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디아스포라 / 정민식

- 헤로니모를 기억하며

 

희망도 한때는 가난했다

대궁 잘라낸 자리마다 흰 꿈이 배였다. 애니깽

선인장에 찔리고 긁히던 나의 살던 고향

 

돌아가야 할 곳에 몸 대신 쌀 한 숟갈 묻는다

밥그릇 속 똘똘 뭉친 한인의 밥심이

멕시코 만灣을 떠나왔지 낯선 난류가 익숙해지도록

 

다시 떠날 수 없었던 건

유목도 난민도 아니었기 때문이야

 

성공한 혁명 뒤에서 이민자였다가 슬픔이 되었다가

결국엔 장롱 속 오래된 사진첩 이름 석 자가 되었다

오래된 비디오테이프처럼 훗날을 재생할지라도

그래, 그건 우리의 뿌리에 관한 이야기

 

어쩌면 시대는 정신의 식민지일지도 모른다

고국이라는 고백만으로도 왈칵 쌀뜨물이 스민다

 

그러니 흩어진 쌀을 다시 한 톨 한 톨 모아

명부를 만들고 학교를 세우고 따끈한 밥을 짓는 거야

온 마을이 밥 짓는 냄새로 가득 찰 때까지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먼 나라 쿠바에서 꼬레아노 4세가 부르는 노래

지금은 반으로 접힌 나의 살던 고향, 숙연도 무색해질 만큼

 

돌아보지 말아 후회하지 말아

떠날 필요가 없었던 거야

 

* 노사연의 노래 <만남>은 쿠바의 한인 사회에서 세대를 거듭하여 불리고 있다.

 

 

 

 

[심사평]

 

올해로 아홉 번째 수상자를 배출하는 오장환 신인문학상 심사위원은 다음과 같은 심사기준을 적용하면서 심사에 임했다. 우선 언어의 밀도와 형식, 메시지의 설득력 등 전반적인 시적 완성도를 고려했다. 아울러 전위적인 미적 형식을 통해 현실 참여를 일구었던 오장환의 시적 성과에 부합되는 시편을 고르기 위해 노력했다.

 

투고작들은 전반적으로 전통적 서정시를 답습한 시편들이 많았으며 코로나19라는 시대 현실을 형상화한 시편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간혹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응모작들도 발견되었으나, 꼼꼼한 검토를 통해, 결국 하태희의 시편 ( 건너편에서 나는 산책을 한다외 네 편)과 정민식의 시편 ( 디아스포라-헤로니모를 기억하며외 네 편)을 수상작 최종 후보로 놓고 고심한 심사위원들은 '오장환 신인문학상'이 단지 이 땅의 수많은 문학상 중의 하나가 아니라, 오장환 시인의 귀한 문학적 성과를 성공적으로 계승하는 뜻깊은 문학상이라는 점을 엄중한 마음으로 고려하면서, 정민식 씨를 수상자로 선정하기로 흔쾌한 마음으로 합의하였다.

 

수상자 정민식 씨가 그의 표현대로 쉽게 "번역될 수 없는 말들"에 부합되는 창의적인 시를 많이 써서, 한국시를 이끌어가는 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울러 아쉽게 오장환 신인문학상에 선정되지 못한 하태희 씨의 시편을 다른 기회를 통해 조만간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

 

728x90

 

 

 

모르는 과자 주세요 / 이신율리

 

 

아는 과자는 어제 다 사라졌어

달콤한 맛을 알기 전에 사라져서 다행이야

사과는 계모가 다 먹어치웠지 내겐 사과 대신 다크초콜릿만 주고

 

유혹하지마, 모르는 것은 달콤하지

 

계모를 동그랗게 묶어 마카롱을 만들었어

빨주노초파남보 다음은 분홍이 되는 이상한 나라에서

서로 모르는 가족끼리 식탁에 둘러앉아 거짓말 두 개 넣고

 

맛없는 크림이 자랄 때까지 과자는 햇살의 공식을 모른다고 했지

 

, 터지는 멘토스와 다이어트 콜라 폭발하는 계모가 좋아

 

폴란드초코와플 테니스공껌 턱 빠지는 풋젤리 모르는 과자 주세요

 

쓴 맛도 알고 싶어?

