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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리나에게 부쳐 외 4편

 

박소진

 

 

기차를 탄 안나 카레리나와

멀어지는 브론스키를 보았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보통의 날에

고전을 읽고

그곳의 입맞춤을 따라한다

한 줌의 익숙한 기억으로

화려한 군무여

 

그러나 나는 여전히 느리다

사랑할 여유가 없고

온종일 노랗게 짓무른 하늘만 본다

때로는 가쁜 숨을 토하며

 

내가 울었던 날이

구름도 하얗게 쇤 어느 날이

지나치지도 않게 적당했던 하루에

토해내고 천천히 지워지고

수신인 없는 편지 마지막에

내 이름 세 글자를 쓰고

연약한 연애를 닮은 얼굴로 초라한 옷깃을 여민다

 

그런 기차를 타고 싶었다

안나가 울던 기차

안나처럼 사랑하리라 했다

안나처럼 수줍지만 초라하지 않게 

 

 

 

 

예술과 진실

 

 

정직한 아름다움은 범주에 들지 못했다

단순함은 복잡해지고 묘사는 난해했다

천 년이 흐르는 동안

모방의 예술가는 선을 말했고

거짓의 진실을 살고 죽었다

 

미의 표본이 없어

신은 죽었다

만물이 제 모습을 신이라 여겼다

두꺼비도 제 모습이 아름다웠고

황소에게 인간은 두 무릎을 바쳤다

거짓은 치장으로 비만해지고

진실은 가난으로 배를 주렸다

그렇게 또 다른 천년이 오고

비너스는 다산했고

어느 날, 아도니스는 예수였다

 

그림자 없는 종은 없고

영혼도 제 모습이 있어 상상력은 번창했다

신도 당신의 모습을 발밑으로 보지만

진실의 창은

오만으로 재갈 물려 검게 닫혔다

 

 

 

 

 

동행

 

 

당신을 떠나온 어느 날은

시리게 따뜻했다

몇 안 되는 세간을 들인 날,

남루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허리를 굽혔다

공손한 무릎에 두 손을 얹고

천천히 낯선 여자의 품으로 가라앉았다

 

가을이 새롭다

새로 만난 엄마가 자신의 방법으로 가을을 그린다

이 인연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보여주려나

이건 벌개미취, 이건 들국화

꽃들은 사람의 감정과 상관없이 활짝 행복하다

몇 번의 발자국을 나란히 하늘 아래 찍어본다

낯선 길이 걸어오고

서로 부둥켜 하얀 들판을 걷고

차가워진 팔을 겹쳐 안았다

 

발자국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제 어미 그리워 우는 여자를 달래어

저린 젖가슴위로 입김을 불어넣는다

가늠 없이 겹쳐 안은 팔 사이로

남아있는 마음이 여자를 적시며 흘렀다

 

 

   

 

그 해, 오늘

 

 

눈을 떴다 핏덩이를 안는다

모래알 같은 기억이 씹힌다

가냘픈 태동, 갓난애가 놀고 있다

아기는 자라 여자의 이야기가 되리

엄마의 창은 딸의 눈이라

딸의 목소리가 어미의 웃음이라

엄마는 나와 열 달을 같이 살았다

나를 매만지고

흐르는 나를 치켜 올리고 옷깃을 여미며

손을 잡고 속삭였다

 

엄마처럼 나도 아기에게 말을 걸어본다

이건 초록 여름 나무

저건 토끼 닮은 구름

내가 걸어 엄마가 걸었고

내가 멈추면 엄마도 앉았다

내가 눕고 아기는 기었다

 

배앓이에 눈을 뜬다

호흡이 정적을 깨고 엄마를 부른다

아기의 달아오른 울음이 손에 잡힌다

나는 내 딸과 열 달을 살았다

그 해, 엄마도 나와 열 달을 살았다

심장이 뛰고

기억이 온기를 내뿜는다

 

 

 

 

 

딸기꽃

 

 

손이 시리다

딸기는 찬물에 씻어야한다

입김에 영글었던 씨앗들이 짓이겨지고

붉게 탄 입술을 하나씩 잘랐다

등 뒤 너머 식구들 웃음소리에

찬 손은 얼어가고

 

천국에 초대받은 아이들은

지상으로 내려올 때 딸기 꼭지가 생긴다는구나

가진 것 중 가장 순백의 이야기를

내게 바치겠다고

당돌하고 수줍게

머리에 이고 보는구나

 

