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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의 푸가

(장민기 / 명지전문대학 문창 2 )

 

해바라기 농담

(하승훈 / 상계고등학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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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 (김혜린 / 숭실대학교 문창 4 )

 

 

 

시계 모양을 한 골목 / 장수민 

 

 

종로에는 몸통이 긴 괘종시계 모양을 한 골목이 있다
그 골목의 노인은 시간의 빈틈을 찾아낸다
눈가를 구기느라 몇 겹의 주름을 가진 백발의 수리공
그의 눈에 두꺼운 돋보기 하나 끼워져 있다
어두운 시계방 책상 앞 옅은 불빛 하나 빛나고
잔뜩 굽힌 몸 뒤로는 새마을 금고, 박힌 큼직한 달력
그 옆에 누래진 국가 유공자 증서 걸려 있다

노인은 잊혀진 시간들을 감고 있다
시간을 흩어지게 하는 그는
조그만 부품들이 펼쳐진 책상의 가장자리에서
곳곳에 흠집 난 돋보기 너머로 녹이 슨 태엽을 본다
몇십 년간 팔목에서 묵직하던
칠이 조금씩 벗겨진 손목시계를 쥐고
멈춘 톱니바퀴를 맞물리게 한다
초침과 분침이 지나온 시간을 훑어낸다

그는 부러진 시간을 고친다
창고에서 발굴된 부품마저 닳아빠진 괘종시계
닦고 닦아도 먼지가 내려앉는 시계를 쥐고 있다
1950년경 부러져 멈춰버린 시간이 그로 인해 흘러간다
시계 골목이 좁아져갔으므로 자처했던 부랑자에서
1953년 군복을 벗던, 많은 이의 우상으로 돌아가는 노인

하루내 시간을 감아내고 나면
그 짧은 골목만 시계 바늘을 한껏 돌려놓은 듯
색 바랜 간판들이 펼쳐진다
사라지는 햇빛을 따라 금은방들은 하나둘 셔터를 내리고
수리공은 까마득한 어둠이 머물고 가는
괘종시계 모양을 한 골목을 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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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부] 미식(美食) / 임대섭

       

숲을 오래 걷는다

숲이 숨을 몰아쉬고 습기가 될 때까지

 

심장은 거꾸로 선 뿌리

 

괴물은 괴물이 되기 위해 제 살부터 씹는다

 

이에 낀 첫 살

맛의 죄

 

심장은 거꾸로 선 뿌리

 

내 피로 나는 무성해진다

바닥의 깊이로 갱신되는 성장 후의 생장

나는 추락의 가능성

 

여린 무릎의 멍이 다년생으로 죽는다

나는 나에게만 미안하다

 

살을 섞는다

 

너를 삼켜도 내 맛이 나

 

침을 삼킨다

머리부터 떨어지기 위해선 얼마나 자라야 할까

한 번에 부서지기 위해선

 

깨진 것들은 잔뜩 웃는 것 같다

 

살을 섞으며 섞이는 건 몸이 아니라 맛이다

 

내 몸 밖에서 무언가 깨지는 것 같은데 내 몸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것 같은데

숲이 끝났다

 

어둠 속에서 괴물의 입이 밝게 부서진다

뒤엉킨 살덩어리

우리는 이곳에서 다정하다

 

 

 

 

 

[고등부] 오도독뼈 / 김상희

 

그 집 모퉁이에 세 들어 살고 싶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거긴 비 오는 것도 큰일이겠지 싶었다

그녀는 허리가 굽고 배가 나와 설거지를 할 때면

티셔츠의 배 부분이 젖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안기는

주인의 어린 딸이, 그 딸이 기억하는 어미의 품이

축축하여 비린내가 났다

 

나는 장손이라 오도독뼈를 먹지 못했다 그녀는 소 돼지의

여린 살을 먹지 못했다 그녀는 설거지 더미에서

찾아 낸 오도독뼈를 금덩이인 냥

혀 아래로 숨겨두었다 이리주세요 그녀는 축축해진

윗도리를 잡고 제 말은요, 그러니까 혀 아래 얼마간의 슬픔을

머금고 전혀 안 그런 것처럼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오돌뼈라고 부르셔도 고생하진 않으실걸요?