쓴맛이 아는 과자를 안다고 먹고 칡촉

아는 과자가 모르는 과자를 모른다고 먹어치워 악마의 잼 누텔라

 

계모의 주머니가 깊어지고 있어

아는 과자만큼 손목이 따뜻해져 거울아 거울아

 

주머니에 빠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츄파춥스 일곱가지 맛을 빨면서 모르는 과자를 찾아가지

 

 

 

 

[심사평]

 

오장환문학상 신인상에는 총 107명의 응모자들이 모였다. 수준이나 완성도 면에 크게 떨어지는 시들은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시들이 감상적이고 설명적이며 관념적이었다. 시의 언어가 산문의 언어와 다른 점은 의미의 명료함이 아니라 오히려 모호함이다. 세계가 확정해놓은 의미로부터 언어를 해방시키기 위한 시의 전략이다. 때문에 시의 언어는 감상과 설명과 관념과는 거리가 멀다. 도리어 세계의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 세계의 실재를 드러낸다. 자신의 시가 어떤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일이다.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손에 남은 작품은 김미소, 김점복, 김창훈, 최진명, 이신율리 등 총 다섯 명의 시들이었다.

 

페이드 아웃4편을 보내온 김미소의 시들은 일상적 대상과 사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목소리로 인해 일상은 일상 너머 존재하는 비극성을 서서히 드러낸다. 특히 여름에게는 폭발적인 목소리의 흐름이 여름이라는 계절에 새로운 상상력을 끌어들이며 성장과 소멸, 삶과 죽음이 난반사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시의 목소리가 지닌 리듬과 그 리듬이 불러일으키는 파토스는 우리를 참혹하지만 매혹적인 세계로 안내한다. 그러나 다른 시편들은 아직 너무 거칠고 손쉽게 관념어와 추상어들이 남발되고 있다. 더 충분한 상상과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해 보인다.

 

