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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외 6편 / 최지안

 

가난한 나의 말들은 금세 해졌습니다

 

낡은 소맷부리처럼, 당신에게 닿으면 올이 풀리는 날개들

 

시린 발 비비며 겨울을 읽는 동안

 

통장 잔고가 줄듯 심장의 말도 줄어갔습니다

 

당신에게 빌린 언어들은 붉은 딱지가 붙어 쓸 수 없습니다

 

뒤꼍에서 곱은 손으로 보낼 깃을 짰으나

 

늦가을 기러기처럼 떠나는 것을 시라고 한번 불러보아도 되겠습니까

 

끊긴 안부들이 그렁그렁 내려앉은 꿈결마다 우두커니 서 있는 우체통들

 

밤새워 계절을 건너간 꿈은 또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오고 돌아오고야 말고

 

나는 서랍 속에 얼음장 같은 종이들을 밀어 넣습니다

 

겨울 처마 밑에 쩔쩔매던 그런 문장들이 달려 있습니다

 

그 끝에서 가끔 똑똑 햇볕이 떨어지기도 하는

 

 

[당선소감] 여기, 발화점

 

발꿈치 들어 살살 걸어봅니다. 지상으로부터 한 뼘 떨어져 걷는 사람이 시인이라지요. 휴대폰으로 건너온 당선이라는 말이 그 저녁을 휘저었습니다. 이름표 받아든 일학년처럼 이래도 되는 것인지, 내가 가져도 되는지 만져도 보고 기울여 보기도 하였습니다. 꿈과 잠 사이가 멀었습니다.

 

문턱을 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얄팍한 발목으로 넘겨다 본 까마득한 저쪽. 물렁한 턱이란 없었지요. 한 생을 시만 먹으며 무명으로 소비해도 괜찮겠다 싶었으나 이름을 가지지 못한 것들은 파일 안에서 허옇게 낡아갔습니다.

 

끝동을 만지작거린 9월. 몇 편의 깃을 골라 저쪽 문턱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기회를 주신 김윤배, 이경철, 안도현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가족들에게 기쁜 소식 알릴 수 있어 행복합니다. 특히 열렬한 지지자인 두 딸과 축하 케이크를 먹고 싶습니다. 마경덕, 박지웅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 공부했던 수원 AK 시창작반과 시담 동지들의 응원 고맙습니다. 수필 스승이신 손광성 선생님 휘하 아가위회원들과 기쁨 나누고 싶습니다.

 

아마도 여기가 제 시의 발화점이 되겠지요. 이제부터 뜨거워지겠습니다.

 

40년을 디디고 살다가 얼마 전 떠나온 용인에게 안부 전합니다. 용인을 생각하는 날이 많았다고.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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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흔적을 남기지 않고 걸어가는 발

 

저마다 마스크를 끼고 제4회 남구만신인문학상 본심에 임했다. 용인의 구도심 어느 카페에서였다. 최종심에는 모두 열 사람의 응모작이 올라왔다. 다들 시적 수련의 흔적이 단단해 보였다. 우리는 선천적인 재능이나 어떤 우연에 의해 시인이 탄생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학습과 훈련이 좋은 시인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다만 학습과 훈련의 흔적이 시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서는 곤란하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걸어가는 발을 만나고 싶었다.

 

새로운 신인일수록 조선의 실학자 박지원의 말처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태도를 잘 유지해야 한다. 신인에게는 과거의 것을 본받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응모작들은 ‘법고(法古)’와 ‘창신(創新)’ 사이에서 망설이고 기울고 빠져나오고 때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고민의 자국이 역력했다. 그 고민은 사사로운 것과 공적인 것, 가까운 것과 멀리 있는 것, 익숙한 것과 낯선 것, 현실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들을 넘나들고 있었다. 다만 여러 사람의 작품에서 ‘애인’ ‘문장’ ‘언니’ ‘허공’ ‘언어’와 같은 시어들이 동시에 발견되어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현상이 시류에 편승하는 말의 패션이 아니기를 바란다.

 

꽤 오랜 토의 끝에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압축되었다. 「말할 수 없는 것」외 6편은 현실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시를 진행시키려는 의식이 강해 보였다. 자의식에 대한 편애와 고백의 시들이 넘쳐나는 때에 세계를 바라보는 이런 태도는 적잖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거기에다 발랄하면서도 능숙하게 시를 전개하는 솜씨도 일품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표현의 수사에 기대 멋스러움을 만들려고 하는 기술이 넘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보기로 했다.

 

당선작으로 고른 「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외 8편은 무엇보다 시가 잘 읽힌다는 장점을 지녔다. 이 사람의 시는 독자를 끌어당기는 흡입력이 아주 강한데 그것은 서로 대조되는 세계를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배롱꽃」 같은 시에서 “월세가 밀린 꽃이 아픈 허리로 비를 밟고 야근을 간다”는 표현처럼 삶의 신산함에 다정한 정감을 부여하면서 선연한 서정을 획득하는 경우가 많다. 시인의 긍정적인 세계관이 시의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성과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 고통에 바늘 끝을 갖다 대고 그 고통을 달콤하게 만드는 시를 쓸 수 있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김윤배(시인), 안도현(시인), 이경철(시인, 문학평론가)

 

 

 

올해 ‘제4회 남구만 신인문학상’ 당선작은 최지안씨의 ‘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외 6편이 선정됐다.

