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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곽 외 4편 / 혜원

 

당신은 손의 윤곽이 열쇠와 닮아서 아침에 손을 떨어뜨린 사람

 

내 손은 정오의 구멍처럼 환하고

V자로 깎아 낸 아홉 개의 벤 자리와 여덟 개의 이가 있는 당신의 열쇠는

부드러운 곡률을 갖고 있어서 우리는 쉽게 통과하네

타인의 주머니에 쉽게 손을 맡기고

 

열쇠를 만지듯

가볍게 만지작거리고

 

백 년 동안 열쇠가 녹고 있지

 

녹은 자리가 예뻐서

당신이 또 손을 어루만지면

 

너무 헐거워

 

당신은 한 번도 내 손을 열지 못했지

다른 손이 필요하다고 믿었지

윤곽이 녹아서

 

백 년 동안 열쇠만 깎았지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한 일은 최선을 다해 손을 오므렸던 일

 

손을 펴면 열쇠의 깎은 자리가 사라지고

내 주머니에서 손이 사라지고

 

주머니에 타인의 열쇠가 가득하네

 

어느 날 모르는 손 하나를 쥐면

자물쇠의 깊이만큼 긴 구멍이 생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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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인사

 

자세를 교정하다 새의 온도를 짐작했습니다 짐작만 했어요 뜨거운 온도로 쏟아지며 태어나던 날부터 세상을 짐작하는 것이 습관이어서

 

어깨에는 깃털처럼 자라는 겨울이 있습니다 깃털을 뽑으면 함박눈이 쏟아집니다 눈은 발아래 쌓입니다 눈을 밟으면

 

새가 펑 펑 울었습니다 새는 그렇게 웁니다 짐작으로

한 발을 반쯤 들어 올린

 

새가 절반만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처음으로 새를 만났고 새가 날개를 펴는 순간은 자주 목격했지만 공중에서 날개를 펴는 동작이 발레의 짐작이라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습니다 다리를 반쯤 들어 올려도 새처럼 아무리 다리를 찢어도 날지는 못 했습니다

 

나는 상냥하고 못돼먹었으니까

 

동베파도브레 - 정령의 신발 한 짝을 훔쳐 신고

글리사드 - 찢은 새를 밟고

발을 버린 무용수처럼 날아올라 - 그랑제떼

 

숨이 멎었습니다 짐작만으로

 

신발 한 짝에 어깨 한쪽을 집어넣을 수 있다면 다른 발을 들어 올려 빛을 끌어당긴다면 불가능한 자세를 새의 창문이라고 한다면

 

아침마다 당신의 창문을 들여다보며

당신이 나를 내다보는 것이라고 짐작하겠습니다

 

 

 

사과를 먹는 사과씨들

 

어떤 의미에서 사과는 2층에서 언니들이 던진 종이다

 

사과를 씻으면 단어는 뭉개진다

이 언니가 저 언니와 섞이고 문장이 젖는다

 

종이는 썩지 못한 것들의 시

아니, 씨

언니들의 방에서 뒹굴던 사과씨 귤씨 비타민C는

 

내가 버린 종이였다

젖은 종이를 펼치면

 

사랑한다는 말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건너가 있다

계단이 계단으로 접히다 썩은,

 

집들이 언니들의 씨와 나의 시 사이에서 어두워진다 어두워진다 어두워진다 더 어두워진 다음에 언니들을 깎아낸다

 

사과씨에 닿기 위해

시를 쓰면

사과는 씨에서 멀어지고

 

사랑한다는 말은 집에 가까워졌다

 

집을 뭉치면 금형공장 프레스로 누르면 더 단단한 씨가 되겠지만

사과씨 귤씨 바다라는 Sea는 다른 장르의 종이

혜은 씨 수미 씨는 얼마나 멀어졌을까

 

사과를 씻으면 농약보다 먼저

사과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체리가 굴러다니는 지구

 

 

