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기 / 이용진 (강원대․경영학․3)
때로
탄가루 날리는 거리를 숨차게 달려가야 했다
부랴부랴 새벽잠을 구겨넣고 달려와
늘 검푸른 빛 감도는 석탄더미 깊숙히
삽을 꽃아 넣어야 했다
물안개처럼 굼실굼실 피어오르는 탄 먼지 바라보며
왜 이다지도 정신이 가물거리는지
저탄장아래 굳게 멈추어 선 화차에
나방가루같은 일상을 쏟아넣으며
다짐하고 다짐하여도
오늘 하루 어깨를 짓누르며 또 시작되는
새벽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떠나고 싶음의 충동으로 석탄을 퍼올리면
주루루 흘러내리는 가난
무엇으로 저 깊은 아가리를 채울것인가
해가 바뀔때마다
막장에서 캐어낸 일상의 화석들이
좁은 아궁이에서 오래오래 타들어가는 것처럼
나는 왜 타오르지 못하는 것일까
잘 갈무리된 생활을 갖기엔
기적을 울리며 미끄러지는 저 화차의
폐활량이 너무 깊은 탓일까
검은 이마를 빛내며 달려가는
화물열차에 몰래몰래 유년의 일기를 실어보내며
때로 내 성장기를 묶어둘 수 있어야 했다
생나무 가지 뚝뚝 분질러 밑불을 붙이며
매운 연기에 눈물이라도 흘려야 했다
사상터미날에서 / 정현열(부산대․국어국문학․4)
모두들 침묵하고 있었다
사상공단의 핏대 세운 굴뚝이 대합실 유리창 너머로
노을빛의 끈적끈적한 거품을 쉬임 없이 토해 낼 즈음
살얼음이 번지는 낙동강 강바닥을 날아오른 철새들은 삼삼오오
뿌우연 도시의 저녁하늘을 끼주룩거리며
가로지르고 있었다
초겨울의 통영행 쓸쓸히 내려 감은 눈꺼풀 속에서 주름 잡힌
어머니의 미소 띤 나무등걸을 떠올렸을 때
철 지난 갈대숲은 팽팽한 실핏줄의 바람을 몰아
지방 국립 대학 국문과 졸업반인 나의
야윈 늑골을 뿌리채 뒤흔들고 있었다
아무도 흐린 말꼬리를 붙잡지 않았다
더러는 판문점 소식과 주말의 눈꽃구경이 연이어 전해지는
대형 브라운관 앞에서 무료한 눈망울을 굴리며 더러는
입심 질긴 시골 노인의 입술 근처에서 웅크린 채
논바닥에 널브러진 무, 배추, 쭉정이,
그 따위 것들의 신세를 생각하며
어둠 속 흘러 만나야 할 먼 종착점의 불빛을
저마다의 내면 깊은 곳
버스표 한 장의 짙은 그리움으로 묻어둔 채
남녘의 낮은 강둑길을 따라 노을을캐어 물고 돌아가는
철새들의 길게 뽑은 모가지에 대하여
어둠처럼 조여드는 겨울 산하의 한기
그 단단한 그물코에 대하여
모두들 하나같이 침묵하고 있었다
[심사평]
예선을 거쳐 선자에게 넘어온 작품은 모두 27명의 시 130여편 (시조5편 포함)이었다. 한 편 한 편을 읽어 나가며 선자의 마음을 뒤흔들어줄 만한 힘찬 작품을 기대하였으나 결과는 허사였다.
전체적으로 대학생 작품으로서 일정한 수준들은 유지하고 있었으나 시적 개성이 없었다. 우리가 인생의 수많은 사업 중에서 굳이 시의 업(業)을 택하였거나 택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남과는 다른 독특한 목소리로 세계와 자아를 새롭게 해석해보고자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언어가 「새로운 울림」을 주어야 한다. 말과 말이 부딪쳐 불꽃이 튀어야하며 정신의 긴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편의 시는 자신의 전체를 건 무엇이어야 한다. 적어도 막다른 벼랑 끝에 서서 전신의 힘을 모아 내지르는 소리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시에 자신의 영혼을 걸어야 한다. 이 말이 지나치게 시의 전문성만을 강요하는 말로 들어서는 안된다. 전국적인 규모의 대학생 문예작품 공모에 응모한 작품들치고는 소인성(素人性)에도 못미치는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마츄어리즘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거기에도 잘 써보려고 하는, 전문성에 육박해보고자 하는 「힘」이 들어있는 한.
「노예들의 합창」외 5편과 「食口」외 4편은 참신한 실험성이 돋보였으나 실험이라는 말이 흔히 그렇듯이 현실의 뿌리가 없었다. 언어만이 혼자 떠서 저홀로 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간혹 가다 빛나는 언어의 교직(交織)이 있었으나 육체를 얻지 못하고 있다.
연(鳶)Ⅰ,Ⅱ를 투고한 사람의 시(詩) 만들기 솜씨는 대단하다. 이번 투고 작품 중 그 솜씨만을 고르라면 단연 으뜸이었다. 그러나 함께 묶은 다른 세편을 포함하여 그의 시에는 너무「새것」이 없었다. 젊은 시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욕망이 없었다. 우리 시단(詩壇)의 전통 취향의 서정시들이 빠져 있는 막연한 복고조가 아무런 반성없이 재연되고 있는 느낌이다. 『회색빛 불감의 하늘로 날리는/장년의 쓸쓸한 연날리기여』 따위의 귀절이 그것이다.
마지막까지 남은 두 작품은 「사상 터미널에서」와「성장기」. 우열을 가리기도 어려웠지만 둘 중에서 더 나은 시적 성취를 발견하기도 쉽지 않았다. 현실에 뿌리두고자 하는 우리 기성 시단의 시들의 폐혜가 이곳에서도 극심했다.
둘 다 힘찬 목소리는 있었으나 툭 트인 자기 목소리는 아니었다. 첫 시구(詩句)의 활달한 운행(運行)이 끝까지 그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한결같이 맥없는 결구(結句)로 끝나버렸다. 그러나 그 활발한 시상(詩想) 전개와 건강한 시적(詩的) 지향을 사, 두 작품 공히 가작으로 만나, 때묻은 상투성을 벗는 데에 힘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시영 <시인ㆍ창비사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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