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아버지의 빗살무늬 / 김우진
울타리에 기댄 빗자루, 아버지의 갈비뼈처럼 적막하다
어둠을 사립문 밖으로 쓸어내던,
헛기침으로 새벽을 열고 마당을 쓸던 대빗자루에 검버섯처럼 이끼가 무성히 자랐다
귀가 닳아 몽당해진, 칡끈이 삭아 매듭 풀린 자리에 손때 묻은 지문이 남았다 최초의 낙관처럼
빗자루를 태워 연기로 날려 보낸 아랍의 어느 부족처럼 아비의 빗자루를 아궁이에 넣고 군불을 지폈다 굴뚝 밖으로 빠져나간 연기는 마당을 추억한다는 듯 머뭇거리더니 팔랑팔랑 북향으로 날아갔다
마당에 빗살무늬를 그려 넣던 아버지, 아름다운 아침 풍경을 만드셨다
대추나무 엷은 그늘이 햇볕에 끌리고 있다 삐짝 마른 그늘이 아버지의 옆구리 흉내를 냈다
아버지의 유전자가 나에게 옮겨붙어 가문의 혈통 같은 마름병을 앓게 되어 땅거미를 잡아먹었다
바람에 시달린 폐가의 지붕, 앙상한 가슴팍처럼 서까래들이 빗살무늬로 얹혀있다 먼 순례의 길 같은 빈약한 굽은 등을 만져보고 가는 바람의 근육,
어둠의 뿌리에 걸려 넘어진 바람의 뼈들이 등짝에 붙어 후렴처럼 흔들렸다 빗살무늬 옹구발에 거름을 지고 무덤골 무논으로 오래전에 떠나신 아버지
[최우수상] 달빛마당 / 박수봉
돌계단 밟아 문헌서원 가는 길 청잣빛 하늘이 고려 같았다.
나무들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숲 속에 내가 아는 고려가 있다.
하늘에 화문으로 박혀 있는 낮달이 희미한 몇 세기를 이곳에다 풀어놓고
짐짓 모른 체 돌아갔다.
계절이 시끄럽게 울고 있는 것은 나무들을 고려한 감정일 것이다.
서원 뜰 가득히 달빛 걸어놓고 계절풍의 바람이 소나무 현을 튕긴다.
수십 세기를 건너온 악보 없는 연주가 층계 밑 배롱나무의 눈시울을 적신다.
촛불을 켜놓고 달빛마당 서성였을 월포(月圃)*의 외로움도 저렇게 붉었겠다.
촛불이 질 때까지 세우지 못한 시의 등뼈가 화석으로 뒹구는 뜰, 여물지 못한 세상,
벌어진 옷섶을 꼭꼭 여며주던 시인의 문장들은 한 줌 재로 사라졌다.
전염병처럼 불어 닥친 회오리바람, 분서(焚書)의 매운 연기가 세상을 덮고 사람들은 연신 눈시울을 훔쳤다.
연기로 뒤덮인 불가역적 길 위에서 시인은 줄곧 말을 잃었다.
저녁 숲이 꺼내어 놓은 별곡체의 음률이 배롱나무 옷자락을 흔든다.
丹心, 꽃잎은 지면서도 얼마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발닥까지 벌겋게 핏물이 배었다.
바람의 유골이 흩어져 있는 서원의 달빛마당 월포의 도포자락
품 넓은 그림자가 소매를 털고 가만히 방문을 연다.