둥근 것은 왜 기울어질까 태양과 체리와 방울토마토는 슬픔 없이 기울어진다 지구와 체리는 부딪친다 크랙이 생겼다 방울토마토는 싱거워서 크랙 사이로 체리즙을 흘려 넣는다 그런 식으로 지구에 연애라는 감정이 발생했다 그러니까 연애는 워싱턴 체리 같아 이국적인 말로 세련된 욕을 구사하지만 연애의 안쪽은 백 년 내내 우기였지 백 년 동안 비를 맞아 태양은 지구보다 작아지고 백 년 동안 비를 맞아 지구는 체리보다 작아졌다 빗물은 어디에 고여야 하나 비는 싱거워져서 지구를 적시지 못하고 백 년 동안 과육 속에서만 내린다 태양은 방울토마토처럼 창백해진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일억 년 후에 하얗게 될 방울토마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일억 년 동안 친절했던 체리에 대해 사랑은 체리나무 같지 친절을 조금 기울이면 가지 끝은 붉게 맛이 들었다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지구를 토마토와 함께 두면 지구에 먼저 금이 갔다

 

 

기체를 끌어안는 방식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덮밥을 즐겨 먹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밥 위에 얹어 먹기도 하고 가끔은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얹기도 해요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멍게덮밥이고요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알맹이는 씹을 때마다 당신을 주황색으로 떠올리게 해요 멍게 오렌지 꽈리는 버리세요 주황색만 생각하세요 첫 키스는 꽈리 같았죠 꽈리를 불면 질량이 0이었던 한 점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팽창하는 인플레이션 10⁻³⁶이나 10⁻³⁴초 만에 멍게는 멍게로부터 멀어지죠 멍게를 훔쳤다는 말은 아니에요 이론물리학과 식품영양학은 버리세요 그러면 식탁은 물질이 아니라 신비로운 대기현상이 됩니다 신비롭다는 것은 대기가 폭풍의 기류를 품고 있다는 의미 대적점이라는 목성의 주황색 반점 사실 멍게는 거기서 나왔죠 노을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면 대화를 이어갈 수 없죠 그러니 주황색은 잊어요 덮밥만 생각해요 폭풍의 대기를 뚫고 착륙하듯 나는 숟가락으로 퍼먹기도 하고 젓가락으로 꿰뚫기도 해요 가장 선호하는 방법은 재료의 숨통을 끊어놓는 거죠 죽은 별에서 새 별이 탄생하듯 재료의 완전한 죽음으로 밥은 완성되니까요 덮밥은 죽음 위에 죽음을 얹는 한 끼니까요 첫 키스로부터 멀어지고 있을 당신과 당신 사이 암모니아로 이루어진 행성을 찾다 보면 입은 기체로 들끓고요 사실 꽈리는 거기서 나왔죠

 

 

[당선소감]

 

복대박, 림포마 투병 중인 반려견입니다.

 

「윤곽」의 그 손처럼 내 손은 한 번도 종양을 어쩌지 못하고 간절하게 다른 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022년 세 번째 날 오후를 지나는 중이었고 내게 좋은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오후였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다시 일상을 시작하던 중 당선 소식을 접했습니다. 연모하면서도 두려웠고 좋아하면서도 피해 다녔던 제게 그건 ‘기적’이었습니다. 어쩌면 간절함이 신께 닿았나 봅니다.

 

부족한 저를 뽑아주신 곽재구 선생님, 염창권 선생님 그리고 ‘상상인’ 관계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와의 결별을 밥 먹듯이 하던 저를 안타까워하시던 여성민 시인님 감사합니다. 정말 잘 써야 된다고 하신 허혜정 교수님과 고락을 함께해 온 시향문학 회원님들 감사합니다. 아낌없는 격려와 지원을 보내주신 키다리 아저씨 배철훈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 동생들 감사하고 대박아! 그만 일어나렴.

 

이제는 시를 가장 가까운 곳에 두겠습니다. 애인처럼.

