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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 / 이용진 (강원대․경영학․3)

 

때로

탄가루 날리는 거리를 숨차게 달려가야 했다

부랴부랴 새벽잠을 구겨넣고 달려와

늘 검푸른 빛 감도는 석탄더미 깊숙히

삽을 꽃아 넣어야 했다

물안개처럼 굼실굼실 피어오르는 탄 먼지 바라보며

왜 이다지도 정신이 가물거리는지

저탄장아래 굳게 멈추어 선 화차에

나방가루같은 일상을 쏟아넣으며

다짐하고 다짐하여도

오늘 하루 어깨를 짓누르며 또 시작되는

새벽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떠나고 싶음의 충동으로 석탄을 퍼올리면

주루루 흘러내리는 가난

무엇으로 저 깊은 아가리를 채울것인가

 

해가 바뀔때마다

막장에서 캐어낸 일상의 화석들이

좁은 아궁이에서 오래오래 타들어가는 것처럼

나는 왜 타오르지 못하는 것일까

잘 갈무리된 생활을 갖기엔

기적을 울리며 미끄러지는 저 화차의

폐활량이 너무 깊은 탓일까

 

검은 이마를 빛내며 달려가는

화물열차에 몰래몰래 유년의 일기를 실어보내며

때로 내 성장기를 묶어둘 수 있어야 했다

생나무 가지 뚝뚝 분질러 밑불을 붙이며

매운 연기에 눈물이라도 흘려야 했다

 

 

 

   

 

사상터미날에서 / 정현열(부산대․국어국문학․4)

 

모두들 침묵하고 있었다

사상공단의 핏대 세운 굴뚝이 대합실 유리창 너머로

노을빛의 끈적끈적한 거품을 쉬임 없이 토해 낼 즈음

살얼음이 번지는 낙동강 강바닥을 날아오른 철새들은 삼삼오오

뿌우연 도시의 저녁하늘을 끼주룩거리며

가로지르고 있었다

 

초겨울의 통영행 쓸쓸히 내려 감은 눈꺼풀 속에서 주름 잡힌

어머니의 미소 띤 나무등걸을 떠올렸을 때

철 지난 갈대숲은 팽팽한 실핏줄의 바람을 몰아

지방 국립 대학 국문과 졸업반인 나의

야윈 늑골을 뿌리채 뒤흔들고 있었다

 

아무도 흐린 말꼬리를 붙잡지 않았다

더러는 판문점 소식과 주말의 눈꽃구경이 연이어 전해지는

대형 브라운관 앞에서 무료한 눈망울을 굴리며 더러는

입심 질긴 시골 노인의 입술 근처에서 웅크린 채

논바닥에 널브러진 무, 배추, 쭉정이,

그 따위 것들의 신세를 생각하며

 

어둠 속 흘러 만나야 할 먼 종착점의 불빛을

저마다의 내면 깊은 곳

버스표 한 장의 짙은 그리움으로 묻어둔 채

남녘의 낮은 강둑길을 따라 노을을캐어 물고 돌아가는

철새들의 길게 뽑은 모가지에 대하여

어둠처럼 조여드는 겨울 산하의 한기

그 단단한 그물코에 대하여

모두들 하나같이 침묵하고 있었다

 

 

 

 

 

 

 

[심사평]

 

예선을 거쳐 선자에게 넘어온 작품은 모두 27명의 시 130여편 (시조5편 포함)이었다. 한 편 한 편을 읽어 나가며 선자의 마음을 뒤흔들어줄 만한 힘찬 작품을 기대하였으나 결과는 허사였다.