원래 우리가 편한 게 최고잖아요 사는 게

진창 같아도 여긴 우리나라니까요 나는 체류하던

환상에서 나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젖은 티셔츠, 물비린내 나는 고깃집 주인에게 나는 어째서 오돌뼈는

안 되는지 물어보지 못 했다 평생을 물어도 모를 일이었다

 

오돌뼈가 오도독 소리를 내며 혀 아래로

박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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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부] 대과거 / 전명환

 

이젠 모서리가 없는 관계를 믿을 수 있다

창틀 너머의 사건들에 관해서는 몰라도

미끄러지는 발자국은 여태 모아두었다

발자국이 쌓여 벽지 위에 계속 자라고 불 꺼진

하루는 병든 생각처럼 씹혀서

바닥도 언젠가 꺼져버릴 거라고 믿고 있다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과학자의 잠언과

더 이상 고양이를 키울 수 없다는 당신의 말에는

공통점이 있다

문을 두드리면 죽은 소리가 난다

두드리고, 두드리다 보면 대답하지 않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배울 수 있다

배울 수 있는 하루는 얼마나 비참한지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있다면

아무 일도 없는 하루의 어제와 또

하루의 어제에 대해 떠올리고 싶다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와 그 고양이가 우는 모습과

고양이 사진이 있고 사진이 없는,

지진처럼 지나가는 열차가 떠오르면

사람들 모습 사이 들어 있는 당신과

(당신 옆에서 깜빡이는 그림자)

방 안에서는 항상 가로등이 보이는데

바깥에서 안으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나는 닿을 수 없는 時制를 획득한다

무딘 조명 아래 차분하게 쌓이는 시간과

희미해지는 경계 덕분에 정말로

모서리가 없는 관계를 믿게 되었다

 

 

 


 

 

[고등부] 몽상 / 황주연

 

성년의 날 머리맡에 장미가 놓이기 전까지

몽상은 나를 살게 했어

여기는 침대가 아닌 선술집

가죽신발로 발을 구르고 선장과 건배를 하지

돛을 두른 여왕님을 따라 우리는 바다의 기사

용기 한줌으로 황금을 산다네

좋은 술 한통이면 모두와 친구가 되지

여관 주인은 말리지 않고 노래는 빨라지네

 

눈을 뜨면 보이는 천장과 야광별 스티커

헤진 스티커가 더 이상 발광하지 않을 때

여기는 길거리가 아닌 사막별이야

나는 월세 찾아 방랑하는 음유시인

운하에 들어오는 거대한 유람선은

바쁜 사람들을 싣고 도심으로 흐르네

액정을 보느라 굳은 사람들 얼굴은

밝은 크림색도 있고 구릿빛도 있어

 

동물원에 도착해서 먹이를 주려 했지

앵무새는 석류 대신 터키석을 물어가네

불씨 남은 담배가 침침하게 빛나는 거리

언제부터였을까

아라베스크 무늬처럼 복잡해진 몽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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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부] 당선작 없음

 

 

 

 

[고등부] 도시의 염부 / 강혜원

 

뜨거운 햇빛이 정육각형으로 굳어가는 유리수면

도르레를 풀고 내려오는 청소부가

창문에 쌓인 소금을 한쪽으로 밀어내는 이곳은,

아파트 염전

갈기갈기 찢어진 구름이 칸칸이 나뉜 통유리창에 담겼다 사라진다

몇 달 저 증발한 동료 하나는

반사된 풍경에서 짜고 쓴 맛이 난다고 했다

하얗게 퍼진 소금벽을 타고 사내는

이쪽에서 저쪽,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이동하며

종일 밀대로 얼룩 같은 풍경을 증발시킨다

부서진 알갱이 같은 생계를 쓸어 모으기 위해선

두려움을 빠르게 졸여내야 한다

줄을 당겨 신호를 보내는 대신

발을 굴려 옆 칸으로 움직이는 사내

공중을 지상처럼 디디는 경지에 오른 것인가

땡볕에서 증발되는 것들이 많아

그의 몸은 수분을 빼앗기고, 거칠게 말라가고, 피부는 검게 타

고글을 쓴 자리만이 하얗게 남는다

모든 자국에는 증발의 기억이 있다

목덜미를 쥐어뜯는 열기에

염전과 함께 몸이 뜨거워지는 동안

창문은 더욱 찬란하게 반짝이고

청소부는 말없이 얼룩진 포말자국을 쓸어낸다

얼룩을 보면 무엇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일까

추측하는 버릇은 이 일을 시작하면서다

새똥자국에도 배설의 온기가 한 때 깃들여 있었음을

사내는 안다

견딤의 시간 속에서 끝내 그는 가장 작은 소금결정이 된다

오래된 줄 하나에 온 몸을 맡기고

구획된 소금밭을 하루 종일 누빈다

유리창에 비친 무표정한 얼굴,

밀대로 쓱 밀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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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부] 멧돼지 / 황익순

 

견고한 산맥은 그럴듯할 뿐

멧돼지를 만족하게 할 수는 없다

 

어디라도 가서 당장 그곳 숨을 들이켤 준비가 되어 있는

멧돼지는 고궁보다 오래된 숲의 외곽을 순례하고 있다 마치

움직이는 네 발짜리 언덕처럼

 

