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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을 수 없는 가만히 동호회 외 6/ 변윤제

 

 

가만히 멈춰라.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시작된 동호회.

 

가만히 멈추는 건 무엇인가요 멈추는 것과 가만히 멈춤은 무슨 차이일까요.

먼지떨이를 쓸어내리며 생각했습니다.

수백 갈래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고민했습니다. 먼지떨이로 사람을 때리면 회초리가 되고요. 먼지떨이로 반찬을 집으면 젓가락이 되는데.

가만히 멈추면 가만히가 무엇이 되지요?

 

요를 펴면서도 생각했어요.

이불로 나를 돌돌 말아 쥐는 사람아. 김밥 놀이를 시키며 내 숨을 사라지게 하는 사람아. 어머나.

오이의 기분은 희박하구나? 그래서 안쪽이 창백하구나.

 

그대여.

내게 가만히를 명령한 그대야말로 가만히의 명수.

타르트를 파는 저 세탁소를 보아요.

가루가 떨어져요. 옷걸이엔 밀가루 포대가 잔뜩 걸려 있답니다. 세제 대신 흰 가루 쏟아지고.

 

왜 우리는 항상 가는 곳만 가야 하나요?

이 세탁소에 온 손님은 아무도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새하얀 건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당신만이 매일 저 세탁소에 옷을 맡겨요. 검고 푸른 옷마저 희게 만드는 저 세탁소를.

완벽한 하얀색을.

가만히는 그렇게 꾸준한 일. 늘 하는 것을 늘상 반복하는 일. 그런데 제게도 가만히라니요?

 

가만히를 일생 기르면서 가만히를 가만히 가르치는 당신.

제자리에 멈춰 돌아가는 세탁기 군단.

 

진정한 의미의 세탁에 대해.

당신은 알고 있었고.

당신이 찾아온 옷가지는 타르트가 되었고. 포도 향이 나고. 어떨 땐 빳빳한 쿠키의 감촉이 제 목젖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가만히 있어.

그 말이 제 유년을 하얗게 탈색하는데.

발버둥.

토악질. 새하얀 구토물의 겨울. 가만히 동호회가 발버둥으로 완성되고야 마는데.

 

가만히에게 편지를 씁니다.

가만히야.

나는 한 번도 너 같은 종류의 가만히는 원한 적 없어. 나 혼자만으로 충분한 가만히 동호회.

가만히 부르는 순간 가만히 있던 그림자가 떨어져나가고.

제 털을 가만히 기르고 있던 먼지떨이가 부서져버리고.

벽에 가만히 스며들고 있던 내 등이 내 척추에서 떨어져나가서.

사방이 저로 가득한.

동호회라기보다는 가만히 의회에 가까워집니다. 가만히로 구성된 제국일지도 모릅니다. 가만히 가만히 다가오는 비명에 대해.

가만히 나라의 폭군으로서 명령합니다.

 

꺼져.

가만히 꺼져.

세상 모두가 일제히 발버둥친다면, 진정한 가만히가 완성되는 것?

 

시속 칠백 킬로미터로 달아나는 가만히 국민들.

도저히.

도저히.

결정적으로 나는 가만히 있게 되는 겁니다.

 

코끼리가 없는 코끼리 유치원이나 마찬가지예요.

코끼리가 들어오는 순간 알게 되는 거죠.

우리가 무엇을 동경했는지.

육중한 네 다리와.

유치원을 기둥째 뿌리 뽑는 압도적인 코.

우리 귀여움이 바라왔던 파괴적이고 절대적인 힘.

 

그대여.

가만히 멈추라고요?

가만히야.

나는 나의 가만히를 끌어안습니다.

가만히의 기다란 코가 내 목을 살며시 조릅니다.

, 가만히.

그리하여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가만히 동호회.

 

 

 

 

최류자들

 

 

인도에서 온 아디타

 

냉장고에 넣은 여권은 기한이 줄어들지 않는다 믿는다. 아디타의 여권은 늘 차가운 곳에 케밥을 파는 그는 자신을 터키 사람이라 소개한다. 며칠째 팔리지 않는 양고기에 기름을 덧바르면서. 화전하는 걸 보면서. 주전자에서 끓고 있는 건 편지. 수증기가 올라오자 종이 접히는 소리. 당신 불법으로 온 거 맞잖아. 유통기한 지난 거라고. 배탈이 났다는 남자가 아디타의 뺨을 갈겼다. 두어 번 더 후려갈겼다. 노래를 부르며 양고기에 기름을 바르는 아디타. 기름기름. 고기고기.

 

안부의 나라

 

손님이 정말 많은 시장이었대요. 아무도 없어요. 어떤 날엔 제 가게에만 비가 내려요. 일인용 먹구름, 일인용 우울, 일인용 불법 체류, 일인용 범법자.

단 한 명도 앉힐 수 없는 비좁은 가게. 흰 앞치마를 입고 행주를 위로했어요. 돼지고기 전단지를 위로했고. 뚝뚝 떨어지는 기름방울을 위로했고. 위로를 위로했습니다.

제가 부친 돈은 잘 갔나요. 전화를 걸면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제 소식을 걱정하기엔 그곳이 너무 행복해져서. 찬란이 영영 안부가 되어서.

 

일자리 소개소의 창가

 

우표로 쓰기에 적합한 증명사진들. 시장 골목마다 내가 데려다놓은 체류자들. 휴지에 항공권을 그리고 선물해주었다. 오랫동안 비행기를 타고 온 한 사람은 앉아서 잠들었다. 힐을 벗겨주었고. 패딩을 벗겨주었고. 또각또각 그 사람의 구두가 그자를 버리고 가는 걸 보았다. 비행기는 대체로 어항 속을 날고 있다.

 

대필

 

아디타는 돈을 많이 벌어요. (받아 적는 척한다.) 어제와 그제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어요. 눈 내리는 식혜 속을 함께 거닐고 싶어요. (??) 오늘은 물론 항상 기분이 좋아요. 잘 안 보이던 눈도 제대로 보이고요 (그는 머뭇거린다.) 정말이에요. 제 걱정은 저를 걱정하는 사람들이에요.

 

소개소 창가엔 언제나 뿌연 안개. 제대로 쳐다보면 빼곡히 흰 우표가 붙은 창문. 걱정과 염려가 실질적으로 이곳의 눈을 가린다.

괜찮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입속에 어두운 복도가 보이고. 괜찮습니다. 다시 들려오는 소리 속에 복도에 구멍이 뚫리고. 그 복도를 오려내는 건 빛나는 가위. 편지를 부치지 않는다.

 

유통기한

 

어느 날 세계지도가 그려진 거울이 배달되어왔다. 지우개로 가장 먼 나라부터 지우기 시작했다. 한 체류자가 그 거울을 냉장고에 집어넣으려 하는 것을 보았다. 말리지 않았다. 그들이 안타깝게 여겨질 때 그들을 더욱 이용한다.

 

 

 

 

기분의 중력과 부력

 

 

혀를 질끈 깨물면 햇살의 방향이 달라지고

좋아

좋구나, 라고 발음하는 일만으로 기분에 부력이 돈다

정신병원에 갇혔던 스무 살 병상이 꼬리 치며 사라지는 뒷모습

 

그때, 꼬리는 의지랑 무관하게 헤엄쳤다

몸통이 꼬리에 매달려

수많은 물속을 여행 다녔지, 포식자를 피해 온 가족이 도망간 외할머니의 수조, 쉬는 시간이면 몰려와 날 때리는 물고기들, 어항을 빙빙 도는 정신병에 걸렸던 스무 살 폐쇄병동, 나를 둘러싼 부모의 동공, 그 물살과, 지느러미 사이로, 힘차게 헤엄쳐 다녔지

꼬리 짓이 더욱 세게, 왜 나에게? 몸통의 의문과 꼬리의 운동은 먼 곳, 온몸이 경쾌한 리듬을 그리다가

 

어느 날 바라던 바처럼 땅으로 걸어올라와

두 팔, 두 다리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밤마다 창밖서 끈적이는 즙이 흘러들고

 

천장에 아가미가 달렸어, 어느새 주억거리는 소리 속

수없이 많은 비늘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그때의 몸을 걸어나갔고, 결국 꼬리에게, 왜 그랬어, 그런 여행을 왜 떠나게 했어, 파문이 되돌아오는 결 속

평범하게 잠이 들었지만

 

그러나 그날엔

커튼을 순식간에 젖힌 아침인데도

볕이 주춤거리며, 일렁거리며, 망설이는 파도처럼 밀려들었지

동틀녘 육지에 올라온 생선이

제 안의 초점을 조금씩 되찾는 모습을 보았듯이

 

이제 헤아릴 수 있어

물고기였던 사람의 기분엔 언제나 중력과 부력

 

침대에 누워 또 한번 혀를 깨무는 거야

그러면 침대 속 남아 있던 물결이 출렁거리고

좋은 게 뭔데? 까먹고 살면 안 돼? 그런 중얼거림도 꼬리 칠 수 있지

 

죽어가던 비늘이 태양을 향해 솟구치고, 보여

우릴 둘러싼 것 중 가장 강한 중력을 가진 저 별

태양 곁엔 늘 쏟아지는 비늘

눈부신 물결 속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등을 마주대고 잔 밤과, 그런데도 무사히 졸업하던 날의 기억, 강박당한 나를 둘러싼, 다정한 폐쇄병동 환자들, 어느새 꼬리가 그곳을 헤엄치고

잊고 있던 기분의 중력이 나를 계속 끌어당기면

 

아니야, 역시 오늘은 기분이 좋아

발음하며

날 뒤덮은 비늘을 하늘로 솟구치게 해

그들은 하늘에 침잠하고, 짙푸른 아침 물살의 색을 빚어내지

창공, 내 기억으로 출렁이는 수면

다시 혀를 질끈 깨물면

 

 

 

 

민트초코가 유행이라서

 

 

치약을 넣고 라면을 끓입니다

유행이라면 뭐든 해보고 싶으니까요

제겐 적당한 동질감이 필요할 뿐

치약에게도 따뜻함은 필요하지 않겠어요?

국물까지 마셔도 죽진 않을 거예요

한때 흰 국물 라면이 유행일 때도 있었잖아요

이 면을 마지막으로 저도 퇴장할게요

꿈이 생기고 말았잖아요

민트초코의 결정타를 날리겠다는 야심까지가,

 

라면을 들고 지하철에 탈 거예요

가스버너에 불을 지피고 역무원이 출동할 때까지

흰 연기 피어오르는 눈앞에서

도시 괴담처럼 살아남는 거죠

화가 날 때마다 저는 이를 닦던 사람

칫솔과 치약에게 성을 내던 사람

민트초코가 유행이라니

치약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가 온 게 고마울 따름

이제 위장은 잘 닦인 치아처럼 번쩍일 테고

참신하다는 말은 모욕적일 뿐

치약 라면이라 해서 칫솔을 들 필요는 없죠

논리적일 필요가 없는 곳에서

젓가락을 들고 치약 거품 속으로

하얀 구멍 구멍의 더 구멍 아래로

자꾸 그렇게 곁눈질하지 말아요

세상에 대한 안목이 생겨버릴 것 같잖아요?

