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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골의 호랑이 사냥 / 김재현(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ㆍ1)

 

벵골의 호랑이 사냥꾼이 되고 싶었다.
갠지스와 브라마푸트라의 물줄기가 쌀을 익히는 저녁,
어딘가에서 노을처럼, 핏빛의 포효가 숲을 적시면
사냥꾼들은 엽총 한 자루를 쥐고 일어섰을 것이다.
호랑이의 두 눈은 긴 세월, 날카롭게 벼려진
달의 색채로 번들거렸고
몸을 뒤덮은 호반은 벵골만 나무의 뿌리처럼
호랑이의 노란 털을 가로지르고 있었을 것이다.
강이 땅으로 스며들어 곡식을 키우듯,
체액에 젖은 근육으로 두려움이 스밀 때
몸 속에선 한 떨기의 날카로운 열기도 고개를 들었다.
사냥꾼들은 그것을 용기라 불렀을 것이다.
사람들은 사냥꾼들의 용기를 사랑했을 것이다.
우리가 벵골의 호랑이 사냥꾼이 되었다면, 오늘은
갠지스와 브라마푸트라의 물줄기가 땅을 적시는 저녁이었고
황금빛으로 번진 벵골만의 쌀을 추수하는 날이었겠지만,
벵골 호랑이는 멸종했고, 우리는
오직 한 자루의 펜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호랑이가 있을 숲도, 호랑이도 없이
세상에는 이제 사냥꾼들의 총 드는 습관만 남았다.
호랑이가 없었으므로, 총은 겨누어선 안 될 곳을 향했고
우리는 유약해서 우리끼리의 펜을 들고 싸운다
강이 땅으로 스며들어 곡식을 키우듯, 체액에 젖은
근육으로 두려움이 스며, 한 떨기 열기가 피어났지만
우리는 그것을 용기라 부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갠지스와 브라마푸트라의 물줄기가 흘러도 지금은
敵 없는 敵意가 호반처럼 세상을 더럽히는 저녁,
벵골 호랑이 사냥꾼의 총 뽑는 습관만이 남아 있는 저녁,
사람들의 몸 위로 벵골 호랑이의 호반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나
호랑이를 사냥하는 그 뜻만을 유전 받은 우리는
벵골만을 지키기 위해 한 편의
詩따위를 쓰는 것밖엔 할 수 없는 저녁인 것이다.

 

 

 

 

 

 

[심사평]

 

지금 우리 시단에는 타자가 없는 세계에 묻혀 있는 떨거지가 있다. 세상에 살되 사진의 언어만으로 사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타자의 언어가 다가갈 열린 문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진실은 자신의 진실일 뿐이다. 그들의 내면은 난잡하다.
이 같은 소통 없는 세계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지난날의 어느 시기가 너무 큰 담론들에 짓눌려 있던 반동이 너무 길다.
바로 이런 시단의 풍속이 대학신문 응모작품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시의 가능성에는 다른 풍속을 반드시 낳을 것이다.
나는 오래전 1회, 2회 응모작품을 본 적이 있다. 그 감회와 함께 이번의 예선 작품을 보게 되었다.
세 개의 가작도 골라보았으나 부득이 한 개의 당선작만을 낼 수밖에 없었다. 당선작이 있다. ‘벵골의 호랑이 사냥’이다. 이것을 주저 없이 추천한다.
시풍이 있다. 시풍이 위풍당당하다. 문체가 역동적이다. 자기 속의 어떤 정서적 배설이 아니라 탁 트인 야생에의 투신이 생동감을 일으킨다. 또한 인류사적 사고가 담겨 있다. 여기에 더하여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고발에도 소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토록 커다란 서술행위가 계속되기 바란다.

 

심사위원: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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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꽃 / 김윤희(서울예전 문예창작학ㆍ2)


1.


옥탑방, 창에 대고 입김을 불면 하얗게 얼어붙은 한 무리 되새떼가 날아오른다

북쪽은 어디일까. 성에가 녹은 자리로 골목을 굽어본다. 바람이 허랑한 몸속을 맴돌아 나가고 여린 날개뼈가 결빙 음을 내며 다시 얼어붙는다.

새들의 흰 뼈가 쌓인다. 하늘은 이름 없는 무덤처럼 흐려진다.


2.

나는 잠 속에서 날개를 포륵거렸다.

시신의 버드러진 기운처럼 겨울비가 내렸다.

나는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떨어지는 것일까. 으르르딱딱- 이빨을 부딪치면 흰 사기들이 창틀에서 부서져 나갔다. 약한 것들은 제 몸이 부서질 때마다 소리를 냈다.

내가 깨뜨린 사금파리가 발밑에서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3.

해는 산그림자 속으로 떨어진다.

창에 볼을 문대면 푸릉- 콧김을 내는 짐승이 날개를 젓는다.

飛上, 飛上… 나는 가만히 손가락을 대고

손끝에서 반짝,

보안등 아래 물방울이 조랑조랑 달린다.

세상의 기울기가 다른 곳에 고드름이 매달려 있다.

