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대상] 풍경에 기대다 / 송금례

 

 

나무가 제 몸에 색을 바르는 중이다

새소리 더해져서 풍경이 태어나는 불당 골에

마애불이 홀로 서서 기억을 지우고 있다

두려움을 모시겠다는 진언을 접하고 나서

말을 많이 한 죄로 사람의 입을 가둔 날부터

돌덩이 같은 질문이 몸이 되는 저 마애불

처음엔 가슴속 희망부터 버리기 시작했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생의 온기

그 곳에 다다르기 위해 이목구비 다 지우고

가끔씩 바람에 어깨를 쓸어내린다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는 계절은 혼자 돌고

당신이 버린 입술만 새가 되어 날아간다

입 없는 사람들의 몸 안에서 들끓는 소리를

하늘이 오독하는 사이

나무가 손을 터는 비탈길에서

노랑망태버섯이 성긴 마스크를 쓰고 시간을 염한다

몸에서 태어났지만 허공이 집인 슬픔

그 걸음이 잔잔하지만 발자국은 무겁다

발자국 찍힌 가슴을 열면 눈물이 돋아나고 있다

꿈처럼 멀어 지루해지는 지상의 시간

돌로 살기 위해 부처의 허물을 버리는 마애불

그 풍경에 기대면 눈물도 조금은 가벼워지고

뒤돌아 바라본 마을엔 얼굴 아닌 얼굴들이 떠다닌다

, 도처에 마애불이다

원시로부터 초대가 시작되었다

 

 

 

 

 

[최우수상] 바지랑대 / 박봉철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긴 시선 팽팽한 빨랫줄의 현은 고용했네

칼날처럼

아슬아슬한 벼랑 사이로

거죽 같은 생, 무게 얹히고 탱탱 당겨진 올 울음, 죄다 당기던 외줄의 길

 

구불구불 길을 헤치며 곧추선 아버지,골다공증으로 숱한 역경과 좌절을 무릅쓰고 구멍구멍 벅찬 날숨과 들숨으로 부풀어 올랐다, 절벽인가 둥지인가 변신하는 공중의 깃발로 홀로 가지가 되고 횃대가 되어 수평을 켰을 때 펄럭이며 솟구친다 헛발을 물리치고 질긴 관절, 꽉 다잡은 약력은 삐걱대는 목숨 줄이었지만 기울지 않는 홰를 껴안고 머무를, 저리 단단한 우듬지가 되었을까

 

등 굽은 능선을 곧추세워

둥글어진 윤슬 투명하게 툭툭 현 소리로 울부집네

젖어 그늘진 세월

다 말리는, 반추의 한낮

질긴 숨줄은 기울어진 어깨너머

수평의 대를 쳐 받쳤네,쭉 펼 자리 뻗어 고단한 주름 물고 가며

저 땡볕에 시퍼런 힘줄에 노출되는

관절 마디마디 살타는 공명만 울릴 뿐 허술한 틈새를 가르고

한 치의 어긋나지 않았던 궤도

쨍쟁, 고스란히 굳어가는

비스듬한 혈기 한나절 찌르네.

 

 

 

 

[우수상] 물결 / 장정순

 

[장려상] 씀빠귀 / 이희경

[장려상] 외발수레 / 김미향

[장려상] 벵골만의 일몰 / 김태춘

[장려상] 붉은무늬 푸른나방 / 이혜정

[장려상] 파꽃 / 김연화

 

[특별상] 성에꽃까치둥지 / 김경희

 

728x90

 

[대상] 물의 잠을 묶다 / 이정희

 

하구의 갈대밭에

쌀쌀해진 물의 겹겹들이 든다

물을 밀리고 밀려와서

아래로만 흐르는 존재들 같지만

스스로 잠을 청하러 갈대밭에 들기도 한다

자박자박은 스스로 드는 물소리고

두덕두덕은 갈대밭이

물 갈피를 여며가는 소리다

좀체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수심은

뿌리들의 집이어서

한 움큼 모아져야 가뭇가뭇 흔들리는데

둑과 둑 사이 넘나드는 물소리를 들치면

구부정한 허리가 보인다

한 걸음 한 걸음 시침하듯

땅을 꿰어 놓은 들녘

여름 내내 물을 빨아들였음에도

엮으면 바짝 마른 것들이 되는 갈대

아버지는 만평 물의 잠을 돌보고

속이 비어 가벼운 것들로

줄줄이 남매를 엮었다

휘어지고 늘어지며

유유히 마른 꽃 피우는 것들

햇빛과 닯빛이 한 대궁에서 마른

그 한 묶음을 추스르는 아버지

물은 오래 잠들어 있으면

버석거리는 소리를 낸다고

쏟아질 것 같은 물의 귓속말을

단단히 묶는다

 