 

 

 

[심사평] 

 

메타버스metaverse 시대의 특징적인 상상력이 글쓰기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현실계와 가상계의 경계 지점에서 머뭇거리는 예비 시인들의 목소리가 지치지 않고 끝없이 들려온다. 이처럼 중심을 포착하기 어려운 시대에 ‘시 쓰기/읽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현실계에 구멍을 뚫지 않고는 가상계 혹은 상징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서 구멍은 통로이며, 구멍 뚫기는 시인의 몫이다. 더불어 한 편의 시가 하나의 소통의 단위가 되기 위해서는 화살촉과 같은 무게중심을 가지고 대상을 향해 꽂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무기명으로 본심에 전송된 원고는 16명의 투고작이었다. 먼저 이를 출력하여 두 사람이 각자의 관점에 따라 읽었고, 다음에는 오프라인으로 모여 당선작을 결정하였다. 대상작은 8명, 4명, 2명의 순서로 좁혀져 갔다. 전체적인 면에서 시적 표현의 양상이나 제재의 다양성은 인정할 수 있으나, 시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요건인 서정적 자아의 부재, 주제 의식의 빈곤, 시어의 함축성보다는 진술적 설명에 치우친 점 등이 우선 지적되었다. 최종에서 논의된 작품은 「크레인의 목적」 외 7편, 「손, 라이프 나이프」 외 8편, 「문」 외 4편, 「윤곽」 외 4편이었다.

 

먼저 「크레인의 목적」은 일상의 애환을 환몽 속에 아프게 겹쳐 보인다. 크레인에 날아온 새는 자아의 상관물로 ‘몸 바꾸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곧 감상의 벽에 막힌 것이 아쉬움이다. 동봉한 다른 작품에서도 논평이나 감상을 넘어서는 의미의 파장이 있어야겠다. 「손, 라이프 나이프」는 영상 언어 및 극적 서사의 방식으로 언어의 다층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실험적 형식을 아우르는 중심이 풀려 있다. 그것은 대상 세계에 대한 추구의 진정성보다는 논평적 위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끝까지 남은 작품은 「문」(「락다운」)과 「윤곽」(「사과를 먹는 사과씨들」)이었다. 「문」에서는 “눈송이마다 저녁이 붙어 있다.”와 같은 표현이나, “마당은 자꾸 넓어져서 너는 저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나는 오두막에 들어앉아 폭삭 늙을 때까지 시를 쓰고, 지나가는 새소리를 모으기도 했다.”와 같은 절묘한 서정성의 실현이 시의 정감을 풍부하게 한다. 동시에 내면의 영역 표시를 ‘문’으로 상징한 것은 평이하지만, 역설적으로 ‘문이 없었’던 것에 닿아 있다. 평이한 진술 속에서 의미를 형상화해내는 솜씨가 돋보였다. 「윤곽」은 앞의 시와 같이 ‘나/너(당신)’의 관계성 속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결속의 상징은 “손”이자, 손이라는 윤곽을 가진 “열쇠”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당신”의 관계성을 깨고 타인의 “손”이 개입되는바, “녹은 자리가 예뻐서/ 당신이 또 손을 어루만지면// 너무 헐거워”와 같이, 너(당신)조차도 타자화되면서 꽉 쥔 열쇠의 윤곽은 점차 “헐거워”진다. “내 주머니에서 손이 사라지고// 주머니에 타인의 열쇠가 가득해졌다”라고 했을 때, 선택 불능의 홈만 깊게 파인다. 전체적으로 너(당신)는 마음으로 지어진 가상의 너이자 허구적 현실이다.

 

두 작품 모두 장단점이 있고, 비중이 엇비슷하다. 「문」에서는 ‘나/너’의 단순한 도식이, 「윤곽」에서는 일부 어눌한 표현이 걸린다. 논의 끝에 「윤곽」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 시의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시상의 안정적인 전개와 동봉한 작품에서 보이는 상징성의 구축 등에서 믿음이 간 것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아깝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분발을 부탁드리며 다음 해를 기약하기로 한다.

 

- 심사위원 : 곽재구 · 염창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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