새들은 북쪽으로…

손톱자국이 나게 유리창을 긁으면 맹폭한 짐승이 부푼 날개로 쩡, 하고 날아오를 것 같다.


온종일 하늘은 어둡고

실핏줄 뻗치는 성에꽃, 눈부시게 터진다. 

 

 

 

 

 

[심사평]


시는 기억을 재구성해서 언어로 드러내는 양식이다. 다시 말하면 기억의 형상화 과정이 시쓰기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조건이 따라붙는다. 하나는 기억 혹은 체험 내용의 선택과 배제의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언어의 형상화가 표현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인식의 문제라는 점을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를 읽는 사람은 시인의 체험 내용을 알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현란한 언어의 운용 방법을 배우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독자는 무엇보다 시를 둘러싸고 있는 시적 인식의 놀라움하고 은밀하게 내통하고 싶어 한다. 인식의 힘을 보여주는, 인식의 육박전을 펼치는 작품 하나 어디 없나, 하고 유심히 응모 작품들을 읽었다. 시를 고만고만하게 잘 쓰는 사람은 많은데, 놀라운 상상력으로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시는 드물었다. 마지막까지 여러 번 들었다 놓았다 한 시는 모두 여섯 사람의 작품이다.

 ‘어머니의 상자’와 ‘빈집’, 그리고 ‘소류지’ 세 편은 시에서 풀어 보이는 어머니와의 갈등이나 고통이 현실에 적절하게 밀착하고 있다. 그것은 시적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데 상당히 성공하고 있다는 뜻이다. 현실의 누추함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길 줄 아는 힘도 느껴진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안이한 화해를 서두르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다.

 ‘겨울로 가는 길’은 나무라는 대상을 통해 스스로 인내하는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매우 안정된 호흡에다 “밖으로는 길을 덮고 속으로는 길을 내는 저 몸부림”처럼 눈길을 끄는 구절도 곳곳에 보인다. 앞으로 상상력의 확장에 더욱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은행나무 아래서’는 이미지의 전개가 자연스럽고 감각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감정 조절도 이만하면 수준급이다. 그런데 작자는 마지막 줄의 ‘세월’이라는 시어 하나가 시의 격조를 얼마만큼 떨어뜨리는지 고민해보기 바란다.

 겨울 풍경을 흠잡을 데 없이 잘 버무린 ‘성에꽃’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말을 절제하는 기량과 무리 없는 묘사력을 무엇보다 높이 샀다. 함께 응모한 시도 만만찮은 솜씨를 발휘하고 있어 믿음직스럽다. 부디 좋은 시인이 되기 바란다.

 

심사위원: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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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퍼런 풍문 / 한인숙(제주대 국어교육·3)


멸치의 경악에 찬 눈망울이 햇빛을 받아 팔딱인다

남해 섬자락이 살풋 치마를 잡고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곳

육지로 몰려온 멸치 때가 내딛는 첫걸음을 본다

깜짝 터지는 플래시처럼 반짝이는 그들의 발을 본다

(-어쩌면 눈물일지도 모른다)

양동이 이고 나온 동네아주머니 담아, 젓을 담근다 한다

작둣날처럼 푸른 고등어 등 뒤에 두고 내달린 것이란다.

채 마르지 않은 나무로 짠 조각배 자맥질하듯 떠올랐다

배안엔 물보다 공기가 더 많이 담긴 생수통 하나, 언젠가

서슬퍼런 전쟁의 풍문을 피해 온 일가족이 있었다

카메라 눈에 잡힌 눈망울들 육지에 닿아 오래 출렁이고 있었다.

 

 

 

 

 

 

[심사평]


예심에서 올라온 열 명의 응모자에서 두 사람을 골라내는 건 쉬운 일이었다. 나머지 여덟 명의 학생은 시의 말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한 듯했다. 자신의 감정과 관념을 직설적으로 토로하거나 말 밑에 접어 숨긴 뜻 없이 축자적 의미 그 자체로 전달하는 방식은 시의 말법이 아니다. 특히 객관화되지 못한 사적세계의 주관적 감정은 금물이다. 서정시의 궁극적 목표가 정서감흥에 있으며 그것은 개인의 감정에서 기인될 수밖에 없다는 건 일견 타당한 말이다. 하지만 이 감정은 납득하거나 수긍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감정과잉만 지적하는 게 아니다. 화려한 수사나 세련된 어법으로 제법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설득력 없는 자폐적 주관성이 넘쳐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마이산 만불탑’과 ‘무용총 사냥벽화’, ‘산자락에 있는 집’을 들고 응모한 학생과 ‘저승꽃’과 ‘귀의 문을 열다’, ‘시퍼런 풍문’을 선보인 학생은 나름대로 시적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어 돋보였다.

