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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파종법  6편 / 윤경예

 

구름이 왔다 물과 결이 수직으로 쏟아졌다

씨앗을 뿌리는 계절,

비는 산과 나무와 강의 모든 음색을 바꿔놓는다

 

가려운 피를 갖고 있는 씨앗들

밭의 둔턱으로 뛰어들었다

강의 뼈를 제 그늘로 뭉게뭉게 피워내는 도술

구름의 속도를 갖기 위해,

씨앗은 안테나를 세웠고 몸의 생장점을 기록했다

 

빗소리로 강은 날카롭게 둥글어지고

지붕은 집나간 영혼들을 처마에 숨겨준다

뿌리를 모으고 있는 저 감자들,

으레, 식물들의 체위는 굽은 직선이다

기를 쓰며 수직으로 눕는 나무는,

구름의 파종법을 견디지 못하고 뿌리를 허공에 두었다

 

높고 낮고 틈만 있다면 물빛으로 메우는 빗소리

백년 된 씨앗마저 깨우는 소리,

감자는 저녁을 끌어다 덮어 별 하나 키운다

제 어머니 무릎뼈 갉아 먹는 소리로

감자는 둥글어진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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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접공에게 잠을 드릴게요

      

용접공의 가방엔 숱한 구멍 뚫린 작업복이 있다

무섭도록 조용한 선글라스도 있다

속눈썹 몇 개 떨어져 나와 테에 묻었다

용접공 눈물의 무게는 알 수 없었고

대신 벌겋게 달아오른 실핏줄만이

불꽃이 가닿는 철판의 노동을 일러줬다

 

컨테이너 판을 용접하는 작업화,

사다리를 난간에 놓고 쇠를 밟는다

쇠와 쇠를 붙이는 일은 밤의 두께보다 한층 짙었다

서로 다른 성질을 다 읽는 순간까지

불꽃은 하나의 꽃무늬가 되어야 했다

 

단번에 자르거나 쇠를 붙이는 산소용접기,

까맣게 그을리는 것은 쇠가 아니라 그의 손등이었다

손등엔 점점이 찍힌 무늬 혹은 불이 지진 상처

성좌를 본 것 같았다

궤도를 이탈한 별똥별 같았다

 

오늘도 모든 준비는 끝났다, 컨테이너 처마에 붙이는 간이지붕,

윙윙 터지는 불꽃의 꿈, 구름과 구름도 이어붙일 기세다

 

저 지평선 끝에는 장마전선을 붙이는 용접공이 있을 거다

그렇다면 비는 그가 튕겨놓은 물꽃이 아닌가

밤새도록 꿈틀거리는 작업화의 눈이

불꽃의 채도를 버리지 못했다

눈물은 지금 사막을 건너고 있고

잠은 길 위에 잠시 머무는 바람의 집을 찾는다

 

 

 

 

  

깨를 볶는 집

     

뭐든 다 볶아야 하는 집, 여름이 무너진 자리를 볶고 있다

깨 볶는 집은 면사무소와 소방서 옆에 있다

컵라면에 물 붓다가 뛰쳐나가는 출동 벨소리도 볶고

소방헬기 프로펠러도 볶는다

산소마스크의 무기력도 볶는다

복지사와 독거노인이 상담하는 소리와

베트남 여인의 주민등록증의 인장도 볶인다

 

무쇠솥으로 하루를 볶는 노인

세상만사 따위는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무엇인가 볶을 것이 있다면 들기름집으로 가자

 

노인은 어제 콩을 볶았고 둥굴레를 볶았고

지금은 깨를 볶는다

물기 말린 들깨 알들, 방아깨비처럼 튕겨나간다

철거 독촉장과 수술비 걱정도 볶아 날려버린다

자주 넘어져 울고 웃던 무릎도 바싹 볶아졌다

마른 깻단처럼 말개지는 것은 노인의 코가 아니라

배경이 된 풍경이다

 

오늘도 휘휘 반짝이는 소리들,

황토 뒤엎는 빗소리도 아니고

깨벌레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도 아니다

무쇠 솥이 새타령 부르고 있는 거다

 

깨꽃이 타닥타닥 저녁의 얼굴로 환해진다

바람, 한줄기 툭툭 여러 갈래로 지나간다

너도 가고 나도 가고 그늘처럼 들이친다

 

 

 

 

 

갈대가 운다

  

뗏장 밑이 저승길이라고

맨살 부비는 갈대가 운다

툭툭 떨어져 으깨진 발자국들이

봉분 앞에 모여들 때,

 

우리는 삽자루처럼 서서

담배 한 개비 불붙여

서쪽으로 올려 드리고

서쪽부터 뗏장을 입힌다

 