한 가락도 나눠주지 않을 거예요

 

 

 

 

귀신고래의 마을

 

 

애초 증조모가 내게 맡긴 일은 고래의 귀지가 될 만한 파도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그녀와 같이 고래 귓속을 걸으면 천장의 선홍빛이 귀지에 내려앉고.

부스러기마다 불이 들어와 밤에도 사방이 어둡지 않았다.

 

고래 귓속에 무엇이 들어올 때마다 새로운 장소가 발견되곤 하였다.

씨앗이 닿아 초원이 된 고막.

귓바퀴 소용돌이를 하릴없이 걷자 트랙이 되었고.

그녀와 함께 그곳을 종일 걸으면 사지에 소용돌이 문양이 돋기도 했다.

 

나는 불이 들어온 귀지를 들고 고래의 외이도를 탐험했다. 파도 무늬 그려진 귀지.

처음엔 푸른빛이나, 점차 황금빛이 감도는.

혈색이 닿으면 핏줄아 돋는 그것에게.

내가 부스러기에 얼굴을 가까이 대면 두 볼에 붉은 기운이 선명해졌다.

 

광대 안쪽이 마그마가 흐르는 것처럼 뜨겁다가, 이내 온몸이 싸늘해졌다.

증조모는 그럴 때 내 목덜미를 낚아채 고래 귀 바깥으로 집어던졌다.

그 밖은 노을의 너머와 맞닿은 곳, 나는 지평선 아득한 곳에서 집까지 헤엄쳐왔다.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며 매타작이 쏟아지는 집.

지붕을 휘감은 넝쿨이 허름한 집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증조모를 만나고 왔단 얘기에 부모가 고개를 저으면.

그들 귀에서 귀지가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부모의 안쪽에도 누군가 걸어가고 있을까.

내가 아직 보지 못한 나의 아이라거나.

그들 귓속엔 회초리 소리가 몰아치는 숲. 칼날 서걱이는 정원이 있을지도 몰랐지만.

 

다만 그들의 귀지를 모아 고래 귓속에 데려가보고 싶었다.

그러면 고래는 어떻게 될까. 나를 받아들인 고래가 처음 만든 장소가 어디였을까.

기억나지 않는 그곳이 무척 궁금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귀지가 필요해졌다.

고래 귓속에서 증조모는 더 깊숙한 곳으로 걸어가고. 내 몸은 커져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늘었기에.

 

좁은 곳에 몸을 밀어넣을 때. 이런 소리가 들렸다.

겨울이 왔다. 고래 귀지에 꽃이 피는 계절이야.

이파리가 무성할 때. 고래는 숨을 거두고 대신 심해 깊숙한 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단다.

 

고래가 가라앉은 바다에 빛이 들어오리라 생각했다.

선홍빛이 유자형을 그리며 내려앉고. 물살이 불이 붙은 것처럼 환해질 때.

멀리서 보면 물결 사이 새로운 핏줄이 생긴 듯, 빛이 들어오리라고.

나는 더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고래 귓속으로 내 큰 몸을 힘껏 밀어넣었고.

 

 

 

 

알파카 부인의 안데스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아뇨, 전 주방세제가 다 떨어진 날에 태어났는데요. 행주를 비빌 때 나는 마찰음. 푸른 열 자국에서.

수세미에 불어터진 살갗이 벗겨질 때. 밑에 발굽이 보일 때에. 그릇 두드리면 과일 향 번지고.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챌 때.

 

이토록 목이 길고 귀는 쫑긋 서 있고. 침을 잘 뱉는 내가 누구인가를 마주볼 때.

핥으면 죽는 과일인데요. 먹어보겠어요. 그저 과일을 흉내낸 냄새. 눈을 감았다 뜨면.

 

어쩌면 부엌은 가짜들의 골목. 줄기가 자라버린 그릇. 사과 냄새 매달린 접시까지.

그러니 탄생이 가능합니다.

두 팔을 두 다리로. 온몸에 털이 자라고. 부엌의 바닥. 아니. 거의 맨틀이라 볼 수밖에 없는. 지옥이라 불러도 될 지하에서. 땅이 융기하면.

더 가능해지는 네 개의 다리.

 

사이에서 남미식 키친에 당도한다면. 얼룩을 지우고 있는 자. 얼룩을 사라지게 하는 자.

그러니까 불가능해지는 얼룩. 희미해지는. 투명이 되는 얼룩. 그것은 바로.

더욱더 오세요. 그게 나. 우리가 사람이었다고요? 그렇게 살았으면서도 그렇게 믿어요?

 

그런 말은 알파카나 줘버리라고요. 목젖 뒤에 거리가 있고 거기까지 넘어오세요. 오세요. 눈에서 연기를 뿜으며.

가능해지세요. 이 부엌은 골목의 봉우리. 솟아올라 도시를 산맥으로 만들 정상. 능선을 잇댄다면. 당신의 어깨 곁에.

우리들의 모든 손목 능선에. 이 능선이 가닿는다면.

 

식칼을 쓰며 나는 손을 베였습니다. 사실 안 쓸 때도 베였습니다. 당신을 마주볼 때.

극장에서. 거리에서. 동사무소. 뒷골목에서. 카페에서. 개가 짖는 노을 옆에서 꽃무늬 담벼락과 들쳐지는 바지와.

막말을 내뱉는 택시와 식당에서. 곁과 곁.

물에도 날이 달린 이 도시에서. 당신은 왜 그렇게 목이 긴가요? 침을 왜 뱉나요? 왜 그렇게 우나요?

나의 털 속으로. 서슴없이 파고든 무수한 손가락.

 

이런 건 안 좋은 습관이라니까. 깨끗하게 부엌을 관리해야지.

 

퉤퉤- 이 침 뱉기는 설거지를 위해 쓰입니다. 뱉는 소리와 함께 쓰레기봉투 벗겨지고. 내가 알파카가 아니라면?

아닌 거죠, .

다시 퉤, 소리에 맞춰 씻겨나가는 것. 내 방식대로 깨끗해지는 것.

 

* 세사르 바예호

 

 

 

 

망고가 아닌 모든 이유

 

 

망고를 태운 부드러운 재.

칠흑의 가루 곁에 누워 생각한다.

 

세상의 어떤 별은 망고에 매달려 그대로 과육의 색이 되지만. 그 빛이 과일의 유일한 색인 것처럼 한사코 맺혀 있지만.

 

태웠을 때는 검구나.

태양이 어떻게 끝날지 알 것도 같다. 이건 우주 한 알의 색.

 

귓속에 어두운 설탕이 쏟아진다. 한 번도 닿은 적 없지만, 영원히 오고간 어떤 지옥이.

 

검은색. 오히려 남국의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적도 아래. 혀를 내밀면 자오선 녹아내리고. 소금기와 물빛. 혀뿌리부터 옮겨 적히는.

 

바다 밑엔 늘 몇 점의 어둠이 가라앉아 있다. 내 머릿속 꼭 세 개나 네 개 이상은 들어 있는 누군가의 해골처럼.

그때 나의 기분은,

두통약이 밀려들어올 때 내 두통의 마음. 백사장에 닿아 꺼져가는 포말의 심경.

망고를 온 가지에 매달고 썩히는 나무를 본 적도 있지. 지나치게 익은 과실은 뚝뚝 물을 흘리고.

처음 보는 종의 개미떼는 항문이 노랗게 젖어 있다. 줄지어 잇닿는 행렬은 마치 벌레가 되었다고 할 수밖에.

 

버켄스탁으로 긴 줄을 짓밟을 때. 저마다 다른 명도로 빛나는 솜털만큼의 볕이.

바삭바삭 부서질 때.

 

심장은 뛰고. 두근거림에 맞춰 몸에서 무언가 새어 나왔다. 파도처럼 흩어지는 벌레떼.

그때 벌레는 부드러운 물. 그래. 과육의 성질.

 

망칠수록 익어가는 부위는 어디에나 있었어.

망고 나무가 내 정수리에 자신의 물을 흘리고 있을 때. 순간 달콤해지는 고민들에게.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머리칼 한 올 한 올 타들어가는 게 느껴지고 달콤하고 유려한 재가 되어갈 때.

두피마저 부드럽고 따뜻한 재로 변해갈 때.

 

그건 내가 내 생각들에게 적어 내린 답장.

결심이라 말하진 않겠다.

평범한 사람의 불행이 내게 닿지 못한다는 것. 평범한 사람의 행복도 결코 내가 맛볼 수 없다는 얘기.

머릿속엔 온통 망고 굴러가는 소리. 나 자신이 타오르는 한 그루 망고 나무 일 적에. 이건 망고가 아니어야 하는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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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 임유영

 

모자 하나가 멀리 호수 위에 둥둥 떠 있는 걸 보았다. 가벼운 짚으로 만든 모자 같았다. 크기는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팽이 크지 않아 보였다. 리본이나 꽃 장식도 없었다. 끈이 달렸는지 모르겠다. 크만큼 시력이 좋지는 않았다. 아케이드의 마네킹 위에 모자가 얹혀 있으면 나는 그것들을 약간 두려워하며 지나친다. 모자는 사람을 상상하게 만든다. 특히 누군가의 머리를. 머리 중에서도 이마를, 땀이 맺힌 이마. 주름이 잔뜩 진 이마. 검버섯이 가득한 이마. 이것은 뙤약볕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내 조모의 이마. 조모께서는 결코 모자를 쓰지 않으셨다. 그것이 얼마나 여성답지 못한 일인지에 대해 사람들은 수근거렸지만, 조모는 개의치 않으셨다. 옅은 이맛빛 잔털로 살짝 덮임 조그만 이마. 이건 내 조카의 것이다. 조카의 머리통은 덜 여문 배를 억지로 나무에서 따온 것처럼 생겼다. 그애는 늘 머리에 꼭 맞는 모자를 쓰고 외출한다. 우리 가족이 마지막으로 조모님을 모시고 이 호숫가에 온 것은 이십여 년 전이다. 조식을 마친 뒤 온 가족이 조모님을 부축해 가벼운 산책을 나섰다. 호숫가로 밀려온 물이 뭍에 닿을 때마다 흩어지고 다시 밀려갔다. 조모님이 중얼거리셨다. 바다......바다......바다...... 우리 중 누구도 그것이 파도가 아니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아침

 

오년 전 나는 호수에 한 번 뛰어들었다. 아무 준비 없이 훌쩍 뛰어내렸다. 출렁다리는 출렁거렸고, 내가 뛰어내리거나. 말거나.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코를 꼭 쥐고, 눈을 감고, 다른 한 손 끝과 양발 끝을 힘주어 모으던 짧은 순간에, 어, 이건 제대로가 아닌데, 생각했고,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는 문장은 다시는 실제로 떠올리고 싶지 않다. 입고 있던 흰색 반바지와 베이지색 티셔츠 대신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휴양지의 병원 응급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지나치게 격정적인 바이올린 연주.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고 머리가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지끈거렸고. 다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을 끔벅. 감았다 뜰 때마다 보이는 흰 것들. 그것들은 긴 벌레처럼 움직였다. 호수에 사는 커다란 기생충이 내 눈알 속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나를 발견했다는. 얼굴이 새카만 남자가 멀리서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크게 웃었다. 박수를 짝, 짝, 짝 치더니 주먹을 쥐고 허공을 흔들다가. 기지개를 켜며 뒤돌아 떠났다. 마치 아주 대단한 일을 완료한 사람처럼. 자신이 한 일에 흡족한 듯 보였다. 그가 떠나고 내 몸에 커다란 기저귀가 채워진 걸 알아차렸다. 더듬어보니 탐폰이 없었다. 나는 아직 그것을 제거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저희도 시스템이라는 게 있다고, 무뚝뚝한 간호사는 반복할 뿐이었다.

