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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봉지 / 이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선생님 지금은 손을 들어도 되나요? 이런 질문까지 손을 들고 해도 되나요? 부족하다면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똑똑똑똑, 문을 두드립니다. 뼈가 아픕니다. 오늘따라 더요.

 

안녕하세요, 인사합니다. 빈손을 흔들어 안부를 묻습니다.

 

문득 손을 든 나를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걸어갈 때 나의 냄새가 다른 사람에게 가기 전에 또 다른 나는 멈춰있고. 멈춰있고 싶은 것처럼.

 

그런 말들은 넘친다고요, 조금 더 자유롭게 살아보라고, 좀 예술적으로.

 

보이는 것 말고 집중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 이건 지워야 할 문장입니다. 무언가 있을 것 같지만 없는 문장이에요.

 

오늘은 많은 선생님들이 돌아가셨습니다. 어쩐지 동시에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거니 하다가 눈물을 흘릴 수도, 추모의 입을 열 수도 없습니다.

 

어제 동생이 그랬어요. 언니, 나 비닐이 생겼어. 아장아장 걸어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냅니다. 그 안에 어떤 것이 들었는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맨 처음 비닐을 기억해주면 좋았을 텐데. 언젠가 비밀에서 풀려나도록.

 

검은 봉지 안의 것들의 폭로. 더 이상 검은 봉지도, 폭로라는 단어도 필요하지 않는 세상이 만들어질 겁니다. 선생님이 일순간 사라졌다는 것을 기억할 테니까.

 

들었던 손을 내립니다. 한동안 볼륨을 낮추고 몸의 무게를 낮췄습니다.

 

도로 위로 비닐봉지 여럿이 떠오릅니다. 온몸을 뒤집고, 봉지 안의 추진력으로.

존경하는 선생님, 나는 문득 도로 위의 움직임이 더 배울만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선생님, 존경하는 세력이 한 줄 두 줄 줄어들고 있는 것은 왜일까요.

더 이상 손 들지 않고, 도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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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꼬치 / 강응민

 

우리는 노점상을 마주보고 나란히 서서

닭꼬치를 먹는다 한 방울의 매콤한 소스까지
남김없이 해치운다 그러다 문득 너는 묻는다
닭꼬치에 꽂힌 이 육즙 어린 살점은 닭의 것일까
그러자 머릿속에는 닭도 아닌 비둘기도 아닌 어떤
새가 그려지고 그것을 우선은 닭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말 그대로 피와 살과 뼈도
없이 아침마다 홰를 치고 모이를 쪼는 그런
가상의 닭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서로의
입술에 묻은 소스 같은 것을
닦아주었으니 가상의 닭을 엮은
이 닭꼬치는 가상의 닭꼬치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가상의 것을 좇는 식욕에 이끌려 왔을
따름이고 때때로 식욕은 사랑과 공생하며
허기를 태(胎)삼았으니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가상을 뒤따라온 우리의 사랑 또한
가상의 사랑일 수 있겠다
그리하여 가상의 사랑을 하는
우리 또한 가상의 우리일 뿐이고

그제야 알고 말았다

 

너는 나의 

나는 너의
가상이라는 것을
이렇듯 우리를 둘러싸고
계절감을 잃은 계절풍이 불어오자
소스도 핏물도 아닌 것이
뚝뚝 떨어지며
이내 흥건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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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진 시외버스 터미널 / 전명환

 

칼이 떠다니는 바다에는 술 위에 배가 뜬다

바람을 먹고 자라는 배들은 만석이 될 때까지 해를 거두었다가, 얼마 안 되는 빛까지 잔에다 들이붓고 말하는 법을 까먹은 등대만 눈을 깜빡인다

바다 향이 이렇게 독하다

동네에 불을 지르는 생각 같다

생각

 