비대칭의 아침4편을 보내온 김점복의 시의 장점은 대상을 낯설게 우리 앞에 새롭게 존재하도록 하는 점이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발화 방식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인데, 하나는 철저하게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는 방식, 다른 하나는 아예 대상의 내부로 파고들어가는 방식. 둘 다 그에게는 효과적인 시적 전략으로 보였다. 다만, 대상과의 거리가 어정쩡할 때, 대상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거나 대상에 대한 피상적 해석을 가하는 시들이 다소 눈에 띄었다. 그 결과 시가 상식적 세계를 뛰어넘는 성취를 보여주지 못하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자신이 무엇을 써야 하는지 어떤 세계를 보여주고자 하는지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계동 104번지4편을 보내온 김창훈의 시에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묘사다. 치밀한 묘사가 끌어들이는 이미지는 대상과 정황에 새로운 감각을 부여해 시가 마주한 세계를 낯설게 다시 경험하도록 한다. 특히 그의 시 환생이 보여주는 이미지의 감각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할머니라는 어쩌면 번연할 수도 있는 소재를 다양한 이미지들을 통해 다른 각도로 접근하면서 보신 분 연락 안 해도 무방해요라는 역설을 끄집어낸다. 그 역설을 통해 환생은 복잡한 다층적 의미를 띄고 우리 앞에 다시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이런 성취는 많지 않다. 다소 식상한 발상에 너무 기대 있는 시들이 있는가 하면 협소한 현실로 수렴되어 상식적 결론에 이르는 시들도 있었다. 이미지를 좀 더 밀고 나가는 힘 그래서 모르는 세계로 시를 진입시켜 보는 용기가 더 보태진다면 조만간 그를 지면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A44편을 보내온 최진명 시의 존재론적 시선은 매력적이다. 그는 일상의 감각들 확장시키고, 그 감각에 의해 파생되는 이미지들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는 법이 없다. 그렇게 외부에서 길어 올려진 감각들이 내면의 고통스러운 목소리와 버무려지며 내면과 세계가 조우하게 된다. 내면도 세계도 그 과정에서 변화를 겪는다. 다른 내면과 세계가 그의 시에서 새롭게 창조된다. 그러면서도 섣불리 흥분하지 않는 점은 그의 시의 또 다른 매력이다. 환촉은 그가 어떻게 감각과 이미지를 운용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미지란 결국 하나의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계의 통합적인 감각에서 시작된다는 사실도 이 시를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시들은 관념적으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여서 무척 아쉬웠다. 관념은 결국 세계를 축소하고 자폐적이고 왜소한 내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최진명의 시를 손에서 내려놓는 데 오랜 망설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이신율리의 시를 선택했다. 통통 튀는 감각으로 무장한 자유로운 상상력은 우리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자신만의 리듬을 통해 그 상상력에 생기를 불어넣는 점은 그의 시가 지닌 큰 장점이었다. 이런 점은 다른 응모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매력이었다. 그럼에도 거칠지 않고 과하지 않으며 매끄럽게 시를 진행하는 솜씨는 그가 만만치 않은 내공의 시간을 거쳐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는 과자는 어제 다 사라졌어라고 시작하는 그의 시 모르는 과자 주세요는 흔한 백설공주 계모 모티프에서 시작되는 것 같지만 다양한 과자의 감각과 발랄한 리듬과 어우러지며 상식적 해석의 차원을 넘어서며 우리를 한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로 데려간다. 결국 모르는 과자모르는 세계의 상관물이며, 그 세계로 진입하려는 자의 불안을 아이러니하게도 발랄한 리듬과 감각적인 이미지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시에서 상식세계의 윤리를 대상에게 들이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대상에 대한 역설적 접근이 가능해지며 이러한 접근을 통해 새로운 윤리가 발생한다. 이것이 그가 보여주는 모르는 세계의 모습이다. 다만, 그의 시에서 일상적 정황에 너무 도드라질 때 감각과 리듬만 남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점은 그의 시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아쉽게 당선에서 밀려난 분들에게 위로를 보낸다. 곧 좋은 소식으로 만나게 될 것을 믿는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그가 지금보다 훨씬 더 모르는 세계로 그의 시가 통통 튀며 뛰어나가길, 그래서 우리가 더욱 자유로운 상상력의 언어로 우리 세계를 다시 창조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해본다. 우리 시의 영토가 조금쯤 넓어지겠다.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김근(심사평), 안현미

 

728x90


파이프 / 신성률


길고 큰 구멍이 동심원으로
관자놀이에서 뛰논다
한참을 놀다가
찬물도 씻어 먹는 엄마를
코끝에 몰아놓고는
종아리를 마저 올려세운다
찬물로 찬물을 헹군 엄마는
늘 뜨겁고
저녁은 오늘도 길고 크다
신나게 놀다가 들어왔을 뿐인데
식을 것 없는 상보 아래 저녁은 심심하게 식어가고
엄마는 속이 다 보이도록
자꾸 아까운 찬물을 헹궈낸다
그때마다 길고 큰 구멍은
중심을 잃고 나를 향해 운다
종아리를 올리기 전부터 저녁이 다 내려앉을 때까지
찬물 같은 엄마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면
관자놀이는 제멋대로 뛰놀고 저녁놀처럼 어지럽다
심심한 저녁은 동심원으로 종아리를 말아 올린다
놀면서도 심심해하는 나를 엄마는 잘 알고
나는 파이프와 더 친하다
파이프가 나를 파이프로 만들어주기로 한 걸 
엄마는 모르고
그 길고 큰 저녁의 끝까지 나는 알기 싫지만
모르는 척해도 떠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서
짧고 작은 종아리로 중심을 잡는다
어디 따로 향할 데가 없는 것처럼
심심한 종아리를 따라다니며
놀기에도 아까운 저녁을 마저 헹군다
마치 아무 소리도 흘리지 않는다는 듯이
동심원으로 멀리 뛰노는 저녁의 종아리를
차마 못 보겠다는 듯이
찬물로 뜨겁게 헹궈낸 파이프의 끝이
입에 딱 달라붙어
다 저녁 찬물을 밥을 말아
뚝뚝 떨어지는 딸국질을 건져먹는다





