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보조법어 - 심재열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책 소개
'보조법어'의 해설집. '보조법어(普照法語)'란 고려의 '보조국사(普照國師)'의 '법어(法語)'라는 뜻으로, 한국불교를 완성한 보조국사의 깨참과 사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보조법어'를 해설한다.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로읽기가 아닌 세로읽기다.

 

목차
1 정혜결사문
2 수심결
3 진심직설
4 원돈성불론
5 간화결의논
6 부록

 

 

서평

 

세상이 어지럽고 잘못되어갈 때, 나서서 지혜로운 가르침을 주고 직접 실천하여 본보기를 보이는 이들이 있다. 고려 중기의 불교승려인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도 그런 이로 꼽힌다. 지눌은 한국 불교역사, 특히 한국 불교사상사에서 신라 때의 원효(元曉)와 함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추앙된다. 그의 글을 모아놓은 것이 ‘보조법어’다.

당시 고려사회는 민란이 거듭되고 무신정권이 등장하여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불교계에는 분열과 타락상이 심각했다. 지눌은 세속의 명리를 좇는 데에만 급급한 당시 불교계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수행을 하는 승려조차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된다는 불교 본령의 목표는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기껏해야 내생에 좋게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데 대해서 비판을 가했다.

그러면서 정과 혜를 나란히 닦아 성불을 목표로 하는 수행에만 전념하자는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벌였다. 정이란 바깥의 자극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혀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혜는 맑은 정신으로 세상의 실상을 환히 비추어보는 지혜를 가리킨다. 지눌은 그 둘을 함께 닦는 수행을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이라 일컬었다. 이것이 지눌이 제시한 수증론(修證論·닦음과 깨달음에 관한 이론) 세 가지 가운데 첫 번째다.

지눌은 또한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이라는 수증론을 제시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님인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스스로 범부로 살고 있다는 게 선불교의 관점이다. 마치 열쇠를 손에 들고도 한참 찾아다니다가 어떤 계기에 문득 제 손에 든 열쇠를 알아차리듯이, 자기의 본래 정체를 알아차리는 깨달음은 단박에 일어난다. 이를 일컬어 돈오(頓悟)라 한다.

하지만 깨달음만으로 부처님으로 살게 되지는 않는다. 워낙 오랫동안 범부로 살아가는 습관에 속속들이 젖어있기 때문이다. 얼음이 본래는 물이라 해도, 얼음 그대로 물 노릇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이 물 노릇을 하게 하려면 열을 가하여 녹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치열한 수행과정으로 자신의 삶을 채워야 한다. 이를 일컬어 점수(漸修)라고 한다. 이는 수행과 깨달음에 관한 선종(禪宗)의 사상을 교종(敎宗)인 화엄사상을 가지고 설명한 것으로, 선교일치를 표방하여 당시 불교계의 분열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마지막으로, 지눌은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을 천명했다.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이 지름길이라는 뜻이다.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으로 자신의 의식을 꽉 채워 망념이 스며들 틈이 없게 하면, 그 의심덩어리가 커지다 못해 터져버리는 깨침의 체험에 이른다. 지눌을 통해 한국불교에 간화선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땅으로 인하여 넘어진 자는 땅으로 인하여 일어선다. 땅에 의지하지 않고 일어설 수는 없다.” 보조법어의 ‘권수정혜결사문’의 첫 구절이다. 우리가 잘못 살아가는 것은 마음을 잘못 써서 그런 것인데, 올바르게 되는 것 또한 바로 그 마음에 달렸다는 뜻이다. 궁극적인 해결은 저 밖 어디 다른 데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며, 모든 문제를 우리가 만들었고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해결책이 보인다는 교훈이다. 만사를 소유의 문제로만 보는 습관이 든 이 시대에 새삼 귀중하게 새겨볼 만한 가르침이다.

윤원철 서울대 교수 종교학과

출처 : 로스쿨에도전하는사람들★로도사★
글쓴이 : 논리연구 원글보기
메모 :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논어집주  (0) 2009.02.15
[스크랩] 맹자 원문 사이트  (0) 2009.02.12
회남자  (0) 2009.01.28
좌전  (0) 2009.01.28
공자가어  (0) 2009.01.28
728x90

 

논어집주.hwp

 

출처 : 논술바이블 - 學而時習 논술
글쓴이 : 범하선생 원글보기
메모 :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보조법어 - 지눌  (0) 2009.04.29
[스크랩] 맹자 원문 사이트  (0) 2009.02.12
회남자  (0) 2009.01.28
좌전  (0) 2009.01.28
공자가어  (0) 2009.01.28
728x90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http://chinese.dsturgeon.net/text.pl?node=1602&if=gb&en=on

출처 : dksun4251
글쓴이 : great book 원글보기
메모 :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보조법어 - 지눌  (0) 2009.04.29
[스크랩] 논어집주  (0) 2009.02.15
회남자  (0) 2009.01.28
좌전  (0) 2009.01.28
공자가어  (0) 2009.01.28
728x90

 

회남자.hwp

 

회남자.hwp
0.26MB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논어집주  (0) 2009.02.15
[스크랩] 맹자 원문 사이트  (0) 2009.02.12
좌전  (0) 2009.01.28
공자가어  (0) 2009.01.28
삼국지연의  (0) 2009.01.28
728x90

 

左傳.hwp

 

左傳.hwp
0.42MB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맹자 원문 사이트  (0) 2009.02.12
회남자  (0) 2009.01.28
공자가어  (0) 2009.01.28
삼국지연의  (0) 2009.01.28
[스크랩] 제13강 강의를 마치며  (0) 2009.01.28
728x90

 

공자가어.hwp

 

공자가어.hwp
0.16MB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남자  (0) 2009.01.28
좌전  (0) 2009.01.28
삼국지연의  (0) 2009.01.28
[스크랩] 제13강 강의를 마치며  (0) 2009.01.28
[스크랩] 채근담(번역)  (0) 2009.01.28
728x90

 

삼국지연의.hwp

 

삼국지연의.hwp
1.03MB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좌전  (0) 2009.01.28
공자가어  (0) 2009.01.28
[스크랩] 제13강 강의를 마치며  (0) 2009.01.28
[스크랩] 채근담(번역)  (0) 2009.01.28
[스크랩] 채근담 전집 해설  (0) 2009.01.28
728x90

법가를 끝으로 고전 강독을 마칩니다. 강의 첫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중국고전은 5천년 동안 쌓여 온 것으로 엄청나기가 태산준령입니다. 우리의 강좌는 호미 한 자루로 그 앞에 서 있는 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위를 좁히고 우리의 주제와 관계 있는 예제에 한정하여 읽었습니다. 그나마 내가 섭렵한 고전의 범위를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고전강독을 끝내자니 당연히 미진한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관계론(關係論)이라는 주제에서 본다면 당연히 불교를 다루어야 마땅합니다. 불교사상은 관계론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론(緣起論)은 그 자체가 관계론입니다. 불교사상에 대해서는 다행히 여러 분야의 많은 연구자들이 계속해서 좋은 연구성과를 내놓고 있습니다. 근대에 대한 성찰적 접근에 있어서도 월등한 진경(進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관심만 있다면 이 부분의 연구성과에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 관한 논의 이외에 또 한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송대(宋代)의 신유학(新儒學)에 관한 것입니다. 더구나 송대의 신유학(新儒學)은 1천여 년에 걸쳐서 동양적 정서와 사유구조를 지배한 소위 주자학(朱子學)입니다. 그리고 이 송대 신유학의 성립은 그 자체가 당면한 사회문제에 대한 절박한 논구(論究)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수(隋) 당(唐)이후 광범하게 퍼진 불교문화와 특히 선종불교로 말미암아 야기된 사회적 이완(弛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중국고전 강독에서는 이 두 주제에 대한 논의가 빠질 수 없습니다. 불교사상의 관계론 부분과 신유학의 사회적 관점을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범위가 엄청난 것일 뿐 아니라 나의 역량을 넘는 것입니다. 부득이 우리의 주제와 관련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그 의미를 지적함으로써 이론적 소재(素材)로서 언급하는 것으로 끝마치려고 합니다.
  
1.불교사상의 관계론
  
첫째 불교사상의 핵심은 연기론(緣起論)과 깨달음(覺)입니다. 불교의 사상영역을 연기론과 깨달음으로 한정하는 것 자체가 불교에 대한 무지라 할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는 일단 이 부분에 한정하기로 합니다.
  
불교철학의 최고봉은 화엄(華嚴)사상입니다. 그런데 ‘화엄경’의 본래 이름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입니다. 범어로는 Mahavaiplya-buddha-ganda-vyuha-sutra입니다. ‘대방광불화엄경’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는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대(大)는 극대의 개념입니다. 절대적 대(大)의 개념입니다. 소(小)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가 끊어진 극대를 의미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개념입니다. 그리고 방광(方廣)의 의미는 글자 그대로 넓다는 뜻입니다. 공간적 의미로 풀이됩니다. 따라서 ‘대방광(大方廣)’은 크고 넓다는 뜻으로 불(佛)을 수식하는 형용사구가 됩니다.
그리고 불(佛)은 붓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대방광불이란 한량없이 크고 넓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붓다를 의미합니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이 붓다입니다. 화엄(華嚴)이란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로서 갖가지의 꽃으로 차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大方廣佛華嚴經’의 의미는 정리한다면 “광대무변한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萬德)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이라고 풀이됩니다.
물론 ‘大方廣佛華嚴經’의 문자적 의미가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붓다를 높임으로써 붓다의 진리를 더욱 장엄하게 선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화엄(華嚴)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화엄이라는 의미에서 불교철학의 핵심을 읽을 수 있으며 또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엄(華嚴)이란 꽃(華)이 엄숙하다(嚴)는 뜻입니다. 잡화엄식이라고 하여도 상관없습니다. 여러 가지 꽃으로 장식된 세계를 화엄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왜 이 세계가 고해(苦海)가 아니고 꽃으로 장식된 세계인가에 대하여 당연히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승이 고해가 아니라 꽃으로 장식된 화엄의 세계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그 비밀이 바로 ‘大方廣佛’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大方’은 최고(最高)의 법칙(法則)이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광(廣)의 의미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광(廣)의 최대개념이 무한한 우주와 같은 단순한 넓이의 개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단순한 사고입니다. 마땅히 우리의 사고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리게 해야 합니다.
만약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큰 것이고, 충분히 넓은 것입니다. 한 포기 작은 민들레도 그것이 땅과 물과 바람과 햇빛 그리고 갈 봄 여름과 연기되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간적으로 무한히 넓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佛)은 붓다를 의미한다기보다는 ‘깨닫다’는 의미로 읽습니다. 바로 그 광대함을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바로 연기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으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하지요. 작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돌 한 개라도 그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무한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는 바로 이 연기의 구조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붓다가 설하는 법(法)이 바로 이 연기의 세계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無限)시간과 무변(無邊)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고 작은 미물(微物)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찬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한 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읽어야 하는 대방광불화엄경의 의미가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수천태(隋天台) 당화엄(唐華嚴)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러한 화엄사상이 당나라 전시기에 난숙하게 꽃피었기 때문입니다. 이 화엄학의 핵심이 바로 연기론입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고전을 읽어온 기본적 관점이 바로 관계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사상은 관계론의 보고입니다.
불교에서 깨닫는다는 것 즉 각(覺)이란 이 연기의 망(網)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개인이 갇혀 있는 분별지(分別智)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갇혀 있는 집합표상(集合表象) 즉 업(業)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 깨달음의 문제는 우리가 이번 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강조해온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과 그 현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구조를 깨달아야 하고, 우리를 포섭하고 있는 문화적 기제를 깨달아야 하고, 우리시대의 지배담론이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깨달음을 다짐해오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覺)에 있어서 최고형태는 바로 '세계(世界)는 관계(關係)'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마저 찬란한 꽃으로 바라보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이 현실을 수많은 꽃으로 가득찬 화엄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관계론에 의하면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존재(存在)가 아니라 생성(生成 a Becoming)입니다. 칸트의 "물(物)-자체"(ding an sich)란 설자리가 없습니다.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물 자체라는 생각은 순전히 관념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물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어쩌면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전후방 연쇄(linkage)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사물의 실재성은 내재적인 것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수입된다는 니체의 주장이 오히려 관계론적 사고입니다. 우리의 인식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의 극히 일부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들의 극소수만이, 그리고 그 극소수의 극히 작은 부분들만이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온다.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오는 것들은 우리가 그 전체를 볼 수 없는 긴 일직선 위에 찍힌 작은 점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작은 점들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적인 대상이라고 가정하고, 이들이 의식된 또는 의식되지 않은 다른 사건들과 독립해서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것은 원인이고 어떤 것은 결과라고 판단한다"는 해체(解體)철학이 바로 인식의 원천적 협소함을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정체성(正體性)은 애초부터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 분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작은 우물을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의 긴 도정에 나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벽암록(碧巖錄)'의 제2칙에서 조주(趙州)스님은 사람들(衆)에게 이야기합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참다운 도는 어렵지 않다. 오로지 간택을 경계할 따름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간택(揀擇)이란 것이 바로 분별지(分別智)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장자가 이야기한 '우물'입니다. 우리들이 개인적으로 갇혀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이며, 나아가서 우리 시대가 집단적으로 갇혀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를 깨트려야 하는 것입니다. 체제가 쌓아놓은 거대한 성벽을 허물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의 집합표상인 카르마(Karma)를 깨트려야 하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은 자본주의에 대한 의식의 변혁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투쟁은 사상투쟁에서 시작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깨달음(覺)의 의미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깨달음의 의미를 지극히 명상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고전읽기의 시작이며 그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다른 글에 썼습니다만 불교철학의 관계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적 이미지는 인드라의 그물입니다. 제석천(帝釋天)의 그물망(Indra's Net)에 있는 구슬의 이야기입니다.
  
