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볼트 / 임후성

 

 

코끼리를 보라

코끼리끼리는 볼 수 없는 코끼리를 보라

꼬리를 위해 서 있는 네 번째와 세 번째 다리를 보라

걸음을 뗄 때 발을 남기고 벗겨질 것만 같은 발의 접힌 거죽을 보라

달라붙어 있지 않고

그것은 끌려다닌다

우리의 난제였던 바깥이다

실체는 헐렁헐렁하다

그 안에서 기관을 해체하는 망치질 같은 코끼리의 걸음을 보라

눈앞에 직접 정의된 코끼리를 보라

걸을 때마다 부서지고 있지 않은가

간신히 어금니로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코끼리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안과 바깥은 서로에게 통증이 그지없다

 

뒤쪽 숲을 보라

나뭇잎들이 가지에 붙어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한다

나무 주위를 맴돌며 탈출이 어려운

바람의 원숭이들을 보라

가장 가까운 붉은색을 볼 수 없는 원숭이의 눈을 보라

저 영특한 종족은 의혹의 못에 박힌 매혹이다

이때 고개를 돌려 완전한 불의 형태로 시간을 태우는 대관람차를 보라

오전의 하품 같은 간격을 보라

회전의 무의미 아래 네게 권해지는 네 머릿속을 보라

 

주차장에서 마주친 사 년 전 그 사람을 보라

하천이 흐르는 대로변에서

다리 아래로 유혹해

교량의 접합부마다 극렬하게 박힌 볼트를 해가 질 때까지 함께 보았던 그 사람을 보라

볼트 하나를 빼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을 보라

그가 너를 찾아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볼트 하나를 갖고 있다

그와 상관없이 혼자서 한 번 더 다리를 건너라

다리는 흔들거린다

그 아래를 보라

조그만 구멍을 남기고 녹슨 생략이 있다

 

예스이십사

 

deg.kr

- 에드픽 제휴 사이트로 소정의 수수료를 받습니다.

 
 
 
 

[당선소감] 고향을 떠난 모든 ‘미사일’에게 읽어주고 싶은 시

 

이 기쁨에 아득함이 있다. “‘볼트’는 어떻게 그곳까지 갈 수 있었을까.”

 

당선 소식 후 잠시 자리를 피해 줬던 일상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날짜를 확인한다. 겨울이 느리게 가는구나. 일상은 왠지 사소한 일에도 조금 더 책임을 요구하는 것 같다. 무반주 첼로를 들으니 코끝에 저수지가 생기는 기분이다. 세계 안에서 파편인 나는 이제 새롭게 비행해야 한다. 상승과 하강의 난류(亂流)를 지나며 나는 시의 이름으로 호명될 것이다. 착빙하는 동체에 닿는 빛의 차가움은 문학의 신경인가. 고향을 떠난 모든 미사일에게 시를 읽어 주고 싶다.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하는 편지 한 통이 와 있다. 읽어 보고 싶은데 그 전에 내게 자꾸 다른 일이 생긴다. 그럴 줄 알았어. 편지는 또 다른 이에게 가 버릴 거야. 그러면 나는 읽지 못한 편지의 말을 대신 써 나가도 좋겠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 그립습니다. 존경하는 극작가이신 아내 김성민님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은 늘 저를 보호하고 삶과 문학을 위한 수공업적 자세를 길러 주셨습니다. 저는 문학과 예술의 동료로서 당신에게 속합니다. 외롭고 높게 인문 연극하는 극단 피오르에 감사드립니다. 서현과 진서에게 감사합니다. 당신들은 나의 변증법입니다. 예선을 거쳐 최종심까지 질식의 시간을 견뎌 준 ‘볼트’에게 감사합니다. 당선의 영광을 주신 서울신문에 감사드립니다. 아름답고 절실하고 성스러운 모국어에 감사합니다. 어쩌면 영원히,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나는 오늘의 관습 앞에서 순결한 존재의 먼 얼굴을 회상한다.

 

 

[심사평] 코끼리와 사회의 연결, 그 상상력과 호흡에 감탄

 

“한 명.” 신춘문예는 한 명을 찾는 일이다. 인파 속에서 그 사람을 찾아야 한다. 예년보다 응모작이 많은 데다가 수준 또한 높아서 심사장은 후끈후끈했다. 한 명이 될 수 있는 이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793명이 응모한 3001편의 시들을 집중하며 읽었다. 팬데믹의 여파가 경기 침체, 청년 실업 등의 양상으로 응모작에 나타났다. 삶의 피로와 미래에 대한 비관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고 기후 위기를 염려하는 시도 눈에 띄었다.

 

본심에 올라온 세 명의 응모자는 개성으로 빛났다. 개와 오리와 코끼리 등 동물이 시를 이끄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공통점이었다. ‘여름의 잠’(외 2편)을 보낸 응모자는 정적인 장면을 상상으로 부풀리는 데 거침없었다. 상상이 끝나고 질문이 바닥나도 여운은 오랫동안 현장에 머무를 수 있음을 담담하게 보여 주었다. ‘문에 기대지 마시오’(외 2편)를 쓴 응모자는 예사로운 풍경에서 움직임을 그려 내는 데 능했다. 골목길과 지하철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아름다운 날들”을 복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가만히 설득해 냈다.