 ‘산자락에 있는 집’ 시편을 쓴 학생은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빼어나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활달한 상상력과 거침없는 어법 또한 젊은이의 패기를 자랑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선작의 자리를 양보하게 된 것은 그 풍성한 이미지 다발을 하나로 엮어낼 수 있는 결정적 응집력이 없기 때문이다. 시라는 항아리는 양감과 색택(色澤)으로만 충분치 않으며 그 쓰임새도 고려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당선작 ‘시퍼런 풍문’도 현실과의 관련성만 따지자면 그리 후한 점수를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멸치 떼로 암유되는 현실을 보트 피플의 문제로 연결한 시적 발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더구나 두 개의 에피소드를 흔적 없이 기울 수 있는 바느질솜씨는 어지간한 내공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일견 역동적인 상상력이나 패기가 좀 부족한 듯하지만 섬세한 감각과 행간의 여백을 활용할 줄 아는 간결한 문체, 비유의 적실성과 다양한 어조의 활용, 이미지의 통일성과 결구의 솜씨 또한 나무랄 데가 없다. 다만 다른 응모작에서 볼 수 있는바, 미묘한 정서의 결을 지나치게 추구하게 되면 주관적 감정의 세계에 빠질 수 있으므로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수상자의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장옥관(시인ㆍ문예창작학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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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방이 있는 골목 / 박소란(동국대 문예창작학ㆍ4)

 

이따금씩 아랫도리를 까발린 사내가 출몰했네

라면 부스러기 같은 눈이 쌓인 밤

동동거리며 문을 따는 여대생들 하얀 목덜미를 훔치기도 했네

노인네 속곳처럼 지린 밑을 조몰락거리며

황망히 닫힌 문을 서성이던 어느 침울한 날엔가

월세방 전단이 빼곡한 수은등 아래

벌거벗은 그가 사무쳐 울고 있었네

이국종 겨울나무처럼 쓸쓸한 가지를 떨고 있었네

누군가 내게 보내는 비밀한 교신 같아

창백한 담벼락들 맞부둥켜 손가락질 해대는

이방의 어둔 골목에서

어쩐지 나는 그에게 말을 걸고 싶었네 추위를 달래고 싶었네

언 수피 가까이 아랫목 같은 불 지피고만 싶었네

생각해 보면 단 한번도

벌거숭이 사내만큼 외로운 적 없었는데

집냄새 사람냄새 사무친 적 없었는데 그 밤,

사내의 등 뒤로 무거운 걸음 재촉하며

괜한 뒷모습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네

어쩐지 낯선 도시의 헐벗은 나를

사내의 뿌리 곁에 고스란히 두고 온 것만 같네

 

 

 

 

 

로드무비 / 민구(명지대 문예창작학ㆍ3)

 

버스는 만원이고 눈발은 거세지고

사내는 잠이 든다 사람들은,

능청스럽게 코고는 그를 쏘아본다

기척에 놀란 그가 허리를 세워 상체를 고정시킨다

버스가 떠민 희미한 얼굴들이 시야에 걸려 그대로 들어온다

그는 밖으로 툭툭 시선을 던지며 멈추면 내려놓고 다시

새로운 얼굴을 건져 올리지만

本意는 아니다

 

바퀴가 풀어놓은 길 위로 분주하게 사람들이 오가고

걸음이 느린 몇은 앞으로 쏠리다가 앞선 이들을 향해

발이 먼저 미끄러진다

 

그때 버스 한 대가 급정거!

 

감탄부호처럼 급조된 소리, 또 그렇게 생긴 소리,

바닥에 닿으려는 순간 한 번

사뿐히 날더니 길 위로 풀썩 주저앉는다

뜻밖의 정지화면에 당황한 사람들이

씹힌 테이프를 두고 잠시 중얼거린다

 

도로 한복판 전광판에 날마다 관객 동원수가 기록되고

고장난 테이프는 재활용이라지만

그래도 끊이지 않는 말,

눈 위에 눈 쌓이듯 불어난다

 

 

 

 

 

 

[심사평]

 

예심에서 올라온 열 사람의 작품들은 시적 글쓰기의 맛깔과 태깔을 제대로 갖추었다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시적 대상으로 향하는 열정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고, 열정을 전달하는 말의 짜임새 또한 성글어서, 젊은이들의 글에서 기대되는 패기와 집요함이 속속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근래 들어 우리 문화 전반에서 눈에 띄는 비시적 사고방식과도 무관하지 않은 현상으로 짐작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 혹은 시적인 것이 우리 삶에서 사멸해버린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노후한 수도관에서처럼 시의 물길이 우리 삶 곳곳에서 하릴없이 유실되는 것일 뿐이리라. 그러나 정말 위험스러운 것은 시적 글쓰기의 모세혈관이 터져버림으로써 정신의 수족마비 현상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또한 시적인 것의 소모와 유실로 인한 폐단이 비단 정신의 수족마비에만 그치겠는가. 선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시를 모르면 높은 담장 앞에 서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다소간의 망설임 끝에「자취방이 있는 골목」과「로드 무비」를 가작으로 선한다. 어쩌면 변태성욕자로 보이는 한 사내의 허름한 출몰을 이야기하는「자취방이 있는 골목」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남루한 풍경 한 자락을 수놓듯이 섬세하게 보여주는데, 배면에 화자의 감상적인 어조가 배어듦으로써 긴장과 밀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또한 건조하고 거의 물질적인 시선으로 도시생활의 한 단면을 스냅사진으로 떠올리는 「로드 무비」는 말을 씹는 재미의 일단을 보여주지만 때로는 지나친 연상의 비약으로 인해 읽기를 방해한다. 일단은 두 편의 시 모두 글쓰는 사람 자신의 조야한 일상에 뿌리와 부름켜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무성한 시의 그늘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다만 시는 근본적으로 말의 번짐으로 이루어지며 말의 번짐을 가능케 하는 힘은 글쓰는 사람 자신의 집요한 열정과 정신의 자유로움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열정도 자유도 쟁취하는 것이다.