전체적으로 대학생 작품으로서 일정한 수준들은 유지하고 있었으나 시적 개성이 없었다. 우리가 인생의 수많은 사업 중에서 굳이 시의 업(業)을 택하였거나 택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남과는 다른 독특한 목소리로 세계와 자아를 새롭게 해석해보고자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언어가 「새로운 울림」을 주어야 한다. 말과 말이 부딪쳐 불꽃이 튀어야하며 정신의 긴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편의 시는 자신의 전체를 건 무엇이어야 한다. 적어도 막다른 벼랑 끝에 서서 전신의 힘을 모아 내지르는 소리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시에 자신의 영혼을 걸어야 한다. 이 말이 지나치게 시의 전문성만을 강요하는 말로 들어서는 안된다. 전국적인 규모의 대학생 문예작품 공모에 응모한 작품들치고는 소인성(素人性)에도 못미치는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마츄어리즘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거기에도 잘 써보려고 하는, 전문성에 육박해보고자 하는 「힘」이 들어있는 한.

「노예들의 합창」외 5편과 「食口」외 4편은 참신한 실험성이 돋보였으나 실험이라는 말이 흔히 그렇듯이 현실의 뿌리가 없었다. 언어만이 혼자 떠서 저홀로 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간혹 가다 빛나는 언어의 교직(交織)이 있었으나 육체를 얻지 못하고 있다.

연(鳶)Ⅰ,Ⅱ를 투고한 사람의 시(詩) 만들기 솜씨는 대단하다. 이번 투고 작품 중 그 솜씨만을 고르라면 단연 으뜸이었다. 그러나 함께 묶은 다른 세편을 포함하여 그의 시에는 너무「새것」이 없었다. 젊은 시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욕망이 없었다. 우리 시단(詩壇)의 전통 취향의 서정시들이 빠져 있는 막연한 복고조가 아무런 반성없이 재연되고 있는 느낌이다. 『회색빛 불감의 하늘로 날리는/장년의 쓸쓸한 연날리기여』 따위의 귀절이 그것이다.

마지막까지 남은 두 작품은 「사상 터미널에서」와「성장기」. 우열을 가리기도 어려웠지만 둘 중에서 더 나은 시적 성취를 발견하기도 쉽지 않았다. 현실에 뿌리두고자 하는 우리 기성 시단의 시들의 폐혜가 이곳에서도 극심했다.

둘 다 힘찬 목소리는 있었으나 툭 트인 자기 목소리는 아니었다. 첫 시구(詩句)의 활달한 운행(運行)이 끝까지 그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한결같이 맥없는 결구(結句)로 끝나버렸다. 그러나 그 활발한 시상(詩想) 전개와 건강한 시적(詩的) 지향을 사, 두 작품 공히 가작으로 만나, 때묻은 상투성을 벗는 데에 힘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시영 <시인ㆍ창비사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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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학 시간 ․ 2 / 안치숙 (충북대, 국어국문학)

 

스무 해 앓아온 말들이

분필가루 날리며 흩어지고 있다

늦은 교정에는

냉이와 나생이의 차이

너와 나의 긴 차이를 엎으며

눈이 내리고

지나는 발걸음에 남겨진

사는 일의 슬픔과 노여움 위에도

눈이 쌓여서

평등하게 고요한 방언학 시간

 

가슴 속에 숨쉬는 생각들은

언 땅 밑 뿌리 웅크리어

말발굽 소리를 내며 뚜 ․ 가 ․ 닥 ․ 뚜 ․ 가 ․ 닥

 

맥박을 뛰게 하고 맥박이 뛰어

너의 가슴 속으로 달리게 하고

냉이 나생이 나싱갱이와 혹시 먼조상들이

그렇게 불렀을 이름에

파릇한 옴이 돋아나게 한다

 

분필가루 쌓인 노트 위

라인, 템즈, 세느 혹은 내가 사는 무심천

뿌리 내린 뚝길에

스무해 처음으로 내딛는 눈

 

 

 

 

 

[심사평]

   

젊은 시절이라는 게 영향받기 쉬운 시절이어서 소리 높은 주장이라든지 떠들썩한 무슨 경향에 좌우되기 쉽지만, 문학이란 무슨 유행도 아니며 일제히 따라야 할 무슨 방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상투적인 소재나 표현, 포즈나 어투 같은 것은 혐오감을 일으키기 쉽다. 예술이란 무엇보다도 상투성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의 조건을 한 두 마디로 얘기할 수 없지만, 자기의 생활반경 속에서 건진 작품에는 우선 호감이 간다. 이것은 특히 대학생 작품에 해당하는 말이겠지만, 일반적으로도 자기가 잘 아는 일 (이것을 체험이라고 하고 절실함이라고도 하며 또는 억압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을 다루는 것이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한 우선적인 조건이라고 하겠다.

