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 황인수
1
책을 꽂다가 불현듯 돌아서면 성큼
포말을 일으키며 달려와 찰랑찰랑 발 아래 부서지는 햇살
몰래 다가와 팔 길게 뻗어 유리창을 찢고 서있는
복숭아나무 꽃가지.
난 한참동안 가늠하죠.
나를 위압하고 있는,
나의 빈틈을 찾고 있는,
고개 돌리는 찰라 내 뒤통수를 탁-치고 도망갈 봄날의 깊고 황홀한 눈동자를.
보고 있어도 눈치 챌 수가 없죠.
이미 저만큼 달아나고 있는 봄의 짧은 머리카락.
나는 지금 술래죠.
2
책을 꽂다가 휙 돌아서면서도
난 깨닫지 못했죠. 꽃그늘 속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서고 있는,
어느 날 불쑥 찾아온 듯한 그를.
돌아서고 싶지 않아요. 시선을 놓으면 그가
달아나야 하니까요.
나는 잠시 술래라는 사실을 잊죠.
3
그는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을까요?
2층 열람실 한쪽 모퉁이가 그의 출발선이었을까요?
시나브로 내 마음의 지도 한 끝에서 중심으로 다가오고 있는 그.
타임!을 외치고 잠시 시선을 접으면 이 설렘이 멈출까요?
책을 꽂다가 휙 돌아서서 그가 없으면
노을 지고 난 뒤의 하늘처럼 우르르
땅거미로 주저앉는 내 마음.
4
꽃이 지고 가지마다 엄지손 마디만한 복숭아들이 매달렸어요.
그는 햇살 속에 서 있고, 난
그가 바라보아도 보이지 않는 유리창 이편에 서 있죠.
그의 모자가 바다처럼 푸르네요.
그의 꿈이 출렁출렁 파도치고 있어요.
여자가 보이네요,
그의 옆에 서 있는 물결치는 긴 머리카락의.
두 사람이 웃고 있네요.
곁에 선 단풍나무가 가끔씩 어깨를 들썩이며 따라 웃네요.
며칠 동안 작달비가 내렸어요.
오래된 책상 위에 남아 있는 빗금처럼
유리창을 긋던 빗줄기
눈물방울처럼 뚝뚝 복숭아를 떨구고 갔네요.
일 년 내내 햇살이 푸짐한 도서관 1층.
책을 꽂다가 불현듯 창가로 오면
초록 잎 뒤에 숨어 익어가는 내 심장을 닮은 복숭아.
그는 햇살 속에 서 있고
나는 아직도 헤아리고 있죠.
그의 서가(書架) 한 켠에 비집고 들어가 꽂힐 수 있는, 나를 위한
단지 2센티미터의 좁은 틈이라도 있는지.
그리고 또 생각하죠.
그의 숫자는 무얼까? 그의 자모(字母)는? 그의 분류기호……
그는 모르겠죠. 해마다 이 서가의 책 사이사이마다
분류기호 없이 꽂아놓은 나의 그리움들을.
난 이제 술래가 아니에요.
그에게로 가서 팔을 툭 치며 말할까요?
봄부터 유리창 안에서 당신을 햇살인 양 품었다고.
그가 웃지 않으면 어쩌지요?
그가 보이지 않아요.
그가 앉아있던 대리석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았어요.
그가 피워 올렸던 담배연기인 양 흩어지는 구름.
그가 서 있던 복숭아나무 밑을 서성거렸죠.
익지도 않은 채 떨어져 뒹구는 복숭아.
복숭아의 무게를 기억하는 휘어진 가지는 한동안
제자리를 못 찾고 있는데.
찬 이슬이 내렸어요.
그의 푸른 모자 속에서 출렁거리던 꿈처럼
높은 하늘.
여전히 그는 보이지 않고
불현듯 다가온 그의 그림자 인 양 복숭아나무 빈 가지
햇살에 매달려 유리창을 그리움으로 흔드네요.
5
뒤돌아 서 있을 때 다가오는 건 숙명이라죠?
사랑은 꼭 그렇게 와요.
밀물처럼
돌아설 때마다 한 뼘씩 다가와 있죠.
내 발목을 적시는 설렘,
턱밑까지 차오르며 파도치는 그리움.
하지만 숙명은 썰물을 등에 업고 오는 법.
돌아서고 돌아본 만큼 멀어져 가죠.
책 위에 남모르게 쌓여 가는 먼지 같은 사랑
책갈피마다 보이지 않게 쓰여 있는 사랑의 이름들
사랑에 있어서, 난 언제나
술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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