 

심사위원: 이성복(문예창작학ㆍ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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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화채 / 문성록(계명대학교 한국어문학·4)

 

아버지가 수박을 싣고

장터로 떠돌다 돌아온 날 밤이면

트럭 옆자리에는

늘 낯익은 아주머니가 앉아있었습니다

 

그런 저녁이었습니다

어김없이 팔다 남은 수박들이

마당으로 내동댕이쳐졌고

어머니에게 발길질 해대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방문에 어른거렸습니다

아픈 허리를 움켜쥐고 흐느끼며 어머니는

안방에서 쫓겨 나와 마실로 뛰어갔었습니다

누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덮어쓰고

아프게 나를 껴안았습니다

겁에 질려 잠이 들면서도 나는

복숭아 만한 누나 가슴을 만지던 손이 떨려왔었습니다

 

아침에 깨어보니 언제 돌아오셨는지 어머니는

커다란 양푼이에 깨진 수박들을

숟가락으로 긁어 담아 하얀 설탕을 싸락눈 같기도 한 설탕을

하염없이 뿌리며 턱밑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계셨습니다

누나와 나는 아무 일도 모른다는 듯이

설탕 맛 밖에 나지 않는 화채를 떠먹으면서도

시퍼렇게 멍든 어머니의 얼굴은 차마 보지 않았습니다

마당가에는 깨진 수박들이

빨간 잇몸을 드러내고 웃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누나와 나는

아침에 먹다 남기고 간 화채를

냉장고에서 꺼내 허기를 달랬습니다

누나와 나는 평상 위에 누워 어머니를 기다렸지만

밤이슬이 우리 이마를 적시고 별들이 사라질 때까지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누나와 나는

화채를 다시는 먹을 수가 없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아마 수박 위에 하염없이 뿌려놓은 어머니의 눈물의 맛을

그때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심사평]

   

예심에서 올라온 작품들 가운데, 『해부학 교실』(외 8편)과 『숭한 이야기』(외 3편) 은 기본적으로 시를 엮을 수 있는 투고자의 소양과 자질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누구나 심장에서 퍼올리는 혈액으로 산다’는 예사로운, 그러나 단지 예사롭지만은 않은 사실을 삶의 모세혈관들이 만나는 지점마다 확인하는 전자는 남루한 대상들을 남다른 의미로 바꾸어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해가 지고, 아버지도 질 것을 안다’는 다소 생경하며 요령부득의 진술을 통해 일상의 통속과 무감각을 희화화하는 후자는 삶의 급소들을 정확히 짚어내려는 진지한 노력을 드러내 보인다. 다만 그들의 작품에서 사적인 감정들의 잔재나 과잉된 언어조작은 조만간 극복되어야 할 미숙함이라 하겠다.

이번 심사의 가장 큰 보람은 당선작으로 선한 『달콤한 화채』이다. 『연근』, 『절름발이 비둘기』, 『새 신을 신으면서』, 『단편』 등 함께 투고된 네 편의 시 모두 고른 수준을 갖춘 작품들이어서, 정작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택해야 할지 망설여야 했을 정도이다. 대개는 현재의 시점에서 아픈 가족사를 재구성하는 이 시편들은 좋은 시가 가져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춘 모범적인 것이면서도, 흔히 모범적인 작품들에서 눈에 띄는 식상함과 진부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뼈아픈 체험들에 유연한 리듬을 부여하는 언어의 자유로움, 대상을 자기화하면서도 칙칙한 감정토로에 떨어지지 않는 정신의 균형감각, 그리고 무엇보다 서두르지 않고 이야기를 조립함으로써 울림을 증폭하는 넉넉한 어법은 앞으로 뛰어난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기쁜 마음으로 당선자의 정진을 빈다.

 

이성복(문예창작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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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 / 신희진(연세대 인문학부·3)

 

바지의 긴 구멍을 들여다보면 슬프다.

굽이쳐진 동물의 창자 속 같기도 하고

어둠 쳐진 시간의 긴 골목길 같기도 하다.

여기엔 도무지 빛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슬프다.

나는 바지의 구멍을 들여다보다가

긴 空洞의 끝에 가 부딪히곤 한다.

탈출구일까, 방황의 가지 끝에 달린 피로의 냄새와

때로 끝이 몽똑하게 잘린 그리움.

단발의 몸을 끌고 간 짓궂은 먼지나

더욱 얄궂은 흙탕물 같은 질팍함이 붙어있다.

이것들이 주렁주렁 주름을 빚어낸다.

