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고인귀실행 / 정설연
이택재 현판과 함께
텃골 마을 실개천 물살을 짚던 시선에
말간 소리 읊조림으로 올라오니
티끌 묻은 마음 먹물을 풀어낸다
초서롱과 저서롱의 묵향이
처마 아래 깃들어 있다가
구름 사이로 나온 햇빛을 받아
문에 빗살을 치며 부지런히 글귀를 찾는다
드림줄을 잡고 있던 빛의 붓질이
계단을 밟고 내려간다
한결같은 자태로 서 있는 느티나무,
바람이 와서 일렁임으로 태평무를 추어도
발 디디는 품새 안정적이다
밑동의 껍질 안쪽으로 끌어들인
곧은 시간의 겹들이 두텁고 장엄하다
들풀에 앉아 잠을 자는 나비 깨지 않게
걸음을 옮기는 후손의 손에 묻어 있는 흙이
헤아림의 구근을 밀어 올린다
[금상] 순암 사론을 기리다 / 송귀영
강목법 세련되게 정통의 부각으로
역사를 재구성한 동사강목 필생역작
남인의 학맥 계승한 통치덕목 이루었다
당대의 국제질서 조공은 사대교린
전별의 득실 살려 유교이념 매듭 풀고
대록지 임관정요로 성호학파 계승했다
일정한 사문 없이 텃 골에 소옥지어
여택제 강학산실 향지 법을 저술하여
추봉된 광성군 광경 경학 관이 환생한다
[은상] 안정복 / 박덕은
상수리나무 위에
목관 하나 놓여 있다
'
시커멓게 뚫린 등가죽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온기들이 흘러나오는
매미의 빈 껍질
말랑말랑한 살이었던 슬픔이 먹먹해지는 시간은
이제 누구의 몫인지
날개를 얻은 바람의 몸이
초조한 듯 더디게
한때 흙이었던 무게를 구석구석 매만지고 있다
관 밖의 넘치던 말들이
몹시 그립고 낯익은 것에 사로잡혀
노을이 따갑다
적멸로 가는 저 뜨거운 움직임은
젖은 눈의 저녁을 따라
목 끌어 안고 떨어지지 않는 소리 듣는다
허공에 새겨야 할 발자국은
이파리들의 울음소리에 목메어
자석처럼 붙어 있다
환상인 양 숨쉬던 거뭇거뭇한 손등에
묽어진 어둠이 눈물방울처럼 닿자
추운 하늘이 등을 떠민다
그만 가자고
[동상] 등신불 / 이기은
몸이 편안하면 수행이 더디기에
지하철 역사 야멸찬 콘크리트 바닥에
마음을 뉜다
술잔 마주치는 소리에 공명된 목탁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으로 전하는 울림
세상의 번뇌를 덮으려
오직 한 길 밝혀줋 취중수행
육중한 철문도 벽도 없이
낡은 박스 하나로 구분지은 구도의 벽
누군가 떨어뜨린 동전 한 닢에도
오체투지로 올리는 감사
죽비보다 날카로운 삭풍의 삿대질
여름옷 한 벌로 곱다시 견디는 동안거
낮은 곳에 엎딘 저 거룩한 이름
누가, 노숙자라 부르는가
화엄을 실천하려 저리 애쓰는 마음
갈고닦아 말간 웃음이 되기까지
고단한 육신에 덧 쌍하가는 고행
천 번을 지나쳐도
그들이 곧 등신불임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들의 자조 섞인 눈 빛 모아
가사 장삼을 대신하는가 가난한 부처
[동상] 갈수기 / 임일환
하늘로 배를 두른 두꺼비 한 마리
단에 올린 제물처럼 주검이 장엄하다
기도가 하늘에 닿지 않는 듯
봄이 다 가도록 비는 내리지 않고
웅덩이마다 버짐꽃이 피어날 때
젤라틴 막 안의 유생들은 끝내
어미를 닮지 못한 미라가 되었다
날마다 열꽃만 피어올라
꽃잎을 내밀 수 없는 창포 늪에
습기 없는 슬픔은 먼지 되어 날리고
