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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도(東史綱目圖)* / 권수진

압록강과 두만강을 아름드리 품고 있는

거대한 대륙이다

붓끝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마다

굽이굽이 능선을 타고 승천하는 가파른 길

날던 새도 한 번쯤 쉬어야 넘어가는

백두산 천지를 호젓하게 소요逍遙하는 자만이

장엄한 주몽의 영지와 통할 수 있다

용추계곡 흐르는 물소리에 이끌려 관문을 들어서면

최영 장군의 넋이 일장검 짚고

성벽에 걸터앉아 선정禪定에 들어간 시각

구룡九龍의 꼬리가 굽이치듯

붓선 한 획畫이 휘어진 그 자리에

사라진 용마루 점點을 찍는다

죽비竹篦로 뒷골을 내리치듯 차가운

약수 한 사발 마시고 나면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발해 민족의 말발굽 소리

소리꾼이 깨달은 득음이다

명창의 공명이 고수의 북채와 하나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다

양지바른 개마고원에 석양이 지고

만주벌판과 유라시아 대륙에 서서히 해가 뜨면

울창한 숲에 가려진 광활한 대평야가

파묵破墨기법으로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내는

한 폭의 진경산수화가 활짝 펼쳐진다

* 안정복의 <동사강목> 부록에 실린 지도

 

철학적인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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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하늘은 높고, 바람은 차가웠다. 시를 쓰며 사는 세월이 길었다. 누구 하나 알아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었다. 날마다 뜬눈으로 긴 밤을 지새우며 간간이 보내오는 원고청탁 마감일에 맞춰 시를 썼다. 매번 수많은 공모전에 응모하였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강제적으로 글을 써야만 하는 의무조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상의 수많은 일 중에서 왜 하필 창작이라 불리는 이 작업에, 나는 그토록 오랜 시간 매달리며 살아왔는가? 그렇게 심신이 점점 지쳐갈 무렵 뜻밖의 당선 소식을 접했다.

순암 안정복 선생은 조선 후기 실학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특히 <동사강목>을 저술한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분이셨다. 주자학이 조선 팔도를 지배하던 시절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아무도 관심 없는 실용적인 학문 분야에 관한 책들을 100여 편씩이나 꾸준히 저술한 분이기도 하다. 물질이 세계를 지배하는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오늘날 시를 쓰는 나와 마찬가지로 당시 정주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실학에 전념한 순암 선생의 일생이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4회 순암 안정복문학상을 준비하면서 18세기 순암 선생이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그곳에는 능력보다 신분을 우선하는 부조리가 있었고, 실리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옹고집이 있었으며 자국의 국위선양을 폄훼하는 중화사상이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성리학을 근간으로 실학의 유용성을 접목해서 당대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순암 선생의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문제의식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능력이 부족한 관계로 내가 순암 선생의 행적을 얼마만큼 문학적으로 잘 승화시켰는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공을 들여 글을 쓰고,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도 일단 내 손에서 벗어난 글들은 늘 아쉬움과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결과를 초래했다. 세상을 향해 던져진 이번 작품이 명시로 남게 되든 아니면 졸시로 웃음거리가 되든 간에 그에 대한 평가는 오직 독자들의 몫으로 남긴다.

문학을 경시하는 풍조 속에 해마다 순암 안정복문학상을 주최하는 한양문학 순암 안정복문학상 운영위원회와 순암연구소 관계자분들에게 우선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어설픈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세상에 빛을 발하게 해 주신 심사위원장 손해일 선생님을 비롯한 김성호, 이소암, 문근영, 이현수 심사위원분들에게도 큰절을 올린다. 모두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힘들 때마다 서로 힘을 북돋아 주고 나와 함께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도반들에게도 항상 문운이 가득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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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순암 문학상 당선작 발표

1. [대상] 동사강목도 : 권수진 시인 (상금 300만원과 시비 제작)

