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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우리詩문학상』신인상 상반기 당선작(1)】

 

          「잔혹한 일상」외 4편 │ 박승출

 

 

 

 

잔혹한 일상 박승출

 

 

  전생에 나는 길 위를 떠도는 자가 아니었을까. 모서리 반듯하게 정돈

된 삶보다 정처 없이 흐트러진 일상에 더 마음이 가니 아마 나는 전생에

길 위에서 죽은 얼굴 환한 귀신이 아니었을까. 단 한 번도 똑 같은 길

위를 걸어가 본 적이 없는 바람에 날리는 바람처럼 가벼운 무게를 갖고

태어난 영혼이 아니었을까. 길 위에 서면 더없이 평온하게 밀려오는 탁

트인 숨결, 태양을 삼키며 등지며 붉은 노을을 향해 영원을 걷는 사막

의 캐러밴은 아니었을까. 죽어 은하수 너머 아예 먼먼 밤하늘로 날아가

박혀 우주를 돌며 자유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자들의 쉼 없는 이정표가

된 푸른 별자리의 하나는 아니었을까.

 

  어제 갔던 그 길을 따라 걷는다. 이제 시큰둥한 가로수들은 나를 보고

도 더는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돌아서 가도 거리의 모퉁이들은 더 이

상 비밀스런 궁금증을 품지 않고, 늘어나는 내 몸무게를 쉽게 감지하는

보도블록들의 딱딱한 오와 열이 현기증을 일으킨다. 누군가가 땅바닥에

떨어뜨린 책이 바람에 같은 페이지를 미친 듯이 계속 펄럭이고 있는 거

리, 느끼는 시선도 없이 상가 유리창 안에서는 어제의 드라마가 홀로

재방영된다. 왕성한 식욕으로 길을 먹고 길을 뱉어내는 사거리는 언제

나 체증으로 막혀 있고, 오늘도 어제처럼 허락 없이는 건널 수 없는 횡

단보도, 나는 포로처럼 서서 단지 두 마디의 말로만 깜빡이는 푸르고

붉은 신호등의 무뚝뚝한 점멸을 무작정 기다린다. 어제 갔던 그 길을

따라 걷는다. 나와 똑같이 생긴 이상한 사람들이 나와 똑같이 무덤덤한

이상한 표정으로 말도 없이 나와 눈빛을 주고받는

 

  숨 막히게 잠잠한 이 일상을 훌러덩 말아 먹고 싶다

 

  후생에서 내 전생은 이제 비밀이고 싶다

 

 

  

 

 

안개의 도시

 

 

기어이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안개를 몰고 와선 거리마다 풀어 놓았고

해가 뜬 한낮에도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간혹 이마를 부딪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거리를 어색하게 떠돌았고

곁을 스쳐도 서로 알아보지 못했다 어디선가

분리 수거되지 못한 간밤의 식욕들이

썩어가며 가로수 밑에서 냄새를 피워 올렸고

온다던 약속시간이 지나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항거할 수도 없는 시간 속에서, 멀리

형체 잃은 차량의 불빛들이 놓여진 다리도 없이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한 채 강물 위

허공 속을 달리고 있었고

건너가고 있는지 건너오고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들러붙는 습기 찬 물방울의 끈적임을 떨궈내기 위해

가로수들이 몸을 둥글게 움츠리며 잎을 부르르 떨었고

어둠을 온몸에 바른 채 터널을 막 빠져나온

자동차들이 어리둥절한 시선을 도로 위에 뿌리며

딱성냥처럼 길을 그으며 급정거하기도 했다

안개는 사람들을 하나씩 가두면서 지우고, 도시는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자꾸 더

안개를 피워 올리고 있었고

안개 위로 우뚝 솟은 옥상 위의 거대한

전광판만이 이 모든 안개 속을

유유히 내려다보며 희미한 무슨 말인가를

쉴 새 없이 빠르게 뱉어내고 있었다

 

 

 

 

 

 

밤풍경

 

 

유리창마다 검은 노을이 드리우고

거리에는 어제보다 더 일찍 밤이 찾아왔다

도시가 차려 놓은 거리의 목록들이 일렁일 때마다

허공 어디쯤에서 역한 냄새가 스며나왔고

사람들의 표정이 어딘가를 향해 일그러졌다

그때 밤의 문이 미친 듯이 펄럭이고

스펀지처럼 어둠을 빨아들였다

마약처럼 어둠에 흠뻑 젖은 불빛들이 걸어 놓은

입간판을 향해 다시 구두코들이 뛰어들고 뛰어나가고

검은 도화지 위에 채색된 밤의 불빛들

블록마다 신세계가 그려졌다

세상은 자꾸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은밀히 숨어들거나, 낙엽처럼 구르는 낙오의

뒷골목에서 굽은 등을 한껏 움츠리며

쓸쓸히 사라지기도 했다

바닥을 핥으며 달려와 교차로에 우뚝 선 차량들이

먼 곳의 불빛과 불멸의 신호를 주고받으며

레이저 광선을 쏘아대며 다시 질주를 준비하고 있었고

횡단보도 붉은 신호등이 보초처럼 단호하게

밤의 경계를 지키고 있었다

또다시 어디선가 형체도 없는 바람이 불어와선

쓸쓸히 지상을 구르는 불빛의 잔해를 쓸고

어딘가로 불어갔고

발 밑 고요를 안고 사는 사람들은 작고 차가웠다

절망이 웃으면서 내게로 걸어왔다

 

 

 

 

 

 

시간의 화석

 

 

지구의 오래된 뼈마디를 들여다본다

붓끝이 더듬고 지날 때마다

묻혀 있던 시간의 흔적들이 조금씩 쏟아진다

사라진 꽃의 향기가 상상을 자극하고

잃어버린 대륙이 만개한 들판을 펼쳐 놓는다

수천만 년 된 딱딱한 바람의 화석이 공중으로 흩어진다

산맥이 솟을 때 넘지 못하고 지층 깊이 갇혀버린

비를 쏟아내지 못한 구름의 불운과

행성 사이를 건너와선 숲에 닿지 못하고

단단하게 굳어버린 햇빛화석이 뜨겁게 녹아내린다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 놓은 듯

생의 비명이 다른 생 위에서 절규하고

다시 흙의 계단을 거슬러 오르면

한순간 어둠이 내린 끝없는 시간을 지나

어느 초라한 생명 하나가 흐린 눈을 굴리며

초원 위로 조심스런 첫발을 내딛는다 그렇게

멸종과 출몰의 끝없는 반복이 켜켜이 쌓인 언덕에서

두근거리며 지축은 거대한 분열을 계속하고

기는 것들과 달리는 것들과 나는 것들의

한데 어울린 놀라운 무덤,

시간과 시간 사이에 끼인 두터운 먼지 후후 불어내며

영겁의 시간의 조각들을 눈으로 따라가면

퍼즐처럼 떨어져나간 시간의 아귀가 채워지는

땅속 깊이 꼭꼭 봉인되었던

오래된 싱싱한 비밀들이 흙의 껍질을 물고 일어선다

 

 

 

 

 

 

가로등 우울

 

 

  가로등 불빛이 우울했네. 어둠을 껴입은 밤의 족속들 길을 당기며 어

디론가 급히 몰려간 후 거리에 홀로 남아 흐느끼고 있었네. 밤의 문은

쉬이 닫히지 않았네. 아무렇게나 구겨지며 넘겨지는 페이지처럼 거리를

끌고 형체 없는 바람들이 몰려다니고 있었네. 손과 손이 닿지 않는 빛

의 사각지대마다 부푸는 어둠, 꺼지지 않는 무심한 상가 불빛들은 담을

찾아 밤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끝없이 타전하고 있었네.

