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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순 / 하기정

 

 

그는 슬픔에 관한 한

긴 목을 지녔다

바람의 구멍을 열면

두 개의 목이

서로의 목구멍에 대고

울음을 불어 넣었다

 

달빛을 가르는 여름 나무의

녹청색 그림자들

놋쇠 바닥에 달라붙은

저녁의 검은 그을음

 

울음통의 깊은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눈물과 같은 비소와

눈웃음을 그은 선과 같이

 

침묵이 그를 긴 관에 눕혔다

관통하는 게 울음인지 노래인지

한통속으로 통했다

 

빛나는 관록과도 같이

젊고 마디 굵은

청춘의 목울대에 빨대를 꽂고

 

숨을 불어 넣자

길고 긴 울음을

연주했다

 

 

 

 

[수상소감]

 

상을 받은 소감이라니,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 앞으로 쓸 작품은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쓸 것인지?’ 소감문을 쓰려고 생각하다가 나는 나에게 묻고 있었다. 수상 소식을 전해 들은 건 이른 아침이었으니, 해가 뜨는 쪽에서 귀인의 목소리를 들은 날이었다. 잠결인가 꿈결인가 했다. 심어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에 열매가 열리는 꿈을 어렴풋이 꾸었다. 가지에 달린 것들은 지나치게 익었거나 아직 덜 익은 것들이었다. 간밤의 해몽을 오후가 되어서야 생각하다가 마스크 속에 감춰진 입꼬리가 올라갔을 것이다. 상을 받고 기쁘지 아니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로 인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도 더불어 기뻐하니, 얼마간 기쁨은 두 배로 지속할 것이다. 기쁜 것은 기쁜 것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할 것이다. 언덕을 넘고 산길로 호젓이 나 있는 오솔길을 걸어가기를, 홀로 있는 방식을 유지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런 마음이 사라질까 봐, 불안하기도 할 것이다. 상을 받았으니 그만큼 더 골몰하고 절실해지고 더 겸손해지는 것, 그리고 계속 쓰는 것, 이것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받은 꽃다발은 기분 좋은 무게가 느껴질 것이다.

 

채우거나 버려야 할 부분이 있을 작품을 눈여겨 보아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가 나아가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자리를 만들어주신 <시인뉴스 포엠>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심사평]

 

시인 뉴스포엠 시인상의 응모작들을 공들여 읽었다. 응모작은 140분이 보내온 800여 편의 작품이었다. 응모작들 중엔 이미 시단에 등단해 활동을 하고 있는 신진 시인들의 작품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고, 미등단자의 작품들 중에도 상당한 시적 수련을 거친 것으로 보이는 분들의 작품이 눈에 띠었다. 현대사회는 IT산업 사회라고도 하고, 대중문화 사회가 되어버렸다고도 한다. 시는 쇄락의 길에 접어들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심사자는 시인뉴스포엠 시인상 심사과정에서 800여 편의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치열한 정신이 불러낸 불꽃의 언어’, ‘목숨의 언어들을 만났으며, 새로운 힘의 언어를 만날 수도 있었다. 심사자는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한국시의 현재와 미래를 톺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였다.

 

시의 수준을 판별하는 몇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첫째, 시인의 일상사나 현실문제를 서술하고 있는 시. 둘째, 시인의 일상사나 현실 문제를 시적 장치로 표현하되 시적 구조를 이뤄내고 있는 시. 셋째, 깊은 투시력으로 발견한 시적 대상과 시적 자아가 적절한 구조를 지향하고 있으며, 비유의 관계로 원활히 소통되고 있는 시. 물론, 셋째 단계의 시를 만날 때의 환희가 가장 큰 것이라고 믿는다. 심사자는 그런 나름의 기준에서 응모작들을 읽었다.

 

하기정의 바순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바순은 목관악기이다. 목관악기 중 가장 낮은 음역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라고 한다. 단풍나무나 배나무로 몸통을 만들며 갈대 조각으로 리드를 만든다고 한다. 바순은 갈대 조각으로 만든 리드를 숨으로 불어 울려 긴 울음통이 소리를 반향해내도록 만든 악기라 한다. 바순의 시인은 이 목질의 리드를 숨으로 불어 울림의 오묘한 소리를 만드는 발성 시스템을 입에서 입으로 숨을 옮겨 생명을 복원시키는 것으로 상정된 시를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처한 응급환자와 마우스 투 마우스응급처치를 떠올리도록 배려되어 있다. “두 개의 목이/ 서로의 목구멍에 대고/ 울음을 불어 넣고 있으며, “침묵이 그를 긴 관에 눕혔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침묵하는 악기 바순은 긴 관에 눕혀져 있다. ()은 관()과도 상통해 쓰이도록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소리를 내지 못하고 침묵하는 몸통은 소리의 죽음이기도 할 것이겠다. “빛나는 관록과도 같이/젊고 마디 굵은/ 청춘의 목을대에 빨대를 꽂는 그의 시에는 생명회복에의 바램까지 깃들어 있다. 목관악기 바순을 노래한 외피를 벗겨보면 이토록 큰 함축이 내재해 있다.