2. [금상] 이택재를 소리하다 : 김학중 시인 (상금 100만원)

3. [은상] 이택재 : 이은영 시인 (상금 50만원)

4. [동상]

1) 파문을 건지다 : 김향숙 시인 (상금 10만원)

2) 사부인곡 : 황은순 시인 (상금 10만원)

3) 순암일기 : 송금례 시인 (상금 10만원)

5. [장려상]

1) 순암을 만나다 : 신화정 시인 (상장 및 상패 수여)

2) 이택재의 별 : 최병규 시인 (상장 및 상패 수여)

3) 빛이 된 순암 : 곽인숙 시인 (상장 및 상패 수여)

4) 이택재에 물든 가을 : 이인환 시인 (상장 및 상패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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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묵연墨硯 / 전양우

 

오로지 새벽 첫이슬 모아

이택재麗澤齋 교육백년대계

經世致用 修己治人

역사의 정통성 東史綱目에 새기니

만고불변 송덕비에 빛나는 목민의 뜻

말없는 수양으로 한없이 뿌리 내려

무성한 가지 광주 뜰에 펴고

영원히 푸른 향기 큰 가슴에 가득 담아

家和萬事成

身體髮膚受之父母

때로 가뭄으로 헐벗고

비바람이 눈을 가리고

눈서리가 오감을 마비시키고

삼복더위가 숨을 막아도

밤새 촛불로 타는 고지식한 진심

大器晩成

새소리 화합하고 신록 화려하니

향기는 사방에 나비 떼로 남아서

천고의 북소리 오늘까지 들려오니

정갈한 묵연墨硯 어제처럼 서늘하다

 

 

 

 

 

 

[금상] 記夢*(기몽) / 최재영

 

이택재에 저녁이 들자

뒷산이 먼저 내려와 눕는다

수백 년이 지나도록 어둠을 밀어내려

누군가 밤새 서책을 읽고 있을까

등촉 흔들리는 창틈으로

달빛은 수시로 들렀다 가고

사내의 형형한 눈빛이

길고 긴 역사를 통시한다

반도의 강역을 바로 알리고자

핏발 선 눈으로 써 내려가는 일필휘지

누구도 기록하지 못한 사내의 비범은

어디에서 읽어내는가

필생의 역작을 기억하는 노거수 느티나무는

켜켜이 바람을 접었다 풀며

뼈 속까지 환해지는 묵향 한 줌씩 내놓다

꿈에서라도 근심하여 찾아오시는지

한 획씩 힘있게 내리긋는 붓 끝엔

밤늦도록 적막이 머물다 간다

꿈을 더듬어 기록하는 내내

일생 강직하여 고단했던 그의 행적을 따라

아득히 번져가는 먹빛, 환하게 피어난다

 

*기몽: “꿈을 더듬어” “꿈을 적다”는 뜻으로 안정복의 시 제목

 

 

 

 

 

[은상] 가을, 이택재 / 김희숙

 

소슬바람이 계절의 손을 잡고 이택재에 당도한다

새들은 마당에 종종거리며 발자국 글씨를 쓰고

햇살은 눈을 반짝이며 문장을 읽는다

 

가을이 노랗게 내려 앉은

느티나무 아래 순암을 생각한다

수백 년 느티가 만들어준 그늘, 그 그늘의 심연

그렇게 세상에 한없는 그늘을 나누어 주고 떠난 사람

 

글자에 녹아든 영혼이 묵향으로 풀어지는 사숙당

텃골에 울려 퍼졌을 호연지기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유생들의 글 읽는 환한 소리, 새벽을 깨웠겠다

 

역사의 계통을 밝히고 시비를 가리느라

지새웠을 나날, 이택재는 묵묵히 지켰으리라

빗방울 불러와 노래 불러주고

깊어가는 하늘 위에 순암의 생각 받아 적었겠다

 

 

 

동상: 정철(이택재에서)