 

  이문동 산 1번지 산동네에서 시작된 불빛이 어둠을 적시며 아래로 아

래로 이끌리듯 내려올 때, 그때 불빛 닿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에선 비

명도 없이 밤이 살해되고 있었네. 어둠의 한 끝을 지키던 초병들이 그

만 두려움에 질끈 눈을 감는 바닥에는 입이 틀어 막힌 작은 비닐봉지가

밤의 어둠속 저 편으로 천천히 유기되고 있었네. 야경이 펼쳐놓는 풍경

한 자락에 취한 구름들이 자정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 도시의 밤하늘을

유유히 흐르고 있었네.

 

  세상의 모든 가로등,

  세상의 모든 어둠 다 환하게 밝힐 수 없다고 깨진 가로등 불빛 아래

어둠이 고이네

 

 

 

 

 

당선 소감

 

         허무를 위해 쓰는 나의 시

                                    

                                                              박 승 출

 

 

  늦게 시작한 공부에 밤새는 줄 모르고 산다.

  현자는 시간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이라는데 나는 얼마나 시간을 낭비하

며 살아왔는가. 내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급

해진다.

  이룬 것도 이루어야 할 것도 다 한 줌 바람 같은 궁극적인 세상이지만 그

허무를 위해서 시를 쓴다.

  시의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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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우리詩문학상』신인상 당선작>

 

 

 

평일 늦잠자기에 대한 존재론적 소묘 외 4편

 

 

 

장수철

 

 

오랫동안 읽혀지지 않은 비밀서고의 금서처럼

나는 잠들어 있다.

가끔씩 책갈피 사이 실눈을 뜨고

방바닥 위 성간운처럼 펼쳐진

먼지들의 광활한 밀도를 가늠하다가

캡슐에 담긴 우주미아가 되어

멀고 먼 먼지 사이를 헤매는 꿈을 꾸기도 했다.

창문으로 한 덩이 빛무리를 이불 위에 싸질러 놓고

중천으로 달아나는 해.

어느 골목에선가 태초의 말씀처럼

트럭에 실린 과일의 이름들이 하나씩 확성기로 호명되고,

그때마다 세상이 하나씩 생겨날 것만 같은 한낮,

내 이름이 호명될 때까지 캡슐에 담겨

유성우가 내리는 저 성간운 속을 나는 헤매고 있다.

오늘은 세상이 생겨난 지 8일째 되는 날,

신들의 도서관서가 속 가지런한 책들 위에

분류기호를 잃고 덩그렇게 올려져 있는 나의 오후.

점심 빈 그릇을 담은 배달 오토바이를 따라

하루 반나절이 비탈을 내려가며

덜그럭덜그럭

나를 독해하고 있다.

 

 

 

 

 

엘리제를 위하여

 

 

엘리제는 어디 있는가.

트럭이 후진하며 들려주는 엘리제를 위하여.

 

능수버들 낭창낭창 흩날리듯

못갖춘마디의 도입부가 길바닥에 뿌려지고

트럭이 신중하게 후진할 때에 맞춰 속 깊은 엘리제가

후사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비탈의 이면을 분산화음으로 쓸어내리면,

골목길 바닥에 앉아 있다가

주섬주섬 공깃돌을 들고 일어서는 아이들.

 

비탈을 오르다 힘을 잃거나,

잘못 들어선 막다른 길에서 돌아 나올 때

홀린 듯 사는 내가 갑자기 낯설어 다시 나에게로 들어설 때

걸어 온 길 위 올망졸망 피어난 이끼꽃 식구들까지 처연히

짓밟으며 나는 언제나 못갖춘마디로 되돌아와야만 했구나.

 

트럭이 후진하며 들려주는 엘리제를 위하여.

나의 엘리제는 어디 있는가.

 

 

 

 

 

파 한 단

 

 

시장 모퉁이 담벼락에 기대어 무참히 꺾인

푸른 제 잎의 그림자 밟고 비스듬히 서 있는 파 한 단.

밭일하다 막 돌아와 담벼락에 기대고 앉아

담배 연기 내뿜던 아버지의 긴 그림자처럼

일몰 혼신의 햇볕에 장렬히 맞서며

뭉텅뭉텅 빠져나간 내 욕망의 머릿단 한 움큼 거기 세워져 있다.

하얀 발뒤꿈치에 피딱지처럼 말라붙은 흙발인 채로,

 

산다는 것은 파뿌리처럼

뽑힌 자리마다 옹골찬 구멍을 세상에 내는 일.

그리고는

담벼락에 비스듬히 제 등을 기대고

그때의 아버지처럼 꺾인 절망의 그림자 흙발로 밟고 서서

파 잎보다 검푸른 담배연기나 석양을 향해 길게 내뿜는 일.

스스로 시침이 되어

긴 그림자로 떠나야 할 때를 가늠하다가

제 발치에서부터 피어오른 어둠과 함께

지는 해를 길게 전송하는 일.

 

 

 

 

 

가을, 나무들의 사춘기

 

 

한결같이

사람의 손 닿는 곳 바로 위에서부터

나무는 첫가지를 펼쳐보였다.

제가 쓴 일기를 이제 좀체 보이려들지 않는

사춘기 딸아이처럼

저무는 도시의 문법을 익히고 나면

사람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곳,

비로소 제 느린 언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인적 끊긴 늦은 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성긴 머리채를 붓 삼아 밤하늘에 휘갈겨 놓은

저 수많은 별자리들 그리고

초저녁부터 덜 마른 눈물자국처럼 희끗

마침표로 찍어놓은 낮달 하나.

