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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수업이 끝난 강의실에 앉아 / 박소란

 

부르주아 냄새가 나는 노교수의 뒤를 따라
옆구리에 시론을 낀 학생들 차례로 쓸려나가면
빈 강의실은 조심스런 숙제처럼 남겨진다
무심한 바람이 닫힌 문을 할퀴고
그 할퀴어진 자국이 아프게 시리다
언제부턴가
어둑해진 창 밖 수척한 은행 한 그루
물끄러미 내 눈을 들여다본다
웅크린 가지나 살갗을 드러낸 뿌리가
아주 사소한 듯 흔들릴 때마다
내 몸도 따라서 가볍게 흔들리다가
문득 그 아래
습작처럼 구겨진 이파리를 줍고 싶다
사는 것엔 저마다의 방패가 필요한 법이라고
지독하게 구린 열매 몇 알 달고 선
나무의 듬쑥한 마음을 읽고 싶다
나무가 자꾸만 바람 쪽으로 기울 때마다
내 몸도 따라서 가만히 기울이다가
분주히 찾아드는 추운 계절의 소리를 듣는다
옹색한 상처가 금세 들통 나고 이젠
내 몸 어딘가 구린 열매 몇 알 달고 설 차례다

 

 

가작

 

흰나비가 날아오는 날이면 / 선샤인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케케묵은 스타킹을 빤다

 

스타킹을 조물락거리며 비비는 손등 위로
그녀가 느닷없이 팔랑이며 왔다
몇 해전 새하얀 머리로 떠났을 때 만큼이나
하얀 날개를 달고 찾아 와서
아니라는, 아직 멀었다는 날개짓으로 잔소리다
거품기 가시지 않은 손을 뻗어 잡으려 할 때
꾸지람만 덩그러니 남기고 잘 있으란 말도 없이
이웃집 나무 사이로 성큼성큼 사라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의 눈동자에 찡하게 아지랑이 피어오른다

 

햇빛 한 가득 차 있는 마당
전기줄 따라 하늘을 가르는 빨래줄에
메리야스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던
오이지 같은 할머니의 젓가슴을 널면
어린시절 가슴에 박힌
욕쟁이 할마이의 매서운 문장들이
저릿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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