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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 박예슬

 

오후엔 내내 먼지를 세었답니다
창가에 머물던 쇄빙선이
바다를 향해 출발했고
걸음이 길을 부술 때마다 저는
한없이 목이 길어졌지요

유리병입니다
얼음으로 가득합니다

식지 않는 코코아,
쪽지가 흘러내리는 테이블,
부서지는 모래알,
튜브를 타고 떠내려 오는
라디오 소리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쇄빙선은 하얀 구름을 가르고 있었고,

투명한 타일들은 계속 떨어집니다
부딪혀 달그락거립니다

펭귄은 정말 바다에 있나요
타일이 또 떨어집니다
발꿈치가 시려워 까치발을 듭니다

 

 

 

 

언니에게 / 김보라

 

학교와 반대방향, 발을 내딛는 대로 비탈진 길은 어느새 몸속으로 들어와 언니를 걷고 있지 딱딱한 구름의 계단을 오르면 얼굴이 붉어지는 동백숲에 사라진 언니의 신발 한 짝이 벗어져 있어 볕이 들지 않는 열아홉, 언니의 치맛자락에 꽃잎 포개어지고 발목 없는 삭정이들 바람을 붙들어 목에다 두르면 어느덧 겨울 머리카락까지 꼭꼭 숨긴 푸른색 그늘에 꽝꽝 얼어있는 빗소리 술래가 되어 언니를 불러 길 잃은 다람쥐가 길을 묻는 길목에 어느새 한 그루의 나무가 된 언니, 꼬리를 살랑이는 그림자가 새벽을 뛰어 넘으면 새록새록 젖은 언니의 눈망울에 잘 익은 청춘이 토도독 눈을 떠 별들은 빛을 뻗어 아득히 먼 집을 움켜쥐고 시간을 뒤집어 놓은 바위는 무덤의 형상으로 굳어있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세상이란 테가 더 촘촘해지는 일 언니의 열아홉이 고스란히 뿌리내린 동백숲에 세상에서 가장 붉은 꽃이 되어보는 언니, 오늘은 꽃잎이 허공 가득 흐드러지는 밤이야

 

 

 

 

 

[심사평]

 

응모된 원고는 총 33편으로 예년에 비해 응모작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응모자 중에서 1차 예심을 통과한 사람은 총 5명이었는데 다섯 사람의 작품 중에서 마지막까지 눈여겨 살펴본 작품은 ‘부고’, ‘코코’, ‘블루스’, ‘진달래 타이머’, ‘좀비’, ‘화장실’, ‘나의 옴파로스’, ‘언니에게’, ‘밥’, ‘경사 45도’ 등이다. 이 중에서 ‘진달래 타이머’ 외 2편은 알레고리적인 비유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미지를 완성하고 확장하는 능력, 상상력 등의 전개에서 아직 미숙한 점이 보였다.

무엇보다 시적 소재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내면이나 시적 모티프, 창작 동기 등이 모호한 점이 단점이었다. ‘경사 45도’ 외 3편의 경우도 산만한 전개, 표현의 정확성이 부족한 수사 등 집중도가 부족한 상태에서 작품을 인위적으로 완성하려는 억지가 보여 제외되었다. ‘나의 옴파로스’ 외 2편과 ‘부고’ 외 2편의 경우도 아직 적지 않은 단점이 보였지만, ‘부고’, ‘블루스’, ‘코코’는 감성이 살아 있어서, ‘나의 옴파로스’, ‘언니에게’, ‘밥’ 등은 전체적인 안정성과 완결성이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나의 옴파로스’ 외 2편의 경우 다소 상투적 구성과 어휘 구사, 시적 감정의 작위성 등이 두드러져서, ‘부고’ 외 2편은 시상의 단순함, 감상적 결말 등에서 부족함이 보여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언니에게’와 ‘부고’를 아쉽지만 가작으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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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박물관 /

 

잠깐이지만
아무도 손아귀에 쥔 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돌 자신조차도

이날 서 있는 것이 어려워졌다
진열대에다 그릇을 나란히 놓는 게 힘들어졌다
돌이 있었는데, 모두가 달력에 숫자를 모아 놓았는데
새로 구한 유리 물병이 문득 오래되었을 때

