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보 외 4편 / 신정민
고라니가 지나갔다
진흙은 발자국의 깊이를 가늠하고 있었고 나는
깨진 체온계의 수은이 구슬처럼 굴러다니던 아침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주워 담을 수 없게 된 날이었다
혹, 고라니의 발자국을 지워 버린 곳곳의 웅덩이가 사라진 숲의 홀로그램이라면 그날 아침 숲에서 사라진 건 고라니인가 알 수 없는 그림자인가 혹, 그날 그 숲의 흔적이 숲의 체온이라면 숲은 슬픔과 엇비슷한 감정에서 어떤 속도로 복원되는가
흙탕물이 가라앉는 속도
늪에 던져진 돌멩이를 잠시 피했다 모여드는 개구리밥의 속도쯤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미 지나가버린 고라니의 발자국은 알 듯 말 듯한 이곳과 저곳 사이에 나타나는 간섭무늬 그래서 고라니가 비가 내린 숲 여기저기 흔적을 남겼던 것일지도 몰라
밟힌 풀들이 일어서는
그만큼의 속도로 발자국은 아직도 고라니인가
생각에 잠긴 진흙 한 줌
그날은
삼백 년 전에 죽은 한 남자가
한 소녀의 꿈에 나타나 자신이 묻혀 있는 곳을 상세히 알려 주던 날이었는데 나는 체온을 재다 말고 까르르 까르르 달아나는 구슬을 따라다녔던 것이다
붙잡을 수 없는 아침 숲 어딘가에 본 적 없는 고라니가 있어 발자국은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며 그날의 적적함을 재현해 내고 있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저 큰 나무를 선택한 건 벼락이 아니다
쓰러진 줄도 모르고
지난여름 그 산벚나무 꽃을 피웠다
숨 거두시기 전 내 이름 또렷하게 불러주셨던 아버지
벌목공도 마다하는 숲에
해지기 전 잠시 환한 저녁이 찾아와
사력 다해 핀 꽃들에게 귀를 빌려주고 있다
몸이 익힌 건 잊히질 않아
넘어지며 들었을 첫 우렛소리
한 번 더 꽃 피울 수 있을까
오픈 북
틀렸던 문제는 잊히질 않아
다림질의 세 가지 조건은 수분 압력 온도였다
알고 있는 단어를 다 써버린 것처럼
골목 입구 동네 세탁소만 떠올랐다
더 잘 구르기 위해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다니는 동그라미들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지만
음식물에 초파리가 생길 때 필요한 조건들만 생각났다
어느 봄날 주민센터 찾아갈 때
길 가던 세 사람 모두 다른 길을 가르쳐주었던 것처럼
사람에게 답이 있다던 힌트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뒤늦게 알아도 괜찮은 일
어떤 자료든 참고할 수 있는 생이었는데
달달 외운 조건들, 성적불량자에겐 너무 많았다
커닝 없는 시험은 재미가 없었다
백엽상
해와 달도 맞벌이를 하지요
저녁 운동장 도는 사람들 별자리 돌리고요
어두워서 흰 나무상자 눈에 더 밟혀요
어릴 때 이미 다 배웠지요
매달리고
미끄러지고
빠져나가고
나는 개가 물어간 아이들을 눈금으로 남겨요
둘, 넷, 여섯…
애들이 또 줄었구나
어떤 온도로 놀아줄까
아쉽지만 북쪽 창문도 너희와 놀아줄 수 없구나
달리는 것도 싫고
친구 사귀는 것도 싫고
혼자 있는 아이들 기록으로 남겨요
일곱 바퀴, 여덟 바퀴…
운동장이 얼마나 작은지 어른 되면 알려줄게요
젠가
달팽이를 바위에 내려쳐 속살을 빼먹는 것이
발톱인지 부리인지 생각하면서
하루가 몇 개의 단어로 쪼개어져 있는지 생각하면서
블록 더미를 무너뜨리는 자가 나타날 때까지
우린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
창문 하나 손끝으로 밀어내어 맨 위에 쌓는다
차례를 치른다
단순한 규칙은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경우의 수들이 동원되지만
끝나지 않는 테이블 게임 위에 엇갈려 쌓이는 직각들
한 손만 사용해야 하는 스릴이 있다
누군가의 창문을 오래 바라보는 버릇 그러니까
불안은 건물 한 채를 무너뜨리곤 한다
어두운 불빛들의 곡예
밤 한가운데를 거니는 달갑지 않은 순서
위기를 떠넘겨야 하는 차례는 자주 돌아온다
아주 긴 이야기를 질질 끌며
쌓고 또 쌓아도 높아지지 않는 방식으로 쌓이는 관계들
우리가 쌓고 있는 것이 무너질 때까지
기껏 세워놓은 것을 쓰러뜨리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아이리스 플래티넘 캐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수상소감]
수상자가 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고향에 갈 때마다 바라보았던 지리산의 이름으로 큰 상을 받게 되어 더욱 영광스러웠습니다.
’내게도 이런 영광이 올 수 있을까‘ 품었던 마음이 있었기에 이 뜻깊은 상이 뜻밖의 결과라고 하면 조금은 거짓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혹시나, 하고 바랬던 꿈같은 일, 분에 넘치는 이 상이 제게 주어져서 감사하고, 기쁘고, 살짝 두렵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먼저 이 영예로운 상을 제게 안겨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지리산문학회에 감사드립니다.