명랑한 핏빛을 품고

그 속에서 고귀하게 피었다

프리카*에게 바쳐질 만 했구나

손이 시려 그만 조각을 냈다

가시를 품은 장미로 돌아가지 못한

망각의 꽃잎은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해

홀로 외롭다

 

너를 따다가

손이 시렸다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여신

 

 

 

 

 

성명 : 박 소 진

주소 : 서울시 성북구 돈암2동

약력 :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전) PANTOS Logistics 우크라이나 법인 주재 근무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 석사 재학 중

자유문학세대예술인협회 전국문학창작공모대회 시 부문 최우수상 (일반부) 수상

(2011.10.15.)

자유문학세대예술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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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후협상 / 김필대

 

금요일,

마음이 늘 몸보다 앞선다

무작정 나선 길

곧 되돌아 올 길을, 천천히 지우며 떠난다

 

생각하면

비 젖은 꽃송이처럼 너는 기울어진다

대책 없는 시간은 흘러가고

처음부터 일일이 설명에 열 올리던

네 그림자 지쳐 길게 누워있다

 

다시 꽃 피는 날, 낯익은 이름 부르면

외롭고 쓸쓸히 한 세상 살아온

잊었던 이름들 먼저 대답하고

퇴근시간에 맞춰 허리 굽히는 山들

 

일주일치의 근심을 배낭에 구겨 넣고

사람들은 도시를 빠져나가고,

 

물끄러미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숨겨둔 히든카드 한 장을 만지작거린다

 

늦어버린 저녁 먹으러 간다

너를 보내고도

아직도 널 보내지 못한, 비공식

막후협상은 남아있다

 

 

주소를 묻다

 

자정을 알리는 소리에

오늘은 어제가 되고 기다렸던 내일이

오늘로 신발을 갈아 신었습니다

시간은 새 주소로 자리를 옮기고

초를 세며 걷기 시작합니다

 

이파리 버린 가로수들

계절은 주소를 잃어버리고

도시는 어지러운 불빛을 허리에 두르고

잠을 반납하고 있습니다

출구를 잃은 바람조차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감나무 그늘 뒤로 달빛이 서성일 때

후두둑 감꽃이 떨어지듯

누군가 황급히 돌아간 발자국

남겨진 한 줄의 말씀처럼 선명합니다

 

달빛에 휜 나뭇가지처럼 당신에게 휘어져

한여름의 분수를 오래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높이 올라 추락하는 마음을 그때 보았습니다

 

이제 막 도착한 오늘이

지금의 날 예견한 듯 바라봅니다

짐을 꾸리다 발견한 오래된 시집 한 권

놓쳐버린 詩句처럼 우리는 어디쯤에서 멈췄을까요

 

안개 속으로 천천히 걸어갑니다

아직 詩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들고

 

 

 

슬픔을 나누는 명상

 

좀 더 많은 슬픔을 가진 자가

작은 슬픔을 가진 자를 위로하는 게

이 작은 나라의 법이다

봄꽃 지천으로 피었으되 정작

자신의 부재를 알리고 떠나는

들꽃 하나 아직 보지 못했다

운명 따윈 믿지 않은지 오래지만

예정된 절대적인 힘에 가슴 졸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출구가 막힌 슬픔의 극한,

가혹한 현실도

서로 손을 잡으면 삶의 통로가 생기려나

이 한줌의 기쁨을 위해 얼마나 많은 슬픔이 길을 잃었나

진정 알고 싶던 운명의 변주곡

이곳을 관장하시는 운명의 神께

우리가 원하는 것들의 목록을 적어 보낼까

소박하지만 빈들에 엎드린 한 송이 들꽃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 한통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라도

기꺼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세상이 있었으면

 

 

떠나기 위해 돌아오다

 

말없이 떠나고 싶은 것은

어딘가에 나를 버리러 가는 일

가진 것 훌훌 털어내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첫걸음만 내디딜 수 있다면

길은 어디에나 있다

아무도 이웃하지 않은 저기 홀로선 미루나무에게

짧은 작별을 고하고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가난했던 우리의 청춘에게도

위로의 술 한 잔쯤 권하고 싶을 때,

 

익숙해진 계절병은 제 시간 그 장소에

어김없이 돌아오고

비오는 날의 강가, 물줄기가 드럼을 친다

 

너를 두고 그림자만 데리고 떠나는 길

심장소리보다 더 크게

물의 심장이 울고 있다

빗소리가 앞서서 강을 건너는 동안

나는 자욱하게 지워지는 중이다

 

