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 / 윤연옥
낡은 일기장에는
작은 파편들이 널려있고
가을이 데려 온 바람
놀다간 자리서 햇볕 냄새가 난다
툇마루서 뒹굴던 고슬한 추억
손바닥으로 만지고 쓸어보면
햇살처럼 보드랍고 따뜻해
속절없이 내려놓는 한조각 그리움
찬바람 불어 시린 속
일상 허기 달래면
동강 난 필름
마주보고 웃는다
장독대 항아리 속 웅크리고 있던 홍시
외할머니 손에서 단내를 풍기고
까치밥 쪼던 까치
한낮 풍경이 되다
꼬물대며 하냥 기어가는
사랑의 자취들
우화의 날갯짓 소리에
불빛 찬란하게 몸 바꾼 뜨락
가뭇없이 떠나가는
파편 한 조각 집어 들고
무심의 공덕이라
해조음에 하늘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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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정년 퇴임 후 새로운 도전, 큰 상에 감사”
내 어렸을 적 외가에서, 이른 봄이면 툇마루에서 햇볕을 안고 뒹굴었다. 그리고 가을이면, 홍시 하나를 밥사발에 담고 숟가락을 꼽아 주시던 외할머니가 계셨다. 혀끝에 녹는 달콤함은 무어라 말할 수업이 황홀했고, 감나무 꼭대기에서는 까치밥으로 남겨둔 감을 까치가 깍깍거리며 쪼아 먹고 있어 숟가락을 흔들며 깔깔대고 웃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곳에는 나비가 우화하듯 크고 멋진 현대식 건물이 버티고 있다. 머릿속으로는 동강난 필름처럼 드문드문 어린 날의 추억이 스쳐 지나고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빼앗긴 듯 허전하고 슬프다.
아마 지금도 그곳 어디엔가는 할머니 향기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 달큰한 냄새가 그립다.
전화가 온다. 낮선 번호다.
상냥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 시가 당선 되었다고...
소녀시절엔 누구나처럼 문학소녀였고, 시집을 읽으며 괜히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고, 메모지에 글을 낙서처럼 끄적거려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후 내 삶의 궤적에는 열심히 사는 직장인이었을 뿐이었다.
정년퇴임 후 새로운 꿈에 도전하고자 펜을 잡았다. 아직 무르익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큰 상을 준다니 그냥 감사할 뿐이다. 아마도 늦깎이 걸음 뒤처질까봐 주시는 채찍이라 생각한다.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동양일보 관계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또, 당선을 함께 기뻐해 줄 모든 분들께 서릿발 속에서도 감도는 훈풍을 모아 보내드립니다.
모두가 행복하시길...
[심사평] “근원적 삶의 신실한 성찰력 돋보여”
이번 신인문학상 응모작은 전보다 많은 작품(588)으로 늘어났지만 미숙하고 난무한 작품들이 많았다. 숙명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치열한 도전의식이 예년보다 떨어지고 있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우열을 겨룬 작품으로 김길중의 ‘컵라면’에서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노인의 몸매와 숨을 몰아쉬는 노인의 ‘리어카가 무거워지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리어카가 가벼워지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짙은 어둠과 컵라면에 물을 붓고. 마지막 국물을 들이켜고 있는 정황을 엿보인다.
윤연옥의 ‘외갓집’에서 낡은 일기장에 작은 파편 같은 가을이 데려온 바람, 햇볕 냄새가, 툇마루 뒹굴던 추억이 햇살처럼 보드랍고 따뜻한 그리움으로. 찬바람 속의 허기와 장독대 항아리 홍시, 외할머니 손에서 단내를 풍기고, 까치밥 쪼아 먹던 시절의 외가의 추억들을 일떠세워. 사랑의 자취들을 속에서 읽어낸다.
가뭇없이 떠나가는 한 조각 속에서 무심의 공덕이라며, 해조음의 하늘만 본다. 여기서 해조음은 불타의 관음음으로 세월 속에서, 하냥은 함께의 방언으로. 무심의 삶속에 살아나고 있다.
윤연옥의 ‘외갓집’에서 근원적 삶의 신실한 성찰력이 돋보인다. 윤연옥의 ‘외갓집’을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더욱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정연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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