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화채 / 문성록(계명대학교 한국어문학·4)
아버지가 수박을 싣고
장터로 떠돌다 돌아온 날 밤이면
트럭 옆자리에는
늘 낯익은 아주머니가 앉아있었습니다
그런 저녁이었습니다
어김없이 팔다 남은 수박들이
마당으로 내동댕이쳐졌고
어머니에게 발길질 해대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방문에 어른거렸습니다
아픈 허리를 움켜쥐고 흐느끼며 어머니는
안방에서 쫓겨 나와 마실로 뛰어갔었습니다
누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덮어쓰고
아프게 나를 껴안았습니다
겁에 질려 잠이 들면서도 나는
복숭아 만한 누나 가슴을 만지던 손이 떨려왔었습니다
아침에 깨어보니 언제 돌아오셨는지 어머니는
커다란 양푼이에 깨진 수박들을
숟가락으로 긁어 담아 하얀 설탕을 싸락눈 같기도 한 설탕을
하염없이 뿌리며 턱밑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계셨습니다
누나와 나는 아무 일도 모른다는 듯이
설탕 맛 밖에 나지 않는 화채를 떠먹으면서도
시퍼렇게 멍든 어머니의 얼굴은 차마 보지 않았습니다
마당가에는 깨진 수박들이
빨간 잇몸을 드러내고 웃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누나와 나는
아침에 먹다 남기고 간 화채를
냉장고에서 꺼내 허기를 달랬습니다
누나와 나는 평상 위에 누워 어머니를 기다렸지만
밤이슬이 우리 이마를 적시고 별들이 사라질 때까지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누나와 나는
화채를 다시는 먹을 수가 없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아마 수박 위에 하염없이 뿌려놓은 어머니의 눈물의 맛을
그때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심사평]
예심에서 올라온 작품들 가운데, 『해부학 교실』(외 8편)과 『숭한 이야기』(외 3편) 은 기본적으로 시를 엮을 수 있는 투고자의 소양과 자질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누구나 심장에서 퍼올리는 혈액으로 산다’는 예사로운, 그러나 단지 예사롭지만은 않은 사실을 삶의 모세혈관들이 만나는 지점마다 확인하는 전자는 남루한 대상들을 남다른 의미로 바꾸어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해가 지고, 아버지도 질 것을 안다’는 다소 생경하며 요령부득의 진술을 통해 일상의 통속과 무감각을 희화화하는 후자는 삶의 급소들을 정확히 짚어내려는 진지한 노력을 드러내 보인다. 다만 그들의 작품에서 사적인 감정들의 잔재나 과잉된 언어조작은 조만간 극복되어야 할 미숙함이라 하겠다.
이번 심사의 가장 큰 보람은 당선작으로 선한 『달콤한 화채』이다. 『연근』, 『절름발이 비둘기』, 『새 신을 신으면서』, 『단편』 등 함께 투고된 네 편의 시 모두 고른 수준을 갖춘 작품들이어서, 정작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택해야 할지 망설여야 했을 정도이다. 대개는 현재의 시점에서 아픈 가족사를 재구성하는 이 시편들은 좋은 시가 가져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춘 모범적인 것이면서도, 흔히 모범적인 작품들에서 눈에 띄는 식상함과 진부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뼈아픈 체험들에 유연한 리듬을 부여하는 언어의 자유로움, 대상을 자기화하면서도 칙칙한 감정토로에 떨어지지 않는 정신의 균형감각, 그리고 무엇보다 서두르지 않고 이야기를 조립함으로써 울림을 증폭하는 넉넉한 어법은 앞으로 뛰어난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기쁜 마음으로 당선자의 정진을 빈다.
이성복(문예창작학․교수)
'대학문학상 > 계명문화상(계명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5회 계명문화상 시부문 당선작 (0) | 2012.04.05 |
---|---|
제24회 계명문화상 시부문 당선작 (0) | 2012.04.05 |
제22회 계명문화상 시부문 당선작 (0) | 2012.04.05 |
제21회 계명문화상 시부문 당선작 (0) | 2012.04.05 |
제20회 계명문화상 시부문 당선작 (0) | 2012.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