동상: 박종익(이택재의 별)

동상: 강명숙(순암을 읽다)

동상: 이영균(순암의 이택재를 나서며)

동상: 박봉철(대죽에 필사하다)

 

장려상: 서상규(꽃과 나비가 편찬한 역사)

장려상: 최형만(영장산객전)

장려상: 박혜정(순암의 말)

장려상: 윤두용(이택재 혼불)

장려상: 정형근(순암의 가르침을 읊다)

 

 

 

 

 

 

[심사평]

 

제3회 안정복 문학상에는 총 542명이 응모하였다. 제1차 심사에서 100편을 선정하여 제2차 본심에서 13명을 선정하였다. 대상 1명, 금상 1명, 은상 1명, 동상 5명, 장려상 5명이 선정되었다.

 

심사위원들은 뚜렷한 주제의식과, 다양한 수사법(Rhetoric)에 의한 표현의 형상화와 운율 등에 초점을 맞추어 심사에 임하였다.

순암 안정복 선생의 생애와 사상과 실천과, 역사의식 등을 잘 이해하고 시로 승화시킨 작품에 가점을 주어서 선정하였음을 밝혀둔다.

전양우씨의 「묵연墨硯」은 뚜렷한 주제의식이 돋보이며, 시의 형상화면에서도 순암의 생애와 역사의식을 충실히 표현해내고 있어서 대상에 선정되었다.

최재영씨의 「記夢기몽」은 주제의식과 시의 유기적 구조, 표현의 유려함 등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금상에 선정되었다.

김희숙씨의 「기억의 건축학」은 제의의식을 통해 자신의 뿌리와 역사와 본질과 조우하는 과정을 심도있게 형상화해내고 있어서 은상에 선정되었다. 그 외에 동상과 장려상 등에 선정된 작품도 깊이 있고 완성도 있는 작품이 많아서 선정에 어려움이 있을 정도로 심사숙고하였음을 말씀드린다.

수상자에게 축하드리며 선에 들지 못한 많은 분들께도 아낌없는 격려말씀을 드린다.

아울러 <안정복 문학상>을 제정하여, 많은 국민들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데 기여해주시는 순암연구소와 현대시선문학사에 경의를 표한다.

 

심사위원

이혜선(시인 문학박사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김영미(시인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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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순암順菴의 빛 / 조선의

새들은 내려앉는 자세로 텃골을 선회했다
고여 있는 시간이 안개로 일어서다가도
돌아서면 사라지는 방향으로 꿈틀거렸다
침묵의 겉옷에 가려진 상처처럼
쉽게 배설할 수 없는 감정의 조각들
한 뿌리 제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문장마다
허기진 물음 같은 오래된 정설을 찾아
각기 다르게 예속된 수 세기 연대를 더듬었다
명분을 가진 꽃들의 과장된 수식어만큼
첨예한 빛깔로 대신할 수 없는 주장은
전지의 양날에 놓인 운명과 같았다
의례에 어긋나면 시비가 따른다*
야사는 무른 혀처럼 복선이 깔린 낭떠러지
정사를 펼쳐내는 힘은 가감 없는 기록에 있었다
하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대의大儀에
과거와 미래를 잇는 순암의 일필휘지
순례의 첫발을 떼듯 어둠을 무릅쓴 빛이
새들의 날개보다 가볍게 떠올랐다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







[금상] 근본을 찾아가는 길 / 박성훈

이택재의 향기, 숨결 보란 듯 그대로일 테니
초서롱 저서롱 넓고 깊은 가르침 미쁘기 가없고
내어 준 밑동 잘리는 고통도 순순히 참아내면
몸뚱어리 차마 어쩌지 못해 새순은 그렇게 돋아날 테지

까치발로 들어 올린 위태한 세상 홀로 짊어진 채
존재하지 않던 길 정답 찾아 헤매던 날들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 곧게 걸었던 그 길 위엔
눈물 한 방울 없는 조문객의 서러운 곡소리