 

토론 끝에 ‘볼트’ 외 2편을 응모한 임후성을 그 ‘한 명’으로 결정했다. ‘볼트’는 코끼리 다리에서 볼트를 연상하고 코끼리 몸집과 사회 구조를 빗대어 전개하는 시다. 코끼리를 알기 위해서는 코만 만져 봐서는 안 된다. 펄럭이는 귀, 네 개의 튼튼한 다리, 길쭉한 코, 단단한 상아까지 만져 봐야 한다. 그의 시 쓰기가 톺아보기를 지향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막힘없는 상상과 내달리듯 호흡하는 문장은 읽는 맛도 더해 주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코끼리처럼 성큼성큼 나아가되 주변의 작은 존재들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울러 응모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심사위원 : 신해욱·오은·정끝별

 

 

728x90

 

 

 

반려울음 / 이선락

 

 

슬픈 시를 쓰려고 배고프다, 썼는데 배곺으다라 써졌다

곺 뒤에 커서를 놓고 백스페이스키를 누르자 정말 배가 고팠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버렸나? 배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고프다, 쓰자 배가 없어졌다. 등이 구부러지는, 굴절된 뼈 같은 오후

 

그래, 슬픔은 늘 고프지

어딘가가 고파지면 소리 내어 울자, 종이 위에 옮겼다

 

*

 

세면대 위에 틀니를 내려놓듯 덜컥, 울음 한마디 내려놓고 왔습니다

그뿐인가 했더니

옆구리 어디쯤에 쭈그리고 있던 마음, 굴절되어 있네요

 

거품을 집어삼킵니다 씹어도 건더기라곤 없는 튀밥

혓바닥이 마르고, 버썩거립니다

 

그래요, 뭐든 버썩거릴 때가 있어요 잠깐 눈 돌리면

쏟아지기도 하고

 

난 수년 전 아이 몇몇 쏟아버린 적도 있어요

 

그땐 내 몸도 깡그리 쏟아졌던 것 같아요 마지막 손톱을 파낼 땐

눈에도 금이 가고 있었죠

 

얘야, 눈빛이 많이 말랐구나 눈을 새뜨고 있는 게 아니었어내가,

 

손가락을 흘리고 다니지 말랬잖아요 근데 왜 까마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지보송보송 털이 난 꿈속에서

 

*

 

배가 고프단 얘긴 줄 알았는데, 그림자 얘기였어

 

부품해진 그림자론 날아오를 수 없다, 어떤 돌은 그림자도 생겨나지 않는다, 죽은 후론 배꼽도 떠오르지 않는다, 쏟아졌던 아이들이

 

처음으로 수면에 떠올라

배꼽은 어디 있을까?’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깨지지 않는 것도 깨진 것이 돼 버린 오후

이렇게 비좁고, 나는 깎아지른 맘뿐이었나

 

몇 줄 적지 못한 종이 한 장 찢어, 공중에 날리는

 

 

 

 

 

[당선소감] 나이는 숫자일 뿐더 많이 생각하고 노력해야죠

 

농막에서 돌아와 막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낯선 번호의 전화가 왔다. “서울신문 기자인데요.” 나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내 속의 내가 한 길쯤 공중으로 솟아올랐던 걸까? 아내가 진정하라고 어깨를 내려주었을 때서야 참으로 많이 놀랐구나, 기뻤구나, 실감이 났다. 전화기 속으로 절이라도 겹쳐 넣고 싶었다.

 

수 해 전 아내는 농막 하나를 지어 내어주며 하고 싶은 것 많이 해보라고 권했다. 이튿날 바로 읽고 있던 시집 10여 권을 들고 가 종일토록 읽었다. 토요일 오후엔 동리목월문예창작대에서 수강했다. 구광렬 시인의 첫 수업 때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된 계기였다.

 

그 후에도 손진은 시인, 전동균 시인, 유종인 시인의 열강을 놓치지 않고 들었다.

 

제법 몇 해가 흘렀을 때에서야 약간씩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내 속의 내가 말을 걸기도 했고, 주위의 사물들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써보라고 권하는 듯했다.

 

시가 되는지 뭐가 되는지도 모르고 즐겁게 썼다. 여러 시집을 읽었다. 수백여 권쯤 될까? 세 번, 네 번, 열 번, 스무 번쯤 좋아지는 시집을 더 많이 읽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좋아하게 됐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노력하겠다, 다짐해본다.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리며, 노심초사 나를 지켜봐 주신 여러 지인들께도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문우님들께도, 시목문학회 회원들께도 깊이 감사를 드린다. 아내를 다시 한번 껴안아 주고 싶다. 마스크를 벗고 사는 시간이 얼른 왔으면. 기다려진다.

 

 

 

 

[심사평] 고픔과 아픔 외면하지 않는 시, 질문을 그치지 않는 시

 

올해도 많은 분들이 새봄을 향해 시를 보내 주셨다. 오랜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읽었다. 예년보다 더 오래 숙고했는데, 손에서 쉽사리 내려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단단하게 짜인 세계를 횡단하며, 심사자들의 눈과 손이 시종 천천히 움직였다.

 

오픈이 보여 준 감춤과 들킴의 미덕, ‘물과 풀과 건축의 시에서 감지한 조용한 폭발, ‘비닐하우스가 만들어 낸 미묘한 긴장, ‘온몸 일으키기가 일으킨 위트와 블랙 유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같이 머리와 가슴을 두드리는 시편이었다.