 

 

 

 

아침

 

  새 아이보리 비누를 뜯어 세수했다. 가방에서 튼튼한 주머니 두 개가 달린 푸른 면직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양 소매 끝에 자개로 만든 단추가 세 개씩, 등뒤에 두 개가 달려 있는 옷이다. 단춧구멍이 너무 작아 끼울 때마다 고생스러웠다. 그러니 풀어지지도 않겠지. 누가 일부러 잡아 뜯지 않는 이상. 양말은 연회색 실크 양말을 가져왔다. 검은 구두는 어젯밤 미리 닦아두었다. 구두가 푹 젖을 생각에 조금 울적해졌었다. 비 오는 날엔 결코 신지 않았던 양가죽 구두.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비싼 구두. 졸업식에도, 처음 피어노 연주를 들으러간 공연장에도, 부유하지만 엄청나게 부자는 아닌 친구들을 만났던 시내의 식당에도 신고 갔던 것. 유치한 장식은 없지만 은근히 굽이 높은 구두. 굽의 바깥쪽마다 색이 열게 닳았다. 굽은 두 번 갈았다. 왼쪽보다는 오른쪽이 더 빨리 닳곤 했다. 구두방에 갈 적마다 멋쩍었다. 나는 오른쪽으로 더 기울었답니다. 혹은, 저는 왼쪽으로 더 기울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오른쪽으로 기울었던 중 만났던 사람들. 왼쪽으로 스쳐지나갔을 모르는 사람들. 사람들? 말하고 싶지 않다. 고백하고 싶지 않다. 최종 끝. 끝의 끝으로 간다. 가고 말 것이다.

  거울 속에 푸른 옷을 입은 여자가 서 있다. 긴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고. 나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게 만들고자 했던, 아무 의미를 담지 않고자 했던, 저 갈색 눈동자. 밤의 겉껍질을 둥글게 오려붙인 듯한. 비밀을 간직하고자 했던. 두 개의 논. 죽은 사람에게도 비밀이 있을까? 죽음은 비밀일까? 폭로일까?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시체, 시체에겐 비밀이 없다. 시체는 폭로일 거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폭로. 아무래도 머리는 하나로 묶는 것이 좋겠다. 발견될 때를 대비하면 그쪽이 낫다.

 

 

 

 

 

아침

 

오믈렛. 한데 섞인 흰자와 노른자의 중립적인 맛. 사각사각 씹히며 풋내를 살짝 풍기는 피망의 향기. 아주 잘게 썰린 햄의 질감과......버터. 강렬한 버터의 향기. 불에 충분히 달궈진 버터와 부드러운 달걀의 신비로운 조화. 신적인 것. 강렬한 것. 달걀과 불과 기름, 약간의 소금과 후추. 그러나 어떤 비법에는 아주 적은 양의 설탕이 포함되기도 하는데, 마치 독약의 이로운 활용법처럼. 설탕이 독이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순수한 설탕의 혐오자들은 의사가 아니라 알콜중독자들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단맛을 싫어하다못해 거기에 반대하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달콤한 것은 오직 술이면 족하다는 듯이. 그러나 그들은 모르지. 아침의 오믈렛에, 짭짤한 비스킷에, 심지어 튀김옷 반죽에도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설탕. 설탕을 잽싸게 뿌려 넣는 어떤 사람의 손. 아침을 만드는 사람의 손. 안주를 만드는 손. 여자. 여자의 손. 묶인. 찔린. 찢긴. 손. 희고 검고 누럼 세계의 손. 여자가 가진 손. 레이디스 핑거. 쿠기의 이름. 알코올 중독자 중에도 여자가 많은데 누군가 그들에겐 각별히 키친 드링커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내 위장을 들여다볼 검사관은 술을 아주 많이 마시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알코올 중독자라면 더할 나위 없다.

 

 

 

 

 

아침

 

간밤에 바에서 가벼운 프로세코를 한 병 주문했다. 산듯하고 청량했다. 천천히  두 잔을 마신 뒤에 아페롤과 칵테일 글라스를 청했다. 글라스에 아페롤을 약간 따르고 거기에 프로세코를 가득 채웠다.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초여름의 휴영지에 잘 어울리는 선택이다. 프로세코가 다 떨어져서 우아한 동작을 즐겁게 감상했다. 샴페인 잔을 들고 테라스에 나가니 호숫가의 야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재스민 향기와 잔디 깎은 냄새, 물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검은 호수 위로 잔물결이 부서진 샹들리에처럼 반짝였다. 완벽한 밤이었다. 체라스 난간에 올라가 그대로 떨어지고픈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충동을 억누르느라 애쓰던 중 내가 취했음을 깨달았다. 옷깃을 여미고, 글라스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종업원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자 나의 갈색 트렁크와 푸른 원피스, 잘 닦아둔 검은 구두가 그대로 잘 놓여 있었다. 창밖에서는 아직도 호수의 물결이 반짝이고 있었기에 나는 책상 위의 펜을 집어 글을 쓸 뻔했다. "나는 매번 무거운 문을 밀면서 왔습니다......" 지금 내 앞에는 빈 종이가 한 장 있을 따름이다.

 

 

 

 

 

 

아침

 

  손목시계를 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시계는 내가 가진 가장 무거운 금속일 것이다. 얼핏 보면 번쩍이는 금팔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황동으로 만들어 저미도록 얇은 금박을 입힌 시계다. 나는 과시적인 장신구를 좋아하지 않지만 유행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는다. 크고 빛나는 것을 목, 귀, 손가락에 전부 휘감는 대신 팔목에 하나 정도 걸기. 이것이 내가 유행을 따르는 방식이다. 치장의 욕구는 내가 잘 조절해온 충동의 하나다. 갑싼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다. 죽임당한 여자 대신 죽음을 선택한 여자로 보였으면 좋겠다. 이상한 일이지. 장신구를 사는 데엔 돈이 든다. 고귀한 여자는 돈을 쓰지 않는가? 성모님이라면 돈을 쓰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성모상은 얼마나 화려한가! 성모님도 죽은 여자라고 볼 수 있을까? 죽어도 죽지 않는 여자라고 해야 하나. 나도 집에 성모상과 초로 꾸민 간이 제단을 갖추고 있지만, 이제 초를 밝히고 성모께 기도를 드리는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깊은 강바닥에서 댐을 만드는 수부들은 납덩이로 만든 허리띠를 찬다고 한다. 시계를 찬들, 허리띠를 찬들, 내게 손목이나 허리가 남아 있으려나.

 

 

 

 

 

 

아침

 

  멀리서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린다. 빨강, 파랑, 노랑 색색의 공들이 높이 떠오르고 떨어지고, 아이들은 얕은 물에서 놀고 어른들은 호숫가에서 일광욕을 한다. 그토록 조용히던 밤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쏟아내다니. 그래 나는 해가 뜨지 않는 아침을 찾으려 이곳에 왔지. 숱한, 헛된 밤을 따라온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웃는 소리를 듣는다. 양산을 쓴 숙녀들의 속삭임도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걷는다. 깨끗하고 예쁜 조약돌을 찾아 주머니에 넣는다.

 

 

 

 

 

 

아침

 

나에 관해서라면 아무것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곧 누군가는 알아차려 주리라. 얼마나 지나야 할까? 누군가. 누구일까? 여러 명일까? 단 한 사람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남자일 것 같다. 그이는 뜨내기 순정일까. 별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젊은 남자일까. 물론 산전수전 다 겪었을 수도 있지. 상관없다. 아니, 상관있다. 나는 죽은 자의 얼굴을 하고 있겠지. 죽은 장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죽은 자의 얼굴이겠지. 틀림없이. 그는 눈썹을 높이 들어올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을 꿀꺽 삼킬까. 경험이 많은 중년의 경감일지도 몰라. 수영을 잘하는 어린 아이라면 어쩌지? 엄마 심부름을 끝내고 한달음에 호숫가로 달려와 옷을 벗어던지고 날씬한 전갱이처럼 헤엄치던 아이라면 어저지. 그 애가 여자애라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달려! 전속력으로 뛰어가렴. 가가운 건물 쪽으로. 옷은 되도록 주워 입고. 네가 발견한 끔찍한 광경을 가장 먼저 만나는 어른에게 알리렴. 너는 울거나, 소리 지르거나, 주저앉을 지도 모른다. 괜찮아. 털어놓은 다음엔 되도록 빨리 잊어. 전부 잊어버려. 친구들에게 너의 무용담을 자랑하며 떠벌려도 좋다. 그럼 더 빨리 희미해지겠지. 이보다 더 무섭게 만들 수는 없을 거야. 걱정 마. 금찍한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고, 모두 잊어버려.

 

 

 

 

 

 

차회 예고

 

다음 편에서도 주인공은 죽지 않고

이야기는 계속된다는 예고,

대신 조연 중 누군가 희생될지도 모른다.

다음 편에서 나는 손수건을 꼭 쥐고 울 준비를 하고.

울고 난 뒤의 지루함을 버틸 채비를

과자를 준비한다. 우유를 따른다.

다음 편의 그다음 편에도

예고가 있나? 이야기는 계속

되나? 여보세요.

가다듬은 목소리로 자,

 

왼손 역지 끝마디에

새카만 점이 한 개 생겼습니다.