청어 / 신성률


오래전 울며 다녀간 소년이
간밤에 일그러진 얼굴로 다녀갔습니다


가문 돌무더기 산꼭대기에 숨어
돌을 쌓고 억새와 흙을 이겨 오두막을 짓고
아내를 얻고 아이들을 낳고 바람 불어 소년을 잊고
세상이 가까워져 울타리를 높이 치고


추운 밤이었는데 소년이 대낮을 데리고 왔습니다
소년이 들어온 사립문으로 
햇살이 쏟아지고 물이 차오르고 청어 떼가 들어오고
헤엄을 모르는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 헤엄을 치고
아내가 바빠 이리저리 뛰고


아내가 아이들이 소년과 함께 청어를 잡느라
피 묻은 비늘들이 지붕까지 튀어올랐습니다


아주 더 오래전 소년을 보낼 때
소년은 무섭다고 춥고 목이 마르다고 했었습니다


소년이 무서워 옴짝달싹 피할 데 없던 나는
오래 전 소년처럼 피할 데가 없어서
지붕 위로 올라가 몸에 자꾸 돋는 비늘을
핀셋으로 떼어내고 있었는데


첨벙
첨벙


오빠라고 불러 형이라고 불러 다음에 또 올게
……… 그런데 엄마는,





신제품 / 신성률


가게처럼 사내가 낡아 보였다
옛날을 만들어낸 오늘의 상품들이
반짝거리며 가득했다
가게 보느라 오늘날에는
되는 일이 더는 없다고 떠들어대자
그나마 늙을 수 있었던 것도
십오 년씩이나 볼 가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자가 받아 쳤다
사내의 말대로라면
다 태초에 이루어진 일이거나
옛날에 이룬 일들만으로도 반질반질
가게가 넘쳐나야 마땅했기에
여자는 지려고 들지 않았다
늙지 않고자 해서 사내는 늙었을 것이다
새로 들어온 물건들을 뜯어본 적도 없이
손님들에게만 팔았을 것이다
그러고도 쭈글쭈글하지 않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라고
다시 여자가 입을 열었다
늘 들떠 있기 십상인 물건들을
총채로나 만지작거리면서
할인된 오늘을 고스란히 내주었을 것이다
여자도 그렇게 만질 것 같다는 생각 끝에
몸서리치는 여자가 대롱대롱 매달렸다
운 좋으면 사내는 앞으로도
십오 년은 더 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양 볼 탱탱하도록 추파춥스를 물고 있는 여자의
생몰연대는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늙지 않고자 해서 늙은 사내에게 하는 말들은
영락없이 마누라처럼 보였다
새로 들어올 물건들을 옛날부터 뜯어왔다 해도
다 뜯어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사내의 생각 또한
번들번들한 여자와 다를 바 없었지만
술잔에 사탕이 들어갈 리 만무하듯
여자의 어림과 사내의 짐작은 섞일 리 없어보였다
사내처럼 가게가 늙어서
번쩍거리는 오늘이 그득그득했다





가끔은 두꺼비집을 내리고 / 신성률


온몸이 귀 하나를 이기지 못하고 다 귀가 되었다 봄에 울던 귀가 입동이 지나도록 울었고 이상한 소문이 자꾸 들리는 귀가 이상했다 들렸는데 들리지 않았다 머리칼이 잘리고 전신마취를 당했다 뼈에서 고름을 긁어냈다고 했다 다 잘될 거라 했다 귀를 국가가 관리해주었다 다 달 들릴 거라 했다 들리지 않았는데 들렸다


그 뒤로도 온종일 귀는 제 위치를 알려왔다 손톱 밑이나 복사뼈에 머물기도 했고 무릎이나 이마를 짚기도 했지만 더러 몸 밖으로 나갔다오기도 했다


온갖 말들의 은신처가 된 귀가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그 해는 왕이 곳곳에서 출몰하던 해이기도 했다 집사네 집에 며칠 들렀다고도 했고 집달리가 여럿이라고도 했는데 가끔은 민가의 두꺼비집을 내리고 마술을 부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온몸을 다 들은 귀가 해를 넘기고도 온몸을 다 떠벌리고 다닌다는 말들이 우박처럼 튀어 올랐지만 왕가의 두꺼비집에 물 뿌린 이가 누구인지 끝내 관가에서는 밝혀내지 못했다고 했다