제석천의 궁전에 걸려 있는 그물에는 그물코마다 한 개의 보석이 있습니다. 그 보석에는 다른 그물코에 붙어 있는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습니다.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는 이들 모든 영상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영상도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또 다시 다른 보석에 비치고, 당연히 그 속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습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영상이 다중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의 참된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계의 구조를 변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연기(緣起)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공간적이고 정태적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이고 동태적 개념인 것이지요.
그래서 연기를 상생(相生)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연(緣)하여(pratitya) 일어나는(samutpada)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연기(緣起)를 보는 것이 바로 법(法)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무 두 개를 마찰하면 연기(煙氣)가 일어납니다. 이 경우 연기는 나무에 의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가 사라지면 연기도 사라집니다. 연기(煙氣)는 나무와 상의상존(相依相存)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연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실체론적 존재가 아니며 관계론적 생성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이목상마(二木相摩)의 비유입니다.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지요. 연기(煙氣)는 결과(果)이며 나무는 원인(因)입니다. 연기가 인연으로 생겨난 과(果)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무도 인연으로 생겨난 과(果)입니다. 물과 햇볕과 흙의 상마(相摩)에 의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물과 햇볕과 흙이 사라지면 나무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인과 과는 하나가 아니면서 서로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것입니다. 그것을 불이무이(不二無異)라 합니다.
현대철학 특히 해체론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자기해체적 본성을 갖는 것입니다. 본질은 오로지 ‘관계맺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현상은 이질적인 요소들의 잠정적 동거(同居)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해체론의 핵심적 논점입니다.
이러한 해체론적 논의구조와 비교해 볼 때 불교철학이야말로 존재론에 대한 가장 과격한 해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를 연기(緣起)로 파악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를 연기(煙氣)처럼 무상한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불교사상은 모든 생명과 금수초목은 물론이며 흙 한 줌, 돌멩이 한 개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의미를 부여하는 화엄학(華嚴學)이면서 동시에 모든 생명의 무상함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화엄(華嚴)과 무상(無常)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이 불교 속에 있는 것이지요. 모든 사회적 실천과 사회적 업적에 대하여 일말의 의미부여도 하지 않는 무정부적 해체주의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불교사상은 해체철학의 진보성과 해체철학의 무책임성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책임성이란 모든 존재의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존재의 의미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역할을 연기론이 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언어가 어떤 지시적(指示的) 개념이듯이 삼라만상이 어떤 지시적 표지(標識)로 공동화(空洞化)함으로써 가장 철저한 관념론으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한 의미부여가 거꾸로 모든 것을 해체해버리는 거대한 역설입니다. 실제로 수(隋) 당(唐)이래로 선종(禪宗)불교가 그 지반을 널리 확장해가면서 이러한 의식의 무정부성이 사회적 문제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그 의미를 규정하고자 하는 송대의 신유학(新儒學)이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2) 신유학(新儒學)
  
사상(思想)은 역사적으로 변화 발전합니다. 유학(儒學)도 그 시대적 과제에 대하여 무심할 수 없으며 부단히 새로워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반적 설명 이외에 신유학이 등장하게 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송대에 이르러 신유학이 등장하게 되는 까닭은 훈고학(訓詁學) 일변도의 한(漢)나라 유학이 침체를 거듭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대의 유학은 경서(經書)의 자구(字句)해석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실천적 측면에서도 형식적인 예론(禮論)의 논의에 치중하였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결과적으로 위진(魏晋) 남북조와 수당시대를 거치면서 불교(佛敎)와 도가(道家)가 유가를 압도하게 됩니다. 유학이 당시의 지적 관심과 요구에 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유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개별적 대응을 꾸준히 계속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말(唐末)의 한유(韓愈)가 그렇습니다. 그는 불교를 비판하는 것과 아울러 도가(道家)도 비판합니다. 인의(仁義)는 구체적이고 실체가 있는 것이지만 도덕(道德)은 추상적인 이름이라는 것이지요. 도덕은 내용이 없는 것이며 결국 인의를 내다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도교는 불교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군신(君臣) 부자(父子)라는 사회적 관계를 부정하고 오로지 마음의 평안을 구하고자 한다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유교는 천하를 구하려는 것이지요. 궁극적으로는 평천하(平天下)가 유가의 목표입니다. 이것이 한유의 이른바 노불(老佛)비판입니다.
한유와 마찬가지로 이고() 역시 불교와 도가를 비판하고 ‘대학’과 ‘중용’이라는 새로운 문헌적 근거에 주목하였다는 점에서 송대 신유학의 선구로 평가받습니다. 송대(宋代)에 접어들면서 경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광범하게 진행됩니다. 그것이 남송의 주희(朱憙)에 의하여 집대성하게 되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아는 바입니다.
물론 주희 역시 선대의 많은 학자들의 연구업적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자는 우주론(宇宙論) 인성론(人性論) 공부론(工夫論) 등 광범한 체계를 완성하고 사서(四書)를 확정하고 유교의 도통(道統)을 확립합니다.
우리는 송대에 들어와서 나타나는 신유학의 배경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하여야 합니다. 물론 한대(漢代)의 형식적 문풍(文風)에 대한 반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으며, 그리고 위진남북조 이후 지배적인 조류가 된 불교와 도교에 대한 비판이 그 발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하여야 하는 것은 또 다른 통일 국가의 출현과 함께 사회질서를 재건하려는 정치적 성격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점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송대의 신유학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에 관한 것입니다. 주자가 그 곤궁을 극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임종을 앞두고도 대학을 장구(章句)하고 있었을 정도로 극진하였던 이유는 당대 사회의 엘리트로서의 사명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문풍에 대한 반성이라기보다는 당면한 사회적 현실에서 느끼는 위기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명의 중심을 자처한 중화사상이 역사적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불교의 전래와 17세기 이후의 서구사상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중국 이외에 문명(文明)이 있다는 사실에서 받는 충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민족(異民族)의 지배기간인 원사(元史)와 청사(淸史)마저도 각각 송(宋)과 명(明)을 계승하는 정통왕조로 규정하는 것이 중국의 중화주의(中華主義)입니다. 중화주의는 민족주의적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나라가 망하는 것을 ‘亡’이라 하지 않고 도(道)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亡’이라고 할 정도로 중화주의는 초민족적 세계관이며 문화주의적 세계관이었습니다.
중국이 불교에서 받은 충격은 이러한 중화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엄청난 것입니다. 사이팔만(四夷八蠻)이라는 세계인식은 중국 이외에는 문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며 오만함이었습니다. 중국 이외에 다른 문명(文明)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화주의적 세계관이 무너지는 충격인 것이지요.
불교철학은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할 정도로 대단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사상은 현실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유학에 대신하여 사회의 이념형태를 규정하는 지배이데올로기로 굳건한 지위를 점하게 된 것이지요.
특히 불교사상은 개인주의적이며 반사회적인 해체사상을 내장하고 있습니다. 신유학의 등장은 불교의 이러한 해체주의적이고 반사회적인 사상영향으로부터 사회질서를 지키고 통일국가를 만들어가야 하는 현실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는 신유학이 종래의 중국학이 결여하고 있는 철학적 구조를 보완하고 있다는 견해에 대한 반성입니다. 유학은 송대 유학에 이르러 비로소 심성론(心性論) 우주론(宇宙論) 수양론(修養論) 등 체계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즉 송대 신유학에 이르러 비로소 유학의 철학화가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철학 즉 philosophy는 어디까지나 서양의 문화전통에서 비롯된 특수한 문화아이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리스철학 이후 중세의 스콜라철학을 거쳐 근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소위 서양철학은 그 철학적 구조는 현실(現實)과 이상(理想), 현상(現象)과 본질(本質) 등 이분법적(二分法的) 구조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학적(神學的) 구조라는 것이지요. 존재론적 구조이면서 동시에 신학적 구조라는 또 하나의 특수한 사유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따라서 철학을 인류 보편적 문화형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이지요. 철학이라는 지적 활동은 보편적인 것으로 추인하기보다는 그것을 문화상대주의적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유럽 중심의 특수한 지적 활동일 뿐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송대 유학이 철학화(哲學化) 하였다는 평가는 서양철학의 고유의 범주와 개념을 송대 유학에 적용하여 바라보았을 때만 부분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불교사상이 중화주의를 자처하던 중국에 문화적 충격으로 나타난 것도 부정할 수 없으며 윤리중심의 중국사상에 결과적으로 철학적 사유를 심화하는 계기를 준 것도 사실이지만 이러한 접근은 우리가 불식해야 할 서구적 관점을 역설적으로 다시 심화하는 오류를 답습할 위험이 없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사상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사회적 문제는 선종불교의 해체주의적 성격이나 지방군벌(地方軍閥)과 결합한 실천선(實踐禪)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통일왕조의 이데올로기인 화엄철학 그 자체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여야 할 것입니다. 해탈(解脫)이라는 관념 자체가 일종의 초윤리적(超倫理的)이고 탈사회적 의식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점에서 송대의 유학자들에게 불교사상은 현실의 물질성(物質性)을 제거하고 사회제도 그 자체의 존립을 부정하는 지극히 위험한 반사회적 사상이었으며 비윤리적 사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식이 주자(朱子)로 대표되는 송대 신유학자들로 하여금 시대적 사명감으로 ‘중용’과 ‘대학’을 장구(章句)하게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유학에 대한 이해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불교는 한말(漢末)의 혼란기에 중국에 유입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오두미교(五斗米敎) 등 30여년 동안 계속된 농민반란과 삼국쟁패의 혼란기에 유입됩니다.
사회적 혼란기에는 일반적으로 종교(宗敎)와 이성(理性)이 갈등을 빚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기에는 대체로 종교가 지반을 확대합니다. 중국불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중국불교가 이러한 혼란기를 경과하면서 열반(涅槃) 불성(佛性) 등의 사유를 내부로 이입하여 대승불교(大乘佛敎)로 성립된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이러한 중국불교의 성립과정은 수(隋) 당(唐)의 통일과정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수천태(隋天台) 당화엄(唐華嚴)이라는 중국불교의 전형을 완성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중국불교의 성립과정이 바로 중국의 통일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종교가 갖는 어쩔 수 없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정치적 성격입니다.
이 시기에 성립된 중국불교는 타민족에 대한 중국민족의 결속과 통일의 구심으로서 정치적 역할을 충실히 해냅니다. 소위 승원철학(僧園哲學)이 그것입니다. 승원(僧園)이라는 종교적 집단에 대하여 막대한 정치적 특권을 부여하여 그곳을 이데올로기의 생산기관으로 삼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화엄철학(華嚴哲學)은 번쇄(煩瑣)한 귀족철학으로서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에 적합한 것입니다. 객관적 실재(現實)를 도외시한 정신의 변혁을 강조하며, 객관의 물질성을 제거함으로써 동시에 현실의 계급적 모순구조를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적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화엄불교는 통일국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적합하다는 것이지요.
안록산(安錄山)과 사사명(史思明) 등 군벌의 난, 그리고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의 농민반란 이후에 나타난 현상입니다만 난을 진압한 진압군이 군벌(軍閥)로서 각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할거(割據)하게 됩니다. 중앙집권적 구조가 지방호족(地方豪族)중심의 봉건적(封建的) 체제로 이행하는 것이지요.
중국불교의 성격변화도 이러한 변화와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수천태 당화엄이라는 승원철학은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적 이데올로기이며 지방 봉건정권의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지방의 봉건정권으로서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생산이 불가능하고 불필요하게 됩니다.
봉건정권에게는 오히려 실천선(實踐禪)이 지지를 받게 됩니다. 선종(禪宗)은 역사적으로 지방분권적 봉건적 구조와 결합됩니다. 중앙의 지시와 간섭을 배제하는 해체적 본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근본에 있어서 무정부주의(fundamental anarchism)입니다. 일체의 제도적(制度的) 규제를 거부하는 성격을 갖습니다.
선(禪)은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와 상통하는 무조직(無組織), 무경전(無經典)에 기반을 둔 각(覺)이요 불심(佛心)입니다. 선종의 이러한 성격과 구조가 그 후 사원(寺院)경제의 몰락과 보시체계(報施體系)의 와해 그리고 만당(晩唐)의 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존속하게 되는 저력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한편으로 선종(禪宗)은 민초의 철학인 도가의 전통과도 더욱 밀접하게 상호 결합하게 됩니다. 유(有). 무(無). 유위(有爲). 무위(無爲) 등의 도가(道家) 개념과 습합하게 되고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위진 남북조 이래의 탈유가적 사회상황을 심화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 화엄학(華嚴學)은 그 고도의 정치(精緻)한 이론이 더 이상 발전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 지점에서 선(禪)이 되고, 이 선(禪)에 의하여 불교는 대중(大衆)종교가 됩니다. 선종불교는 대중이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여러 층위의 내용을 벌여놓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대중에 대한 영향력에 있어서 막강한 권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행사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전의 화엄학이 중앙정부의 권력을 합법화하는 이데올로기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종불교 역시 지방의 봉건정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송대의 신유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통일국가를 재건하고 사회질서를 확립하여야 하는 시대적 대응과제의 일환으로서 형성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종교와 이성의 갈등기에 비종교적 엘리트들이 직면했던 고뇌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당대 사회의 엘리트 계층에게 있어서 시급히 개변되지 않을 수 없는 매우 불안정하고 위험한 현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야기가 매우 장황해졌습니다만 어쨌든 불교와 신유학은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이라는 역사의 어떤 전형을 엿보게 합니다. 역사의 매 단계에는 이러한 구도가 중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이러한 중층적 구도를 명쾌하게 드러내는 것이 역사이해의 본령이라고 생각하지요.
이 시기에 보여준 중국불교와 신유학의 관계는 역사발전의 어떤 전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유학의 성격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한다는 것이 다소 길어졌습니다. 지금부터는 ‘대학’과 ‘중용’에 관한 이론적 소재(素材)만을 간단하게 지적하고 끝마치겠습니다. 이론적 소재라는 것은 물론 관계론적 관점과 연관되는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3) ‘대학(大學)’독법
  
‘대학’은 원래 예기(禮記) 제42편이었습니다만 주자(朱子)가 그것을 따로 떼어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나누어 주석하였습니다. 경(經)은 공자의 말씀을 증자가 기술한 것이고 전(傳)은 증자의 뜻을 그 제자가 기술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대(漢代) 유가(儒家)의 공동저작이 통설입니다.
‘대학’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으로서 유가사상 중에서 가장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내용이라 평가됩니다. 다음은 ‘대학’ 원문입니다만 자구(字句)번역은 하지 않고 전체의 구조와 내용을 검토하기로 하겠습니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知止而後有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安而後能慮 慮而後能得
物有本末 事有始終 知所先後 則近道矣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 在格物 物格而後知止
知止而後意誠 意誠而後心正
心正而後身修 身修而後家齊
家齊而後國治 國治而後天下平.

  
親民(친민) : 백성을 친애함. 程子는 新民으로 읽음. 백성을 새롭게 함.
本末(본말) : 本은 명명덕, 末은 친민.
始終(시종) : 始는 知止, 終은 能得.
格物致知(격물치지) : 物에 格함으로써 知에 이름.

  
'대학’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첫째 명덕을 밝히는 것(明明德), 둘째 백성을 친애하는 것(親民,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 新民), 셋째 최고의 선에 도달하는 것(止於至善) 이 3가지를 삼강령(三綱領)이라 합니다. 그리고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가 8조목입니다.
우리는 ‘대학’의 내용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주자가 왜 예기(禮記)의 이 부분에 주목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장구(章句)하고 주(註)를 가하였는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주자 이전에도 사마광(司馬光)이 ‘중용대학광의(中庸大學廣義)’를 지어 ‘중용’과 함께 대학을 따로 다루었습니다.
이처럼 ‘대학’을 주목하게 된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대학’은 일반적으로 대인(大人) 즉 귀족(貴族), 위정자(爲政者)의 학(學)이라 합니다. 그러나 ‘대학’은 단지 지식계층의 학이라기보다는 당대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선언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명덕이 있는 사회, 백성을 친애하는 사회, 최고의 선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해탈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송대 지식인들의 사회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反)불교적이고 반(反)도가적입니다. 불교의 몰(沒)사회적 성격에 대한 비판입니다. ‘대학’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평화로운 세계의 건설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이 8조목입니다. 8조목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의 순서입니다.
  