구두점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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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절 하얀 꿈


그 절에서는 

도자기 그릇을 팔았다


나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데

그곳에 가면 살 수 있을 거라고들 했다


비 내리고 천둥 치던 날

절에 갔다


먼 길을 걸어온

손과 발에선

흙냄새가 난다


내가 찾고 있는 그것은 조용하고 둥글다 그것은 초록색과 파란색을 적당히 섞어놓은 듯한 색을 띤다 그것은 불타오르며 깨진다 그것은 눈을 감는다 침묵한다 그것은 알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둥그런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자주 형태를 바꾸고 색깔을 나무를 더 기울게 만드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이런 문장을 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눈을 떠보니 텅 빈 방이었고


죽지 않고 도착해서 기뻤다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곧 내가 찾는 것을

찾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고


밖에서는 여럿의 사람들이

나직이 이야기하는 소리


그들은 즐겁다

처음 들어보는 이국의 언어들


이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니구나


겨울이 도착하고 있다

얼었다 녹고

다시 얼어버리는 눈

미끄러지는 사람들


나는 순간 황홀해진다

눈발 속에

홀로 절이 서 있다


하양 문과 검은 지붕

검은 지붕 위 쌓여가는

햐얀 눈

정직한 세상

고요하고 무궁하게



내가 찾는 것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이 되는 그것은 불빛 그것은 굴러가는 토마토 그것은 이국의 사람들이 마시는 뜨거운 홍차 그것은 향기 그것은 허기 그것은 치통 그것은 늙은 개의 얼굴 그것은 울리지 않는 전화벨 그것에 손을 가져가면 순간 사정없이 깨어져


무수히 많은 파편들은 

흐르고 넘어지고 흐르고 슬프고 흐른 채 나에게 도달한다

눈을 질끈 감는다


다시 빈방에 남겨져 있다


인기척이 들리고

흙냄새가 가득한






순무는 순무로서만


너른 들판을 지나고 있었다. 87년식 오토 밴의 갖은 소음과 진동 속에서 우리는 순무에 대해 말했다. 난 순무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 그는 순무를 좋아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만큼 순무에 대해 잘 알진 못했다. 나는 그에게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순무를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사랑할 수도 있을 정도라고 말했는데 나는 좋아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은 아주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순무와 함께 온천을 가거나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을 들으며 우유 거품이 올라간 차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나는 순무의 적정 입수 온도는 63도이며 그 이상은 질겨진다는 것을 하나의 방정식으로 증명하는데 성공했고 그것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이라고 말한다. 그는 순무라면 뭐든 좋다고 한다. 질기든 맵든 삭아 있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순무를 찾기 위해 차를 멈추고 순무밭으로 들어갔다. 그때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앞다투어 등장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순무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휩쓸려 우리도 순무의 파란 머리를 쑥쑥 뽀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순무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이 순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자네들은 정말 아는 게 아무것도 없구만.


함께 쪼그려 앉은 아주머니들은 모두 혀를 찼다. 하지만 순무들은 우리의 손에 놓인 채 가만히 침묵만 할 뿐이었다. 그는 이것이 순무들이 기분이 좋다는 신호라고 속삭였지만 나는 순무의 속은 당최 모르는 거라며 침울한 표정으로 깍둑썰기를 하였다. 아주머니들은 작게 조각난 순무에게 고춧가루를 뿌리고 버무리더니 우리의 입 속에 넣어주었다. 아주머니들이 물었다. 아직도 모르겠냐고.


우리는 잇따라 입을 벌리며 더 달라 칭얼 댈 뿐이었다.


* 사뮈엘 베케트, <충분히>, <죽은-머리들/소멸자/다시 끝내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실패자들>







박태기나무아래서 벌어진 일


은영이와 찬영이로

다시는 함께 불리지 않는다


우리는 늘 영이었는데

생각은 서로 무한하다


그래서 무슨 생각 해, 하면

이인삼각으로 달리던 우리의 그림자


꼬여버린 다리 세개와

늘 앞서 있던 너의 어깨를


그리고 청기 백기 내려간

텅 빈 운동장에서 나는

단지 미안하다 했을 뿐인데


파벽돌처럼 딱딱하던 네 얼굴

참 예뻐서 갖고 싶었던 너의 치맛자락

끈 풀린 운동화 너의 지랄맞은 친구들까지


전부 다 폭발하던 그때 그 가을 하늘

나는 바닥에 엎드려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그때 그 달빛 아래

아이들이 떠나도 붉은 멍투성이의 나무 하나

잠시 숨죽이더니 계속 자라는 거 있


주렁주렁 홍채 같은 열매들이

사방에서 흔들리고


하지만 언제고 영아

네가 말라비틀어진 내 아래를 지나간다면


그땐 겨울 지나 봄일 것만 같고

나도 초록을 피울 수 있을 것만 같고


찬영이와 은영이로

운동장은 가득할 것만 같고

그래도 나는 영이고

영아, 나는 너 다 이해해


그러니 영아, 계속 달려

나 여기서 기다릴께 혼자 꽃피울게


옛날 일은 다 잊었는데

누군가 소원을 물어봐


영아, 기억나지 않는 소원이란

얼마나 오래된 걸까







마당엔 어른들이 모여 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솥을 들여다본다 솥은 우리 가문의 자랑 큰할머니와 할머니와 어머니는 솥에서 태어났다 이 모든 솥뚜껑에 맞아 죽었다 언니는 솥 아래서 불타 연기가 되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솥에 누군가를 넣고 누군가를 꺼내며 누군가는 솥을 걱정한다 솥에 들어갈 사람이 점점 부족해 누군가 내게 너는 주워온 게 분명하다고 한다


검은 솥을 들여다보면 아무리 채워도 넘치지 않는 검은 물이 있다 그 속엔 무엇이 있길래 솥은 한없이 검은가 나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쓰지 않는다 솥이 없는 하루에 대해 쓴다 솥에서 유래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쓴다 마당을 둘러싼 담장 밖에 대해 쓴다 큰할머니와 할머니와 엄마와 이모와 언니가 아닌 것들에 대해 쓴다


계속 쓴다고 되니


죽은 줄 알았던 언니가 늙은 배롱나무를 들여다본다 나무 아래서 고양이가 죽은 제 새끼를 핥고 있다 언니는 죽기 너무 아까운 미소를 짓고 있다 살아 있는 고양이는 이미 죽은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군가가 이제 그만 솥을 치우자고 한다 그는 이제 곧 붙잡혀 솥에 들어갈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


쓰지 못한다 나는 솥에서 태어나 솥을 맴돌며 솥으로 돌아갈 사람이고 솥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이고 결국 백지에 불을 붙여 솥에 던져 넣게 될 사람이다 연기로 가득해 경보소리가 울리고 어른들이 도망가면 그 뒷모습을 지켜보게 될 사람이다 나는 솥의 자랑일 것이다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읽던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의 유일한 결말은 아니니까


가장 많은 미움을 쌌던 인물처럼

나는 징검다리를 건넜다


개울에 빠져 죽었다는 그와는 달리;

반대편에 잘 도착했는데


돌아보니 사방이 꽁꽁 얼어 있었고

그애는 죽었겠구나


죽은 이를 미워하던 사람들이

모여 흐르는 땀을 연신 닦다가


미워하던 마음이 사라진

텅 빈 구멍을 들여다본다


그것은 검고 아득해서

바닥이 보이고


돌맹이를 던져볼가


아서라, 죽은 이는 다시 부르는 게 아니야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찰나에도

두부는 아주 평화롭게 구워진다


이것은 소설일까 아닐까


고개를 들면 온통 하연 창밖과

하얗게 뒤덮인 사람들이 오고가는 풍경


모든 것이 끝나도 

어떤 마음은 계속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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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 


난 웃는 입이 없으니까 조용히 흘러내리지

사람들이 웅덩이를 밟고 지나가

더 아프려고 밥도 꼬박고박 먹고 알약도 먹어

물처럼 얼었다 녹았다 반복되는 하루

친구라도 만들어야 할까? 우동 먹다 고민을 하네

무서운 별명이라도 빨리 생겼으면 좋겠다


약 먹고 졸린 의자처럼 찌그덕삐그덕 걷고 있는데

사람들은 화가 나면 의자부터 집어던지네

난 뾰족하게 웃는 모서리가 돼야지

살아본 적 없는 내 미래를 누가 부러뜨렸니!

약국 가서 망가진 얼굴이나 치장해야지

뒤뚱뒤뚱 못 걸어야지


난 은밀한 데가 조금씩 커지고 있어

몸은 축축해 곰팡이가 넘치는 벽이 되려고 해

사람들이 깨트리기도 전에

계란프라이처럼 하루가 누렇게 흘러내리고

탱탱하게 익어가는 구름들아 안녕

누가 좀 만져주면 좋겠지만


뚱하게 걷다보면 장대비가 내리고

집에 뛰어들어가도 계속 비를 맞는다


터진 수도관을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 난 자구 흘러넘치는데 바닥을 닦아낼 손이 안 보이는데


갈 데가 없어 혼자 미끄럼틀을 타면

곁을 지나가던 어깨들이 뭉툭 잘려나가지

떨어진 난, 공처럼 어디로 튈 지 모르겠지만







뾰족한 지붕들이 눈을 찌르고 귀마개를 뺏더니 아무도 나한테 말을 안 걸고


세면대 속 출렁이는 비명을 싯어내자

앞니가 두 개나 달아난 내가 뚱하니 서 있네

누구한테 자꾸 털리고 다니니?

내가 나를 털었는데 어젯밤에 발작이 있었거든요

더러워진 손바닥과 구린내 나는 발가락을

우리집 마녀에게 내민다

젖꼭지 캄캄한 엄마가 냄새를 맡고 뛰쳐나와

불심검문처럼 내 몸을 구석구석 더듬다

내일쯤 잡아먹으면 끝내주겠지?

먼지 쌓인 악몽이 내 피를 한 차례 휩쓸다 간다

생각이 엉킬 때마다 머리카락은 무서운 속도로 자라고

검은 수초가 되어 발목을 넘어뜨리고

고무줄처럼 질긴 얼굴을 누가 잡아당기면

늘어나고 찝지기는 나의 일상들

불안을 쪼그맣게 오려서 알록달록 꾸민다

미모를 갱신한 내가 약국으로 놀러간다

내 인생 하류를 통과하는

소화제를 한 움큼씩 집어삼키면

우와 시원하다! 몸에 찍힌 발자국들이 욱신거리고

눈 코 입 깨진 자리마다 후후 불면서

하트 모양 스티커를 붙이면 자신감이 생긴다

예쁜 건 내 잘못이에요!

열등한 건 더 열등한 것들을 만나 해결하라고

화장실 물을 시원하게 내려주면

가난하고 뻔뻔한 걸 낳아놓고

미역국을 사발로 퍼먹은 게 누구더라?

마녀에게 빠진 이를 드러내며 비웃어야지

굴러다니는 깡통처럼 신나게 밑바닥을 보여줘야지







뒤에서 오는 여름


여러 방향으로 꺾이는 의자에서

책을 읽는다


흔들리는 풍경이 다가오는데


여름 안에서 나 혼자 걷고 있었다 여름이 무성하게 이파리를 뿜어내고 그늘을 만든다 삐뚤빼뚤 자라난 내가 징그럽게 언덕을 뒤덮고


생각을 길게 이어서 하면

펼쳐놓은 들판이 넘어간다 웃음과 비명으로 찝겨 있었다 이파리는 떨면서 바닥에 엎드려 있고, 문장들이 따라붙는 건 모르는 사람의 불행들이지 남의 고통은 문장에게 최고로 인기가 많고


글시들은 다정한데

감당할 수 없어서 조금 미쳐 있었고


살기 이해 나는


줄곧 상처 입고 있었다 문장을 오래 들여다보면 징그러웠다 겹겹의 헨즈들로 징그러운 내부를 읽어 낼 수 있었다 무서울 게 없었다 두려움을 지나칠 수 있는 슬픔이 더 켜져버려서


뭉개진 새를 곳곳에 심어 두었다


더는 혼자서 버티지 않아도 돼, 라는 말을 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오래 버려졌던 거니 서늘하게 등 뒤가 젖어 있던 날


지나오던 길목에서 죽은 새 한 마리를 본다


익숙한 문장은 겪어본 일들이었다







프랑켐슈타인의 인기는 날마다 치솟고 너희는 약 맛을 좀 아니


나사들이 미릿속을 맴돌고 있어

불안이 피부 위로 돋아났어


그림자를 주워 입고 노을을 구경하는데

나는 왜 멀쩡한 걸까?