나는 돌들에게로 내려갔다
털이 촘촘히 자라나는
나무 상자 속에 든 추위를 생각했다
몇 개의 형틀과 붉은 카펫

나는 알아요, 모두의 맨발이 얇고
오래된 집의 마룻바닥을 둥글게 한다는 것
발과 보석이 가진 고통은 흔한 것이어서
아무런 장식 없이도 두개골은 아름답다는 것

나는 또 걸어다닌 길이만큼 늘어난 모피를 생각했다

놋쇠반지가 비워둔 좁은 구멍이 있고
그 안에서 흰 돌을 끊임없이 골라내고 있었다
팔 없는 사내가 오고 있었다
물떼새가 죽고 있었다
팔 없는 사내가 오고 있었다

물떼새가

아무도 돌에게 차례를 주지 않았다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걸려 넘어지는
하룻밤 새 늙어버린 돌을 수명
죽은 내가 죽은 사실조차 기어나지 않게 되는 때

 

 

 

 

가작

 

귀뚜라미

 

나의 움직임은 가장 불규칙한 곡선이다
하나의 무늬 아래 갇혀 있다거나
어머니의 귓속에서 산란을 말하는 것은 나의 주된 습성
아무도 나의 혼탁한 겹눈을 모른다
흑갈색 시월은 오히려 반대로 발달하고
잡식의 바람은 늦가을을 삼킨다
힘세던 목소리는 무엇보다 길고 뾰족했지만
다 얼어버린 밤은 늘 무의미하다
어머니는 우리가 인간의 선조일지 모른다며 농담을 했다
찌르르르, 퇴화된 추억
짙어진 안개를 촉각으로 느낀다
접혀진 날개는 전혀 안부가 없고
나는 반짝이는 것들은 모두
야행성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치 않은 가시를 가지고
여기저기 돌출한 도시를 피해가는 것
길에서 마난 침묵들과도 악수를 하며
나는 월동 준비를 한다, 내가 걷는 곳마다
어머니의 지문들이 새겨진다
목적지는 새하얀 잠들이 산재해있는 곳
지금 비록 나는 땅의 숨 속에 미끄러지지만,
나는 가장 작은 몸으로도
가장 높게 뛸 수 있다

 

 

[심사평]

올해의 투고작은 예년에 비해 그 양이 현저히 늘어났고 작품의 수준 또한 놀랄만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총 16명 52편의 작품을 심사했는데 13명 정도의 작품이 당선권에 해당될 만큼 안정된 완성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박물관’, ‘얼음구멍에서 나오는 법을 보여드리지요’, ‘손금’, ‘귀뚜라미’, ‘안식년’, ‘십구세 수요일 성공시대와 나’, ‘벤치’, ‘거짓모과의 영감’, ‘곱창집의 시인’, ‘릴레이’등의 작품을 남겨 놓고 작품의 장단점을 비교했다.

대체로 뛰어난 작품들이었지만,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에 있어 다소 편차가 나타났다.
‘박물관’, ‘얼음구멍에서 나오는 법’, ‘손금’, ‘귀뚜라미’는 시정 정서의 환기력과 형식적 안정감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다른 작품들도 모두 등단의 수준에 가까운 작품이었지만 이 네 편의 작품에 보다 많은 장점이 보였다.

특히 ‘박물관’은 시적 정서를 표현하는 안정된 어조와 구성이 좋았고, ‘귀뚜라미’는 울림이 있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귀뚜라미’의 시상은 다소 평이한 안정성에 머문 듯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박물관’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김춘식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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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밤의 놀이공원 / 박민혁

 