이 순서가 반드시 옳은 것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학’이 선언하고 있는 것은 개인(個人), 가(家), 국(國), 천하(天下-世界)는 서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의 수양과 해탈도 전체 체계를 구성하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양과 해탈에 가장 근접한 조목이 성의(誠意) 정심(正心) 그리고 수신(修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전체과정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것이며 그것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이것이 ‘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자가 ‘대학’을 장구하고 주를 가하여 존숭(尊崇)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은 3강령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상적인 사회상과 8조목으로 선언하고 있는 개인과 사회의 통일적 인식에 그 핵심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의 8조목 중에서 주자가 가장 의미를 둔 것은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라고 생각합니다.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 즉 물(物)에 격(格)하여 지(知)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지(知)란 인식이나 깨달음의 뜻입니다. 그리고 격(格)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가지입니다만 격(格)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물(物)과의 관계를 통하여 인식을 얻는다는 것이지요. 실천을 통하여 지(知)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지요.
물(物)이란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든 없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우리의 주관적 의사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물질(物質)과 같은 개념으로서 외계(外界)의 독립적(獨立的) 대상(對象)을 의미합니다. 인식과 깨달음이 외계의 객관적 사물과의 관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돈오(頓悟)와 생각의 비약(飛躍)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선종(禪宗)불교의 주관주의(主觀主義)를 배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주자가 주목한 ‘대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하여는 비판적 견해가 없지 않습니다. 물(物)의 의미에 대하여도 그것은 기존의 봉건적 질서를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천명(天命)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지요.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경우의 지(知)란 사회적 실천에 의하여 얻어진 합법칙적인 인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예(禮)와 같은 봉건적 가치를 수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인식체계가 매우 논리적이며 객관적 지식에 대한 합당한 설명이란 점에서 높이 평가됩니다. 주자는 불교의 심론(心論)과 도가의 관념론을 비판하는 근거를 격물치지에서 찾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5장에서 주자는 격물치지의 의미를 한층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5장은 주자가 ‘대학’을 재정리하면서 없어졌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자신이 직접 써서 채워 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보망장(補亡章)이라고 불리는 장입니다. 따라서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와 함께 주자의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자는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의 의미를 우리의 인식(知)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데서 온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사람에게는 인식능력(心之靈)이 있고 사물에는 이치가 있기(有理) 때문에 앎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물에게로 나아가서 그 이치를 궁구(窮究)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물과의 관계 즉 실천에 의한 객관적 사물과의 접촉을 인식의 제1보로 규정하고 격물(格物)을 전체 체계의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최상층에 있는 평천하(平天下)로 나아가는 제1보로 삼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주자가 ‘대학’을 주목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격물치지와 전체계의 통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3강령 8조목의 통일적 이해입니다. 이것이 ‘대학’ 독법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대학’ 독법에 있어서 비판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그 내용을 함께 살펴보기로 하지요.
‘대학’의 3강령 8조목은 대체로 가까운 데서부터 먼 데에 이르는(自近至遠) 단계적 순차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혀집니다. 수신(修身)을 한 다음에라야 제가(齊家)가 가능하고 마찬가지로 제가(齊家)를 이룬 다음에 치국(治國)할 수가 있으며 치국(治國)이후에나 평천하(平天下)가 가능하다는 의미로 읽혔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집안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위인이 사회적 발언을 한다고 핀잔을 주는 예를 종종 목격하기도 하지요. 수신에서 평천하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순차적 과정으로 설정하고 그렇게 이해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대학’의 선언은 봉건적 관문주의(關門主義)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평가를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수신(修身)은 봉건적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러한 수신(修身)에서 시작하여 제가(齊家), 치국(治國)을 거쳐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장구한 과정을 설정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청년들의 진보적 사상을 봉쇄하는 구조에 다름아니라는 것이지요. 물론 그렇게 읽혀져 온 것도 사실이고 그렇게 읽혀질 수 있는 내용이 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자가 ‘대학’을 장구하고, 고주(古註)와는 다른 해석을 내리고, 별도로 단행(單行)하여 존숭한 까닭은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당시의 시대적 과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의 의미를 매우 중요하게 제기하는 까닭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사물과의 접촉 그리고 사물에 내재한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모든 것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자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 논리로 우리는 3강령 8조목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을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8조목은 각 조목의 순차성을 선언한 것이라거나, 그러한 순차성은 청년들의 진보적 사상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은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지요.
물론 ‘대학’의 내용 전반의 성격에 비추어 그러한 개연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며 또 지금까지 그렇게 읽혀지고 그렇게 주장되어 온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대학’ 본래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대학’의 정신은 한 마디로 8조목의 각 조목이 전체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데에 있으며 그 전 과정이 하나의 통일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대학’은 8조목 간의 순차성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그 전체적 연관성을 깨닫는 데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대학(大學)’은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는 것입니다. 풍우란(馮友蘭)의 관점이 그렇습니다. ‘대학’은 평천하(平天下) 즉 세계평화를 위한 방법론과 평화의 내용에 관한 담론이라는 것이지요.

 

평천하(平天下), 즉 평화로운 세계는 명덕(明德)과 친민(親民)과 지선(至善)이 실현되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인간관계가 존중되는 사회(明德), 민주적인 사회(親民) 그리고 선량한 사회(至善)를 만들기 위하여 개인의 품성이 도야되어야 함은 물론이며 개인뿐만이 아니라 가(家)와 국(國) 그리고 국가간(天下)의 관계가 평화로워야 합니다.
뉴욕의 WTC건물 붕괴 이후 고조되는 테러논의를 예로 들어 보지요. 세계가 평화롭기 위해서는 물론 테러국가가 있어서도 안 되지만, 테러를 야기하는 원인제공자로서의 패권적 국가가 없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테러란 기본적으로 거대폭력(巨大暴力)에 대한 저항폭력(抵抗暴力)입니다. 거대폭력이 먼저 거론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더구나 저항폭력을 테러로 규정하고 테러를 빙자하여 폭압적인 개입과 일방주적 지배를 관철하려는 패권국가(覇權國家)의 거대폭력이 건재하는 한 세계평화는 요원한 것이지요. 근대 이후의 세계질서가 침략과 수탈로 점철된 제국주의 역사였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합니다.
개인의 해탈과 수양만으로 평화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학’에는 노불(老佛)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그 저변에 확실하게 깔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은 와해된 사회질서를 재건하려는 당대 인텔리들의 고뇌에 찬 선언이었다고 하여야 합니다.
세계평화는 세계를 구성하는 각 국가의 평화이며, 국가의 평화는 국(國)을 구성하는 각 가(家)의 평화에 의하여 이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家)의 평화에는 가(家)의 구성원인 개개인의 품성이 높아져야 됩니다.
‘대학’은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체계적인 논리입니다. 이러한 체계적 논리의 최상에 놓여 있는 것이 ‘명덕(明德)’입니다. ‘대학’의 최고강령은 명덕(明德)입니다. 덕(德)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여러분은 ‘논어’에서 읽은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을 기억할 것입니다.
덕(德)은 ‘관계(關係)’입니다. 개인과 사회, 사회와 국가, 국가와 세계가 맺고 있는 관계성의 자각과 실현이 궁극적으로는 세계평화의 기초인 동시에 한 개인의 수양의 기초가 된다는 점을 통일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학’ 독법에 있어서는 송대 신유학이 어떠한 학문적 동기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주자(朱子)에서 그 절정(絶頂)을 발견하는 당시의 지식인들의 고뇌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사회적 관심이 매우 촌스러워진 현재의 상황, 개인의 감성을 가장 상위에 두는 오늘날의 문화, 단편적인 이미지에 의하여 그 전체가 채색되는 부분의 춘화적(春畵的) 확대가 지배하는 오늘의 사회와 문화를 생각하면 주자의 시대가 당면했던 사회적 과제를 짐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개인적 수양에 아무리 정진한다 하더라도, 한 장의 조간 신문에서 속상하지 않을 수 없고, 한 나절의 외출에서 속상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가 바로 우리가 속하고 있는 사회라면 우리는 생각을 고쳐 가져야 합니다.
개인의 수양이 국(國)과 천하(天下)와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를 완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들의 품성이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한 우리의 삶과 우리 사회가 바람직한 것이기는 어렵지요.
불교철학이 모든 것을 꽃으로 승화시키는 뛰어난 화엄학(華嚴學)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덧없이 만드는 무상(無常)의 철학인 것과 마찬가지로 해체주의(解體主義)는 자본주의에 대한 거대한 집합표상을 해체하는 침통한 깨달음의 학이면서 동시에 개인을 탈사회화하고 단 하나의 감성적 코드에 매달리게 만드는 일탈(逸脫)과 도피(逃避)의 장(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학’은 그런 점에서 소학(小學)밖에 없는 오늘의 학문 풍토에서 다시 한번 주목되어야 할 인문학(人文學)이라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모색하는 새로운 문명론(文明論)의 서장(序章)이라 할 것입니다.

 

4) ‘중용(中庸)’ 독법
  
‘중용’ 역시 ‘예기’ 제31편으로 들어 있다가 따로 단행(單行)된 것입니다. 물론 주자가 장구(章句)한 것이지요.
장구란 ‘대학’ 독법에서도 이야기하였습니다만 장(chapter)과 구(paragraph)로 문장을 재분류하는 것입니다. 주자가 ‘대학’에 이어 ‘중용’을 주목한 까닭이 무엇인가를 먼저 밝혀야 합니다.
주자는 ‘대학’ ‘중용’의 장구뿐만 아니라 ‘논어’ ‘맹자’에 관한 이전의 모든 주(註)를 모으고, 재해석하는 소위 집주(集註)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서집주’를 통하여 사회의 기틀을 새로이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지요.
‘논어’와 ‘맹자’가 인(仁)과 의(義)를 기본 코드로 하는 사회학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읽었습니다. ‘대학’은 좀 전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세계와 나의 통일적 관점에 관한 이론입니다. 주자가 ‘중용’에 열중한 까닭도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물론입니다.
‘중용’은 미리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당시의 사회적 과제를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는 텍스트입니다. 죽는 날까지 책상에 앉아서 ‘대학’을 장구하던 주자의 학문적 동기에 관해서는 이미 이야기하였습니다. 당시를 풍미하는 해체주의적 문화와 무정부적 상황을 개변하려는 노력입니다. 건축적 의지로 일관된 사회학적 동기이며 사명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伋)가 지어서 성조(聖祖)의 덕을 소명(昭明)한 것이라고 합니다.(孔潁達) 그리고 자사(子思)가 도(道)의 부전(不傳)을 우려하여 지었다고 합니다(주자의 주). 물론 이러한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언술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중용’을 장구한 이유가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중용’의 독법을 옳게 갖고 가기 위해서는 ‘중용’ 제1장을 읽기 전에 먼저 서두에 붙여놓은 ‘장구서(章句序)’부터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자는 이 서(序)에서 ‘중용’을 지은 목적이 무엇인가를 먼저 묻고 자답(自答)하기를 자사(子思)가 도학(道學)의 전통이 끊어질까봐 지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도학의 전통이 도통(道統)입니다.
이 경우 도학이란 주자가 체계를 세우려고 한 사회이론임은 물론입니다. 주자는 노불(老佛)에 대한 견제심리가 대단하였으며 그것이 역설적으로 도통론(道統論)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불교적 법통(法統)개념인 의발전수(衣鉢傳授)란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 서(序)에서 주자는 정자(程子)를 빌려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유가의 사회이론을 도통의 논리로써, 즉 학문적 전통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지요.
“정자가 말하기를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庸)이라 한다. 중은 천하의 바른 도요, 용은 천하의 정한 이치이다(子程子曰 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 中者天下之正道 庸者天下之定理). 이 편은 공문(孔門)에서 전수한 법이 오래되어 원래에서 어긋나게(差) 됨을 두려워하였다(此篇, 乃孔門傳授心法 子思恐其久而差也).”고 하였습니다.
천하에는 바른 도가 있다는 것을 선언하고 이 바른 도는 역사적 전통에 의하여 그 진리성이 검증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주자가 ‘장구서’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이 ‘장구서’에서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이 ‘실학’(實學)입니다. 공문(孔門)에서 전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실학이며 이 실학은 우주와 세상의 원리를 잘 아우르고 있으며 그 의미가 무궁하다는 것이지요(其味無窮 皆實學也). 이 실학이라는 선언이 바로 불교의 허학(虛學)에 대한 유학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주자가 예기(禮記)의 이 부분을 주목하게 된 이유를 우리는 제1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제1장은 ‘중용’의 전체구조에서 서론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합니다. ‘중용’ 제1장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됩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매우 익숙한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

  
‘대학’의 논리구조와 마찬가지로 ‘중용’에서도 일관된 통합적 사상체계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성(性)과 도(道)와 교(敎)의 통일입니다.
주자는 주(註)에서 명(命)은 영(令)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성(性)은 곧 이치(理致) 즉 원리(原理)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교(敎)는 도(道)에, 도(道)는 성(性)에, 성(性)은 천명(天命)이라고 하는 객관적 원리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개인은 거리낌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법칙과 그것과 통일되어 있는 유교적 원리에 의하여 사회화(社會化)되어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천명(天命) 즉 궁극적 원리 즉 도(道)의 대원(大原)은 하늘에서 나온 것(出於天)이라는 동중서(董仲敍)의 주장을 들어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개 사람이 자기의 성(性)이 있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천(天)에서 나온 것임은 알지 못하며, 사물의 법칙이 있음은 알지만 그것이 성(性)에서 말미암은 것임은 알지 못한다. 성인의 가르침이 있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나의 고유한 바로 인하여 제재(制裁)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蓋人之己之有性 而不知其出於天 知事之有道 而不知其由於性 知聖人之有敎 而不知其因吾知之所固有者裁之也)"
‘중용’이 가장 중요하게 선언하는 것이 바로 리(理)입니다. 성즉리(性卽理)입니다. 리(理)는 법칙성(法則性)입니다. 이것이 성(性)입니다. 성(性)은 천명(天命)입니다. 이 성(性)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도(道)임은 물론입니다.
도(道)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 즉 솔(率)해야 하는 것이며, 솔(率)은 노(路)라 하였습니다. 이 도(道)를 따르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바로 교(敎)입니다.
성(性)과 도(道)는 비록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 기품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지나치고 모자라는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성인은 사람과 물건이 마땅히 해야 할 바에 인하여 품절(品節)하여 천하의 질서로 만드니 이것을 일러 교(敎)라 한다, 중요한 것은 이 교(敎)의 내용이 바로 예악형정(禮樂刑政)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악형정은 매우 사회적인 개념입니다.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와 정책입니다. 주자가 ‘중용’에 주목하고 장구한 이유가 이러한 것에 대한 재조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 법칙성(法則性)입니다. 우리의 태도가 과하든 미치지 못하든, 우리가 그 존재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관없이 객관적 법칙은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성인의 가르침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것이 우리들에게 원래부터 있는 바가 재단되어 나오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주자가 ‘중용’을 통하여 제기하려고 하는 가장 절실한 주제는 바로 도(道)의 큰 근원(根源)이란 하늘에서 명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그것을 따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도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인간적 도리의 구체적 덕목은 예악형정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사회적(社會的) 가치(價値)라는 것이지요.

 