낚시 좋아하는 아버지,

죽어서도 가물치 낚으시라고

저수지 내려다보이는 곳에 묘를 썼단다

 

그때 산그늘을 뒤흔드는 까마귀처럼

봉분 한쪽이 열린다

저승으로 옮기는 주소, 글씨가 까맣다

아니 촉촉하다 뗏장 뿌리 내릴 때까지

신발 끈 조여매고, 사십구일 동안

본적으로 뒀던 뒤주 냄새를 지울 것이다

 

    

 

 

 

빗소리와 흰 개

   

흰 개는 지금 비를 맞고 서 있지

가죽나무는 죽은 자리에 비를 가뒀지

개는 으르렁거림도 없이 그저 앞발을 모으고 있지

목줄 달아난 그림자만 생각하지

 

비는 계속 굵어지는데

개의 앞발엔 검정 흙이 튀었지

늑골엔 털이 빠져서 빗소리만이 고이지

담장 그늘

개가 짖었던 소리가 보이지

그동안 개가 짖었지만 담장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해서

개의 입모양만을 기억했지

 

빗소리에 묶여 있는 건, 목소리를 잃어가는

개의 두시였지

분꽃이 뚝, 뚝 떨어지는 두시였지

 

번개는

웅덩이 하늘을 감고 올라가고

무지개는 나뭇잎 스피커 뒤에서

나왔지

 

개와 빗소리에

잘려나간 것은 계절의 간극이었지

하나같이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사건이었지

화재경보 울리는 오후 두시였지

 

빗소리가 내리고 있다고 믿는 흰 개,

파리 떼 뒤집어쓰고, 죽어가지

오후 두시의 틈새에서 죽음의 주파수를 맞추지

  

 

 

 

 

달의 시계

    

달의 시계는 뿔고둥이다

 

뿔고둥이 작두섬에 달을 지고 오면

어머니 물속으로 뛰어든다

수달처럼 전복과 소라를 읽는다

점자를 읽듯 바다를 읽어낸다

 

회오리 파도를 몸에 감고

저음으로 먹먹해지는 심해까지 다녀온다

올망졸망한 것들이 망사리를 채울 때마다

현기증은 귀를 멍들게 하고

물갈퀴는 발을 부르트게 했다

 

빨랫줄 귀퉁이에 널린 어머니 옷가지에서

밭은 물숨 사락사락 만져지는 늦은 저녁

전복껍데기와 퉁치*를 넣고 끓인 뜸북국이

두레밥상을 차지했다

어머니는 그것을 아가미국이라고 불렀다

숨을 먹고 자란 것이었으므로

 

나는 뿔고둥 삶은 것을 잘도 빼먹었다

아무데나 나를 마구 부려놓고

어머니의 신발은 작두날 속으로 뛰어든 밤,

뿔고둥에는 생계의 초와 분이 흐르고 있었다

 

* 새끼 민어의 전라도 사투리.

 

    

 

 

 

끝물

       

귀뚜라미는 구석을 키운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구석을 키운다

맨드라미 밭을 넘어왔다

채송화 밭은 더듬이에 이고 왔다

고추밭은 그냥 두고 왔다

 

탄저병 걸린 꼭지엔 그림자만 살아있다고

귀뚜라미는

태양을 움푹 찔러보고 왔는지

울음만 붉게 젖어 있었다

그늘만 푹푹 빠지는 말매미 소리를 찾아왔지만

삼년 째 똥오줌 받아내고 있는

어느 집 마당에 와서야 제 발톱을 다듬고 있었다

 

소리는 말려야 한다는 것을 귀뚜라미는 안다

끝물, 목숨 길처럼

배밀이로 마루까지 안방을 밀고 다니는 귀뚜라미는

오늘, 제가 가야할 길을 열어주는 저승사자를 만났다

 

통곡의 강을 열어주는 귀뚜라미

담장 길을 뚫고 있었다 죽음이

저 혼자 가기 싫다고 달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당선소감

 

청개구리는 긴 겨울을 어떻게든 버텨내기 위해 제 핏줄과 신경까지 얼어 붙인 채로 회색의 체면에 빠진다고 한다. 핏줄 얼어붙고 살 얼어 터지는 소리를 기록하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기다릴 것이다. 심장 소리 다시 켜지고 팔딱팔딱 튀어 오를 파란 몸뚱어리의 봄을, 봄은 제 등을 먼저 밟고 온다는 것을 청개구리는 믿어 의심치 않았으리라.