달 한 조각 쥐고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새벽 어깨 사이로
고려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月圃 : 최충 선생의 호
[우수상] 세한도 덧칠하다 / 김숙자
추위가 풍경을 뭉개도
새들의 몸은 문풍지처럼 가벼웠다
지난밤 갈던 먹 밀어내고 아침이면 새 먹을 간다
휘저은 당신의 갈필에서
목젖 어여쁜 새가 되고 싶은 나는
무스스한 털빛을 가다듬는다
세파에 시달려 구불거리는 소나무
껍질을 때리는 부벽준들
눈 내린 집 봉창에 구겨 넣는다
그림자 얼었다고 뿌리까지 언 건 아닐 거야
당신이 머물던 벼루와 연적 사이
이제 내게 남겨진 일이란
화선지 가득 고드름빛 새소리 번지게 하는 일
낙관 찍힐 여백의 자리는 유배 중이니
천 년 뒤에나 천천히 열릴 서랍에
당신도 나도 밀어 넣는다
[우수상] 헌작 / 최류빈
- 최충선생을 생각하며
[장려상] 공갈빵 / 최미숙
[장려상] 우리들의 혼천의 / 유지우
[장려상] 오솔길 / 한상록
[장려상] 직립은 자립 / 김태호
[장려상] 굄목을 놓다 / 김가현
가지런한 대숲이 묵향 베인 학당을 단정하게 품고
빽빽하게 꽂힌 서책들은 먹물 풀어낸 활자들로 단단히 고정되어
입신양명의 꿈이 쉼 없는 붓질에 한 생을 받치고 있네요
현실의 중압을 껴안은 배움의 공간은 언제나 전쟁 같죠
희끗희끗한 가르마 같은 오솔길에 올라
달빛이 덮어주는 이불로 잠들 때까지 시를 읊으면
깊이 뿌리박힌 대숲도 바람에 포갠 채 잠이 들어요
글방마당 구석에 자리 잡은 매화봉오리
벼루에 풀어지는 연적처럼 온축해 놓은 향이 풀어지고
시린 삭풍과 맞서 무덕진 분홍빛을 감싸고 있죠
삐걱거리는 석계(石階)에 굄목을 놓으면
아둔한 어둠을 더듬어 휘황한 촛불이 밤을 깨우고
옥판선지에 난초 한 줄기를 치는 손길이 팽팽해져요
학당 앞 느티나무에서 울려 퍼지던 북소리 산천을 뒤흔들 때
눈빛에 날을 세운 강독(講讀) 소리 요란해요
무한의 끝을 돌고 도는 엄격한 가속도의 각촉부시* (刻燭賦詩)
시어가 수놓은 꽃비단이 공중에서 퍼져가요
짙은 밤 날짐승의 포효소리는
문고리를 걸어 타래쇠를 꽂아 닫아야 했지만
바람에 풀어 놓은 학당의 읊조림은 천고의 묘함이 흐르네요
문장으로 몸에 수(繡)를 놓은 음성의 파도는
맹렬하게 격랑을 헤쳐 구재학당을 훑고 가요
흐트러진 마음 단단히 동여맨 굄목이 두터워지면
점점이 붉고 따스한 빛이 아지랑이로 피어오는 묵향도
현기증을 일으키던 시간의 속도도
미세하게 흔들리다가 고요해짐을 반복하죠
돌담을 넘어온 해금 소리 굄목을 맴돌 때
바람이 불면 공중에 생기는 비의 명주실 무늬가
머리칼을 헤쳐 참빗 살 사이로 가지런히 빗겨주어요
* 각촉부시(刻燭賦詩) : 초에 눈금을 새기고 그 눈금이 타기 전까지 시를 짓는 놀이.
[심사평]
올해 처음으로 진행된 ‘제1회 해동공자 최충 문학상’ 전국공모전의 대학 · 일반부 응모작품들은 상(賞)의 연치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수준의 응모작들과 만나게 하여 심사 자리를 들뜨게 만들었다. 주최 측의 세심한 준비가 바람직한 결실로 나타난 것이리라. 응모 작품들의 전반적인 수준도 높았지만, 수상에 든 몇몇 작품들은 주장을 시로 세공하는 솜씨가 잘 조련된 장인의 그것 같아서 달리 흠 잡을 데 없는 완성된 작품으로 읽혀졌다. 마지막까지 심사자들이 숙고했던 시편은「아버지의 빗살무늬」「달빛마당」「헌작」「세한도에 덧칠하다」등이었다. 「아버지의 빗살무늬」는 폐가로 남겨진 옛집을 둘러보며 세상을 등진 아버지를 추모한 작품이지만, 그것이 ‘울타리에 기댄 빗자루’의 ‘빗살무늬’로 그리움을 확산시키고 있어서 시의 설득력을 살려낸다. 한편, 「달빛마당」은 주체의 체험이 고스란히 작품으로 반영되어, ‘문헌서원’의 정경이 독자에게도 환하게 이전되는 듯한, 역사의 힘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러고 보면 「헌작」「세한도에 덧칠하다」 또한 고전적 풍미를 제대로 살려낸 음미할 만한 수준의 시편들이었다. 심사자들은 「아버지의 빗살무늬」를 대상으로, 「달빛마당」을 최우수상, 그리고 「헌작」과「세한도에 덧칠하다」를 우수상으로 뽑으면서, 문장으로 배향하는 이러한 정성들이 ‘월포(月圃)’의 가르침에 가닿아, ‘최충 문학상’의 정신으로 길이 새겨지기를 기대하였다.
-심사위원장 김명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