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숲과 검은 호수 / 이원석
모든 것은 덤불 속에 감춰져 있지
거기까지 가는 길이 어둡고 어렵고 어리고
나뭇가지에 헝클어진 머리칼에는 마른 잎들이 견디기 힘든
날들이 따라붙었지 매달리고 매만지고 메말라
찬 공기는 조금씩 뒤섞였어
침상에서 내려 딛은 발은 문 앞까지 낡은 마루가 삐걱이는
소리를 누르고 길고 고른 숨소리들
사이로 천천히 밀어내는 호숫가의 배
젖은 흙 다섯 발가락들 사이로 닿는 촉각 촉각 누르는
건반과 긴바늘 입술 위의 손가락
우거진 뿔이 덤불 속에 갇혀
머리를 숙이고 있지 포기하지 못한 자랑들이 엉켜 있는
낮은 덤불에 얼굴을 묻고 몸을 떨지 다물지 못하는 입으로
숨을 뱉으며 뒷걸음질 끝에 꿇은 무릎과 마른 잎 위의 몸뚱이
내가 들어 올리고 싶은 뿔은 덤불 속에 잠겨 있어
달리는 덤불을 보여 줄게
춤추는 작은 숲을
바닥을 움켜쥔 모든 뿌리와 함께
흰옷은 흙투성이
물은 차고 어두워 소스라치는 살갗
걸어들어오는 고요와 잠긴 청각이 듣는 물소리
물속을 만지면 물이 몸을 바꾸고 뒤집는 모양은
얼굴과 얼굴이 흐르고 잠기는 기억
길게 줄어드는 음이 끊기지 않는
몸에 선을 긋고 지나가지 손도 발도 없이
물의 틈을 찾아 결대로 몸을 틀며 가라앉는 숨
접촉경계혼란
피아노의 가장 낮은 건반을 무한히 두드리는
바닥
놓지 마 놓지 마
춤을 추는 팔과 파란
뒤집힌 호수 바닥 위에 검은 숲
그림자 속 덤불과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고개를 젓는 우거진 뿔과 큰 눈망울
진저리치며 흩날리는 입과 잎과 입김
호수 위엔
잔물결조차 일지 않는 검은 물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 숲엔 부러진 뿔과 나뭇가지
몸뚱이 위로 끝없이 떨어지는 마른 잎사귀
[당선소감] 옥상에 매여 있던 ‘전기양’ 발견해주셔서 감사
진짜 양 한 마리를 키우고 싶었을 뿐이야
열망과 기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전선을 따라 어둠이 내려 기어이
전기양을 보러 갈 때
너는 진짜 양에 대해서 오랫동안 얘기하고는 했지
그리고 혼자 남은 나는 양 울음소리를 흉내내 본다 전자식으로
매에 하고 매번 울었지만
매에 순간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습니다.
전기양의 울음을 모조하기 위해 성대를 기계식으로 교체합니다.
살아 있는 양 한 마리를, 살아 있는 양 두 마리를, 살아 있는 양 세 마리를 천천히
전자식으로 떠올리다가 잠이 들곤 했습니다.
옥상에 매여 있던 전기양을 발견해주신
*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정진하겠습니다. 작년 체육관 운영이 어려울 때 삼백 빌려준(다 갚음) 재휘야, 고맙다. 사실은 날 가장 먼저 시인이라고 불러 줬던 친구, 나의 부를리우크. 그리고 다시 시를 쓰며 들었던 시 창작 수업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공간과 프로그램을 마련해 주신 읻다 아카데미, 첫 수업료를 빌려준(다 갚음) 동생 정아, 새로운 언어를 찾아 주신 백은선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유난스런 자식을 지켜봐 주신 부모님(못 갚음), 늘 지지하고 응원해 준 가족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평] 현실·꿈·무의식 넘나들며 보여줄 새로운 모험의 결과물 기대
총 750명의 투고자들 중 12명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가장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터널’, ‘부메랑’, ‘그림자 숲과 검은 호수’ 등이었다. 무엇이 당선작이 돼도 좋을 만큼 세 분의 작품들은 완성도가 높고 자기만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터널’ 외 2편은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어둠과 물기, 그리고 “파열 속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간결하고 절제된 언어로 그려낸다. 고립되고 무너진 세계를 벗어나 타자에게 가 닿으려는 화자는 관념을 다루거나 허공을 유영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다만 흑과 백, 소리와 침묵, 칼과 꽃의 선명한 대비 구조가 다소 단순한 폐쇄회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부메랑’ 외 2편은 도시의 평범한 풍경이나 일상적 소재들을 특유의 활력으로 되살려내 감각적 향연의 장으로 만든다.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자유로운 연상을 통해 펼쳐지는 동안 산문성이 강화되지만, 시적 긴장을 잃지 않고 리듬을 조율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원심력의 확장이 번번이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추어버려 소품에 가깝다는 인상이 들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그림자 숲과 검은 호수’는 투고자의 작품 중 상대적으로 가장 짧은 시였다. 100행에 육박하는 시들을 신춘문예에 투고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오히려 그 패기와 스케일을 높이 사고 싶었다. ‘경로를 잃어버린 통로와 불가피한 레시피’, ‘정밀하게 고안된 하루’ 등의 다른 투고작들도 만만치 않은 시력과 테크닉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당선작은 ‘접촉경계혼란’이라는 심리적 현상을 숲과 호수의 데칼코마니를 통해 역동적으로 전개하면서 “달리는 덤불” 하나를 눈앞에 보여 준다. 앞으로도 그가 현실과 꿈과 무의식을 유연하게 넘나들며 어떤 새로운 모험의 결과물들을 우리 앞에 부려 놓을지 기대를 갖게 된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나희덕·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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