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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곽 외 4편 / 혜원

 

당신은 손의 윤곽이 열쇠와 닮아서 아침에 손을 떨어뜨린 사람

 

내 손은 정오의 구멍처럼 환하고

V자로 깎아 낸 아홉 개의 벤 자리와 여덟 개의 이가 있는 당신의 열쇠는

부드러운 곡률을 갖고 있어서 우리는 쉽게 통과하네

타인의 주머니에 쉽게 손을 맡기고

 

열쇠를 만지듯

가볍게 만지작거리고

 

백 년 동안 열쇠가 녹고 있지

 

녹은 자리가 예뻐서

당신이 또 손을 어루만지면

 

너무 헐거워

 

당신은 한 번도 내 손을 열지 못했지

다른 손이 필요하다고 믿었지

윤곽이 녹아서

 

백 년 동안 열쇠만 깎았지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한 일은 최선을 다해 손을 오므렸던 일

 

손을 펴면 열쇠의 깎은 자리가 사라지고

내 주머니에서 손이 사라지고

 

주머니에 타인의 열쇠가 가득하네

 

어느 날 모르는 손 하나를 쥐면

자물쇠의 깊이만큼 긴 구멍이 생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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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인사

 

자세를 교정하다 새의 온도를 짐작했습니다 짐작만 했어요 뜨거운 온도로 쏟아지며 태어나던 날부터 세상을 짐작하는 것이 습관이어서

 

어깨에는 깃털처럼 자라는 겨울이 있습니다 깃털을 뽑으면 함박눈이 쏟아집니다 눈은 발아래 쌓입니다 눈을 밟으면

 

새가 펑 펑 울었습니다 새는 그렇게 웁니다 짐작으로

한 발을 반쯤 들어 올린

 

새가 절반만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처음으로 새를 만났고 새가 날개를 펴는 순간은 자주 목격했지만 공중에서 날개를 펴는 동작이 발레의 짐작이라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습니다 다리를 반쯤 들어 올려도 새처럼 아무리 다리를 찢어도 날지는 못 했습니다

 

나는 상냥하고 못돼먹었으니까

 

동베파도브레 - 정령의 신발 한 짝을 훔쳐 신고

글리사드 - 찢은 새를 밟고

발을 버린 무용수처럼 날아올라 - 그랑제떼

 

숨이 멎었습니다 짐작만으로

 

신발 한 짝에 어깨 한쪽을 집어넣을 수 있다면 다른 발을 들어 올려 빛을 끌어당긴다면 불가능한 자세를 새의 창문이라고 한다면

 

아침마다 당신의 창문을 들여다보며

당신이 나를 내다보는 것이라고 짐작하겠습니다

 

 

 

사과를 먹는 사과씨들

 

어떤 의미에서 사과는 2층에서 언니들이 던진 종이다

 

사과를 씻으면 단어는 뭉개진다

이 언니가 저 언니와 섞이고 문장이 젖는다

 

종이는 썩지 못한 것들의 시

아니, 씨

언니들의 방에서 뒹굴던 사과씨 귤씨 비타민C는

 

내가 버린 종이였다

젖은 종이를 펼치면

 

사랑한다는 말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건너가 있다

계단이 계단으로 접히다 썩은,

 

집들이 언니들의 씨와 나의 시 사이에서 어두워진다 어두워진다 어두워진다 더 어두워진 다음에 언니들을 깎아낸다

 

사과씨에 닿기 위해

시를 쓰면

사과는 씨에서 멀어지고

 

사랑한다는 말은 집에 가까워졌다

 

집을 뭉치면 금형공장 프레스로 누르면 더 단단한 씨가 되겠지만

사과씨 귤씨 바다라는 Sea는 다른 장르의 종이

혜은 씨 수미 씨는 얼마나 멀어졌을까

 

사과를 씻으면 농약보다 먼저

사과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체리가 굴러다니는 지구

 

 

둥근 것은 왜 기울어질까 태양과 체리와 방울토마토는 슬픔 없이 기울어진다 지구와 체리는 부딪친다 크랙이 생겼다 방울토마토는 싱거워서 크랙 사이로 체리즙을 흘려 넣는다 그런 식으로 지구에 연애라는 감정이 발생했다 그러니까 연애는 워싱턴 체리 같아 이국적인 말로 세련된 욕을 구사하지만 연애의 안쪽은 백 년 내내 우기였지 백 년 동안 비를 맞아 태양은 지구보다 작아지고 백 년 동안 비를 맞아 지구는 체리보다 작아졌다 빗물은 어디에 고여야 하나 비는 싱거워져서 지구를 적시지 못하고 백 년 동안 과육 속에서만 내린다 태양은 방울토마토처럼 창백해진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일억 년 후에 하얗게 될 방울토마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일억 년 동안 친절했던 체리에 대해 사랑은 체리나무 같지 친절을 조금 기울이면 가지 끝은 붉게 맛이 들었다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지구를 토마토와 함께 두면 지구에 먼저 금이 갔다