「방언학 시간․2」를 당선작으로 뽑는 까닭도 위와 같은 관점에 있다. 캠퍼스라는 생활공간,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대학시절이 배경이 되고 있는 이 작품은 아울러 그 처지에 걸맞는 발상과 표현과 어투를 보여준다. 따라서 나쁜 과장이 없다. 그러면서도 내용은 캠퍼스를 넘어서 퍼져나간다. 게다가 「방언학 시간․2」에 있는 구절 <냉이 나생이 나싱갱이와 혹시 먼 조상들이 / 그렇게 불렀을 이름에 / 파릇한 움이 돋아나게 한다>에서 보는 감수성의 질은 작자에게 시적 자질이 잇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흔히 빛이라고 부르는 어떤 상태, 또는 생명감이야말로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자질이기 때문이다.

「휴어기의 달」, 「작도(作圖)」 등을 응모한 학생의 작품도 위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도(作圖)」는 발상이 독특하기는 해도 작위(作爲)가, 선명치 않아서 「휴어기의 달」을 가작으로 뽑는다.

「겨울 내재율(內在律)」 중의 첫 번째 것인 「꽃」은 1언과 4언의 첫 3줄 같은 좋은 부분이 있으나 좀 겉늙어 보이는게 흠이고 주제의 일관성이나 선명함에 있어서도 결함이 있다.

「채송화의 노래」와 「두더지의 노래」는 어느정도 슬프고 또 온당하게 보이는 다짐으로 차 있는 진솔한 작품이지만 장차 감정적, 지적으로 좀더 성숙하기를 바라고 싶고 「한국사 강의 노트」는 「우금치에서」와 더불어 한국사에 대한 진지한 인식을 담고 있으나 너무나 많이들 쓰는 상투적인 소재이고 또 너무 심각하다.

 

정현종(시인․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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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 리오만의 죽음을 비유로 한 비가 / 진용선(인하대, 독어독문학)

 

<Ⅰ>

젊은 시인 리오만이

이디오피아 어느 길목에서

굶어 죽었다는

석간신문 외진 구석에서

우리는 안다.

살아 있으면서 살지못해

고통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을

 

어둠속에 쓰러지는

크고 작은 아라비아 숫자엔

더 이상 아랑곳 없는

허기진 눈동자를

우리는 안다.

 

리오만의 뼈 끝까지 파고간 죽음과

인도양을 날으는 흰 갈매기들의

쉬어가지 못하는

지친 날개짓도 안다.

 

지금도 어둠내린 곳곳마다엔

몸으로 우는 사람이 있어

둥둥 북소리 낮게 이어지는

이디오피아, 고요한 땅엔

말할 수 없는 죽음만 펼쳐져

 

어디에선가 날아온 갈매기

하얗게 울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Ⅱ>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

산 것은 모두 죽어가고

리오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끝맺지 못한 시 마지막 행엔

갈매기 울음만 잠들어

밤은 아직 멀기만 한데

 

먼동조차 지팡이처럼 땅에 떨어져

동동 발을 구르다가

떨리는 손끝으로

아득히 다가오는

낯선 별무리 헤아리는 밤

힘에 겨운 북소린 점점 낮아지고

어두운 길목에

희미한 별빛 하나 둘씩 내릴때면

우리는 안다

리오만의 목소리가 사라진

그 길목에서

산 것은

이제

더 이상 죽지 않는다는 것을

 

한 마리 갈매기도 울고 간

이디오피아, 고요한 땅에

밤은 아직 멀기만 한데

 

 

 

 

 

[심사평] 뽑고나서 지나치게 「응모」를 의식, 모방하는 경향 나타나

 

선자에게 주어진 20명의 응모자 작품 약 60편을 읽고, 그 가운데서 다음 시를 쓴 5명을 뽑았다.