무서운 말도 장난처럼 찍찍 내뱉을 줄 아는데 의사는 맨날 망가질 거래 조롱하는 입술처럼 젖꼭지가 점점 더 삐뚤어질 거며 나에 관한 어떤 얘기도 꺼내지 않는다면 뒤집힌 물고기처럼

밤낮으로 불안에 시달릴 거래


혀를 숙 내밀고 가로수에 매달려 지나가는 사람이나 깜짝 놀래키고 싶은데! 날개를 쫙 펼치고 찢어진 흉터처럼 날아다녀야지 시퍼런 가위처럼 살아있는 것들은 전부 오려내야지 목말라서 헐떡이는 사람을 목매고 싶게 만들어야지 켜놓은 가스불처럼 온 집안을 잿더미로 뒤덮어야지 앞만 보고 똑바로 걸어가도 삐뚤어지고


버텨야 할 중력이 내 인생을 흙탕물에 풍덩! 빠뜨리는데


더 추워지기 전에 나를 봉인하러 가야지 누가 베어간 콧대를 이어서 붙여야지 입은 왜 달린 건데? 거대한 감옥에 뚫려 있는 쪼글쪼글한 구멍이 무슨 소용인 건데? 갇혀 있던 소문만 새어나와 사방을 더럽히는데 수술대에 오르면 의사들은 링거 색이랑 오줌 색이랑 똑같다고 킬킬거리고 깨어나면 사람처럼 우스운 것들은 절대로 안 믿어야지! 겨울밤이 어두워져 사람이 사람을 닮아가는 줄도 모르고


번호표가 길어지는 병원 앞에서


회복해서 또 사는 게 무섭지도 않니? 알약은 어디서 녹고 있을까 눈을 떴는데도 난 아직 깨어날 줄 모르고 시체 냄새 나는 향수나 칙칙 뿌리고 놀러 가야지 아무나하고 사랑할 땐 흥청망청 뒤로 해야지 표정이 안 보이는 자세가 훨씬 아프고 재미있으니까 나보다 더 망가진 애들만 보면 심심하게 뒤가 간지러워


너덜너덜한 웃음이나 뒤집어쓰고

다 같이 모여서 수다나 떨래?







물 속에서


나는 쭉쭉 뻗어나갈 거야 해파리처럼 서너 토막 난 식물처럼 

목소리가 길게 자라고 있어


혀가 잘려나간 불장난을 앨범 속으서 끄집어낸다 종교를 버리고 밑바닥으로 도망치는 건 어때?


때수건으로 머릿속을 밀다 찜질방 문을 열면

문어처럼 불어터진 여자가 다리 건너 한 명씩 사내들을 끌어 안고 허벅지 살을 씹어댈지도 모르지

그 여자 발바닥에 침이라도 뱉으며

여편네야 밥은 언제 줄 거야? 냉장고 밑구멍 속으서 집어 삼키는 뻣뻣한 치모

계집애야 그건 네 아빠나 좋아했던 청춘이지 미역줄기가 아니란다 목이라도 매달고 싶은 거니?


나는 가위질을 잘하고

사람을 하고 싶지만


매일 밤 직장에서 튀어나와 젖꼭지를 빨아대는 뱀을

엄마에게 빼앗기고 말았지


(흉터투성이 우연이 깡패 같은 우연이 내 거웃에게 떼인 돈이나 받으러 온다면 덜 지루하려나?)


벌겋게 달아오른 강철 팬티를 벗어던지고 목욕탕 문을 나서는데 브래지어도 깜박하고 안 했는데

소용돌이 물살처럼

하필 네 자지가 털털거리는 오토바이가

불가마 장수탕 앞에서 뒤집어지는 신기루란


오 분 뒤로 뒷걸음치는 입술

오 분 전에 발생한 사고들은 나를 물귀신으로 만들고


 어제도 그제도 한 달 전의 일도 오 분 앞에서 꼴까닥 자궁을 찝지고 말았잖아?(내 인생 흔적도 없이 달아나버린 보통명사들이 어때? 용수철을 심장에 박고 완급조절에 실패한 쾌감이지? 죽음보다 싱싱한 치욕이지? 몸밖으로 튕겨나간 너를 붙잡을 곳이 아무데도 없지? 억울해진 혀로 똥구멍을 긋고 달아나고 싶은데)


목소리는 가랑이를 벌린 채

우리에게 일용할 음부를 오르락내리락


(이제 그만 물속에서 슬그머니 놓친 척 해줘)


양칫물 위에서 발버둥치는

옛 애인의 자지는 잘라먹었어야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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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문학동네〉신인상 시 당선작_ 이방인(외4편) / 장혜령

                                                          심사위원 : 김경주, 김민정, 이원 (시인)

 

이방인 (외 4편)

 

   장혜령

 

 

   

빛은 잘 들어옵니까

 

이상하지.

세입자가 관리인에게, 그리고

우리가 죄수에게 묻는 질문이 동일하다는 것은

 

불 꺼진 독방의 내부는

누군가 두고 간

불펜 잉크처럼 캄캄하다는 거,

의도 없이도 흐른다는 거

 

처음 타본 비행기와

어깨가 기울어진 한 남자의 뒷모습

 

그의 휘파람을

존경한다고 교도소장은 말했다

크고 두터운 손으로, 아버지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바람은 불어옵니까

 

진주식당의 여자는 국수 대신

빨래를 솥에 넣었고

 

예수기도회의 붉은 자전거 옆에는

북경반점 오토바이가

 

모든 질문에

전학생의 시점으로

생각했지

 

경도와 위도 선상에서

초조해질 때마다

별들 사이에 있다는 건, 더 확고해졌으니까

 

동료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삼키는 연습을 하는

수배자처럼

 

배후가 없는 비밀이 몸속을 떠돌고

깡통 속엔

씹다 뱉은 성냥들이

붉게 차오르곤 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더 말할 것은 없습니까

 

들판 같은 책상 위로

캥거루 한 마리가 뛰어간다

 

빛은 잘 들어옵니까

바람은 불어옵니까

 

이상하지,가

둘 수 없는 것의 안부를 묻는 일

 

어디선가

새들의 농담이 들리고

 

그의 배후를 바라본 것은, 저 나무가 유일하다

 

 

 

눈의 손들

 

 

 

   내가 스물셋이었을 때, 남자는 서른둘이었다. 발을 심하게 다쳐 더 이상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느꼈을 때, 그 사람을 만났다. 남자는 무릎을 한쪽 발을 절고 있었다. 걷지 않는다 해서 고통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루에 몇 번씩 주사기로 내 발에서 물을 빼내는 일을 도와주었다. 우리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느 날 흩날리는 길 위에서 그는 내게 유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에겐 일본인 아내를 둔 아일랜드 친구가 있었다. 친구의 여자는 딸을 낳고, 아이에게 유키雪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이는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

 

   마치 눈처럼 사라졌어.

  그에게, 유키는 Snow와는 다른 단어였다. 그는 Snow를 눈으로, 유키라는 단어를 죽음과 아름다움 사이의 것으로 기억했다.

 

   부부는 유키가 죽은 몇 년 뒤, 아이를 가졌다. 아이는 유키와 같은 딸이었다. 딸이 자라서, 소녀가 되고도 그들은 유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소녀는 아빠를 따라 한 달에 한 번은 배를 타고 런던에 갔다. 역사시간에 가보지 못한 섬나라에 대해 배울 수 있었지만, 여전히 자기 몸의 나머지 반을 이루는 그곳이 궁금했다. 일주일에 한 번 일본어 세터에 갔다. 그곳에서 히라가나平假名를 읽었다. 일본어 교본 맨 앞에는 글자를 외우기 쉽도록 글자 하나마다, 그 음으로 시작되는 단어와 사진을 넣어둔 페이지들이 있었다.

 

   유키는 유ゆ로 시작하는 첫 단어였다. 사진은 눈의 고장이라 하는 니가타 현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진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별 표시를 따라 뒷장을 펼치면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을 쓴 곳’이라고 적혀 있었다.

                                                     *

   백 년 전, 눈의 고장으로 가는 기차 안이었다. 한 여자가 병든 애인의 머리칼을 하염없이 쓸어 넘겨주었다. 낮고 지극한 시선이 눈과 같았다. 건너편 좌석에 앉아, 차창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여행자가 있었다. 남자는 기차에서 내린 뒤에도 눈을 닮은 그 여자를 생각했다. 그는 눈을 닮은 여자를 생각하며 그의 여자를 만났다.

 

   여자의 등은 눈처럼 희었다. 남자는 다다미 바닥에 웅크린 여자의 목덜미를 보았다. 새벽녘에 여자의 붉어진 이유가 부끄러움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단단하게 뭉친 눈의 따뜻함에 대해 생각했다. 백지白紙라는 흰 손의 손등을, 뒤집어도 손등뿐인 흰 꽃잎의 배면을 생각했다.

                                                      *

   일본 사람들은 생각하다思う라는 단어로 사고하는 것과 느끼는 것 양쪽 모두를 표현했다. 그들에게는 이성으로 사물을 탐구하는 일과 가만히 아름다움을 감각하는 일이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불태웠고 가장 좋은 때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유키의 아빠는 일본 문화의 모순과 미의 개념에 관한 책을 썼다고 한다. 책을 쓰던 사월에 유키가 죽었다. 슬픔 속에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서문 마지막에 들어갈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꽃잎처럼 져간 사랑하는 딸을 보내며, 라고만 썼다. 그는, 딸을 보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 사람의 방식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꿈에서 그는 딸을 보았다. 꿈속의 계절은 겨울이었다. 겨울바람 때문에 딸의 손등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또 다른 꿈속에서 그는 꽃잎이라는 글씨가 담긴 술잔을 들고 있었다. 아내도 없이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데, ‘꽃잎’이란 글자를 건져낼 때 몸에서 종소리를 들었다.

                                                        *

   눈의 고장으로 가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쉽게 마주칠 수 있다.

   명동으로 가는 4호선 전철 안, 엄마가 무릎을 베고 누운 어린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는 오래전 그것을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잠든 아이의 얼굴 위로 투명한 흰빛이 떠올랐다.

 

 

 

 

 

 

   어젯밤 꿈속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시를 읽고 있었는데 그것의 마지막 행에는 ‘답설무흔踏雪無痕’이라 적혀 있었다. ‘그대는 발자국 없이 눈길을 가는가, 그대는 지워지기 위해 걸어가는가’ 내 문학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내게 시 안으로 들어가라 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전나무 가지 위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어디선가 새를 불러들이는 사내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가지에서 후드득 눈이 쏟아졌고 새가 날아올랐다. 시의 첫 연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선생은 말이 없었다. 나는 머지않아 나 자신이 두 번째 연의 첫 행임을 알았다.

 

   한 여자의 곁이었다

   여자는 새였다

   나의 왼편에 있었다

 

   여자의 날개를 뜯어

   어린 새들에게 먹였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나를 읽었다. 새의 흰 날개가 하늘을 채웠고 거대한 수정 하나가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소년이었고, 새는 속삭임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주위가 항아리 속처럼 어두워져갔다.