 

 

기체를 끌어안는 방식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덮밥을 즐겨 먹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밥 위에 얹어 먹기도 하고 가끔은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얹기도 해요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멍게덮밥이고요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알맹이는 씹을 때마다 당신을 주황색으로 떠올리게 해요 멍게 오렌지 꽈리는 버리세요 주황색만 생각하세요 첫 키스는 꽈리 같았죠 꽈리를 불면 질량이 0이었던 한 점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팽창하는 인플레이션 10⁻³⁶이나 10⁻³⁴초 만에 멍게는 멍게로부터 멀어지죠 멍게를 훔쳤다는 말은 아니에요 이론물리학과 식품영양학은 버리세요 그러면 식탁은 물질이 아니라 신비로운 대기현상이 됩니다 신비롭다는 것은 대기가 폭풍의 기류를 품고 있다는 의미 대적점이라는 목성의 주황색 반점 사실 멍게는 거기서 나왔죠 노을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면 대화를 이어갈 수 없죠 그러니 주황색은 잊어요 덮밥만 생각해요 폭풍의 대기를 뚫고 착륙하듯 나는 숟가락으로 퍼먹기도 하고 젓가락으로 꿰뚫기도 해요 가장 선호하는 방법은 재료의 숨통을 끊어놓는 거죠 죽은 별에서 새 별이 탄생하듯 재료의 완전한 죽음으로 밥은 완성되니까요 덮밥은 죽음 위에 죽음을 얹는 한 끼니까요 첫 키스로부터 멀어지고 있을 당신과 당신 사이 암모니아로 이루어진 행성을 찾다 보면 입은 기체로 들끓고요 사실 꽈리는 거기서 나왔죠

 

 

[당선소감]

 

복대박, 림포마 투병 중인 반려견입니다.

 

「윤곽」의 그 손처럼 내 손은 한 번도 종양을 어쩌지 못하고 간절하게 다른 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022년 세 번째 날 오후를 지나는 중이었고 내게 좋은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오후였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다시 일상을 시작하던 중 당선 소식을 접했습니다. 연모하면서도 두려웠고 좋아하면서도 피해 다녔던 제게 그건 ‘기적’이었습니다. 어쩌면 간절함이 신께 닿았나 봅니다.

 

부족한 저를 뽑아주신 곽재구 선생님, 염창권 선생님 그리고 ‘상상인’ 관계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와의 결별을 밥 먹듯이 하던 저를 안타까워하시던 여성민 시인님 감사합니다. 정말 잘 써야 된다고 하신 허혜정 교수님과 고락을 함께해 온 시향문학 회원님들 감사합니다. 아낌없는 격려와 지원을 보내주신 키다리 아저씨 배철훈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 동생들 감사하고 대박아! 그만 일어나렴.

 

이제는 시를 가장 가까운 곳에 두겠습니다. 애인처럼.

 

 

 

[심사평] 

 

메타버스metaverse 시대의 특징적인 상상력이 글쓰기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현실계와 가상계의 경계 지점에서 머뭇거리는 예비 시인들의 목소리가 지치지 않고 끝없이 들려온다. 이처럼 중심을 포착하기 어려운 시대에 ‘시 쓰기/읽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현실계에 구멍을 뚫지 않고는 가상계 혹은 상징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서 구멍은 통로이며, 구멍 뚫기는 시인의 몫이다. 더불어 한 편의 시가 하나의 소통의 단위가 되기 위해서는 화살촉과 같은 무게중심을 가지고 대상을 향해 꽂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무기명으로 본심에 전송된 원고는 16명의 투고작이었다. 먼저 이를 출력하여 두 사람이 각자의 관점에 따라 읽었고, 다음에는 오프라인으로 모여 당선작을 결정하였다. 대상작은 8명, 4명, 2명의 순서로 좁혀져 갔다. 전체적인 면에서 시적 표현의 양상이나 제재의 다양성은 인정할 수 있으나, 시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요건인 서정적 자아의 부재, 주제 의식의 빈곤, 시어의 함축성보다는 진술적 설명에 치우친 점 등이 우선 지적되었다. 최종에서 논의된 작품은 「크레인의 목적」 외 7편, 「손, 라이프 나이프」 외 8편, 「문」 외 4편, 「윤곽」 외 4편이었다.