 

 

 

 

[최우수상] 거미인간 / 이용호

 

 

 

 

 

[우수상] 진도 벌포마을 / 김회권

 

 

함박눈이 송이송이 나리는 밤

벌포마을 사내 대여섯

노루꽁지만 한 하루해 싹둑 잘라먹은 선창가

폐선처럼 누운 선술집 뻘건 갈탄난로에 둘러앉아

시린 해풍에 저린 몸을 미역처럼 말린다

 

이따금 토해지는 굽갈래 기침 소리

갈탄난로 위 여린 꼬막들은

해소끼 같은 허연 거품을 내뿜고

먼바다 거센 파도 수만 번 접었다 폈을

늙은 사내는 구릿빛 마디 굵은 손

뚝뚝 꺾으며

누런 양푼에 찬 소주를 친다

 

바다의 삶이란 때론

만선의 깃발마냥 펄럭이던 것인가

맞바람에 시린 냉가슴 쓸어내는 일인가

때아닌 난파에 찢긴 걸그물 같아

저마다 순항치 못한 빛바랜 날들을 호명하며

짠기 밴 시린 눈을 연신 껌벅인다

 

막배 끊긴 벌포 선창가

눈은 허풍쟁이처럼 푹푹 나리고

여가 진도여

몇은 더 이상 비울 것 없는 가슴에

찬 술을 붓고, 또 몇은

오래전 목젖 깊숙이 삼켜버린

질기디질긴 뿌연 침묵을

밤새도록 찌개처럼 끓인다.

 

 

 

 

 

 

 

[장려상] 비질 / 박종익 
 
 
노인의 왼팔은 몽당연필입니다
속심까지 바닥을 보입니다
멀리 쪽방들이 옆구리를 맞대고 있는 사이로
딸랑 손수레 하나
꼼지락꼼지락 털게처럼 세상에 대고
누런 먼지를 피워 올리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 사용했는지
왼팔이 없어 슬퍼 보이는 그에게
불온함과 초조함이 가득한 그 길에서
투구게 갑옷같이 한없이 딱딱해져
꼼짝없이 화석이 되어 갑니다
그가 웃습니다
짧은 자라목을 보고 비웃습니다
이 몹쓸 이기적인 안도감을 향해
오른손마저 흔듭니다
보이는 건 온통 편린뿐
좁은 미간 사이로
위태로이 줄지어 서 있는 불길한 표지판
오 갈 데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마른 잎사귀들이 노인의 빗자루 위로 떨어집니다
노인은 길에게 오른팔을 마저 내주고
몸은 다시 강물 위로 떠돌고
멀어질수록 희미하게 들려오는
검은머리물떼새 울음
강은 노인을 부르고 그는 팔을 흔들고
더는 참을 수 없는 골목 너머로
괜한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담아내며
세상에 대고 마른 비질을 하고 있습니다

 

 

 

[장려상] 관 / 최교빈 

 

 

[장려상] 고래는 달빛으로 눕는다 / 김인달 

 

 

[장려상] 소금의 기억법 / 심은정

 

 

 

728x90

 

 

[대상] 장마 / 김향숙

 

 

국숫집 마당에 젖은 국수가락이

하얀 기저귀처럼 흔들린다

 

햇볕이 나면 보송보송 말려

시장 골목 구멍가게로 배달한다

국수 값 몇 푼으로 유지하는 가족의 생계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국수가락이 젖는 날에는

아버지의 가슴에도 장대비가 내렸다

한숨으로 허기를 달래고

마르지 않는 궁핍으로 앞치마를 동여맸다

 

장마가 지면 근심도 길어져

밀가루를 온몸에 묻히고 국수를 뽑던 가장의 빈자리에

고단했던 시간들이 방울방울 맺혀 있다

국수가 길어지던 날 빗물에 풀려 버린 끈

주인 없는 앞치마가

빈 벽에 걸려 비바람에 날리고 있다

 

