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눈 / 김재훈
가장 위험한 상처는 적막 속에서 태어난다
총성이 울리고
공중의 새가 통째로 떨어지는 밤에는 어떤 짐승이든
전속력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아름다운 옛 애인들은 항상 전속력으로 떠났고
아름답다는 말 속에는
숨 가뿐 동물들이 살고 있다
숨:
한 아름다움이 다른 아름다움 속으로 파고드는 것
(당신은, 당신이 잠결에 스스로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모습 본 적 있는지)
혹은
갑자기 열리는 하나의 상처,
구름들
구름이 하나 흘러가고
나는 구름에 취해
감정,
그리고 감정의 정치를 감정적으로 생각해본다
입술을 물게 하는 어떤 감정은,
生을 통째로 삼키거나 차라리 던져버리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뭉쳐진 눈(雪)과 흙 속의 감자와 우리의 뿔을
동일한 각오로 단단하게 만들지
무엇이든 상하게 하고 싶은 날이 있다
몸통보다 커다란 뿔을 세우고 돌진하는 짐승들
마치 그 뿔이 부러지길 바라는 듯이
하지만 누구도 다치지 않길 바라면서
그런 걸 정말 각오라 말해도 좋을까
간신히 희미해지는 구름의 전속력
겨우 그만한 각오를 품고
내가 나를 뭉쳐 공중으로 던져버릴 수 있다면
해 저무는 늦은 오후의 주택가에
아무도 모르게 검은 눈이 날릴 것이다
공허의 근육 / 김재훈
삼월에 고백했는데 지금은 구월, 서사도 없이 시간을 흘러서
이름 붙이지 못한 구름들이 이리저리 흩어진다
수년간 방치된 흉가가 드디어 무너졌을 때는 장마가 지나고
매미 울고 뜨거운 여름도 지난 뒤라고
어쩌다 마른 잎사귀를 밟았지만 다시 보면 죽은 매미였다
무너진 집은 무너지기 위해 얼마나 오래 허공을 뒤틀었을까
그늘과 함께 주저앉아버리는 모든 통증의 끔찍함에 대하여 잠시,
나는 생맥주를 마시고 입술에 묻은 거품을 닦는다
정말 그래 매미라는 풍선, 잔뜩 부풀어오른 여고생들은
한꺼번에 울어버리고 울어버린 만큼 떡볶이를 먹지
몸 아픈 구름들이 이빨을 떠는 저녁 지상의 모든 그림자가
치통처럼 부풀어오른다 피가 고인 입술에 입맞춰주겠니
저기 풍선이 하나 날아간다 울음이 울음 속에 스미듯이
허공으로 작고 빨간 허공 하나가 아랫입술을 물고
비늘꽃 / 김재훈
아, 저 무성한 비늘,
봐, 내 팔뚝에 소름이 돋고, 손가락은 뱀처럼 길게 늘어나지, 내가 너를 만지
면 붉은 손톱 밑에서 가느다란 혀가 자란다, 설익은 무화과를 먹으면 혀가 갈라
진단느데, 혓바늘 하나하나 갈라져서, 혀가, 머리털처럼 덥수록이 길게 자라,
개천 둑에 열린, 설익은 무화과를 따먹은 일뿐이었는데, 콸콸 넘쳐흐르는 장마
철 개천을 보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간지러운 작은 고추를 만지작거렸을 뿐인데,
문득,
다친 새끼고양이가 가여워 산 채로 땅에 묻어주었을 뿐인데, 무덤을 덮은
흙이 잠깐 갈라지다 마는 걸 보았던 일뿐인데, 무화과나무 아래에선,
모를 거야, 몽정의 밤들, 파란 혀를 지상까지 길게 내린 달빛이 내 얼굴을
핥던 밤, 나는 달아날 줄 모르는 송아지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따뜻하구
나 파랗게 무섭구나 끄덕거렸는데, 내 손톱달에서 혀가 길게 자라는 지금,
너는 고양이의 귀 같은 꽃, 송아지의 주둥이 같은 꽃, 혀를 길게 풀어헤쳐 내
깊숙이 뿌리내릴 테야, 수천 마리 나비로 하르르, 날아드는 거야,
눈뜨지 마, 잠들어, 작은 무덤처럼 잠들어,
비늘꽃, 비늘꽃, 무덤꽃, 비늘꽃,
찰스나 나나 / 김재훈
낮잠을 자는
누이 옆에 앉아 사과를 깎는다
서툰 칼질로 속살을 두껍게 베어내다가
나는 그만,
누이의 잠꼬대를 들어버렸다
찰스, 아니야 찰스
잠든 누이를 바라보니
키가 한 뼘은 줄어들었다
누구일까 찰스는
그도 과일을 깎는 데 서툰 걸까
작아지는 누이의 손을 잡아주고 싶은데
한 손에는 사과
다른 손엔 과도를 들고 있다
괜히 찰스가 미워진다
누이는 어디서 그런,
하지만 찰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니
일단 찰스를 용서해볼까 하는 요량이지만
용서라는 건 또 뭔가
그럴듯하게 멱살 한번 잡아본 적 없고
그야말로 침대에 누워 벽이나 차는 주제에
누이 꿈속의 찰스를
용서할 수 있는 걸까
그래서 나는
누구일까 찰스는 누구일까, 자꾸만
이제는 인형만큼 작아진 누이의 잠꼬대를
엿듣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안 돼 찰스
형님, 해봐 찰스
따위의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아
찰스를 불러내서는
사과가 담긴 쟁반 앞에 마주 앉았다
우리 둘은 어지간히 쑥스러운 모양으로
시선을 내리깔고
숨이나 수고 있다가
동시에 아 근데, 하고
고개를 드니
누이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사과나 먹으면서
누이를 기다리자고 말하려는데
내 어깨를 두드리며
찰스가 먼저 입을 연다
형님, 해봐 찰스
뭐라는 거니 찰스
형님, 해보라니까 찰스 말조심해 찰스 장난 말고 찰스 재미없어 찰스 미친
거니 찰스 이건 아냐 찰스 뭔 지랄이야 찰스 까불지 말고 찰스 멱살 잡고 찰
스 뒹굴면서 찰스 야 이 새끼 찰스 죽고 싶니 찰스 가만 안 둬 찰스 이빨 물
어 찰스
제발 좀 찰스
제발 좀 찰스
아, 정말 누이는 정말 어디로 간 걸까
못생긴 사과가 키득거린다
쿠키 / 김재훈
사다리
시계
종이컵
질서와 정지
달고 딱딱한 쿠키를 앞에 두고
사람들은 말한다
인생에 대하여
인간의 성분에 대하여
입 벌린 채 음식을 씹는 사람들과
춤추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도서관
어린이
슬리핑백
구름과 겨울
예보와 다른 폭설이 내린다
곧 그친다는 소문이 돌지만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해
흩날리거나 쏟아지는 것
펭귄에 대한 정의가
펭귄의 것일까
서가에 주저앉아
만지작거리는
주머니 속 쿠키
'문예지 신인상 > 문학동네신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2년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0) | 2012.09.01 |
---|---|
[스크랩] [2011 문학동네 신인상 시 당선작] 최예슬 (0) | 2012.03.04 |
제16회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0) | 2012.03.04 |
제15회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0) | 2012.03.04 |
제14회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0) | 2012.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