‘중용’ 제1장의 다음 구절들은 성(性), 도(道), 교(敎)를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에도 삼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천명의 보편성 즉 리(理)의 법칙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법칙성이 다음에 나오는 중(中)입니다. 미발(未發)의 상태(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이지만 근본(根本)을 점(占)하고 있는 본체론적(本體論的)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발(發)하여 중절(中節)을 이룰 때 그것을 화(和)라고 하는 것입니다(發而皆中節 謂之和).
성(性)과 도(道)가 중(中)의 개념이며 교(敎)는 절도에 맞게 노력하는 화(和)를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사회적 질서 즉 예악형정에 어긋나지 않고 절도가 맞는 경우를 화(和)라는 것이지요.
화(和)가 비록 봉건적 질서와 합치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주자는 확실하게 사회적 관점에 서 있습니다. 용(庸)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용(庸)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 즉 봉건제도와 유교도덕에 의하여 규범화된 일상(日常)을 의미합니다. 일상적 용(用)과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중용지도(中庸之道)’가 세계의 근본이며 세계의 보편적 ‘도리’(道理)라는 것은 유가의 도덕적 규범을 ‘理’(天理)로 선언하여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객관적 원리로 규정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중(中)은 천하의 대본(大本)이며 화(和)는 천하의 달도(達道)가 되는 것입니다(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나는 여기서 ‘천하’(天下)라는 어휘에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자가 ‘중용’에서 강조하려고 한 것이 ‘천지’(天地)라는 자연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천하’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천하(天下)는 사회적 개념입니다. 주자의 학문적 동기가 사회질서를 다시 새우려는 건축의지에 있었다고 했습니다만 우리는 주자의 그러한 입장을 ‘중용’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이지요. 주자의 정신세계는 철저하리만큼 사회적 모티브가 중심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철학이 중화주의를 자처하던 중국에 문화적 충격으로 나타난 것도 부정할 수 없으며 중국의 사상사에서 결과적으로 철학적 사유를 심화하는 계기를 준 것도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당면의 사회적 과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이 주자의 체계입니다. 그것을 철학적 범주의 확대로 해석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에 더하여 그 자체로서 관념론적 함정에 빠지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송대 신유학은 노불(老佛)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해이해진 사회질서를 재건하기 위한 당대의 지적 실천과정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후 7백년동안 중국사회는 물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사회적 모델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켜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확립된 패러다임에 의하여 재건된 중국사회는 명대(明代) 276년, 청대(淸代) 267년 동안 중국 사회를 관통하는 '초안정(超安定)시스템’의 근간을 이루게 됩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서구 근대사회에 의하여 그것이 다시 한번 도전 받을 때까지 주자가 세운 도통(道統)이 사회원리로서 굳건히 그 지위를 이어갔던 것이지요. 중국의 유학사상은 이처럼 송대의 새로운 재편과 중흥을 거쳐 대단히 안정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바로 그 견고하고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대응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지요. 견고한 구조는 변화에 대한 무지(無知)와 지체(遲滯)로 이어지고 당연히 19세기말의 근대질서의 도전을 맞아 힘겨운 대응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송대 신유학에 대하여 물론 많은 이론(異論)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로 북방 이적(夷狄)과의 싸움에서 계속하여 실패하는 과정에서 중국인들의 시선이 내부를 향하게 되었다는 데에서 송대 신유학의 계기를 찾아보려고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일종의 자기반성이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이 점은 오히려 불교적 성찰과 상통하는 것으로 그런 점에서 불교의 영향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당나라 이후 과거제도가 정착되고 관료제도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중국의 전통적 정치이상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자신감이 유학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상적 기조를 학문적으로 대성시킨 사람이 바로 주자(朱子)였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신유학은 13세기까지 중국이 경험하였던 정치사회적 성취와 지적유산(知的遺産)이 학문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발전의 일반적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단히 성공적인 것으로서 서구근대사상에 의하여 치명적인 충격을 받을 때까지 중국사상과 중국사회 구조의 견고한 토대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명(明)나라 중기에 양명학(陽明學)이 소위 심학(心學)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신유학에 대한 비판이론으로서 상당한 충격을 던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양명학의 대두를 계기로 지식인 사회에 상당한 반향과 새로운 지적 전환의 가능성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비판이론으로서의 심학은 신유학과 같은 강도와 파장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심학이 당쟁의 와중에서 그 입지를 상실하고 후에 강화학파로서 명맥을 유지하는 데서 그칩니다. 우리는 물론 이 심론(心論)에서 매우 중요한 성찰적 관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다루지 못합니다.
주자의 이론이 ‘性卽理’임에 반하여 심론의 요지는 ‘心卽理’입니다. 신유학이 선종불교에 대한 비판적 체계라면 양명학은 신유학에 대한 비판의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자의 체계가 독서궁리(讀書窮理)-->지혜(智慧)라는 논리임에 반하여 심론은 ‘양지(良知)’에 직접 호소하는 체계입니다. 바로 이러한 성격이 선종불교와 마찬가지로 심론이 대중화에 성공하게 합니다.
신유학이 선비의 학문에 갇히는 것과는 달리 육상산(陸象山)의 강론에는 수많은 사람이 운집하였던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명대(明代)의 인구증가와 사회의 계급적 질서가 급속하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심론의 차별철폐사상과 평등사상이 상인계층의 전폭적 호응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그리고 심론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주체성의 강조입니다. 주체성이 심(心)이라는 또 하나의 주관적 관념론으로 표상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이 심론(心論)은 적극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상산의 이론을 계승한 왕양명(王守仁)은 심(心) 성(性) 이(理)를 통일적으로 규정합니다. 구체적 현실은 심(心)으로 통일된 인식(認識)된 세계’이며 인간과 세계는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왕양명의 체계는 心=性=理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심(心)으로 통일되는 것이지요.
“효친(孝親)의 마음이 없다면 효도의 이(理)가 있을 수 없으며, 충성의 마음이 없다면 충성의 이(理)가 있을 수 없다(無孝親之心 無孝之理 無忠君之心 無忠之理)”는 논리입니다. 충효의 이(理)가 있기 때문에 충성과 효심이 생긴다고 하는 주자의 입장과는 정반대입니다.
주자이론의 기초가 되고 있는 추상적 ‘이(理)의 세계(世界)’가 존재할 여지가 없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심론에 있어서는 이(理)의 객관적 실재성(實在性)을 전제하는 주자의 사상체계는 부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론은 ‘대학(大學)’의 3강령(三綱領)과 8조목(八條目)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내놓습니다. 명덕(明德)이란 대인(大人)이 천지만물을 일체(一體)로 삼는 ‘마음’(心)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명명덕(明明德)이란 그 ‘체(體)’를 수립하는 일이며, 친민(親民)이란 그 ‘용(用)’을 행하는 일이며, 지선(至善)이란 명덕(明德)과 친민(親民)의 기준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양명학(陽明學)을 심학(心學)이라고 하는 것이지만 3강령을 명덕(明德) 즉 ‘심(心)’ 하나로 통일하고 있습니다.

 

8조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통일적으로 설명합니다. “격(格)이란 바로 잡는 것이며 물(物)이란 일(事)이다(格者正也 物者事也)”라고 새롭게 해석합니다. 물(物)의 시비(是非)를 바로 잡는 것은 양지(良知)이고 지식을 넓히는 것은 물(物)을 바로 잡는 데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物)이란 예를 들어 그 뜻이 어버이를 섬기는 데 있다면 ‘어버이 섬기는 일’이 물(物)이라는 것이지요. 이 경우 물(物)의 의미는 오히려 ‘affairs’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8조목 역시 ‘치양지(致良知)’로 귀일(歸一)됩니다. 격물(格物)이 단지 사물(事物)과의 관계(關係)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솥에 쌀을 넣지 않고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이 허황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결과적으로 양명학(陽明學)에서는 ‘格物致知正心誠意修齊治平’이 치양지(致良知) 즉 심(心)으로 통일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세운 다음(先立其乎大者) ‘성(誠)’과 ‘경(敬)’으로 보존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논리입니다. 양명(陽明)은 말합니다. “너를 묶는 그물을 찢어라(決破羅網), 공자(孔子), 육경(六經)도 존숭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물론 심학(心學)은 글자 그대로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심론(心論)에서 긍정적으로 읽어야 할 부분은 바로 ‘주체적(主體的) 실천(實踐)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인식이 실천의 결과물이라면, 그리고 그 실천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목적의식적 행위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신유학에 대한 심학(心學)의 문제제기는 매우 정당한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양명학의 심(心)이 선종불교의 심(心)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강화학파가 무엇보다도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였다는 것에서도 바로 심(心)에 대한 양명학적 의미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신유학과 양명학의 이론적 지양(止揚)과정에서 또 한가지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미시적 관점보다는 거시적 관점을 견지하는 일입니다. 성즉리(性卽理)와 심즉리(心卽理)의 논리적 구조를 천착해 들어가기보다는 신유학과 신유학에 대한 심학의 문제제기라는 일련의 논쟁적 과정을 통하여 사상사(思想史)의 전개과정을 읽는 일이지요.
그것은 사상의 일생(一生)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상의 생성(生成)-발전(發展)-변화(變化) 그리고 소멸(消滅)의 과정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상사의 전개과정에서 사회변화(社會變化)를 읽어내는 일입니다. 사상은 사회변화를 이끌어내고, 다시 사회적 변화를 정착시키고 제도화하는 사상고유의 전개과정을 확인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모든 사회적 변화는 사상투쟁에 의하여 시작되는 것이며 사회적 변화는 사상체계의 완성으로 일단락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연속과 단절, 계승과 비판이라는 중층적 과정을 경과하는 것이 사상사의 가장 보편적 형식이지만 이처럼 복잡한 전개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주체적(主體的) 입장(立場)과 실천적(實踐的) 자세(姿勢)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우의 새로움이란 단지 이론에 있어서의 새로움이 아니라, 입장(立場)과 자세(姿勢)에 있어서의 ‘새로움’이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창신(創新)의 자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지적 관심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실천적 과제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경우 특히 주의를 요하는 것은 이러한 창신의 실천적 과정이 보다 유연하게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창신이 어려운 까닭은 그 창신의 실천현장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은 우리의 선택 이전의, 주어진 것이며 그리고 충분히 낡은 것이란 사실입니다.
현실은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요. 과거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을 창신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 유연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과거란 지나간 것이거나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 그루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고스란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의 모든 실천은 무인지경(無人之境)에서 새집을 짓는 것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창신(創新)은 결과적으로 온고창신(溫故創新)이라는 보다 현실적 곡선(曲線)의 형태로 수정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조(敎條)와 우상(偶像)을 과감히 타파하는 동시에 현실과 전통을 발견하고 계승해야 하는 부단한 자기 성찰의 자세와 상생(相生)의 정서를 요구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고전강독이 바로 그러한 자세와 정서를 바탕으로 해서 진행되었다고 생각합니다.

 

5) 고전강독의 정리
  
우리는 지금까지 관계론(關係論)의 관점을 가지고 고전을 섭렵하였습니다.
‘시경’의 풍(風)과 ‘서경’의 무일(無逸)사상에서는 개인의 고뇌와 아픔에 대하여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뇌와 아픔이란 개인과 사회, 개인과 시대가 엮어내는 갈등과 긴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뇌와 아픔은 주체와 조건 사이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존재조건이며 어쩌면 모든 주체의 자기확인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고뇌와 아픔에 대하여 보다 열린 생각을 키워가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산다는 것이 아픔이라는 사실입니다. ‘상처란 산 자가 걸치는 옷’이라는 달관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고뇌와 아픔이란 그것을 회피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조건임을 자각하는 것이 정직한 대응방식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회피하기보다는 몸소 겪어가는 1인칭의 공유(共有)가 가장 정직한 대응방식이라는 것을 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인칭의 공유란 주체와 그 주체의 존재조건 사이에 이루어지는 적극적 관계건설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그것은 관계론적 대응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초사’에서는 현실과 이상의 갈등과 모순에 대하여 읽었습니다. 주관적 이상과 객관적 현실이 빚어내는 모순과 갈등은 ‘시경’과 ‘서경’에서 읽었던 존재조건 그 자체의 아픔과 고뇌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목표와 수단의 관계로 대치하여 그 차원을 격하시키기보다는 그것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에 주목하자고 하였습니다.
현실의 이상화와 이상의 현실화라는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고, 목표를 높은 단계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수단을 낮은 단계의 목표로 위치 규정하는 관계론적 사고가 올바른 대응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다른 것끼리의 대립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올바른 대응이란 언제나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역’에서는 동양학의 기본적 사유구조(思惟構造)로서의 관계론적 인식틀을 확인하였습니다. 득위(得位), 응(應), 비(比) 등 사물(事物)과 사건(事件)과 사태(事態) 나아가 ‘세계의 변화’를 읽는 관계론적 사유구조를 확인하였습니다.
‘논어’는 기본적으로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으로 읽었습니다. ‘논어’의 중심개념인 인(仁)은 인간관계 그 자체였으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인(仁)은 관계론적 개념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논어’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관계론은 두 개념을 나란히 놓음으로서 서로를 드러내는 대비(對比)방식이 바로 관계론적 구조라는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두개의 개념이나 사물을 나란히 대비시킨다는 것은 그 둘을 ‘관계시키는’ ‘짝짓기’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론적 대응방식은 ‘학(學)과 습(習)’, ‘지(知)와 우(愚)’, ‘화(和)와 동(同)’, ‘문(文)과 질(質)’ 등 도처에서 발견될 수 있었습니다.
‘맹자’는 공자의 ‘인(仁)’이 사회화되어 ‘의(義)’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의(義)는 ‘인로(人路)’이며 그 자체로서 사회성을 담고 있는 것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특히 여민락장(與民樂章)과 곡속장(穀章의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 그리고 화살을 만드는 사람과 방패를 만드는 사람의 대비는 삶과 사상에 대한 관계론적 관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관계론의 지평을 훨씬 넓혀주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노자’와 ‘장자’에서는 관계론이 최대의 범주로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노자와 장자는 자연(自然)을 최고의 도(道), 유일한 도(道)의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자연이라는 최고의 개념으로 사회와 인간을 포용하는 구조입니다. 노자와 장자의 관계론은 그런 의미에서 관계론의 외연(外延)을 최대로 확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민초(民草)의 철학, 약한 자의 철학으로서 물의 철학을 전개하였습니다. 물처럼 도에 순응함으로써 그리고 무위(無爲)로써 무불위(無不爲)하는 유연한 관계론을 개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무위(無爲)와 무불위(無佛爲)의 관계, 무(無)와 유(有)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관계론의 폭을 심화하였음을 발견하였습니다.
‘묵자’ ‘순자’ ‘한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묵자의 겸애(兼愛)와 교리(交利) 역시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이며 순자의 교육론과 능동적 주체성 역시 인간주의의 선언입니다.
가장 비정한 이론으로 일컬어지는 한비자의 법가이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법가사상은 변혁사상이며 혁명의 사상입니다. 그리고 혁명은 최고의 실천적 휴머니즘이라는 주장을 수긍한다면 오히려 법가사상에서 최고의 인간주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중국고전강독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하려고 한 것은 관계론적 담론이었습니다. 그리고 관계론의 현실적 내용은 바로 <인간주의 +사회주의>라는 동양적 가치의 기본구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의 사회주의란 현실사회주의를 지칭하는 'Socialism'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오리려 공동체라고 하는 사회주의적 가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전에서 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가장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人性)의 고양(高揚)’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인성(人性)의 의미가 바로 인간관계이며 관계론적 의미를 갖는 것이지요.
이것은 서구적 가치가 개인의 존재를 기본으로 하여 개인의 존재조건 즉 사회적, 물질적 조건을 확대하고 해방하여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과 구별됩니다. 서구적 가치는 인성의 고양보다는 개인의 존재조건을 고양하는 것이며 그 존재조건들 간의 마찰과 충돌을 합리적으로 규제하는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고전의 강독에서 우리가 지향하여야 하는 것은 동양학의 기본구조인 ‘관계성(關係性)의 고양(高揚)’이 곧 21세기의 문명사적 과제라는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기 때문에 부연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체제가 필연적으로 양산하는 물질과 인간의 낭비,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보다 근본적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것, 그리고 우민화(愚民化)의 최고수준을 보여주는 상품문화(商品文化)의 실상을 직시하는 것에서 우리의 비판정신을 키워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비판적 성찰이 새로운 문명에 대한 모색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적 성찰이 근대사회의 기본적 패러다임인 ‘존재론’적인 구조에 대한 반성과 직결되어 있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이러한 철학적 사고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어야 비로소 유연한 발상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였을 경우에 비로소 역사인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개인, 집단, 국가 등 모든 존재들이 자신의 존재를 강력한 것으로 만들어가려는 강철(鋼鐵)의 의지(意志)와 그 강철의지가 전개되어온 강철의 역사로 근대사를 조명할 수 있는 관점을 확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고전 강독은 고전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보다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성찰적 관점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성찰적 관점을 갖기 위하여, 나아가 ‘관계론’적 관점으로 이를 키워가기 위하여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지요.
그러한 관점을 얻었다면 마치 강을 건넌 사람이 배를 버리듯이 고전의 모든 언술(言述)을 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그러한 관점을 유연하게 구사하여 새로운 인식을 길러내는 것이 과제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창신(創新)의 장(場)이 시작되는 지점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기되는 것이 이 시간의 모두에서 이야기한 시(詩)와 산문(散文)에 관한 것입니다. 시와 산문의 이야기는 ‘가슴’의 이야기이며, 이성(理性)이 아닌 감성(感性)의 이야기입니다.

 

6) 시문(詩文)과 정서(情緖)
  
우리는 한 학기동안 관계론을 화두(話頭)로 걸어놓고 고전을 읽었습니다. 그 강독과정에서 관계론에 대한 대체적인 이해도 전달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다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함께 읽지 못하고 여러분에게 과제로 남겨두는 시(詩)와 산문(散文)에 대한 것입니다. 시정신과 산문정신이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크게는 정서(情緖)의 문제라고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강의 중에 아마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고 기억됩니다만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heart)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심에 있다는 의미는 사상을 결정하는 부분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head)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고 해왔던 것이지요.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關係論)의 장(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場)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성(理性)보다는 감성(感性)을, 논리(論理)보다는 관계(關係)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가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이제 강독을 마치면서 새삼스럽게도 다시 가슴의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앞으로 시와 산문을 더 많이 읽으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사철(文史哲)과 나란히 시서화(詩書畵)에 대한 교육을 병행하여 왔습니다. 이성훈련과 나란히 감성훈련을 중시하였다는 것이지요. 물론 오늘날의 시서화(詩書畵)가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그 정서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런 이유에서 지금까지의 고전강독에서는 반드시 시와 산문을 함께 읽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강의에서는 함께 읽고 감상할 시간이 없습니다.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부언해두려고 합니다.
  