 

 

새해를 기다리며

 

어머니처럼 늙어버린 계절이

나를 향해 오고 있다

사람들 사이를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겨울처럼 서러운 중년의 사내는

코트 깃을 세우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난 사람들

쓸쓸히 헤어진 어느 길모퉁이

새해 인사장 대신 악수를 청하노니

잘 가라 그대 새해여

 

어제 올랐던 삶의 산봉우리

체온으로 덥혀진 한 잔 술 권하고

다시 봄을 기다리는 저 아래 삶의 계곡엔

가난이 눈처럼 쌓여있다

용케도 운명에 매몰되지 않은 영혼들이

산그늘 아래 오랫동안

울고 서있다

 

태양은 습관처럼 다시 뜨겠지만

일출과 일몰이 다르듯

양지와 음지가 있다

빛은 고르지 않다

 

그늘에 발을 묻고 사는 잡초의 이름을

누가 기억할 수 있을까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얼룩진 삶들

저 산 밑에 살고 있다

 

세상의 맨 끝줄에 서서, 오지 않는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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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감성 제4회 신인상 공모 당선자 발표

 

안녕하세요. 깨끗함과 개혁을 표방하는 문예감성 제4회 신인상 공모에 많은 분들이 응모해 주심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최초 발표일을 3월15일로 공지 했습니다만 많은 분들이 응모를 해 주셔서 1차, 2차를 거치는 과정에 다소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발표가 늦어진 점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당선작은 빠른 시간 안으로 신인상 수상작 게시판에 등재토록 하겠습니다. 당선되신 모든 분들에게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장르별 당선자

 

1. 시 부문
  김현승  '지렁이 발자국' 외4편
  김필대  '막후협상' 외 4편

 

 

지렁이 발자국 / 김현승

 

콘크리트 틈에 지렁이들이 피었다

그 와중에 모래 씨앗들을

새끼처럼 품은 이들이 있다

꺼지지 않는 호흡이다

토막 난 바람에도 혼절할까

온몸을 환대로 감싼다

그들을 깨운 생에 자양분이 되는 건

이슬 한 움큼

구름이건 햇살이건 바람이건

목숨이 세포인 생물에는 모두

견뎌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고

메마르고 어지러운 시간들이 온몸에 달라붙는다

환절環節마다 말라붙은 오후를 계속 기다보면

제 세상의 끝이 보일까

우거진 밤을 두 근육으로 밀어 끈 후에는

수평선이 닿아있는 시간의 배후에서

집을 짓고 있을지 몰라

그 틈에서도 그들은 호흡을 하고 있다

 

오늘, 거리에서 헝클어진 발자국을 보았다

 

 

지하역에 문병 가겠어요

 

결핍된 목구멍 속으로

지하의 生이 운반되어 오네요

정지했던 시간의 틈이 문을 열어요

코까지 차오른 숙성된 시간들이

토사물처럼 분비되지요

네 줄 서기로 흩어졌던 신발들이

멀미하는 구멍 속으로 모여요

사막 같은 발끝들을 머물게 했던

역사(驛舍)에 또

빈 바람만 씹히네요

 

결빙된 하루가 지하역에서 미끄러워요

그냥 내버려두면 넘어지겠어요

그것 봐요,

기절한 술병들이 흠집 나 있잖아요

구겨진 구직 전단지들 위에 딱지가 앉아 있어요

 

역 구멍 속으로 등이 굴곡진 생명들이 동거해요

관절염으로 마비된 넋들

시름시름 바닥을 기더라도 바람막이 벙커가 필요한 거겠죠

텅 빈 갈망으로 꽁꽁 둘러 싼

닳고 닳은 옷들

해진 마음 한 귀퉁일 매만져 줄래요

종양 같은 먼지의 무게를 덜어 주겠어요

 

지하역에 구멍이 있어요

지하역 구멍은 상처막이 벙커예요

그 안에 머무는 마른 생명들, 모두

편도선이 퉁퉁 부어 있어요

 

지하역으로 비대한 어둠이 걸어오고 있어요

 

 

노파의 장롱

 

긁히고 베이던 어린 날들이 있었지요

 

그때는 몰랐어요

처음부터 있었던 그대의 둔탁한 부재(不在)를

출처를 알 수 없던 살갗의 홍조는 늘

부재(不在)의 모서리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그러자 점점 귀 기울이게 되었어요