 

당선작과 끝까지 경합한 저기 저 작은 나라외 네 편은 독특한 시적 세계관으로 심사자들의 고른 지지를 받았다. 자기만의 세계가 이미 상당 부분 구축돼 있어 앞으로 그 세계가 어디로 어떻게 뻗어나갈지 궁금했다. 토씨 하나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 문장들은 묘한 리듬감을 자아내 읽을 때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띤 토론 끝에 반려울음외 두 편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젊음은 젊은 상태, 혹은 젊은 기력을 가리킨다. 젊은 시가 있다면 그 상태를 잊거나 잃지 않고자 기력을 쏟아붓는 시일 것이다. ‘고픔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시, 질문을 그치지 않는 시일 것이다. 일상의 한 장면에서 지나간 시간을 길어 올리고 작금의 감정을 그 위에 내려놓는 시일 것이다. ‘반려울음은 쓰면서 고파지는 시, 배가 뱃가죽과 배꼽을 소환하는 시, 마침내 쏟아버리면서 동시에 쏟아지는 시였다. “버썩거리는일상을 비집고 다른 존재를 향한 유일한 감정이 솟아오르며 빛나는 시였다. 울음을 껴안으면서 울음과 함께 살겠다고 다짐하는 시였다.

 

시 쓰는 데 있어 이른 시간과 늦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를 쓰는 시간은 모두 제시간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응모자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심사위원 신해욱, 오은, 박연준

 

 
728x90

 

 

최초의 충돌 / 김민식 

 

 

나는 화면 너머의 테니스 경기를 본다

테니스 라켓이 공을 치는 순간

무수한 공중이 한꺼번에 태어난다

 

고래의 힘줄

산양의 창자

얇게 저며진 살점으로 직공은

라켓을 짠다

종선과 횡선이 지나간 사이에

태어나는 눈

공중에 이름을 붙이는 최초의 노동이었다

 

천사를 체로 걸러낼 수 있다고 믿은 프랑스인이 있었다

축과 축의 직교 속에서 성령은 좌표를 얻었다

 

의심 속에서

의심도 없이

 

체의 촘촘한 눈을 세는 귀신의 눈은 비어 있다

 

눈알만 파먹힌 생선들이

부둣가에 쌓여 있다

 

백경白鯨의 투명한 수정체

멸종된 거대 수각류의 담석

전체를 상상하면 그것들은 차라리 허공이었다

 

한국의 산에는 호랑이 모양 구멍이 반드시 하나씩 있으며

 

돌탑 위에 둥근 돌을 하나 올려도

산이 무거워지는 것은 아니었고

 

무수한 왕의 안구가 뽑혀나가도

지구가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믿음 속에서

믿음도 없이

 

삶의 질량을 변화시킬 혁명이 필요했다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믿는 사람이 없었고

하늘에 빛나는 돌이 불과 물과 함께 떨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생겼다

 

외계에서 날아온 돌은 지구를 확실히 무겁게 만든다

그것은 종종 과학의 영역이었다

 

“마음 속에 천 개의 방이 있고, 그 안에서 천 개의 멜로디가 흘러나옵니다. 나는 어떤 계열의 천사인 것만 같습니다”*

 

처음으로 운석을 발견한 아이가 남긴 말이었다

그가 발견한 검은 돌은

검은 신전의 기둥이 되었다

 

운석이 떨어진 자리엔, 빛과 유리와 불과 물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는데요

 

정말 그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자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다만 우주의 조각을 만져보고자 하는 순례자들의

 

계획 속에서

계획도 없이

 

푸른 언덕에 모여 유성우를 구경하는 사람들

얼굴들이 깊게 파인 구멍 같다

나뭇가지에 걸린 셔틀콕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표정만 같다

 

너, 라고 부르면 뒤돌아보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아무도 귀엽거나 밉지 않았고

 

아나운서의 어깨 너머로

카메라가 풍경을 화소로 만들기 직전

 

나는 주머니에서 빛나는 하얀 공을 꺼냈다

아직 세상에 없는 구기종목의 공인구였다

 

 

⁕“머릿속에 만 개의 방이 있어서 좋은 멜로디가 나와요.”: 4세 어린이 백강현의 말. (‘영재 발굴단’ 108회)

 

 

 

 

728x90

 

 

최초의 충돌 / 김민식

 

나는 화면 너머의 테니스 경기를 본다

테니스 라켓이 공을 치는 순간

무수한 공중이 한꺼번에 태어난다

고래의 힘줄

산양의 창자

얇게 저며진 살점으로 직공은

라켓을 짠다

종선과 횡선이 지나간 사이에

태어나는 눈

공중에 이름을 붙이는 최초의 노동이었다

천사를 체로 걸러낼 수 있다고 믿은 프랑스인이 있었다

축과 축의 직교 속에서 성령은 좌표를 얻었다

의심 속에서

의심도 없이

체의 촘촘한 눈을 세는 귀신의 눈은 비어 있다

눈알만 파먹힌 생선들이

부둣가에 쌓여 있다

백경白鯨의 투명한 수정체

멸종된 거대 수각류의 담석

전체를 상상하면 그것들은 차라리 허공이었다

한국의 산에는 호랑이 모양 구멍이 반드시 하나씩 있으며

돌탑 위에 둥근 돌을 하나 올려도

산이 무거워지는 것은 아니었고

무수한 왕의 안구가 뽑혀나가도

지구가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믿음 속에서

믿음도 없이

삶의 질량을 변화시킬 혁명이 필요했다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믿는 사람이 없었고

하늘에 빛나는 돌이 불과 물과 함께 떨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생겼다

외계에서 날아온 돌은 지구를 확실히 무겁게 만든다

그것은 종종 과학의 영역이었다

“마음 속에 천 개의 방이 있고, 그 안에서 천 개의 멜로디가 흘러나옵니다. 나는 어떤 계열의 천사인 것만 같습니다”*

처음으로 운석을 발견한 아이가 남긴 말이었다

그가 발견한 검은 돌은

검은 신전의 기둥이 되었다

운석이 떨어진 자리엔, 빛과 유리와 불과 물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는데요

정말 그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자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다만 우주의 조각을 만져보고자 하는 순례자들의