 

용인문학회(회장 이원오)가 주최하고 용인시와 용인신문사, 의령남씨 문충공파 종중이 후원하는 ‘남구만 신인문학상’은 조선시대 문신 ‘약천 남구만(1629~1711)’의 문학세계를 기리고 시 창작을 장려하기 위해 지난 2018년 제정됐다.

 

본심 심사위원단은 “최지안의 ‘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외 8편은 무엇보다 시가 잘 읽힌다는 장점을 지녔다. 이 사람의 시는 독자를 끌어당기는 흡입력이 아주 강한데 그것은 서로 대조되는 세계를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약천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등 시조 900여 수를 지어 우리나라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벼슬을 그만둔 뒤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에서 여생을 보내며 문집 ‘약천집’ 등을 남겼다. 묘역과 별묘 등이 모현읍 초부리에 있다. 

 

당선자에게는 상금 500만 원이 수여되며, 시상식은 11월 27일 용인문화예술원 마루홀에서 진행되는 ‘2021 남구만문학제’에서 진행된다.

 

한편, 이번 예심은 용인문학 편집위원회가, 본심 위원엔 김윤배(시인), 안도현(시인), 이경철(시인, 평론가)씨가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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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 송용탁

빈 도시락 통이 다리를 퉁퉁 칠 때면 무릎 근처에서 달그락 물결이 일었다. 학교 마른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길은 흐르고 나는 고인다. 이름 모를 꽃들이 내 이야기를 엿듣곤 했다.

결이란 말은 혼자서도 혼자가 아닌 마음

늘 골목 끝에 서 있던 엄마가 없다. 세상의 숨결이 겉잎을 버리는 시간. 혼자라는 속잎이 있다. 시시한 놀이가 거친 숨결을 달랜다. 견뎌야 하는 목록이 늘어날수록 숨은 여러 결로 쌓였고 숨을 내쉬기 힘든 무게가 있었다.

소실된 곳에 가면 세상은

나를 설득하고 싶은 모양이다

떠난 마음들이 사는 도래지가 있다고,

노을의 손을 잡고 뛰었다. 엄마의 살에서도 물결이 인다. 살의 결이 말을 걸어 올 때 길은 생이 아닌 다른 힘으로 걷게 된다. 엄마와 살이 닿으면 다 말하지 않아도 엄마는 알았다. 나는 혼자가 아닌 것 같아 응결된 마음이 눈물처럼 흘렀다. 세상의 길이 붉게 일렁거렸다.

빈 도시락 통이 달그락달그락 계속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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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의 자세

 

 

과묵한 표지로 걷고 있었다

계절은 돌보지 않았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지구 한구석 풍화가 일어났다

바람만 이를 가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가을의 슬픈 버릇이었다

 

자전은 지구가 나를 읽는 방식

한동안 정독이었던 적도 있었다

견고한 발음으로 낮과 밤이 지나갔다

나를 닮은 표정들이 모였다

마른 책상 위에 쌍혀가고 있었다

외롭지 않다고 묵독을 해야 했다

 

- 초토의 흙은 검거나 붉거나

난독의 영역일거라

남의 꼬리털을 비명처럼 세우고

나의 이름을 적는다

경건한 필체가 나를 저장해 주기도 할 거라

잠시 우주도 심심해지는 순간

해는 점점 짧아져서

내 키도 줄어드는 가을이라고

끄덕끄덕 낯선 글자들이 방문을 했다

 

발췌의 기술로 상심한 속지를 더듬어 본다

아름다운 문장들은 허기진 페이지로 흘러갔다

나는 오늘도 부호로 끝난 몸짓이었다

 

흔들리는 자전의 공식들

산책을 떠난 나의 낱장들

 

결국 가을이었다

 

 

 

 

아무도 진화하지 않았다

 

 

나무속 아궁이에 불을 놓는다

 

굳은살로 굳은살을 씻던 손의 끝

 

눈이 모인다

물이 고인다

 

싹이 나던 자리에 물을 붓는다

꺼지지 않는 불이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나무의 씨앗들이 흘러내렸다

소매가 찰랑거리면 저녁도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아궁이는 무섭게 웅크리고 있었다

뜨거운 밥이 저녁을 데워주고 있었다

몇 술 뜨지도 못하고 누워야 했다

 

그의 이름을 발음하던 혀를 잡는다

이름은 그을음보다 멀리 있었다

 

단단하다는 것은 아프다는 것이다

매운 옹이에 불이 붙는다

 

불은 느 ㄹ그리운 방향으로 돈다

타버린 나무속에 산의 높이가 숨는다

 

춤사위가 끝나고

단단한 멈춤이 왔다

 

잠시 조용하기로 했다

 

 

 

 

 

당신의 분절성

 

 

사라진 것들을 깁기 위해 하류로 간다. 당신은 상류의 서식지만으로도 충분했다. 꽃은 피우는 것보다 떨어뜨리는 일에 집중한다. 중독은 표백의 또 다른 자세. 당신의 결백을 건사하는 일이 무겁다. 그래서 나는 자꾸 하류로 간다.

