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대상] 의자와 식탁 / 길덕호


아내가 외출한 사이 설거지를 한다

삶의 찌든 때, 사랑의 찌꺼기들이 그릇에 붙어

우리들의 어설픈 삶들을 몸으로 보여준다


수돗물 틀자 와르르 박수 소리가 쏟아지고

물살을 맞은 그릇들은 서로의 몸을 비비며

서로를 기대고 부딪치며 물방울의 춤을 춘다


그릇의 앙상한 몸들을 닦기 위해

찌든 생채기마저 어루만지기 위해

거품으로 단장을 하고 이리저리

우리의 흔적들을 문지르다 보면

어느새 거울처럼 떠오르는 삶의 단상들


생명을 가졌다는 즐거운 환희

하지만 그와 함께 찾아온 직장에의 종언

당신은 둥지를 잃었지만 소중한 새들을 얻었어요


설거지통 속에 들어간 그릇들처럼

아이들과 함께 비비고 문지르고 살았던 세월들

서로 기대고 부딪치며 사랑의 물살을 헤치던 나날들

살아가던 시간들이 물방울처럼 튀어 오르고


함께 가지를 드리우며 새들을 키운 지 이십여 년

때를 벗기고 기름을 지우는 치열한 삶의 한 귀퉁이에서

서로의 그늘이 되기 위해 넓게 이파리를 펼치고

고단한 등허리에 거품이 되어 서로를 닦아주던,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식탁의 모서리까지 둥글게 품으며

흔들리지 않는 의자가 되어 가족들을 자신에게 앉히던

연약한 아내를 생각해 본다


설거지는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는 것일진대

집에 온 아내가 환하게 웃어주길 기대하는 나는

아직 식탁이 되기엔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수상] 파밭 점자책 / 유택상

              - 어머니


파밭이 어머니의 점자책이라 하자, 그후에는

태풍과 폭설과 한파가 지나갔다

묵정밭을 일군 어머니의 손가락이 대파밭 쪽파밭을 만들었다

등 굽은 이랑마다 중중모리 회오리 바람이 분다

햇살은 바람결에 어머니의 몸빼 옷을 찍거나 할퀴고 지나갔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어머니 한글을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모르신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은 하늘과 땅의 마음을 아신다

하늘을 보고 계절을 보고 땅을 보고 씨뿌리고 파종하고 거둘 때를 아신다

어머니는 묵고 오래된 밭에 나가시어 자식같은 생물들을 길러 나를 키우셨다

이랑마다 푸른 작은 쪽파를 심어 점자를 세우 듯

가지런히 허공을 향해 중심을 세웠다

호미로 풀을 뽑아내고 있다

무릎을 끓었다 이마가 땅에 닿았다 다리의 골다공증으로 통증을 호소하시던 어머니

파밭 주변에 달맞이꽃이 개망초가 머리칼을 흔들어 놓았다

대못이 박힌 땅의 마음이

이랑마다 가슴으로 녹아드는 어머니의 굽은 허리가

향긋한 냄새가 낱말로 쓰여졌다

땀방울이 멍울진 가슴을 풀어 놓았다

언제부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엄마의 침묵

비손 하듯 두손을 모았다 호미에 찍힌 땅이 소리를 내었다

구부리고 숙이고 밤낮없이

땅속에서 자식같은 뿌리들이 살뜰하게 자랄 수 있게

물줄기를 하늘을 향해 끌어 올렸다

대궁마다 파란 잎새가 푸른 기도처럼 짙게 번져갔

어머니의 손등이 생채기로 가득했다

애면글면 키원 온 이랑이 길게 늘어진 아픔이 경전이다

나는 어머니의 몸에서 아린한 전언을 읽는다

호밋날로 쓰여진 어머니의 문장이

말로 다하지 못한 슬픔이 등불로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발목이 저려 왔다

보랏빛 주름치마가 돌부리에 찢혔다

호미의 굽은 등이 길을 내어 주었다

침묵의 끝자락 모서리 낱말이 적혀 있었다

누구도 잡아주지 않는 가느다란 모심이

손 마디에 모래알들이 흩어졌다

지워지지 않는 삭이고 삭힌 내력이 내려 앉았다

파밭에 공책에 적힌 글귀가 음률이 되어 흘러 나왔다

점점히 박힌 언어들

이랑의 폐부 깊숙이 엄마의 등에

업혀 파밭에 앉아 잡풀을 뽑는 햇살의 시간

어머니의 등짝을 만지듯 이랑을 만져본다

땅의 보풀을 풀게 하고 무릎의 뼈가 미치지 못하는

저 넓은 지평에 푸른 연필이 담장 위로 솟아 오른다

절절 끓던 엄마의 공책 속에는 작은 돌 큰 돌

호미 한 자루도 꽃피우고 있었다





 

 

 