첫째 사상은 '감성(感性)'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감성적 형식으로 인격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격은 기본적으로 감성입니다. 이성의 차원에서 논리화된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한 사회의 법과 제도는 문화로서의 실체성을 갖기 어려운 것이지요.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천과는 관계없이 단지 주장하였다고 하여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는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상은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肉化)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형식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상은 지붕 위에서 날리는 종이비행기가 아니지요.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은 이성(理性 Cool Head)의 형태가 아니라 감성(感性 Warm Heart)의 형태로 존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감성은 이성에 비하여 그것의 작동이 직접적이고 항상적(恒常的)입니다. 그리고 잠재의식층에 각인되어 있는 심층(深層)의 정서입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이고 그리고 가장 정직한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思考)이전의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성형태로 갈무리되고 있는 사상은 판단 이전에 작용하는 본능적 대응과 관계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과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것이 감성적 대응입니다.
이러한 정서와 감성을 기르는 것은 인성(人性)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 인성을 고양하는 최후의 방법입니다.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마음씨가 바르고 고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사상(思想)의 장(場)을 문사철(文史哲)의 장으로부터 시서화(詩書畵)의 장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시서화(詩書畵)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想像力)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시서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어줍니다. 바로 우리들 자신을 조감(鳥瞰)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유연하게 해주는 것이며 우리의 사상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경’편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러한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생각을 열어줍니다. 하나의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게 해줍니다. 공간적으로 상하좌우의 여러 지점(地點)을 갖게 해줍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춘하추동의 여러 시점(時點)을 갖게 해줍니다. 공간적 시점(視點)과 시간적 시점(時點)을 다양하게 해 줌으로서 우리의 생각을 열어줍니다.
우리가 무엇과 어떻게 관계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상투적이고 도식적인 사고로부터 총체적이고 동태적인 사고로 이끌어줍니다. 여러분은 ‘시경’편에서 시(詩)에 관하여 이야기한 것을 상기하기 바랍니다. 서(書)와 화(畵)에 대하여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없지 않습니다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최근에 유전정보와 생물학에 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이야기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시서화(詩書畵)와 관련된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서화와 같은 예술적 정서와 감성(感性)은 아날로그이며 우뇌(右腦)의 작용이라는 것이지요. 좌뇌(左腦)가 분석적이고 의식적인 정신활동과 관계되는 것임에 비하여 우뇌는 정감적이고 잠재적인 사고가 진행되는 부위라고 합니다.
시서화의 필요성에 관하여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방식은 역설적이게도 좌뇌적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이왕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조금 더 이야기하지요. 뇌세포는 약 5백억 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5백억 개의 뇌세포는 청소년기에 완성되고 25세 전후를 정점으로 하여 매일 10만개씩 죽어간다는 것이지요. 50대, 60대에는 즉 노화가 진행될수록 죽어가는 세포의 수가 20만개, 30만개로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뇌세포의 감소는 좌뇌우세(左腦優勢)의 인간형보다 우뇌우세(右腦優勢)의 인간형의 경우가 더 더디게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노화방지를 위하여 우뇌활성이 요구된다는 것이지요.
물질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계산이나 분석 등 디지털 환경이 강화되면서 좌뇌가 발달하는 추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좌뇌의 발달은 우뇌의 발달을 저지하고 도리어 우뇌세포의 소멸을 촉진한다는 것이지요.
예술적 정서를 길러야 한다는 이야기가 어쩌다 노화방지로 바뀌어버렸습니다만 시와 산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더구나 한글의 구조는 서양문자인 알파벳과 마찬가지로 표음문자(表音文字)입니다. 디지털입니다. 반대로 한자(漢字)는 아날로그입니다. 상형문자이지요.
아날로그인 한자(漢字)에 비하여 한글과 알파벳은 우리의 뇌를 좌뇌우세로 유도한다는 것이지요. OX식 사고방식이 가장 첨단적인 디지털인 것은 물론입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은 물론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가 문사철보다 시서화에 더 많은 관심을 두어야하는 일화의 하나로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시간관계로 시와 산문을 읽지 못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유종원(柳宗元) 시 한편과 산문 한편을 소개는 하는 것으로 강독을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유종원(773-819)은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왕숙문당(王叔文黨)이라는 혁신정치집단을 만든 개혁사상가였습니다. 그러나 귀족 관료 그리고 번진(藩鎭)세력이 연합한 보수집단의 반격으로 말미암아 실패로 끝나고 지방관료로 강등됩니다. 그리고 지방에서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봉건론(封建論)’ ‘천설(天說)’은 역사인식에 있어서의 진보성이 높이 평가됩니다. 당시의 유가들의 일반적 견해와는 달리 군현제(郡縣制)가 필연적임을 역설하여 진시황의 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으며 특히 ‘천설’에서는 천명론(天命論)과 봉건적 지배체제를 강력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서 한유(韓愈)와 더불어 당대의 고문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고문운동이란 시경(詩經)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개혁운동임은 물론입니다. 문장은 한유와 겨루고 시는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다음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5언절구 ‘강설(江雪)’은 당대 이후 인구에 회자되는 명시로 꼽히는 것입니다. 이 시는 짧은 시구로 마치 눈앞에 보여주듯 선명한 그림을 펼쳐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이 함의하는 메시지가 칼끝처럼 날카롭습니다. 먼저 시를 함께 읽어보기로 하지요.
  
                    江 雪
  
天山鳥飛絶 萬徑人踪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산에는 새 한마리 날지 않고
길에는 사람의 발길 끊어졌는데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홀로
눈보라치는 강에 낚시 드리웠다.

이 시가 그려 보여주는 그림은 매우 선명합니다. 동양화에서 자주 보는 풍경 같기도 하고 도연명(陶淵明)의 전원(田園)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풍설이 휘몰아치는 강심(江心)에서 홀로 낚시 드리우고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은 필시 그의 자화상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 시에 관련된 시화(詩話)를 따로 접할 수 없어서 정확한 시작의도를 알 수 없지만 이 시에서 우리가 읽게 되는 것은 그의 고독한 고뇌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개혁의지의 끝없는 좌절로 점철되어 있다는 침통한 역사관입니다.
  
다음은 유명한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입니다. 전문(全文)은 너무 길기 때문에 앞부분만 소개합니다. 해석만 하겠습니다. 이 글의 함의(含意)는 여러분 각자가 읽어내기 바랍니다.
  
郭橐駝不知何始名 病僂隆然伏行 有類橐駝者 故鄕人號曰駝
駝聞之 曰甚善 名我固當 因捨其名 亦自謂橐駝云
其鄕曰 豊樂 鄕在長安西
駝業種樹 凡長安豪家富人爲觀游 及賣果者 皆爭迎取養視
駝所種樹 或遷徙無不活且碩茂 蚤實而蕃
他植木者 雖窺伺傚慕 莫能如也
有問之對曰 橐駝非能使木壽且孶也 以能順木之天 以致其性焉爾
凡植木之性 其本欲敍 其培欲平 其土欲故 其築欲密
旣然已勿動勿慮 去不復顧
其蒔也若子 其置也若棄 則其天者全 而其性得矣
故吾不害其長而已 非有能碩而茂之也
不抑耗其實而已 非有能蚤而蕃之也
他植木者不然 根拳而土易 其培之也 若不過焉 則不及焉
苟有能反是者 則又愛之太恩 憂之太勤
旦視而暮撫 已去而復顧
而甚者爪其膚以驗其生枯 搖其本以觀其疎密
而木之性日以離矣
雖曰愛之 其實害之 雖曰憂之 其實讐之
故不我若也 吾又何能爲哉

  
“곽탁타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곱사병을 앓아 허리를 굽히고 걸어다녔기 때문에 그 모습이 낙타와 비슷한 데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탁타’라 불렀다. 탁타가 그 별명을 듣고 매우 좋은 이름이다, 내게 꼭 맞는 이름이라고 하면서 자기 이름을 버리고 자기 역시 탁타라 하였다.
그의 고향은 풍악으로서 장안 서쪽에 있었다. 탁타의 직업은 나무심는 일이었다. 무릇 장안의 모든 권력자와 부자들이 관상수(觀賞樹)를 돌보게 하거나, 또는 과수원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과수(果樹)를 돌보게 하려고 다투어 그를 불러 나무를 보살피게 하였다. 탁타가 심은 나무는 옮겨 심더라도 죽는 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잘 자라고 열매도 일찍 맺고 많이 열었다. 다른 식목자들이 탁타의 나무 심는 법을 엿보고 그대로 흉내내어도 탁타와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자라게 하거나 무성하게 할 수가 없다. 그 결실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일찍 열매맺고 많이 열리게 할 수가 없다.
다른 식목자는 그렇지 않다. 뿌리는 접히게 하고 흙은 바꾼다. 흙 북돋우기도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한다. 비록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지나치고 그 근심이 너무 심하여 아침에 와서 보고는 저녁에 와서 또 만지는가 하면 갔다가는 다시 돌아와서 살핀다.
심한 사람은 손톱으로 껍질을 찍어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사하는가 하면 뿌리를 흔들어 보고 잘 다져졌는지 아닌지를 알아본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나무는 본성을 차츰 잃게 되는 것이다.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고전강독 끝>
  

 

 

오늘로 ‘신영복 고전강독’을 마칩니다. 프레시안이 창간되던 2001년 9월 24일 시작, 장장 1백66회를 계속하며 진한 감동 속에 화제가 된 명강의였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프레시안 독자를 위해 강의 내용을 다시 원고로 꼼꼼히 정리해주신 신영복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처음부터 끝까지 열독하며 뜨거운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신영복/성공회대 교수

출처 : hgmja
글쓴이 : 나그네 원글보기
메모 :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자가어  (0) 2009.01.28
삼국지연의  (0) 2009.01.28
[스크랩] 채근담(번역)  (0) 2009.01.28
[스크랩] 채근담 전집 해설  (0) 2009.01.28
[스크랩] 제5강 주역(周易)  (0) 2009.01.28
728x90

채근담

 

인간이 가장 고귀한 것은 죽은 뒤의 이름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보는 데는 세련 된 겉모양 보다 내면의 진실성이 중요하다.

마음은 밝은 태양처럼 활짝 들어내고, 재능은 주옥처럼 깊이 감추어야 한다.

최고의 결백은 악조건 속에서 악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귀에 거슬리는 바른 말은 몸과 마음을 닥는 숫돌이다.

조화로운 기운, 즐거운 마음은 그의 인생을 즐겁게 한다.

최고의 도덕가는 별난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한가로운 때엔 긴장된 마음가짐이 있어야하고, 바쁜 때엔 여유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만물이 잠든 고요한 밤은 자기 본연의 참마음을 관찰하여 밝히는 가장 중요한 때다.

득의한 때일수록 자신을 자주 돌아보고 실패한 때일수록 더욱 분발하여야 한다.

명아주국이나 비름나물 속에 마음이 맑아지고, 화려한 의복이나 맛있는 음식 속에 절조는 살아진다.

살아 서는 불평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은혜를 남기도록 한다.

겸양의 덕은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다.

큰사업을 이룬 것은 없어도 명리의 속된 욕정에서 벗어나면, 그가 곧 명사요 성인이다.

벗을 사귀는 데는 의협심이 있어야 하고, 사람이 되어서는 순결한 마음이 필요하다.

총애와 이익은 남보다뒤지는 것이 좋고, 덕행과 공업은 남보다 앞설수록 좋다.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은 곧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요, 남을 이익되게 하는 것은 곧 나를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자랑은 큰 공을 무색하게 하고, 뉘우침은 큰 죄를 녹여버린다.

좋은 이름은 남에게 돌리고 나쁜 이름은 스스로 책임지도록 한다.

겸손한 마음가짐에는 조물주도 시기않고 귀신도 해치지 않는다.

참 부처와 참 도는 우리의 날마다 생활하는 가운데 있다.

사람은 어느 환경에 처하든 가운데를 잡아 운용할수 있는 중정한 마음을 길러야 한다.

남의 허물을 나무라는 데는 너무 엄하게 말고, 사람을 다스리는 데는 너무 높게 말아야 한다.

깨끗한 것은 더러운데서 생기고, 밝은 것은 어두운 곳에서 생긴다.

객기를 눌러야 정기가 드러나고, 망녕된 마음을 없애야 참마음이 나타난다.

정욕이 가는 대로 따르다 보면, 때로 만족은 있으나 남는 것은 후회로움 뿐이다.

국가의 요직에 앉아 있어도 산림의 취미만은 항상 간직하고 있어야 하며, 산림 속에 묻혀 있어도 나랏 일만은 외면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공덕은 한 평생 과실이 없는 것이요, 진정한 은덕은 원망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공상한 기풍이라 하더라도, 너무 치나쳐서 그것이 인간과 만물에 이익을 줄 수 없는 것이라면 전연 무가치한 것이다.

일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는 처음으로 돌아가 원인을 찾아보고, 일이 한창 잘 될 때는 말로를 생각해야 한다.

부귀한 사람은 의당 마음을 너그럽고 후하게 써야하고, 총명한 사람은 마땅히 자기의 재주를 안으로 감추어야 한다.

낮은 자리에 있어 보아야 높은 자리가 얼마나 위험한 자리인가를 알게 되고, 침묵을 기른 뒤에야 말많은 것의 수선스러움을 알게 된다.

부귀공명에 대한 마음을 버려야 범인을 벗어날 수 있고, 도덕인의에 얽매이지 않아야 성인이 될 수 있다.

마음을 좀먹는 것은 이욕이 아니라 사견을 고집하는 것이요, 도의 방해물은 소리와 색이 아니라 잘못 뚫린 총명이다.

한 걸음을 물러서는 법과 삼분을 양보하는 덕을 지니면 무상한 인정 험한 세상길을 탈없이 걸어갈 수 있다.

소인을 대하는 데는 엄하게 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미워하지 않기란 어렵고, 군자는 공경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알맞게 공경하기란 어렵다.

천지의 정기는 질박하고 엄숙한 상태에 머물고, 인간의 간교한 슬기와 총명에 사라진다.

마귀를 항복받으려면 자기의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고, 빗나간 마음을 잡으려면 객기를 눌러야 한다.

자제를 기르는 데는 바깥출입을 엄하게 하고, 벗 사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욕정으로 가는 길은 쉽고 편리하지 발을 들여서는 안 되고, 바른 도리를 걸어가는 길은 어렵고 불편하지만 물러서서는 안 된다.

군자의 마음은 어느 한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정한 자리에 있어야 한다.

저쪽에서 부를 내세우면 나는 인을 내세울 것이요, 저쪽에서 벼슬을 내세우면 나는 의를 높이 치켜 올릴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높은 지조와 한걸음 물러서는 겸양의 덕이 있어야 안락할 수 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오로지 한 길로 꿰뚫어 공명을 염두에 두지 않아야 그 깊이에 들 수 있다.

사람마다 큰 자비심과 진정한 취미가 갖추어져 있다. 다만 사욕과 사정 때문에 선과 악의 엄청난 차이를 낼뿐이다.

도덕을 닦는 데는 목석과 같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이 필요하고, 정치를 하는 데는 뜬구름과 같은 권세와 부귀에 애착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잠자는 혼까지도 온화한 기운에 젖어 있고, 마음이 흉한 사람은 그 목소리과 웃으며 하는 말까지도 살기가 가득하다.

겉으로 나타나는 크고 자은 허물은 모두 캄캄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가장 경계할 것은 캄캄한 속에서 일어나는 부끄러운 생각들이다.

복으로 말하면 한평생 무사한 것보다 더한 복이 없고, 화로 말하면 일에 마음 시달리는 것보다 다한 화가 없다.

잘 다스려지는 세상에서는 방정한 것이 좋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둥근 것이 좋고, 말세에서 살 때는 방정과 둥근 것을 아울러 쓰는 것이 좋다.

입은 은혜는 생각하되 베푼 은혜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자기 허물은 잊을 수 없으되 원한만은 잊어야 한다.

마음 없이 베푼 은혜는 한 말의 곡식이라도 천만 석이요, 갚음을 염두에 둔다면 천만 금이라도 한푼의 공도 없다.

고르지 못한 세상에서 어찌 나 혼자 좋은 것만 갖추며 내 생각대로 하랴! 내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서로가 맞추어 나가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책을 읽으면, 그것을 주어다가 사리사욕을 채우고 자기의 결점을 덮는데 이용한다.