 

남은 꽃들 아래에 가서 하늘을 본다

당신의 등은 군데군데 푸르다

가끔 지나가는 벌들이 눈물이다

바람도 없이 어깨가 흔들린다

뱀처럼 내민 작은 잎이 내 얼굴의 얼룩을 핥는다

큰 죄가 빳빳해졌다

나는 휘어진 뱀이 된다

당신을 휘감는 단단한 뱀

 

내 몸의 넘치는 부분이 탄로 났다. 만약을 위해 다시 하류를 훑는다. 어떤 눈은 볼 수 없어 무심했고 어떤 입은 여울에서 맴돌았다. 이미 헐린 혀,

 

이끼가 자란다

슬픔은 녹색이다

 

혀도 없이 당신은 내 이름을 정확히 발음했다. 이름은 나를 가리키려 하고 우리는 책일질 시간을 배운다. 다리가 하류에 녹는다. 당신은 잎을 피우다 다시 떨어뜨리는 일에 집중할 것이다.

 

나는 다시 하류를 생각한다. 전력을 다해 나를 녹일

 

 

 

 

 

완벽한 생산자

 

 

수척해진 피복은 눈의 자락을 허용하지 않았다. 도착할 곳이 있는 사람의 어깨엔 눈이 쌓이지 않는다고 동행하던 활엽이 속삭인다. 이름이 적힌 화분은 전신주의 긴한 높이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전선의 끝에 비행의 굉음이 뒤따른다. 활엽 또한 도착할 곳이 있었다. 현대는 제이름 하나로 추위를 견디기 쉽지 않다. 소비된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겨울이 끝난 사람에게 활엽은 사치일 뿐이다.

 

화분이 놓인 영안실은 따뜻했으면 좋겠다. 투명한 플라스틱 용기 속 바쁜 어깨 대신 흰 배가 둥실 떠오르면 둥근 생을 요약하는 목도가 있다. 한 자세로 마지막을 지킨 피곤한 의자들도 다리를 펴는 시간. 검은 동자를 먹어 치우기 전에 흰 얼룩을 붙잡는다. 먹다 남은 싱싱한 생각은 도마 위에서 토막 나고, 아무렇게나 검은 봉지에 담겨 또 도착할 곳을 찾을 것이다. 활엽이 고개를 돌리면 나는 홍적기의 고가리처럼 외롭다 속삭인다. 애인의 예쁜 배꼽에 정액이 또르르 구른다. 시야가 몇 번 접힌다. 팽륭은 무너진 행인의 자세에서 온다.

 

노을도 가쁜 숨을 톺았다.

 

 

 

 

 

 

흘레

 

 

 

혼자 먹지 마세요

각자 입구를 열고 식사합시다

 

매끈한 접시 위 쏟아지는 흰 색

식기는 바깥에서 안쪽 순으로 사용합니다

악수부터 속살까지, 과정은 비슷하죠

접시 테두리를 모두 닫아도 될까요

 

손에 쥔 금속성이 반짝 부끄럽습니다

그림을 그리듯 얼굴을 붉힙니다

 

속옷 안의 일은 아무도 몰라요

나는 우아하게 숨 쉬는 방법을 압니다

금속의 가랑이를 벌립니다

식사할 준비가 됐다는 뜻이죠

 

혀는 입보다 먼저 마중 나갈 거예요

후패한 숲의 입구에 줄을 서는데

겨울 내내 키운 자작도 다 세우지 못했는데

식사는 시작됐다는 뜻이죠

 

요리의 맨몸을 만질 때마다

장면이 바뀌고 화폭이 줄어듭니다

 

천장 위 거울의 맨몸도 먹는 일의 하나라서

입안 가득,

입구의 최댓값을 감상합니다

 

나이프와 포크를 교차해야죠

다음 음식을 주세요

모든 몸이 달콤합니다

 

다리를 꼬고 있는 건 접시를 치우지 말란 뜻입니다

 

다행히 양말은 신은 채로,

예의 같은 게 있으니까요

날개를 터는 붓이 있습니다

 

붓의 깊은 뿌리가 먼 곳의 혀가 될지도 모릅니다

여섯 개의 입을 가진 주사위를 꿈꾸죠

 

때론 접시의 입구를 열고

접시가 돌아가는 상상을 해요

 

무례하다 말할까요

모던하다 부를 까요

 

맛있게 먹는 데도 순서가 필요하대요

 

-흩어진 흰색을 치우다 식탁을 지웠다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건 개라고 부를까

허기를 채워도 네 발은 어렵다

목을 감싼 수건이 무릎으로 떨어질 때

그리다 만 그림을 생각했다

접시와 난 비밀이 생겼다

 

쥔 손을 펴면

나는 

이미 젖은 그림이죠

 

다리를 일자로 만듭니다

식사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바가모요*

 

 

심장을 놓고 가는 사람의 장소에는 삽 한자루의 높이만 있다

 

노동의 뼈대로 세워 올린 당신의 계단 위에 흰 꽃을 놓는다. 친애하는 건축물 앞에서 해명을 요구하는 사람들, 울음을 먹고 산 자들이 입주를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말랑말랑한 살들이 안긴다. 저녁의 위로는 짧다. 한 삽 한 삽 게워낸 당신의 연한 마음. 종일 모래에 섞고도 남았나요. 당신의 앉은 자리에 버무리다 만 선사의 가루가 떨어진다. 저 단단한 건축의 살에서도 당신 살냄새가 날까. 어저면 처음부터 화석이었던 당신. 고단한 모래가 씹힌다. 근사한 노래 같다.

