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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원창리 13호 / 허남훈

 

원창리 13호

 

누가 아직 밥을 먹고 있다

 

반쯤 열린 대문과 빨랫줄의 팬티와 널브러진 신발들은 한통속이다

 

숨죽인 나는

결의에 찬 그 아침의 사내처럼

아니 결례 앞에 주저하는 순한 청년처럼

아니 사실은 밀정처럼

 

대문가를 서성인다

 

80년이 지나도록 이곳에

표지석 하나 세우지 못한 우리가

 

배신자가 아니라면 누가,

 

아직 밥을 먹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회중시계의 바늘은 날카로워졌을 것이다

뱃속의 쇠고기 국은 더 뜨거워졌을 것이다

 

“선생님, 저와 시계를 바꾸시죠. 제게는 이제 한 시간 밖에 소용없는

물건입니다”

 

프랑스 조계 화룡로 원창리 13호

백범 김구의 낡은 시계를 품은 사내가, 두 아이의 아빠가, 스물다섯

의 청년이,

도시락과 수통을 들고 집을 나선다 그 아침의 소풍을,

그 영원한 찰나를, 담대한 선택과 직시를

 

뒤쫓던 나는 놓치고 만다

그랬을 것이다 그는,

아니 그들은 행적을 지우며 빠르게 걸었을 것이다

상하이에서, 항저우에서, 난징, 하얼빈, 그리고 광저우에서

 

상하이 하비로 312호

임시정부의 두 번째 청사 터에 들어선 H&M 매장

그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로

중절모에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바삐 걸어간다

 

그날,

가지고 간 도시락이 아직 남아 있다

누가 아직

 

 

 

 

 

[우수상] 독도의 노래 / 윤빛나

 

 

독도의 노래 출렁이는 어머니의 수첩

다시 파랑의 책갈피를 넘길 때

사자의 화음, 광휘를 번득이던 황금빛 동해 언덕

혹등고래 떼 우글거리던 영원의 바다가

독도의 심장에 정박하여 우람하다.

민족의 발자국 첨벙첨벙 백의의 역사.

물떼 묻은 하얀 손이 강철같은 정의의 밧줄을 뿌려

접안을 시도하던 겨레의 가슴들

백두의 바다가 태산처럼 독도를 세우던 무궁화의 아침.

사자의 바다가 과묵한 반도(半島)를 깨우고

푸른 가산도를 베고 누운 태평양의 한낮

하얀 우주의 시계 위에 건곤감리(乾坤坎離)

진리의 나래가 닳고 닳아도

청홍백(靑紅白), 불멸의 지느러미를 휘두르던 독도.

청룡의 땅, 독도 바다, 기린초 사는 숲속으로

물결치는 박주가리 고운 팔월, 전설의 바다.

하얗게 타오르던 어머니의 땅으로

곰딸기 열매 붉은 칠월의 강토(疆土), 이사부 길에

파랗게 울려 퍼지는 조국의 노래 용감하다.

금강산 짊어지고 사는 단군의 고향

맑디맑은 태백의 파도가 치달려온 능선.

괭이갈매기 소리, 우산봉 부둥켜안은 여든아홉 선열의 바다가

조국의 해원(海園)으로 스며드는 깊디깊은 한국령(韓國領).

백두의 푸른 맥박, 청혈을 뿜어내던 기억의 물살들.

젊은 태극의 바다, 대한봉에 으르렁거린다.

삼천리길 달려온 아침의 태양

거룩한 땅의 이름으로 뿌리내린

아름다운 꽃밭에 들리는 독도의 노래

높디높은 겨레의 꿈 영그는 독도의 벼랑마다 맺힌 그 숨결.

오래된 조국의 새암이 달리고

신서란 향기 꽁꽁 감아 돌던 물마루

돌고래빛 한라의 바다가

사자의 섬에 퍼덕인다.