그대가 내게 건네는 말들에

쪼그라든 풀잎들, 꽃받침이 헐거워진 자리,

내장의 언어들을 물려주기 위해

내 몸에 자국을 남겼대요

 

처음으로 그대의 내력을 알게 되었어요

이불홑청 흐트러진 꽃잎들 사이로

첫울음 터뜨린 후,

내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목련꽃을 낳은 해에

세상 울음길을 터 주었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그대의 낯이 쓸쓸하게 늙어 있네요

가장 낮게 엎드려 볼을 대고 서성여 보았어요

바람의 얼굴을 한 채 그대의 소매를 잡아당겼지요

 

차고 비릿한 숨이 몰아치고

검고 눅눅한 싱싱한 꽃잎들이 번져가고 있어요

 

어서 이 꽃잎들을 품어야겠어요

 

 

 

오래된 통증

 

그때도 사나운 밤이었다

 

골목 10m 간격의 나뭇가지들이 떼울음을 울었고

울음소리는 내 따귀를 때리고 있었다

차가운 울음 부스러기들이 몸에 들러붙을까, 슬쩍

피할 궁리를 하고 있는데

골목 한 귀퉁이에서 생선 비린내들이 새어나왔다

먼 과거로부터 흘러 들어온 생선 대가리들,

떠돌이 차림으로 각질처럼 길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도시의 무덤 속에 웅크린 중년의 사내,

얼어가는 수도관에 목숨을 걸어 놓고

초보의 몸짓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건너편 멀리 보이는 ‘來 美 安’ 불빛들과 부딪혀

동파하는 중년의 눈빛

골목의 울음 위에 얹혀 골목을 밀어올렸다

 

그때는 비릿한 밤이었다

고양이 울음이 어디선가 들려오고

생선 대가리의 울음이 저릿한 두 귀밑 거리를 메우던 밤

중년의 눈빛이 마음의 고리에 걸려 바람에 흔들린다

내내 비린 기억이 가시지 않는다

 

 

 

겨울 품에 들다

 

베개 밑에 겨울이 내려앉는다

 

충혈된 별 그림자가

손을 맞대고 비비는 소리

이불 속에 들어와 체온을 지펴주고

연방 꼼지락대던 어린 발가락들은

눈부신 공상에 잠이 멎는다

 

마당에는 새치름한 눈의 요정들이

얼음 왕국을 만들고 천장 밑 환상화에

까르르대던 머리맡

할머니의 잔소리도 유쾌한 그날은

목련도 한껏 필듯하였다

이불 속 공상을 지피는 집을 찾지 못해

꼼지락대던 시린 발가락들도

베개 밑 겨울과 잠을 청할 때

베개 밖 겨울에도 눈이 내려앉는다

 

아스팔트길에 피울

인조 불빛을 가공하는 도시

어떤 이들은

귓가에 걸린 별 그림자 소리 잃어가고

어떤 이들은

베개 밑 겨울만 훔쳐가지만

할머니가 계시던 그해, 겨우내

지붕 위에 베개 밑에 겨울이 내려앉던,

그 이불 속 어린 발가락들은 여전히

그리운 공상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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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지다 / 김혜인 

 

비틀거리는 기억은 술을 먹어야 싱싱해진다

지그시 마음을 감고 투명한 사연을 한잔 마시면

드디어 세상엔 붉은 꽃잎이 하나씩 피어난다

상처 난 가슴을 치료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빨간약을 발라주시는 시간

세상은 요술처럼 붉은 꽃 천지가 된다

내 뜰에도 살며시 왔다 가는 봄

오늘은 꽃들이 다 피기도 전에 술이 떨어졌다

붉은 꽃 몽우리들은 어찌하라고 님은 전혀 기척이 없으시다

붉어 속이 타는 줄은 차마 묻지도 못하고

어쩌자고 눈웃음 저리 치는지

새들도 비밀이 있고 바람도 때로는 거짓으로 우는데

부끄러운 화장을 지우듯 아픈 기억은 잊어야 한다

섬처럼 적막한 그 사랑에 겨울이 툭툭 꽃으로 진다

사랑은 꽃이 져도 버거울 뿐이다

 

 

 

봉숭아 물들이다

 