 

'국내 문학상 > 낭만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회 낭만문학상 당선작  (0) 2019.06.26
제1회 낭만문학상 당선작  (0) 2018.08.04
728x90


이사 / 이봉주

 

한 뼘 햇살이 더 비치는 집에 이삿짐을 푼다

 

개업 슈퍼에서 사은품 하나 받으려고 긴 줄을 서 있는 아내의

가난한 얼굴이 담긴 바구니,

늦은 밤 지친 내 몸을 담고 집으로 들어오던 너덜너덜한 가방

부부싸움에 두 귀를 깊숙이 숨겼던 접시들이 맨살을 내밀고 있다

 

셋방살이마다 나귀 등짐처럼 함께 짊어지고 다닌 가난

 

보자기만 한 둥지가 조금씩 넓어질 때마다

그 둥지 속에서 살갗을 비비며 가슴을 적시던 속울음

젖은 날개를 후드득 털어내는 오후 햇살이 마디마디 서럽다

 

뒤돌아본 시간은 늘 흑백사진처럼 어둑하다

 

그 어둑한 시간 속에서

아내는 내 시린 손을 가슴에 품어 꽃불 한 송이로 피웠고

나는 고단한 아내 손을 가슴에 묻어 돌탑 같은 어깨를 세웠다

 

첩 번을 목젖으로 삼키던 허기진 말들이 서로 이마를 닦아주는 저녁

 

아직 갈 길이 멀어서일까

 

저 뒷들에서 숨을 고르는 바람의 날개

실밥이 툭툭 터진 신발 두 짝이 기울어진 몸의 균형을 잡고 있다



'국내 문학상 > 낭만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회 낭만문학상 당선작  (0) 2019.08.24
제1회 낭만문학상 당선작  (0) 2018.08.04
728x90


[대상] 넝쿨 손 / 이병룡


아내가 베란다에 심은

콩 넝쿨이

하루가 다르게 치오르다가

지지대의 끄트머리

허공에서 머뭇거린다

조금 굽어져요

휘청거리지 말아요

몸을 더 비비꼬아야 해요

삶이 채근하는 대로 올라온 끝점이

아찔한 낭떠러지다

실직의 단호한 명제앞에 멈춘 것이다

낭떠러지에 우두커니 걸터앉아

넝쿨 밑에 그려진 궤적을 내려다본다

넝쿵 아래는 아직도 소란스럽고

지붕 위에 다다른 햇볕은 뜨겁다

콩 터지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고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의 주인공들은

연거푸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아내의 씨줄 넝쿨손이

허공을 더듬고 있는 내 날줄을 엮어

넝쿨 사이사이의 간극을 메워준다

한치 앞도 못보고 제 안으로만

구부러져 가는 내 접힌 손을 끌어올린다

콩 줄기가 한 물결의 연리지로 솟아

가슴 넓은 콩잎을 널찍널찍하게 피우고 있다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절벽에서

허공의 틀을 헤쳐 나가는 저 가냘픈 넝쿨 손

삼십 년 전, 내게로 오려고

망설임 없이 봇짐을 싸던 바로 그 손이다







[우수상] 바느질 / 지연구


침을 묻혀 실 끝을 돌돌 말아 바늘귀에 넣느라

한 쪽 눈을 찡그려 가며

아내가 아이의 바지를 꿰매고 있다

침침한 눈을 비벼 가며 늦은 밤 까지

찢어진 바지와 함께 아내가 바느질 하는 건

여기저기 해지고 구멍 난 우리 집 살림살이

처음부터 찢어질 기미를 보이던 신접 살림살이부터

이미 찢어져 버린 아파트 대출금

구멍 난 아이들의 학자금

정리해고를 당하고 방황하던 시절

나의 외로움까지

아주 오래전부터 아내는

집안 살림살이들을 꿰매고 있었다

혼자 하는 아내의 바느질이 안쓰러웠는지

하얗게 센 머리에 바늘을 문질러 가며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내 곁에 앉아 함께 바느질을 하고 계신다

어머니가 뾰족한 바늘 되어 옷감을 뚫고 앞으로 나가면

아내는 실이 되어 그 뒤를

촘촘히 밟으며 따라가고 있다

이 만큼 살아가는 우리 집 형편도

어머니께 배운

집안을 꿰매고 다듬는

아내의 바느질 솜씨 덕분이다

바느질을 끝낸 어머니가

아내의 주름진 손에 바늘을 들려주며 조용히 웃으신다

어머니와 밀애를 들킨 듯

헛기침을 하며 방문을 여는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두 뺨이 발그레 하다


아내는 우리 집을 세우고

꿰매는 기둥이다









'국내 문학상 > 낭만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회 낭만문학상 당선작  (0) 2019.08.24
제2회 낭만문학상 당선작  (0) 2019.06.2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