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그날 연꽃이 보았지 / 이생문
동안거 입재 준비에 한창이던 연못에 불던 피바람
고요한 새벽 핏자국 선명한 군홧발소리 들었지
바람에 맞서다
마른 잎 비틀리고 꽃대 꺾이며
한 톨 핏기마저 바람에 빼앗기던
소리 없는 울분 연못에 출렁였지
숨죽이며 들었지
어쩔 수 없어 몸부림치던 소리 없는 울부짖음
무자비로 짓밟는 서슬 퍼런 군홧발소리
도량을 활보하던 점령군의 불발된 폭죽소리
바람도 봄 오면 따뜻해질 거라고 미소 짓던
마른 꽃의 얼굴
맑은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칠흑 같은 번뇌의 수렁 건너며
큰 가슴으로 거룩한 생명 감싸 안은
핏발 선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총칼 보다 단단한 거룩한 씨앗은 기억했지
그대 여기 짓밟고 걸어온 길
참회의 길이 되길 간절히 빌며 해마다 꽃 피웠지
그대 끌어안으며 날마다 합장하는
인토忍土에서 보내는 마지막 자비
[최우수상] 법음(法音)의 꽃 / 유송원
신군부 군홧발에 옆구리가 채였을 때 억, 하고 허리가 구부러졌다
초저녁의 어둠이 각혈을 하듯 눈밭에 어혈(瘀血)처럼 나뒹굴었다
권총 손잡이로 뺨을 맞으며 스님은 법당이 아닌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검은 표지의 신문조서로 책상을 두드리며 저들은 거짓을 종용했다
무소유의 무구한 수행자에게 탐욕의 권승(權僧)을 자복하라 윽박질렀다
목에 핏대가 불거진 고문의 목소리가 도사견처럼 수행자를 물어뜯었다
간악한 목소리로 회유하는 그 악마의 음성에서 미소가 번들거렸다
핍박과 어거지와 이간질과 악다구니가 한통속으로 비구(比丘)의 사지에 주리를 틀었다
신음조차 가늘어지는 초주검에 몰아넣으며 허튼소리의 실토를 사주했네
세속보다 더 세속의 악행을 활개 치는 그 속에서도
암자 한귀퉁이 연못에는 홍련과 백련이 가혹하게 피고
스님들이 잡혀간 뒤끝의 이상한 적막을 갈음하듯
종무소의 진돗개는 범종각의 당목을 당겨 범종을 대신 쳤다
뱃구레가 빈 목어(木魚) 뱃속에 잘못 든 참새는 우왕좌왕 목어 속을 두드리고
절간 음식께나 도둑질한 족제비는 법고(法鼓)에 몸을 던져 북소리를 얻어낼 때
소나기 천둥이 칠 때 구름무늬 일렁이는 운판(雲版)은 제물에 맑게 울었다
붙잡혀간 스님이면 불심도 붙잡혀간 것이라고
그 시절 스님들의 고심참담을 그 후유증을 심중 심경(心經)에 새기고, 스님들이 돌아오셨다
고문과 치도곤 당한 심신으로 돌아온 스님들 반 부처로 돌아오셨다
아픈 몸 처절한 고통의 마음이 곧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 견뎌는 시절,
그리고 절간 연못에서 딴 연잎으로 연밥을 만들어
고문에 쇠약해진 스님의 약밥을 올리면
어눌해진 말보다 먼저 스님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천 근 만 근의 원통하고 비통한 아수라들의 악행 악식을 잠시 물렸다
약밥으로 물리쳐질 고통이라면 삼시 세끼 약밥을 올리리라
약밥에 밤 대추 잣 꿀 은행 말고도 더 넣고 싶은 게 있다
부처님 꺼지지 않는 온화한 미소의 법음(法音)이 푹 배인 약밥이면
한귀퉁이만 베어 먹어도 뒤틀리고 남루가 된 영육의 치도곤이 풀리고
시대의 야차(夜叉)들과 정권의 하수인들의 무지몽매를 위해
연꽃처럼 합장하고 그들의 카르마가 반복되지 않게 하소서
여래(如來)의 약밥 한 말씀 드신 스님은 고통을 가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백팔 배 오백 배 천배라도 몸에 혼곤한 땀에 천근처럼 절어도
지옥의 굴레를 짓는 현세의 악업들 모든 고리가 풀려나가라고
보라, 저 오욕의 진흙탕 세월에서 걸어나온 연꽃에서 법음(法音)이 환하게 번진다
[우수상] 발자국 자리 / 임재경
찢기는 듯한
비명소리가