갈망의 이유를 잃어버린 아비는
푸석이는 몸 뒤집어 하늘을 외면했다
바람 없이도 소문은 날아가
개미 떼의 추모행렬 길게 이어지고
등걸감 깬 농부의 핏발 선 눈에서
놀 빛 빗물이 흘러내린다
[동상] 텃골 느티나무 / 이광재
누군가 말했다
텃골길 49번지 느티나무는 까치발로 서 있다고
무성한 뿌리를 가진 느티나무가
물을 내어 놓는다
새벽이면 언덕 아래
마을로 흘러가는 물소리가 들린다
영장산 아래 한 자리에 서서
퇴칸을 열어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으로 굳게 선
연접한 두 높이가
천년을 서로 윤택하게 지나온
텃골 느티나무 집
새봄이 와도 오랑캐꽃만 지친인 시절
가지째 꺾이고 엎어져
민들레, 족도리풀, 쇠뜨기, 광대나물
작은 생들이 아픈 소리를 낼 때마다
느티나무는 상처를 보듬고
물을 내어 주었다
세상이 온통 그릇된 향로를 답습하고
삐뚤어지게 바람이 불어올 때도
개연히 바로 잡아
이를 깎고 다듬어서
더 높고 더 넓은
하늘을 만들었다
아직도 새벽이면 길을 열어
마을로 내려가는 물소리가 들린다
시린 겨울이 찾아와도
느티나무 위로 햇살이 눕고
소복하게 함박눈이 내리고
새들의 종소리가 울린다
그 옛날 바다라고 불렸을
텃골 느티나무는 늘 만조다
[동상] 섬 / 윤여송
관념이 퇴적층으로 굳어진 섬에는
푸석불 같은 희망으로 탈출을 꿈꾸는
유배된 언어가 살고 있다
푸른 물비늘을 출렁이며
대양을 활보하던 파도가
고립된 섬에 몸을 부딪혀
하얀 포말로 생의 찬가를 부를 때면
거역할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의 시간을
비틀걸음으로 걷던 언어는
자유를 향한 외침으로 탈출을 준비한다
그러나 희망을 망상이 되어
무수한 시간을 고립 속에 살아온 섬은
언어를 위한 길을 내주지 않는다
닭 모가지만도 못한 울대를 열지 않는다
바삭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헤 벌린
어두운 동굴 속 핏기 없는 미라처럼
거져 냉랭한 숨소리만 바람으로 헉헉거릴 뿐
파도가 걱정으로 헤집고 지나간 자리에는
침몰한 희망만 부스럼 같은 상처로 남겨져
탈출을 금지당한 언어는 애잔하게 시들어가고
고립된 섬은 점점 더 고립에 빠져들고
기어이 고립을 자유라 항변하며
마른 땅 위를 부유하는 수많은 섬들 속에서
너와 같아 나도 하나의 섬이 되었다
[동상] 석등 / 손숙영
석등의 신열이 밖으로 붉게 번지고
연화문 돌이끼는 묵언을 물고 얼룩이 졌다
한 자락 바람의 보시로
젖몸살 앓았을 꽃망울,
우듬지 끝까지 시리고 아팠을 것이다
한평생 그 향기 팔지 않았으나
끝내 지키지 못한 꽃 입술
터질 듯 부푼 살 내음의 통증으로
어쩌자고 홍매 그렇게 피고.
법당 앞 화강석 석등에 불이 켜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주지스님 잰 걸음보다 더 재게
해가 덜컥 넘어갔다
[장려상] 이택재 / 안춘예
[장려상] 낚시꾼 / 권덕진
[장려상] 텃골에 뿌리내리다 / 양보영
[장려상] 월식 / 김삼순
[장려상] 어깨에 대하여 / 이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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