알 수 없는 나무의 사연들이 빼곡히 들어찬

사람의 손 닿는 곳 바로 위의 공중에서

나무는 정성스레 씨앗을 빗고,

가을이면

제 뜨거운 노래로 찬 가슴 오롯이 불 지르다가

깊은 서랍 속 자물쇠 채워둔 딸아이의 일기장 갈피마다

시뻘겋게 피멍든 생애의 낱장 하나

슬며시 꽂아두고 가는 것이다.

 

 

 

 

 

신문지 한 장

  

저렇게 넓은 가슴인 줄 몰랐네,

지하보도 한구석 누군가 덮고 잠든

신문지 한 장.

출근시간 지난 지하승강장 휴지통 출신이라고

얕볼 일이 아니었네.

정오쯤 지나면

제 풀에 일제히 주눅이 드는 조간이라고

내팽개칠 일도 아니었네.

석유 냄새 아직 칼칼한 제 날갯죽지로

아무도 어쩌지 못하는

뜨거운 슬픔 하나 품고 있는 것인데,

곱은 두 손 제 샅에 모아 넣듯

싸늘히 식은 희망 하나 비비며 데우는 것인데.

신문 속에 세상이 있다지만

펼쳐 놓으면

저렇게 큰 세상 덮고도 헐하게 남았으니

정녕 신문에 나고도 남을 일인데,

아직 신문 속 세상은 고요하네.

저렇게 넓은 가슴인 줄 아무도 모르네.

 

 

 

 

 

<신인상 당선소감>

 

  새 눈꺼풀 하나를 열기까지 | 장수철

 

 

  지독하게 외로워 본 사람은 안다, 불을 켜는 것이 누군가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음을 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함이라는 것.

 

  마천루 위의 고도표시등이 붉은 눈시울로 껌뻑거리는 저녁 하늘을, 여객기 한 대가 흐린 불빛으로 함께 껌벅이며 날아가는 장면처럼 내게 애틋한 것은 없다. 그 은밀한 접선을 위하여 암구호처럼 필사적으로 외고 있던 존재의 가냘픈 불빛을 점멸하는 것, 그것이 내게 시였다. 그만큼 시를 쓰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시 때문에 즐거울 일이 한 번도 없던 내게, 이 번 수상은 시로써 나의 생이 고양되는 첫 번째 기억이 되었다.  뽑아주신 심사위원 여러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할 따름이다. 내 시의 흠결을 너그럽게 지나쳐 주신 덕분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시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내 삶일까 자문해 왔다면, 이제 내 삶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시일까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이제 더 깊은 심해로 들어섰다. 그곳은 천지사방 해초처럼 미끌거리는 어둠뿐이므로 지상의 흐려진 두 눈은 아예 감고 가겠다. 조만간 내 몸 어딘가에서 등지느러미처럼 하늘거리는 새 눈꺼풀 하나가 다시 열리리라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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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우리詩문학상』신인상 당선작>

   

 

 

인사동 가는 길외 4편 

 

 

 

이동훈 

 

 

  그날 서울역으로 마중 나온 것은 폭설이었다. 한 치의 여유 없이 매몰찼던, 좀처럼 써지지 않던 자기소개서처럼 바로 앞을 가리던 폭설이었다.

 

  눈을 털며 들어선 식당, 국물 한 술에 입천장을 데었다, 우라질, 재수 옴 붙은 인생에 시빗거리라도 찾고 싶었을 게다, 그때는, 기다리는 게 일이고 견디는 게 전부였던 시절, 끓던 속도 곧 시들해졌다.

 

  벼린 칼날 같은 눈발 속, 짐 부리다 발목 잡힌 차량의 경적으로 들썩하는 어둠 속을 다시 걸었다. 기록적인 폭설도, 전구 한 알에 어른거리는 후줄근한 옷가지도, 쪼그려 앉거나 서성거리는 사내도, 그저 데면데면했다.

 

  인사동 가는 길은 아예 눈에 묻혔다. 약속에 대어 가지 못하고 들어앉은 여관 주점에도 눈이 내렸다. 입 안의 쓰라림은 어디인지 모르게 자꾸 번지고, 술 탓인지, 눈 탓인지 통점마저 흐려졌다. 쌓인 눈을, 쌓인 도수를 생으로 버티며, 쓸데없는 눈 걱정으로 훌쭉해진 볼을 자꾸 비벼대던 날이 있었다.

 

 

 

 

 

기침

 

 

기침이 잦아지면서

성가시던 가려움증이 사라졌다.

독한 놈을 더 독한 놈이 몰아낸 꼴이다.

쿨룩, 쿨룩

혹여 비뚜로 나간 말이나 행동이

이부자리까지 들썩하게 하는 게 아닐까.

짐짓 일상을 반성하는 시늉까지 하는데

아내는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야단이다.

기운을 다 소모하면 편안해질 것을

처방 받고 기운을 차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그래도 아내 말에 토를 달지는 않는다.

아예 밥까지 먹지 말라고 하면 곤란하니까.

굶을 수만 있다면 그리해도 좋겠지만

가려움증이나 기침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게

한 끼를 굶는 일이다.

구걸도 마다않는 가난 앞에는

너무 부끄러운 고백이다.

배고픈 이웃은 가까이 있는데 무수한 말들만

분파를 나누어 배부르게 경계를 쌓고 있지 않은가.

기침은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아

저 홀로 밤새 터져 나오니

아내 입장에서는 께름한 것이 당연하다.

다 낫기 전에 병원에 가야겠다는 우스갯말을

느지막이 고민해 보는데

그래, 안 그래, 그래, 안 그래

연하여 묻듯이

쿨룩, 쿨룩대는 것이다.

 

 

 

 

 

허균에게

 

 

  책을 암만 읽어도 쓰일 데가 없어 술로 허송하던 시절, 천출이 세상에 어디 있냐는, 기왓장 깨는 듯한 당신의 일성은 내게 바로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죄 없이도 불안한 무지렁이들과 함께 하는 길이었고, 등쳐먹고 곤댓짓하는 양반 나부랭이를 조지는 길이었고, 태어날 때부터의 차별을 거부하는 길이었습니다.

 

  모든 것의 위인 왕과 모든 것이 성은이라고 비위 쓰는 무리가 당신과 나의 행동반경을 조여 오자, 슬프게도, 당신은 현실과 타협하는 쪽에 섰습니다. 나를 외딴섬으로 유폐시킨 것은 당신이 마주한 벽을 내게 강요한 것입니다. 적통인 당신은, 서자인 나를 홍길동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보냈지만 팔도 어디에서도 나를 허구라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내가 당신의 분신이라서가 아니라 이 땅의 꿈꾸는 자의 소망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디쯤에선가 당신의 꿈과 나의 꿈이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저 당신과 나란히 앉아 같은 높이로 술 한 잔 나눌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차이를 인정하되 차별이 없는 나라를 한통으로 말하면 오죽이나 좋았겠습니까. 우리의 혁명은 실패에 직면했습니다. 위를 받들고 위와 아래의 구별을 없애고자 했던 당신의 한계입니다. 허나 실패에 대한 책임은 누구의 몫도 아니고, 모두의 몫입니다. 질서라는 이름의 폭력을 질서에 순응하며 바루는 일이, 법을 따르면서 악법을 고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압니다. 그럼에도 그리 가야하는 것인지……, 당신, 숙제입니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가을이면 느티나무가 좋았다.