 

 

 

 

[우수상] 떡국 / 박다은

 

냉동실에서 삼 년 묵은

가래떡처럼 몸을 굽히고

할아버지는 삼 년을 더 살았다

매년 떡국을 퍼먹었던 놋그릇에

칠십오 년 인생을 지탱해온

총알 자국 투성인 몸뚱이가

절반도 안 되게 담겼다

1953년에 멈추어진 나침반 바늘처럼

가만히 앉아 북을 바라보던 뒷모습

소금 같기도 참깨 같기도 한

할아버지 부스럭부스럭

사탕 훔쳐가는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할아버지를

북쪽으로 향하는 꽃가마에 태워 보냈다

꽃문을 열고 나온 어린 소년이

멀리 두고 왔던 여동생의 손을 잡고

천국 방앗간으로 향하는 길

끝도 없이 뽑아져 나오는

엄지와 새끼 새끼와 엄지가

약속하듯 얽혀 있다

하나로 이어진 탯줄 자르듯 똑,

한 뼘의 가래떡을 썰어

육수와 팔팔 끓여내는 새해의 아침

아기처럼 놋그릇에 눕혀진

할아버지 통통한 젖살을

아긍 깨물어 보았다

 

나는 한 살을 더 먹었다

 

 

 

 

 

[우수상] 할머니의 대나무 숲 / 태성일

 

할아버지는 6.25전쟁 때 경찰로 근무하시다가

북한군에 의해 돌아가셨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잠시 세상에 들르셨다가 그렇게 다시

영원 속으로 홀로 여행을 떠나셨다

 

할머니는 삶이 힘이 들 때마다 자식들 몰래

할아버지의 사진을 꺼내어 한참을 보시곤 하셨다

사진속의 할아버지는 엄숙한 표정이다.

다시 찍을 수 없는 사진

좀 웃어 주셨으면 좋으련만

항상 꺼내 보아도 엄숙한 표정이다

 

할아버지 사진은 오랜 시간 버티다가

가로로 3줄 금이 생겼다

사진에 생긴 줄이 할머니 이마 주름을 닮았다

그 줄을 보시며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사진도 세월 가는 것이 힘에 부치나 보다”

 

할머니는 사진을 쳐다보시며

억울한 일, 힘들었던 일 다 쏟아 놓으셨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엄숙한 표정의 할아버지는

금세 환히 웃으시며

"그래요, 당신이 옳아요.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당신은 웃는 게 더 예뻐"

"둘째가 당신한테 잘못 했네요. 그래도 너무 야단치지 말아요

내 보기에는 둘째가 속정이 제일 깊다니까"

이렇게 할머니를 달래시곤 하셨다

 

할머니는 세상 살아가며 들은 애먼 소리

가슴속에 켜켜이 쌓아 놓았다가 더 쌓을 공간이 없어지면

할아버지 앞에서 다 쏟아 놓으셨다

 

할아버지 사진은 할머니의 대나무 숲이다

가슴속에 꾹꾹 눌러 놓았던 힘들었던 일

너저분하게 풀어 놓아도

늘 말없이 들어주시고 인자한 웃음으로 답해주시는

할아버지 사진은 할머니의 대나무 숲이다

 

 

 

 

 

[장려상] 영웅의 유언 / 박상환

 

이 광장의 함성 속에

나의 피와 살점과

내장과 뼛조각들을

단 하나 남김없이 모두 바치노니

 

부디 후손들이여

이 희생을 헛되이 말라

 

우리에게 닥친 고된 시련이

온전히 우리만의 시련이기를

 

우리의 운명은 오로지 우리의 것이거늘

누가 마음대로 이 운명을

저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게 했는가

 

기억하라 후손들이여

우리가 이토록 목놓아 울부짖던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신념과 우리의 희생을

 

총과 칼로 혀를 찢고

곤봉과 매질로 갈비뼈를 부숴도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소망대로 이끌기를 원하노니

 