 

   낯선 여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을 발하는 꽃 아래 있었다. 그녀는 겹겹의 문門에 대해, 입구를 열면 다시 새로운 입구가 열리는 꽃의 내부에 대해 말했다. “새의 날개를 닮은, 고요히 물결치는 백白의 입구로 들어가라.” 그녀가 말했다. “그것이 너의 내부다. 너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은 희었고 내 앞에서 슬픔처럼 부드럽게 벌어지며 열렸다. 나는 걸었다. 빛의 계조階調를 따라 어두운 흰빛에서 밝은 흰빛으로, 점점 더 밝은 흰빛으로. 이마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문학선생을 바라보았다. ‘발자국 없이 눈길을 가는가, 지워지기 위해 걸어가는가’ 선생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이 희붐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선생은 내리는 눈 속에 서 있었다.

 

   눈을 떴을 때, 흰 작약 한 송이가 머리맡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물결의 말

 

 

 

그것은

물고기의 아가미 또는

지난밤에 깎은 사과 껍질

 

안쪽에서 만져진다

 

두꺼운 외투를 열어 보이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 생각했다

겨울에도 철 지난 얇은 옷을 고집하는

가난하고 또 우아한, 어떤 취향에 관해

 

그들이 오래된 만큼

내 생각도 오래도록 이어졌고

 

빌려온 책을 읽을 때마다

 

누군가 몸속에 잠깐 불을 켰다

여긴 누구였을까

 

물결처럼 밀려왔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잠든다

떨어진 모과처럼 여기저기 뒹굴며

 

같은 의미에서, 나는 이제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겨울, 청어와 모래, 작은 북과 캐스터네츠, 빗방울과 앵두와……

 

길을 잃을 때는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것의 목록을 적는다

 

실패가 거듭될 때,

매일 입술에서 닳아 없어지는

이름들처럼

걷잡을 수 없이 얇아질 때

그래서, 살고 있는 그것을 만질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사랑한다는 것,

흔들리는 한

모두 같은 물속일 거야

 

물결의 말이다

 

 

 

폴림니아 성시*

 

 

 

기억합니까

처음 페달을 밟고

혼자 앞으로 나가던 순간을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대답은 없고

룸미러에 매달려 흔들리던

작은 성상聖像

 

어머니에게로

누군가의 팔에 안겨

최초의 울음을 터뜨리기 위해

 

그는 달리고 있습니다

열대어의 알처럼

산란하며 어깨에 내려앉던 오후의 빛

아이들의 함성

펄럭이는

 

사이프러스를 닮은

연기 속으로 들어설 때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시간은 모든 서명을 지워버렸지요

 

어디에서 왔습니까

나는 도처에서 왔습니다 심야버스에서, 매일의 식탁에서

핀으로 나비의 날개를

고정하던, 빈 교실의 작은 책상으로부터

 

옮겨가기 위해

살았습니까

아니요 나는 결코…… 아무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했어요

 

어둠 속, 성호를 그으며

무릎을 꿇을 수밖에

손과 발을 묶어달라고 간청하는

꽃다발의

무력한 자세로

제각기 기도할 때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있어

 

흰 새는

날아오르고 있었지요

거대한 그물에 갇힌 형제들을

끌어가듯

한없이 느린 속도로

 

세계가

조금 전진한 것 같았습니다

 

 

————

* 차학경, 『딕테』

 

 

 

--------------------

장혜령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연출 전공)를 졸업했다.

팟캐스트〈네시이십분 라디오〉를 제작해왔다.

〈EBS 지식채널 e〉작가. ‘소셜리스트’ 리뷰어로 활동하고 있다.

 

 

 

                       —《문학동네》2017년 가을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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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인간 / 김정진

 

꿈에서 나는 꽃을 물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주변은 온통 제 몸을 날리는 것들로 가득하고 나도 중력을 거부한 이름들과 나란히 떠다니고 싶어집니다. 벼락을 맞은 나무의 키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나도 돌이켜 살고 싶어 죽은 나무 구멍에 머리를 들이밀고 숨을 쉬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삶을 뒤집은 건 내가 아니라 나무였고 나는 아직도 그 안에서 나던 향기를 생각하는 중입니다. 홀로 남은 나무마저 어느 순간 몸을 날리게 될까봐 나는 꽃이 떨어진 자리마다 우표를 붙여주었습니다. 말 못할 슬픔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이 식물로 다시 태어난다는데 또 다시 아프게 죽은 식물들은 무엇으로 태어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몇 달이 지나고 내 안에 여전히라고 부를 만한 방이 남아 있다면 죽은 나무 산 나무 그 방 안에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휘파람새는 꽃을 따려 손을 내미는 소년의 손가락을 물고 날아갑니다. 손가락을 잃은 소년은 자신의 손가락보다 새였던 꽃을 더 그리워하다 마침내는 제 손을 꽃피우고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얼마 전 늙은 코끼리 한 마리가 나무 밑에 몸을 뉘었고 코끼리는 시든 식물의 빛깔로 말라갔습니다. 나무는 코끼리를 먹어치우고 다시 걸음마를 연습하는 중입니다. 손가락을 문 새가 있어 휘파람으로 부르려는데 입을 틀어막는 섬뜩함에 놀라 잠에서 깨어보니 내가 물고 있는 꽃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낙엽들이 살을 베며 지나가고 이제 민들레를 불던 내 입에서도 향기가 납니다.

 

 

 

 

 

 

 

 

미러링

 

왼손잡이던 사람이 오른손잡이가 된 후에도

남아 있는 왼손의 흔적처럼

 

내가 싫어하던 여름은

네가 좋아하던 여름

이를테면

 

내가 해가 뜨기 전의 하늘이라면

너는 해가 진 후의 하늘

 

저녁일까 새벽일까

왼손 오른손 셈을 하다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던 구름들

옛사람들은 이것을 병아리 감별사처럼 구별했겠지

 

한 번도 왼손으로 써 본적 없는 사람이

왼손을 먼저 내밀기 시작했다면

그에겐 이제 오른손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될까

 

왼손만으로 내 목을 조르며

숨이 넘어가기 전 치솟는 쾌감에 한 번은

반쯤 사는 기분을 느낄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늘 높은 줄 모른 채

올려다보던 여름의 수심

정오와 자정 중 어느 것이 더 깊어?

해가 뜨기 전의 하늘과 해가 진 후의 하늘처럼 날아가는 외눈박이새의 활공

 

네가 밤이 되어갈 무렵 나는 새벽이 되다가

무분별도 하루이틀이라고 밤을 지새고도 두 눈에 비춰보던 양손

중앙정원을 반대 방향으로 걷는 두 사람이

중간에서 만나는 그 지점

 

서로 지나가던 순간이 있었다

해가 뜨기 전의 하늘은 세어본 적이 있는 마주침이고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

 

어제 벽에 붙어 있던 거미가 오늘도 그대로 있다

자신이 거미가 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어제는 만났지만 오늘은 만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그게 그거라고 말하는 너에게 그거는 그거고

이거는 이거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에 실패한다

 

구석이 점점 어두워져도 거미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거미가 되기 전의 삶을 떠올려보는 것일까 그와 삶을

바꿔치기한 무엇은 먼저 자욱한 실내에 엉거주춤 서 있을까

한 번을 바뀌지 않아도 적응하기 어려운 몸

네가 되어보는 상상을 하고 알코올이 되는 상상을 한다

 

오늘 자전거를 끌고 천변을 지나간 사람이 내일은 나타나지 않는다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인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줄이 내내 우리의 뒤로 늘어뜨려지고 잠시

뒤처진 사람의 발이 앞서간 사람의 것에 걸린다

그가 일으킨 바람이 사그라지기도 전

다른 바람이 와서 그것을 지우듯이

 

어제 벽에 붙어 있던 거미가 오늘은 안 보인다

그런 믿음을 갖는다

 

너의 그때가 나에겐 지금

거미줄에 걸린 나방이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날지 못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죽음을 예감하고 수많은 지금이 걸어온다

 

 

 

 

 

 

 

 

논픽션

 

중간까지 읽은 소설의 주인공이 남자라는 걸

소설의 중간까지 일고서야 알았다

일생이 절반에 이르기까지 여자였던 남자는

책장이 넘어가듯 단순하게 생을 바꿔버리는데

남자가 된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가사 없는 노래를 불러준다

 

새벽은 금세 저물어 첫차는 다가오고

 

그가 된 그녀는 그란 사람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파쇄기에 갈려버린 마음을 안고 금 하나를 넘지 못해 애만 태우다가

한 곡도 다 못 맺고서 동면을 간다

그녀였던 그는 그녀가 간 줄 모르고 이불을 개다

그날 아침 창밖으로 눈이 내리는 것을 보았다

 

쌓이기만 하고 녹지 않는 눈이었다

 

다시 펼쳐보아도 이불 속에 그녀는 없고

돌아갔어도 덮어쓰기 된 생이 끈 간 데 없어 여자였던 남자는

원래 남자였던 남자로 그녀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

모두가 떠났고 모두가 남겨진 소설에서

종종 그는 그녀를 떠올렸고 중간의 중간까지 읽은 소설의 주인공이

그인 줄로만 알았건만

덮고 나면 그마저도 흐릿해지는 오리무중의 폭설

감감한 마음을 만져보다가 네가 머리에 쌓인 것을 털며 들어온다

 

먼 사람들은 모두 잘 지내지 않으냐

 

 

 

 

 

 

 

 

 

목성

 

미안하지만 미안할 수 없는

무중력 속의 죄책감

목성에 살았더라면

지구를 두 개는 넣을 수 있는 눈을 갖고서

배가 아니라 섬 하나쯤 가라앉더라도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다

 

발음은 무뎌지고 역사는 두꺼워지겠지

시간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진다는 것

항상 벽에 기대어 길어지는 덩굴의 생존

기우는 해만큼 그림자 속 잎사귀는 점점 뾰족해진다

꼿꼿이 선 실어증 환자가 끝에

......해, 라는 말을 툭 떨어뜨릴 때

 

종소리가 사소해지는 것이 들립니까 더 사소해지고 사소해질 때까지

작고 작은 종이를 접는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이지 않는 종이를 손바닥 위에 얹으면

보인다 하늘 끝으로 날려보낸 수백 개의 연

뜨거운 물에 찬물을 조금씩 섞어 미지근한 물을 만들듯이

방 속의 방 속의 방 안으로 들어가야 겨우 실감할 수 있는

무중력의 포근한 질감이 있다

어떤 죄를 지어야 무거워질 수 있을까 무엇을 더

해야 무툭해질 수 있나

 

네게 산 위에 뜬 목성을 알려주며

더 이상의 후회를 없애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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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 홍지호


버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버리기 위해서 쓴다

쓰게 되면 버릴 것들이 생기니까

나의 사랑하는 자여

나는 사랑해서 너를 썼나

너를 쓰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나

나의 사랑하는 자여

나에게는 언제나 순서가 문제였지만

순서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오늘의 안식은 어제의 기념

계절은 바뀔 것이나

기념은 계속될 것이다

어제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날이므로

어제를 쓰기 위해

오늘은 계속 버려질 것이므로


사랑의 창조자여

내가 일요일과 월요일 중 어느 쪽이 한 주의 시작인가에 대해 골몰할 때

오늘은 지나가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올 것처럼

오늘이 온다


가끔 너는

버리기 위해 너를 썼냐고 물을 수 있다

그건 내가 너를 쓴 의도와 다른 것이지만

너는 그럴 수 있고

너는 물을 수 있지만 나는

대답해 줄 수 없다


나를 창조한 나의 피조물이여

나의 사랑하는 비문이여

너를 내가 썼다


내가 너를 썼다고 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 사랑하는 자여

문장에는

순서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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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문학동네 신인상 시부문 당선작] 구현우

 

 도그빌

 

 

  꿈에서 주운 개를 꿈 밖에서 키운다. 내가 먹는 밥을 먹인다. 내가 아는 곳으로 데려간다.