먹구름들이 수두처럼 흘러와 있다 세간에는 역병이 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정지해 있다 생은 늘 간이역에 있었다 바람이 이따금씩 여러 겹 덧칠된 페인트의 표면으로 둔기를 던진다 녹슨 쇠붙이들이 구슬픈 웃음을 흘렸다 비루먹은 목각벤치들은 개처럼 짖지 않았다 작은 뱃머리에 앉은 피노키오가 코가 떨어져 나간 채 웃고 있다 바닥에 깔린 블록들이 단단한 치아처럼 서로를 붙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교정니를 한 채 웃던 너는 어디로 갔을까 누군가 강제로 혀를 집어넣으려 했다 나무들의 앙상한 갈빗대 사이로 바람은 쥐떼처럼 오갔고, 허공을 갉아 찬 공기를 쏟아냈다 병(病)은 오랫동안 피리를 불어댄다 어둠처럼 질긴 쉬파리들이 저녁을 덮고, 어린이들의 출현은 기약 없었다 폭죽은 물집에서만 피고름처럼 터졌다 과잉된 겨울 내일은 다시 어린이의 날,

 

 

 

가작

선물 사러가는 날 /심혜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는 유독 발이 아프다
외로움은 하층민의 습관이라던
한 교수의 말을 몰랐던 때에도
생일에는 늘 혼자였다
착한 사람 증후군을 앓는 나
계단에서 낮은 숨을 쉬던 이는
내츄럴 베이지 파운데이션으로 덮어둔다
헤어진 연인의 생일
선물을 사러 간다
시인들이 잠든 책장 앞에서
뜯어진 만화책을 몰래 보는 나는
부끄러울 게 없다
비싼 잡동사니를 파는 곳에서
꿀벌의 춤을 춘다
컵라면 용기의 뚜껑을
온몸으로 붙드는 플라스틱 인형이
들썩거리는 머리를 누른다
현기증이 나고, 손끝이 저릿하다
오늘도 초콜릿을 물고
혈당 대신 흘러내리는 가면을 끌어 올린다

 

 

 

[심사평]

 

총 27편의 응모작 중에서 일정한 수준 이상을 갖추고 있는 작품은 ‘명왕성’ 외 3편, ‘머무름표(;)’ 외 2편, ‘밤의 놀이공원’ 외 2편, ‘선물 사러가는 날’ 외 2편 등 4명의 투고작이었다. 이 중 ‘머무름표(;)’ 외 2편은 다소 미숙한 점과 시상이 깊지 못한 점이, ‘명왕성’ 외 3편은 산뜻한 이미지와 언어가 장점임에도 발상이 소박하다는 점이 각각 단점이어서 수상작에서 제외되었다.

‘밤의 놀이공원’은 삶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언어의 조합이 뛰어났고, ‘선물 사러가는 날’은 투고작의 수준이 고르며 시적 포에지가 선명한 점이 장점이었다.

그러나 ‘선물 사러가는 날’ 외 2편의 경우 구성이 다소 취약한 점, 이미지가 다소 모호한 점 등의 약점이 있어 당선작은 ‘밤의 놀이공원’이 선정하였다. 다소 언어의 과잉이나 과장이 없지 않으나 가능성이 많은 작품이었다. 수상을 축하하며 더 많은 발전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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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병아리 / 오상미

 

상자박스가 우리의 삼층 침대가 되었다. 찬 신문지 바닥에서

 

이렇게 목 놓아 울면 나 좀 봐 주겠어요?

 

바람이 너무 차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양 팔의 깃을 세우고 똥구멍에 힘을 꽉 주고 말한다.

 

어때요 발성이 괜찮나요? 어서 나를 데려가 주세요

 

고양이가 날을 세우는 장면이 오버랩되며 나는 지금 잡아먹히러 간다

 

어차피 금방 죽어버리는 병아리일 뿐이다 그래

 

걱정되세요? 똥줄이 탈 정도로 오래 버티게 노력해볼게요

 

우리의 종족은 장수만 한다면 무척이나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

 

병아리 공장의 상품들에게 하자가 있다는 건, 꼬마들은 모르니까 숨기도록 

 

사창가의 언니들도 젖가슴을 꺼내놓고 있지 않잖아 내 똥구멍을 보지는 말아주세요

 

꼬장꼬장한 단 돈 천원을 갖고 병아리를 주무르는 꼬마의 손과 사창가를 더듬으러 오는 아저씨

 

그렇게 큰 손으로 나를 조물조물 구석구석 만지는 건 이젠 정말이지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아