어둠이 귀가 커질 대로 커져서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다는 소문이 거리마다 흉흉했다 어디고 할 것 없이 귀가 큰 밤이 굴러다녔고 밤새 삐라를 줍는 귀먹은 늙은이들이 점점 늘어만 갔다 삐라는 건배사처럼 모호한 말을 남긴 채 뿔뿔이 흩어졌고 귀가 큰 밤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728x90

 

광화문바닥분수 / 김백형

 

광화문 광장 한복판 혹등고래 한 마리가 누워 있다

대리석 따개비를 붙이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폭염에 숨어 있던 시민들 고래를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저것 봐봐 오대양 물을 잔뜩 채우고 있나봐

타들어가는 허공에 죽쭉 물줄기를 쏘고 있잖아

신이 난 아이들은 고래 등을 뛰어다니고

철퍽철퍽 물장구를 칠 동안

16차선 도로는 굽이치며 흘러간다

펄펄 끓는 태양 벗지 못한 갑옷 속에서

 세상 굽어보던 이순신 장군은

살 것 같다 살 것 같다 숨통을 트고

바다로 떠나지 못한 광화문 통째로 실어

출항을 준비한다

컨테이너 빌딩들 선적할 동안

티셔츠 젖은 연인들 포옹을 하고

넥타이 푼 아빠들은 구두를 벗어놓고

애엄마 웃음 따라 물 만난 고기들을 쫓는데

허공도 무지개를 걸어놓고 발라당 누워

어스름 땅거미를 기다린다

산호초 같은 남산 위로 물밀어올리는 밤바다

교차로 횡단보도를 정어리 떼처럼 건너는 회사원들

광화문은 그제야 물고기를 말려놓고

와이파이 데이터를 켜 세상 얘기에 귀 기울인다

정말? 눈 번쩍 뜨일 때마다 해파리 섬광처럼 별이 뜨고

쯧쯧 어떡하니, 머리가 한 짐 될 때 가로등이 부표처럼 둥둥 뜨고

그 사이 혹등고래 한 마리

지난한 오늘 하루를 유유히 빠져나간다

 

 

 

 

 

 

728x90

 

 

역류하는 소문 / 박순희

 

봄밤은 무리 지어 피는 것을 좋아합니다

무리는 많은 말발굽들이 있고

나는 그 중에 한 개를 뽑아 구두에 매달았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한낮이 지나갑니다

낮 동안 소리 없는 말들은

엄지에서 태어나고 죽어갑니다

 

천 리를 간다는 말엔

흥겨운 안장이 있습니다

 

난 무엇인가를 부르다 깨어나기도 하는데 간혹 후생이나 전생의 처지를 몸 안에서 겪는다는 생각입니다 낮게 젖은 꿈이 발굽을 타고 땅속으로 스며드는 아침, 밤새 돌아다녔던 몸이 말합니다 어제는 낯선 심장을 만나 아프지 않게 울었습니다 소문은 무리 지어 달리는 생물입니다 문 안의 일이나 문 밖의 일이란 당신이 던진 말발굽 하나가 단초입니다 사람들의 말로 지쳐가는 귀는 워워 말을 쓰다듬는 것이 해답입니다

 

나는 역류하는 존재가 아니라서

심심한 하루를 보냅니다

매일 넘치지 않기 위해서 쪼그려 앉습니다

이야기는 안경을 벗어야 볼 수 있습니다

부질없이 부푼 것 중 하나가 여벌이어

입술이 부릅니다

 

봄밤에 나는 말발굽들을 뽑아 버립니다

주인 없는 말발굽들이 어디론가 질주하고 있습니다 

 

 

 

728x90

 

1945, 그리운 바타비아 / 채인숙

 