하늘에서 가늘고 긴 소면이 내리는 날

물의 가락을 뒷산이 후루룩 말아먹는다

장마 때마다 국수를 드시는 아버지

산소 앞에 식구들을 불러놓고

잔치국수를 대접한다

 

국수 위로 쏟아지던 눈부신 햇살이

널린 국수 가락 사이를 비집고

숨바꼭질하던 아이들 웃음소리가

국물 위로 떠오르는 밤

 

눅눅한 국수가락이 기억 속에 출렁이고

퉁퉁 불은 빗소리가 뒤척이는 밤을 적신다

 

 

 

 

[최우수상] 머리없는 불상 / 강태승

 

 

경주 남산에는 머리 없는 불상이 법을 설한다

천 년을 살았기에 만 년도 너끈히 살 수 있는 

머리가 있어도 없어도 불(佛), 나비 날아들고

잠자리가 모가지에서 눈깔 데굴데굴 굴리거나

살모사가 날름거려도 자세를 고치지 않는다

 

참새 개구리 까마귀가 앉아도 나무라지 않는

계절의 잎사귀가 쌓여도 뒤척이지 않는

머리를 누군가 치우고 허공을 얹어 놓았다

해와 달이 머리에 앉으면 환해지는 삼라만상

별이 뜨면 불상은 아침까지 반짝인다

 

불개미와 송충이가 발자국만 남기거나

이내빛 물들어도 내용이 변하지 않는다

시방은 가을이라 단풍이 불상의 머리 

구름모니불 바람모니불 서릿발 솟은 목에 

첫눈이 쌓이면 잠시 눈사람이 되는 불상 

 

머리 없으니 분노 슬픔 기쁨도 없겠다?

사대에서 버려져 산이 된 불두(佛頭)를

산영(山影)이 간직하려 하지만 검어지는 능선

으름 머루 솔방울 도토리도 불상이 되는

노루와 고라니도 즐거운 무두불이 지상에 산다.

 

 

 

 

 

[우수상] 숲의 기억법 / 김영욱

 

 

 



[장려상] 돌의 연대기 / 김순철

 

[장려상] 햇살의 차가워질 때까지 / 하태희

 

[장려상] 그녀의 몸속에 바다가 산다 / 최정희

 

 

 

 

[장려상] 고깔제비꽃  /김숙희 
 
 
흥부전같은
먼 먼 이야깃구절을 들추다보면
남녘은 내게 처마 하나 제공해 주지
내 지붕은 보라색
낡은 슬레이트 처마밑은 웬지 빛이 바래
아파트 실외기는  주추를 틀기에는
너무 간당 간당해 그렇다면
공중재비처럼 한바퀴 돌아버릴 수도 있지
나는 봄마당을 아우르는 봄의 전령사  
 
황토바람이 말을 몰아도
벌 나비 의 군무가 구름 떼 같이 몰려와도
보랏빛 지붕하나면 봄 날을 쓸 수 있어 
 
봄바람에 꽃잎들이 흩어지고
꽃샘바람이 게걸스레 탄주를 튕길 때 쯤  
 
들녘은 아픔이 흩날리지
아픔은 희망의 남쪽
따사로운 빛이 주추를 올리는 봄 날
보랏빛 지붕아래서
은밀한 침묵이 움트고 있어
처마가 자라도록
노란부리의 언어가 생동하고 있어 

 

 

 


 

 

 

 

728x90

 

[대상] 아버지의 빗살무늬 / 김우진

 

 

울타리에 기댄 빗자루, 아버지의 갈비뼈처럼 적막하다

어둠을 사립문 밖으로 쓸어내던,

 

헛기침으로 새벽을 열고 마당을 쓸던 대빗자루에 검버섯처럼 이끼가 무성히 자랐다

 

귀가 닳아 몽당해진, 칡끈이 삭아 매듭 풀린 자리에 손때 묻은 지문이 남았다 최초의 낙관처럼

 

빗자루를 태워 연기로 날려 보낸 아랍의 어느 부족처럼 아비의 빗자루를 아궁이에 넣고 군불을 지폈다 굴뚝 밖으로 빠져나간 연기는 마당을 추억한다는 듯 머뭇거리더니 팔랑팔랑 북향으로 날아갔다