두 해 전 말라죽기 직전

막걸리 대여섯 동이 빨아들이고

살아났다는 느티나무였다.

그리고는 나이를 거꾸로 먹기 시작했다.

바스라진 껍질을 떨어뜨리고

미끈한 맨살을 내놓으며

갈수록 참해지고 야해지다가

드디어 잎잎이 붉게 타올랐다.

 

낮술 걸친 날

느티나무 아래 일없이 서성거리다가

느티나무 이파리처럼 빨갛게 물들어

느티나무 꼭대기를 쳐다보았다.

막걸리 두 잔에 되돌릴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고

그런 공짜가 있겠냐고

주름진 하늘이 묻고 있었다.

 

술 깨는 저녁에

느티나무 아래 서서

느티나무도 공짜 술을 먹지 않았느냐고

그 덕에 지금 불타고 있지 않느냐고

이제 나도 젊음을 지펴

생명을 한껏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부르르 떨다가 돌아섰다.

느티나무 아래

바람 이는 소리가 사납게 들렸다.

그런 가을이었다.

  

 

 

 

 

무서운 이야기

 

 

  보일러 끓는 소리 따라 이야기도 슬렁슬렁 풀어진다.

몸이 아프면 귀신이 든다고 하잖아. 내가 그 꼴인 게야. 오줌을 늦게 가렸어도 무탈하기만 했는데 덜컥 저승길이 보인 거야. 요즘 같으면 병원에 간다고 호들갑이겠지만 그땐 걱정스런 눈빛만 잔뜩 부조 받았어. 앓는 소리도 못 내는 불덩이의 몸으로 이불 덮고 죽은 듯이, 아니 거지반은 죽어서 흰자위만 치뜨고 있었을 거야. 밤새 물수건을 대던 할매도 등을 보이며 졸고 있었어. 아릿한 마음에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할매, 할매를 불렀지. 웬일인지 돌개바람에 문풍지가 사납게 울더니 정신이 번득 들더군.

 

  ……할매가 아니구나!

 

  목소리가 안 나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다시 죽음 같은 깊은 잠을 지나고나니 머리맡에 할매가 알 듯 말 듯한 웃음을 물고 있었어. 열은 감쪽같이 내렸고 말이야.

 

  내 이야기가 무섭지 않아?

  보일러 기름 값이 더 무섭다고.

 

  그럼 이제 뜨거운 이야기 하나 해볼까.

 

 

 

 

 

<신인상 당선 소감>

 

 

잘 여문 시 한 편을 위하여 | 이동훈

 

 

 

  국숫집 가는 길이었습니다. 집집이 면발도 다르고 국물도 다르지만 그 다른 것이 제 맛을 내도록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망설이다가 재차 내놓은 글이 선에 들었다는 말씀을 듣고는 국수 맛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한편으로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습니다. 바깥에 내놓아도 되는 글맛인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 딴에 그럴듯하게 여기고 마침표를 찍었던 것도 며칠 후에 꺼내 보면 엉성한 데가 수월찮이 눈에 뜨였습니다. 어찌 보면 글 쓰는 사람 자체가 빈구석이 많고 허술한데 글발이 속 시원히 통한다면 그게 이상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빈 곳간에 가깝지만 제 주변을 잘 건사하고, 이웃의 이야기에 마음을 기울이고 그 삶을 들여다보면서 부족한 곳을 조금씩 채워 나가겠습니다. 언젠가는 잘 여물어 똘똘한, 그래서 나누어가질 만한 시 한 편을 외게 될 것이라고 주문을 걸어 봅니다.

 

  저의 모자람을 좋게 헤아려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고개를 숙입니다. 발이 익어 저절로 찾게 되는‘시마을’벗님들께도 머리를 꾸벅입니다. 오는 주말엔 가족과 함께 소문난 국숫집에 가야겠습니다. 같이 드시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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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방 외 4편

 

조 삼 현


새 한 마리 휘익 부리로
바람을 가르며 늙은 오동나무 귓속으로 들어간다
동굴처럼 어둡고 게르처럼 아늑한,

오동나무는 겹겹이 여미고 싶은 나이테의 욕망 대신 몸속에
소리의 방 하나 들였던 것이다, 늘 비워 두어 새들과
한데 잠 뒤척이는 풀벌레며 다람쥐
제 상처에 깃든 것들을 비좁고 넉넉한 품으로 감싸 안았다
천둥소리 바람소리 눈보라 드나들며 몸 데워 가게 하였다
어떤 날은 집 단장을 하는지 새가, 그러다 부리 다친 새가
물렁뼈를 쪼아대어 수심이 깊어지기도 하였지만
온갖 소리들이 오래 머물다간 방은 늘 이명처럼 왕왕거려
귀앓이를 하기도 하였지만
귀멀수록 환해지는 것 오감이어서, 오동은
나무의 결속에 더불어 살아 온 이웃들의 소리를 귀담았다