사치하는 사람은 부자이면서 즐 부족에 허덕이고, 검소한 사람은 가난하면서도 늘 여유가 있다.

독서에 성현의 뜻을 보지 못하면 문자의 노예요, 학문에 실천이 없으면 입으로만 하는 참선이다.

인간의 낡은 지혜로 엮여진 무가치한 책과 요사스런 음악보다,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본성의 참의 문장을 읽고 참의 음악을 득을 줄 알아야 한다.

인생의 고락은 돌고 도는 것, 뜻대로 안된다고 슬퍼할 것이 없고, 뜻대로 잘 된다고 기뻐할 것도 없다.

도덕으로 얻은 부귀와 명예는 산림 속의 꽃과 같고, 공업으로 얻은 것은 화분의 꽃과 같고, 권력으로 얻은 것은 화병의 꽃과 같다.

좋은 환경에 있는 군자가 훌륭한 계획을 세워 좋은 사업을 이룩할 생각을 않는다면, 백년을 살아도 값있게 사는 하루만 못하다.

학문을 하는 이는 엄격한 가운데 온화한 기상을 잃지 않음으로써 만물의 생에 이바지한다.

참말로 청렴한 것은 청렴이란 이름조차 없으며, 교묘한 재주는 재주를 부리지 않는다.

기울게 만든 기기는 가득차면 엎어지고, 돈 넣는 벙어리는 속이 빔으로써 소용이 된다. 군자는 가득한 것을 피하고, 텅 빈 상태에서 논다.

공명성과 객기의 발동으로 얻은 사업은 아무리 큰 결과를 가져왔다 하더라도, 모두가 속된 것이요, 무익한 것이다.

마음이 밝으면 캄캄한 방 속도 푸른 하늘이요, 마음이 어두우면 밝은 태양 아래에서도 귀신이 나온다.

이름도 없고 지위도 없는 즐거움보다 귀한 즐거움은 없다.

악을 하되 두려운 줄을 알면 착한 길로 들어설 여지가 있고, 선생을 하되 위선에 흐르면 선 속에도 악의 뿌리가 자란다.

어떠한 영웅호걸도 천지자연의 조화의 손바닥 위에서 웃고 울다 갔지만, 오직 순경 역경을 자유로이 받아넘기는 군자만의 예외다.

지나치거나 모자라거나 간에 중정의 자리에서 벗어난 사람은 원대한 사업을 도모할 수 없다.

복은 기쁜 정신을 기름으로써 불러들일 수 있고, 화는 남을 헤치는 기운을 버림으로써 물리칠 수 있다.

열마디 말에 아홉이 맞아도 훌륭하다 할 수 없다. 맞지 않은 나머지 한마디가 많은 허물을 몰고 오기 때문이다.

마음이 쌀쌀하면 받는 복도 그만큼 쓸쓸하고 엷고, 마음이 따뜻하면 받는 복도 그만큼 두텁고 오래간다.

바른 도리에의 길은 지극히 너그러워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크게 키워주고, 인욕애의 길은 지극히 좁아, 눈앞이 다 가시덤불이요 진흙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에 수없이 단련한 끝에 얻은 복이라야 오래가고, 의문과 믿음에 수없이 반복 연구한 끝에 얻은 지식이라야 참지식이다.

사욕을 쓸어내고 마음을 텅 비어두어야만, 의리의 참 마음이 들어와 살고, 의리의 마음으로 꽉 채워 두어야 물욕이 들어오지 못한다.

더러운 땅에는 초목이 많이 나고,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

몸에 병이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마음에 번민이 없는 이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옛 사랑은 금은보화를 보배로 여기지 아니하고, 탐욕하지 않는 마음으로 보배를 삼았다. 탐욕은 사람의 품위를 깨뜨리기 때문이다.

보고 들리는 것은 다 바깥 도적이요, 정욕과 의식은 안 도적이다. 그러나, 주인공인 본심만 제자리에 깨어 있다면 이것들은 다 나의 심복이다.

새로운 사업계획보다 현업에 더욱 힘쓰고, 지나간 실수에 사로잡히기보다 앞으로 실수 없기에 마음을 다한다.

사람의 기상은 높고 너르되 소홀한 데 흘러서는 안되고, 취미는 깨끗하되 메말라서는 안된다.

군자는 한 번 있었던 일은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 일이 오면 오는 대로 응하고, 가면 가는데로 잊어 마음을 항상 비워둔다.

결백하면서 사람을 용납할 수 있고, 인정이 풍부하면서 결단을 잘 내리고, 총명하면서 까다롭지 않고, 정직하면서 남을 바로 잡는데 지나치지 않는다.

사람은 먹으나 굶으나 사람으로서의 품위와 지조만은 한결같이 지켜 나가야 한다.

한가하다고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아니하며, 고요하다고 정신적인 활동을 끊지 아니하며,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속이고 숨기지 않는다.

바른 도리에의 길은 삶이 있고, 인욕에 이 길은 죽음이 있다. 혹 자신이 인욕의 길 위에 있거든 곧 바로 도리의 바른 기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마음의 참 본체를 보고, 마음의 진정한 활동을 알며, 마음의 참 취미를 얻는 것, 이것은 도를 깨닫는 최상의 방법이다.

즐거운 환경 속에서의 즐거움은 참 즐거움이 아니다. 헐벗고 헐먹는 구차한 환경 속에서도 더덕과 더불어 산다는 즐거움, 이것이 참 즐거움이다.

남을 위하여 자기의 이익을 버렸으면 그것으로 그쳐야 한다. 남의 딱한 처지에 인정이 넘쳐 은혜를 베풀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하늘이 만일 내게 복을 적게 주거든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나의 덕을 두터이 쌓아 나가리라. 그리하여 복이 아니 오지 못하도록 하리라.

하늘은 사람들이 원하고 원치 않는 것에는 아랑곳없이 욕심없는 마음에 복을 주고, 욕심많은 마음에 복을 덜어간다.

노래를 팔던 기생도 늙바탕에 어진 남편 만나 살면 다 묻히고, 정절 부인도 늙바탕에 정조 한 번 잃게 되면 남는 것은 치욕뿐이다.

평민도 덕을 심고 은혜를 베풀면 지위없는 왕공재상이요, 놓은 벼슬아치도 권세나 탐내고 임금의 총애나 판다면 벼슬가진 걸인이다.

우리가 누리는 오늘의 행복은 조상이 피땀흘려 쌓으신 덕택이요, 우리가 짓는 오늘의 사업은 훗날 자손의 행복의 발판이 된다.

군자의 위선적인 행위는 소인의 드러내놓고 하는 악행보다 나을 것이 없다.

집사람에게 허물이 잇거든 슬며시 돌려서 타이르며, 마치 봄바람이 언 땅을 풀어주듯 서서히 마음을 돌리기를 기다린다.

내 마음에 결함이 없으면 세상에 결함이 절로 없어지고, 내 마음이 관대하면 험악한 인정이 따로 없다.

군자는 세상 사람이 싫어하거나 의심한다고 자기의 지조와 도덕적인 행위를 바꾸지 않는다.

역경에서의 괴로움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 침과 약돌이요, 순경에서의 즐거움은 사람의 명치끝을 노리는 창, 칼이다.

부귀와 권세에 대한 불같은 욕망에 청냉한 기미로 조화를 아니하면 결국 자신을 불사르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 한 번 참되면 오월에 서리도 내리게 할 수 있고, 성곽도 무너뜨릴 수 있으면, 금석도 꿰뚫을 수가 있다.

훌륭한 문장은 기교를 부리지 않는 것이요, 성인은 남다른 언어를 쓰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몸은 잠시 빌려받은 환상과 같은 몸, 부귀공명은 헛된 꿈, 만물은 평등무차별한 것, 이 이치를 알아야 천하를 짊어지고 나갈 수 있다.

입에 떡이나 좋은 음식은 위장을 해치는 독약이요, 마음에 썩 유쾌한 일은 덕을 잃게 하는 매개물이다. 그러나, 반쯤에서 그치면 탈이 없다.

남의 사소한 잘못과 사사로운 비밀, 그리고 남의 지나간 악행에 관대해야 덕을 기를 수 있다.

몸가짐을 가벼이 하면 한가롭고 안정된 날이 없고, 마음을 무겁게 쓰면 활발한 기능을 잃는다.

이 몸은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몸, 죽는 날까지 즐겁게 그리고 값있게 마쳐서, 이 세상에 왔다간 발자취를 굵직하게 남겨야 한다.

원망은 은혜로 말미암아 생긴다. 특별한 은혜를 심어 한편으로 원망을 사느니 보다, 은혜와 원망을 초월하여 다같이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늙어서 오는 질병은 젊었을 때 스스로 지은 것이요, 쇠한 뒤의 겹친 불행은 한창 왕성할 때 지어 놓은 것이다.

새로운 인연을 맺는 것보다 옛 벗과의 우정을 더욱 두텁게 하는 것이 훨씬 정이 길다.

공평한 정론에 반대의 손을 들면 만세토록 부끄러움을 남기게 한다.

내 뜻을 굽히면서까지 남에게 환심을 사기보다는 내 몸을 곧고 바르게 하여 죄없이 남에게 미움을 받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부모형제의 변을 당해서는 더욱 조용하고 침착해야 하고, 친구의 과실을 보았을 때는 적절한 충고를 주어야 한다.

진정한 영웅은 사소한 일을 빠뜨리지 아니하고, 홀로 있을 때에 기만하거나 숨기지 아니하고, 망해 가는 급박한 때에 자포자기하지 않는다.

천금을 주고도 원망하는 마음을 살 수가 있고, 찬 밥 한 그릇으로도 영원한 은혜를 심어 줄 수가 있다.

자기의 뛰어난 재주와 덕과 지조를 안으로 감추어 충실하게 키우면서, 겉으로 어리석은 양 평범하게 걸어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처세법이다.

군자는 번영한 그 때에 앞으로의 환란을 미리 염려하고, 영락한 때엔 백번이라도 참고 견디며 기필코 이것을 성공으로 돌린다.

기이한 것에 마음이 쏠리는 사람은 원대한 식견이 없고, 높은 지조를 세워 혼서 나아가는 사람은 항구성이 없다.

불간은 노여움, 물같은 욕심이 끓어오를 때는 얼른 참 마음을 불러 일으켜 생각을 한 바탕 궁글리면 모두가 참 마음과 하나가 된다.

사물을 보는 눈은 공정해야 하고, 일은 자기의 역량을 저울질한 뒤에 남의 단점을 들추지 말며, 나 보다 나은 이를 시기하지 말아라.

남의 단점은 간곡히 타이르며 감싸주어야 한다. 만일 남의 단점을 들어내어 떠벌린다면 이는 자기의 단점으로 남의 단점을 공격하는 셈이다.

음흉한 사람에게는 마음을 주지 말고, 무엄한 사람에게는 말을 건제지 말라.

마음이 혼미속에 빠져들거든 마음을 깨워 일으켜야 하고, 마음이 긴장되어 굳어 있거든 마음의 고삐를 풀어놓아야 한다.

하늘이 노하여 천둥 벼락 치다가도, 한 번 지나가 버린 뒤엔 흔적이 없듯, 사람도 한 번 있었던 일을 마음에 오래 담아 두어서는 안 된다.

지식이란 인욕의 마귀를 비쳐보는 밝은 구슬이요, 인내의 힘은 인욕의 마귀를 베어 버리는 지혜의 칼이다.

속임을 당하여도 말로 나타내지 아니하고, 업신여김을 받아도 태연할 수 있는 이 가운데, 무궁한 뜻이 있고 또 무궁한 활동이 가능하다.

인생의 역경과 곤궁은 값있는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한 불가마와 쇠망치와 같은 것이다.

천지가 사시의 운행을 어김없이 하여 만물을 길러주듯, 사람도 희로애락의 정을 바르게 하여 만물의 생에 이바지함이 있어야 한다.

남을 해치는 마음은 있어서 안되지마는 해악을 예방할 만한 마음은 있어야 하고, 차라리 속을 지언정 남의 마음을 지나치게 넘겨짚는 버릇은 좋지 못하다.

옳다고 생각되는 일은 끝까지 밀고 나가되 공론을 무시하지 말며, 사사로운 은혜로 큰 덩치를 손상치 말며, 공론을 빌어 사정을 쾌하게 마라.

친하고 싶은 어린이가 있거든 미리 그를 찬양하지 말고, 버리고 싶은 악인이 있어도 미리 그 뜻을 말 내지 않는 것이 좋다.

낯빛같이 빛나는 큰 절의는 구석진 곳에서 길러져 나오고, 천지를 굴릴 만한 큰 경륜은 지극히 세심한 데에서 우러나온다.

자애와 효도와 우애와 공경의 아름다운 덕에 이해 관계가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이것은 남남끼리 은혜를 팔고 사는 장터와 다를 것이 없다.

내가 유독 고운 것을 세우지 않는다면, 아무도 나를 밉다 아니 할 것이다. 곱고 미운 것은 상대적인 것, 참된 가치는 대립을 초월한 무차별한 곳에 있다.

변덕은 빈천한 사람보다 부귀한 사람에게 더욱 심하고, 질투심은 모르는 사이보다 친한 사이에 더욱 심하다.

공로와 과실은 조금이라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은인과 원수만은 너무 두드러지게 밝힐 것이 못된다.

작위도 너무 높이 오르면 위태롭고, 행실도 너무 높게 가지면 헐 뜯긴다.

악은 숨어 있기를 싫어하며, 선은 드러나기를 싫어한다. 따라서 숨은 악만큼 무서운 것이 없고, 숨은 선만큼 큰 공덕도 없다.

덕은 재주의 주인이요 재주는 덕의 노복이다. 재주는 있는데 덕이 없으면, 마치 주인 없는 집에 노복들만이 일을 처리하는 것과 같다.

간악한 무리와 요행을 바라는 아첨꾼을 제거하려면 반드시 단 한 곳 도망할 길을 터놓고 몰아내야 한다.

궂은 일은 내가 하고, 좋은 일은 남에게 양보한다.

물질로 남을 돕는 것만이 돕는 것이 아니다. 좋은 말로 사람들을 어리석음에서 심한 곤궁에서 풀려나게 한다면, 이 또한 한없는 공덕이다.

굶주려 춥고 배고프면 돈 많은 사람에게 붙고 배불러 아쉬움이 없으면 떨어져 뒤도 안 돌아보는 것이 세정이다.

사물을 보는 눈은 냉정해야 하고, 사물에 처하는 마음은 철석같이 굳어야 한다.

덕은 도량의 크기에 따라 쌓이고, 도량은 식견의 높이에 따라 넓어진다.

모든 소리가 다 잠든 한 밤과 이른 새벽, 고요히 자신이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 몸은 온전히 물욕과 정욕에 수갑 채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반성은 덕을 길러 주는 보약이요, 원망은 덕을 깎아 내리는 칼이다.

공명과 부귀는 세상을 따라 옮겨가지만, 사람의 기개와 절조는 영원한 것으로 천년이 하루같이 빛나는 것이다.

천지자연의 무궁한 조화 속에서 인간의 작은 지혜를 어떻게 믿고서 잔꾀를 부린단 말인가!

인간에게는 진정한 원활한 활동의 멋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세상을 자유로이 건넬 수가 있다.

사람의 마음은 거울과도 같아서 때와 먼지만 끼이지 않는다면 항상 맑고 밝다.

한 생각으로 인도를 등지게 되고, 한 마디 말이 인화를 깨며, 한가지 일로 자손에게 재앙을 물리는 수가 있다.

성급하게 하는 일은 남의 노여움을 사기 쉽고, 사람을 가르치되 심하게 다잡으면 도리어 빗나가기 쉽다.

아무리 높은 절의요 교묘한 문장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이 덕으로써 닦여진 것이 아니면, 한점의 가치도 없다.

한창 인기 좋은 때 물러나고, 남보다 뒤만큼 몸을 두는 것은 인생에 다시없는 처세술이다.

덕은 사소한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서 쌓이고, 은혜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데 의의가 있다.