(A)우리 시대의 그리움

(B)개나리

(C)예성강

(D)낙동강

(E)젊은 시인 리오만의 죽음을 비유로한 비가

모두가 공들여 쓴 작품들이고 상당한 수준을 보여 주었다. 간단히 언급해 보면, 장시의 불륨을 가진 (A)는 긴 호흡으로 활달한 수사학을 구사했는데, 정작 「우리 시대의 그리움」을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힘이 부족했다. (B)는 4편의 시가 모두 민중의 혼을 노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양한 비유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산만한 푸념에 머무르고 만 느낌이다. 국토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C)는 그 절실한 의도가 추상적 고백을 넘어서지 못했다. (D)는 낙동강 칠백리를 역사의 힘줄로 보고 아주 짧고 건강하게 노래하는 데 성공 했으므로 가작에 넣었다. (E)는 오늘의 암울한 세계 현실을 폭넓은 상상력으로 파악하여 정직하게 형상화했다. 동봉한 3작품도 응모자의 고른 솜씨를 보여 주고 있어 당선작으로 뽑았다. 다만 제목은 「젊은 시인 리오만의 죽음」으로 족할 것을 공연히 멋을 부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번 응모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작품으로서의 「시」자체보다 「응모」라는 취지를 너무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요즘 신춘문예 시처럼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을 즐겨 도입한다든지, 별다른 필연성도 없이 시를 길게 쓰려는 경향이 현저하다. 이미 다른 사람이 한 짓을 흉내내는 것은 창작의 본질에 어긋난다. 특정한 기성시인의 작품을 애써 모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기다운 개성이 표현된 작품을 쓰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쓸데없는 한자(어)를 피하라는 것도 간절히 부탁해두고 싶다.

 

김광규〈시인 ․ 한양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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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박기 / 전연옥(서울예전, 문예창작)

 

못질을 한다

저물녘 창틀에 걸린 우울을 바라보며

밤마다 허물어지는 이시대의 낡은 흙벽을 찾아

나는 또다시 망치를 찾아 들고

확신에 찬 못질을 해본다.

 

지붕을 울리고 기둥을 흔들며 들어가는 대못

더러는 허리를 구부리고 주저앉아

내 망치와 한 판 승부를 겨누려 하지만

손등을 타고 번지는 노동의 구릿빛 이 힘은

허공에 우뚝 선 또 하나의 흙벽에

길고 단단한 무쇠 못 하나를 깊이깊이 박고 있으니

 

내 너를 다시 일으켜 세워

흩어진 식구들의 허름한 작업복을 주워 걸고

한겨울 넘나드는 북풍을 막을 수 있다면

힘에 겨워 어깨가 결린다 해도

나의 망치질은 멈추지 않고

하늘에 하늘

그 위에 지붕까지 움직일 것이니

 

어둠이 긴 꼬리를 뒤척이며 다시 찾아 와

찬 방바닥 버려진 못들의 머리 맡으로

무허가 날림의 흙벽을 쓰러뜨려도

불멸의 내 강인한 의지는

부서진 마디 마디에 새 못을 치고

알몸으로 흔들리는 담벼락에

이 시대에 가장 튼튼한 못 하나를

정확하게 박을 것이다.

 

 

 

 

 

[심사평]

 

  예심을 거쳐 내게 온 작품은 모두 열여덟 사람의 작품이었다. 그 가운데서 다시 다음의 여섯 사람의 작품을 추렸다.

전 연옥 : 못박기 외 5편

정 일근 : 열일곱 살의 바다 외 5편

한 상권 : 한국문학사 외 2편

이 상연 : 소쩍새 울음외 5편

박 현경 : 비닐우산 외 3편

심 종철 : 눈 외 6편

 

「열일곱 살의 바다」(외)를 쓴 분은 말을 다루는 빼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유년화첩」같은 것은 이 분의 뛰어난 상상력을 느끼게 해준다. 결점이 있다면 말 재간이 너무 뛰어나다 보니 말 속에 삶의 모습이 빠지고 마는 것인데, 그 가장 나쁜 보기가 이 분이 앞에 내세우고 있는「열일곱 살의 바다」같은 작품이다.