계획 속에서

계획도 없이

푸른 언덕에 모여 유성우를 구경하는 사람들

얼굴들이 깊게 파인 구멍 같다

나뭇가지에 걸린 셔틀콕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표정만 같다

너, 라고 부르면 뒤돌아보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아무도 귀엽거나 밉지 않았고

아나운서의 어깨 너머로

카메라가 풍경을 화소로 만들기 직전

나는 주머니에서 빛나는 하얀 공을 꺼냈다

아직 세상에 없는 구기종목의 공인구였다

 

 

 

 

728x90

 

 

그림자 숲과 검은 호수 / 이원석

 

 

모든 것은 덤불 속에 감춰져 있지

거기까지 가는 길이 어둡고 어렵고 어리고

나뭇가지에 헝클어진 머리칼에는 마른 잎들이 견디기 힘든

날들이 따라붙었지 매달리고 매만지고 메말라

찬 공기는 조금씩 뒤섞였어

침상에서 내려 딛은 발은 문 앞까지 낡은 마루가 삐걱이는

소리를 누르고 길고 고른 숨소리들

사이로 천천히 밀어내는 호숫가의 배

젖은 흙 다섯 발가락들 사이로 닿는 촉각 촉각 누르는

건반과 긴바늘 입술 위의 손가락

우거진 뿔이 덤불 속에 갇혀

머리를 숙이고 있지 포기하지 못한 자랑들이 엉켜 있는

낮은 덤불에 얼굴을 묻고 몸을 떨지 다물지 못하는 입으로

숨을 뱉으며 뒷걸음질 끝에 꿇은 무릎과 마른 잎 위의 몸뚱이

내가 들어 올리고 싶은 뿔은 덤불 속에 잠겨 있어

달리는 덤불을 보여 줄게

춤추는 작은 숲을

바닥을 움켜쥔 모든 뿌리와 함께

흰옷은 흙투성이

물은 차고 어두워 소스라치는 살갗

걸어들어오는 고요와 잠긴 청각이 듣는 물소리

물속을 만지면 물이 몸을 바꾸고 뒤집는 모양은

얼굴과 얼굴이 흐르고 잠기는 기억

길게 줄어드는 음이 끊기지 않는

몸에 선을 긋고 지나가지 손도 발도 없이

물의 틈을 찾아 결대로 몸을 틀며 가라앉는 숨

접촉경계혼란

피아노의 가장 낮은 건반을 무한히 두드리는

바닥

놓지 마 놓지 마

춤을 추는 팔과 파란

뒤집힌 호수 바닥 위에 검은 숲

그림자 속 덤불과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고개를 젓는 우거진 뿔과 큰 눈망울

진저리치며 흩날리는 입과 잎과 입김

호수 위엔

잔물결조차 일지 않는 검은 물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 숲엔 부러진 뿔과 나뭇가지

몸뚱이 위로 끝없이 떨어지는 마른 잎사귀

 

 

 

 

202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옥상에 매여 있던 전기양발견해주셔서 감사

 

진짜 양 한 마리를 키우고 싶었을 뿐이야

열망과 기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전선을 따라 어둠이 내려 기어이

전기양을 보러 갈 때

너는 진짜 양에 대해서 오랫동안 얘기하고는 했지

그리고 혼자 남은 나는 양 울음소리를 흉내내 본다 전자식으로

매에 하고 매번 울었지만

매에 순간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습니다.

전기양의 울음을 모조하기 위해 성대를 기계식으로 교체합니다.

살아 있는 양 한 마리를, 살아 있는 양 두 마리를, 살아 있는 양 세 마리를 천천히

전자식으로 떠올리다가 잠이 들곤 했습니다.

옥상에 매여 있던 전기양을 발견해주신

 

*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정진하겠습니다. 작년 체육관 운영이 어려울 때 삼백 빌려준(다 갚음) 재휘야, 고맙다. 사실은 날 가장 먼저 시인이라고 불러 줬던 친구, 나의 부를리우크. 그리고 다시 시를 쓰며 들었던 시 창작 수업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공간과 프로그램을 마련해 주신 읻다 아카데미, 첫 수업료를 빌려준(다 갚음) 동생 정아, 새로운 언어를 찾아 주신 백은선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유난스런 자식을 지켜봐 주신 부모님(못 갚음), 늘 지지하고 응원해 준 가족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평] 현실··무의식 넘나들며 보여줄 새로운 모험의 결과물 기대

 

750명의 투고자들 중 12명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가장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터널’, ‘부메랑’, ‘그림자 숲과 검은 호수등이었다. 무엇이 당선작이 돼도 좋을 만큼 세 분의 작품들은 완성도가 높고 자기만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터널2편은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어둠과 물기, 그리고 파열 속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간결하고 절제된 언어로 그려낸다. 고립되고 무너진 세계를 벗어나 타자에게 가 닿으려는 화자는 관념을 다루거나 허공을 유영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다만 흑과 백, 소리와 침묵, 칼과 꽃의 선명한 대비 구조가 다소 단순한 폐쇄회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부메랑2편은 도시의 평범한 풍경이나 일상적 소재들을 특유의 활력으로 되살려내 감각적 향연의 장으로 만든다.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자유로운 연상을 통해 펼쳐지는 동안 산문성이 강화되지만, 시적 긴장을 잃지 않고 리듬을 조율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원심력의 확장이 번번이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추어버려 소품에 가깝다는 인상이 들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그림자 숲과 검은 호수는 투고자의 작품 중 상대적으로 가장 짧은 시였다. 100행에 육박하는 시들을 신춘문예에 투고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오히려 그 패기와 스케일을 높이 사고 싶었다. ‘경로를 잃어버린 통로와 불가피한 레시피’, ‘정밀하게 고안된 하루등의 다른 투고작들도 만만치 않은 시력과 테크닉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당선작은 접촉경계혼란이라는 심리적 현상을 숲과 호수의 데칼코마니를 통해 역동적으로 전개하면서 달리는 덤불하나를 눈앞에 보여 준다. 앞으로도 그가 현실과 꿈과 무의식을 유연하게 넘나들며 어떤 새로운 모험의 결과물들을 우리 앞에 부려 놓을지 기대를 갖게 된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나희덕·안도현 시인