염불 소리를
가르고 말았다
불전의 향불은
사그라들고
희미한 연기만이
제자리에 맴돌았다
그날
낯선 이들이 남긴
진한 발자국은
낙엽을 치우는 빗질에도
겨우내 내린 눈에도
사라지지 않는
흉터로 남았다
긴 겨울이 지나
어느덧 봄의 차례
온 세상이 꽃으로 뒤덮이는데
발자국 자리에는
풀 한 포기 돋아날 생각을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
저 자리에도
봄날이 올 것이다
와야만 한다
사죄의 말은 씨앗이 되고
후회의 눈물은 양분이 되고
부처님의 자비는 햇살이 되어
마침내 아름다운 꽃이 필 날이
올 것이다
와야만 한다
[우수상] 법난의 풍경 / 박봉철
캄캄한 기운이 해를 가리던 그해
난폭한 군화가 들이닥친 법당,
군홧발소리에 총칼과 더불어 뱀들이 똬리를 틀었다
그해 낮달은 말문을 닫았고 온전히 귀를 감추었다
발설되지 못한 소문과 진실은
고문과 왜곡으로 그 뼈와 살이 으스러졌다
그림자가 엎질러진,
그 자리조차 온화한 좌불坐佛
예견되지 않은,
고난에도 둥근 미소를 머금었다
시월의 세파는 너무 가혹했기에
더 이상 묵과?過할 수 없지만
가름하게 뜬 눈으로 염불을 지새우는 새벽
어느 세상 그리 바뀌어도
언제나 한결 같던 대자대비의 姿態
저 무자비한 법난의 가세에도
좌불의 話頭는
언제나 길고도 無量하다
[장려] 그 날을 잊지 못합니다 / 박미선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들이,
예의 없이
일주문에 들어선 그날.
조용하고,
청량한 내음을
풍기던 산사가
긴장감에
감돌던 그날.
수행자로서,
평온한 일상을
깨트리던 그날을
나는,
잊지 못합니다.
흩날리는 벚꽃 잎이
군화에 짓밟히고,
바람결에 흔들리던
풍경소리가,
군인들의 분주함 속에
묻히던 그날.
무슨 연유로
그러한지
묻는 말에
답변을 듣지도 못한 채,
어떠한 저항을 할 틈도 없이
나는 끌려갔습니다.
청정하고,
하염없이 맑은 하늘아래,
나는 일주문 밖으로
끌려갔습니다.
[장려] 월정사의 연등 / 박하성
만월산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신군부가 저지른 10.27 법난
군홧발에 짓밟힌 자국마다
불의에 저항하던 그날의 불심들로
부처의 문양紋樣을 새긴 걸 보면
돋을새김체로 핀 은유의 경전
창검 같은 서릿발을 녹여낸 길 따라
조롱조롱 매달려 금강연을 내지른다
연등 앞세우는 길마다
따라오는 범종소리
둥그렇게 몸을 만 꽃등의 행렬
불의한 모서리를 깎으리라
겨우내 억눌렸던 땅이
무도한 권력에 휘둘렸던 불도가
신명身命을 다해 일으킨 무혈혁명이다
월정사에 또 봄이 왔다
[장려] 백련白蓮처럼, 바라무처럼 / 이윤정
바라무처럼 피리라
나비무처럼 피리라
화들짝 한 번에
다 피지는 않아도
7월부터 8월을 거쳐
한 송이, 또 한 송이
피고, 피고, 또 피고,
연꽃의 뿌리처럼
법난을 이겨내고
우리 이 나라의 불교는
깨끗한 백련처럼 또 피어나
낮고도 어두운 곳에서
도도히 솟아올랐으니
끈질김의 기적을 안다
불교를 만날 수 있는
이 시대는 축복이어라
천천히 한 잎, 한 잎
꽃받침을 피워 올리고
그 깊고 깊은 마음을
가만가만 읽어야겠다.
[장려] 법난속의 꿈길 / 이정훈
할매 할매 같이가
할매따라 걸어가는 숲길은 꿈길
꿈길을 깨우는 피묻은 군화발
두려움에 눈을 뜨니 비명속의 대공분실
이곳이 사출산(死出山)인가
혼돈속에 육신의 고통이 힘겹게 깨운다
이보시오 보살님의 아들
나는 초라한 불자요
승복을 돌려주오
그대들의 매질도 부처님께 자비를 구할테니
부디 목탁을 돌려주오
내 육신에 가하는 고문보다
그대들이 기도하는 도량에 범하는 무례함이
내 가슴을 찢는구려
입안 가득 맺힌 통한의 울림은
파형없는 붉은피로 쏟아진다
또다시 혼절의 바닥으로 떨어진다
육신의 고통보다 더한 절망의 고통이여
입적의 눈물이 혼란한 속세를 적신다
할매따라 걸어가던 숲길이 다시 이어진다
할매 할매 같이가
같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