‘마당 쓸 때 빗자루를 눕혀 쓸어야 먼지가 덜 인다, 고 하셨던 노모가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오랫동안 부족한 저를 지켜봐 준 가족들에게 고맙다는 마음 전할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시인으로서 깜냥을 다하려고 애썼지만, 늘 거기서 거기였습니다. 그러나 시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여기와 거기의, 너와 나와 그와 우리들의 순간적인 화해라는 파스의 말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최초의 시가 존재라는 말, 인간은 완성되지 않는다는 말, 이미지 속에서 스스로를 실현한다는 말, 다만 나름대로 매듭을 짓는다는 말, 그것이 스스로가 하나의 시라는 말을 생각해왔습니다. 내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쓴다는 말도 새롭게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언어 너머의 세계를 위해 조금 더 애써보겠습니다. 세상에 없는 것을 상상하고, 경계를 무너뜨리며, 대립적인 것들 사이의 화해를 추구해보겠습니다. 저의 우둔한 시작이 결국은 내가 얼마나 외로운지 확인하는 것일지라도 멈추지 않겠습니다. 답답한 거기가 제 자리라는 것, 어눌한 문장들이 곧 저라는 것. 그런데도 제가 저에게 주는 유일한 선물이라는 것도 새겨보겠습니다.
이 상은 그래도 괜찮다고, 그렇게 한 걸음씩 더 나아가라고 주시는 것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시 앞에선 언제나 쩔쩔매지만 시 또한 더불어 사는 삶이니 세상을 향해 무엇을 외칠 것인지 고민해보겠습니다. 보답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그랬듯 시작해보겠습니다.
이번 저의 수상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줄 문우들, 끌 동인들과도 이 기쁨을 나눌 수 있어 좋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대상을 묵묵히 견인해내는 인내력
제17회 지리산문학상에는 130편의 원고가 응모되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집은 7편이었고, 무기명 번호만 매겨진 원고는 온라인을 통해 심사위원들에게 전해졌다. 예심 통과작 7편을 전해 받은 심사위원들은 각자 2, 3편의 후보작을 추천하기로 하였고, 그 결과 1번의 『불 켜진 창문 하나가 백짓장 같아서』, 2번의 『서성이던 후면에 관한 크로키』, 4번의 『정오에게 레이스 달아주기』가 각각 2표를 받아 최종심에 올라가게 되었다. 다소 파격적이고 어리둥절 정신이 혼미한 시도 있었지만 대부분 안정적인 보폭으로 감각과 상상, 확장을 꾀한 시편들이었다.
4번 작품들은 인식의 깊이가 조금 얕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특히 원고 뒷부분에 배치된 시편들에서 받은 느낌은 “갑자기, 왜 이렇게, 힘이 빠졌지?” 하는 것이었다. 인식도 인식이지만 언어와 언어가 만나 만들어내는 긴장, 미묘함의 부족이 그 이유인 듯 했다. 좋은 시를 통해 느끼는 야릇한 설렘이 잘 느껴지질 않았고,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점 때문에 아쉬웠다.
2번 작품들은 고백하자면 감당이 안 되는, 불안과 분절의 것이었다.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차리고, 지지를 보내고 좋은 점수를 주자, 용기를 내 보았지만 감당하기가 벅찼다. 이 ‘서성이던 후면에 관한 크로키’의 충동과 혼동을 통해 2번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보여주려는 것인지, 감지가 잘 안 됐다. 다시 숨을 고르고, 눈을 비비고, 읽기와 느끼기에 도전했지만 응모자의 고도(孤島)가 무엇인지 감이 잘 잡히질 않았다. 외람되게도 2번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었다. 눈 밝은 누군가에 의해 발굴되기 전까지는……. 심사자 중 한 사람인 나는 무식한 자신을 탓하며 2번의 작품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견 없이, 싱겁게, 1번에게로 합의가 모아졌다. 1번의 장점은 고른 수준, 안정감이었다. 1번의 ‘대상을 묵묵히 견인해내는 인내력’은 모범의 것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1번의 시들은 한 편 한 편 진심을 다 해 썼다는 미덕이 있었다. 일테면 1번의 실존은 “몸으로 익힌 건 잊히질 않”는 것이었고, 시는 결국 삶으로부터 발생하고 삶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틀렸던 문제는 잊히질 않”는 법. 두 말 할 것도 없이 ‘삶’이라는 “질문의 책”을 앞에 두고 시인은 고민하는 자이다. 그래서 시인의 집엔 오래 “불 켜진 창문 하나가 백짓장 같”을 수밖에 없고, 고민해봤자 소용없지 뭐, 좌절과 체념의 밤을 지새운 뒤 긴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다. 그 번민의 과정을 통해 마침내 깨닫게 되는 건 “커닝 없는 시험은 재미가 없”다는 것. 철학이나 종교와는 달리 시인의 실존이란 그렇다. 대단한 것도 고상한 것도 아니다. 예외 없이 장삼이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와 시인의 숙명이다. 끊임없이 경쟁해야만 하는 세상에서 삶이란 기껏 “단순한 규칙은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는 “젠가”, “쌓고 또 쌓아도 높아지지 않는 방식”의 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하병상치(下炳上治)의 치료법이 그렇다.
낙관적인 것은 회광반조(回光返照), “한 번 더 꽃 피울 수 있을까” 하는 시인의 희망. 자연의 아침 숲에서 시인은 ‘간섭무늬’를 읽고 ‘고라니 발자국’으로 대체되는 원시의 발자국 ‘홀로그램’을 본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인은 저만치 우리들의 집 밖에 ‘백엽상’ 하나를 짓고 “세상의 온도와 습도를 재 보려”고 한다, 어른이 되어 바라보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운동장이 얼마나 작은지” 그것을 알려주고 싶어 한다.
당선이 결정되고 확인해본 시인의 이름은 신정민이었다. 묵묵히 시와 삶을 견인해내는 시인의 인내력에 응원을 보낸다.
- 심사위원: 안도현 김륭 유홍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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