그들의 썩은 야욕에

우리의 신념을 적시게 놔두지 말라

 

젖가슴을 빼앗긴 갓난아이처럼

무력하게 울고만 있지 말라

 

그대들은 목숨을 걸고

조국의 존엄함을 지키라

빼앗긴 그것을 염원하며 스러진

우리들의 목숨을 잊지 말라

 

언젠가 후손들이 공기처럼 누리게 될

조국의 안녕과 조국의 자유와

조국의 존엄함과 조국의 영광을 위하여

나 지금 뼈부스러기까지 한점 남김없이

모두 그러모아 미련 없이 바치리니

 

그대들은 그 결과를 반드시 지키라

그대들은 그것을 소중히 지키라

 

조국이 힘을 잃어 어둠이 몰려 올 때에는

다 같이 손을 잡고 적과 맞서 싸우라

 

다시는 무력하게 나라를 잃지 말고

다시는 분열하여 핏빛 세상을 만들지 말라

 

이 조국에 쏟아지는 햇빛과

이 조국에 쏟아지는 빗물과

이 조국에 쏟아지는 영광 한점 한점이

온전히 조국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싸워 승리하라

 

 

 

 

 

 

[장려상] 연서 / 김서영

 

오늘 나는 누덕한 종이 사이 가장 하얀 것을 골라

내세에 있는 당신께 연서를 부칩니다.

 

사랑하는 당신

그 곳은 정말 꿈같은 곳입니까.

내가 그대 고운 이름 세글자를 또박히 부를 수 있는 곳입니까.

당신 머리칼을 휘날리며 같이 그윽한 꽃향기를 맡으러 갈 수 있는 곳입니까.

 

당신은 꽃으로 살기 싫다했지요.

꺾으면 꺾이는 꽃이 아닌 바람이 되기를 소망했지요.

그래서 당신은 바람이 되었습니까.

배우고 싶던 것

입고 먹고 싶던 것

이루고 싶어 했던 간절한 꿈

당신이 열망하던 모든 것이 이루어졌기를 항상 바라고 바랍니다.

 

나의 일생의 염원은 그대가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었고

나의 염원은 이루어졌으니 이제 그대는 행복해지소서.

감히 누구도 그대의 행복을 제할 수 없는 따스한 그 곳에서 부디 평안하게 살아주소서.

 

그대가 밟고 있는 땅엔

나의 피가 흩뿌려졌었지요.

나의 젊음은 아직도 그 곳에 있습니다.

 

당신이 살아있기에 내가 존재 할 수 있음을

내가 존재하였기에 당신이 살아 있을 수 있음을 알고 있겠지요.

그러니 다신 아름다운 내 고향을 빼앗기지 말아주소서.

세상이 멸하여도 그 땅의 주인은 당신임을 잃지 말아주소서.

이것이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나의 마지막 당부입니다.

 

 

 

 

 

[장려상] 눈보라 / 유택상

 

죽은 나무들이 숨죽이며 살아서 산 능선마다 울음소리를 낸다

죽어서 떠돌다가 눈보라에 묻혀 일어서지 못하는 형제들 휴전선 고지마다

고요도 숨죽일 만큼 수십 년 바람소리만 내고 있다

어디엔가 응어리진 뒤틀린 산길 끓어졌다 이어지는 생(生)

산자락 마디마디 매달린 녹슨 철모의 외로운 새의 눈물들

거기 색바랜 아버지의 군복이 구겨져 있다

 

강산이 피로 물들었다, 문지방을 넘던 포성소리 바람들이 수백 번 흔들어 삶을

폐허로 못을 박았다

주먹 쥔 지평선은 무방비로 서 있어도 나무들은 폭풍처럼 이글거리는 섬광처럼

삭풍에 눈보라를 일으켰다

산,고지마다 비목이 서 있다, 비목 위에 앉아 있는 새들

몸에 흉터를 남기고 날지도 못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고뇌에 찬 마음들이

휴전선 이곳저곳에 깊이 누워 있는 얼룩진 군복의 아픔을 품고 있는 것이다

북쪽으로 떠나보낸 얼굴들을 잊고 싶은 것이다

구름 낀 골짜기가 생사의 갈림길 이었을까?