소년은 쥐고 싶은 것이 많다

한 번쯤 쥐어 본 것들을 다시 놓지 않겠다고 결심할 때 소년은 과거로 도망치고

이 동네 사람들은

바다에 떠다니던 칼을 하나씩 주워 온다

대부분 사람을 죽이기 손쉬운, 생김새다

생김새니까 죽은 사람만 있고

죽인 사람은 없다

칼을 무서워하는 뜨내기들은 바람에 귀가 베여 있다

뜨내기들이 그렇다

 

나 또한 집에 칼을 세워두었다

나름 살 만한 동네라는 말이 거기서 나오고

 

몇 년째 일기에 꼭 쓰는 말이 있다

이 동네 사람들은 허세를 부린다 술을 마시면 누구나 그렇고 남자들은 대개 그렇다

그러니까 문제인 것이다

검은 비닐엔 만 원이 겨우 담기는데

게다가 단골이라니,

빨리 이 동네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뿐

가끔은 당신의 칼과 악수하는 상상

그때는 기쁘게 속삭이고 싶다

 

아저씨, 나는 더 무서운 사람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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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싸움 / 황익순

 

서로가 낭떠러지다
눈앞이 절벽이라 
흰자위 가득
거센 돌풍이 불어닥친다 
 
떨리는 뒷다리 오금까지 고기압이 진동한다
온몸을 다해 전진하지만 뒤로 미끄러질 뿐이다
머리 가득 느껴지는 체중에 사방을 볼 수도 없다
가쁜 숨결로 짠 조수가 밀려온다
늑골이 혈액에 휩쓸린다 
폐부로 높새바람이 세차게 치밀어오른다
분신의 격투

두개골이 폐석 더미를 박는다
탄광으로 폭음이 터진다   
절벽이 충돌한다
정월이 수평선으로 떨어진다
힘껏 내리친 도끼가 두꺼운 나무를 두 쪽으로 팬다
뜨거운 아스팔트로 굉음이 달려나간다
불타오르는 숲, 이제
멀어버린 두 귀와 속으로
붉은 피를 피리로 휘몰아가는 소리 
두 마리의 머리 
살갗으로 뼈가 튀어나온다

두 눈이
겁으로 가득 한
우물이 된다 
 
복받친다
열점의 숨결과 빙점의 공포가 자기장을 일으킨다
해골과 해골이 부딪친다  
비명이 비명으로 부딪친다
폐가 부풀어 올라 자꾸만 피멍을 친다
두 마리 동시에 몸을 빼고 
체중을 실어 힘껏 상대를 찍을 때 

뿔이 깨지는 소리
두 뿔이 깨지는 소리
두 마리의 두 뿔이 네 개의 뿔이 되고
여덟 개의 뿔이 되어
 
서로를 박는다
박는데도
박히지 않는다
밀려나지 않는다 바로 눈앞의
벼랑을 향해 서로
떠밀지 못하고
떨어지지도 못한다

절대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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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의 퍼즐놀이 / 고은별

 