 

먼저 「크레인의 목적」은 일상의 애환을 환몽 속에 아프게 겹쳐 보인다. 크레인에 날아온 새는 자아의 상관물로 ‘몸 바꾸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곧 감상의 벽에 막힌 것이 아쉬움이다. 동봉한 다른 작품에서도 논평이나 감상을 넘어서는 의미의 파장이 있어야겠다. 「손, 라이프 나이프」는 영상 언어 및 극적 서사의 방식으로 언어의 다층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실험적 형식을 아우르는 중심이 풀려 있다. 그것은 대상 세계에 대한 추구의 진정성보다는 논평적 위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끝까지 남은 작품은 「문」(「락다운」)과 「윤곽」(「사과를 먹는 사과씨들」)이었다. 「문」에서는 “눈송이마다 저녁이 붙어 있다.”와 같은 표현이나, “마당은 자꾸 넓어져서 너는 저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나는 오두막에 들어앉아 폭삭 늙을 때까지 시를 쓰고, 지나가는 새소리를 모으기도 했다.”와 같은 절묘한 서정성의 실현이 시의 정감을 풍부하게 한다. 동시에 내면의 영역 표시를 ‘문’으로 상징한 것은 평이하지만, 역설적으로 ‘문이 없었’던 것에 닿아 있다. 평이한 진술 속에서 의미를 형상화해내는 솜씨가 돋보였다. 「윤곽」은 앞의 시와 같이 ‘나/너(당신)’의 관계성 속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결속의 상징은 “손”이자, 손이라는 윤곽을 가진 “열쇠”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당신”의 관계성을 깨고 타인의 “손”이 개입되는바, “녹은 자리가 예뻐서/ 당신이 또 손을 어루만지면// 너무 헐거워”와 같이, 너(당신)조차도 타자화되면서 꽉 쥔 열쇠의 윤곽은 점차 “헐거워”진다. “내 주머니에서 손이 사라지고// 주머니에 타인의 열쇠가 가득해졌다”라고 했을 때, 선택 불능의 홈만 깊게 파인다. 전체적으로 너(당신)는 마음으로 지어진 가상의 너이자 허구적 현실이다.

 

두 작품 모두 장단점이 있고, 비중이 엇비슷하다. 「문」에서는 ‘나/너’의 단순한 도식이, 「윤곽」에서는 일부 어눌한 표현이 걸린다. 논의 끝에 「윤곽」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 시의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시상의 안정적인 전개와 동봉한 작품에서 보이는 상징성의 구축 등에서 믿음이 간 것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아깝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분발을 부탁드리며 다음 해를 기약하기로 한다.

 

- 심사위원 : 곽재구 · 염창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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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런 편이다 당선작 / 나종훈

 

 

우리 엄마들은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금 간 식탁을 버릴 때도 그들의 누렇고 긴 이야기를 파란 봉투에 담을 때도 가느다란 바람이 간결하게 불었다 비밀스런 이야기들은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턱이 빠진 창문을 넘었다 그럴 때면 매미 대가리가 가득한 지붕에서 우아한 고양이들이 말을 더듬었다 머리부터 나오지 못한 사생아는 주인 없는 의자를 만들고 버리고 만들고 버리곤 했다 반복되는 요일은 흔들리는 요람처럼 소문을 토해냈다 그런 편이었다 토스트가 만드는 소리는 지나치게 의존적이었다 난생처음 먹은 계란 프라이엔 거짓 맛이 노랗게 뒤엉켜 있었다 전혀 새로운 종으로 분류된 조류의 춤 같았다. 오후의 텅 빈 놀이터와 요리가 멈춘 부엌에 똑같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장롱 위엔 회초리가 장롱 안엔 가족사진이 있었다 거의 그런 편이었다 먼지 쌓인 책장처럼 계절은 고요히 다가왔고 중립을 지키던 남자들의 입술에도 눈이 쌓였다 의자에서 떨어진 노을은 높임법을 자주 틀렸다 아이들은 사진 속 지평선을 바라보며 어렴풋이 말을 배웠다 대부분 그랬다 그런 편이었다 옥상에 누워 수를 배웠다 얼어붙은 도마를 두드리는 수는 계절보다 한 수 위였다 반사적인 칼질이 그랬다 그런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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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일기장 같은 친구와 평생을 함께 할 수는 있겠지만 용기가 없었다.

날 닮은 부분이 너무 많아 부끄러웠다.

다듬어지지 않은 표정을 들킬까 도망가기도 했다.

몇 년을 말없이 지내기도 했다.

 

화목제로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린다.

부족한 저의 시를 좋게 봐주신 두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진지한 태도를 가르쳐주신 이승하 교수님에게 감사드린다.

 

눈이 많이 온 새해 이글루를 아이들과 만들었다.