 

나는 당신의 언어를 상속받지 않을래

 

연단 위 확성기를 든 자의 목소리는 차라리 먼 나라의 아리랑. 옥상 위에 올라 꽃비를 맞는다. 고복은 하늘이 내린 자의 습관이라는데 당신과 나는 족보가 없다. 울음이 반올림되면 고장 난 심장도 구호를 외칠, 

 

나는 팔을 조금 내려도 될까요

 

당신의 장소에 꽃힌 삽 한 자루. 유실물은 노래다. 이마가 두 번 놓아둔 심장에 닿는다. 술잔이 넘친다. 여전히 나의 혁명은 어설프다.

 

 

* 탄자니아의 프와니에 있는 도시. '심장을 두고 간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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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장지葬地  6편 / 한정우

 

전력의 속도다

경적을 울리며 비상등이 켜진다

 

또 어느 비명을 거두려는가

 

바람은 예기치 않은 방음벽,

그 가파른 기세에 서둘러 선회한다

부딪혀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여린 생명들,

파르르 깃털이 흩어진다

널브러진 핏빛 비명 위로

허리 잘린 구름이 흘러내린다

 

지상과 파란 하늘 사이

저 투명한 경계의 벽에 숨겨진, 붉은 비수를

지상의 눈들은 보지 못했다

 

아니다

아니다

 

남풍 따뜻한 하늘등성이

숭숭숭 구멍을 낸 바람의 장지로

새들이 날아온다

고라니 떼, 길을 세워 세로로 달려온다

바람보다 가벼운 뼈를

바람 깊숙이 묻어 스스로를 풍장 한다

 

들리지 않는 호곡소리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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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여전히 빗장이 풀린 채

대문은 그곳에 오래도록 매달려 있다

대문 끝에 걸어놓은 풍경이 밤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별들 몰려와 가슴을 짚는다

 

저 문을 열고

아흔아홉 번의 봄이 오고

유성처럼 가을이 소리 없이 다녀갔다

새는 등 위에 청운을 얹고 건너와

마당가 대추나무에서 진록의 계절을 살다 가곤 했다

어느 새벽 다급한 손이 등을 후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검은 날개를 펼친 늙은 영혼이 새벽 찬바람을 앞세우고

대문을 나서는 것이었다

나는 밤마다 마당 한가운데 서서

쏟아져 내리는 별을 다 받아 삼켰다

별을 삼킬 때마다 눈에서 왈칵왈칵 참꽃이 피는 것이었다

흔들리는 착란의 순간들을

상사의 뒤안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문 뒤에 서서 드나드는 별과 바람의 파수꾼

 

바람은 낡은 문 앞에서 방향을 꺾는다  

이제 저 높은 벽기둥으로부터

족자 속 대문을 내려놓을 때

 

문고리 걸리기 전

저 대문을 내 가슴께로 옮길 일이다

    

 

 

 

 

 

마분馬糞

 

한때, 경마장 근처 이웃이었던

선바위마을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불러대던, 그때처럼

 

이젠 뿔뿔이 흩어진 그 사람들이

스마트폰 창을 열고

부윰해진 화면과 흑백 이름들을 꾸역꾸역 불러들인다

코를 찌르는 마분이 과거처럼 미세하게 날린다

화면이 정지된다

목젖까지 달려와 독하게 엉겨 붙은 마분은

과천 벌을 달리던 검의 말들의 질주리라

과거를 달려 창의 경계를 넘는 말들은

끈적한 눈빛으로 화면을 응시한다

 

목젖을 더듬는다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창창하다

목젖을 지나 다시 창을 향해 내달린다

확대된 화면은 말발굽 소리를 따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분이 자욱하게 창을 덮는다

 

나는 정지 되었다

 

 

 

 

 

 

 

미술관은 내부 수리 중

 

한 여인이 뛴다

뒤를 따라 한 무리의 여인들이 미술관을 몰려나와

새 떼가 날아간 덕수궁 뒷길로 내달린다

머리 위에 하얀 새를 얹은 여인

어깨 위에 방울뱀을 휘감은 여인

후레지아 꽃다발로 가슴을 가린 여인

꽃다발을 잃어버린 한 여인은

무색의 나체인 채로, 육신을 풀어 순수의 공기로 스민다

인드라 구슬 그물에 걸려 서로를 비추는 영롱한 영혼

수만 개의, 수억 개의 산소방울로 투영된다

채색되지 않은 순백의 산소방울로 그윽한,

봄밤의 유혹에 여인들은 화사한 머리를 푼다

 

나는 먼지 날리는 미술관 전시실에서

벽면에 걸린 저 얼굴들을 본 적이 있다

짙은 재색의 벽면은 파닥거리는 날것의 영혼을 가두었고

흐릿한 조명으로 오랫동안 억압된 삭신은

한 덩이 고독한 물감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닳아져서 얇아져서 스스로를 허무는 재색 벽의 경계를