바지 속 쌍둥이 동굴은 평행할 줄 모르는

왜곡된 사랑,

내 절뚝거리는 사랑이 어둠으로 올망져 있는 곳.

때로 바지 속 긴 구멍을 들여다보다 잠든다.

그것은 외로운 동물 같은 꿈이며

버려지지 않는 식탁, 내 하루를 판화처럼 찍어내는

진기한 역사다.

바지를 입는 일이 그렇다.

 

 

 

 

 

[심사평]

 

  예심에서 올라온 열 명의 응모자들의 작품은 예년에 비해 수준이 떨어졌다. 간혹 재미있을 듯 싶은 시라 하더라도 말장난이 지나치거나, 말장난을 해놓고 수습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같은 사람의 응모작들도 수준의 편차가 많았다.

비유컨대 시라는 진술방식은 ‘자기 부상 열차’와 같은 것이다. 시의 언어사용 방식은 산문의 방식과는 많이 달라서 일단 언어 위로 떠오르지 않으면 시로서의 맛깔이 나지 않는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시의 의미는 ‘잠수함’과도 같이 언어의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이어서, 일단 바깥으로 드러나면 쉽게 사라지고 만다.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만, 시는 말장난이다. 그러나 시라는 말장난은 언제나 ‘의미 있는’ 말장난이며, 신선하고 강렬한 충격을 주는 말장난이다. 시에 대한 이같이 적나라한 접근이 때로는 시가 감정과 사상의 통로라는 고정관념을 부수는 데 효력을 갖는다.

마지막까지 남은 두 응모자의 시들 가운데 「육면체의 노을」을 쓴 학생은 일단 시라는 진술방식이 언어를 타고 한바탕 잘 노는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다. 그는 여러 가닥 언어의 실을 교묘하게 맺고 꼬는 솜씨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언어 교직은 때로 장난스러움이 지나쳐, 자신이 엮고 있는 실이 어느 가닥인지를 까먹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시는 말장난의 일종이지만, 말장난이 곧 시는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바지」를 당선작으로 고르는 데는 오랜 망설임이 있었다. 시를 엮어 가는 과정이 적지 않게 불안할뿐더러, 함께 투고된 다른 작품들의 수준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응모자의 글쓰기 훈련이 아직 충분치 않고, 시의 존재방식에 대한 또렷한 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수상작으로 택한 것은 바지라는 일상적 소재를 시적 대상으로 읽어내려는 진지하고 건강한 자세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바지의 긴 구멍을 들여다보면 슬프다”로 시작되는 흥미진진한 횡설수설은 헐렁헐렁한 바지의 모양새와 터무니없이 닮아 있고, 바지처럼 땟국물에 쩔은 일상적 삶의 모습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도무지 빛이 보이지 않는 바지 구멍에서, ‘몽똑하게 잘린 그리움’을 읽어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수상을 축하하며 정진을 빈다.

이성복(문예창작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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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유인력의 법칙 / 황현진(계명대 문예창작학전공·4)

 

어느 날은 멀뚱멀뚱 달을 보다 장난기가 발동하여

손가락에 달을 걸어본답시고 툭툭 쳐보기도 하고

옛다 똥침이다 푹푹 찔러도 보다가

그날 밤 잠들면서 딴에는 우습다고 헤벌쭉헤벌쭉 거리다가

아직도 창 밖에는 달이 있는지라

 

아하, 내가 달을 갖고 논게 아니었구나

저놈이 뉴턴 앞에서 사과를 떨어뜨리듯 내 손가락 하나를

당겼다 밀었다 한 게로구나 싶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울 엄마 뱃속으로 나를 밀어 넣은 것도 너였고

때마다 뱃속 가득 밀물되어 들어와 두둥실 나와 놀기도 하고

썰물 때가 되면 나를 비틀어 끄집어내던 게 다 너였구나

네가 줄어들수록 둥글둥글 내 배는 부풀어오르고

내 뒤를 따라 다니는 긴 그림자가 날 잡아당기는 네 손목인지도 모르고

나는 여태껏 살아왔는데

달 안에서 절구 찧으며 산다는 옥토끼는 어디 가고 없고

탯줄을 그네 삼아 노는 갇힌 아이만이 달빛에 어룽거리는데

 

돌아누워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면

너로 인한 지난 스무 몇 해의 세월은 탱탱하게 잡아당긴 쿠킹랩 같은 건지도 몰라

 

 

 

 

 

[심사평]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시는 고도로 경제적인 이야기 방식이다. 그것은 물론 말수를 줄임으로써 도리어 의미 내용을 확장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감정과 관념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기를 삼가고 매개물을 빌어 넌지시 둘러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시적인 이야기 방식은 언제나 구체에서 추상으로, 감각에서 깊이로, 평범에서 비범으로,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사소함에서 소중함으로 나아가는 데 있으며, 그 역방향은 단적으로 말해 비시적이다. 그것은 총알이 뚫고 나간 시체나 바늘구멍상자와 같아서 들어오는 길은 좁아도 나가는 방향은 놀랍도록 넓은 것이다. 혹은 그것은 작은 톱니바퀴처럼 저보다 몇 배 큰 톱니바퀴를 돌게 하며, 지렛대나 도르래도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것과 같이 일상과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 되며, 그를 통해 일상과 자연에 가리어진 삶의 속살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입을 다물고 배로 웅얼거리는 복화술처럼 오랜 수련과 단련을 통해서만 터득되는 것이다.