그리고 점심을 먹다 당선 연락을 받았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전화였지만 의외로 차분한 나에게 놀랐다.

만들고 온 직후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을 보고 기뻐해 주는 아내와 아무것도 모른 채 장난치는 아이들을 보고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가족에게 너무 고맙다.

나를 만들어준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도 감사드린다.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작품 가운데 다음 네 분의 작품을 추천했다.

 

외 7편. 말을 세공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통념과 달리 시는 인공어의 일종이다. 일상적인 말들은 소통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들과 비슷해져야 한다. 반대로 시의 말은 다른 말과 제 자신을 구별하려고 하며, 바로 거기서 미적 효과가 생겨난다. 시편마다 구사하는 말놀이(이름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이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는 자리다)가 자연스럽고 싱싱하다. 다만 (응모자가 미처 몰랐을 수도 있는데) 다른 시인들의 소출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별똥별> 외 4편. 자연과학 분야의 용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와서 썼는데, 그게 또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시의 역사가 일러주는 것은 시의 지평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유머와 우화가 이과 출신 쌍둥이처럼 구별할 수 없이 한 몸이다. 이 길로 계속 나아간다면 우리 시의 특별한 개성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응, 그런 편이다> 외 5편. 문장을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만들어내는 유장한 말투가 매력적이다. 능수능란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능수能手이고 능란能爛이다. 유려하게 문장을 엮어가는 손과 화려하게 펼쳐지는 말들의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 가꿔온 말들의 정원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쉽게도 장시에서는 장력張力이 조금 약해지는 것 같다.

 

<나는 아직 허공에 닿지 않았다> 외 6편. 시편마다 세상의 모습이, 살아온 내력이, 사람들의 사연이 촘촘한데, 그 풍경과 이력과 이야기가 한 지점에 맺혀 있다. 이 지점이 시가 발화發火, 發話, 發花하는 지점이다. 모티프라고도 부르고 은유라고도 부르는 그 곡절에 정확히 스타카토가 찍혀 있다.

 

이 가운데 두 분의 작품이 다른 본심위원의 추천과 일치했다. 논의 끝에 두 분의 작품 모두 선하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 권혁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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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춧잎이 시들어간다 / 박희연

 

 

1.

먹다 남은 배추 겉잎이 시들었다.

속잎이었던 그 겉잎은 싱싱했다.

싱싱한 것을 시들게 만드는 내공은

내게 있을까 시간에 있을까.

돌아보면 내 삶은 혐의로 가득 차

어깨가 움츠러들고 손이 오그라든다.

불안은 종종 표면적을 작게 만든다.

배춧잎이 조글조글 말라붙었다.

 

 

2.

가까이서 보면 크고 멀리서 보면 작다.

표면적을 작게 만드는 방법 하나

당신과 거리를 두는 일이다.

코로나19 시대의 인류애는

서로가 서로에게 보균자라는 혐의를 두는 것

 

3.

오래된 습관처럼 해가 뜨고

어제저녁 먹다 남은 배춧국을 먹는다.

TV에 비친 한 정신병동에서

누군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죽거나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죽어나간다.

저 죽음의 이면에도 아랑곳없이

당신과 나는 숟가락을 놓지 않는다.

우린 너무 많이 배양되었고

너무 오래 변이를 거듭해왔다.

 

4.

남은 배춧잎이 또 시들었다.

속잎마저 이울어 더 이상 시들 일이 없을 때

난 헛헛한 마음에 기침을 한다.

불안이 고조된 열차 안에서

어느새 오래된 습관처럼 사람들이 물러선다.

배추는 배추의 불안과 혐의로

나는 나의 불안과 혐의로

당신은 당신의 불안과 혐의로

세계는 세계의 불안과 혐오로

아주 작아져버린 당신이 때때로 그리울 수도 있겠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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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제가 있는 사무실은 지하예요. 아주아주 커다란 빌딩의 지하여서인지 겨울이 긴 곳이지요. 처음 근무를 하던 5월에도 난로를 옆에 끼고 있었어요.

 

여기 추위는 칼날 같은 매서움이 아니라, 싸늘하게, 아무도 모르게 뼛속까지 채우는 기운이에요. 이 기운이 갉아낸 제 뼈마디가 가루가 되어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 싶어요. 마치 바람 속에 사라진 마꼰도처럼요. 욕심이 앞서 마르께스의 또 다른 책이 없을까 뒤적이는데 딱히 끌리지 않네요. 하나 무작정 읽고 싶었던 건 절판이고요.

 

늘 마음에 걸리던 몽테뉴 수상록을 다시 들었습니다. 여태 책꽂이에 꽂아두고 답답하기만 했는데 오늘은 웬일로 읽고 싶더라니까요. 처음과 달리 어려움도 덜하고요.