 

  발코니로 간 나의 개는 밑에서 올라오는 담배연기를 태연히 빨아들인다.

  그게 발코니의 냄새인 줄 안다.

  한강으로 간 나의 개는 낯선 두 아이가 공 하나로 웃고 우는 장면을 지켜본다.

  그게 가족인 줄 안다.

  세탁소로 간 나의 개는 모피코트를 벗어놓고 나온 여자를 따라간다.

  그게 마음인 줄 안다.

  현관 앞에 멈춘

  나의 개는

  문을 열어두어도 안에서 불러봐도 꼼짝없이 앉아 있다.

  주인과

  타인이

  그게 그건 줄 안다.

 

  언제 어딘가로 사라졌는데, 나는

  나의 개가 있었다는 것마저 잊어버린다.

  이전인지 이후인지 모르지만

 

  꿈에서 만난 개를 꿈에서 방치한다. 오줌을 뿌리며 따라오는 소리가 아직 뜻이 없는 낱말처럼 들린다.

 

  꿈 밖에서 나는 혼자 이인분의 요리를 먹는다.

 

  익숙하고도 익숙해지지 않는 도시를 걷다가

  나의 개를 닮은 개와

  나의 개를 하나도 안 닮은 개와

  개도 아닌데 개로 불리는 남녀노소가

  어디에나 있는 것을 본다.

 

  도시는 한꺼번에 어두워지고

 

  내가 없는데 내 방에 불이 들어온다.

 

 

 

 

 자각몽

 

 

  양의 이미지는 온순하지

  막상

  양을 그려놓고 보면

  온순하지 않지

  그것은 구름

  그것은 연기

 

  그녀로부터 달아나고 멀어지다가

  빨간 기와가 붉은 벽돌이었단 사실과

  울타리 너머도 울타리란 걸 알았을 때

  그 때 나는

  새하얘졌어

 

  이해하기 전에 뭉게구름

  뒤로 뭉게구름이 지나가

  변명하기 전에 담배 끝에서

  연기가 이어지고

  연기로 이어지고

  끝나버린 연애가 계속되고 있어

  주파수를 돌려

 

  오래된 노래를 틀어놓고

  그녀를 알기 전의 내가 되어서

  백 마리 이백 마리

  양을 세

  눈꺼풀을 내렸다 들어올렸다

  반복하다가

  환상이었던 이야기는

  현실이 되었던가

 

  진짜 양을 보지 못했으니까

  진짜 양은

  가짜 늑대에게

  잡아먹혀버렸으니까

 

 

 

 

 허브

 

 

  날마다 탁자에서 허브가 자란다. 허브를 먹으며 동생이 자란다. 귀가 얇은 식물은 모든 감정을 이해한다.

 

  모르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커브 아이와 어른 오가는 발에 차일 때마다 쓰임새가 달라지는 돌, ,

 

  동생과 나는 같은 탁자를 쓴다.

  탁자는 넓고 허브는 많고 동생은 탁자의 허브 또는 허브로 된 탁자를 먹는다. 탁자는 식탁으로 쓰일 수 있다. 책상으로도 쓰일 수 있다. 허브로 된 탁자는 자라는 성질이 있다.

 

  담 하나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쌓인다.

  밤마다 담을 두드리는 소리 똑똑 쿵쿵 흑흑 하나둘, 하나둘,

 

  나와 동생이 칼날과 연필로 새긴 수만 가지의 틈,

 

  허브가 시들어 죽는다. 그래도 상관없이 동생은 자라고 있다. 탁자는 딱딱한 성질이 있으며 그건 죽은 동물의 시체에서나 만져볼 수 있다.

  허브든 탁자든 결국 관상용 식물이 된다.

  나는 오른쪽으로 동생은 왼쪽으로, 다를 것 없는 심정으로.

 

  자꾸만 벽돌이 쌓인다.

 

  들은 적 없는 울음소리가 낯익어지면 가족이 된다.

  날마다 골목이 늘어 많아지는 서랍 하나둘, 하나둘.

 

  허브를 씹으며 현관을 나서는 동생과 나,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목격자들

 

 

  탁하고 번뜩이는 눈빛 야생의 너와 나, 다져진 나와 너는 살아서는 친해질 수 없을 테지만

 

  물체와 나, 이렇게 만났으니 더듬더듬 만져봐도 괜찮지

 

  뺨을 너와 맞대던 줄무늬고양이는

  수풀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가 들려

  수풀- 너머 아파트의 외벽, 그늘, 창문, 그러니까 그즈음의 영역이 줄무늬고양이가 되어

 

  울고 있어

  나와 같은 곳을

  행인들과 주민들이 보고 있어 다만

  내가 본 것과 다른 고양이를 보고 있거나

  줄무늬를 기억하거나

  아니면

  또 다른......

 

  물체가 된 너는 도로 위를

  구르고 구르지

 

  인간적인 눈이 많은 번화가의 밤이라

  생물이던 너, 사물로 남은 너는

  프레임 속에서 요리되는 중이야

 

  맹목적인 눈도 의심 섞인 눈도 아닌 인간적인 눈

 

  표지판과 빵 냄새와 영어 학원과 알코올이 뒤섞인

  그림자가 따로 걷고 있어

  기묘하게도 너를 꼭 닮아

  마치 사람인 것도 사람이 아닌 것도 같은데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어

  누군가 받았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무언가

  통째로

  삼겨버렸어

 

 

 

 

  본능 이상의 것

 

 

  폭설이 우리를 산장에 묶어두었다. 주인 없는 산장에서 보낸 이틀. 눈은 한시도 그치지 않았다. 산장이 눈에 파묻히지 않는 게 안도와 오해를 낳았다. 우리는 네 명이고 이틀 전에는 세 명이었다. 산장보다 좋은 곳을 찾으러 간 한 사람, 나빠져도 혼자가 좋다던 한 사람 있었다. 너희 말을 도저히 더 못 들어주겠다고, 차라리 눈 속으로 들어갔다. 모르는 두 사람은 언제부턴가 우리는 함께였다. 식량이 반에서 반으로 줄고 있었다. 산장은 아주 따뜻해서 지내는 동안 방한복을 벗고 있었다. 산장은 아주 넓어서 우리가 안 쓰는 방들이 수십 개가 넘었다. 먼지 쌓인 빵을 먹으며 우리는 정도껏 쌓이는 눈을, 겨울이 지나고도 비참히 내리는 눈을 보았다. 장작이 떨어지자 의자 다리를 부러뜨렸고 의자 다리를 잃어버리자 소설을 넣었고 소설이 재가 되자 역사를 던졌고 역사가 사라지자 성경을 찢었다. 잡담이 아니라면 말을 아꼈다. 벽난로가 식고 우리는 세 명이 되었다. 따뜻해졌다. 빵 대신 빵가루 묻은 먼지를 먹었다. 우리를 떠난 그 사람이 더 잘 지낼 거란 생각이 들어서 슬프게 추웠다. 눈이 비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산장을 떠날 수 없었다. 이미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채 얼어붙었다. 식량이 떨어지고 우리는 두 명이 되었다. 배가 불렀다. 여름이 분명했는데 우리는 산장에 묶여 있었다. 소모적인 대화가 계속되었다. 눈과 비가 절반씩 내리고 있었다. 춥고 배고팠지만 우리는 한 명이었다. 혼잣말을 하다 죽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우리에 관한 뉴스가 평생 실종으로 보도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구현우 1989년 서울 출생. 안양예고와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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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최대화 외 4편

 

   황유원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기차가 아무리 짓밟고 가도 손가락도 발가락도 잘리지 않는 건 손가락도 발가락도, 아무것도 없어서

 

손가락을 잃은 기타리스트는 알지 흉측한 음악을 만들 바에야 약을 먹고 죽는 게 낫다는 걸

발가락이 없는 애벌레는 알지 발가락이 없으면 기어서라도, 가고 싶은 곳엔 가고 봐야 한다는 걸

 

말하자면 비시각적 음표들의 시각적 극대화

 

그러나 약은 치료하기도 하는 것,

 

병명보다 더 많은 치료제를 잔뜩 싣고 가던 기차가 마침내 말기에 다다라 포기하고 탈선할 때

눈 내린 들판에 처박힌 기차에서 동그란 알약들이 쏟아져나올 때의 기분이란

 

그 기분 누가 알겠냐마는 환자들만은 알지,

환자들은 꿈속에서 거기까지 걸어가 그 약을 모두 주워 먹은 다음날 아침 병실에서 깨어나 기차의 차가운 몸을 이해하지 넘어진 채 몸을 뒤로 돌리던 기차를 이해하며 몸을 정확히 당신들 반대편으로 돌리지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

 

오늘밤 그들의 기도가 기차처럼 길어져 결국 지구를 몇 바퀴씩이나 돈 기도들의 속도가 기차를 조금씩 허공에 뜨게 해 마침내 이륙한 기차를 바라보며 철로가 난생처음으로 편안해질 수 있다는 희망,

을 품자마자 기차는 곤두박질치고

지진처럼 지축이 흔들려 복부를 강타당한 남자처럼 철로가 신물을 토할 때 신물 위로 기타가 쏟아지는 기분

 

그 기분은 누가 알까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꿈에서 엎질러진 아이나 알까

 

아무리 길게 써도 저 레일에는 모자랄 것이므로 여기서 그만둬도 상관은 없겠지만

 

고요한 밤, 캐롤을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린 아주아주 거룩한 밤, 깨진 전구를 뛰어넘어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거침없이 이해하고 산타를 엉망진창으로 때려눕히고

 

지구가 한 바퀴 돌기 전까지 기타를 모두 수리해야 하는 수리공의 마음은 망가진 리프(riff)들을 밤새 고치고 있는 기타리스트밖에 모르지

 

너에겐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릴 만한 그 무엇이 있나?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이라도 있니?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을 타고 비옥한 꿈속을 달리다 넘어지는 곳이 늘 절벽 앞이어서 느껴보는

아찔함, 그 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 리듬을 정면으로

견뎌본 적 있니!