도시 사람보다 산중 늙은이를 사귀는 것이 좋고, 남의 험담을 늘어놓기보다 옛 사람의 아름다운 언행을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다.

모든 사업은 덕으로 기초공사를 닦은 위에 세우지 아니하면, 성공도 그 한때뿐이다.

번영의 뿌리는 올바른 정신이니, 이것을 심지 않고 자손의 번영은 기대할 수 없다.

진리의 터전은 자기에게 있으니 밖에서 구걸하지 말며, 자기에게 있는 재능만이 참이 아니니 자랑은 말라.

도란 공공물이니 사람마다 이 길을 밟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요, 학문이란 가정에서의 끼니라, 누구든 배워서 실천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남을 잘 믿는 사람은 자기 마음이 성실한 때문이요, 남을 의심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 사기성이 있기 때문이다.

후덕한 마음은 만물을 생생하게 길러주는 봄바람이요, 모진 마음은 만물을 얼려 죽이는 북풍 찬바람이다.

선악간에 자기가 뿌린 씨는 모르는 사이에 어김없이 열매를 맺는다.

옛 벗에 대한 정은 더욱 새롭게 하고, 숨은 일일수록 명백하게 하며, 불쌍한 사람일수록 정중하게 대하여야 한다.

근면과 검소! 군자는 이것을 도덕을 실천하기 위한 표적으로 삼고, 소인은 이것을 사리사욕을 꾀하는 도구로 삼는다.

일을 착수할 때는 반드시 생각을 거듭하여 전진하는 수레바퀴가 되어야 한다.

남의 허물에는 관대하고 자기의 허물에는 엄격하며, 자기의 곤궁은 무던히 참아 나가되 다른 사람의 곤궁만은 차마 볼 수 없어야 한다.

뛰어난 사람이란 현실에 참여하면서 현실의 온갖 이욕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은혜는 엷은데서 부터 차츰 두텁게 주고, 위엄은 엄격한데서 부터 차츰 관대하여야 한다.

마음을 비워두면 지선의 본성이 나타나고, 생각을 깨끗하게 하면 마음이 저절로 맑아진다.

남이 나를 존경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호화로운 겉모양이요, 남이 나를 업신여기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초라한 겉모양이다.

죽임을 가엾이 여기고 삶을 즐거워하는 인애하는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라 할 수 없다.

사람이 인욕을 버리고 인의예의 타고난 도덕성을 극진하게 하면, 마침내 하늘의 큰 덕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다.

한가한 때일수록 초롱초롱한 정신을 가져야 하고, 바쁜 때일수록 마음에 고요를 찾아야 한다.

이해에 대한 생각은 사전에 의논할 일이요, 일단 일을 착수한 이상은 아주 잊어버려야 한다.

군자는 몸가짐을 엄격하고 명백하게 하며, 마음가짐을 관대하에 하여, 어떠한 소인에게도 욕을 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

군자는 절의와 도덕과 학문을 다하되 온화한 기운으로 현실에 처하여 누구에게도 비방이나 허물을 사는 일이 없다.

사람은 다 선적인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지성으로 선도하면 어떠한 악인도 선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

자비심은 천지간의 화평한 기운을 일으키고, 결백한 마음은 맑고 향기로운 이름을 남긴다.

기괴한 행동은 재앙의 씨앗이요, 평범한 덕행은 화평의 근원이다.

험악한 인정과 불우한 세상에서 인생의 가시덤불을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은 참을성뿐이다.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가치는 옥같이 맑고 깨끗한 마음의 본체를 잃지 않는데 있다.

바쁜 속에서 마음의 한가로움을 얻고, 시끄러운 속에서 마음의 고요를 얻을 수 있어야 사물에 걸릴것이 없다.

자기의 본심을 어두워지지 않도록 닦으며, 남의 마음을 나를 위하여 다하게 하지 말며, 짐승을 부리되 가혹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

공평과 청렴은 벼슬살이에 보배요, 관용과 검소는 살림살이에 보배다.

부귀한 때는 빈천한 처지의 아픔을 생각하고, 젊고 건강한 때는 늙고 병들때의 쓰라림을 생각해야 한다.

몸가짐은 너무 희고 깨끗하게 해서는 안되고,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선악을 너무 분명히 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소인과 맞서지 말고, 군자에게 아첨하지 말라.

보통사람의 욕심병은 고칠 수 있으나 이치를 고집하는 지식인의 병은 고치기 어렵다.

수양은 쇠붙이를 다루듯 단련에 단련을 거듭하고, 일은 무거운 화살을 놓듯 천만번을 생각한 끝에 실행해야 한다.

차라리 소인의 미움을 받을지언정 좋아하는 처지가 되지 말고, 군자의 심한 꾸지람을 받을지언정 관용받는 처지가 되지 말라

도덕의 테두리 밖에서 자행하는 드러난 악행은 미치는 해독이 얕고, 더덕의 테두리 안에 숨어서 저지르는 악행은 미치는 해독이 깊다.

은혜는 커도 갚지 않으면 원한만은 미미한 것인데도 갚고야 말며, 남 헐뜯는 말엔 덮어놓고 동조하면서 남 칭찬하는 말엔 끝없이 냉정한다.

참소하는 말은 태양을 가리는 구름과 같아서 곧 걷히지만, 아첨꾼의 달콤한 말은 사람의 덕을 털어내는 무서운 적이다.

산이 너무 높으면 나무가 없고, 사람이 너무 고상하면 외롭다.

사업에 거듭 성공하는 사람은 대개 바르고 원만한 사람이요, 일마다 실패하는 사람은 고집불통인 사람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세속에 물들어서도 안 되고, 세속과 동떨어진 행위를 해도 안 된다.

해가 서산에 기울 즈음이면 저녁 노을로 아름답게 장식하듯, 군자는 만년에 더욱 분발하여 자기 인생의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해야 한다.

좋은 재주를 안으로 감추며 병든 듯 어리석은 듯 하는 것은, 때가 오면 크게 부리기 위함이다.

검소의 미덕이 지나치면 더러운 구두쇠가 되고, 겸양의 덕이 지나치면 간사한 행동이 된다.

역경의 근심과 순경을 기뻐하지 말며, 오래 평안함을 믿지 말며, 처음 고행을 두려워 마라.

술잔치 잦은 집치고 모범 가정이 없고, 이름 좋아하는 사람치고 높은 인사가 없고, 이름과 지위에밝은 사람치고 모범관리가 없다.

보통 사람은 욕망의 충족을 즐거움으로 삼고, 통달한 사람은 욕망을 억제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다.

만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큰 욕심을 삼가고, 위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마지막 고비에서의 경솔한 행동을 삼가야 한다.

사람은 이지적인 차가운 눈이라야 시비 선악에 대한 바른 판단을 얻을 수 있다.

마음이 넉넉하면 하는 일도 넉넉하게 풀리고, 마음이 옹색하면 하는 일도 옹색하게 죄어든다.

남의 악한 소문에 얼른 동조하지 말고, 착한 소문에도 냉정하게 그 진실여부를 살펴라.

성질이 조급하면 되는 일이 없고, 마음이 화평하면 일마다 순조롭다.

사람을 모질게 부리면 착실한 일꾼까지 떠나가고, 벗을 함부로 사귀면 아첨꾼까지 모여든다.

아름다운 꽃을 만나거든 눈을 고상하게 뜨고, 위험한 곳을 만나거든 얼른 머리를 돌려라.

절의는 조화로써 분쟁의 길을 막고, 공명은 겸양의 덕으로써 질투의 눈을 막아야 한다.

관직에 있을 때는 마음속을 쉽게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하고, 물러가 고향에 있을때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둔다.

덕망이 높은 사람을 두려워하면 방자한 마음이 안 생기고, 서민을 두려워하면 횡포한 마음이 없어진다.

역경에 허덕일 때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생각하고, 마음이 태만해질 때는 나보다 나은 사람을 생각한다.

마음이 기쁘다고 기쁜 바람에 가벼이 일을 떠벌리지 말고, 마음에 권태증이 난다고 하던 일을 중도에서 버려서는 안된다.

독서에는 문자를 읽지 말고 사상을 읽어야 하며, 사말을 관찰하는 데는 형상에 메이지 말고 실상을 파고 들어야 한다.

현능한 사람이 되어 어리석은 사람을 가르치기는커녕 눌러 보며, 부귀한 사람이 되어 곤궁한 사람을 구제하기는커녕 업신여긴다면, 이는 천벌을 받을 인생이다.

마음 가운데 욕심이 없어 자연에서 노는 사람이라야 함께 학문도 논할 수 있고, 공업도 세울 수가 있다.

입은 마음의 문이요, 의지는 마음의 발이다. 문단속 말 단속을 엄밀히 함으로써 속마음을 지키며, 그릇된 길을 비껴갈 수 있다.

남의 허물을 꾸짖을 때는 앞으로 허물없기를 일깨워 주고 자기 허물에 대해서는 허물이 있는가를 항상 돌아본다.

오늘의 자제들은 내일의 어른이요, 오늘의 수재들은 내일의 일꾼이다. 어릴 때 단련하지 않으면 큰 그릇으로서의 기능을 다 할 수 없다.

군자가 근심하는 것은 환난이 아니라 즐거운 처지요, 군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높고 귀한 사람이 아니라 의지없는 외로운 사람이다.

곱고 쉬 지는 것이 담박하면서 오래 가는 것만 못하고, 일찍 열매 맺는 것이 늦게 성취되는 것만 못하다.

사람은 때로 마음을 고요한 곳에 두고, 인생의 참된 경계와 마음의 본체가 무엇인가를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명리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기조차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명리에 대한 생각을 다 잊지는 못한 사람이다.

많은 재주를 지닌 것보다는 무능한 상태 그대로 주어진 참 마음을 온전하게 간직하는 것이 훨씬 값있는 일이다.

오색 아름다운 분단장은 덧없는 거짓모습이요, 발가벗은 가을의 쓸쓸한 풍경이 바로 천지와 인생의 변함없는 참 모습이다.

세월은 본래 긴 것을 이욕에 쫓기기는 사람들이 저 혼자 짧다 하고, 세상은 본래 끝없이 너른 것을 이익을 쪼개는 사람들이 저 혼자 좁다 한다.

아름다운 풍취는 주먹돌 사이에서도 얻을 수 있고, 훌륭한 경치는 가난한 집 대나무 지붕 밑에서도 볼 수 있다.

인생은 꿈이요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꿈 가운데의 꿈이다. 고요한 밤에 종소리를 들으면 꿈속의 꿈에서 깨어나 인생의 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새소리 벌레소리는 다 이 마음을 전하는 비결이요, 꽃잎 풀빛은 다 진리를 읽는 훌륭한 문장이다.

책을 읽되 천지만물의 글자 없는 책을 읽고, 거문고를 타되 천지자연의 줄 없는 거문고를 탈 줄 알아야 참 진리를 체득할 수 있다.

욕심없는 마음은 가을 하늘과 맑게 개인 바다요, 내 옆에 거문고와 책만 있으면 그 곳이 바로 신선이 사는 곳이다.

술에든 부귀영화든 한 번 크게 취했다가 깨고 나면, 남는 것은 허무와 슬픔뿐이다.

사물의 깊은 뜻을 깨달아 알면 앉아서 천하의 명승을 구경할 수 있고, 흥망성쇠의 이치를 간파하면 천고의 영웅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다.

산하와 대지는 하나의 작은 티끌이요, 인생은 티끌 속의 티끌이며, 이 몸은 하나의 물거품과 그림자요 부귀공명은 그림자 밖의 그림자다.

사람의 일생은 눈 깜짝할 사이의 부싯돌 불빛이요, 사람이 명리를 다투는 것은 달팽이 뿔 위에서 영토 싸움을 하는 것과 같다.

탐욕과 번뇌를 끊고 공한 자리로 돌아가되, 제도 중생에 이바지할 수 있는 산 공이어야 한다.

은퇴하고 싶을 때에 그 즉시 은퇴하면 은퇴할 수 잇지만, 세 속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린다면 끝내 은퇴하지 못하고 만다.

사람은 냉정한 상태로 되돌아온 뒤에야, 한창 열을 내어 뛰어다니던 지나간 일이 부질없는 일이없었음을 뉘우치게 된다.

부귀를 뜬구름 보듯하되 세속을 등져서는 안되고, 산수를 아무리 좋아하되 산수병에 걸릴 만큼 극단을 달려서는 안된다.

세상 사람들이 부귀공명에 다 취해 있어도 나만은 혼자 개어 대자유의 경계에서 놀리라.

마음이 한가로운 사람은 하루가 천년이요, 생각하는 것이 너르고 큰 사람은 말만한 방이 저 하늘만큼이나 너르다.

날마다 사욕을 덜고 덜면 자연의 대도에 합하게 되고, 날마다 물욕을 잊고 또 잊으면 무아경에 이르게 된다.

현실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신선의 경계요, 항상 부족에 걸근거리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범속에 세계다.

권세가에 붙어 살다 겪는 새앙은 더없이 비참하고도 빠르며, 욕심없는 경계의 한가로운 취미는 더없이 맑고도 오래 간다.

소나무 시냇가를 거닐며, 대나무창 아래 책을 베고 높이 누었다.

앞을 다투면 길은 자연 좁아지고, 한 걸음 사양하면 길은 그만큼 너르고 평탄해진다.

한가할 때 마음을 닦아두어야 바쁜때 마음의 동요가 없고, 살았을 때 생사의 이치를 터득해 놓아야 고요한 마음으로 죽음에 임할수 있다.

은사의 마음에 영예와 치욕이 따로 없고, 인의도덕에 인정의 덥고 찬 것이 따로 없다.

가난이라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가난에 대한 근심하는 마음을 없애버리면 마음은 항상 안락한 속에 머물게 된다.

앞으로 나아갈 때는 뒤로 물러설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하고, 일을 착수할 때는 손을 때야 할 때를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한다.

탐욕이 많은 사람은 권문세가요 부호라도 항상 부족에 걸근거리며 구걸하기를 좋아하니, 이는 곧 돈 많은 걸인이요 가난뱅이다.

보잘 것 없는 이름을 자랑하며 뽐내는 것처럼 보기 딱한 것이 없고, 자랑할 만한 이름인데도 드러내기를 부끄러이 여기는 만큼 흐뭇한 일도 없다.

천지만물의 깊은 이치를 깨달아 무차별계에서 노는 사람에게는 고요와 시끄러움이 따로 없고, 번영과 쇠퇴가 따로 없다.

하늘의 구름은 가나오나 걸릴 것이 없고, 하늘의 달은 시끄럽거나 고요하거나 온세상을 차별없이 비추어 준다.

인생의 진정한 멋은 부귀영화에서의 지하고 맛좋은 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렴결백한 속에서 콩죽먹고 찬물 마시는 이 가운데 있다.

도라고 하는 것은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며 잠자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자연스러운 이 가운데 있다.

인생은 유심한 경계를 벗어나 산처럼 구름처럼 대자연의 무심한 경계로 들어가야 한다.

마음에 애착을 버리면 티끌세상도 신선의 세계요, 마음에 애착을 끊지 못하면 즐거운 세상도 괴로운 바다다.

사람은 항상 안으로 고요를 지켜 바깥경계에 마음 흔들리지 아니함으로써, 또렷한 기억력과 밝은 마음을 간직할 수 있다.

갈대 이불 아래 구름에 잠잘지라도 순결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고, 댓잎 잔에 달을 희롱하면 티끌을 벗어날 수 있다.

짙고 화려한 맛은 맑고 깨끗한 맛을 따를 수 없다.

티끌 세상에 있으면서 티끌에서 벗어나고, 세상일에 몰두하면서 자기 본연의 심성을 깨닫는, 여기에 수양의 참 뜻이 있다.

몸과 마음을 항상 고요 속에 앉혀두면, 영예와 치요 시비와 이해, 그 무엇으로도 나를 그릇되게 하지 내 마음을 어둡게 할 수 없다.

산속에서 개짖는 소리, 닭우는 소리를 들으면 구름속 별천지요, 글방에서 매미소리 까마귀소리를 들으면 고요 속 별천지다.