 

728x90

 

 

랜덤 박스 / 류휘석

 

 

내겐 매일 허들을 넘다 실패하는 광대들이 살아요

 

불필요한 기념일이 빼곡한 달력, 숨 쉴 날이 없어요

나 대신 종이에 누워 숨 쉬는 사람들

밤이 되면 광대는 잠을 자고 나는 일어납니다

 

나는 허들을 치우고 부서진 광대들을 주워 종이 상자에 집어넣습니다

그늘을 뿌리는 거대한 인공 나무, 물을 줘요 잘 자라서 더 크고 뾰족한 허들을 만들어내렴

 

그렇지만 모든 게 나보다 커져서는 안 돼,

 

광대들은 일도 하지 않고 아침마다 이불을 걷어냅니다 나는 토스트처럼 튀어 올라 침실을 접어 내던져요 나를 어지럽히는 벽시계와 발목에 생긴 작은 구멍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커집니다

 

방이 비좁아서 나는 밖에 있습니다 밖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 상자를 만들어야 해요 재사용 종이는 거칠고 단단해서 반성에 알맞습니다

천장에 붙어 기웃거리는 가녀리고 얇은 나의 광대들

반성이 시작된 집은 무덤 냄새가 나는 요람 같아요

 

나는 탄생부터 기워온 주머니를 뒤집습니다 바닥은 먼지로 가득찹니다

도무지 채워지질 않는 상자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실패와 실종

 

내가 죽으면 광대들은 허들을 넘을까요

궁금해서 죽지도 못합니다

 

 

 

 

2019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눈 감으면 떠오르는 사람들, 고맙습니다

 

오후가 끝나가고 있을 때 전화를 받았다. 광고 전화인 줄 알았다. 오랜 불면 탓에 힘없는 목소리로 받았던 게 마음에 걸린다.졸업을 앞둔 상태라 걱정이 많았다. 두꺼운 불안이 나를 감싸고 끝없이 진동하는 기분 속에서, 나는 내내 깨어 뭐라도 해야 하는 사람.

 

뭐라도 읽고, 뭐라도 써서, 뭐라도 되어야만 하는 사람. 녹음된 내 목소리는 여전히 사랑하기 어렵지만 아주 조금은 허락을 받은 것 같아서 기쁘다.

 

매 순간 후회되는 일이 많아서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집을 사게 된다면, 넓은 베란다가 있는 집을 사서 세상에서 제일 긴 빨랫줄을 이어야지. 슬픈 사람들을 건져 널어둬야지. 잘 마르고 잘 개지는 사람들. 그것들을 다 게워낸 후에는 편히 잘 수 있을까.

 

미안합니다. 건강해지겠습니다.

 

못난 아들 끝까지 믿어주신 부모님 감사드립니다. 사랑합니다. 누나 많이 챙겨줘서 고마워. 부족한 저를 이끌어주신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님들. 감사드립니다. 더 믿고 의지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용기가 되어준 동기들, 고맙다. 잠든 저를 깨워 차에 태우고 백일장에 데려갔던, 잘하고 있다고 매번 말해줬던 여러 선배님 감사합니다. 항상 응원하고 자존감 채워주는 후배들, 고맙고 사랑해. 그리고 서산 친구들,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고맙고 사랑한다.

 

정말 힘들 때 어깨를 두드려주신 심사위원 나희덕, 안도현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배울 게 아직 많은 저에게 더 많이 혼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학예회. 너희들이 없었으면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어. 더 열심히 써서 덜 우울해지자.

 

 

 

 

 

[심사평] 실패·실종을 겪은 자만이 그릴 수 있는 우리시대 음화

 

예심을 통과한 열 분의 작품들은 완성도가 비슷한 수준이어서 우열을 가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중에서 랜덤 박스’, ‘앞의 감정’, ‘요르단에서 온 편지등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논의를 거듭할수록 언어적 테크닉이 승한 시보다는 고유한 자기 목소리를 지닌 시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요르단에서 온 편지6편은 이국적인 소재나 배경, 동화적 상상력을 통해 이채로운 이미지들을 빚어낸다. 일상의 공간이 자연스럽게 먼 극지나 태고의 시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풍경이 매력적이다. 그러나 감각과 리듬에만 주로 의지하다보니 소품에 그치는 느낌이 들었다.

 

앞의 감정2편은 시어를 다루는 숙련된 솜씨와 구어체의 다정한 문장들 덕분에 흡인력 있게 읽힌다.

 

그런데 그 유려한 문장들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잘 잡히지 않았고, 기시감이 느껴지는 표현들이 눈에 띄었다. 매끄러운 언어 뒤에 인식의 충격이나 여운이 좀더 있으면 좋겠다.

 

당선작으로 뽑은 랜덤 박스2편은 다소 장황한 듯 하지만 시적 사유와 문제의식을 끝까지 밀고 간다는 점에서 믿음이 갔다.

 

우울한 판타지에 가까운 그의 시들은 특히 허기’, ‘죽음등에 예민한 촉수를 대고 있다. “매일 허들을 넘다 실패하는 광대들처럼 종이상자에 갇혀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현대인의 일상은 부단한 실패와 실종을 겪은 자만이 그려낼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음화(陰畵)가 아닐까.