설핏 사람을 속여도 세상까지 속일 수 없듯
선뜻 선을 양보해도 인까지 양보할 순 없는 법
갈래갈래 알 수 없는 길, 배움의 길 걷다 보면
나를 이겨 도를 행함에 찾기지 않던 길 찾아낼 테지

속이지 못한 양심을 속인 우매함을 경계하나
묻고 또 물어봐도 누구 하나 올곧은 대답 없으매
본 것 없고 근본 없는 속물 될까 두려워
애오라지 글 밭 매고 일구어도 겉멋 드니
이녁은 어느 세월 오묘한 이치 깨칠 날 있을까.






[은상] 수택(手澤)*의 기록 / 이미영

희미한 과거는
종이에 묻은 사람의 지문을 닮았다
동심원 한 쪽이 무너졌기에
옛사람들의 행적을 찾는 일은
그래서 더 궁글고 아득하다
그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시간을
일일이 백지에 옮겨 적는 선유(先儒)
중심에서 멀어지는 생각들이
조급해진 붓놀림을 재촉하고
종횡무진, 뻗어가는 이야기를 쫓느라
그의 낮과 밤은 점점 짧아진다
무뎌진 직관과 유순한 이성이
되살린 숨소리를 잡아두느라
붓의 깃이 닳고 벼루에 구멍이 났다
태도의 흐름을 안쪽으로 모으고
틀림과 다름의 갈래를 짚어내느라
대하의 방점을 한참동안 미뤄둔 지 오래
사료를 모으고 실증을 더할수록
근본 없는 속설은 갈피 밖으로 밀려나고
책 모서리마다 둥글게 닳은 지문이 생겼다
길고 긴 시간의 책장 속을
수없이 뒤채었을 순암*의 손자국들
20권 20책, 동사강목으로
역사의 오롯한 인장이 되었다

* 수택(手澤): 손이 자주 닿았던 책이나 물건에 손때가 묻어서 생기는 윤기
* 순암(順菴): 안정복의 호










[심사평] 

제2회 안정복 문학상은 총 845편이 공모를 하였다. 1차 내부심사에서 300편을 골랐고, 2차 외부 심사에서 100편을 골랐다. 그리고 최종 심사하에 대상 1명. 금상 1명. 은상 1명. 동상 5명 장려상 5명. 이렇게 13편을 골랐다.
심사 기준은
첫째. 뚜렷한 주제의식이 있어야 한다.
둘째. 은유와 상징을 통한 보편적인 진리와 가치를 담고 있어. 문학 수용자인 독자들이 공감하는 시여야 한다. 이러한 기존을 바탕으로 심사를 하였고. 함축적인 시어들의 유기적인 상호작용 없이 이미지들만 산만하게 조합한 시들은 배제하였다. 그리고 순암 선생의 업적을 잘 이해하고 소화하여 시로 형상화한 작품에는 가점을 주었다. 13편의 수상작은 중에 대상. 금상. 은상의 결정에는 진지한 논의가 있었다.
이미영씨는 세 작품 중 <용정>이 두 작품과 차이가나 은상으로 결정 했으며. 박성훈씨는 세 작품 중 <거미집에 걸린 기억>이 자신의 언어 자체만을 직시하고 있는 느낌을 주어 금상으로 결정했다. 대상으로 결정한 조선의씨는 내재된 언어 감각에 충실한 점을 높이 평가 하였다. 앞으로도 생각이나 느낌을 언어화 하는 과정에서 모호한 자기 논리가 감지되지 않도록 경계하면 더욱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원동력을 꾸준히 가꾸어 나가기를 기대하며. 수상하신 분들 모두 진심어린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위원 강정화 김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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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고인귀실행 / 정설연 