 

어지럼증과 현기증을 호소하던 굽이치는 능선들, 재 넘어 숨죽인 고향

진통제를 꽂고도 어두운 들판을 달리던 삭풍

아내와 딸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가 아직 모르는 길 앞에서 절망할 때

생사를 모르는 추운 길 위 숨결들

하늘은 철책도 경계도 없었다

외로워서 죽지 않으려고 얼굴을 땅에 묻고 물을 빨아 검은 젖을 먹던 새들

이젠 눈물이 말라버렸다 산과강이 찢어져 울음은 눈물없이 건조해졌다

지도는 환기되지 못하고 비명으로 갈 수 없는 길이 막혀 있다

물줄기는 뭉개지면서 희미해졌다 산을 횡단하던 길은 숲의 어둠으로 둘러 쌓였다

 

새가 운다 징소리가 들린다

밤낮을 되풀이하면서 목청을 틔우며 아픔을 받아들이는 득음(得音)

입보다 귀가 더 밝은 온몸의 촉수

전선의 밤은 애타면서 바스러지게 새의 소리에 귀가 쫑긋 똬리를 틀고 있다

꽃잎의 낙화에도 얼룩진 아픔을 씻어내고 게워내려는 빗방울

상처와 울음이 서로 눕히는 소리 절명의 눈물이 간당간당 할 때

나는 푸른 나뭇잎에 온몸을 맡겨 날개를 달고 사라져가는

먼 하늘의 내력을 더듬고 싶은 것이다

 

 

 

 

 

 

[장려상] 국혼: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그들 / 김다희

 

봉오동 죽음의 골짜기에서

날아온 나비는

하얀 국화 꽃 위에서 단잠을 취하고

 

탑골공원의 수많은 민들레 씨앗은

단단하고 비옥한 땅위에 꽃을 피우네

 

철새는 원래 내 땅이 아닌 듯 날아가고

참새와 비둘기가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우네

 

서대문 형무소에 피고 있는 진달래꽃이

마당을 가득 짖은 보랏빛으로 메우면

 

슬며시 다가가 가슴에 대어보고

눈에 대어보고

코에 대어본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아름다운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남기기 위해서

 

눈에, 입에, 코에 가슴 깊숙이 새겨본다

 

 

 

 

 

[장려상] 단지동맹 / 이종완

 

단지동맹

 

팔십 년대가 흘려두고 간 오래된 풍경화

그 헐거워진 나사못의 녹슨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리에 서서 가만히 사방을 둘러보면

길은 나의 첫 걸음에서부터 시작되고

부정의 그림자 뒤에서 가만히 숨어 있을 수는 없다.

내게 보이는 것을 나는 본다.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을 나는 지킨다.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지켜야할 것을 끝끝내 지켜야 한다.

지친 발걸음이 쌓이면 풀들은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라고 한다.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그때 다잡던 그 마음

열두 개의 단지로 남은 의기

모든 것이 흐트러져 있어도 하나하나 일으켜 세워야한다.

감당해야 할 일 온 몸으로 감당해 가며

이름 있는 자들도 이름을 지우며 가는 길

작은 어둠을 밝히는 그때의 핏방울들

떠난 이들의 맑은 눈물로 방울방울 내리는데

상처가 지나가면 새살이 돋아 오르듯이

숨어있던 고통과 오랜 줄다리기는 계속되고

연록으로 돋아오를 조국의 산하를 그리는 이들이여

어눌한 눈길로 바라보는 포시에트 항구

러시아 아이들의 눈길에서 떨어져 내리는 작은 평화는

어느새 하얗게 젖어버린 물안개가

반짝이는 흔적을 지우려 할 때

우리들은 굳건하게 뿌리내린 한 그루 푸른 솔이 되어

익숙한 몸짓으로 새로운 하루를 길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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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고패질 / 최류빈