 

당선을 축하드리고, 그 갇혀 있음과 미끄러짐을 딛고 앞으로도 치열하게 살아내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안도현·나희덕 시인

 

728x90

 

 

 

정말 먼 곳 / 박은지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

 

그 절벽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몰라 빨리 가봐야 해

정말 먼 곳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었다

돌이 떨어지고 흙이 바스러지고

뿌리는 튀어나오고 견디지 못한 풀들은

툭 툭 바다로 떨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 소리는

파도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상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고

거짓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견디는 일은 떨어지는 일이었다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2018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가 준 위로, 나눌 수 있어 기쁘다

 

10년 후 내 모습 같은 걸 그려보는 일은 어려웠다. 계획은 늘 틀어졌고, 예상치 못한 일은 자꾸 찾아왔다. 오늘을 무사히 견디자는 목표만이 살아남았다. 물론 자주 실패했다. 발밑이 무너지거나, 흩어진 나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가만히 울면서 오늘을 보낼 때도 있었다.

 

그런 날엔 시의 힘을 빌렸다. 시를 읽거나 쓰면 내가 덜 초라하게 느껴졌고 덜 외로웠다. 시를 써야 내가 같았고, 가끔은 근사해 보이기까지 했다.

 

잘 쓰고 싶었고, 좋은 시를 쓰고 싶었으나 이 또한 자주 실패했다. 그냥 쓰는 수밖에. 시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을 버리고 그냥 쓰는 수밖에. 그러던 오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10년 후 만난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든다. 오늘도 내일도 시의 힘을 빌려야지. 이 힘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어 기쁘다.

 

우리 엄마 허경숙, 엄마의 사랑으로 제가 살아 있습니다. 행복의 밀도를 높여주는 우리 가족, 특히 조카 박지성 고맙고, 사랑합니다. 우리는 더 많이 행복해져야 합니다.

 

끝까지 저를 지켜봐 주신 박주택 교수님,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김종회 교수님을 비롯한 경희대 국문과 교수님들, 프락시스연구회와 경희문예창작단, 현대문학연구회 선후배님들이 계셔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경환, 승원, 은영, 규진 더 많은 밥과 술을 함께합시다. 나의 가장 큰 위로인 의룡,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워.

끝으로 이문재 선생님, 나희덕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제게 내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많이 웃고 많이 울며 계속 쓰겠습니다

 

 

 

 

[심사평] 수사 과잉의 피로감 속 간결미 돋보여

 

2000년대 이후 서정시의 갱신은 탈주체의 문제나 문법적 해체와 맞물려 진행되어 왔다. 본심에 올라온 열다섯 명의 작품들에서도 그런 변화가 확연히 느껴졌다.

 

주체가 불분명한 진술들과 지나치게 비틀어서 소통 불가능할 정도의 문장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러한 단절과 비약이 항상 새로움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이규진, 남수우, 장희수, 박은지의 시들은 새로운 어법을 보여 주면서도 나름대로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박은지의 정말 먼 곳을 당선작으로 뽑게 된 데에는 과잉된 수사가 주는 피로감 속에서 그의 간결하고 명징한 언어가 상대적으로 돋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투고자들보다 작품의 편차가 크지 않고 전체적으로 안정된 호흡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신뢰감을 갖게 했다.

 

박은지의 시에는 특히 장소성에 대한 예민한 의식과 상상력이 두드러진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는 진술처럼, 시적 화자는 여기와 저기, 현실과 상상,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계속한다. 서로 대립되는 사물이나 세계를 오가며 균형 잡힌 사유와 감각을 보여 주는 그의 시는 현실을 손쉽게 이월하지도, 거기에만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절벽과도 같은 현실을 견디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힘을 잃지 않는 것, 그 리드미컬한 힘으로 그는 정말 먼 곳까지 갈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시적 여정을 기대하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이문재·나희덕

 

728x90

 

 

진단 / 신동혁

 

 

머리를 자르면 물고기가 된 기분입니다

나는 종교가 없고 마지막엔 바다가 온다는 말을,

소금기가 남은 꼬리뼈를 믿습니다

훔쳐 온 것들만이 반짝입니다

지상의 명단에는 내가 없기에

나는 나의 줄거리가 됩니다

나는 맨발과 어울립니다

액자를 훔치면 여름이 되고 비둘기를 훔치면 횡단보도가 되는

낯선 버스에서 승객들이 쏟아집니다

멀리서 보면 선인장 더미 같습니다

서로를 껴안자 모래가 흐릅니다

모래가 나의 모국어가 아니듯

빈 침대는 바다에 대한 추문입니다

나는 모르는 햇빛만을 받아 적습니다

혼잣말을 엿들을 때 두 귀는 가장 뜨겁습니다

지도를 꺼내어 펼쳐봅니다

처방전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듣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호주머니가 깊어집니다

 

 

 

 

2017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문학은 상상의 세계로 나를 인도해 주는 길잡이

 

고교 시절 나의 꿈은 양치기였다. 그보다 더 오래 전에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해적이 되고 싶었으며 광부가 되어 금광을 찾아 떠나고 싶었다. 모두 유아적 상상력에서 비롯된 꿈들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 둘 떠올려 보자면 정말 끝이 없을 것 같다. 이 가운데 비교적 오랜 시간 간직한 꿈이 양치기였는데, 나름대로 현실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조금 웃음이 난다.