오동나무, 맑고 푸른 경전을 뜯는다
오동나무가 우려낸 거문고, 장구, 가야금 중중모리는
소리의 방에 녹음된 오래된 미래*를 풀어내는 것이다

*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택배 

 간곡한 마음이면 틀린 주소로도 전해지는가 겹겹이 주름진

앙상한 손 떨면서 탁본을 뜨듯 베꼈을 어머님의 기별 확, 코

끝에 와 닿는다 맵다 나는 차마 박스 속 속정 들여다보지 못

하고 남향의 하늘만 우러르고 있네 가을비 한 두름 울컥, 눈

물처럼 지나가고 지난여름 아린 기억 한 점 뭉게구름 피어오

르네 팔월 땡볕에 시들지 않은 것은 전봇대뿐이었지 관절염

두 다리를 질질 끌며 궁둥이에 폐비닐방석 매단 앉은뱅이걸음

밀며 고추를 따시는 어머니! 온몸으로 기어 가는 한 마리 굼

벵이였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한 고추대허리춤 두 손 받혀

쭈우욱 펴 일어서며 "저 염병할 놈의 화상은 왜 지만 폔케 자

빠져서 이 고생을 시킨다냐, 그래도 어짤거시여 내가 이거라

도 한께 우리 자석덜 묵고 맵게 살제" 고추밭 옆 하얀 참깨꽃

밭에 모신 지아비 봉분을 향해 화살 된통 쏴붙이더니 몸빼 속

뇌신* 한 알 꺼내 드시고 이내 회오리바람 몰아친다

 지난여름 고추들은 어머니 욕을 먹고 매운 맛 붉게 차올랐

다. 지금, 고춧가루 알갱이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염병할 놈

염병할 놈 염병할 놈 염병할 놈 너 혼자만 잘 묵고 잘 사냐,

하는 것 같다

* 진통제


동행
- 메인스트림에 대하여


누군지도 모르는 아무나 당신, 우리
연애 한번 해보는 건 어때
수작 한번 부려보는 건 어때?
빛이 그림자를 內外처럼 동행하듯
시가 시인을 한평생 데리고 살듯
늘 가까이 또는 멀리 있는 그대여
재래시장 허술한 순댓국집에서 만나
시린 소주잔으로 첫인사를 기울인,
마을버스를 타고 가다 아등바등
지하철을 갈아타는 그대여
검정 비닐봉지에 두부 한모 사들고
해거름녘 골목길로 휘어져 가는 이여
목소리가 작아 어깨를 움츠린,
정이 안양천 물비늘처럼 남실거려
하찮은 것에도 그렁그렁 눈시울이 젖는 이여
오늘도 무사하였구나, 서로 등 다독이는
늘 중심이 아닌 길모퉁이의
누군지도 모르는 아무나 당신, 우리
팔짱을 껴보는 건 어때
스크럼을 짜보는 건 어때?


 


육교 위에서

 

이 비 맞고 나면 병이라도 나래지
나비바람* 때도 옹골차던 이파리 훌치는 가을비
앓은 뒤 아이는 사닥다리 한 칸쯤 하늘로 올라가겠지
늙은이는 땅 밑 전설 속으로 한 뼘쯤 잦아들겠지
우산도 없는 공중에서 땅을 밟지 못하는 중년
사내가 나를 찾아 가고 있는 이 길은
몸보다 먼저 떠난 마지막 열차
마음은 벌써 서해 앞 바다를 품어 안고 있건만
피조개 속살처럼 붉디붉은 석쇠 위에
썰물만 하염없이 굽고 있구나, 가리비가 지글지글
제 몸속에 농축한 바다를 토해내 듯
웃자란 기억 속 해금 안 된 문장들이 들끓고 있구나
네온사인 불빛은 하나 둘 심지가 잦아들고
첫 열차가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데도
밀물은 개찰구에 막힌 듯 돌아오지 않는 아침
나, 그 비 맞고 나서 열꽃이 무성하다.


* 나비바람 : 태풍이름


비밀의 방


아내 몰래 방 하나 감춰 둬야할까 봐요
개심사 목백일홍 끌어안고 사진 한 컷 찍은
연분홍 꽃향기 살짝 풍긴 사연이 불꽃 지폈나
내 카메라폰 열어본 그녀 철썩!
내 뺨을 후려치듯 핸드폰 폴더를 닫는다
그녀는 나에게 改心하라하고
나는 開心했으니 고쳐야할 마음 없다하였으나
물증이 진술보다 명백하다 보여 줄 것 더 없다
철조망을 치고 공포탄을 쏘아대는 그녀, 이렇듯
고치라는 것과 엑스레이필름 훤히 걸어 두어
허파에 바람 든데 덧난데 헤진데
몇 번은 당신이 호호 불며 상처 꿰매준데
보일 것 다 보였다는 기타 줄 팽팽한 긴장이
재즈를 뜯다 급기야, 꽈당 쾅 깨진
결혼사진 액자 속 이십년 동안 웃는 두 사람
저 미소 거둘까 말까 지울까, 순간
안방 문 삐쭉이 열고 쳐다보는
머루알 같은 눈동자가 넷!

핸드폰에 비밀번호를 채워
방 하나 감춰둬야 할까 봐요, 아내 몰래



<당선 소감>

한 벌 옷이 되기 위하여 / 조삼현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가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고치모형의 집입니다.

나는 누에처럼 온몸을 뒹굴며 명주실을 뽑아 스스로가 갇힐 감옥을 지었습니다. 물론 내 입에서

뽑아내는 실이 누군가의 옷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알았다면 명주가 아닌

광목을 짰을 것입니다.

  나의 실수가 마음 갇힌 자들과 마음 닫은 이들의 한 벌 옷이 될 수 있다면, 우화등선 날개옷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그들을 위하여 한 번쯤은 더 실수를 하고 싶습니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깜깜한

고치 속에서 아직은 서투른 부리로 콕콕 문을 두드렸습니다.

  줄탁동시 문 열어준 심사위원님들과 조수옥 시인, 조기조 시인께 무릎 숙여 감사드립니다.

함께한 시주막 동인들, 그대들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조삼현 시인 약력]


* 전남 영암 출생
* 이메일 : sam32112@naver.com




출처 : 우리시회(URISI)
글쓴이 : 홍해리洪海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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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외 4편

 

방 인 자


첫눈 내리는 날
시간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유행이 한참 지난 낡은 간판을 바라보면
빛바랜 것들이 나를 잡아당긴다
눅눅한 냄새 속에서 불려 나오는 추억
오랫동안 침묵했던 활자들이 꾸물꾸물 기어 나온다
누구의 연으로 잠 못 이루던 밤 읽던
시집들이 아직도 따듯하게 남아 있고
굵게 쓴 이니셜을 문신처럼 안고 있는
사전들의 눈동자가 똘망하다
십대의 푸른 시간을 점거하던 참고서들의
너덜대는 귀퉁이마다 빛났던 야망을
투명 테이프가 붙잡고 있다
새 책인 채로 나이를 먹는 것들이 아우성에 목이 쉬었다
채석강 층암절벽처럼 쌓여서
시간에 깊은 뿌리 내리고 이 순간을 나룻배에 태워
과거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쪽 벽을 밀면 미지로 소통하는 통로의 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나오고
나는 활자들 속으로 먼 여행을 떠날 것이다






깊은 밤
돈세탁을 했다는 연락이 왔다
깔끔한 그녀가 지갑을, 돈을, 어지러운 시간을
북북 치대고 방망이로 두들겨 빨았을 것이다
맑은 물에 세상의 일부를 헹구고 또 헹궈냈을 것이다
뽀얀 돈들이 일렬횡대로 빨랫줄에 걸려 나풀거리고
카드의 마그네틱이 빛을 잡아당기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밤새 꿈을 꾸었을 것이다
돈을
영화 인디아나존스의 주인공처럼 헬기에서 뿌렸을 것이다
돈을
히말라야산맥의 눈 위로 소낙눈처럼 뿌렸을 것이다
찬바람에 속이 시원했을 것, 아니면 불안했을 것
그렇게 돌아와 따뜻한 침대에 누워 언 몸을 녹이고
이른 아침 그녀는 돈을 손바닥 다림질 하였을 것이다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것들을
지갑에 살피로 꽂고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돈세탁하고 당당하게 사는 방법에 대해
고심할 것이다