1
화란의 여자들이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쓴 채 하얀 자전거를 타고 파타힐라 광장을 빠져나간다 항구 바깥에는 별의 방향을 따라 바다를 향해하는 목선들이 긴 열을 이루며 잠에 들었다

 

2.
어둠의 극장에는 일찍 늙어버린 배우들이 모여 도망자들을 위한 연극을 만든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복동의 식민지에서 왔다던 청년의 이야기를 한다 어린 아내를 두고 온 그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을 생각하느라 밤새 울었다고 그러다 잠자리를 밀고당한 것이라고 수용소를 탈출한 그를 찾아 병사들이 그림자극을 공연하던 와양 극장을 덮쳤다고 그건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고 청년은 화란인의 빨래를 다려주는 여인의 사랑을 거절했다고

 

3.
광장 모퉁이에서 사산도를 연주하던 노인은 중세의 문양들이 어지럽게 그려진 천막으로 들어가 끝내 돌아오지 않은 옛 애인의 이름을 문신으로 남겼다 손목에 새겨진 검은 먹선의 그녀와 이별 수를 점쳐준 점술사를 위하여 너는 국수를 삶았다 발목에 쇠뭉치를 매단 채 키보다 낮은 천장 아래서 서럽게 입을 맞추던 노인의 사랑은 한때 와양 극장의 아름다운 대본이었으나 무수히 실패한 사랑의 대사들만 젖은 면발이 되어 목구멍을 타고 넘었다

 

4.
사랑을 잃은 날마다 밤은 더 깊어지고 자정이면 어김없이 배가 고팠다 그날도 그다음 날도 바타비아의 밤은 느리게 걸어왔다가 황급히 광장을 덮쳤다 그림자극의 마지막 대사가 끝나면 배우들은 식은 국수를 먹으러 천막으로 들었고 너는 밤새 다림질할 빨래 바구니를 받으러 광장을 나섰다 누구도 사라진 그이들의 이름을 다시 부르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습기의 무게를 견디느라 밤이 저지르는 어떤 더러운 사랑에도 눈을 감았다

 

5.
당신을 위해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했는가를 생각하는, 밤은 쓸쓸하다

 

 

* 바타비아 : 자카르타의 옛 이름

 

 

 

728x90

 

 

기타와 바게트 / 리호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찾아

그러면 스스로 나는 법을 깨닫게 될 거야

나는 조나단, 더 이상 빵부스러기에 연연하지 않는

적도의 펭귄5

 

 

흔해빠진 스트라이프 팬티는 사양할래

더 이상 그녀의 젖가슴이 떠오르지 않거든

쇄골과 골반 안쪽에는 맹수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검은 눈동자 문신을 그려놓았어

 

유명한 빵집 앞에서 22분을 기다려 바게트를 샀지

비스듬히 칼집 넣은 중간 중간에 오후를 채워 넣었어

빠삐용의 죄수복에도 붉은 칼집이 들어간 것을 아나?

찢긴 나비의 날개 조각들이 채워져 있던 걸로 기억해

 

낯선 이들의 침입을 막으려 부적처럼 세워놓은

검은색 기타 옆에 바게트빵을 기대놓았어

여섯 개의 현에 매달린 그녀가 가는 잠에서 깨어나 한입 물었지

후두둑 오후가 쏟아져 내리더니 이내 나비가 된 그녀가 웃고 있네

 

더 이상 스테레오타입의 섹스는 사양할래

가슴에 노란 빠삐용 문신을 새긴 그녀의 심장은

오른쪽에 있거든

 

 

 

기타와 바게트

 

nefing.com

 

 

올해 '3회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리호(45··서울시 강동구)시인이 문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 주목받고 있다.

 

리 시인은 지난 9월 충북 보은군과 실천문학사에서 주관한 오장환 신인문학상에 '기타와 바게트'란 제목의 시로 응모해 당선했다.

 

송찬호 시인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은 그녀의 작품 전반에 깔린 패기 넘치는 목소리를 높이 샀다.