 

며칠 전 제가 별 감흥도 없이 무뎌진다고 했잖아요. 씁쓸하던 참에 이런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사변(思辨)으로 거적때기를 씌워 나의 감수성을 둔하게 만들고 있다.”

 

어디다 갖다 붙이냐 하겠지만 그냥 그 말로 제 아둔한 감수성을 위로했어요. 그리고 정말로 사변할 수 있도록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

 

정신은 일정한 목표가 없으면 갈팡질팡하고, 이런저런 공상의 막연한 들판에서 줏대 없이 방황을 한다는데, 딱 제 꼴입니다.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의지인지 아닌지 몰라 쩔쩔맵니다. 아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나요? 그리고도 아님, 제가 당당히 맞설지 모르는 비겁자인가요?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바이. 2005년 11월. K에게. 희연드림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 보게 되는 옛날 영화처럼 자료를 찾다 발견한 메일 하나.

난 아직도 모르기만 해서

알 때까지 읽고 써보기로 한다.

 

알 때까지 써볼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신 ‘상상인 신춘문예’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졸시에 낙점을 찍어주신 이병률 시인님, 권혁웅 시인님께 감사드린다. 변덕스러운 내 시를 한결같이 읽어주신 이산하 시인님, 권미강 시인님, 조연희 시인님께 감사드린다. 그런데 K! 난 과연 알 수 있을까?

 

 

 

[심사평]

 

제1회 상상인 신춘문예 응모자는 330여 명이었다. 그 중 9명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하여 본심에 올랐다.

 

시의 세계는 시 쓰는 자들의 아우성으로 완성된다. 신인들의 시를 대면하는 자리에서는 그 생각이 더 치민다. 폭발력이라든가, 자유로움을 기대하지만 그것도 잠시. 예지를 바랄 수 없는 내 안경으로 뭘 고르겠다는 것인가 싶어 나를 누른다. 그렇게 동물적으로 읽게 된다. 동물적으로 받아들이되 나도 모르게 신뢰하기. 나는 이런 마음으로 원고 앞에 앉았다.

 

권혁웅 시인과 나는 본심에 오른 시들 가운데 좋았던 시들과 좋았던 응모자들을 거론했다. 그 가운데 겹쳐 호명된 두 사람의 이름은 심사 분위기를 긴장시켰다.

 

우선 나종훈은 분위기를 충족시켰다. 읽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분위기는 누구나, 아무나 만드는 것이 아닐 것인데 전체 시를 꼼꼼히 읽게 만드는 전개 방식이 호감이었다. <응, 그런 편이다>은 섬세했으며 <타락한 교집합>에서는 패기가 출렁였다. 신춘문예에 어울린다 할 수 있는 시격을 만나게 해준 신인의 면모 또한 궁금해지는 시였다. 안 해도 되는 말을 감히 애정을 기울여 꺼내자면 다만 몇 편의 시에서 안정적인, 입체적이지 않은, 갇힌 듯 답답한 몇몇 줄의 위태로운 ‘투’가 걸렸다는 것이다.

 

배춧잎으로 그가 몸담은 시대와 그가 고통하는 세계를 그리는 데 성공한 시, 박희연의 <배춧잎이 시들어간다>는 열거의 촘촘함이 매력이었다. <나는 아직 허공에 닿지 않았다> 역시 나뭇잎이 등장하는데 나뭇잎이 전면에 주도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닌데도 나뭇잎이 없다면 이내 시가 허물어지고 마는 아찔함이 닥쳤다. 시에서의 감동이라는 것은 그런 ‘등짝’이 있어야 제 맛인 것 아닌가.

 

일단 나종훈, 박희연으로 압축되기는 했으나 그래도 놓치는 것은 없는지 세세한 살핌을 시작했다. <검은 개> 외 6편을 응모한 이은희의 시는 제목들이 시선을 끌었다. 제목부터 대작의 포즈가 압도적이어서 집중하며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시들은 좋은 이미지들이 서로 붙지 못하고 각자 분리되거나 잘려져 있었다. 좋은 시가 하나하나의 이미지들이 뒹굴며 전진하면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그러기엔 끊겨 있음으로 그저 평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즐거웠다. 마지막 시를 응모원고에 포함시킨 건 제 살을 깎아내리는 판단이었다. 시라고 하기엔 너무도 먼 작품이었다.

 

낯설지만 신선하다고 볼 수 없는, 시가 아닌 것 같은데 분명히 시로 향하고 있는 향일성이 좋았던 <별똥별> 외 5편을 투고한 한경훈의 시들은 날것의 느낌이 팽팽하고 지성의 결도 딴딴한데, 상체 앞쪽에다 힘을 빡 주고 있는 것이 거슬리기도 하면서 또 이쁘기도 하였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세공 연마를 거친다면 곧 지금까지 만날 수 없었던 시인이 될 거라 기대한다.

