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후협상 / 김필대
금요일,
마음이 늘 몸보다 앞선다
무작정 나선 길
곧 되돌아 올 길을, 천천히 지우며 떠난다
생각하면
비 젖은 꽃송이처럼 너는 기울어진다
대책 없는 시간은 흘러가고
처음부터 일일이 설명에 열 올리던
네 그림자 지쳐 길게 누워있다
다시 꽃 피는 날, 낯익은 이름 부르면
외롭고 쓸쓸히 한 세상 살아온
잊었던 이름들 먼저 대답하고
퇴근시간에 맞춰 허리 굽히는 山들
일주일치의 근심을 배낭에 구겨 넣고
사람들은 도시를 빠져나가고,
물끄러미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숨겨둔 히든카드 한 장을 만지작거린다
늦어버린 저녁 먹으러 간다
너를 보내고도
아직도 널 보내지 못한, 비공식
막후협상은 남아있다
주소를 묻다
자정을 알리는 소리에
오늘은 어제가 되고 기다렸던 내일이
오늘로 신발을 갈아 신었습니다
시간은 새 주소로 자리를 옮기고
초를 세며 걷기 시작합니다
이파리 버린 가로수들
계절은 주소를 잃어버리고
도시는 어지러운 불빛을 허리에 두르고
잠을 반납하고 있습니다
출구를 잃은 바람조차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감나무 그늘 뒤로 달빛이 서성일 때
후두둑 감꽃이 떨어지듯
누군가 황급히 돌아간 발자국
남겨진 한 줄의 말씀처럼 선명합니다
달빛에 휜 나뭇가지처럼 당신에게 휘어져
한여름의 분수를 오래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높이 올라 추락하는 마음을 그때 보았습니다
이제 막 도착한 오늘이
지금의 날 예견한 듯 바라봅니다
짐을 꾸리다 발견한 오래된 시집 한 권
놓쳐버린 詩句처럼 우리는 어디쯤에서 멈췄을까요
안개 속으로 천천히 걸어갑니다
아직 詩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들고
슬픔을 나누는 명상
좀 더 많은 슬픔을 가진 자가
작은 슬픔을 가진 자를 위로하는 게
이 작은 나라의 법이다
봄꽃 지천으로 피었으되 정작
자신의 부재를 알리고 떠나는
들꽃 하나 아직 보지 못했다
운명 따윈 믿지 않은지 오래지만
예정된 절대적인 힘에 가슴 졸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출구가 막힌 슬픔의 극한,
가혹한 현실도
서로 손을 잡으면 삶의 통로가 생기려나
이 한줌의 기쁨을 위해 얼마나 많은 슬픔이 길을 잃었나
진정 알고 싶던 운명의 변주곡
이곳을 관장하시는 운명의 神께
우리가 원하는 것들의 목록을 적어 보낼까
소박하지만 빈들에 엎드린 한 송이 들꽃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 한통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라도
기꺼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세상이 있었으면
떠나기 위해 돌아오다
말없이 떠나고 싶은 것은
어딘가에 나를 버리러 가는 일
가진 것 훌훌 털어내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첫걸음만 내디딜 수 있다면
길은 어디에나 있다
아무도 이웃하지 않은 저기 홀로선 미루나무에게
짧은 작별을 고하고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가난했던 우리의 청춘에게도
위로의 술 한 잔쯤 권하고 싶을 때,
익숙해진 계절병은 제 시간 그 장소에
어김없이 돌아오고
비오는 날의 강가, 물줄기가 드럼을 친다
너를 두고 그림자만 데리고 떠나는 길
심장소리보다 더 크게
물의 심장이 울고 있다
빗소리가 앞서서 강을 건너는 동안
나는 자욱하게 지워지는 중이다
새해를 기다리며
어머니처럼 늙어버린 계절이
나를 향해 오고 있다
사람들 사이를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겨울처럼 서러운 중년의 사내는
코트 깃을 세우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난 사람들
쓸쓸히 헤어진 어느 길모퉁이
새해 인사장 대신 악수를 청하노니
잘 가라 그대 새해여
어제 올랐던 삶의 산봉우리
체온으로 덥혀진 한 잔 술 권하고
다시 봄을 기다리는 저 아래 삶의 계곡엔
가난이 눈처럼 쌓여있다
용케도 운명에 매몰되지 않은 영혼들이
산그늘 아래 오랫동안
울고 서있다
태양은 습관처럼 다시 뜨겠지만
일출과 일몰이 다르듯
양지와 음지가 있다
빛은 고르지 않다
그늘에 발을 묻고 사는 잡초의 이름을
누가 기억할 수 있을까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얼룩진 삶들
저 산 밑에 살고 있다
세상의 맨 끝줄에 서서, 오지 않는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문예지 신인상 > 문예감성신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5회 문예감성 신인상 (0) | 2012.09.21 |
---|---|
제4회 문예감성 신인상 (0) | 2012.07.16 |
제3회 문예감성신인상 (0) | 2012.02.20 |
제2회 문예감성신인상 (0) | 2012.02.20 |
제1회 문예감성신인상 (0) | 2012.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