 

구겨진 리듬을 잘 펼치면 과연 어디까지 펼쳐질 수 있을지, 무엇까지 덮어볼 수 있을지를 가늠하며 최대한 붉은 와인을 박스째 주문해

 

뱃속에 와인을 만 박스나 싣고 가는 기차가 오늘밤 도무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유를 누가 이해하겠냐마는

사랑을 한 박스나 마시고도 제대로 서 있는* 조니 미첼은 이해하지, 어쩌면 술집을 이름표처럼 달고 다니다 이름을 아무 데서나 콸콸 쏟아버리던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이해하지

 

잠시 동안의 짧고 굵은 경악과 모든 최대화에 따르는 극심한 부작용, 그때마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경적을 울리며 긴 열차 한 대 빨려들어오는 느낌, 결국 일망타진 당하고 마는 느낌을

 

너무 긴 문장에겐 이제 그만, 쉼표를

 

 

———

* Joni Mitchell, 〈A Case of You〉중에서.

** Amy Winehouse.

 

 

 

 

풍차의 육체미

 

 

 

그냥 풍차가 됐으면

바람 불면 돌아가다

바람 자면 멈추는

돈키호테도

로시난테도 아닌

그냥 븅 븅

힘차게 제자리를 지키고픈

달려가서 안기고픈 남자의 규모로

븅 븅

잘리지도 않아서 영원히 자를 수 있는 공중을 썰며

븅 븅

호프나 한잔하고 부리는 호기로

정오 조금 지난 시간에 벌써 뒤풀이를 계획하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일단 목부터 축이고 볼 때

그 목구멍들을 통해 넘어가는 힘으로

븅 븅

네가 런던에서 파리로 넘어가는 버스에서 보고 반한 육체미

븅 븅

내가 암스테르담에서 보고 매달려 돌아가고 싶던 힘찬 팔

난 지금 혼자 콩나물해장국 한 그릇을 비운 후 장충단공원에 앉아

문자나 주고받으며 당신들의 잡담을 엿듣고 있을 뿐인데

여긴 풍차가 하나도 없는데

난 갑자기 풍차가 되고 싶고

븅 븅

뭐라도 잡고 돌리고 싶고

뭐라도 븅 븅 돌아갔음 좋겠는데

여름바람에 감사하며

담배 피는 영감탱이들을 피해 부채 부치고 있는 할머니의

고약한 표정도 예쁘게 봐줄 수 있는

풍차가 됐으면

븅 븅

꽃받 오가는 꿀벌들의 날개 소리를

딱 100배만 확대한 음량으로

븅 븅

위풍당당

힘차게

난 버스도 안 타고 있는데

갑자기 내려서 좀 걷고 싶은 기분이고

식당에서 보던 야구경기를

여기저기 계단에 앉아 손에 스마트폰을 든 사람들이 이어서

봐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고

계속되는 경기

븅 븅 븅

계속되는 안타

붕 부웅 붕

계속되는 향기

부웅 부우웅 브응

소리를 녹음해줄 순 있지만

모양을 녹화해줄 순 있지만

지금 이 향기를 첨부해줄 순 없네

내가 풍차가 아니라서

힘찬 팔이 아니라서

마음에 드는 사실 몇 가지

부우웅븅 븅 븅

풍차는 없어도

딱 몇 초만

풍차가 됐으면

 

 

 

새처럼 우는 성(聖) 프란체스코를 위한 demo tape

 

 

 

내가 다가갈 때마다

푸드득

새들이 도망갔다

참새 비둘기 까치

다 나를 피했다

있는 힘을 다해

두루미 청둥오리 수리부엉이

훨훨 훨훨 훌훌

황망한 어궤조산(魚潰鳥散)

성 프란체스코여

그대 새의 음성

투명한 예각들 부서져내린다

돌을 쪼아 조각내듯

그러나 돌멩이 하나 상처 입히지 않고

돌 틈으로 꽃 몇 송이 밀어내는 힘으로

산산조각나는 공중

번개처럼

번개가 지나가고 난 뒤의 말짱한 하늘 같은 것들 남겨두고서

공중분해되는 새들

나무 속에 숨어서

도처에서 울려퍼지는

문자메시지 오는 소리처럼

부서지는 문자들의 빛나는 꼭짓점

형태 없는 소리들에게 거룩한 이름을

새들의 자세

새들의 종종걸음

새들이 거는 전화

마이크만한 새들이 떨어뜨리는 노래

군함새 저어새 해오라기

얼마간 비축해둔 힘으로

훨훨 훌훌 훨훨

겨자를 잔뜩 친 새 날개 스시

식초를 잔뜩 친 새 성대 냉면

푸드덕 파다닥

자유를 찾은 것처럼

곧 도살당할 것처럼

소쩍새 마도요 수리부엉이

귓구멍을 두들겨패는 성질머리

불현듯 시작돼서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꾀꼬리 찌르레기 섬휘파람새

내리막길에서 손을 놓은 자전거의 속도

큰 날개 휘저어

춤을 추는 것처럼

다들 모여 어서

춤구경이나 하라는 것처럼

새들이 도망

갔다 도망

갔다 도망갔고

도망갔다 도망

갔으나

끝내 도망가지지 않는 잡새들

훌훌 훨훨 훨훨

 

 

 

초겨울에 대한 반가사유

 

 

 

내가 여기서 가만히 팔을 괴고 앉아 있는데 저기 식탁 위

에 놓인 물병이 흔들,

리고 있다면 저 흔들림은 나만의 흔들림

 

에서

이 세상의 흔들림

 

까지.

 

찬 마룻바닥 위

벽에 걸린 가을 풀 거꾸로 말라가는 시간 속에서

반가사유상의 왼발바닥이 새하얘진다

 

창밖에는 길어온 물항아리 하나 하늘에 떠 있다

흔들흔들

출렁이다가

 

엎질러지는 날개들

박살나는 물항아리의

예리하고

빛나는 펼쳐짐으로

 

넓어지는 접촉면

발에서, 무릎으로

골반으로 가슴으로

번져오는 추위 속에

마침내 시려오는 머리.

 

반가사유가 뭐 별건가

시원한 바람 한 줌, 십 분여의 뻥 뚫린 환기보다 못한 것

 

엔터키 때리듯 벌떡!

일어나 창 쪽으로 달려가려다 말고

한 칸,

또 한 칸 스페이스바 누르듯

저린 발 뗀다

 

금동여래입상이 뭐 별건가

정말 오랜만에 다시 하늘색이 된 하늘

창을 열고 그 앞에 선 자라면 누구라도 잠시, 확장될 것

 

얼굴은 활주로 같은 것

그 위를 무허가로 비행하는 표정들

자주 착륙하는 낯익은 표정들과

한번 이륙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표정들 속에서

금동여래입상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반가사유상의 사유가 새하얘지고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금동여래입상의 차이는 오로지 넘버뿐

 

스페이스바는 누르고

엔터키는 때린다

거꾸로 할 수 있다면

날 놀래킬 것

 

그럴 때마다 촛불들이 쓰러지는 저녁바다

불바다가 되는 수평선 수직선

경계선 따위

그 온갖 선(線)들

 

저 불이 밤바람에 옮겨붙으면, 저 불이 더 불어나면

안 된다

안 되지만

 

뭐 안 될 것도 없다

그럴 때마다 브레이크 브레이크, 멀리 해안도로에서 타이어 타는 냄새

물이 불어나듯

넘치는 불의 계절

물불 같은 거, 가리질 말 것

 

손가락도 없는 눈으로

잡을 수도 없는 구름이나 오래 매만져보는 이 늦가을, 마지막 날 아침

스페이스바 길게 누르고 있는동안만큼

반가사유상의 사유가

엎질러지고 있는 저 하늘

 

여래입상 따위

엔터,

엔터,

거기 털썩

주저앉혀버려

 

 

 

레코드 속 밀림

 

 

1

 

예술은 두 종류,

차가워지거나 뜨거워지거나

 

목이 쉬면 빛이 바래는 가사가 있고

휘발된 노래 밑바닥에 반정부군처럼 살아남아

지구 반대편 지원군을 불러모으는 가사가 있지

그러거나 말거나 변함없는 사실은

 

마음을 다하면

판은 돌아가는 거

 

2

 

봄밤, 짐승들이 합창하는

레코드 속 밀림의 고요

식지 않은 피를 싣고서 최대한 무리하지 않게

어슬렁거리는 무리들

 

이것이 바로 열대우림에서 맞는 봄밤

따뜻한 비를 맞는 호랑이들의 피부에 핀 착한 꽃들이 질 때

그들을 달래며 저어보는 부드러운 밀림서

 

호랑이는 두 종류,

찢어지거나 불타오르거나

 

 

▲ 황유원| 1982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서강대 종교학과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인도철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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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부문 심사 경위】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부문에는 총 734명이 4535편의 작품을 응모해주셨다. 최근 몇 년 동안 줄곧 세 분의 심사위원이 심사를 맡아주었는데 올해는 네 분이 심사위원으로 수고해주셨다. 응모작을 4등분해서 김혜순, 남진우, 신형철, 이문재가 개별적으로 예심을 진행했고 각자 3~5명 정도의 응모자를 본심에 올렸다.

   본심에서 논의된 응모자들의 명단을 표제작 제목을 기준 삼아 가나다순으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나무라기엔 늦은」외 네 편을 투고한 김진규씨, 「사진」외 다섯 편을 투고한 박혜민씨, 「샤브샤브」외 네 편을 투고한 장형순씨, 「세상의 모든 최대화」외 네 편을 투고한 황유원씨, 「속눈썹 나무 숲에 대한 진술서」외 네 편을 투고한 김은정씨, 「오브제」외 다섯 편을 투고한 임정민씨, 「원만이 아저씨」외 네 편을 투고한 이동호씨, 「인력의 이유」외 여섯 편을 투고한 박민규씨, 「임계」외 네 편을 투고한 김정희씨, 「점원들의 점심시간」외 네 편을 투고한 최몽휘씨, 「코시체」외 여덟 편을 투고한 용윤선씨, 「타인을 읽다」외 네 편을 투고한 한연희씨, 「최초로 레몬을 먹어본 개가 레몬에게 갖는 두려움」외 네 편을 투고한 백록담씨, 「하얀 숲」외 네 편을 투고한 오솔뫼씨.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올라온 작품을 며칠간 숙독하고 본심회의에 참석했는데, 놀랍게도, 본심은 불과 십 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네 분의 심사위원이 회의에 참석하면서 당선자로 염두에 둔 응모자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최대화」외 네 편을 응모한 황유원씨였다.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할 이유가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황유원씨의 작품이 어째서 우수한가에 대해 잠깐 동안 의견을 교환하고 그를 당선자로 최종 확정했다. 마라톤이 되기 일쑤인 심사회의를 백 미터 달리기로 만들어준 황유원씨에게 축하의 인사를, 함께 달려준 모든 응모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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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쿨장미 / 남지은

 

뾰족한 악몽을 밀어내고

담장에 오르는 새벽

 

나는 내가 비좁다

 

창을 열면

내 안으로 눈이 내리고

 

붉은 새가 걷는다 붉은 새가

 

떼로 날아오르면

검게 찢어지는 하늘이

 

칼들이 쏟아져내리고

아버지가 보인다

 

취한 손으로 가족들 발톱을

뽑아내는

 

모두가 찌르고 모두가 찔리고

모두가 떠나지 않고 이곳에 서 있다

 

내 안으로만 쌓이는 눈

창이 열리면

 

나는 나를 뚫는다

새가 새를 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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