 

결국 우리는 두 분의 당선자를 모신다. 나종훈의 <응, 그런 편이다>에서 펼쳐 보인 미의식과 박희연의 <배춧잎이 시들어간다>의 삶을 향한 시선의 순도는 이번 상상인 신춘문예의 성취이자 시세계로의 참신한 진입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두 시인에게 당선 소식이 도착한다면 책상 위에 생기와 활기 또한 내려앉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 심사위원 : 이병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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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곽 / 혜원

 

 

당신은 손의 윤곽이 열쇠와 닮아서 아침에 손을 떨어뜨린 사람

 

내 손은 정오의 구멍처럼 환하고

V자로 깎아 낸 아홉 개의 벤 자리와 여덟 개의 이가 있는 당신의 열쇠는

부드러운 곡률을 갖고 있어서 우리는 쉽게 통과하네

타인의 주머니에 쉽게 손을 맡기고

 

열쇠를 만지듯

가볍게 만지작거리고

 

백 년 동안 열쇠가 녹고 있지

 

녹은 자리가 예뻐서

당신이 또 손을 어루만지면

 

너무 헐거워

 

당신은 한 번도 내 손을 열지 못했지

다른 손이 필요하다고 믿었지

윤곽이 녹아서

 

백 년 동안 열쇠만 깎았지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한 일은 최선을 다해 손을 오므렸던 일

 

손을 펴면 열쇠의 깎은 자리가 사라지고

내 주머니에서 손이 사라지고

 

주머니에 타인의 열쇠가 가득하네

 

어느 날 모르는 손 하나를 쥐면

자물쇠의 깊이만큼 긴 구멍이 생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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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편이다 당선작 / 나종훈

 

 

우리 엄마들은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금 간 식탁을 버릴 때도 그들의 누렇고 긴 이야기를 파란 봉투에 담을 때도 가느다란 바람이 간결하게 불었다 비밀스런 이야기들은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턱이 빠진 창문을 넘었다 그럴 때면 매미 대가리가 가득한 지붕에서 우아한 고양이들이 말을 더듬었다 머리부터 나오지 못한 사생아는 주인 없는 의자를 만들고 버리고 만들고 버리곤 했다 반복되는 요일은 흔들리는 요람처럼 소문을 토해냈다 그런 편이었다 토스트가 만드는 소리는 지나치게 의존적이었다 난생처음 먹은 계란 프라이엔 거짓 맛이 노랗게 뒤엉켜 있었다 전혀 새로운 종으로 분류된 조류의 춤 같았다. 오후의 텅 빈 놀이터와 요리가 멈춘 부엌에 똑같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장롱 위엔 회초리가 장롱 안엔 가족사진이 있었다 거의 그런 편이었다 먼지 쌓인 책장처럼 계절은 고요히 다가왔고 중립을 지키던 남자들의 입술에도 눈이 쌓였다 의자에서 떨어진 노을은 높임법을 자주 틀렸다 아이들은 사진 속 지평선을 바라보며 어렴풋이 말을 배웠다 대부분 그랬다 그런 편이었다 옥상에 누워 수를 배웠다 얼어붙은 도마를 두드리는 수는 계절보다 한 수 위였다 반사적인 칼질이 그랬다 그런 편이었다

 

 

 

[당선소감]

 

 

일기장 같은 친구와 평생을 함께 할 수는 있겠지만 용기가 없었다.

날 닮은 부분이 너무 많아 부끄러웠다.

다듬어지지 않은 표정을 들킬까 도망가기도 했다.

몇 년을 말없이 지내기도 했다.

 

화목제로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린다.

부족한 저의 시를 좋게 봐주신 두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진지한 태도를 가르쳐주신 이승하 교수님에게 감사드린다.

 

눈이 많이 온 새해 이글루를 아이들과 만들었다.

그리고 점심을 먹다 당선 연락을 받았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전화였지만 의외로 차분한 나에게 놀랐다.

만들고 온 직후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을 보고 기뻐해 주는 아내와 아무것도 모른 채 장난치는 아이들을 보고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가족에게 너무 고맙다.

나를 만들어준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도 감사드린다.

 

 

 

 

 

배춧잎이 시들어간다 / 박희연

 

 

1.

먹다 남은 배추 겉잎이 시들었다.

속잎이었던 그 겉잎은 싱싱했다.

싱싱한 것을 시들게 만드는 내공은

내게 있을까 시간에 있을까.

돌아보면 내 삶은 혐의로 가득 차

어깨가 움츠러들고 손이 오그라든다.