기쁘지도 나쁘지도 않은 눈으로 건넌다  

 

지금, 미술관은 내부 수리 중이다

 

 

 

 

 

푸른 간판

 

지금부터,

기다리기로 한다

도처에 이어진 푸른 간판을 건너

이곳에 미리 온 나는

휘파람새를 띄워 너를 마중 중이기로 한다

 

네가 짚고 올 푸른 간판을 확장하고

네가 넓혀갈 영토의 지형을

가장 넓은 넓이로 도해하며 확장 중이다

 

너를 열광했고, 그때마다

붉은 별이 하나씩 가슴에 박히고

별은 밤마다 상사의 붉은 입술로 폐부의 벽을

까맣게 물어뜯곤 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너를 기다리기로 한다

기다림의 길이는 상사의 깊이라고

나는 오독하고, 그 오독이 오만일지라도

나는 기다림의 깊이를 믿는 중이다  

 

이디야 푸른 간판은

날마다 확장되어가는 기다림이었다

 

 

 

 

 

 

아이들이 바다로 쏟아져 나왔다

알 수 없는 곳에 갇혀 있던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공을 굴리며 달려왔다

하늘로 공을 차올린 아이들은

떨어져 구르는 해를 따라 바다의 중심으로 쫓아갔다

 

우 소낙비 같은 아이들은

우 여름 해 같은 아이들은

실눈을 들어 목청껏 까륵까륵 웃었다

풍선 같은 웃음을 웃는 아이들은

 

아이들이 사라졌다

 

웃음 풍선이 홀쭉해지며 빠르게 꼬리를 감췄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호명에 의해

이름이 하나씩 없어지기 시작하고

아이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갇히는 줄도 모르면서 스스로를 가두기 위한,

머리에 사각의 뿔을 달고 사각의 틀에

얼굴을 구겨 넣고 잘라냈다  

하늘에 네모진 태양이 떴다

 

아이들이 사라진 곳으로

네모난 태양이 지고 어두워지며

바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두드러기

 

지하로 가는 칠흑 같은 계단에서 나는,

첨벙거리는 빗소리 들었다

빗소리 하염없는 계단 아래

온 집안, 붉은 두드러기 창궐하는 눅눅한 냄새들

밤마다 야귀도 극성이었다

 

국가 부도의 날 그날,

세공꾼이었던 아이 아버지는 반짝이는 금방 한켠에서

첫 생일 아들을 위한 돌 반지를 다듬고 있었다

아이 엄마를 위한 물방울 목걸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때, 국가 부도를 알리는 텔레비전 속 앵커의 말을

나는 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린 아들이 막 걸음마를 시작할 때였다

 

영문도 모르는 채 찬란한 금방을 내어주고

아이들 그림책과 장난감이 짤랑대던 방을 비워주고

우리는 지하로, 지하로 내려가는 법을 익혀야 했다

그리고는 지상으로 오르는 계단에 대해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이들 몸에도 붉은 두드러기가 자랐다 붉게붉게 번져갔다

 

천장 밑에 난 쪽창으로 간간이 볕이 들어왔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땅 위의 것들을 기억해 냈다

미처 들고 나오지 못한 노란 그림책과 돌 반지, 물방울 목걸이

 

처음으로 폭포 같은 눈물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전등이 켜지고

국가 부도도 끝이 났다  

 

 

 

 

 

 

당선소감

 

오랫동안 젖은 숲에서 잠자던 작은 몸을 비틉니다

거칠게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에 잠을 깹니다

바람이 넘어간 숲 너머를 생각합니다

그곳은 멀고 높아 볼 수도 닿을 수도 없습니다

보이지 않으므로 상상의 놀이터 하나 짓습니다

놀이터의 공간은 날마다 조금씩 확장되어 갑니다

나는 치열하게 상상놀이를 시작합니다

 

눈여겨 살펴주신 심사위원님 감사합니다

처음 시문을 열어 이끌어주신 옛 은사님,

내 안의 견고한 틀을 부수고 이 자리에 서기까지

내면의 깊은 곳까지 거칠게 흔드는 바람이 되어주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위로가 되어 주신 시우님들 사랑합니다

함께 기다려주신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아름다운 나의 일터 가족들,

그대들이 틈틈이 내어준 조각 시간이 있기에

오늘도 푸른 간판이 걸린 카페에서 시를 읊습니다

스치는 모든 인연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심 사 평

 

시 읽기의 궁극은 읽는 이가 행복하게 사라지며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고백과 사유를 일으키면서 동시에 몰입과 정지의 순간을 선사하는 작품들 앞에서 선자 개인의 취향은 가능한 억제되었고 저마다의 심미안이 겹쳐지는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호출되었다.

2회 남구만신인문학상은 총 712편의 응모작 가운데 예심 추천을 받은 15명의 작품을 대상으로 본심을 진행하였다예년에 비해 전반적인 수준의 고양을 공유하면서도 개성적인 음역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작품들은 드물다는 인상기를 나누면서 방미영(부산), 신현련(문경), 한정우(용인)가 최종 대상작으로 압축되었다.