예심을 거쳐 선자의 손에 들어온 작품들의 태반은 학생들이 아직 시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에 대한 감각을 충분히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그 결과 사회현실의 질곡과 기층민중들의 곤궁을 이야기하는 것이 시의 본연이라고 생각하거나, 문맥을 비틀고 말과 말 사이의 간극을 넓힘으로써 독해 불가능한 독백을 흘려 보내는 것이 시의 위의라 믿는 오해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다만 마지막까지 선자의 손에 남았던 “평화 아파트”와 당선작 “만유인력의 법칙”은 그러한 오해들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비사막”, “횡단보도에 버려진 책”과 더불어 “평화 아파트”를 선보인 학생은 요즘 많은 시인지망자들과 마찬가지로 기형도의 시문법에서 자양을 흡수한 흔적을 보이는데, 어디서나 이미지의 주먹을 날리는 날랜 상상력과 패기 넘치는 무장무애한 어법이 장차 유능한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비유컨대 초보자의 바둑처럼 여기 저기 들쑤셔 이미지의 집을 지으려 하나 끝내기를 제대로 못 하고, 공사가 중단된 가건물의 상태로 시를 분양하려는 듯 한 느낌을 갖게 한다.

당선작 “만유인력의 법칙”은 재기발랄한 어법과 신선한 이미지 채집으로 단연 주의를 끄는 작품이나, 때로 그 재기와 신선함이 장난기와 말놀음으로 치달아 아직 영글지 못한 과일을 따낼 때처럼 아쉬움을 남긴다. 마치 공을 가지고 노는 강아지처럼 먼 하늘의 달과 장난질하면서 그것이 우리 자신의 생식과 배태, 성장과 생존에 작용하고 있음을 유머러스하게 드러내는 대목은 보잘것없음에서 의미심장함으로 나아가는 시어법의 방향을 제대로 짚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말미에서 ‘탱탱하게 잡아당긴 쿠킹랩’의 비유는 지금 이곳의 일상으로부터 시를 낚아 올리는 글쓴이의 만만치 않은 재주를 드러내 보인다. 다만 지나치게 연상에 의존함으로써 행과 행,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군더더기 부분을 제대로 깎아내지 못한 결함이 눈에 띄는데, 이는 함께 선보인 ‘손가락이 아프다’, ‘나른한 주말 오후’에서도 지적된다. 그러한 결함으로 인해 나날의 체험들로부터 길어 올리는 시의 두레박이 텅 비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수상자의 정진을 빈다.

 

이성복(문예창작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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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방 / 이규성

어머니 영전에 소품을 바치며…

 

용접공 김씨가 자수지 옆 벌목된 나무 둥치 사이에서 동사했을 때, 그의 몸은 휑뎅그렁한 방이었다

발에서 벗어낸 듯한 신발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눈에는 핏발이 녹슨 철사줄처럼 엉켜 있었지만, 무엇이든 함부로 그 몸 밖으로 나올 수 없어 보였다

죽어서도 그의 것인 몸 안에 들어가 그는 죽은 것이다

언제였던가, 용접봉처럼 불꽃으로 녹아 내리며 접붙여 놓았던 아내가 떨어져나가자, 더이상 그의 몸에서 불꽃이 일지 않았다는 풍문이 돌았다 그가 세 들었던 방에는 얼룩진 벽지와 씩씩대는 들소 같은 바람만 남았다고

김씨의 바지주머니에서는 동전 몇 개가 간신히 짤랑거렸다

그의 몸은 이미 휑뎅그렁한 방이었다 방문을 열 수 있는 주문은 가랑거리던 그이 숨소리와 함께 사라졌으니, 그 방은 이제 비밀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몸 속, 단단한 빈방을 열고 나간 김씨의 흔적은 저녁 저수지에서 찾아야 했다 갈대가 하얗게 무릎을 꺾은 저수지 얼음장 위로 그의 외투에서 빠져 나온 솔기 같은 햇살이 붉어질 때, 그의 그림자가 얼음장에 잠시 머물다 가곤 했다

한 계절이 지나서도 가끔 내 뼈 속 빈방에

배롱나무가 꽃을 터트리듯 붉은 등을 내다 거는 그가

 

 

 

[심사평]

   

이번 심사에서 끝까지 남은 두 편의 작품은 ‘붉은 방’과 ‘주머니에 관한 단상’이었다. 물론 최종적으로 그 두 편을 고르기까지 몇 번 눈길이 멈추었던 작품으로는 ‘빛 속의 거울’과 ‘누이의 집에서’가 있었지만, 작품의 완성도나 시적인 참신함에 있어서 앞의 두 작품에 못 미치는 감이 있었다.

