐 들고 있다

 

강풍에도 펄럭거리지 않는
중봉선생의
구릿빛 도포자락

 

한 사내가 신문지를 깔고 동상 그늘 속에 눕고 있다
그늘이 마치 제 무덤처럼
오랫동안 품고 살아온 가슴을 둥글게 말고 있다

 

사내는 어떤 혁명을 꿈꾸다 돌아왔을까
어느 병사의 죽음처럼
여기 지치고 고단한 몸을 고요히 잠재우고 있다

 

신문 기사에서도 볼 수 없었던
사내의 두 발이 그늘 속에 싸늘히 버려지고 있다

 

동상 위에서 태양이 흘러내리고
도시소음이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바스락거리고 있다
바닥에 빈 술병이
사내의 남루한 얼굴을 지켜보고 있다

 

북변동 삼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비명을 지르는
수많은 자동차불빛이
중봉선생을 위한 조문 행렬처럼 길게 늘어서고 있다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동상의 도포자락 핏빛으로 물들고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