불을 지피다


빈 깻단을 지펴 물을 끓인다
다 털린 빈 몸을 불이 잡아당긴다
꼿꼿하게 물을 끌어올리던 푸른 몸이 바짝 말라
빨간 불속으로 말린다
타다닥
짧은 비명이
폭죽처럼 터지고
순간,
고소한 몸 냄새

울컥
갑자기 목젖까지 뻐근하게 올라오는 슬픔
어머니의 고소한 냄새가
가슴속 깊이 스며든다
톡톡 다 털려 바싹 마른 몸에
화기가 남아 있는 것은
아직도 깍정이에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게다

물이 끓는다
솥뚜껑 사이로 한 줄금씩 눈물이 흐른다
어머니의 평생이 다 털리고도 뜨겁다



토마토는 뜨거웠다


식전
반으로 가른 토마토
탯줄이 시작된 곳으로부터 실핏줄이
온몸에 퍼져 있다

말캉한 다섯 개의 심장들이 술렁이고
손을 타고 주르륵 쏟아져 내리는 선혈
저 뜨거운 속
벌써 붉은 햇살이 당도해 있었구나

달싹이던 심장이 덜컥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통째로 익은 뜨거운 사랑이 기지개를 켠다

나, 얼마나 뜨겁게 살고 있는가
가슴속을 뒤적여 본다
저 깊은 속 어디쯤에서 불그스레 올라오고 있는
사각거리는 사랑 하나 말캉하게 걸린다


청포도


청포도를 먹다가
덤으로
달콤한 햇살도 먹는다

새콤한 달빛도 먹는다
바람 껍질이 입안에 남아
단물의 끝자락을 혀에 걸어놓는다

토실한 것들 사이에
거뭇한 꽃자락들
한때는 꽃이었다가
쭉정이로 남은 것은
실한 알들에 대한 양보가 아니었을까

자꾸 그것들이 마음을 잡아당기는 것은
쭉정이로 남았어도
한때 실한 알이 되고 싶었던 꿈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루지 못한 꿈도
어루만질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이 그립다

톡톡
마알간 알갱이들이 터질 때 마다
거뭇한 꽃자락들이 자꾸 나를 잡아당긴다



<당선 소감>

무지개처럼 잡히지 않는 시, 그 아름다움을 찾아서 / 방인자


  언제나 가슴앓이는 봄으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나무에 물

오르는 소리가 들리면 마음에 고뿔이 걸렸지만 설레임으로 쿨

럭이던 시간들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무지개처럼 詩는 잡히지 않았지만 그 아름다움, 울컥 솟구

치는 감동이 참 좋았습니다. 나에게만 시치미 뚝 떼는 詩. 그

시를 찾으려 오감을 열어놓습니다. 오늘도 나의 하루를 격려

해주는 시가 있어 마음을 맑게 하고 더듬더듬 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부족한 제 시를 당선시켜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그리고 따뜻한 사랑과 관심으로 시 세상의 문

을 두드릴 수 있게 해 주신 강홍기 교수님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언제나 제게 따뜻한 손을 잡아주시고 다독여 주시는 증재록

선생님, 최석희 자문위원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어깨를 감싸주던 문우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야무지지 못한 저를 늘 살뜰하게 챙겨주는 남편

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직도 두렵지만 열심히 시를 향해

정진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방인자 시인 약력]



* 충북 괴산 출생.
* 이메일 : scent3535@hanmail.net



출처 : 우리시회(URISI)
글쓴이 : 홍해리洪海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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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품>

 

 

<월간『우리詩』2008년 상반기 신인상 당선작>

 

달콤한 지구  외 4편

황 연 진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건물들 사이로 차량이 질주하고
도시가 앓는 소리를 낸다
아프지 않은 과육은 더디게 숙성한다고
농익은 불빛들이 말한다
달리면서 상처를 내지 않는 건 없다
종잡을 수 없는 발자국들이
무수히 보도블록에 찍힌다
줄지어 다가오는 가로등과 신호등
불빛에서 불빛으로 이어지는
뜨거운 순례,
숨 막히는 통증이 불을 켠다고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른다고
벌레 먹은 사과 속이 물크러지듯
골밑을 덮어 흐르다 시득시득
웃음을 베어 무는 강,
사람이 만들어내는 상처가 너무 향기로워서
지구는 빛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숨이 차올라
불빛들은 소리 지른다
벌레들이 어두운 살 속을 통과하고 있다



장미꽃 다발 

장미꽃 삼십 송이를 한데 묶어 비닐에 싼다
비닐은 꽃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꽃에게 말 걸지도 않는다
장미꽃 노란 다발을 투명 비닐에 싼다
비닐은 꽃을 흠향하지 않는다
비닐은 꽃을 시기하지도 않는다
장미꽃들이 이 빠진 상어처럼 웃는다
장미 꽃다발이 흐드득 흐드득 웃는 소리를
비닐이 듣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비닐은 무심하여 청각을 유지하려 하지 않았다
이 세상 버려질 것과 사라질 것들에 대해
마음을 집중하지 않았다
장미꽃은 웃고 찔리고 아프지만
그런 것들이 투명한 중독에 이르지는 못한다
세상에는 무미건조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를테면 주사액은 절대로 마르지 않는다
향기를 그리워하지 않은 지 오래,
비닐은 장미꽃 다발을 구겨 안고 거리를
활보하는 일이 절대로 불편하지 않다
장미가 시들어가는 것은 애초부터 아름다웠다



 



아파트 앞동 수많은 창들이
밤낮으로 수년간 내 쪽을 향하여 있다는
이 견고한 사실로부터 그윽이 불안해질 때 있다
뒷동 어느 집 사내가
홀딱 벗은 채 목욕탕에서 나오는 것을
내가 불시에 목격하였던 것처럼
앞동의 어느 누군가가 엊그제 소파에 무너져 울던
내 모습을 보았을지 모를 일
감춰진 누군가의 절망을 또 다른 누군가가 들여다보고 안쓰러워했을 거라고
달콤한 위안을 느껴야 할까, 수치에 떨어야 할까
더러 미끈해 보이는 거울 속 내 각선미에 취해
혼자 밟아보던 스텝들을
누군가 똑같이 따라 밟기라도 했을까
베란다 넓은 창문은 총천연색 무대의 투명한 막이었을까
집집마다 똑같이 현관에 문 닫아걸고
다른 쪽으로는 몇 개씩 구멍을 내어 시종
침묵하는 무수한 이웃들의 눈

 