이 퍼즐은 모서리로 보내야 하지
자, 봐 파란 지붕 마당 넓은 집 한 채가 완성됐잖아
잘린 버드나무 가지 조각을 하늘 조각 사이에 끼워 넣으면
단발머리로 잠을 자던 버드나무도 번쩍 눈을 떠
담은 아예 골라내도 좋아 그 자리엔
보도블록 사이 피었던 들꽃 퍼즐을 놓아두자
나의 발길을 따라 풍경은 조각조각 나눠지지
내가 허공을 한 발 한 발 짚으며
꽁무니에서 경계를 뽑을 때마다
허물어진 이 동네는 알쏭달쏭하게 흐트러져
나는 신중하게 수치를 재며 졸고 있는 버드나무 사이에 발을 뻗었어
수많은 다리가 조수가 되어 내 작업을 도왔지
서울 바깥 변두리에 얌전히 걸려 있던 동네는
어느 날 포클레인 폭격을 맞고 흐물흐물 허물어졌어
사람들은 모두 떠났고 이제 완성작을 기억하는 건 나 뿐
나는 조각들이 모두 떨어져
하늘과 버드나무가 뒹구는 동네를 다시 맞추는 중이야
좁은 퍼즐 속에서 지금도 자라는 뿌리들을
앞마당 텃밭에 옮겨 심는 중이야
깨진 창문 조각을 하늘에 두면 투명한 새털구름으로 새들이 돌아오지
시든 짚을 마당에 채워 넣은 날은
햇살 병아리가 쫑쫑 깨어나기도 했어
하늘을 한 조각 찾으면 빛도 한 조각 들어와 불 꺼진 집들을 밝히고
널브러진 그림자들 모아 맞추면
푸른 그늘 아래 멈췄던 바람이 다시 달리기를 시작해
내 투명한 집 속에서 버드나무가 몸을 일으키는 게 보이니?
곧 저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휑휑 휘날리며 퍼즐의 먼지를 닦아낼 거야
슬레이트 지붕 틈에서 꺼낸 보름달이 홀쭉해질 때마다
햇살과 병아리와 사람이 버드나무에 기대 살던 동네는 깨어나겠지
어느 하루, 한참을 덜어낸 보름달이 다시 차올라 둥글어지고
그 통통한 빛이 버드나무 머리칼을 빗어주는 날
그 쯤 되면 사방으로 숨어들어간 웃음 조각들도
돌아오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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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 서귀옥

 

안전제일, 팻말 앞에서
고양이가 죽어가고 있었다
등허리의 벽돌무늬 내려놓을 새 없이
아직도 계단을 오르는 중인지 허공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바람의 층수가 한 층 더 높아졌다
그 사이 몸은 저물어
옆구리에서 붉은 저녁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잠시 쉬려고 내려놓은 몸
제 그림자를 짚고 일어서다 풀썩, 무게를 놓쳐버린 고양이가
슬픈 옆구리에 머리를 박고 이아옹 이아옹
인간 남자의 목소리로 울었다
어깨를 짓누르고 열 손가락을 등 허리께에 돌려 묶어놓고
불타는 무늬를 새겨 넣을 때
몸을 찢고 나오던 소리였다
흰 실밥 부스스 풀린 등이 낡은 작업복처럼 펄럭일 때까지도
무늬는 깨지지 않았다
내가 발로 툭 치자
크게 요동치던 무늬, 안쪽에서 뼈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상처를 묶은 매듭, 무늬가 풀려버린 것이었다
고양이는 담장을 넘듯 가볍게 생의 자세를 바꾸었다
세상의 담벼락을 허문 것이
뿔이 아니라 뾰족한 울음이었을까
생의 얼룩 벗을 새 없이
쥐 오줌 얼룩진 천장을 덮고 잠들었던
주름무늬 인간도 저렇게 바닥을 건넜을까
고양이가 스며든 바닥이 캄캄해졌다

 

 

 

●제32회 계명문화상 시부문 - 심사평(장옥관 님)