이 신인들은 우선 언어 실험실의 폐쇄성과 자의식 과잉 그리고 지나친 경험 추수로부터 미학적 균형을 만들어낼 줄 아는 미덕을 갖고 있었다먼저신현련은 구체적 삶에 착근한 언어와 일상을 낯설게 만드는 힘이 돋보였다. “눈구멍에 고인 허기를광대뼈라 했다 같은 구절은 예사롭지 않다다만, ‘얼굴꼽추라든지 몸굴 같은 시어가 보다 자연스럽게 쓰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다음으로 방미영의 안정적인 구조와 재래의 서정시 문법을 충실히 승계한 작품들이 믿음을 주었다쉽게 놓지 못한 물살과 새의 점선같은 작품은 명약관화하게 굳어진 제도 언어와 사물들에게 미결정 상태의 두근거림을 회복시켜 주는 경이가 있다동봉한 작품들의 우열이 보다 고른 수준을 유지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정우의 시는 독창성이 어떤 유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질감의 문제라는 인식을 뒷받침하는 지표다이 시인은 로 규정된 미학 체계를 수렴하면서도 시적인 것을 향해 폭발한다여기에 시적 사유의 깊이와 명료한 이미지세련되고 활달한 어법이 돋보였다또한 응모작 중엔 드물게 세계의 부조리와 날카롭게 맞서면서도 내성을 잃지 않는 균형감이 있고바람의 장지(葬地) 마분(馬糞)에서 보듯 묵직한 문명사적 제재들을 다룰 때조차 시적 부력을 잃지 않는 힘에 기대와 신뢰를 갖게 한다

저마다 다른 개성과 취향을 지녔으나 큰 이견 없이 합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한정우 시인의 독자적 음역에 대한 긍정이 가장 컸기 떄문이다예상한 변화만을 허락하는 시가 아니라 위험하지만 자유로운 곳으로 우리를 밀어가는 시인으로 대성하길 빈다. 

 

- 심사위원: 김윤배, 이경철, 손택수(대표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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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파종법  6편 / 윤경예

 

구름이 왔다 물과 결이 수직으로 쏟아졌다

씨앗을 뿌리는 계절,

비는 산과 나무와 강의 모든 음색을 바꿔놓는다

 

가려운 피를 갖고 있는 씨앗들

밭의 둔턱으로 뛰어들었다

강의 뼈를 제 그늘로 뭉게뭉게 피워내는 도술

구름의 속도를 갖기 위해,

씨앗은 안테나를 세웠고 몸의 생장점을 기록했다

 

빗소리로 강은 날카롭게 둥글어지고

지붕은 집나간 영혼들을 처마에 숨겨준다

뿌리를 모으고 있는 저 감자들,

으레, 식물들의 체위는 굽은 직선이다

기를 쓰며 수직으로 눕는 나무는,

구름의 파종법을 견디지 못하고 뿌리를 허공에 두었다

 

높고 낮고 틈만 있다면 물빛으로 메우는 빗소리

백년 된 씨앗마저 깨우는 소리,

감자는 저녁을 끌어다 덮어 별 하나 키운다

제 어머니 무릎뼈 갉아 먹는 소리로

감자는 둥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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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접공에게 잠을 드릴게요

      

용접공의 가방엔 숱한 구멍 뚫린 작업복이 있다

무섭도록 조용한 선글라스도 있다

속눈썹 몇 개 떨어져 나와 테에 묻었다

용접공 눈물의 무게는 알 수 없었고

대신 벌겋게 달아오른 실핏줄만이

불꽃이 가닿는 철판의 노동을 일러줬다

 

컨테이너 판을 용접하는 작업화,

사다리를 난간에 놓고 쇠를 밟는다

쇠와 쇠를 붙이는 일은 밤의 두께보다 한층 짙었다

서로 다른 성질을 다 읽는 순간까지

불꽃은 하나의 꽃무늬가 되어야 했다

 

단번에 자르거나 쇠를 붙이는 산소용접기,

까맣게 그을리는 것은 쇠가 아니라 그의 손등이었다

손등엔 점점이 찍힌 무늬 혹은 불이 지진 상처

성좌를 본 것 같았다

궤도를 이탈한 별똥별 같았다

 

오늘도 모든 준비는 끝났다, 컨테이너 처마에 붙이는 간이지붕,

윙윙 터지는 불꽃의 꿈, 구름과 구름도 이어붙일 기세다

 

저 지평선 끝에는 장마전선을 붙이는 용접공이 있을 거다

그렇다면 비는 그가 튕겨놓은 물꽃이 아닌가

밤새도록 꿈틀거리는 작업화의 눈이

불꽃의 채도를 버리지 못했다

눈물은 지금 사막을 건너고 있고

잠은 길 위에 잠시 머무는 바람의 집을 찾는다

 

 

 

 

  

깨를 볶는 집

     

뭐든 다 볶아야 하는 집, 여름이 무너진 자리를 볶고 있다

깨 볶는 집은 면사무소와 소방서 옆에 있다

컵라면에 물 붓다가 뛰쳐나가는 출동 벨소리도 볶고

소방헬기 프로펠러도 볶는다

산소마스크의 무기력도 볶는다

복지사와 독거노인이 상담하는 소리와

베트남 여인의 주민등록증의 인장도 볶인다

 

무쇠솥으로 하루를 볶는 노인

세상만사 따위는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무엇인가 볶을 것이 있다면 들기름집으로 가자