영달을 바라지 않거니, 달콤한 미끼가 나와 무슨 상관이랴!

군자가 때때로 산속을 소요하며 시와 책과 그림을 더불어 노는 뜻은, 그것들을 빌려서 중정한 마음을 기르기 위함이다.

사람의 정신을 나른하게 하는 화려한 봄날보다 사람의 정신을 속속들이 맑게 틔워주는 사색의 가을이 훨씬 즐겁다.

시에는 문자보다 시적 정취가 있어야 하고, 선에는 언어와 문자를 떠나 마음으로 주고 받는 선의 참 취미가 있어야 한다.

마음이 동요되어 있으며 보이는 것이 다 나를 해칠 무서운 것들이요, 마음이 깨닫고 보면 모두가 나의 벗이요 흥겨운 음악소리다.

이 몸은 매인 곳 없는 배, 이 마음은 생기없는 고목, 이래서 한 세상을 시비 떠나 살수 있다.

모두가 천부한 재주를 다 하는 것이어니, 꾀꼬리 소리라도 즐거울 것이 없고, 개구리소리라도 듣기 싫을 것이 없다.

이 몸은 잠시 와 머물렀다 가야 할 환영과 같은 거짓 몸이나, 이 속에서 영원히 변함없는 진성의 절대한 진리가 있다.

마음에 욕심이 없으면, 모진 더위속에서 서늘한 바람이 일 듯, 시끄러운 장바닥에서도 시끄러운 줄을 모른다.

부귀하고 근심많은 것이 빈천하고 근심없은 것보다 못하다.

새벽 창 아래서 주역을 읽고, 한낮엔 벗들과 불경을 이야기하며, 대숲 사이 맑은 바람 뚫고 오는 경쇠소리에 마음을 씻는다.

새들이 아무리 즐겁게 노래하여도, 장속에 갇혀 타고난 본성을 묶이게 되면, 천연의 멋은 점차 사라진다.

우주만물은 본래 무차별한 것을 사람이 공연히 '나'라는 거짓형체에 집착하여, 스스로 차별을 짓고 스스로 괴로워한다.

늙었다 생각하고 젊은 때의 나를 돌아보고, 영락하였다 생각하고 번영하던 때의 나를 바라보면, 불타던 욕망도 사치스런 생각들도 일시에 꺼져버리고 말 것이다.

옛날에 내 것이라고 하던 것이 오늘날에는 바뀌어 저 사람의 것이 되니, 알 수 없구나! 오늘의 내것이 또 뒤에 올 그 누구의 것이 될지!

시끄러운 속에서는 냉정한 눈을 부쳐 생각을 간추리고, 심한 곤궁 속에서는 한 마음 뜨거운 열을 올려 맹렬하게 떨치고 일어난다.

즐거움이 있으면 즐겁지 않은 것이 있으니, 차라리 즐거울 것도 즐겁지 않을 것도 없는 평범한 경지가 가장 안락한 집이다.

천지자연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며 고요히 그 의미를 읽어나가면, 나를 잊고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다.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정도를 따라 힘껏 노력하고, 천명을 따라 부끄럽지 않은 죽음을 맞이할 따름이다.

달 그림자가 연못을 뚫고 들어도 연못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 사람이 어찌 그림자와도 간은 부귀공명에 매달려 제 갈 길을 잊는다.!

솔바람소리 시냇물소리는 천지자연의 음악이요, 풀 속의 안개빛, 물 속의 구름 그림자는 천지자연의 최상의 문장이다.

사나운 짐승은 복종시킬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은 항복받기 어렵고, 깊은 산골짜기는 가득 채울 수 있어도 사람의 욕심은 다 채우기 어렵다.

마음자리가 고요하면 가는 곳마다 녹수청산이요,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디를 가나 도를 즐길 수 있다.

고관대작도 부호도 때로는 자연의 그 한적한 생활을 부러워하면서도 여전히 부귀공명을 두고 무리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물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는 물이 있는 줄을 잊기에 더욱 자유롭고, 바람 타고 나는 새는 바람있는 줄을 모르기에 더욱 자유롭다.

흥망성쇠의 덧없음을 생각하면, 그렇게도 불타던 부귀공명에 대한 생각이 식은 재처럼 느껴온다.

이 세상에 불나비 아니 사람 몇이나 되며, 올빼미 아닌 사람 그 몇이랴!

배는 물을 건네기 위한 도구요, 불경이란 불도를 얻기 위한 배다. 일단 불도를 얻었으면 불경은 곧 놓아야 한다.

욕심없는 마음 냉정한 마음으로 만사에 당하면 부귀공명도 시비도 다 끓는 물에 눈 녹듯한다.

사람은 마땅히 슬퍼할 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또 마땅히 즐거워할 만한 것이 무엇인가도 알아야 한다.

한 조각 달 빛을 받은 맑은 물처럼, 내 마음만 밝고 깨끗하다면, 그 어느 것도 내게 방해될 것이 없다.

시상과 소박한 멋은 자연의 풍경에서 우러난다.

오래 엎드렸던 새는 반드시 높이 날고, 일찍 핀 꽃은 빨리 시든다.

인생의 마지막 관뚜껑을 닫을 무렵에야 산 동안 붙들고 목숨을 떨던 것들, 다 쓸데 없슴을 알게 된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세간과 출세간 그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공부에 있다.

임금이 나라의 부강을 위하여 마음을 수고롭히나, 거지가 밥을 빌기 위하여 목소리를 수고롭히나, 수고롭기는 한가지다.

세상 인정을 골고루 맛보고 안사람은, 남이야 나를 소 같다고 해도 끄떡, 말 같다고 해도 끄떡, 도무지 마음을 쓰지 않는다.

무념의 경지를 얻는 방법 : 과거와 미래의 일에 생각을 매어 두지 말고, 오직 오늘을 중심으로 그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보낸다.

마음은 우연히 맞는 것이라야 아름답고, 바람은 절로 부는 바람이라야 맑고 시원하다.

자기 본래의 심성이 맑지 못하면, 참선도 불경도 소용이 없다.

모든 생각을 잊고 집착에서 벗어나야만이 본래의 참되 경계에서 소요할 수 있다.

금은 광석에서 나오고, 옥은 돌에서 나오며, 진리는 덧없는 환상속에 들어 있다.

속된 눈으로 보면 만물은 모두가 각각이고 그대로 있는 것이 없으나, 도의 눈으로 보면 만물은 본래 평등무차별한 것이요, 영원히 변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천지의 조화로운 기운은 움집 속에서도 기를 수 있고, 인생의 참맛은 명아주국에서도 맛볼 수 있다.

본래의 참 마음은 깨달으면 티끌 경계가 참된 경계가 되고, 깨닫지 못하면 신선한 중의 집도 속된 집이다.

온갖 근심 생각 다 끊어버리면, 오두막집 골방속이 그대로 고대광실 높고 화려한 집이다.

인간의 본성은 영원히 메마르지 아니하고, 활동적인 정신은 사물에 부딪칠 적마다 어김없이 나타난다.

자기의 몸과 마음을 잘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은, 오직 자연스러운 가운데 마음의 고삐를 풀어놓기도 하고 거두어 잡기도 한다.

천지자연과 사람의 마음은 본래 하나, 여기에는 거리가 없고 사이가 없다.

문장과 도덕은 기교보다는 졸렬한 듯 수수한데에서 더욱 나아가고, 멋은 공교로움보다 순박하고 자연한 멋이 으뜸이다.

바깥 사람을 마음대로 궁글려나가는 사람은 천지가 그대로 자기의 소요할 땅이어니, 좋은 일 궂은 일이 따로 없다.

현상과 본체와는 형체와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산 속에 숨어사는 사람의 최상의 즐거움은 재자유를 누리며 조용하고 편안한 생활을 하는데 있다.

내가 나기 이전의 내 꼴을 생각하고, 나 죽은 뒤의 내 모양을 생각해 보면, 천만가지 망녕된 생각들이 일시에 싸늘한 재가 된다.

병이 든 뒤에야 건강이 보배임을 알고, 난리가 난 뒤에야 평화로운 때의 행복됨을 생각하는 것은 일찍 안 것이 아니다.

곱고 미운것과 이기고 지는 것은 꿈 같은 인생의 꿈속의 장난이다.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은 주인이 따로 없다. 오직 마음 고요하고 한가로운 사람만이 그 주인이요, 데리고 놀 권리가 있다.

타고난 본성의 순박함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인생 제일의 경계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망녕된 생각이 없으니, 마음이 있는 줄 조차 잊어야 하며, 만물은 본래 하나이니, 하나요 둘이요 생각을 말아야 한다.

아무리 즐거워도 알맞게 마시고 알맞게 즐기며 그 즐거움이 다하기 전에 서둘러 돌아간다면 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일까!

마음이 확고하게 잡히지 않았거든 산속에 들어가 마음을 닦고, 마음이 확고하게 잡혀 잡혔거든 풍진세상에 나와 원만한 활동력을 길러야 한다.

고요함과 시끄러움, 그 어느것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동정이 하나인 자유로운 활동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

산에서 살아 가슴속이 맑고 시원하면 보는 것마다 아름다운 생각이요, 풍진에 몸담아 티끌에 굴리면 쓸모없는 물건으로 떨어진다.

내 마음 무심하여 자연과 하나일 때, 들새도 흰구름도 내게 와 멈춘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마음으로 지어내는 것, 한 생각이 맑고 깨끗하면 뜨거운 불꽃 속도 서늘한 연못이다.

물방울이 돌을 뚫어내듯 그렇게 공부하고, 외가 익을 대로 익어 저절로 꼭지가 빠지듯, 그렇게 노력하며 때를 기다린다.

마음만 맑고 고요하다면, 괴롭고 즐거운 곳이 따로 없고, 시끄럽고 조용한 곳이 따로 없다.

천지의 진정한 뜻은 만물을 오로지 끊임없이 생성발전하게 하는데 있다.

비 개인 뒤의 산 경치는 더욱 새롭고, 고요한 밤 종소리는 더욱 맑고 드높다.

산은 사람의 마음을 넓혀 주고, 강물은 사람의 뜻을 깊고 멀게 한다.

마음이 넓으면 막대한 녹봉도 값싼 오지 그릇이오, 마음이 좁으면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큰 이익으로 보인다.

내가 굳게 앉아 바깥 사물을 마음대로 궁글려 나간다면, 인간의 정욕과 기호도 다 본성의 참에서 나온 것이므로 바른 도리가 된다.

자기의 본성을 깨달은 사람은 만물을 그대로 놓고 그것으로 하여금 각기 주어진 천연의 성을 다하게 한다.

한가한 때에는 망녕된 생각을 근심하고, 바쁜 때에는 참된 본성이 나타나지 않을 것을 근심한다.

마음이 맑고 고요하다면 가는 곳마다 참된 경계요, 보고 듣는 것마다 참된 활동이다.

근심없는 기쁨이 없고, 기쁨없는 근심이 없다. 그러므로 통달한 사람은 기쁨과 근심을 하나로 보고, 둘다 잊는다.

받는 마음은 연못물이 달빛을 반 듯 집착이 없고, 주는 마음은 달이 연못에 빛을 던져주듯 무심해야 무아경에 노닐 수 있다.

이 세상은 티끌 세상도 아니요 괴로운 바다도 아니다. 사람들이 공연히 제 마음으로 티끌을 짖고 괴로워하는 것 뿐이다.

달도 차면 기우느니! 꽃은 반쯤 핀 것이 아름답고, 술은 거나할 만큼 마시는 것이 멋이 있다.

산에서 나는 식물, 들에서 자라는 날짐승들은 세간의 양육을 받지 않으므로서 그 맛이 더욱 향기롭고 독특하다.

좋은 광경을 앞에 놓고 한갖 구경하고 노는 데에만 그쳐 마음에 조금도 깨달아 얻는 것이 없다면, 이는 전혀 무의미한 일이다.

이욕의 구렁에 빠지느니보다 깨끗하고 진실한 마음을 안은 채, 죽음의 구렁에 빠지는 편이 마음 편하다.

분수 밖의 복과 이유없는 이득은 조물주의 낚시 미끼가 아니면, 인간 세상이 파 놓은 함정이다.

인생은 꼭두각시 놀음터! 그러나 내 인생을 내스스로 운전해 나갈 마음의 고삐를 굳게 잡아 흔들리지 않는다며, 이 곳을 벗어날 수 있다.

한가지 일에는 반드시 한가지 손해될 일이 뒤따른다. 다만, 의로운 일인가 아닌가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원이란 본래 음란하고 그릇된 사람들이 모이는 숲속이 아니다.

군자는 마음을 항상 일 밖에 두고, 내가 남을 보고 비평하듯, 자기 자신의 잘잘못을 냉정한 눈으로 관찰한다.

날마다 한가지 일이라도 덜어서 일을 적게 한다면, 던 그만큼 속된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이 차고 더운 마음의 변덕을 없애버리면, 가슴속 가득히 화한 기운이라, 가는 곳마다 봄바람이 인다.

사람은 모든 기욕에서 벗어나므로 서 항상 만족에서 머무르며, 인생의 보다 높은 진정한 멋을 얻을 수 있다.

불가의 '인연 따라 처신하는 일'과 유가의 '자기 분수를 지키는 일', 이 두 가지는 험한 세상바다를 건네는 부낭이다.

 

출처 : hgmja
글쓴이 : 나그네 원글보기
메모 :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지연의  (0) 2009.01.28
[스크랩] 제13강 강의를 마치며  (0) 2009.01.28
[스크랩] 채근담 전집 해설  (0) 2009.01.28
[스크랩] 제5강 주역(周易)  (0) 2009.01.28
[스크랩] 제4강 초사(楚辭)  (0) 2009.01.28
728x90

 

[채근담]1장 - 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을...
[채근담]2장 - 군자는 세상을 꾸밈없이 살 뿐, 능란하게...
[채근담]3장 - 군자는 오히려 자기의 재능을 감추어 알...
[채근담]4장 - 권무술수는 결국에는 사람을 망친다, 알...
[채근담]5장 - 귀에 거슬리고 마음에 꺼리는 말이 나를 ...
[채근담]6장 - 하루를 살아도 기쁜 마음으로 사는 것이...
[채근담]7장 - 성인은 평범하다
[채근담]8장 - 천지는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정지하...
[채근담]9장 - 깊은 밤에 홀로 앉아 있을때에야 비로소...
[채근담]10장 - 성공 후에는 꼭 반성하고, 실패한 후라...
[채근담]11장 - 지조는 담백으로 다듬어지고, 호사로 인...
[채근담]12장 - 사람들의 기억에 어떤 모습으로 남을 것...
[채근담]13장 - 양보하는 사람은 삶이 안락하다
[채근담]14장 - 버리면 얻을 것이다
[채근담]15장 - 사람됨의 기본은 순수한 마음이다
[채근담]16장 - 이익을 보면 물러서고 덕을 보면 실천하...
[채근담]17장 -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나를 이롭게 ...
[채근담]18장 - 아무리 큰 업적도 자랑하면 사라진다
[채근담]19장 - 명예를 독차지하면 해로움을 면하지 못...
[채근담]20장 - 겸손한 사람은 귀신도 해를 입히지 않는...
[채근담]21장 -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 수행보다 낫...
[채근담]22장 - 고요함과 움직임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채근담]23장 - 충고할 때에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야 한...
[채근담]24장 -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채근담]25장 - 자랑하고 뽐내려는 마음을 눌러야 바른...
[채근담]26장 - 현명한 사람은 후회의 기억을 지우지 않...
[채근담]27장 - 포부와 여유를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채근담]28장 - 은혜를 베풀 때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
[채근담]29장 -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면 즐거움이 사라...

 

 

출처 : hgmja
글쓴이 : 나그네 원글보기
메모 :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제13강 강의를 마치며  (0) 2009.01.28
[스크랩] 채근담(번역)  (0) 2009.01.28
[스크랩] 제5강 주역(周易)  (0) 2009.01.28
[스크랩] 제4강 초사(楚辭)  (0) 2009.01.28
[스크랩] 제3강 서경(書經)  (0) 2009.01.2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