 

마당에 빗살무늬를 그려 넣던 아버지, 아름다운 아침 풍경을 만드셨다

 

대추나무 엷은 그늘이 햇볕에 끌리고 있다 삐짝 마른 그늘이 아버지의 옆구리 흉내를 냈다

 

아버지의 유전자가 나에게 옮겨붙어 가문의 혈통 같은 마름병을 앓게 되어 땅거미를 잡아먹었다

 

바람에 시달린 폐가의 지붕, 앙상한 가슴팍처럼 서까래들이 빗살무늬로 얹혀있다 먼 순례의 길 같은 빈약한 굽은 등을 만져보고 가는 바람의 근육,

 

어둠의 뿌리에 걸려 넘어진 바람의 뼈들이 등짝에 붙어 후렴처럼 흔들렸다 빗살무늬 옹구발에 거름을 지고 무덤골 무논으로 오래전에 떠나신 아버지

 

 

 

 

 

 

[최우수상] 달빛마당 / 박수봉

 

 

돌계단 밟아 문헌서원 가는 길 청잣빛 하늘이 고려 같았다.

나무들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숲 속에 내가 아는 고려가 있다.

하늘에 화문으로 박혀 있는 낮달이 희미한 몇 세기를 이곳에다 풀어놓고

짐짓 모른 체 돌아갔다.

계절이 시끄럽게 울고 있는 것은 나무들을 고려한 감정일 것이다.

 

서원 뜰 가득히 달빛 걸어놓고 계절풍의 바람이 소나무 현을 튕긴다.

수십 세기를 건너온 악보 없는 연주가 층계 밑 배롱나무의 눈시울을 적신다.

촛불을 켜놓고 달빛마당 서성였을 월포(月圃)*의 외로움도 저렇게 붉었겠다.

 

촛불이 질 때까지 세우지 못한 시의 등뼈가 화석으로 뒹구는 뜰, 여물지 못한 세상,

벌어진 옷섶을 꼭꼭 여며주던 시인의 문장들은 한 줌 재로 사라졌다.

전염병처럼 불어 닥친 회오리바람, 분서(焚書)의 매운 연기가 세상을 덮고 사람들은 연신 눈시울을 훔쳤다.

연기로 뒤덮인 불가역적 길 위에서 시인은 줄곧 말을 잃었다.

 

저녁 숲이 꺼내어 놓은 별곡체의 음률이 배롱나무 옷자락을 흔든다.

丹心, 꽃잎은 지면서도 얼마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발닥까지 벌겋게 핏물이 배었다.

 

바람의 유골이 흩어져 있는 서원의 달빛마당 월포의 도포자락

품 넓은 그림자가 소매를 털고 가만히 방문을 연다.

달 한 조각 쥐고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새벽 어깨 사이로

고려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月圃 : 최충 선생의 호

 

 

 

 

[우수상] 세한도 덧칠하다 / 김숙자

 

 

추위가 풍경을 뭉개도

새들의 몸은 문풍지처럼 가벼웠다

 

지난밤 갈던 먹 밀어내고 아침이면 새 먹을 간다

 

휘저은 당신의 갈필에서

목젖 어여쁜 새가 되고 싶은 나는

무스스한 털빛을 가다듬는다

 

세파에 시달려 구불거리는 소나무

껍질을 때리는 부벽준들

 

눈 내린 집 봉창에 구겨 넣는다

 

그림자 얼었다고 뿌리까지 언 건 아닐 거야

 

당신이 머물던 벼루와 연적 사이

이제 내게 남겨진 일이란

화선지 가득 고드름빛 새소리 번지게 하는 일

 

낙관 찍힐 여백의 자리는 유배 중이니

천 년 뒤에나 천천히 열릴 서랍에

당신도 나도 밀어 넣는다

 

 

 

 

[우수상]  헌작 / 최류빈

- 최충선생을 생각하며

 

 

[장려상] 공갈빵 / 최미숙

[장려상] 우리들의 혼천의 / 유지우

[장려상] 오솔길 / 한상록

[장려상] 직립은 자립 / 김태호

 

 

[장려상] 굄목을 놓다 / 김가현

 


