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지다 / 김혜인
비틀거리는 기억은 술을 먹어야 싱싱해진다
지그시 마음을 감고 투명한 사연을 한잔 마시면
드디어 세상엔 붉은 꽃잎이 하나씩 피어난다
상처 난 가슴을 치료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빨간약을 발라주시는 시간
세상은 요술처럼 붉은 꽃 천지가 된다
내 뜰에도 살며시 왔다 가는 봄
오늘은 꽃들이 다 피기도 전에 술이 떨어졌다
붉은 꽃 몽우리들은 어찌하라고 님은 전혀 기척이 없으시다
붉어 속이 타는 줄은 차마 묻지도 못하고
어쩌자고 눈웃음 저리 치는지
새들도 비밀이 있고 바람도 때로는 거짓으로 우는데
부끄러운 화장을 지우듯 아픈 기억은 잊어야 한다
섬처럼 적막한 그 사랑에 겨울이 툭툭 꽃으로 진다
사랑은 꽃이 져도 버거울 뿐이다
봉숭아 물들이다
천진난만한 웃음이 한 여름을 감시한다
이기적인 태양 아래
꽃밭은 더욱 무성해진다
손톱만한 죄의식도 없는 외로움이
붉은 꽃을 딴다
한바탕 소나기를 피하지 못하는 계절
손톱위에 펼쳐진 소리 없는 노래가
열 개의 붉은 흔적을 남긴다
친친 동여맨 꿈을 품고
성자의 깊은 꿈속으로 걸어간다
뜨거워지는 열망을 감추고 붉은 무릎을 꿇는다
불러주고 싶은
뒤 돌아 보고 싶은
순진무구한 약속이 점점 빠져나간다
반달만큼 손끝에 걸려있다
샐비어
한창 타오르는 연애가 저리 붉을까
이만치 비켜서 볼만큼 뜨겁고 눈부시다
서로 부딪치며 싸움 같은 사랑을 하다가
산산이 부서지는 종소리
비처럼 쏟아지는 향기가 된다
피처럼 붉은 밀어(蜜語)가 된다
미움이 남지 않은 기억은
꿀물이 나오지 않는 꽃술이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 감동이다
꽉 막힌 침묵을 뚫으려 손끝을 따본 적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꽃잎을 따지 않는다
달콤한 입맞춤을 꿈꾸지 않는다
붉은 사랑은 모두 아프다
해바라기
태양만 바라보는 것은 잔인한 일
감당하지 못할 무게에
고개마저 꺾고
다 낡은 이름을 붙들고
황소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꽃의 절반은 꿀이 없는 가짜꽃
그래도 살기 위해
꿀벌을 불러야한다
꽃이라면
지나는 발길 한 번쯤은 되돌릴 수 있어야 한다
향기와 빛깔과
찬란한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노을이 가슴에서 지고 있거나
숨겨놓은 비밀 씨앗처럼 익어가거나,
해바라기처럼
태양만을 기억한다는 것은 낡고 적막한 일이다
불면(不眠)
겨드랑이 밑의 한 생각이다
구석구석 스멀거리는 가려움
벌레들 기어 다닌다
발등에 몇 마리
무릎 위에 또 몇 마리
등줄기를 따라 꿈틀거리는 기지개
사막에 홀로 남겨진 발자국이다
두개골 속을 걸어가는 바람소리다
하얀 날개가 돋고
지붕에
새 몇 마리
나무 위에
또 몇 마리
바람을 따라 골목을 지나
창문 앞에 서성이는 하얀 달빛이다
화끈거리는 불덩이 강물에 몇 개
하늘 위에 또 몇 개
끝없이 이어지는 불멸(不滅)의 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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