음영을 제 발밑에 둔 채 비탈진 등 위로

울창한 수목의 대기를 걷는다 나뭇잎들의 온갖 색채를 밟으며

가죽 속 뜨거운 혈기를 지닌 멧돼지, 고대 대장간 같은 열기를 내뿜는다

멧돼지는 모든 비밀 통로를 행보한다 무덤을 파헤치고

유해마저 젖혀버리는 어금니를 계속 끄덕거리며 계절을 감지하고 있다

 

미숙한 포수는

마침내 사냥감과 마주쳤으나 총을 겨눌 생각을 못 한다

멧돼지는 너무 멀리 있으나 이미 그 앞까지 와 있고

희미한 표석과 같은데 이미 포수의 그림자까지 밟고 서 있다 멧돼지가

단단한 발굽 속에 고인 힘으로 젖은 땅을 미끄러뜨리려 할 때

두 귀를 멧돼지의 눈에 기울이면 포수의 심장 기척 소리

북이 고동치고 있을 때 마치 멧돼지 가죽 속 가득 찬

소리의 무게에 짓눌린 듯 포수는 두 발을 돌릴 생각도 못 하고 멧돼지가

뜀박질을 내리치려 할 때 튀어나온 귀신같은 사냥개 무리 짐승들은 엉켜

 

이제 없는 이리 떼로부터

이제 없는 호랑이로부터

이제 없는 곰으로부터

이제 없는 과거의 횃불로부터

이제 없는 구석기로부터

그러나 이제 바로 등 뒤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멧돼지는 석순 같은 어금니로

지금을 찢고 싶다

 

멧돼지의 비명이

온 숲에 메아리 울린다

죽음의 무게가 두텁다

그러나 멧돼지는

 

이제는 사라진

불타버린 과거의 숲 속에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모든 허공을 들이박고 있다

 

 

 

 

 

 

[고등부] 달리의 악몽 / 이세인

      

화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내과로 가자

내 상처는 이미 외상이 아니므로

붉어진 손은 계속 등 뒤로 숨겨 두었다가

의사를 만나거든 그때 꺼내야 한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내 안의 모든 것이 녹고 있다는 사실

녹은 시계가 나무에 걸려 있고

책상 위에도 늘어져 있다

 

꿈속은 언제나 뜨겁다

차가운 방바닥에서의 악몽

녹은 시계는 움직이지 않는다

축 처진 시곗바늘을 돌리려 하면

초침보다 날카로운 열기가

손끝을 마구 찔렀다

빨개진 손을 얼른 숨겨보지만

내 안에는 내과가 없다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내 눈꺼풀에는 잠이 늘어져 있다

천장은 꿈속 바다보다 멀다

귓가를 울리는 아득한 뱃고동 소리

 

머리맡 핸드폰 전원을 끈다

알람이 꺼지고,

녹은 줄 알았던 시계소리가 들려오고,

파란 물결이 흩어져버리고,

흐릿해진 내 손이 보인다

새벽 달빛을 두르고 있는 손

흉터는 아직 등 뒤에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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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부] 여름, 어시장 / 김지섭

 

가로등이 아물었다 생채기 같은

사람들이 돋아난다 하나둘 파라솔을 펼친다

 

그녀는 그늘 속에 앉아 꼬이는 파리를 쫓는다 사람들 발목에 파리처럼 들러붙는 목소리가 그녀의 그늘이다

감기지 않는 생선눈알이 녹슬고 있다 꼬깃꼬깃하게 주저앉은 노인의 눈동자, 동전처럼 거리를 구른다

껍질을 들추고 흐느적대는 바지락,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하던 남자가 혀를 내밀고 잠들어 있다

나는 바지락처럼 달그락거리는 집으로 전화를 건다 커튼 주름을 비집고 아이들의 부패된 목소리가 건너온다

 

가로등이 돋아났다 생채기 같은

사람들이 아물어간다 파라솔이 접히고 시장골목도 이젠 물러진다

 

 

 

 

 

 

[고등부] 장화 / 안성군

 

장화는 검은 늪이다.

아버지는 어쩌다 검은 늪에 두 발 빠지셨을까

철벅거리는 발자국소리는

왜 허우적거리는 소리로 들렸을까

늪은 신는 것이 아니라

조심해야 하는 곳이다

아무도 늪을 신어서는 안 된다

문밖에서 벗고 들어오세요,

엄마는 완고하다.

 

그렇지만 엄마, 아버지의 장화 속에는 물갈퀴가 자라고 있어요. 아침 이슬 속을 헤엄치거나 개구리밥 뜬 파릇한 논물 속을 자유롭게 유영해 요. 논물에 거꾸로 누운 몇 그루 미루나무 속을 헤집으면 잠잠한 가지 들을 휘젓고 파릇한 이파리들이 돋아나요. 봄부터 가을까지 헤엄쳐 다녀요.