시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이 표현하고 있는 사람의 삶의 모습이다. 이런데 유의하지 않는다면 이 분은 어느 한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못박기」(외)는 아주 건강한 생각에 바탕하고 있는 시들이다. 시의 수준이 고르지 못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고, 자기 얘기가 아닌 남의 애기처럼 들리는 대목도 없지 않지만, 시의 바탕에 깔린 튼튼한 생각은 아주 값진 것이며, 이 분의 더 큰 가능성을 엿보게 해주는 것들이다.

「한국문학사」(외)에서는 「꿈 꾸는 섭」이 제일 뛰어났다. 이런 쪽으로 나가면 개성있는 시를 쓸 분으로 생각된다.

「소쩍새 울음」(외)은 너무 많이 들어본 가락이다. 뜻이 어디 있는가는 알겠지만 시는 뜻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개성있는 가락을 가지려는 노력을 해야할 것 같다.

「비닐우산」(외)는 재미난 소재를 시에 담을 줄 아는 분의 작품인 것 같다. 그러나 시를 너무 쉽게 쓴 흔적이 보인다. 투고 원고에 전혀 정성이 담겨 있지 않은데, 바로 그것은 시에도 그만큼 정성을 쏟고 있지만 않다는 얘기도 될 것이.

「눈」(외)는 너무 재기가 승한 작품들이다. 그래서 오히려 감동이 적다. 너무 말이 많은 것은 이 분의 시들이 가진 취약점들이다. 일부 기성시의 해로운 영향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다.

정 일근의 「유년화첩」과 전 연옥의「못박기」를 놓고 당선작과 가작으로 서로 바꾸기로 여러 번 하다가 마침내 「못박기」를 당선작으로, 「유년화첩」을 가작으로 정했다. 두 작품은 서로 우열을 가릴 수가 없는 것들이었으나, 일단 재능보다 튼튼한 생각에 더 점수를 주기로 한 것이다.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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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비행기 / 박상봉(계명대, 영어영문학)

 

어머니 치마폭에 쌓여있던 내 일곱살적 꿈 몇장

종이비행기를 접고 있었다.

색색(色色)의 비행기들은 마을을 지나

민들레 꽃씨처럼 날아다니고

키를 넘어 나뭇가지 사이로

노랗게 물든 잎사귀를 흔들며 달아나는

바람을 뛰쫓다가 돌아와 논바닥에 쓰러지는

아버지의 출혈(出血)을 보았다.

휠씬 뒤의 일이지만 별이 보이지 않는 밤이면

성경책 한권을 모두 찢어서

교회당 지붕 위로 날려 보냈다.

내가 날려 보낸 종이 비행기

십자가(十字架)의 중심으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까닭없이 눈물 흘리시던 어머니

예수처럼 말씀하셨지.

저 산을 넘어 가거라

산을 넘으면 물이 있으리라

물을 따라 흐르다가 흐르다가

바다에 가 닿으리라

바다에 나가면 섬을 보게 되리라.

네가 다스릴 너의 나라 찾게 되리라.

내 몸이 점점 가벼워져서

빈 집들만 남은 마을을 버리고 활주(滑走)하였을 때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출혈이 바다보다 더 큰

강물로 흐르고 있는 마을.

장엄한 물무늬의 곡류(曲流)

어머니, 어머니 눈물의 논밭

그 아래로 단풍잎같이 떨어져 쌓이는

내 일생(一生)의 종이 비행기들.