 

노인은 어제 콩을 볶았고 둥굴레를 볶았고

지금은 깨를 볶는다

물기 말린 들깨 알들, 방아깨비처럼 튕겨나간다

철거 독촉장과 수술비 걱정도 볶아 날려버린다

자주 넘어져 울고 웃던 무릎도 바싹 볶아졌다

마른 깻단처럼 말개지는 것은 노인의 코가 아니라

배경이 된 풍경이다

 

오늘도 휘휘 반짝이는 소리들,

황토 뒤엎는 빗소리도 아니고

깨벌레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도 아니다

무쇠 솥이 새타령 부르고 있는 거다

 

깨꽃이 타닥타닥 저녁의 얼굴로 환해진다

바람, 한줄기 툭툭 여러 갈래로 지나간다

너도 가고 나도 가고 그늘처럼 들이친다

 

 

 

 

 

갈대가 운다

  

뗏장 밑이 저승길이라고

맨살 부비는 갈대가 운다

툭툭 떨어져 으깨진 발자국들이

봉분 앞에 모여들 때,

 

우리는 삽자루처럼 서서

담배 한 개비 불붙여

서쪽으로 올려 드리고

서쪽부터 뗏장을 입힌다

 

낚시 좋아하는 아버지,

죽어서도 가물치 낚으시라고

저수지 내려다보이는 곳에 묘를 썼단다

 

그때 산그늘을 뒤흔드는 까마귀처럼

봉분 한쪽이 열린다

저승으로 옮기는 주소, 글씨가 까맣다

아니 촉촉하다 뗏장 뿌리 내릴 때까지

신발 끈 조여매고, 사십구일 동안

본적으로 뒀던 뒤주 냄새를 지울 것이다

 

    

 

 

 

빗소리와 흰 개

   

흰 개는 지금 비를 맞고 서 있지

가죽나무는 죽은 자리에 비를 가뒀지

개는 으르렁거림도 없이 그저 앞발을 모으고 있지

목줄 달아난 그림자만 생각하지

 

비는 계속 굵어지는데

개의 앞발엔 검정 흙이 튀었지

늑골엔 털이 빠져서 빗소리만이 고이지

담장 그늘

개가 짖었던 소리가 보이지

그동안 개가 짖었지만 담장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해서

개의 입모양만을 기억했지

 

빗소리에 묶여 있는 건, 목소리를 잃어가는

개의 두시였지

분꽃이 뚝, 뚝 떨어지는 두시였지

 

번개는

웅덩이 하늘을 감고 올라가고

무지개는 나뭇잎 스피커 뒤에서

나왔지

 

개와 빗소리에

잘려나간 것은 계절의 간극이었지

하나같이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사건이었지

화재경보 울리는 오후 두시였지

 

빗소리가 내리고 있다고 믿는 흰 개,

파리 떼 뒤집어쓰고, 죽어가지

오후 두시의 틈새에서 죽음의 주파수를 맞추지

  

 

 

 

 

달의 시계

    

달의 시계는 뿔고둥이다

 

뿔고둥이 작두섬에 달을 지고 오면

어머니 물속으로 뛰어든다

수달처럼 전복과 소라를 읽는다

점자를 읽듯 바다를 읽어낸다

 

회오리 파도를 몸에 감고

저음으로 먹먹해지는 심해까지 다녀온다

올망졸망한 것들이 망사리를 채울 때마다

현기증은 귀를 멍들게 하고

물갈퀴는 발을 부르트게 했다

 

빨랫줄 귀퉁이에 널린 어머니 옷가지에서

밭은 물숨 사락사락 만져지는 늦은 저녁

전복껍데기와 퉁치*를 넣고 끓인 뜸북국이

두레밥상을 차지했다

어머니는 그것을 아가미국이라고 불렀다

숨을 먹고 자란 것이었으므로

 

나는 뿔고둥 삶은 것을 잘도 빼먹었다

아무데나 나를 마구 부려놓고

어머니의 신발은 작두날 속으로 뛰어든 밤,

뿔고둥에는 생계의 초와 분이 흐르고 있었다

 

* 새끼 민어의 전라도 사투리.

 

    

 

 

 

끝물

       

귀뚜라미는 구석을 키운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구석을 키운다

맨드라미 밭을 넘어왔다

채송화 밭은 더듬이에 이고 왔다

고추밭은 그냥 두고 왔다

 

탄저병 걸린 꼭지엔 그림자만 살아있다고

귀뚜라미는

태양을 움푹 찔러보고 왔는지

울음만 붉게 젖어 있었다

그늘만 푹푹 빠지는 말매미 소리를 찾아왔지만

삼년 째 똥오줌 받아내고 있는

어느 집 마당에 와서야 제 발톱을 다듬고 있었다

 

소리는 말려야 한다는 것을 귀뚜라미는 안다

끝물, 목숨 길처럼

배밀이로 마루까지 안방을 밀고 다니는 귀뚜라미는

오늘, 제가 가야할 길을 열어주는 저승사자를 만났다

 

통곡의 강을 열어주는 귀뚜라미

담장 길을 뚫고 있었다 죽음이

저 혼자 가기 싫다고 달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당선소감

 

청개구리는 긴 겨울을 어떻게든 버텨내기 위해 제 핏줄과 신경까지 얼어 붙인 채로 회색의 체면에 빠진다고 한다. 핏줄 얼어붙고 살 얼어 터지는 소리를 기록하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기다릴 것이다. 심장 소리 다시 켜지고 팔딱팔딱 튀어 오를 파란 몸뚱어리의 봄을, 봄은 제 등을 먼저 밟고 온다는 것을 청개구리는 믿어 의심치 않았으리라.