천진난만한 웃음이 한 여름을 감시한다

이기적인 태양 아래

꽃밭은 더욱 무성해진다

손톱만한 죄의식도 없는 외로움이

붉은 꽃을 딴다

한바탕 소나기를 피하지 못하는 계절

손톱위에 펼쳐진 소리 없는 노래가

열 개의 붉은 흔적을 남긴다

친친 동여맨 꿈을 품고

성자의 깊은 꿈속으로 걸어간다

뜨거워지는 열망을 감추고 붉은 무릎을 꿇는다

불러주고 싶은

뒤 돌아 보고 싶은

순진무구한 약속이 점점 빠져나간다

반달만큼 손끝에 걸려있다

 

 

 

샐비어

 

한창 타오르는 연애가 저리 붉을까

이만치 비켜서 볼만큼 뜨겁고 눈부시다

서로 부딪치며 싸움 같은 사랑을 하다가

산산이 부서지는 종소리

비처럼 쏟아지는 향기가 된다

피처럼 붉은 밀어(蜜語)가 된다

 

미움이 남지 않은 기억은

꿀물이 나오지 않는 꽃술이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 감동이다

꽉 막힌 침묵을 뚫으려 손끝을 따본 적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꽃잎을 따지 않는다

달콤한 입맞춤을 꿈꾸지 않는다

 

붉은 사랑은 모두 아프다

 

 

 

해바라기

 

태양만 바라보는 것은 잔인한 일

 

감당하지 못할 무게에

고개마저 꺾고

다 낡은 이름을 붙들고

황소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꽃의 절반은 꿀이 없는 가짜꽃

그래도 살기 위해

꿀벌을 불러야한다

 

꽃이라면

지나는 발길 한 번쯤은 되돌릴 수 있어야 한다

향기와 빛깔과

찬란한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노을이 가슴에서 지고 있거나

숨겨놓은 비밀 씨앗처럼 익어가거나,

 

해바라기처럼

태양만을 기억한다는 것은 낡고 적막한 일이다

 

 

 

불면(不眠)

겨드랑이 밑의 한 생각이다

구석구석 스멀거리는 가려움

벌레들 기어 다닌다

발등에 몇 마리

무릎 위에 또 몇 마리

등줄기를 따라 꿈틀거리는 기지개

사막에 홀로 남겨진 발자국이다

두개골 속을 걸어가는 바람소리다

하얀 날개가 돋고

지붕에

새 몇 마리

나무 위에

또 몇 마리

바람을 따라 골목을 지나

창문 앞에 서성이는 하얀 달빛이다

화끈거리는 불덩이 강물에 몇 개

하늘 위에 또 몇 개

끝없이 이어지는 불멸(不滅)의 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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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느러미 / 김영석

 

늦은 밤 다림질하는 여자, 손길이 사뭇 진지하다

먼 항해에서 돌아 온 나는 늘 피로에 축 늘어져있다

조심스럽게 때로는 한껏 거칠게 구겨진 깃에 빳빳한 힘을 불어넣고

무뎌진 핏줄을 끌어당겨 날카로운 현실감각을 세우고는

어쩌겠어요 이렇게 살아가는 거지요

언제부터인가 나는 발기되지 않는다 솟대처럼 갈망의 높이였다가

펄떡이는 숭어의 생명이었다가 파도에 잘 길들여진 후 부터는

고개를 조아리는 일상이 습관이 되어버린,

관성으로 열려오는 하루 저항 없이 익숙한 물길에 몸을 실으며

이젠 없이도 지낼 수 있겠다 싶을 때 문득

저 달인들 갈 수 있으리라던 갈매기 조나단처럼

젊은 날 푸르던 이상이 생각나는 것이다

긴장을 놓쳐버린 등뼈 그녀의 손놀림은 정확하다

비창조적이지만 팽팽한 시위를 걸어놓는다

내일도 나는 바다로 달려갈 것이다

지느러미 하나 꼿꼿이 가슴 속에 간직한다는 건

때론 무력감을 부추겨 외면하고 싶지만 가끔은

죽은 신경을 자극해선 불쑥, 희망을 일으켜 세우기도 할 것이다

다림질을 끝낸 여자가 품으로 안겨온다

그나마 살아있는 동안 좌초된 배처럼 쉽게 기울어질 일도

바다 깊이 가라앉을 일도 없으리란 걸 그녀는 알고 있다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다시 일어서듯 그렇게 살아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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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 황인수

 

1

책을 꽂다가 불현듯 돌아서면 성큼

포말을 일으키며 달려와 찰랑찰랑 발 아래 부서지는 햇살

몰래 다가와 팔 길게 뻗어 유리창을 찢고 서있는

복숭아나무 꽃가지.