불안은 종종 표면적을 작게 만든다.

배춧잎이 조글조글 말라붙었다.

 

 

2.

가까이서 보면 크고 멀리서 보면 작다.

표면적을 작게 만드는 방법 하나

당신과 거리를 두는 일이다.

코로나19 시대의 인류애는

서로가 서로에게 보균자라는 혐의를 두는 것

 

3.

오래된 습관처럼 해가 뜨고

어제저녁 먹다 남은 배춧국을 먹는다.

TV에 비친 한 정신병동에서

누군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죽거나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죽어나간다.

저 죽음의 이면에도 아랑곳없이

당신과 나는 숟가락을 놓지 않는다.

우린 너무 많이 배양되었고

너무 오래 변이를 거듭해왔다.

 

4.

남은 배춧잎이 또 시들었다.

속잎마저 이울어 더 이상 시들 일이 없을 때

난 헛헛한 마음에 기침을 한다.

불안이 고조된 열차 안에서

어느새 오래된 습관처럼 사람들이 물러선다.

배추는 배추의 불안과 혐의로

나는 나의 불안과 혐의로

당신은 당신의 불안과 혐의로

세계는 세계의 불안과 혐오로

아주 작아져버린 당신이 때때로 그리울 수도 있겠다.

 

 

 

[당선소감]

 

제가 있는 사무실은 지하예요. 아주아주 커다란 빌딩의 지하여서인지 겨울이 긴 곳이지요. 처음 근무를 하던 5월에도 난로를 옆에 끼고 있었어요.

 

여기 추위는 칼날 같은 매서움이 아니라, 싸늘하게, 아무도 모르게 뼛속까지 채우는 기운이에요. 이 기운이 갉아낸 제 뼈마디가 가루가 되어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 싶어요. 마치 바람 속에 사라진 마꼰도처럼요. 욕심이 앞서 마르께스의 또 다른 책이 없을까 뒤적이는데 딱히 끌리지 않네요. 하나 무작정 읽고 싶었던 건 절판이고요.

 

늘 마음에 걸리던 몽테뉴 수상록을 다시 들었습니다. 여태 책꽂이에 꽂아두고 답답하기만 했는데 오늘은 웬일로 읽고 싶더라니까요. 처음과 달리 어려움도 덜하고요.

 

며칠 전 제가 별 감흥도 없이 무뎌진다고 했잖아요. 씁쓸하던 참에 이런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사변(思辨)으로 거적때기를 씌워 나의 감수성을 둔하게 만들고 있다.”

 

어디다 갖다 붙이냐 하겠지만 그냥 그 말로 제 아둔한 감수성을 위로했어요. 그리고 정말로 사변할 수 있도록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

 

정신은 일정한 목표가 없으면 갈팡질팡하고, 이런저런 공상의 막연한 들판에서 줏대 없이 방황을 한다는데, 딱 제 꼴입니다.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의지인지 아닌지 몰라 쩔쩔맵니다. 아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나요? 그리고도 아님, 제가 당당히 맞설지 모르는 비겁자인가요?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바이. 200511. K에게. 희연드림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 보게 되는 옛날 영화처럼 자료를 찾다 발견한 메일 하나.

난 아직도 모르기만 해서

알 때까지 읽고 써보기로 한다.

 

알 때까지 써볼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신 상상인 신춘문예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졸시에 낙점을 찍어주신 이병률 시인님, 권혁웅 시인님께 감사드린다. 변덕스러운 내 시를 한결같이 읽어주신 이산하 시인님, 권미강 시인님, 조연희 시인님께 감사드린다. 그런데 K! 난 과연 알 수 있을까?

 

 

 

 

[심사평]

 

1회 상상인 신춘문예 응모자는 330여 명이었다. 그 중 9명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하여 본심에 올랐다.

 

시의 세계는 시 쓰는 자들의 아우성으로 완성된다. 신인들의 시를 대면하는 자리에서는 그 생각이 더 치민다. 폭발력이라든가, 자유로움을 기대하지만 그것도 잠시. 예지를 바랄 수 없는 내 안경으로 뭘 고르겠다는 것인가 싶어 나를 누른다. 그렇게 동물적으로 읽게 된다. 동물적으로 받아들이되 나도 모르게 신뢰하기. 나는 이런 마음으로 원고 앞에 앉았다.

 

권혁웅 시인과 나는 본심에 오른 시들 가운데 좋았던 시들과 좋았던 응모자들을 거론했다. 그 가운데 겹쳐 호명된 두 사람의 이름은 심사 분위기를 긴장시켰다.