 

당선작인 '기타와 바게트'에 관해 "에피그램의 제시부터 언어 선택에 이르기까지 파격적인 형식의 구사가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파편적으로 배치된 듯한 이미지 간의 화학적 결합을 통한 시의 축조도 신인상에 걸맞은 목소리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안정적인 기교와 목소리를 담은 작품들과 조금 거칠지만 패기 넘치는 리호씨의 작품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성장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상자로 선택했다"고 심사위원들은 밝혔다. 그만큼 리 시인에게 성장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는 동국대학교 문화예술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뒤 <M2-9>우주시 동인으로 활동하는 시인이다.

 

리 시인은 "12년간 한 우물을 판 결과 이런 영예를 안게 되었다. 두고두고 사람 살리는 좋은 시를 쓰는 것으로 감사한 마음을 갚겠다. 앞으로 문단에 한 획을 긋는 좋은 시인으로 남기를 소망한다"고 당차게 수상소감을 밝혔다.

 

리 시인은 올해 '3회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뒤 '3회 이해조문학상''1회 하늘사랑문학상' 등을 잇달아 수상하며 기성문단에 뛰어들 채비를 마쳤다.

 

728x90

 

 

브라우티건 풍으로 / 신윤서

 

 

선풍기의 날개 사이로 부는 바람은, 내 이름이다. 모기장을 둘러 친 침대에 기대어 워터멜론 슈가에서를 읽는다.

 

약속한 날들이 지나가버리고, 나는 결코 책제목처럼 달콤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몹시 쓸쓸했다. 당신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들판에 망연히 앉아 망초꽃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다.

 

강을 지날 때마다 높이 튀어 오르는 숭어의 은빛 비늘이거나,

빼곡히 적힌 수첩의 전화번호 따위로 우리의 관계가 표현되었으니,

그것은 참 슬픈 일이라 생각했다.

창가에 놓인 유자나무 한 그루가 칠 년째 열매를 매달지 않은 이유는 뻔하지 않겠는가.

 

선풍기의 날개 사이로 부는 바람이 나를 한 페이지 넘긴다.

오래 전 쉴 새 없이 내게로 날아들었던 그대들의 열렬한 편지들이 내 삶을 두껍게 하여

그동안 아무도 나를 즐겁게 읽어주지 않았다.

가끔은 아침을 거르고, 벌에 쏘인 듯 다급하게 지평선으로 가버렸다.

어쩌면 당신은 망초 속에서 늘 울고 있을지도 몰라서 새벽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로 짙은

안개가 내려앉는다.

 

경부선 첫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끝내 돌아서질 못하는, 여행 가방처럼 나는 무겁다.

긴 치맛자락처럼 책의 내용에 굵게 밑줄을 그으며, 서성이고 망설이다 끝내 나는

당신의 기억 속에서 현실로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 이름이 떠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선풍기 바람이 불어오는 모기장이 쳐진 침대 위에 누운 나의 반쯤 드러난

가슴을 열고 들어와 나를 달콤하게 읽어주기를 바란다.

당신이 나의 주인공이 되어 들판에 망연히 앉아 망초꽃이 흔들리는 것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군과 실천문학사를 따르면 신씨는 이번 '2회 오장환신인문학상''브라우티건 풍으로' 5편의 시를 응모해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신씨에게는 상패와 500만 원의 상금을 주고, 수상작은 다음 달 발행하는 '계간 실천문학' 겨울호에 실린다.

 

이번 '2회 오장환신인문학상'에 전국에서 150여 명이 750여 편의 시를 응모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사를 맡았던 송찬호·최금진 시인은 심사평에서 "신인으로서 지녀야 할 도전정신과 참신성, '재치''가치'로 바꿀 줄 아는 능력, 그리고 투고작들의 한결같은 완성도를 높이 샀다"고 말했다.

 

당선작인 '브라우티건 풍으로'에 대한 평은 "당신과 나의 관계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을 그리고 있다. 실험성과 사실성으로 양분돼 있는 듯한 지금의 문학 구도에서, 존재의 의미를 고찰하고자 하는 그의 작품들은 분명 희귀한 것이다.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한 이유도 이에 있다"고 밝혔다.

 

신씨는 대구에서 출생해 부산에서 성장했다. 그는 2012년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을 받았다.