난 한참동안 가늠하죠.

나를 위압하고 있는,

나의 빈틈을 찾고 있는,

고개 돌리는 찰라 내 뒤통수를 탁-치고 도망갈 봄날의 깊고 황홀한 눈동자를.

보고 있어도 눈치 챌 수가 없죠.

이미 저만큼 달아나고 있는 봄의 짧은 머리카락.

나는 지금 술래죠.


 

2

책을 꽂다가 휙 돌아서면서도

난 깨닫지 못했죠. 꽃그늘 속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서고 있는,

어느 날 불쑥 찾아온 듯한 그를.

돌아서고 싶지 않아요. 시선을 놓으면 그가

달아나야 하니까요.

나는 잠시 술래라는 사실을 잊죠.


 

3

그는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을까요?

2층 열람실 한쪽 모퉁이가 그의 출발선이었을까요?

시나브로 내 마음의 지도 한 끝에서 중심으로 다가오고 있는 그.

타임!을 외치고 잠시 시선을 접으면 이 설렘이 멈출까요?

책을 꽂다가 휙 돌아서서 그가 없으면

노을 지고 난 뒤의 하늘처럼 우르르

땅거미로 주저앉는 내 마음.

 


4

꽃이 지고 가지마다 엄지손 마디만한 복숭아들이 매달렸어요.

그는 햇살 속에 서 있고, 난

그가 바라보아도 보이지 않는 유리창 이편에 서 있죠.

그의 모자가 바다처럼 푸르네요.

그의 꿈이 출렁출렁 파도치고 있어요.

여자가 보이네요,

그의 옆에 서 있는 물결치는 긴 머리카락의.

두 사람이 웃고 있네요.

곁에 선 단풍나무가 가끔씩 어깨를 들썩이며 따라 웃네요.


며칠 동안 작달비가 내렸어요.

오래된 책상 위에 남아 있는 빗금처럼

유리창을 긋던 빗줄기

눈물방울처럼 뚝뚝 복숭아를 떨구고 갔네요.

 

일 년 내내 햇살이 푸짐한 도서관 1층.

책을 꽂다가 불현듯 창가로 오면

초록 잎 뒤에 숨어 익어가는 내 심장을 닮은 복숭아.

그는 햇살 속에 서 있고

나는 아직도 헤아리고 있죠.

그의 서가(書架) 한 켠에 비집고 들어가 꽂힐 수 있는, 나를 위한

단지 2센티미터의 좁은 틈이라도 있는지.

그리고 또 생각하죠.

그의 숫자는 무얼까? 그의 자모(字母)는? 그의 분류기호……

그는 모르겠죠. 해마다 이 서가의 책 사이사이마다

분류기호 없이 꽂아놓은 나의 그리움들을.


난 이제 술래가 아니에요.

그에게로 가서 팔을 툭 치며 말할까요?

봄부터 유리창 안에서 당신을 햇살인 양 품었다고.

그가 웃지 않으면 어쩌지요?

  

그가 보이지 않아요.

그가 앉아있던 대리석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았어요.

그가 피워 올렸던 담배연기인 양 흩어지는 구름.

그가 서 있던 복숭아나무 밑을 서성거렸죠.

익지도 않은 채 떨어져 뒹구는 복숭아.

복숭아의 무게를 기억하는 휘어진 가지는 한동안

제자리를 못 찾고 있는데.

 

찬 이슬이 내렸어요.

그의 푸른 모자 속에서 출렁거리던 꿈처럼

높은 하늘.

여전히 그는 보이지 않고

불현듯 다가온 그의 그림자 인 양 복숭아나무 빈 가지

햇살에 매달려 유리창을 그리움으로 흔드네요.


 

5

뒤돌아 서 있을 때 다가오는 건 숙명이라죠?

사랑은 꼭 그렇게 와요.

밀물처럼

돌아설 때마다 한 뼘씩 다가와 있죠.

내 발목을 적시는 설렘,

턱밑까지 차오르며 파도치는 그리움.

하지만 숙명은 썰물을 등에 업고 오는 법.

돌아서고 돌아본 만큼 멀어져 가죠.

책 위에 남모르게 쌓여 가는 먼지 같은 사랑

책갈피마다 보이지 않게 쓰여 있는 사랑의 이름들

사랑에 있어서, 난 언제나

술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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