예심 없이 투고작 500여 편을 모두 읽었다. 오늘날과 같은 속된 시류 속에서도 시를 쓰고 있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크게 위안을 얻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정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느낌이다. 투고작의 대부분이 자신과 세계에 대한 열정적인 탐구보다는 사적인 감정 피력이나 공소한 언어놀이, 상투적이고 피상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었다. 젊은이라면 생에 대한 좀 더 진지하고도 패기 넘치는 탐구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동행』(외 7편)과 『우물이 사는 집』(외 2편), 『소리의 정원』(외 3편), 『고양이』(외 3편) 등이었다. 이 네 명의 작품은 기본기가 탄탄하게 갖춰져 있었다. 습작기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감정의 과잉이나 과장된 포즈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시 속으로 끌어들여 녹여내고 있다는 점이 우선 반가웠다. 『동행』(외 7편)은 아픈 가족사를 바탕으로 우리 삶이 숨기고 있는 허구성을 핍진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의도한 전언이 너무 바깥으로 드러나 독자들의 시 읽는 즐거움을 빼앗는다는 점이 불만스럽다. 『우물이 사는 집』(외 2편)은 시어를 부리는 솜씨가 뛰어나고 시상을 엮어가는 구성력이 돋보인다. 허나 사적인 감정의 잔재가 남아 있고 기성의 틀에 크게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다. 『소리의 정원』(외 3편)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풍경에서 시를 낚아내는 능력이 돋보였다. 반면 젊은이다운 패기와 집요함이 느껴지지 않아 미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당선의 영예는 『고양이』(외 3편)를 쓴 투고자에게로 돌아갔다. 이 투고자의 장점은 응모했던 작품이 두루 수준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풀이, 쪼다』와 『드라이플라워』, 『꽃 피는 손톱』이 모두 당선의 범위에 들어 있어서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할 것인가 고민하게 만들었다. 진지한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개성적인 리듬을 구사해나가는 능력, 어조의 활달한 운용을 보여주는 언어감각, 시상을 무리없이 전개해나가는 구성력 할 것 없이 여러 방면에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오랜 기간 시를 매만져본 솜씨를 엿보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거듭 정진하여 큰시인이 되길 기원한다.

 

 

- 심사위원: 장옥관 시인

 

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겸 시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으며, 대표적인 시집으로 《황금 연못》, 《바퀴소리를 듣는다》, 《하늘 우물》,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등이, 동시집은 《내 배꼽을 만져보았다》 등을 펴냈다.
그동안 ‘현장비평가가 뽑은 2012 올해의 시 선정(죽음에 뚫은 구멍)’, ‘김달진 문학상’, ‘일연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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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를 뽑다 / 이서령

 

어딘가 비밀통로가 있었나봐요

그는 단 두어 번의 노크로 문을 열고 들어왔어요

분명 창문도 가로등도 없는 골목길인데 왜 이렇게 반짝이나 했어요

 

그가 귓속말을 할 때면 텅텅 울리는 기분이에요

이곳은 방음이 되지 않는 동굴, 엽서도 편지도

날카로운 것들은 모두 미끄러져 버린대요

 

그래서 작게 뚫린 공간으로 몰래 침입했대요

그 통로라는 게 참 오묘하게 열쇠는 없지만 계단은 있고

계단과 계단 사이를 건널 때 발이 빠질 수도 있으니

울퉁불퉁한 신발이 꼭 필요하다고 했어요

 

나는 밤마다 나를 찌릿찌릿하게 깨우는 그가 미웠어요

머리를 묶을 때나 책을 보거나 화장을 할 때마다

그가 열어놓은 창문 때문에 시큰시큰 머리가 아파왔죠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는 생각들은 그를 불러댔어요

 

한동안 내 몸을 한참 긁어댔어요 나는,

자두향기가 나는 그의 입술을 꼭꼭 씹어 먹으면서

주머니 속에서 나를 그만 꺼내주기로 했어요

 

자물쇠는 생각보다 날카롭지 않았어요

나는 그의 단단한 성벽을 허물고 빈 정원을 세웠어요

통증은 부드러운 모서리가 되려나봐요

 

밤새도록 나의 철문을 닦았어요 이제 자유로울 수 있어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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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살다2 / 박혜란(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3)

어머니가 내게 도장을 해주시던 날, 질퍽거려 비가 내려야 좋았다.
벼락 맞아 모로 쓰러진 대추나무에 천운이 깃든다 하니
나무에 나를 가두는 일이라 여간 설레었을지도 모르지
숲으로 나갈 채비하는 길목마다 그늘을 기우고 있는 나무들에게
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즐거웠던가


매끈하게 기름먹인 대추나무 탄 자리마다 숲이 숨어 있어
몇 십 년 째 세 들여 키우던 제비집이라든가
햇살의 실핏줄마다 서걱거리는 초록 풀내음
옹이자리를 타고 흐르던 매미의 세찬 울음소리
상황버섯에게 내어준 반 토막 몸의 시간
그 시간 어머니가 매만지는 빈 도장에 고스라니 전해지니
내게도 조금 으쓱했겠지