 

군은 회인면 출신인 오장환(吳章煥·1918~1951) 시인의 시적 성과를 기리고, 나날이 부박해지는 문학적 환경 속에서 시의 현실적 위의를 되새기기 위해 지난해 이 상을 제정했다.

 

오 시인은 한국 아방가르드 시단의 흐름에서 김수영과 황지우로 이어지는 하나의 길을 개척한 시인으로 1933'조선문학''목욕간'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오 시인은 이후 '시인부락''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성백(1937)', '헌사(1939)' 등의 시집을 남긴 뒤 1946년 월북했다.

 

728x90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 / 이재연

 

 

환상과 자폐에서 깨어날 때마다 아파트만 무수히 태어났다.

우리들은 무성한 아파트를 반성했지만 반성뿐인 결론에 도달하곤 했다.

어떤 결론은 보기에도 민망했고 입 속에서도 서걱거렸다.

저녁이 되어 사람의 그림자가 발등에 수북이 떨어지자,

우리들은 우리 속의 쓸쓸함을 꺼내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태양이 식자, 어떤 청춘들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떠돌았고 우리들은 골짜기의 그림자처럼 두꺼워졌다. 그런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

 

바람은 언제 어디서나 나타났지만 주위를 환기시키지 못했고 풀잎들을 일으켜 세우지도 못했다.

 

거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이름을 주고받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서로 다치지 않게 거래를 이어가기도 했다.

 

그러한 거래 끝에서도 생을 뚜렷하게 뒤척이는 영혼을, 시인들은 검은 모자를 눌러쓰듯 자꾸 눌러썼지만 세상의 절반은 영혼의 범람을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밤이 되어 측백나무가 제 키를 껴안고 울 때, 어떤 이는 단순하게 흙으로 돌아갔다. 또 다른 이는 삶과 죽음이 하나인 세계로 들어갔지만 남은 자들은 소수자에 불과했다.

 

뱀처럼 차가운 달이 뜰 때면 도시 외곽을 에둘러 흐르는 냇물이 움직였다. 그 물 꼬리를 바라보면 천천히 소름이 돋았다.

 

곳곳에 기도가 넘쳐흘렀지만, 어떤 불신은 막무가내 손을 뻗어와 소름이 멈추지 않았다.

 

()을 바꿔도 또 다른 나로부터 오늘을 골몰했고 흩날려 귀환하지 않는 꽃씨처럼 아릿한 방식으로 아이들은 줄어들었다.

 

얼굴보다 먼저 시들어가는 한 떼의 젊은이들은 제 내면을 들여다보며 술을 마셨고 아침이면 아이들은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웃자란 아이들이 돌아오자 곧, 태양이 식었다.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

 

nefing.com

 

 

 

충북 보은군이 후원하고 실천문학사가 주관하는 오장환신인문학상수상자의 첫 시집이 나왔다. 22일 군은 20121회 오장환신인문학상을 수상한 이재연 시인이 최근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실천문학사 ·143·사진)라는 제목의 첫 시집을 발간했다고 밝혔다.

 

이 시인의 시집에는 현대인의 생에 관해 원초적 의미를 부여한 42편의 주옥같은 시편들이 실렸으며 오장환신인문학상수상자의 첫 시집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홍일표 시인은 그의 시를 따라가다 보면 존재의 쓸쓸함이 배면에 자욱하다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냉온의 정서를 조율하면서 균형을 유지한다고 평했다.

 

보은 출신인 오장환 시인(1918~1951)의 시적 성과를 기리는 오장환신인문학상은 부박해지는 문학적 환경 속에서 시의 현실적 우월성을 되새기기 위해 제정됐다.

 

그동안 이 시인을 비롯해 신윤서(2리호(3채인숙(4박순희(5) 시인 등은 차세대 문단을 이끌 주인공으로 주목받는 신인들을 배출했으나 지원이 미약해 이들의 시집 출간은 이뤄지지 않아 이 시인의 첫 시집 발간으로 나머지 시인들의 시집 출간도 이어질 전망이다. 군 관계자는 신인 시인들이 문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도록 시집 출간비용 지원 등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