이택재 현판과 함께

텃골 마을 실개천 물살을 짚던 시선에

말간 소리 읊조림으로 올라오니

티끌 묻은 마음 먹물을 풀어낸다

초서롱과 저서롱의 묵향이

처마 아래 깃들어 있다가

구름 사이로 나온 햇빛을 받아

문에 빗살을 치며 부지런히 글귀를 찾는다

드림줄을 잡고 있던 빛의 붓질이

계단을 밟고 내려간다

한결같은 자태로 서 있는 느티나무,

바람이 와서 일렁임으로 태평무를 추어도

발 디디는 품새 안정적이다

밑동의 껍질 안쪽으로 끌어들인

곧은 시간의 겹들이 두텁고 장엄하다

들풀에 앉아 잠을 자는 나비 깨지 않게

걸음을 옮기는 후손의 손에 묻어 있는 흙이

헤아림의 구근을 밀어 올린다







[금상] 순암 사론을 기리다 / 송귀영


강목법 세련되게 정통의 부각으로

역사를 재구성한 동사강목 필생역작

남인의 학맥 계승한 통치덕목 이루었다


당대의 국제질서 조공은 사대교린

전별의 득실 살려 유교이념 매듭 풀고

대록지 임관정요로 성호학파 계승했다


일정한 사문 없이 텃 골에 소옥지어

여택제 강학산실 향지 법을 저술하여

추봉된 광성군 광경 경학 관이 환생한다






 

[은상] 안정복 / 박덕은 


상수리나무 위에

목관 하나 놓여 있다

'

시커멓게 뚫린 등가죽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온기들이 흘러나오는

매미의 빈 껍질


말랑말랑한 살이었던 슬픔이 먹먹해지는 시간은

이제 누구의 몫인지


날개를 얻은 바람의 몸이

초조한 듯 더디게

한때 흙이었던 무게를 구석구석 매만지고 있다


관 밖의 넘치던 말들이

몹시 그립고 낯익은 것에 사로잡혀

노을이 따갑다


적멸로 가는 저 뜨거운 움직임은

젖은 눈의 저녁을 따라

목 끌어 안고 떨어지지 않는 소리 듣는다


허공에 새겨야 할 발자국은 

이파리들의 울음소리에 목메어

자석처럼 붙어 있다


환상인 양 숨쉬던 거뭇거뭇한 손등에

묽어진 어둠이 눈물방울처럼 닿자

추운 하늘이 등을 떠민다

그만 가자고







[동상] 등신불 / 이기은


몸이 편안하면 수행이 더디기에

지하철 역사 야멸찬 콘크리트 바닥에

마음을 뉜다

술잔 마주치는 소리에 공명된 목탁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으로 전하는 울림

세상의 번뇌를 덮으려

오직 한 길 밝혀줋 취중수행

육중한 철문도 벽도 없이

낡은 박스 하나로 구분지은 구도의 벽

누군가 떨어뜨린 동전 한 닢에도

오체투지로 올리는 감사

죽비보다 날카로운 삭풍의 삿대질

여름옷 한 벌로 곱다시 견디는 동안거

낮은 곳에 엎딘 저 거룩한 이름

누가, 노숙자라 부르는가

화엄을 실천하려 저리 애쓰는 마음

갈고닦아 말간 웃음이 되기까지

고단한 육신에 덧 쌍하가는 고행

천 번을 지나쳐도

그들이 곧 등신불임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들의 자조 섞인 눈 빛 모아

가사 장삼을 대신하는가 가난한 부처







[동상] 갈수기 / 임일환


하늘로 배를 두른 두꺼비 한 마리

단에 올린 제물처럼 주검이 장엄하다


기도가 하늘에 닿지 않는 듯

봄이 다 가도록 비는 내리지 않고

웅덩이마다 버짐꽃이 피어날 때

젤라틴 막 안의 유생들은 끝내

어미를 닮지 못한 미라가 되었다


날마다 열꽃만 피어올라

꽃잎을 내밀 수 없는 창포 늪에

습기 없는 슬픔은 먼지 되어 날리고

갈망의 이유를 잃어버린 아비는

푸석이는 몸 뒤집어 하늘을 외면했다


바람 없이도 소문은 날아가

개미 떼의 추모행렬 길게 이어지고

등걸감 깬 농부의 핏발 선 눈에서

놀 빛 빗물이 흘러내린다




 