보이지 않을 뿐 누구에게나 삶은 치열하다. 나답게 사는 일은 더욱 그렇다고 본다. 청색을 버리고서라도 청개구리가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 단지 목숨뿐이었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 같다. 청개구리에게도 어떤 간절한 바람이 있었을 것 같다. 저 밑바닥까지 속속들이 자신을 좌절하게 하는, 그러나 또 살아지게 하는 그것, 꿈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나에게 시란 논 틀 밭 틀 울음소리로 맘껏 뛰어다니며 무논 가득 빗소리를 쓰는 한 마리 청개구리가 되어 보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기꺼이 동파하기 직전의 신경 앞에서도 아직은 견딜 만하다고 다독였던 것 같다.

당선 소식이 들리던 아침은 처마 밑 둥지를 들락거리는 새소리가 유난히 맑고 맑았다. 제 코앞에까지 다가가도 이젠 도망가지 않는 부리엔 가을이 묻어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좋은 징조였던가 보다.

이 순간 감사한 분들이 참 많이 떠오릅니다. 아직은 거칠고 볼품없는 나의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가장 먼저 감사드립니다. 육신은 물론 정신마저 시들어가면서도 잘 버텨주고 계신 친정엄마께 이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별말은 없었지만 한결같은 신뢰의 눈빛으로 지켜봐 준 남편과 생일 선물이라며 시집을 건네던 아들과 딸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또한, “그것이 뭔지 난 잘 모르지만, 여하간 우리 며느리 장하다 장혀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은 시어머니께도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다.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작은 바람 소리의 웅얼거림에도 귀를 바짝 세울 것이고 밀어내지 않는다면 오래도록 들여다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만의 언어를 받아쓰겠노라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

  

  

 

 

 

심 사 평

 

1회 남구만신인문학상 응모작은 전국에서 모두 70여 명의 1000 . 이 중 10명의 작품이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왔다. 남구만신인문학상은 우리 국민이 널리 읊고 있는 동창이 밝았느냐를 비롯해 9백여 편의 시로 조선 숙종으로부터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까지 받으며 우리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약천 남구만(16291711)의 문학과 애민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상.

이런 상 제정 취지에 맞게 우리 문학 발전을 이끌 역량 있는 신인을 뽑기 위해 심사에 만전을 기했다. 본심에서 마지막까지 경합한 응모자는 방미영, 박선희, 윤경예, 신성률, 조평자 씨 등 5.

방미영 씨의 억새풀, 정안수, 붓꽃 등은 우리 민족의 정한을 고전적으로 힘 있게 파고든 수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잘 쓰이는 않는 의고체 시어들과 구절들에 많이 기대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지 못하고 딱딱한 관념에 빠지는 게 아쉬웠다.

박선희 씨의  이은 도마, 낙과의 길목, 카톡방에 내리는 눈 등은 우리네 일상을 가볍게 터치하며 의미를 찾고 있는데 점수를 줬다. 그러나 유쾌한 발상들이 난무하며 시의 초점을 잃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신성률 씨는 유산지, 중세의 반도, 면천지 등 응모한 시 편편에서 시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소재나 주제 등의 내용이나 형식의 폭이 넓어 그 역량을 십분 인정했다. 그런 시적 역량, 혹은 강렬한 작위가 시에서의 간절한 그 무엇을 압도하고 있지 않나 되묻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조평자 씨의 숭어 훌치기, 추수, 물질경이 등은 자연과 어우러지는 우리네 전통적 삶 속에서 정한의 미학을 끌어올리는 솜씨가 좋았다. 음풍농월이 아니라 자잘한 삶의 속내를 파고들려는 현실주의적 태도에도 믿음이 갔다. 그런 정한의 미학과 현실주의가 작위적으로 결합되고 있는 게 흠이었다.

윤경예 씨의 구름의 파종법, 용접공에게 잠을 드릴게요, 깨를 볶는 집 등 편편이 다 밝고 맑았다. 삶의 자잘한 고통과 이웃 간의 불화, 심지어 죽음까지도 아주 유쾌하게 볶고 있었다. 세련된 은유로 이미지가 투명했다. 그런 이미지들이 메시지를 명징하고도 간절하게 전하고 있었다.

너도 알고 나도 느껴 알고 있지만 말로 쉽게 전할 수 없는 우리네 삶의 속내를 감동으로 소통하는 것이 시의 변함없는 덕목 아니겠는가. 해서 감동으로, 고통마저도 유쾌하게 소통하려는 윤경예 씨를 흔쾌히 우리 시단에 밀어주기로 심사위원들은 의견일치를 보았다. 윤경예 씨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네 분도 그 역량으로 보아 시단에서 곧 얼굴을 보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심사위원: 김명인(시인), 김윤배(시인), 이경철(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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