 

돌이켜 보면 내 마음속에 이러한 낯설고 막연한 꿈들을 심어줬던 건 문학이었다. 내 손을 잡고 매번 나를 가장 먼 곳으로 데려갔던 것도 문학이었다. 사실은 꽤 오랫동안 잊어버린 채 지내고 있었다. 세상과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거나 새로움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붙들고 있었던 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분명 양치기를 꿈꾸던 그 때의 두근거림을 기억한다. 아직 가보고 싶은 곳이 많다. 실제로는 드넓은 초원도 양떼도 본 적이 없지만 다시 한 번 믿고 싶다. 시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기를.

 

다음 주면 이사를 하게 된다. 2년간 살았던 달동네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선다고 한다. 모두가 떠난 집 앞 골목길에 버려진 가구들이 즐비하다. 익숙한 것들을 버리는 건 참 힘들다. 그러나 어쩌면 삶은 존재보다 더 많은 부재로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를 호명해 주신 황현산, 정끝별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오랜 세월 제게 시가 되어 주신 이천호 선생님 그립습니다.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는 박찬일 교수님, 블랙러시안 같은 오양진 교수님 감사합니다. 이수명 선생님 감사합니다. 내 곁에있어준 사람들과 떠난 사람 모두에게, 늘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부모님과 듬직한 동생 우람이, 나의 피비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심사평] 새로운 에너지로 가득 찬 시편독창성·몰입도 탁월

 

신예(新銳)’란 새롭게 등장해 만만찮은 실력이나 기세를 떨치는 대상을 향해 쓰는 말이다. 신예가 될 신인 시인에게 기대하는 우선적 요건을 얼마나 오래 쓸 것인가에서 찾고자 했다. 오래 쓰기 위해서는 문장이 힘차고, 쓰고 싶고 쓸 수밖에 없는 운명적 열정이 배어나고, 개성적인 스타일을 담보해야 한다.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독창성, 몰입에서 비롯되는 에너지야말로 신인의 요건일 것이다.

 

본심에 오른 열 분의 작품들은 언어 구사력과 시적 완성도가 돋보였으나 문화적 지표에 기댄 채 포즈화되곤 했다. 시의 세련된 문화화는 모험을 포기한 대가일 것이다. 그럼에도 상상 수프‘10월 삽화의 시적 가능성은 녹록지 않았다. 전자의 경우 어휘와 문장은 화려하고 세련되었으나 그 강점이 약점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에 대해 응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일상에 대한 섬세한 천착이 믿음직했으나 자기가 감각한 것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되는 설명적 묘사가 나르시시즘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었다. 타자화된 세계를 감각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신동혁의 진단을 당선작으로 내보낸다. 보들레르에서 이상에 이르기까지, 세계에 대한 병리학적 진단은 현대시의 오랜 자세다. 지도와 처방전을, 모래와 모국어를, 침대와 바다에 대한 추문을 연결시키는 감각은 풍부하고 그 이미지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이 젊은 시인은 혼잣말을 엿들을 때 두 귀가 가장 뜨거워지는부재의 역설을, “모르는 햇빛만을 받아 적는시의 비의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막 탄생하려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으며 독자로 하여금 의문의 창문들을 열게 끔 설계된 그의 시편들이, 끊임없는 자기 갱신으로 시간의 수압을 잘 견뎌내기 바란다.

 

심사위원 정끝별 시인, 황현산 문학평론가

 

728x90

 

 

가족 / 정신희

 

 

공손하게 마주 앉아

서로를 향해 규칙적으로 다가갔다

흑백으로 갈라지는 길들이 뒤섞이더니

우리 사이는 점점 간격이 사라졌다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비가 올 때까지

기도했다는 것

그가 먼저 돌을 놓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끝까지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

입 안에선 쉬지 않고

돌들이 달그락거렸다

우리는 마주 보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위험했다

돌을 던지고

끝까지 서로를 모른 체하고 싶었다

길이 팽창하고

수거함엔 깨어진 얼굴이 가득하고

우리는 맹목적으로 달려갔다

한번 시작한 길은 멈출 줄 몰랐다

 

 

 

 

2016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는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우며 내게로 온다

 

여러 해 전 도시 생활을 접고 이곳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우리에게 온 햇빛과 바람과 풀 한 포기, 아이들과 내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지를 자연에서 배운다. 그것은 소리 없이 물처럼 내게 스며든다. 어떤 과장도 억지도 없이 나를 불러 세우고 일으켜 세운다. 나는 내게 온 어떤 것도 가꿀 줄 몰랐다. 남편도 아이도 부모와 형제도 하물며 이름 없는 풀이며 벌레며 이웃들이랴. 내가 짓고 있었던 것은 시가 아니라 몽상가의 잠꼬대였고 허세였다. 내가 아닌 타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나무와 풀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마음을 읽고 나누고 드디어 그들이 되는 것, 오늘도 햇빛과 바람과 나무들의 살림살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사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시는 나보다 먼저 내게 닿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했다. 몸이 없던 내게 몸을 입혀 수도꼭지를 틀어 밥공기를 닦게 하고 바닥을 훔치게 했다. 밭고랑에 남아 있던 애기파가 등 뒤에 내려앉는 눈을 털어내고 있다. 주저앉아 있던 나를 애기파 한 포기가 가만히 일으켜 세운다. 시는 늘 그렇게 내게로 온다. 시를 쓰기에 앞서 언제나 정직해야 한다고 일깨워주신 이영진 선생님, 내게 온 모든 인연들과 하나 되어 서로를 가꾸어 나가는 것이 시 쓰는 노릇임을 마지막까지 잊지 않으려 한다.

