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바지 / 신희진(연세대 인문학부·3)

 

바지의 긴 구멍을 들여다보면 슬프다.

굽이쳐진 동물의 창자 속 같기도 하고

어둠 쳐진 시간의 긴 골목길 같기도 하다.

여기엔 도무지 빛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슬프다.

나는 바지의 구멍을 들여다보다가

긴 空洞의 끝에 가 부딪히곤 한다.

탈출구일까, 방황의 가지 끝에 달린 피로의 냄새와

때로 끝이 몽똑하게 잘린 그리움.

단발의 몸을 끌고 간 짓궂은 먼지나

더욱 얄궂은 흙탕물 같은 질팍함이 붙어있다.

이것들이 주렁주렁 주름을 빚어낸다.

바지 속 쌍둥이 동굴은 평행할 줄 모르는

왜곡된 사랑,

내 절뚝거리는 사랑이 어둠으로 올망져 있는 곳.

때로 바지 속 긴 구멍을 들여다보다 잠든다.

그것은 외로운 동물 같은 꿈이며

버려지지 않는 식탁, 내 하루를 판화처럼 찍어내는

진기한 역사다.

바지를 입는 일이 그렇다.

 

 

 

 

 

[심사평]

 

  예심에서 올라온 열 명의 응모자들의 작품은 예년에 비해 수준이 떨어졌다. 간혹 재미있을 듯 싶은 시라 하더라도 말장난이 지나치거나, 말장난을 해놓고 수습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같은 사람의 응모작들도 수준의 편차가 많았다.

비유컨대 시라는 진술방식은 ‘자기 부상 열차’와 같은 것이다. 시의 언어사용 방식은 산문의 방식과는 많이 달라서 일단 언어 위로 떠오르지 않으면 시로서의 맛깔이 나지 않는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시의 의미는 ‘잠수함’과도 같이 언어의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이어서, 일단 바깥으로 드러나면 쉽게 사라지고 만다.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만, 시는 말장난이다. 그러나 시라는 말장난은 언제나 ‘의미 있는’ 말장난이며, 신선하고 강렬한 충격을 주는 말장난이다. 시에 대한 이같이 적나라한 접근이 때로는 시가 감정과 사상의 통로라는 고정관념을 부수는 데 효력을 갖는다.

마지막까지 남은 두 응모자의 시들 가운데 「육면체의 노을」을 쓴 학생은 일단 시라는 진술방식이 언어를 타고 한바탕 잘 노는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다. 그는 여러 가닥 언어의 실을 교묘하게 맺고 꼬는 솜씨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언어 교직은 때로 장난스러움이 지나쳐, 자신이 엮고 있는 실이 어느 가닥인지를 까먹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시는 말장난의 일종이지만, 말장난이 곧 시는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바지」를 당선작으로 고르는 데는 오랜 망설임이 있었다. 시를 엮어 가는 과정이 적지 않게 불안할뿐더러, 함께 투고된 다른 작품들의 수준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응모자의 글쓰기 훈련이 아직 충분치 않고, 시의 존재방식에 대한 또렷한 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수상작으로 택한 것은 바지라는 일상적 소재를 시적 대상으로 읽어내려는 진지하고 건강한 자세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바지의 긴 구멍을 들여다보면 슬프다”로 시작되는 흥미진진한 횡설수설은 헐렁헐렁한 바지의 모양새와 터무니없이 닮아 있고, 바지처럼 땟국물에 쩔은 일상적 삶의 모습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도무지 빛이 보이지 않는 바지 구멍에서, ‘몽똑하게 잘린 그리움’을 읽어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수상을 축하하며 정진을 빈다.

이성복(문예창작학․교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