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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우리詩문학상』신인상 당선작>

 

 

 

평일 늦잠자기에 대한 존재론적 소묘 외 4편

 

 

 

장수철

 

 

오랫동안 읽혀지지 않은 비밀서고의 금서처럼

나는 잠들어 있다.

가끔씩 책갈피 사이 실눈을 뜨고

방바닥 위 성간운처럼 펼쳐진

먼지들의 광활한 밀도를 가늠하다가

캡슐에 담긴 우주미아가 되어

멀고 먼 먼지 사이를 헤매는 꿈을 꾸기도 했다.

창문으로 한 덩이 빛무리를 이불 위에 싸질러 놓고

중천으로 달아나는 해.

어느 골목에선가 태초의 말씀처럼

트럭에 실린 과일의 이름들이 하나씩 확성기로 호명되고,

그때마다 세상이 하나씩 생겨날 것만 같은 한낮,

내 이름이 호명될 때까지 캡슐에 담겨

유성우가 내리는 저 성간운 속을 나는 헤매고 있다.

오늘은 세상이 생겨난 지 8일째 되는 날,

신들의 도서관서가 속 가지런한 책들 위에

분류기호를 잃고 덩그렇게 올려져 있는 나의 오후.

점심 빈 그릇을 담은 배달 오토바이를 따라

하루 반나절이 비탈을 내려가며

덜그럭덜그럭

나를 독해하고 있다.

 

 

 

 

 

엘리제를 위하여

 

 

엘리제는 어디 있는가.

트럭이 후진하며 들려주는 엘리제를 위하여.

 

능수버들 낭창낭창 흩날리듯

못갖춘마디의 도입부가 길바닥에 뿌려지고

트럭이 신중하게 후진할 때에 맞춰 속 깊은 엘리제가

후사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비탈의 이면을 분산화음으로 쓸어내리면,

골목길 바닥에 앉아 있다가

주섬주섬 공깃돌을 들고 일어서는 아이들.

 

비탈을 오르다 힘을 잃거나,

잘못 들어선 막다른 길에서 돌아 나올 때

홀린 듯 사는 내가 갑자기 낯설어 다시 나에게로 들어설 때

걸어 온 길 위 올망졸망 피어난 이끼꽃 식구들까지 처연히

짓밟으며 나는 언제나 못갖춘마디로 되돌아와야만 했구나.

 

트럭이 후진하며 들려주는 엘리제를 위하여.

나의 엘리제는 어디 있는가.

 

 

 

 

 

파 한 단

 

 

시장 모퉁이 담벼락에 기대어 무참히 꺾인

푸른 제 잎의 그림자 밟고 비스듬히 서 있는 파 한 단.

밭일하다 막 돌아와 담벼락에 기대고 앉아

담배 연기 내뿜던 아버지의 긴 그림자처럼

일몰 혼신의 햇볕에 장렬히 맞서며

뭉텅뭉텅 빠져나간 내 욕망의 머릿단 한 움큼 거기 세워져 있다.

하얀 발뒤꿈치에 피딱지처럼 말라붙은 흙발인 채로,

 

산다는 것은 파뿌리처럼

뽑힌 자리마다 옹골찬 구멍을 세상에 내는 일.

그리고는

담벼락에 비스듬히 제 등을 기대고

그때의 아버지처럼 꺾인 절망의 그림자 흙발로 밟고 서서

파 잎보다 검푸른 담배연기나 석양을 향해 길게 내뿜는 일.

스스로 시침이 되어

긴 그림자로 떠나야 할 때를 가늠하다가

제 발치에서부터 피어오른 어둠과 함께

지는 해를 길게 전송하는 일.

 

 

 

 

 

가을, 나무들의 사춘기

 

 

한결같이

사람의 손 닿는 곳 바로 위에서부터

나무는 첫가지를 펼쳐보였다.

제가 쓴 일기를 이제 좀체 보이려들지 않는

사춘기 딸아이처럼

저무는 도시의 문법을 익히고 나면

사람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곳,

비로소 제 느린 언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인적 끊긴 늦은 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성긴 머리채를 붓 삼아 밤하늘에 휘갈겨 놓은

저 수많은 별자리들 그리고

초저녁부터 덜 마른 눈물자국처럼 희끗

마침표로 찍어놓은 낮달 하나.

알 수 없는 나무의 사연들이 빼곡히 들어찬

사람의 손 닿는 곳 바로 위의 공중에서

나무는 정성스레 씨앗을 빗고,

가을이면

제 뜨거운 노래로 찬 가슴 오롯이 불 지르다가

깊은 서랍 속 자물쇠 채워둔 딸아이의 일기장 갈피마다

시뻘겋게 피멍든 생애의 낱장 하나

슬며시 꽂아두고 가는 것이다.

 

 

 

 

 

신문지 한 장

  

저렇게 넓은 가슴인 줄 몰랐네,

지하보도 한구석 누군가 덮고 잠든

신문지 한 장.

출근시간 지난 지하승강장 휴지통 출신이라고

얕볼 일이 아니었네.

정오쯤 지나면

제 풀에 일제히 주눅이 드는 조간이라고

내팽개칠 일도 아니었네.

석유 냄새 아직 칼칼한 제 날갯죽지로

아무도 어쩌지 못하는

뜨거운 슬픔 하나 품고 있는 것인데,

곱은 두 손 제 샅에 모아 넣듯

싸늘히 식은 희망 하나 비비며 데우는 것인데.

신문 속에 세상이 있다지만

펼쳐 놓으면

저렇게 큰 세상 덮고도 헐하게 남았으니

정녕 신문에 나고도 남을 일인데,

아직 신문 속 세상은 고요하네.

저렇게 넓은 가슴인 줄 아무도 모르네.

 

 

 

 

 

<신인상 당선소감>

 

  새 눈꺼풀 하나를 열기까지 | 장수철

 

 

  지독하게 외로워 본 사람은 안다, 불을 켜는 것이 누군가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음을 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함이라는 것.

 

  마천루 위의 고도표시등이 붉은 눈시울로 껌뻑거리는 저녁 하늘을, 여객기 한 대가 흐린 불빛으로 함께 껌벅이며 날아가는 장면처럼 내게 애틋한 것은 없다. 그 은밀한 접선을 위하여 암구호처럼 필사적으로 외고 있던 존재의 가냘픈 불빛을 점멸하는 것, 그것이 내게 시였다. 그만큼 시를 쓰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시 때문에 즐거울 일이 한 번도 없던 내게, 이 번 수상은 시로써 나의 생이 고양되는 첫 번째 기억이 되었다.  뽑아주신 심사위원 여러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할 따름이다. 내 시의 흠결을 너그럽게 지나쳐 주신 덕분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시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내 삶일까 자문해 왔다면, 이제 내 삶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시일까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이제 더 깊은 심해로 들어섰다. 그곳은 천지사방 해초처럼 미끌거리는 어둠뿐이므로 지상의 흐려진 두 눈은 아예 감고 가겠다. 조만간 내 몸 어딘가에서 등지느러미처럼 하늘거리는 새 눈꺼풀 하나가 다시 열리리라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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