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방식 / 이종원
1
흙에서 나온 울음이 날을 세운다
오랫동안 숨죽였던 갈구
단층을 벗겨낸 쇳덩이는
부엌에서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나선다
자르고 베고 나누는 것에서
하늘로 오르거나 바다를 가르거나
그의 초식은 진화하기 시작한다
찌르고 베는 변이로부터
칼의 원초적 사명을 지켜내기 위해
오른손이 거친 외침을 내려친다
오만이 무릎 꿇는 순간
두들겨 맞은 단면에서 소리가 피어난다
2
칼에 쓰러진 나무로부터 풀잎까지
종이가 되지 못한 이름을 기억하리라
허공에 적어 내려간 녹슨 글자들이
지면을 관통하여 가슴으로 굴러가는
칼의 꼬리가 꿈틀거린다
같은 음을 내거나 화음으로 섞일 때
활자에 무릎 꿇는 칼의 방식은
덤과 같아 보인다
등을 보이고 누웠어도 예리한 각도
전파를 타고 날아온 구호는
살처럼 생생하다
칼은 언제나 서 있는 것은 아니다
3
피 또는 투쟁에서 벗어나고자
숫돌에 마름질한 귀 기울여
수 천 도 불꽃에 지는 법을 배우라 했다
선 이쪽과 저쪽에서 대립하는 시선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낸다
휘어지지 않으려는 수식
검기를 갈피에 감추고 저울을 불러낸다
양날을 두들겨 숙성된 바늘을 뽑는 일
저울추가 제대로 좌표를 읽는다면
칼집에 꽂혀있는 칼은
열리지 않아도 해의 눈처럼 빛날 것이다
차가운 서술에도 불구하고
쇠 울음은 가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이륙을 허가하다
내 활주로는 늘 짧아서
꿈이 이륙하지 못하고 자주 떨어졌다
자소서로 출발한 걸음은
출입문에서 넘어지기 일쑤였다
나의 섬은 점점 쪼그라들어
길은 눈앞에서 자주 멈추었으며
가시 울타리를 넘어간다 해도
바다 직전에 날개를 접어야 했다
해의 눈빛을 놓치고
바람의 손과 미끄러지고
돌아서는 길은 절벽처럼 고요했다
태어난 곳이 섬이었으니 언제까지나 섬 소년이었고
뚝뚝, 흙수저는 걸음도 느렸다
비 내리는 날에는 먼저 울었으며
구르다 떠난 바퀴 자국 끝
닳아빠진 운동화 한쪽만 덩그러니
멍투성이 하늘이 통곡처럼 나부꼈다
얼마나 추락을 암기하고
승모근에 지식을 쌓아야 이륙할 수 있을까
구멍 난 심장으로 볕을 나르고
걷어낸 상처에 바람을 발라
수백 번 지우고 쓴 시뮬레이션 복기가
비상활주로 문을 열었다
또 다른 바람이 폭풍우를 가져간 후
오늘 나의 이름이 불리었다
나의 일몰
오후 여섯 시가 유리창에 사선으로 걸린다 정면으로 응시했던 눈동자가 교신을 통해 바람개비를 접는 순간이다 귀로에 연착륙한 사람들은 여의주를 내어주고 고치로 들어간다 양력이 부족한 나는 네온이 범람하는 강 동쪽으로 바람을 쫓는다 어둠에 기댄 동체가 모자란 하루를 채우려는 것이다 마주치는 시선마다 뿔뿔이 흩어지고 분주한 걸음에도 호출에 닿지 못한 손가락은 전쟁 같은 공습에 하나둘씩 꺾인다 취한 유리 조각에 베어진 날개에서 바람이 새고 욕이 눌어붙은 가슴으로 구멍이 지나간다 시간을 속여 몇 장의 지폐와 바꾸려는 아우성에도 날개는 졸음에 겹다 발기되는 아침은 숙면의 또 다른 이름, 나의 숙면은 호출이 쉬고 있는 동안만 허락될 것이다 호출부호가 멈춰 설 때면 아랫목이 그리워져 귀로에 올라선다 먼동으로부터 삶을 복기하는 곳, 들숨을 벗고 옥탑방 거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외등이 날숨을 토해놓으면 도시의 일출과 함께 수많은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나의 일몰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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