 

심사과정에서 박성우의 가정, 조현순의 돌배나무 모퉁이, 박찬익의 파레이돌리아, 이명윤의 안녕 하셉, 김형태의 쪽방촌등이 시적 재질을 보여준 분들이다. 이분들의 정진의 모습을 보고 싶다.

 

- 이건청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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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방식 / 이종원

 

 

1

흙에서 나온 울음이 날을 세운다

오랫동안 숨죽였던 갈구

단층을 벗겨낸 쇳덩이는

부엌에서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나선다

자르고 베고 나누는 것에서

하늘로 오르거나 바다를 가르거나

그의 초식은 진화하기 시작한다

찌르고 베는 변이로부터

칼의 원초적 사명을 지켜내기 위해

오른손이 거친 외침을 내려친다

오만이 무릎 꿇는 순간 

두들겨 맞은 단면에서 소리가 피어난다 

 

2

칼에 쓰러진 나무로부터 풀잎까지

종이가 되지 못한 이름을 기억하리라

허공에 적어 내려간 녹슨 글자들이 

지면을 관통하여 가슴으로 굴러가는

칼의 꼬리가 꿈틀거린다

같은 음을 내거나 화음으로 섞일 때

활자에 무릎 꿇는 칼의 방식은 

덤과 같아 보인다

등을 보이고 누웠어도 예리한 각도

전파를 타고 날아온 구호는 

살처럼 생생하다

칼은 언제나 서 있는 것은 아니다

 

3

피 또는 투쟁에서 벗어나고자 

숫돌에 마름질한 귀 기울여

수 천 도 불꽃에 지는 법을 배우라 했다

선 이쪽과 저쪽에서 대립하는 시선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낸다

휘어지지 않으려는 수식

검기를 갈피에 감추고 저울을 불러낸다

양날을 두들겨 숙성된 바늘을 뽑는 일

저울추가 제대로 좌표를 읽는다면

칼집에 꽂혀있는 칼은

열리지 않아도 해의 눈처럼 빛날 것이다

차가운 서술에도 불구하고

쇠 울음은 가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이륙을 허가하다   

 

내 활주로는 늘 짧아서

꿈이 이륙하지 못하고 자주 떨어졌다

자소서로 출발한 걸음은

출입문에서 넘어지기 일쑤였다

나의 섬은 점점 쪼그라들어

길은 눈앞에서 자주 멈추었으며

가시 울타리를 넘어간다 해도

바다 직전에 날개를 접어야 했다

해의 눈빛을 놓치고 

바람의 손과 미끄러지고

돌아서는 길은 절벽처럼 고요했다

태어난 곳이 섬이었으니 언제까지나 섬 소년이었고

뚝뚝, 흙수저는 걸음도 느렸다

비 내리는 날에는 먼저 울었으며

구르다 떠난 바퀴 자국 끝

닳아빠진 운동화 한쪽만 덩그러니

멍투성이 하늘이 통곡처럼 나부꼈다

얼마나 추락을 암기하고 

승모근에 지식을 쌓아야 이륙할 수 있을까

구멍 난 심장으로 볕을 나르고

걷어낸 상처에 바람을 발라

수백 번 지우고 쓴 시뮬레이션 복기가

비상활주로 문을 열었다

또 다른 바람이 폭풍우를 가져간 후

오늘 나의 이름이 불리었다

 

 

 

 

 

 

나의 일몰                   

 

오후 여섯 시가 유리창에 사선으로 걸린다 정면으로 응시했던 눈동자가 교신을 통해 바람개비를 접는 순간이다 귀로에 연착륙한 사람들은 여의주를 내어주고 고치로 들어간다 양력이 부족한 나는 네온이 범람하는 강 동쪽으로 바람을 쫓는다 어둠에 기댄 동체가 모자란 하루를 채우려는 것이다 마주치는 시선마다 뿔뿔이 흩어지고 분주한 걸음에도 호출에 닿지 못한 손가락은 전쟁 같은 공습에 하나둘씩 꺾인다 취한 유리 조각에 베어진 날개에서 바람이 새고 욕이 눌어붙은 가슴으로 구멍이 지나간다 시간을 속여 몇 장의 지폐와 바꾸려는 아우성에도 날개는 졸음에 겹다 발기되는 아침은 숙면의 또 다른 이름, 나의 숙면은 호출이 쉬고 있는 동안만 허락될 것이다 호출부호가 멈춰 설 때면 아랫목이 그리워져 귀로에 올라선다 먼동으로부터 삶을 복기하는 곳, 들숨을 벗고 옥탑방 거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외등이 날숨을 토해놓으면 도시의 일출과 함께 수많은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나의 일몰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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