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의자와 식탁 / 길덕호
아내가 외출한 사이 설거지를 한다
삶의 찌든 때, 사랑의 찌꺼기들이 그릇에 붙어
우리들의 어설픈 삶들을 몸으로 보여준다
수돗물 틀자 와르르 박수 소리가 쏟아지고
물살을 맞은 그릇들은 서로의 몸을 비비며
서로를 기대고 부딪치며 물방울의 춤을 춘다
그릇의 앙상한 몸들을 닦기 위해
찌든 생채기마저 어루만지기 위해
거품으로 단장을 하고 이리저리
우리의 흔적들을 문지르다 보면
어느새 거울처럼 떠오르는 삶의 단상들
생명을 가졌다는 즐거운 환희
하지만 그와 함께 찾아온 직장에의 종언
당신은 둥지를 잃었지만 소중한 새들을 얻었어요
설거지통 속에 들어간 그릇들처럼
아이들과 함께 비비고 문지르고 살았던 세월들
서로 기대고 부딪치며 사랑의 물살을 헤치던 나날들
살아가던 시간들이 물방울처럼 튀어 오르고
함께 가지를 드리우며 새들을 키운 지 이십여 년
때를 벗기고 기름을 지우는 치열한 삶의 한 귀퉁이에서
서로의 그늘이 되기 위해 넓게 이파리를 펼치고
고단한 등허리에 거품이 되어 서로를 닦아주던,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식탁의 모서리까지 둥글게 품으며
흔들리지 않는 의자가 되어 가족들을 자신에게 앉히던
연약한 아내를 생각해 본다
설거지는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는 것일진대
집에 온 아내가 환하게 웃어주길 기대하는 나는
아직 식탁이 되기엔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수상] 파밭 점자책 / 유택상
- 어머니
파밭이 어머니의 점자책이라 하자, 그후에는
태풍과 폭설과 한파가 지나갔다
묵정밭을 일군 어머니의 손가락이 대파밭 쪽파밭을 만들었다
등 굽은 이랑마다 중중모리 회오리 바람이 분다
햇살은 바람결에 어머니의 몸빼 옷을 찍거나 할퀴고 지나갔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어머니 한글을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모르신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은 하늘과 땅의 마음을 아신다
하늘을 보고 계절을 보고 땅을 보고 씨뿌리고 파종하고 거둘 때를 아신다
어머니는 묵고 오래된 밭에 나가시어 자식같은 생물들을 길러 나를 키우셨다
이랑마다 푸른 작은 쪽파를 심어 점자를 세우 듯
가지런히 허공을 향해 중심을 세웠다
호미로 풀을 뽑아내고 있다
무릎을 끓었다 이마가 땅에 닿았다 다리의 골다공증으로 통증을 호소하시던 어머니
파밭 주변에 달맞이꽃이 개망초가 머리칼을 흔들어 놓았다
대못이 박힌 땅의 마음이
이랑마다 가슴으로 녹아드는 어머니의 굽은 허리가
향긋한 냄새가 낱말로 쓰여졌다
땀방울이 멍울진 가슴을 풀어 놓았다
언제부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엄마의 침묵
비손 하듯 두손을 모았다 호미에 찍힌 땅이 소리를 내었다
구부리고 숙이고 밤낮없이
땅속에서 자식같은 뿌리들이 살뜰하게 자랄 수 있게
물줄기를 하늘을 향해 끌어 올렸다
대궁마다 파란 잎새가 푸른 기도처럼 짙게 번져갔다
어머니의 손등이 생채기로 가득했다
애면글면 키원 온 이랑이 길게 늘어진 아픔이 경전이다
나는 어머니의 몸에서 아린한 전언을 읽는다
호밋날로 쓰여진 어머니의 문장이
말로 다하지 못한 슬픔이 등불로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발목이 저려 왔다
보랏빛 주름치마가 돌부리에 찢혔다
호미의 굽은 등이 길을 내어 주었다
침묵의 끝자락 모서리 낱말이 적혀 있었다
누구도 잡아주지 않는 가느다란 모심이
손 마디에 모래알들이 흩어졌다
지워지지 않는 삭이고 삭힌 내력이 내려 앉았다
파밭에 공책에 적힌 글귀가 음률이 되어 흘러 나왔다
점점히 박힌 언어들
이랑의 폐부 깊숙이 엄마의 등에
업혀 파밭에 앉아 잡풀을 뽑는 햇살의 시간
어머니의 등짝을 만지듯 이랑을 만져본다
땅의 보풀을 풀게 하고 무릎의 뼈가 미치지 못하는
저 넓은 지평에 푸른 연필이 담장 위로 솟아 오른다
절절 끓던 엄마의 공책 속에는 작은 돌 큰 돌
호미 한 자루도 꽃피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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