보이지 않을 뿐 누구에게나 삶은 치열하다. 나답게 사는 일은 더욱 그렇다고 본다. 청색을 버리고서라도 청개구리가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 단지 목숨뿐이었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 같다. 청개구리에게도 어떤 간절한 바람이 있었을 것 같다. 저 밑바닥까지 속속들이 자신을 좌절하게 하는, 그러나 또 살아지게 하는 그것, 꿈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나에게 시란 논 틀 밭 틀 울음소리로 맘껏 뛰어다니며 무논 가득 빗소리를 쓰는 한 마리 청개구리가 되어 보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기꺼이 동파하기 직전의 신경 앞에서도 아직은 견딜 만하다고 다독였던 것 같다.

당선 소식이 들리던 아침은 처마 밑 둥지를 들락거리는 새소리가 유난히 맑고 맑았다. 제 코앞에까지 다가가도 이젠 도망가지 않는 부리엔 가을이 묻어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좋은 징조였던가 보다.

이 순간 감사한 분들이 참 많이 떠오릅니다. 아직은 거칠고 볼품없는 나의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가장 먼저 감사드립니다. 육신은 물론 정신마저 시들어가면서도 잘 버텨주고 계신 친정엄마께 이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별말은 없었지만 한결같은 신뢰의 눈빛으로 지켜봐 준 남편과 생일 선물이라며 시집을 건네던 아들과 딸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또한, “그것이 뭔지 난 잘 모르지만, 여하간 우리 며느리 장하다 장혀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은 시어머니께도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다.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작은 바람 소리의 웅얼거림에도 귀를 바짝 세울 것이고 밀어내지 않는다면 오래도록 들여다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만의 언어를 받아쓰겠노라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

  

  

 

 

 

심 사 평

 

1회 남구만신인문학상 응모작은 전국에서 모두 70여 명의 1000 . 이 중 10명의 작품이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왔다. 남구만신인문학상은 우리 국민이 널리 읊고 있는 동창이 밝았느냐를 비롯해 9백여 편의 시로 조선 숙종으로부터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까지 받으며 우리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약천 남구만(16291711)의 문학과 애민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상.

이런 상 제정 취지에 맞게 우리 문학 발전을 이끌 역량 있는 신인을 뽑기 위해 심사에 만전을 기했다. 본심에서 마지막까지 경합한 응모자는 방미영, 박선희, 윤경예, 신성률, 조평자 씨 등 5.

방미영 씨의 억새풀, 정안수, 붓꽃 등은 우리 민족의 정한을 고전적으로 힘 있게 파고든 수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잘 쓰이는 않는 의고체 시어들과 구절들에 많이 기대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지 못하고 딱딱한 관념에 빠지는 게 아쉬웠다.

박선희 씨의  이은 도마, 낙과의 길목, 카톡방에 내리는 눈 등은 우리네 일상을 가볍게 터치하며 의미를 찾고 있는데 점수를 줬다. 그러나 유쾌한 발상들이 난무하며 시의 초점을 잃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신성률 씨는 유산지, 중세의 반도, 면천지 등 응모한 시 편편에서 시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소재나 주제 등의 내용이나 형식의 폭이 넓어 그 역량을 십분 인정했다. 그런 시적 역량, 혹은 강렬한 작위가 시에서의 간절한 그 무엇을 압도하고 있지 않나 되묻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조평자 씨의 숭어 훌치기, 추수, 물질경이 등은 자연과 어우러지는 우리네 전통적 삶 속에서 정한의 미학을 끌어올리는 솜씨가 좋았다. 음풍농월이 아니라 자잘한 삶의 속내를 파고들려는 현실주의적 태도에도 믿음이 갔다. 그런 정한의 미학과 현실주의가 작위적으로 결합되고 있는 게 흠이었다.

윤경예 씨의 구름의 파종법, 용접공에게 잠을 드릴게요, 깨를 볶는 집 등 편편이 다 밝고 맑았다. 삶의 자잘한 고통과 이웃 간의 불화, 심지어 죽음까지도 아주 유쾌하게 볶고 있었다. 세련된 은유로 이미지가 투명했다. 그런 이미지들이 메시지를 명징하고도 간절하게 전하고 있었다.

너도 알고 나도 느껴 알고 있지만 말로 쉽게 전할 수 없는 우리네 삶의 속내를 감동으로 소통하는 것이 시의 변함없는 덕목 아니겠는가. 해서 감동으로, 고통마저도 유쾌하게 소통하려는 윤경예 씨를 흔쾌히 우리 시단에 밀어주기로 심사위원들은 의견일치를 보았다. 윤경예 씨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네 분도 그 역량으로 보아 시단에서 곧 얼굴을 보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심사위원: 김명인(시인), 김윤배(시인), 이경철(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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