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방이 있는 골목 / 박소란(동국대 문예창작학ㆍ4)
이따금씩 아랫도리를 까발린 사내가 출몰했네
라면 부스러기 같은 눈이 쌓인 밤
동동거리며 문을 따는 여대생들 하얀 목덜미를 훔치기도 했네
노인네 속곳처럼 지린 밑을 조몰락거리며
황망히 닫힌 문을 서성이던 어느 침울한 날엔가
월세방 전단이 빼곡한 수은등 아래
벌거벗은 그가 사무쳐 울고 있었네
이국종 겨울나무처럼 쓸쓸한 가지를 떨고 있었네
누군가 내게 보내는 비밀한 교신 같아
창백한 담벼락들 맞부둥켜 손가락질 해대는
이방의 어둔 골목에서
어쩐지 나는 그에게 말을 걸고 싶었네 추위를 달래고 싶었네
언 수피 가까이 아랫목 같은 불 지피고만 싶었네
생각해 보면 단 한번도
벌거숭이 사내만큼 외로운 적 없었는데
집냄새 사람냄새 사무친 적 없었는데 그 밤,
사내의 등 뒤로 무거운 걸음 재촉하며
괜한 뒷모습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네
어쩐지 낯선 도시의 헐벗은 나를
사내의 뿌리 곁에 고스란히 두고 온 것만 같네
로드무비 / 민구(명지대 문예창작학ㆍ3)
버스는 만원이고 눈발은 거세지고
사내는 잠이 든다 사람들은,
능청스럽게 코고는 그를 쏘아본다
기척에 놀란 그가 허리를 세워 상체를 고정시킨다
버스가 떠민 희미한 얼굴들이 시야에 걸려 그대로 들어온다
그는 밖으로 툭툭 시선을 던지며 멈추면 내려놓고 다시
새로운 얼굴을 건져 올리지만
本意는 아니다
바퀴가 풀어놓은 길 위로 분주하게 사람들이 오가고
걸음이 느린 몇은 앞으로 쏠리다가 앞선 이들을 향해
발이 먼저 미끄러진다
그때 버스 한 대가 급정거!
감탄부호처럼 급조된 소리, 또 그렇게 생긴 소리,
바닥에 닿으려는 순간 한 번
사뿐히 날더니 길 위로 풀썩 주저앉는다
뜻밖의 정지화면에 당황한 사람들이
씹힌 테이프를 두고 잠시 중얼거린다
도로 한복판 전광판에 날마다 관객 동원수가 기록되고
고장난 테이프는 재활용이라지만
그래도 끊이지 않는 말,
눈 위에 눈 쌓이듯 불어난다
[심사평]
예심에서 올라온 열 사람의 작품들은 시적 글쓰기의 맛깔과 태깔을 제대로 갖추었다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시적 대상으로 향하는 열정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고, 열정을 전달하는 말의 짜임새 또한 성글어서, 젊은이들의 글에서 기대되는 패기와 집요함이 속속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근래 들어 우리 문화 전반에서 눈에 띄는 비시적 사고방식과도 무관하지 않은 현상으로 짐작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 혹은 시적인 것이 우리 삶에서 사멸해버린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노후한 수도관에서처럼 시의 물길이 우리 삶 곳곳에서 하릴없이 유실되는 것일 뿐이리라. 그러나 정말 위험스러운 것은 시적 글쓰기의 모세혈관이 터져버림으로써 정신의 수족마비 현상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또한 시적인 것의 소모와 유실로 인한 폐단이 비단 정신의 수족마비에만 그치겠는가. 선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시를 모르면 높은 담장 앞에 서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다소간의 망설임 끝에「자취방이 있는 골목」과「로드 무비」를 가작으로 선한다. 어쩌면 변태성욕자로 보이는 한 사내의 허름한 출몰을 이야기하는「자취방이 있는 골목」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남루한 풍경 한 자락을 수놓듯이 섬세하게 보여주는데, 배면에 화자의 감상적인 어조가 배어듦으로써 긴장과 밀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또한 건조하고 거의 물질적인 시선으로 도시생활의 한 단면을 스냅사진으로 떠올리는 「로드 무비」는 말을 씹는 재미의 일단을 보여주지만 때로는 지나친 연상의 비약으로 인해 읽기를 방해한다. 일단은 두 편의 시 모두 글쓰는 사람 자신의 조야한 일상에 뿌리와 부름켜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무성한 시의 그늘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다만 시는 근본적으로 말의 번짐으로 이루어지며 말의 번짐을 가능케 하는 힘은 글쓰는 사람 자신의 집요한 열정과 정신의 자유로움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열정도 자유도 쟁취하는 것이다.
심사위원: 이성복(문예창작학ㆍ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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