 

우선 나종훈은 분위기를 충족시켰다. 읽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분위기는 누구나, 아무나 만드는 것이 아닐 것인데 전체 시를 꼼꼼히 읽게 만드는 전개 방식이 호감이었다. <, 그런 편이다>은 섬세했으며 <타락한 교집합>에서는 패기가 출렁였다. 신춘문예에 어울린다 할 수 있는 시격을 만나게 해준 신인의 면모 또한 궁금해지는 시였다. 안 해도 되는 말을 감히 애정을 기울여 꺼내자면 다만 몇 편의 시에서 안정적인, 입체적이지 않은, 갇힌 듯 답답한 몇몇 줄의 위태로운 가 걸렸다는 것이다.

 

배춧잎으로 그가 몸담은 시대와 그가 고통하는 세계를 그리는 데 성공한 시, 박희연의 <배춧잎이 시들어간다>는 열거의 촘촘함이 매력이었다. <나는 아직 허공에 닿지 않았다> 역시 나뭇잎이 등장하는데 나뭇잎이 전면에 주도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닌데도 나뭇잎이 없다면 이내 시가 허물어지고 마는 아찔함이 닥쳤다. 시에서의 감동이라는 것은 그런 등짝이 있어야 제 맛인 것 아닌가.

 

일단 나종훈, 박희연으로 압축되기는 했으나 그래도 놓치는 것은 없는지 세세한 살핌을 시작했다. <검은 개> 6편을 응모한 이은희의 시는 제목들이 시선을 끌었다. 제목부터 대작의 포즈가 압도적이어서 집중하며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시들은 좋은 이미지들이 서로 붙지 못하고 각자 분리되거나 잘려져 있었다. 좋은 시가 하나하나의 이미지들이 뒹굴며 전진하면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그러기엔 끊겨 있음으로 그저 평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즐거웠다. 마지막 시를 응모원고에 포함시킨 건 제 살을 깎아내리는 판단이었다. 시라고 하기엔 너무도 먼 작품이었다.

 

낯설지만 신선하다고 볼 수 없는, 시가 아닌 것 같은데 분명히 시로 향하고 있는 향일성이 좋았던 <별똥별> 5편을 투고한 한경훈의 시들은 날것의 느낌이 팽팽하고 지성의 결도 딴딴한데, 상체 앞쪽에다 힘을 빡 주고 있는 것이 거슬리기도 하면서 또 이쁘기도 하였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세공 연마를 거친다면 곧 지금까지 만날 수 없었던 시인이 될 거라 기대한다.

 

결국 우리는 두 분의 당선자를 모신다. 나종훈의 <, 그런 편이다>에서 펼쳐 보인 미의식과 박희연의 <배춧잎이 시들어간다>의 삶을 향한 시선의 순도는 이번 상상인 신춘문예의 성취이자 시세계로의 참신한 진입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두 시인에게 당선 소식이 도착한다면 책상 위에 생기와 활기 또한 내려앉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 심사위원 : 이병률(시인)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작품 가운데 다음 네 분의 작품을 추천했다.

 

<No.4> 7. 말을 세공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통념과 달리 시는 인공어의 일종이다. 일상적인 말들은 소통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들과 비슷해져야 한다. 반대로 시의 말은 다른 말과 제 자신을 구별하려고 하며, 바로 거기서 미적 효과가 생겨난다. 시편마다 구사하는 말놀이(이름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이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는 자리다)가 자연스럽고 싱싱하다. 다만 (응모자가 미처 몰랐을 수도 있는데) 다른 시인들의 소출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별똥별> 4. 자연과학 분야의 용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와서 썼는데, 그게 또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시의 역사가 일러주는 것은 시의 지평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유머와 우화가 이과 출신 쌍둥이처럼 구별할 수 없이 한 몸이다. 이 길로 계속 나아간다면 우리 시의 특별한 개성이 될 것이라 믿는다.

 

<, 그런 편이다> 5. 문장을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만들어내는 유장한 말투가 매력적이다. 능수능란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능수能手이고 능란能爛이다. 유려하게 문장을 엮어가는 손과 화려하게 펼쳐지는 말들의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 가꿔온 말들의 정원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쉽게도 장시에서는 장력張力이 조금 약해지는 것 같다.

 

<나는 아직 허공에 닿지 않았다> 6. 시편마다 세상의 모습이, 살아온 내력이, 사람들의 사연이 촘촘한데, 그 풍경과 이력과 이야기가 한 지점에 맺혀 있다. 이 지점이 시가 발화發火, 發話, 發花하는 지점이다. 모티프라고도 부르고 은유라고도 부르는 그 곡절에 정확히 스타카토가 찍혀 있다.

 

이 가운데 두 분의 작품이 다른 본심위원의 추천과 일치했다. 논의 끝에 두 분의 작품 모두 선하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 권혁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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