야간비행

밤에는 날개를 펴지 않는다
땅 위를 걸으며 길바닥에 박음질한다
날아오를 때의 아찔함,
분간할 수 없는 항로의 아득함,
던져버리듯 꾹꾹 발자국 내리찍는다
허공의 아침은 풋사과의 향내를 풍기며 왔다
붕붕, 까딱이는 꽃모가지들을 건드리면
서로 부딪히는 나뭇가지와 빛살,
현수막들이 금세 얽혀들어
푸르르 불꽃을 내며 타올라 버렸다
연기와 그을음에 눈이 아렸다
길은 길 사이로 빠져나가고 날개 끝으로 그리는 노선은 언제나
반복을 연출하기만 했다
이젠 더 날아오르지 않는 그윽한 저녁
몰래몰래 내려와 숨 쉬는 것들이 이리저리 길바닥을
누비고 돌아다닌다, 그렇다
향기도 빛깔도 없는 맨바닥에 수놓아지는
끈질긴 목숨의 얼굴,
거대한 활주로가 밤새 완성되고 있다



 

한밤의 천 원짜리들

아파트 단지 쥐똥나무 울타리 아래
한 개 천 원짜리 길게 길게 줄지어 있다
파릇한 형광램프 불빛에 며칠째
나뭇잎들은 잠 못 이루고 있다
손거울, 장식액자, 국자, 등 긁개에서 로봇인형까지
낮에 다 갖지 못한 물건들
지친 귀갓길엔 단 한 장의 지폐로 살 수 있다고
행인들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긴다
환한 대낮 제자리에 놓여 있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세간들
갖가지 체위로 그림자 깔고 앉아서
아롱아롱 복숭아 색 살빛을 내뿜고 있다
네모난 플라스틱 바구니에 칸칸이 담겨
밤거리에 불 밝혀지면
사람의 살림살이도 한 편의 긴 춘화가 되는구나
그저 구경만 하고 지난다 해도 어쩌진 못할
굳이 만져만 보고 간다 해도 어쩌진 못할
빛 좋은 천 원짜리들
긴 밤, 뜬눈으로 한바탕 꿈꾸고 있다

 

(월간『우리詩』2008. 8월호)

출처 : 우리시회(URISI)
글쓴이 : 홍해리洪海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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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2008년) 월간 <우리詩> 신인작품 당선작
                        독해 외 4편 / 이경희

                          독해 / 이경희 우리 집 개는 슬쩍 슬쩍, 내 곁을 지나다닐 때마다 나를 핥는다 입으로 맛을 보거나 하지 않으면 뭔가는 시원치 않다는 듯 바코드를 읽어 내려는 센서처럼 재빨리 혀를 댔다가는 지나간다 부지런히 제 볼일 보러 가다가도 아차, 잊은 듯 돌아와 핥는다 내가 밖에서 돌아와 섰을 때나 식구들 편하게 섞여 티브이나 무언가에 키들거릴 때 그 속에 적당히 숨어 있는 나를 개는 잊지 않고 맛보고 간다 오늘은 간이 좀 어떤가 하루 동안의 내 노동의 발등 근처를 할짝, 어느 때는 영 신통치 않다며 제 발바닥으로 꾸욱 밟고도 지나간다 태업한 성분의 어중간한 핑계만으로는 찔끔 내 발을 물러나게 하기도 하는 그, 도대체 집요한 모종의 탐색에도 나머지 무엇이 몹시 모자라, 모자라다며 개는 핥는다, 내 궁금한 발이나 손을 그 때마다 순간적으로 나는 껍질이 찝질하고 얄팍한 어리둥절한 먹이다
                          밥밥 디라라 / 이경희 참을 수 없이 뱃속이 추운 날, 공복이 퍼렇게 언 입술로 와들거리며 나를 올려다보는데 그런 날은 찾아 나서고 말겠다, 띠띠 기필코 만나러 가겠다, 띠띠 주술에 걸린 위장이 어딘가로 스돈돈돈 타전을 하고 손을 잡고 우리는 나란히 외출을 하지 정통으로 무엇을 통일하고 싶었을까, 문득 통일 순대국, 밥집 하나 찾아냈어 내가, 내 위장이, 내 식욕이, 모르스 부호 같은 내, 교란 중인 추위가 서로 다른 위장들이 걸어 다니다가 위장끼리 눈이 맞고 위장끼리 사랑을 하는 참을 수 없는 위장의 노래들을 어쩔 수가 없어서 서둘러 들어서서 밥을 시켰는데? 뱃속 저 밑바닥에서 오래 전부터의 한기가 발끈 눈을 떴어 오랜 무병의 여자가 기어이 제 정체 알아차리고 까무라치듯 저기 주방 저 쪽에 열렬한 체온을 가진 아주 뜨거운 그것, 감춰진 신물에 이끌려 찾아 왔노라고 격하게 대기하고 있는 것 같은? 이제 드디어 내림굿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와 뱃속으로 월담해 들어오는 달빛, 혹은 탐욕 같은 것 들어와 봐, 너를 보여 줘 단청처럼 지랄스런 색동옷을 입혀 줘 미친 꽃 하나가 아, 하고 입을 벌렸어 그리고 드디어 이윽고 너 그리웠어, 그리웠어, 마구 뒤섞인 재료들이 어쩌면 외설적으로도 엉켜 있지 섣불리 마구 헤집어도 무방비로 제 몸을 헤쳐줄 것 같이 하찮고 값싸고 그러나 뜨거운 들쥐처럼 나는 빨갛게 빛나 열렬함은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걸까 먹,는,다, 는 건 얼마나 화려한지 가랭이를 벌리고 핀 꽃 같지 않아? 그때 어떤 철학 하나가 진땀을 삐질거리며 돌아갔지 그러면 알게 돼 밥을 물고 울음을 삐죽이는 건 모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참회 때문이라는 걸 나머, 진 너, 무 무 참, 해 가 볍 거, 나 그리고는 문득, 후두둑 사랑이 끝난 후의 담배 한 모금이라는 샹송이 생각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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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라보다 / 이경희
                                  까무룩한 잠의 뒤켠에서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다 돌아갔다 그 사이사이로 문득 비행기 소리 지나가고 귀 아득한 곳 잠도 아닌 이승도 아닌 저기 어디쯤에서는 편지 한 장 날아오지 않는다 이대로 잠들어 눈 뜨면 혹시 이 세상 사라진 행길가 아닐까, 똑깍 똑깍 무심히 일어나 발톱을 깎는 오후 나는 누군가 꾸고 있는 꿈속 이제 막 퇴장한 배우같이 문득 낯설게 창밖을 본다

                                   