 

 

 

 

 

[심사평]

 

예선을 거쳐 넘어온 작품은 모두 43편이었다. 그 수준은 모두 엇비슷하여 버리는 작품은 남은 작품 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고른 수준을 보면 문득 높은 평준화 현상이 느껴지고, 우리 시(時)의 앞날이 무척 밝다는 희망에서 신바람이 났다. 이들이 우리 시의 장래를 짊어진 얼굴들이라고 느끼면서 햇병아리의 맑은 음성을 불빛 속에 떠올려 봤다. 싱싱하게 자라나는 성장을 부추기면서-

당선작으로 뽑은 「종이 비행기」는 추억의 세계와 환상의 세계를 묘하게 얽어 실감있게 형상화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다. 이렇게 순탄하게 얽히면서 공감(共感)에 스파크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보통 능력이 아니다. 의연(義捐) 한 무게를 가졌으면서도 작은 디테일까지도 살린 빛나는 수확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산강 유역에서」는 당선작에 비해 결코 뒤지는 편은 아니었다. 시(時)를 얽어나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균형으로 볼 때 약간 뒤졌다. 그리고 가다간 상식적인 처리가 옥(玉)에 티였다. 「유산(遺産)이란 표현은 두번씩이나 사용할 당위성이 없었다.

선외가작으로 뽑은 「풀꽃에 대하여」는 어떤 시인의 작품 영향인듯 존재론적 표정에 심각성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인정하겠으나 보다 창의적인 자기의 목소리가 아쉬었다. 좋은 자질을 더 잘 살리기를 당부한다.

「꽃잎」은 결구(結構) 능력이나 언어를 천착하는 힘이 뛰어나지만, 그러나 독자의 이해를 획득하는데 약하다. 그리고 응분의 멋도 살렸으나, 그 멋에 지나치게 치중한 느낌이다. 보다 신중한 배려 속에서 작품을 엮었더라면 싶다.

「저녁강, 우리는 물리 되어 걸어가고」는 유니크하고 발랄한 이미지를 캐는데 싱싱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말을 반죽하는데, 그 뒤를 대주지 못한 느낌이다. 이미지가 활력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탄력 있는 언어가 질서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박재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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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방불명 / 장봉환(경북대, 국어교육학)

 

그는 어디 갔을까.

복음서 어느 뒷장에도 이름이 없는

물푸레나무 그림자처럼

어두운 사내,

물 속에 고인 하늘을 엿보다가

한 쪽 신발을 빠뜨리고 멀리멀리 달아난 사내,

낯선 도시, 삐걱거리는 이층 여인숙 같은 데서

히죽거리며 걸어 나와서는

어두운 유곽거리, 골목 안을 기웃거리다가,

어제는 난데없이

막노동판 공사장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느 어두운 위치에서

스스로의 행방을 가늠하고 있을까?

아직도 그 사람들은

질척한 길거리에 생계를 벌려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가슴에, 눈동자에 지워지지 않는 죄를 품고

끝없는 인종의 꽃을 피우며 서있는데

그는 왜 애써 우리들의 사랑과 정의를 외면했을까

우리들의 학식과 교양을, 연애와 식탁을 저주하고

우리들의 잠을 방해했을까.

거리의 술꾼과 악당들에 섞이어

우리들의 우상과 신앙을 욕하고 발길질하고

그리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까.

기울어가는 낮의 어귀

저만큼 비켜 서 있는 석양처럼

그의 눈에 잠시 스쳐간 것은

연민일까 혹은 사랑일까

어둠일까.

Barabba야, Barabba야.

무덤에서 나온 예수는 오늘도

목메인 소리로 그를 부르고 있다는데

그는 어느 어두운 거리에서

스스러이, 지워지지 않는 죄를

닦고 있을까.

물 속에 고인 하늘을 엿보다가

한 쪽 신발을 빠뜨리고 멀리멀리 달아난 사내.

보음서 어느 뒷장에도 이름이 없는

물푸레나무 그림자처럼

어두운 사내.

 

 

 

 

 

[심사평]

 

  아까운 작품들이 많았다. 시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증거이고 그 사랑을 구체화시키는 능력을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선에 들지는 못했지만, 「우리들의 사냥」은 정열적인 작품이다. 생각이나 느낌의 부피도 두텁다. 너무 추상적이고 어조와 표현에 과장이 심한 것이 흠이다. 〈등 뒤에서는 단지 운명적으로 우는 파도 소리/바람은 튼튼한 창(槍)살이 되어〉같은 표현은 맥락이 감동을 준비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추상과 과장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 자신의 가능성은 많이 보여주고 있다.