가지런한 대숲이 묵향 베인 학당을 단정하게 품고
빽빽하게 꽂힌 서책들은 먹물 풀어낸 활자들로 단단히 고정되어
입신양명의 꿈이 쉼 없는 붓질에 한 생을 받치고 있네요
현실의 중압을 껴안은 배움의 공간은 언제나 전쟁 같죠
희끗희끗한 가르마 같은 오솔길에 올라
달빛이 덮어주는 이불로 잠들 때까지 시를 읊으면
깊이 뿌리박힌 대숲도 바람에 포갠 채 잠이 들어요
글방마당 구석에 자리 잡은 매화봉오리
벼루에 풀어지는 연적처럼 온축해 놓은 향이 풀어지고
시린 삭풍과 맞서 무덕진 분홍빛을 감싸고 있죠
삐걱거리는 석계(石階)에 굄목을 놓으면
아둔한 어둠을 더듬어 휘황한 촛불이 밤을 깨우고
옥판선지에 난초 한 줄기를 치는 손길이 팽팽해져요
학당 앞 느티나무에서 울려 퍼지던 북소리 산천을 뒤흔들 때
눈빛에 날을 세운 강독(講讀) 소리 요란해요
무한의 끝을 돌고 도는 엄격한 가속도의 각촉부시* (刻燭賦詩)
시어가 수놓은 꽃비단이 공중에서 퍼져가요
짙은 밤 날짐승의 포효소리는
문고리를 걸어 타래쇠를 꽂아 닫아야 했지만
바람에 풀어 놓은 학당의 읊조림은 천고의 묘함이 흐르네요
문장으로 몸에 수(繡)를 놓은 음성의 파도는
맹렬하게 격랑을 헤쳐 구재학당을 훑고 가요
흐트러진 마음 단단히 동여맨 굄목이 두터워지면
점점이 붉고 따스한 빛이 아지랑이로 피어오는 묵향도
현기증을 일으키던 시간의 속도도
미세하게 흔들리다가 고요해짐을 반복하죠
돌담을 넘어온 해금 소리 굄목을 맴돌 때
바람이 불면 공중에 생기는 비의 명주실 무늬가
머리칼을 헤쳐 참빗 살 사이로 가지런히 빗겨주어요

* 각촉부시(刻燭賦詩) : 초에 눈금을 새기고 그 눈금이 타기 전까지 시를 짓는 놀이.

 

 

 

[심사평] 


올해 처음으로 진행된 ‘제1회 해동공자 최충 문학상’ 전국공모전의 대학 · 일반부 응모작품들은 상(賞)의 연치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수준의 응모작들과 만나게 하여 심사 자리를 들뜨게 만들었다. 주최 측의 세심한 준비가 바람직한 결실로 나타난 것이리라. 응모 작품들의 전반적인 수준도 높았지만, 수상에 든 몇몇 작품들은 주장을 시로 세공하는 솜씨가 잘 조련된 장인의 그것 같아서 달리 흠 잡을 데 없는 완성된 작품으로 읽혀졌다. 마지막까지 심사자들이 숙고했던 시편은「아버지의 빗살무늬」「달빛마당」「헌작」「세한도에 덧칠하다」등이었다. 「아버지의 빗살무늬」는 폐가로 남겨진 옛집을 둘러보며 세상을 등진 아버지를 추모한 작품이지만, 그것이 ‘울타리에 기댄 빗자루’의 ‘빗살무늬’로 그리움을 확산시키고 있어서 시의 설득력을 살려낸다. 한편, 「달빛마당」은 주체의 체험이 고스란히 작품으로 반영되어, ‘문헌서원’의 정경이 독자에게도 환하게 이전되는 듯한, 역사의 힘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러고 보면 「헌작」「세한도에 덧칠하다」 또한 고전적 풍미를 제대로 살려낸 음미할 만한 수준의 시편들이었다. 심사자들은 「아버지의 빗살무늬」를 대상으로, 「달빛마당」을 최우수상, 그리고 「헌작」과「세한도에 덧칠하다」를 우수상으로 뽑으면서, 문장으로 배향하는 이러한 정성들이 ‘월포(月圃)’의 가르침에 가닿아, ‘최충 문학상’의 정신으로 길이 새겨지기를 기대하였다.


-심사위원장 김명인(시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