휴가 나온 군인인 화자가 시골 누이의 집을 찾아가 하룻밤을 묵고 온 이야기를 산문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누이의 집에서’는 허술하고 구차한 살림을 살아가는 가족들에 대한 애잔한 사랑이 짙게 풍겨지지만, 또한 그 안쓰러움이 적당한 절제를 통해 길러지지 않은 까닭에 객쩍은 독백으로 풀어지는 느낌을 준다.

매우 극적이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악에 받힌 재수생들의 절망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빛 속의 거울’은 어느 리얼리즘 소설의 한 대목보다 섬뜩한 느낌을 준다. 아쉬움이 있다면 그 적나라한 묘사 다음에 어떤 이해나 인식의 갈무리가 따르지 않기에 작품을 쓰다만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또한 동봉한 다른 작품들의 수준도 많이 떨어진다.

끝까지 당선작과 겨루어 오랜 시간 심사자를 고통스럽게 하였던 작품은 ‘주머니의 단상’이었는데, 이 작품과 함께 투고된 ‘옥상 위의 개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섯 편의 연작시 ‘겨울 산책’ 그리고 ‘봄’ ‘어머니’ 등 단시들은 투고자의 타고난 시적 자질을 유감 없이 보여주며, 앞으로 좋은 시인으로서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리라는 예감을 갖게 한다. 다만 그 섬세하고 여린 감수성 때문에 각 편의 작품들의 고만고만하고 큰 충격과 감동이 없다는 점이 아쉽다.

이름 없는 노동자의 차가운 죽음을 다소 요설적인 어조로 풀어 가는 당선작 ‘붉은 방’은 함께 투고된 작품들의 대다수가 명확한 이유 없이 난삽하며 고른 시적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래 심사자를 불안케 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나타나 보이는 능숙한 묘사한 말솜씨는 학생 투고작품으로서는 가히 탁월한 것이어서 당선작으로 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이미 90년대 우리 시에는 이런 류의 작품의 전형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군데군데 난해한 대목들이 말장난의 혐의를 갖게 한다는 점에서, 수상자의 분발과 정진이 더욱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과연, 트집 잡기는 쉬워도 좋은 시를 쓰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성복(문예창작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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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陰 火

 

냉장고 위에 눈이 내린다

삭은 동체로 폐가를 확인하며

어떤 문이든 문은 과묵해야 한다는 듯,

집에 불을 지르고 동반자살했다는

고가도로 밑 폐가에서 나는 눈을 맞는다

화재의 잔재로 남아있는 보일러관은

옛 건물의 윤곽을 기억하는지 바람에

속을 사시나무 같이 긁힌다.

나는 발목 시리게 살아서 거기 그대로인

주춧돌과 함께 겨울 하늘을 바라본다

빈 마당의 마른 우물에

눈망울을 적시기 못하는 검은 상처들

내린 눈보다 내리고 있는 눈보다

우우 신음 소리 낮게 흘리고 있는

겨울 하늘이 자전거 위에 내려와

숨은 치정을 확인한다.

끊어진 체인 위

사선으로 어긋나고 있는 것들

그냥 묵과할 수 없는

살대만 남은 안장 위의 눈

 

 

 

 

[심사평]

 

계명문화상에 응모한 3백여 편의 시를 예심없이 읽었다. 예년에 비해 응모작 수는 줄었으나 수준은 대체로 높아진 것 같았다. 이것은 학생들의 관심이 문자 문학에서 영상 문자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양은 줄고 질은 높아지는 일반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심사 기준을 글쓴 이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했느냐 판단하는 형상성, 내용의 구체성을 살펴보는 구체성, 표현된 생각의 깊이를 보는 사상성에 두었다.

좋은 시는 우선 생각의 크기나 깊이보다 생각하는 바를 얼마나 시의 형태로 드러낼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과 관계가 있다. 그것이 휼륭하고 깊은 사상이라고 하더라도 시의 형태를 띄지 않고서는 말 그대로 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문학을 처음 배우는 학생 때 초심자의 경우 이 점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응모작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은 대부분의 시가 말장난으로 그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해괴한 표현, 전혀 말도 안되는 상황설정, 가벼운 장난끼로 일관하는 작품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새롭고 발랄하기 보다는 경박하고 천박한 표현들이 많은 데 우려를 금하기 어려웠다.

<陰火>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공동묘지 등에서 볼 수 있는 귀신불을 뜻하는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세계를 비극적으로 보고 있다. 이 비극적인 서정이 다른 작품들의 가벼움과 구별되면서 작품에 진정성을 부여하고 있다.

어둡고 우울한 젊은 날의 정성, 시대의식의 폐가에 내리는 눈으로 구체화되어 있다. 함께 투고한 나머지 두 작품에서도 만만찮은 시적 역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축하와 함께 더욱 정진할 것을 부탁한다.