도장칼이 나무의 내력을 가로질러 내 이름 들이고 나니
내 몸 이미 숲이라
좁은 도장집에 빗물이 새도 내 안에 엽록소만 울렁거리곤 했다
다시 태어나는 안쪽 살을 주물러 밀어내는 것처럼
나무에게 내 이름을 주던 날
좌우가 뒤바뀐 이름이 내게 거울 하나 쥐고 살라는 말 같아
그날이후 붉은 인주에 마음 적시고
꾹 하고 어머니와 멀어지고 가까워지곤 했었지


창 밖에 비 내려 벼락이 치고, 아무래도 나는 비 오는 날만 아파서
쓰러진 나무에도 사연이 많아 그 나무 취하고 나니
거울 속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것만 같다
내 도장의 이름 속에서 그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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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호 구역  / 전인배 (대구가톨릭대, 스페인어과, 3학년)


람보르기니가 지방 국도에서 사라진다 반듯한 밑줄을 그으며 증발해 버린 람보르기니는 악어주둥이 같은 주머니에 고여 있다 시속 222Km의 그림자를 끌고 소화되지 않을 속도로 덩어리져 있다 모든 주머니는 손가락을 그림자로 만든다 밑바닥에 달린 지퍼를 길게 그으면 그림자 속에 몸을 말아 넣은 아이가 둥근 다리로 이륜 바퀴를 만든다 할리 데이비슨의 배기량으로 바탕이 컴컴한 고동을 몰며 주머니를 긁는다 동전 꺼내듯 건져 오르던 아이는 실밥처럼 너덜거리는 왼쪽 다리의 균형을 맞춘다 과속 비보호 구역을 걷는 어스레한 걸음이 그림자 낯이다 안개 눅눅한 도로를 지나 벽장 속에 몸을 누인다 어머니는 고라니의 따뜻한 피로, 붉은 벽장을 들어낸다

 

 

 

 

 

[심사평]

 

시인과 독자 사이의 소통, 혹은 작품 독해의 문제가 한동안 시단을 뜨겁게 달구더니 그 기세가 한껏 누그러진 듯하다. 소통하고 싶지 않은 욕망도 소통의 한 방식이라고 본다면, 이즈음의 현상은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라기보다 잠시 잠복기로 접어들었음을 뜻한다. 대학생들의 시도 그러한 기류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괴기스러운 말도 포즈도 없고, 일단 눈에 띄고 보자는 객기도 많이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유심히 살펴본 것은 다섯 명의 작품이다. [학꽁치] 외 2편은 군데군데 빛나는 풋풋한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이 사람은 사유의 군더더기를 가차 없이 베어버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대상과 더욱 치열하게 대면해 결투를 벌일 준비를 하자. [건강한 이력서] 외 2편은 한 편의 시 안에 나름대로 적절한 서사를 구성해서 시를 전개하려는 의욕이 있다. 그 의도는 칭찬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부적인 말의 밀도가 성기다. [새] 외 2편을 응모한 사람의 문장은 투명하다. 시를 어떻게 긴장시켜 끌고 가야 하는지도 알고 있는 듯하다. 때로 그 긴장이 지나쳐 말의 맥락을 놓치고 있는 게 흠이다.