[동상] 텃골 느티나무 / 이광재


누군가 말했다

텃골길 49번지 느티나무는 까치발로 서 있다고


무성한 뿌리를 가진 느티나무가

물을 내어 놓는다


새벽이면 언덕 아래

마을로 흘러가는 물소리가 들린다


영장산 아래 한 자리에 서서

퇴칸을 열어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으로 굳게 선

연접한 두 높이가

천년을 서로 윤택하게 지나온

텃골 느티나무 집


새봄이 와도 오랑캐꽃만 지친인 시절

가지째 꺾이고 엎어져

민들레, 족도리풀, 쇠뜨기, 광대나물

작은 생들이 아픈 소리를 낼 때마다

느티나무는 상처를 보듬고

물을 내어 주었다


세상이 온통 그릇된 향로를 답습하고

삐뚤어지게 바람이 불어올 때도

개연히 바로 잡아

이를 깎고 다듬어서

더 높고 더 넓은

하늘을 만들었다


아직도 새벽이면 길을 열어

마을로 내려가는 물소리가 들린다


시린 겨울이 찾아와도

느티나무 위로 햇살이 눕고

소복하게 함박눈이 내리고

새들의 종소리가 울린다

그 옛날 바다라고 불렸을

텃골 느티나무는 늘 만조다



 





[동상] 섬 / 윤여송


관념이 퇴적층으로 굳어진 섬에는

푸석불 같은 희망으로 탈출을 꿈꾸는

유배된 언어가 살고 있다


푸른 물비늘을 출렁이며

대양을 활보하던 파도가

고립된 섬에 몸을 부딪혀

하얀 포말로 생의 찬가를 부를 때면


거역할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의 시간을

비틀걸음으로 걷던 언어는

자유를 향한 외침으로 탈출을 준비한다


그러나 희망을 망상이 되어

무수한 시간을 고립 속에 살아온 섬은

언어를 위한 길을 내주지 않는다

닭 모가지만도 못한 울대를 열지 않는다


바삭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헤 벌린

어두운 동굴 속 핏기 없는 미라처럼

거져 냉랭한 숨소리만 바람으로 헉헉거릴 뿐


파도가 걱정으로 헤집고 지나간 자리에는

침몰한 희망만 부스럼 같은 상처로 남겨져

탈출을 금지당한 언어는 애잔하게 시들어가고

고립된 섬은 점점 더 고립에 빠져들고


기어이 고립을 자유라 항변하며

마른 땅 위를 부유하는 수많은 섬들 속에서

너와 같아 나도 하나의 섬이 되었다







[동상] 석등 / 손숙영


석등의 신열이 밖으로 붉게 번지고

연화문 돌이끼는 묵언을 물고 얼룩이 졌다

한 자락 바람의 보시로

젖몸살 앓았을 꽃망울,

우듬지 끝까지 시리고 아팠을 것이다

한평생 그 향기 팔지 않았으나

끝내 지키지 못한 꽃 입술

터질 듯 부푼 살 내음의 통증으로

어쩌자고 홍매 그렇게 피고.

법당 앞 화강석 석등에 불이 켜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주지스님 잰 걸음보다 더 재게

해가 덜컥 넘어갔다





[장려상] 이택재 / 안춘예

[장려상] 낚시꾼 / 권덕진

[장려상] 텃골에 뿌리내리다 / 양보영

[장려상] 월식 / 김삼순

[장려상] 어깨에 대하여 / 이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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