「도깨비풀씨」는 훨씬 가라앉은 마음의 자세를 보여준다. 그리고 모르는 사이에 도깨비풀의 공격을 받은 놀라움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도깨비풀씨를 적(敵)으로 삼는 생각의 구조 자체가 이 시를 공감에서 멀어지게 만들며 〈내가 죽어 있었다는 것을 실감한다〉라는 마지막 행을 죽어있는 일상생활의 성찰이라기 보다는 감상적인 발언으로 만든다.

「오후(午後)를 위한 환상(幻想)」과 「너는」은 예쁜 작품들이다. 둘 다 감각이 맑고 밝다.「너는」은〈너는/자꾸 멀어져 가는 배처럼/작아졌다〉같은 어쩌면 상투적인 표현을 신선하게 살리는 맥락을 만드는 솜씨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는 뒤로 가면서 추상적이 되면서 약해진다. 「오후(午後)를 위한 환상(幻想) 」은 생각과 느낌의 재미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환상적인 가운데 연을 앞뒤의 현실감각이 감싸는 구조를 만들어 놓은 마음의 상태를 주목할 만하다. 당선작과의 경쟁 때문에 가작이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계속 작품을 쓸 것을 저자에게 권하고 싶다.

  당선작 「행방불명(行方不明)은 그 무엇보다도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같이 동봉된 두 편의 시도 그것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때문에 혹시 기성시인의 시를 잠시 빌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 정도인 것이다.

  주 이미지 〈물푸레나무 그림자처럼/어두운 사내〉는 이 시 전체를 물들이고 있는 어둠의 색조와 잘 어울리고, 과장이 없이 침울한 어조도 분위기와 적절히 어울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용된 형용사와 부사들도 시인의 절제를 받아 힘을 발휘하고 있다.

앞으로 저자가 너무 단색적(單色的)인 상황에만 이끌리지 말고 좀도 넓고 깊게, 그리고 다양하게 세계를 보려고 노력한다면, 기량은 충분히 갖고있는 것으로 믿어지므로, 뛰어난 시인을 하나 갖게 되는 기쁨을 우리는 향유하게 될 것이다.

 

황동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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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다에서 본 것들 / 변준석(영남대, 국어국문학)

 

1. 물새

물새는 죽어서 물새 울음이 되었다.

어떤 물새 울음은 꺼이꺼이 저 혼자

울면서 바다로 가서

파도가 되었고

파도는 바람의 아픔이다.

항상 제 고독의 양만큼의 모래를 적신다.

 

2. 섬

젖은 모래는 젖어서 다시는 젖지 않는

섬이 되었다.

저 혼자서 아름다워지는 섬

사람들은 누구나 저 나름의 별을 갖고 있듯이

저 나름의 섬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언제나 새 한마리가 살고 있다.

 

3. 눈

젖지 않는 섬과, 마음과, 물새의 머리

위에 내리는 눈은

바다에도 내린다.

바다에 내린 눈은 수평선에 쌓여서 바다가 된다. 바다는 눈

의 고향이다.

 

 

 

 

[심사평]

 

우리 계명 시단(詩壇)이 점점 무르익어 가는 것이 퍽 기쁘기도 하다. 많은 응모작품 중에서도 <겨울바다에서 본 것들>과 <풍경>이 눈에 띄었다. 두 작품 중 전자(前者)가 좀 더 말 다루는 솜씨가 일보 앞서 있기에 당선했다. 이 밖에도 <겨울 산행(常行)> (산행이 무슨 뜻인가 작품을 쓰려면 이런 것도 세심히 주의해야 한다.), <겨울 체석장>, <겨울묘지에서>, <악수(握手)>, <겨울 강에서>, <배앓이>, <바람> 등 좋은 소질이 보이는 작품들도 있었다. 더 더욱 분발하기 바란다.

 

신동집(외국학대 영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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