 

 

 

 

 

[심사평] 깔끔한 표현으로 서정적 구체성·투명성 살려

 

이번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많은 분이 응모해주셨다.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부쳐진 작품들을 함께 읽어가면서, 일부 작품이 만만찮은 시간을 축적한 결과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의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도 많았고,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쏟은 사례도 많았음을 깊이 기억한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함께 주목한 이들은 모두 세 분이었다. 이혜리, 최혜성, 정신희씨가 그분들인데, 오랜 토론 끝에 심사위원들은 정신희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혜리씨의 작품들은 감각적 장면들을 상상적으로 모자이크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충격과 반응으로 연쇄해 가는 감각 운동이 진정성과 독자성과 연관성을 두루 지니고 있었다. 최혜성씨의 시편은 특별히 미동이 끝까지 경합하였는데, 매우 밀도 높은 관찰과 표현이 특장으로 거론되었다.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소묘의 집중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결국 정신희씨의 가족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전언의 구체성과 깔끔한 표현, 그리고 착상과 비유의 과정이 안정된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이 시편은 규칙적으로 서로를 향해 다가가면서도, 맹목과 위험을 동시에 지닌 관계로 가족을 파악한다. 물론 이러한 파악이 정신희씨만의 개성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당선작은 그러한 파악을 그가 먼저 돌을 놓기를 기다리는 동안/나는 끝까지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는 표현에서 보이는 긴장과 예각적 균열을 통해 보여주고, 나아가 의 뒤섞임, 팽창, 멈출 줄 모르는 질주의 형상과 그것을 어울리게 하면서 서정적 구체성과 투명성을 동시에 살려주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점 여러모로 신뢰를 주기에 족했다.

 

심사위원 정호승(시인), 유성호(문학평론가)

 

728x90

 

 

키워드 / 최은묵

 

 

죽은 우물을 건져냈다

 

우물을 뒤집어 살을 바르는 동안 부식되지 않은 갈까마귀떼가 땅으로 내려왔다

 

두레박으로 소문을 나눠마신 자들이 전염병에 걸린

거목의 마을

 

레드우드 꼭대기로 안개가 핀다, 안개는 흰개미가 밤새 그린 지하의 지도

 

아이를 안은 채 굳은 여자의 왼발이 길의 끝이었다

 

끊긴 길마다 우물이 피어났다, 여자의 눈물을 성수라 믿는 사람들이 물통을 든 채 말라가고 있었다

 

잎 떨어진 계절마다 배설을 끝낸 평면들이 지하를 채워 나갔다

 

부풀지 못한 뼈들을 눕혀 물길을 만들면 사람들의 발목에도 실뿌리가 자랄까

 

안개가 사라진다 흰개미가 우물 입구를 닫을 시간이다

 

우물은 떠나지 못한 자의 피부다

 

 

 

 

2015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는 떳떳한 시를 쓰다

 

창고에 수북한 원고들, 창고 벽마다 겨울이 두텁다. 내부에서 쌓은 벽을 허물었으나 외부에서 생긴 벽은 도무지 재질을 알 수 없다. 그때마다 나는 깃을 손질하듯 시를 어루만진다.

 

글자에게도 혼이 있어 누군가는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될 것이라 믿는다. 공대를 졸업했고, 흔한 문학회 한 곳 가입하지 않았으니, ‘삼겹살이라고 불리는 학연, 지연, 혈연 이 세 가지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의 비기.

 

고등학교 때 받은 숙제를 뒤늦게 서울신문에 제출했다. 늦은 숙제를 검사해 주신 정호승, 나희덕 두 분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반짝이는 표면에는 허상이 있다. 질소가 가득한 것은 과자뿐만이 아니다. 소망 하나 있다면, ‘삼겹살과 상관없이 좋은 작품을 쓰는 시인들이 시만 써도 먹고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내세울 것 없는 삶이지만 시 하나만큼은 떳떳하다.

 

 

 

 

키워드

 

nefing.com

 

 

 

[심사평] 죽음의 사건을 환기하며 시대의 음화 그려내

 

사회 전체가 죽음의 사건들에 침잠된 탓인지 올해 투고작들은 전반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느낌이었다. 몽환적이고 묵시록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작품들도 많았다.

 

이 죽음의 시대에 시는 현실적인 응전이나 전망을 보여주기보다는 그 내상(內傷)을 깊이 앓으며 치러내는 제의적 행위에 가까운 것일까. 그러나 이런 현상이 한편으로는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나 패배의식의 반영으로 보이기도 한다.

 

당선작인 최은묵의 키워드역시 죽은 우물을 중심으로 우리 시대의 음화(陰畵)를 그려내고 있다. 이미지가 지나치게 모호해서 소통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고도의 암시성은 시에 있어서 결함보다는 장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는 세월호를 비롯해 죽음의 사건들을 환기하면서 그것을 상징화된 제의로 감싸안는다. 나머지 시들에서도 어딘가 깨지고 부서지고 불구화되고 불모화된 존재들이 그려내는 고통과 폐허의 풍경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다고 할 만하다.

 

당선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작품은 서진배의 고립한다였다. 이 시는 고립에 대한 사유를 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밀고나가 개성적인 존재론에 이르고 있는데, 특히 고립되다의 수동성을 고립하다의 능동성으로 전환해내는 인식의 힘이 좋았다. 하지만 산문적인 어투나 언어의 긴장을 잃어버린 대목들이 눈에 띄고 나머지 작품의 밀도가 뒷받침되지 못했다.

 

이 밖에도 유니크한 발상과 탄력적인 리듬을 보여준 김창훈의 스핑크스의 그림자’, 대상의 기미를 섬세하게 알아차리고 그것을 감각적으로 잘 풀어낸 이정오의 멀다등도 좋게 읽었다. 당선자에게는 진심 어린 축하를, 나머지 세 분에게는 격려와 기대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위원 정호승·나희덕 시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