김용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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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봄이 내게로 와서 / 김장근(중앙대 문예창작학․4)

 

하루는 마루 끝에 팔 괴고 누워

하품 한 자락 길게 뽑으며 먼 산동성이

한켠 그늘과 눈 맞추고 있었더니만,

눈물 납디다 채 펼쳐 보지도 못하고 낡아버린 하루하루가

얼마나 많습디까 그 먼지 쌓인 하루하루가 다 그늘이 되면

어쩌나, 그나마 모조리 한숨으로 훅 끼쳐들면 흩어지면

어쩌나, 아까워서 그랬드랬습니다 겨드랑이나 갈비뼈 틈바구니

내 사타구니에 여태도 고여 있는 나이, 볕 좋은 날 이불

털이 말리듯 훌훌 바람에 함부로 맡겨버리지 못한 나이가

아까워서 아까워서 그랬드랬습니다 세월이 무슨,

인둣빛 앞산에 박힌 한 점 붉은 빛

꽃잎처럼만 그리 귀했으면도 생각했습죠

 

한데 세월은 참으로 모지락스럽기도 한 것입디다

자울자울 한 나절 흐물거리며 한 나절 눈 흐리며 나이 타령이나 속으로 하고 누웠는 놈 앞으로 허참. 봄네가 옵디다그려 연초록 풀잎들은 다 털어버리고 아지랑이 이런 것 개굴개굴 무논 이런 것 죄다 벗어던지고 새살거리는 바람도 없이 본래 봄만으로 몸으로 만 봄이란 년이, 머리는 쑥대머리 까치집 얹고 때절은 저고리 반이나마 어미 풀어헤치고 어디서 주워다 둘렀는지 누런 무명치마 흔들흔들 거려싸며 와서 내 앞에 술 취한 듯 서서 치마를 확 걷어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제 살을 갖다대는데, 아나 먹어라, 아나 먹어라, 하며 한 이십 년쯤이나 때가 쩔어 허옇게 말라 꼬부라진 거웃 그나마도 듬성듬성 쥐파먹은 제 년의 보지를 내 얼굴에 코에, 아나 먹어라, 아나 먹어라, 펑퍼짐한 엉덩짝 앞으로 뒤로 궁싯거려 싸며 비벼대는데 그것 참, 지린내 같기도 하고 달거리 피냄새 같기도 하고 두엄지리 거름 냄새 같기도 하여 한참을 어질어질 아지랑이 피어나듯 어질어질 이마 한쪽 짚으며 어느새 클클거리는 머리 속이나 가늠하다 잠깐 아뜩하여졌더니 봄이란 년이 글쎄 내 얼굴에 제 보지를 짓뭉개며, 아나 먹어라, 아나 먹어라, 이놈의 새깽이야, 내가 네 에미다, 이놈의 새깽이야, 내가 네 새끼란 말이냐, 그리고는 그 년 거짓말처럼, 모지락스런 그 봄이란 넌 봄꿈처럼 나른하게끔 삐비꽃 퍼날리는 먼지길 따라 가버립디다그려

 

봄이 그 지랄 염병을 떨고 간 토방에 꽃 하나 졌습디다

새빨간 꽃잎이 다 뭉그러져 떨어진 자리가 빨그스름하니 물들었습디다

신기하게도 그 꽃 꼭 나를 닮아 누어만 있습디다 어매,

꽃 지고 나니 해도 지고 이제는 내 한 나절도 아주 다 기울어집디다그려

 

 

 

 

 

 

[심사평]

   

‘어느 날 봄이 내게로 와서’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한 편의 시가 짧든 길든 그만한 필연성이 절절해야 작품성을 획득하는 것이련만 대다수의 투고작들이 까닭없이 길거나 짧았다. 또, 인간의 삶과 정서에는 산문으로 표현하여야 공감되는 것과 운문으로 표현하여야 감응되는 것이 있는데, 분별없이 쓴 작품이 많았다. 이것이 시작(詩作)의 여러 기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응모자들이 간과한 결과인 듯 하다.

당선작을 쓴 학생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이 학생의 작품을 선택한 것은 이미지를 빚는 빼어난 솜씨, 그 이미지를 통하여 지적 공간을 확장하면서 의미를 창출해내는 연상 능력, 탁월한 상상력 때문이다. 거기다가 막힘없는 어투와 거침없는 표현력이 더해져서 읽고 난 뒤 일견 대담하다는 소감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의 지나친 과잉이 시의 완성도를 떨어뜨린 치명적 요인이 되고 있음을 지적해 둔다. 이 시를 쓴 학생은 겸허하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언어를 남용하지 않으면서 사물을 풍성하게 하고, 사물을 버리지 않으면서 언어를 살려내는 절차탁마의 수련에 전력투구하기를 요구하고 싶다.

본심에 올라온 총 27편을 투고한 모든 학생들이 그렇게 절차탁마한다면 당락과는 상관없이 더욱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을 버릴 수는 없다. 나로서는 작품들을 읽고 그 가운데서 한 편을 가려내는 일이 직접 시를 쓰기보다 힘겨웠음을 고백해 둔다. 무릇 좋은 시 쓰기를 원하는 자는 그 원하는 만큼 시에 대한 애정은 가지되 욕망을 스스로 폐기할 줄 아는 마음의 상태일 때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 당선자든 낙선자든 모두 시를 써서 무엇을 구하려고는 하되 무엇을 누리려 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당선작을 읽다보면 반면(反面)의 교훈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종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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