 

내 삐약거리는 신음소리가 당신들 귓가에 남을지도 몰라요

 

비웃음치는 당신 달팽이관에 우리의 목소리를 모두 삽입하겠다

 

종이상자 벽에 김이 서리며 바닥이 젖어가고 있다

 

 

 

 

[심사평]

 

응모된 작품을 모두 읽고 나자 네 명의 투고자가 눈에 띄었다. 네 명 모두 모든 투고작에서 고르게 안정되고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 주지는 못했지만 각각 한, 두 편 정도의 완성도 높은 작품은 지닌 투고자였다.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곶감」, 「쉬운 병아리」, 「흠뻑 젖은 오후에」, 「25년 1章」, 「누에」, 「그림일기」, 「12月, 나는 시집을 덮고 凍死했다」 등이다. 「12月, 나는 시집을 덮고 凍死했다」는 다소 서툰 점이 없지 않으나 시상이나 화자의 어투 등에서 참신한 점이 있어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투고자의 창작 능력에 대한 확신을 주기에는 완성도가 부족했다. 「누에」, 「그림일기」는 시의 종결부분이 억지로 짜 맞춘 듯이 보이거나 도식적이어서 오히려 시적 긴장이 무너지는 것이 단점이었다.

「25년 1장」, 「흠뻑 젖은 오후에」는 시 창작에 익숙한 솜씨를 보여주지만 시적 이미지와 언어의 명징성이 떨어지는 등 습관적인 결점이 눈에 띄었다. 「곶감」은 단조롭고 평이하지만 명징한 서술, 이미지의 표현 등이 좋고, 「쉬운 병아리」는 시적 구상이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안정감 있는 시적 전개를 보여준 점이 장점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시의 완성도, 안정성을 보여준 「쉬운 병아리」를 당선작으로, 종결부분이 취약하기는 하지만 시적 포에지를 지닌 「누에」를 가작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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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수업이 끝난 강의실에 앉아 / 박소란

 

부르주아 냄새가 나는 노교수의 뒤를 따라
옆구리에 시론을 낀 학생들 차례로 쓸려나가면
빈 강의실은 조심스런 숙제처럼 남겨진다
무심한 바람이 닫힌 문을 할퀴고
그 할퀴어진 자국이 아프게 시리다
언제부턴가
어둑해진 창 밖 수척한 은행 한 그루
물끄러미 내 눈을 들여다본다
웅크린 가지나 살갗을 드러낸 뿌리가
아주 사소한 듯 흔들릴 때마다
내 몸도 따라서 가볍게 흔들리다가
문득 그 아래
습작처럼 구겨진 이파리를 줍고 싶다
사는 것엔 저마다의 방패가 필요한 법이라고
지독하게 구린 열매 몇 알 달고 선
나무의 듬쑥한 마음을 읽고 싶다
나무가 자꾸만 바람 쪽으로 기울 때마다
내 몸도 따라서 가만히 기울이다가
분주히 찾아드는 추운 계절의 소리를 듣는다
옹색한 상처가 금세 들통 나고 이젠
내 몸 어딘가 구린 열매 몇 알 달고 설 차례다

 

 

가작

 

흰나비가 날아오는 날이면 / 선샤인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케케묵은 스타킹을 빤다

 

스타킹을 조물락거리며 비비는 손등 위로
그녀가 느닷없이 팔랑이며 왔다
몇 해전 새하얀 머리로 떠났을 때 만큼이나
하얀 날개를 달고 찾아 와서
아니라는, 아직 멀었다는 날개짓으로 잔소리다
거품기 가시지 않은 손을 뻗어 잡으려 할 때
꾸지람만 덩그러니 남기고 잘 있으란 말도 없이
이웃집 나무 사이로 성큼성큼 사라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의 눈동자에 찡하게 아지랑이 피어오른다

 

햇빛 한 가득 차 있는 마당
전기줄 따라 하늘을 가르는 빨래줄에
메리야스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던
오이지 같은 할머니의 젓가슴을 널면
어린시절 가슴에 박힌
욕쟁이 할마이의 매서운 문장들이
저릿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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