                                  수인선 닭발 / 이경희 잘린 발들이 접시 위에서 오글오글 모여 궁리를 하고 있다 잘 자다 일어난 아침, 길 떠날 행장에서 어처구니없이 빠지게 된 도둑맞은 군화 같은 닭들의 발목 어느 볕 좋은 마당을 거닐다가 도난당한 장물인 줄도 모르고 매콤하니 쫀득한 닭발을 열심히 뜯다가 문득 그 많은 닭들은, 날다가도 이제 어디 가서 내려앉지도 못 하겠구나 신발 신으려다 말고 휘청 날개나 퍼득거리겠구나 매운 발들만 모여서 빨갛게 웅성대는 걸 보니 어쩐지 자박자박 발자국 소리 들릴 것도 같고 어디로 가시는가, 몸통이 없는 닭발만 걸어 다니는 아무래도 수인선 닭발집에 발 없는 닭들은 차표라도 끊어서 기차 태워 보내 주어야 할까 부다, 어디까지 갈 건지 무릎 꿇고 눈 맞추고 글썽, 찬찬히 물어 본 다음에
                                  하굣길 / 이경희 코스모스 꽃망울을 떠뜨리며 돌아왔지 영화동 농아학교 앞을 지날 때 근처 전파사 라디오에서는 김삿갓 방랑기를 했어 농아들의 수다스런 이야기 사이사이로 차갑게 뛰어오르던 가을꽃 슬픔도 기쁨도 아닌 것 같은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육성회비조였어 자치기를 하다가 거꾸로 본 세상에는 무엇이 있을까 비가 와서 고인 작은 물구덩이에 세상은 전부 거꾸로 서 있었어 만화가게랑 타다 세워둔 세발자전거 모두들 묵묵하게 곤두박질 쳐 있었어 발밑이 허물어져 집으로 가는 길은 멀고 돌아 돌아가면 그 산길 위에 어느 새 붉은 해 뚝 뚝 지고 있었어 

                                 

                                이경희 시인 프로필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출처 : 우리시회(URISI)
                                글쓴이 : 여 백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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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두 / 박승류

                                 

                                전생이 소였던, 나란히 선 구두의 발목을 보면

                                우멍한 소의 눈을 보는 것 같다

                                눈을 끔뻑거리며 쟁기를 끌고 가던 지난날의 소가

                                환생을 해서 콧김을 뿜으며 현관에 누워 있다

                                아침이면 은근히 재촉하는 소를 따라

                                매일같이 생존이라는 봇짐을 지고 길을 나선다

                                그때마다 그는 나직나직 소를 달래며 걷는다

                                급하지 않아 급하지 않아 오늘은 모두 다 잘 될 거야

                                잠시 발걸음을 멈추는 소, 문득

                                여물통이 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밭머리에 서서 먼 산을 한참이나 올려다본다

                                골목골목 긴 밭이랑에 발자국을 찍어가며 다녀야 하는

                                계단식 논밭을 오르내리며 쟁기질을 해야 하는

                                새로운 자신의 일이 생소했던 그날, 처음의 밭이랑은

                                참으로 길었던 것이야, 눈을 감았다가 뜬다

                                사래 긴 밭으로 가서 오늘은 기어이

                                성공을 하고만 싶은 외판(外販)을 위해 그는

                                빼곡히 적힌 방문 예정 고객명부를 또 다시 펼쳐본다

                                밭을 갈 듯 다시, 소처럼 차곡차곡 걸어가던 그

                                파종을 하고 거두어들이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바뀐다

                                서걱이는 발걸음으로 밭이랑을 헤쳐 나가듯

                                그의 일생은 늘 소처럼 걷는 것이다

                                어두워지면 잠시 쉬었다가 아침에 또 들로 나가는

                                눈이 더 깊어진 소 한 마리

                                이어지는 무실적으로 깊게 패인 수심愁心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다

                                 

                                 

                                 

                                 

                                 

                                햇살검객

                                 

                                햇살은 가끔 날이 설 때가 있다

                                날을 세워 다가올 때가 있다

                                칼날처럼 날이 선 햇살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리고 어쩌다, 깊숙이 베일 때가 있다

                                칼날은 계절마다 다른 검법으로 다가온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폭염검법에

                                차갑게 부서지는 혹한검법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춘추검법까지도

                                모두 경험을 해 봤다

                                칼날에는 칼잡이의 혼이 들어 있어, 어떨 때는

                                한번 휘두른 칼날에 가슴을 철렁 베일 때가 있다

                                또 어떨 때는 마음이 동강날 때도 있다

                                모르는 사이 눈동자를 쓱싹 베일 때도 있다

                                우멍한 눈을 파고드는 우수憂愁검법은

                                춘추검법의 한 지류이지만

                                오랜 기간 숙련되어 으뜸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나는 우수검법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

                                불혹을 지나 지천명으로 가는 길에

                                아차, 또 만나고 만 햇살검객

                                피할 방법을 찾지 못 했다 오늘도 나는

                                눈이 베였다

                                말간 피로 눈동자를 씻었다

                                배후는 늘 허공이었다

                                 

                                 

                                 

                                 

                                 

                                 

                                거미의 시학詩學    

                                 

                                시를 쓰듯이 정성껏, 거미는 제 집을 만든다

                                끊임없이 이어져 온 섬세한 사유思惟를 줄줄이 쏟아내듯

                                그는 영글어가는 생각을 촘촘하게 풀어내고 있다

                                행과 연을 살펴가며 운율을 조절하려는지

                                어순語順의 배열을 바꾸고 줄과 마디의 이음새를 고쳐나간다

                                씨줄과 날줄로 엮은 행과 연이 부드럽지만 팽팽하도록

                                줄과 마디의 이음새에 탄력을 주고 있는 그

                                풍향이나 풍속을 담아낸 뒤 다시 한 번 살펴보다가

                                침침해져 잘 보이지 않는 두 눈을 비비며

                                음, 이게 아니야 무엇인가 부족해 중얼거린다

                                그의 눈은 지독한 근시가 되어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천직으로 생각하듯 쓰고 또 쓴다

                                숨을 돌리듯 잠시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뇌리에

                                지난번 발표한 시가 문득 떠오른다

                                그 한 편의 시, 고뇌를 담으며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시에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비평을 하는 참새가 그러했고 독자들 또한 그러했다

                                다만, 몇몇의 날파리가 걸려들어 앵앵거릴 뿐이었다

                                갑자기 우울해지는 동안 구름 사이 해가 나타났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투명하게 보이던 그물망이 흔들, 꽃으로 보이다가

                                다시금 반전을 하는 결구로 마무리되고 있다

                                한 편의 시가 꿈틀 호흡을 시작한다

                                숨은 듯 보일 듯 바람이 행간의 은유를 넘나들며

                                가만가만 읽어 나간다 하늘이

                                말간 눈물을 흘리며 닦으며 파랗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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