 두 사람의 작품을 놓고 오랜 저울질이 필요했다. 그 하나가 [옹관묘] 외 3편이다. 활달하면서도 풍성하고 힘이 좋은 언어가 매력적이다. 게다가 만만치 않은 감각과 사유를 겸비하고 있다. [옹관묘]에서 ‘육신의 안쪽이 내세’ 라는 표현으로 점잖은 성찰에 이르고 있는 점은 이 사람의 내공이 상당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 사람을 당선자로 뽑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깨에 불필요한 힘을 잔뜩 싣고 타석에 들어선 타자라는 느낌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앞의 안정적인 언어보다 불안하지만 자기 목소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비보호구역] 외 5편을 선택하기로 했다. 현재의 성과보다 미래의 가능성에게 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당선작 [비보호구역]은 소품이지만 개성적인 상상력이 과히 일품이다. 주제를 언어의 안쪽으로 숨기는 솜씨도 뛰어나다. 이 시의 문장들은 하나씩 따로 끊어 읽어도 환각 같은 즐거움을 준다. 생의 통증을 이미지 안에 새겨 넣을 줄 아는 것도 호감이 간다. 함께 응모한 작품 중 [눈보라]도 신뢰를 더해주는 데 한몫했다. 축하한다. 다만 과도한 외국어나 외래어의 사용은 자제할 일이다. 한국어로도 충분히 우리를 낯설게 만들 수 있으므로.

 

심사위원: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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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판 / 조윤희(우석대 문예창작학·2)

 

다락방을 정리하다가 보았어
낡은 인켈 전축, 턴테이블은 사라지고
나무 밑동처럼 남은 자리
엄마가 혼자서 레코드판으로
켜켜이 나이테를 쌓아올리던 그 자리
그 많던 판들은 다 어디로 갔니
골목 끝으로 머리채를 붙잡고
언성을 높이던 엄마 목소리가 멀어지니까
갑자기 잡음 섞인 노래가 듣고 싶어
내가 몽땅 갖다 버렸다는데,
나는 아무래도 기억이 안 나
장롱 밑에 들어갔을지도 몰라
납작하게 엎드리면 보일 수도 있어
컴컴한 밑바닥 속으로 손을 뻗어
먼지 낀 레코드판 한 장을 꺼내들었어
무뎌지면 안 돼, 까다롭게 굴어야 해
콕 하고 찌르는 바늘이 날카로워야
그래야 음악에서 빗소리가 나지 않는대
이 판에서는 남편 없으면 무시당한대
평면이 된 지구가 턴테이블 위로 돌아가지
커다란 레코드판 위로 통근버스가
바늘이 되어 골목 곳곳을 찔러
사람들의 노래를 만들어 내지
그것 참,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 엄마가
뜻 모르고 흥얼거리던 샹송이 생각나
화장품 가방을 들고 훑었을
후미진 골목과 가방끈 맨 자리,
푸르게 퍼진 멍 자욱이 생각나
바늘처럼 뾰족하던 엄마는 찾아봐도
없어, 이제 내가 대신 바늘할래
골목과 골목을 긁으며
뱅글뱅글 돌아볼래

 

 

 

 

 

母音을 기다리는 새벽 / 박성준 (경희대 국어국문학· 2)

 

  어머니가 재봉틀 위에 밤하늘을 올려놓고 별자리를 박아 넣을 때마다 촘촘히 빛나는 밤의 혈관들 예리한 바늘 끝이 막 태어난 바람을 내 몸속으로 가라앉히네 그때 부풀어 오른 허공과 별똥별 떨어져 나와 오래 내통한 분홍 초크자국들이 일순간 혼미해진 내 몸에 가득, 수풀이 무성한 물가에 가 있고 다시 축축한 바람을 키워 밤과 헤어진 별빛들 나는 막연히 기다리다 몸에 오돌토돌한 바느질 선만 만지네
  
