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리나에게 부쳐 외 4편
박소진
기차를 탄 안나 카레리나와
멀어지는 브론스키를 보았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보통의 날에
고전을 읽고
그곳의 입맞춤을 따라한다
한 줌의 익숙한 기억으로
화려한 군무여
그러나 나는 여전히 느리다
사랑할 여유가 없고
온종일 노랗게 짓무른 하늘만 본다
때로는 가쁜 숨을 토하며
내가 울었던 날이
구름도 하얗게 쇤 어느 날이
지나치지도 않게 적당했던 하루에
토해내고 천천히 지워지고
수신인 없는 편지 마지막에
내 이름 세 글자를 쓰고
연약한 연애를 닮은 얼굴로 초라한 옷깃을 여민다
그런 기차를 타고 싶었다
안나가 울던 기차
안나처럼 사랑하리라 했다
안나처럼 수줍지만 초라하지 않게
예술과 진실
정직한 아름다움은 범주에 들지 못했다
단순함은 복잡해지고 묘사는 난해했다
천 년이 흐르는 동안
모방의 예술가는 선을 말했고
거짓의 진실을 살고 죽었다
미의 표본이 없어
신은 죽었다
만물이 제 모습을 신이라 여겼다
두꺼비도 제 모습이 아름다웠고
황소에게 인간은 두 무릎을 바쳤다
거짓은 치장으로 비만해지고
진실은 가난으로 배를 주렸다
그렇게 또 다른 천년이 오고
비너스는 다산했고
어느 날, 아도니스는 예수였다
그림자 없는 종은 없고
영혼도 제 모습이 있어 상상력은 번창했다
신도 당신의 모습을 발밑으로 보지만
진실의 창은
오만으로 재갈 물려 검게 닫혔다
동행
당신을 떠나온 어느 날은
시리게 따뜻했다
몇 안 되는 세간을 들인 날,
남루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허리를 굽혔다
공손한 무릎에 두 손을 얹고
천천히 낯선 여자의 품으로 가라앉았다
가을이 새롭다
새로 만난 엄마가 자신의 방법으로 가을을 그린다
이 인연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보여주려나
이건 벌개미취, 이건 들국화
꽃들은 사람의 감정과 상관없이 활짝 행복하다
몇 번의 발자국을 나란히 하늘 아래 찍어본다
낯선 길이 걸어오고
서로 부둥켜 하얀 들판을 걷고
차가워진 팔을 겹쳐 안았다
발자국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제 어미 그리워 우는 여자를 달래어
저린 젖가슴위로 입김을 불어넣는다
가늠 없이 겹쳐 안은 팔 사이로
남아있는 마음이 여자를 적시며 흘렀다
그 해, 오늘
눈을 떴다 핏덩이를 안는다
모래알 같은 기억이 씹힌다
가냘픈 태동, 갓난애가 놀고 있다
아기는 자라 여자의 이야기가 되리
엄마의 창은 딸의 눈이라
딸의 목소리가 어미의 웃음이라
엄마는 나와 열 달을 같이 살았다
나를 매만지고
흐르는 나를 치켜 올리고 옷깃을 여미며
손을 잡고 속삭였다
엄마처럼 나도 아기에게 말을 걸어본다
이건 초록 여름 나무
저건 토끼 닮은 구름
내가 걸어 엄마가 걸었고
내가 멈추면 엄마도 앉았다
내가 눕고 아기는 기었다
배앓이에 눈을 뜬다
호흡이 정적을 깨고 엄마를 부른다
아기의 달아오른 울음이 손에 잡힌다
나는 내 딸과 열 달을 살았다
그 해, 엄마도 나와 열 달을 살았다
심장이 뛰고
기억이 온기를 내뿜는다
딸기꽃
손이 시리다
딸기는 찬물에 씻어야한다
입김에 영글었던 씨앗들이 짓이겨지고
붉게 탄 입술을 하나씩 잘랐다
등 뒤 너머 식구들 웃음소리에
찬 손은 얼어가고
천국에 초대받은 아이들은
지상으로 내려올 때 딸기 꼭지가 생긴다는구나
가진 것 중 가장 순백의 이야기를
내게 바치겠다고
당돌하고 수줍게
머리에 이고 보는구나
명랑한 핏빛을 품고
그 속에서 고귀하게 피었다
프리카*에게 바쳐질 만 했구나
손이 시려 그만 조각을 냈다
가시를 품은 장미로 돌아가지 못한
망각의 꽃잎은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해
홀로 외롭다
너를 따다가
손이 시렸다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여신
성명 : 박 소 진
주소 : 서울시 성북구 돈암2동
약력 :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전) PANTOS Logistics 우크라이나 법인 주재 근무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 석사 재학 중
자유문학세대예술인협회 전국문학창작공모대회 시 부문 최우수상 (일반부) 수상
(2011.10.15.)
자유문학세대예술인협회 회원
'문예지 신인상 > 문예감성신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4회 문예감성 신인상 (0) | 2012.07.16 |
---|---|
제4회 문예감성 신인상 (0) | 2012.07.16 |
제3회 문예감성신인상 (0) | 2012.02.20 |
제2회 문예감성신인상 (0) | 2012.02.20 |
제1회 문예감성신인상 (0) | 2012.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