 

장화를 털면

거름냄새가 쏟아져 나오는 그 속에는

발목 깊은 늪 속에서도 꿈틀거리는 폐어肺魚처럼

크고 억센 아버지의 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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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부] 꽃잎미끼 / 임경헌 

낚시꾼, 섬진강가에 퍼질러 누워 실지렁이들 상주 노릇을 하고 있네, 물결에 잡아먹혀 꿈틀거리는 살점을 좀 봐, 비린내만 펄떡펄떡 꼬리를 치지, 가끔 붕어가 수면을 뻐끔뻐끔 불어대도 낚이는 건 물결 뿐, 물살의 식욕은 웅덩이로 깊어져가고, 미끼는 어둠으로 스며드네, 허기 진 왜가리, 거꾸로 물살 타는 조팝꽃 한 아름 콕콕 쪼아대는데, 찌는 여전히 심연의 절벽에서 자맥질하고, 떨어져 누운 꽃잎들 저들끼리 지껄여대고

  낚싯줄에 물린, 만선의 꿈
  한 번 휘둘러 릴을 돌리니
  피라미, 수직의 힘에 턱이 꿰이네

강물이 실지렁이만한 물고리 한 마리 게워내고 있어, 낚시꾼 붕어만한 허파를 물굽이에 띄어 보내지, 팔뚝만한 강의 비늘들, 끝내 강의 밑바닥으로 파고 들고, 종일 실지렁이를 수장시켜 얻은 건 저린 다리 뿐인데, 홀로 고수인 사내, 또다시 정적이 입질 중이네, 물비늘도 조팝꽃을 미끼로 걸어 한몫을 다짐하고, 끝내 꽃잎에 낚인 봄, 힘차게 물질 중이야






[고등부] 호두 한 알 / 김경민

 

두꺼운 벽 너머 봉숭아 꽃망울 터뜨리는 봄빛산부인과

유리문 사이로 울음소리 하나가 터져나온다 순간

한껏 부풀었다 줄어들기 시작한 빈집 하나

호두과자를 굽는 여자는 때마침 달그락, 철판을 뒤집는다

모양틀에 반죽을 불고 앙금을 잘라넣을 때

안쪽부터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아랫배

그녀는 사라진 집의 기억으로 호두의 형상을 빚는다

유리문이 열리고 부푼 배를 안고 나오는 임산부

한 그루의 여자

단단하게 부푼 배에는

여러 갈래 주름의 자리가 준비되어 있다

밀가루로 빚은 껍질은 단단하지 못하다

줄어들기 시작한 세계처럼

금방 식어버리는 호두과자

뿌리없이 열리는 그녀의 열매들은

주름을 입고 순식간에 늙어버리고

불을 조절하는 여자의 아랫배는

잠시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텅 빈 호두알

바삭한 첫 울음 터뜨리며 굴러나온다

식은 과자를 담는 종이봉투에서

바스락, 마른 잎 소리가 난다

한그루 호두나무 불판에 데였는지 가지를 쓱쓱 문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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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부] 늙은 기관사의 집 / 이동한

 

늙은 기관사의 집은 역에서 멀지 않다

오늘도 기차소리가 파란 페인트칠 한 대문을 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지붕을 뚫고 지나가지만

그는 신발을 벗듯 기차에서 내렸다

 

마당의 복숭아나무 그림자가 철길 쪽으로 뻗어 있다

그림자의 발뒤꿈치가 철컹철컹 쇳소리를 내며

매일 역사로 출근하고 싶어 하는 눈치다

머물고 싶은 곳이 정작 떠나고 싶은 곳이라니,

그는 중얼거리며 처마 끝을 바라본다

 

구름 한 점 점멸등처럼 처마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는 철길위의 구름이었다, 집 밖에서 잠들던 날이 많았다

누구하나 내리던 이가 없던 적막한 신발에서

그는 빈 바구니를 들고 내렸던 것이다

 

그에게 잠깐 멈춤의 건널목은 없었다, 속도가

그의 집이었고 길이었고 평생의 월급이었다

멀리서 오는 기차소리를 듣고 미리부터

마당귀에 일렁거리는 복숭아나무 우듬지

 

늙은 기관사는 천천히, 처음으로

복사꽃 붉은 꽃잎 속을 들여다본다

침목처럼 단단하던 무릎이 시큰거리는 봄이다

 

 

 

    

 

[고등부] 유목민이 살고 있다 / 김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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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부] 신 거미인간 / 이서령

[고등부] 바닥 / 정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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