  몸 경계, 곡선을 빠져나오던 거친 물소리에 두 귀를 띄우면
  까치수영꽃 다리 저린 곳마다 오래 아리고 시린 곳이 있어 
  그곳에 웅크려 목에 걸린 바늘 찾아 헤매자
  첫 한글을 배우던 내 어린 입술이 어머니 관절 속에서
  오독오독 밤하늘을 씹고 싶었네, 젖은 곳을 찾아 찢어진 밤
  오므렸다 폈다 다시 오므릴 때마다 올 풀린 별자리들이
  내 입술주름 위에서 헝클어지고 뒤집혀 문드러지고,
  공기를 껴안고 몸속에서 밀려오는 그 첫 소리가 나를 오래 오래 어리게 했던 거라 
  이제 내가 깍두기공책만큼 좁은 방이어도 좋았네 
  갈비뼈 아래 바늘 대신 연필심을 꾹꾹 눌러
  온전치 못한 내 그림자! 母音을 기다릴 때마다
  작은 방에는 늘 재봉틀을 돌리고 있는 어머니가 계셔
  내가 쓴 커다란 글씨가 공책 벽에 미끄러져 녹아내려도
  배설하듯 그 첫 소리를 내뱉을 때
  꼭 그 공책 만해지는 내 방, 어린 몸이 아파
  밤을 새도 어머니가 다 기우지 못한 그림자를 주워 입고
  물렁물렁한 공책 속에 눈도 뜨지 않고 살고 싶었네

 

 목소리의 언저리마다 휘어 자란 까치수영꽃 하염없이 물가에 모두 띄우며, 母音을 기다리는 새벽, 끝나지 않는 따가운 소리가 목안 가득 고이고 있었네

 

 

 

 

 

 

 

[심사평]


 

예심을 거친 13명의 작품이 내 손에 들어왔다. 이 중에서 「하늘 장례」 외 2편, 「꽃이 피었다」 외 2편, 「아버지똥」 외 6편, 「묵을 씹는 밤」 외 2편, 「외출」 외 3편, 「박쥐의 서곡」 외 5편, 「공(空)과 폭(爆)」 외 2편을 먼저 내려놓았다. 상상력의 진폭이 좁거나, 시적 대상을 상투적으로 인식하는 데서 그치거나, 표현의 새로움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그리하여 나머지 6명의 작품을 놓고 오래 비교하면서 읽었다. 각각 저마다의 개성을 발휘하고 있어 당선작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언젠가는 좋은 시인이 될 것이다. 펜의 힘을 믿고, 시적인 순간을 만나려는 열정을 접지 않는다면 말이다.
「팬티를 입지 않은 여자」 외 2편은 특이하게도 성적인 언어와 상상을 동원하여 쓴 시들이다. 성기, 허벅지, 브래지어, 성감대, 아랫도리 따위의 말들을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에로티시즘도 하나의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시적 놀이’가 그저 가벼운 놀이로 끝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있다. 정말 시로 ‘한 번 질퍽하게’ 놀았는지 따져볼 일이다.

「하이힐을 신다」 외 2편과 「바람의 잉태」 외 5편은 균형 잡힌 언어감각, 고통을 겪은 사유의 흔적이 돋보인다. 트집을 잡자면 지나치게 심각하고 진지하다는 것이다. 너무 시다운 상황, 너무 시다운 언어를 선택하다 보니 시의 울림이 크게 확장되지 않고 있다. 시를 쓰면서 때로는 일탈을 꿈꾸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래야 상승할 수 있다.

「나무미장원」 외 2편은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가장 앞서는 작품이다. 어조의 얽매임이 없고, 분명히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 독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시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활달한 생각에다 좀 더 맛있는 언어를 비볐더라면 더 좋은 시를 낳을 수 있었을 것이다.

 끝까지 남은 두 사람의 작품이 나를 괴롭혔다. 「모음(母音)을 기다리는 새벽」과 「레코드판」이 그것이다. 두 편 모두 어머니와 화자인 ‘나’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탐색하고 있다. 잘 짜인 구성, 부드러우면서도 기발한 시상의 전개, 솜씨 있는 언어 운용 면에서 크게 나무랄 것이 없는 수작들이다.

앞 작품은 역동적인 이미지의 구사와 언어의 밀도가 풍성하고, 뒤의 작품은 시를 잡아내는 날카로운 시선과 언어의 절제미가 뛰어나 딱 하나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두 작품을 공동 당선작으로 뽑기로 하였다. 큰 시인이 되어 미래에 계명문화상의 자부심이 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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