 

후박나무 밑동에 손금이 오른다

곡면으로 직히는 도끼의 말

죽은 나무 깊은 협곡, 진한 생명선으로 남아

너의 찬란한 운명을 증명하고 있다

여린 살 비워갈수록 물고기가 태어나

비늘을 털고 잎처럼 매달리는 논센스

파랑을 건너온 이파리가 천칭처럼 흔들린다

바람의 주술로 총소리 분분한 소리복채

한 쪽으로 기울수록 반대편이 고갤 드는데

나는 땅의 말로 묻히고 너는 오르는 도끼처럼

하늘에 걸리는 달그림자다

아픈 도끼를 뽑아올릴 때마다 살이 자라는

우람한 나무다

너는 짐승처럼 솟아 도끼에게 포효하고 있다

날이 스친 빗면이 조각하는 을씨년스런 표정

죽어 얼굴로 내걸린 너는 신이랴

침략당하면서도 음각으로 호통을 치는 후박나무 일생

파리한 도끼를 아예 뽑아 들고는

복판에 천하대장군, 살을 덜어 양각 오롯한 너

울툴한 겉껍질 사이로 실금처럼

핏물이 흐른다

 

 

 

 

 

[우수상] 무궁화 식당 / 이정희

 

달걀형 무딘 톱니로 허공을 밀어 젖힌다

 

바람의 속살을 휘어잡고

꽃이 되기 위해 뜬구름을 선택했다

빨강보다 연보라를 매단 죄

손에 물마를 날 없이 움직였다

밑 부분이 더 짙은 단심 그늘

종형의 짧은 잎자루처럼 지루한 나날들

 

울타리가 되기로 한 날로부터 한식집을 열고

화려한 자태보다

날마다 싱싱한 꽃을 피우며

꺽이지 않는 섬유질처럼 살기로 했다

 

삼천포 부둣가 허름한 골목에서

스스로 터득한 비법

새벽마다 부풀어 터지는 꽃잎으로

신선한 꽃밥을 차렸다

간발의 차이로 어긋나는 맛과 사투를 벌이며

우툴두툴한 세상 둥글게 말았다

 

검붉은 저녁놀을 즐길 여유도 없이 

종종걸음 치며 내일을 준비한다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메뉴

수시로 진딧물이 달려들어

뒷덜미를 낚아채고

디딤돌마저 건들리기 일쑤

 

빛바랜 잔가지 끝에 레시피를 눌러 적고

갈색 풍미를 곁들인다

푸른 핏줄이 이슬 고여 젖은 눈망울

날갯죽지 파고드는 벌새다

 

보라색 꽃을 매단 푸른 건물

군데군데 마른 얼룩이 찍혀있다

햇살을 건너가는 초록 발톱

내일 아침 환한 꽃이 조식이다

 

 

 

 

 

[우수상] 발로 깍은 나무 / 권효은

 

바람이 말하더군요

이 의자는 참으로 곱다고 말입니다

얼마나 고울까

작은 새도 동동 구르며 무게를 덜고

그 위의 이슬도 미안하여

나이테를 돌고 돈다고요

 

시시 검은 두발은 나무를 안고

발가락에 쇠를 얹어

노수의 심장을 두동강 내셨었지요

아픔을 가리는 것은 허공 속의 화약

온통 잡히지 않는 것뿐

머리 위에 내려앉은 어린 솔잎조차

털어내지 못하는

당신을 보며

나는 원망하였습니다. 조국을

그리고 평화로운 타인의 삶을

 

동강난 나뭇가지는

곧게 뻗은 또 하나의 복사뼈

발가락 사이로 고개 내민 풀이며

손이었다면 향기가 없어 뜯어낼 욕심이겠지요

아, 이토록 너그러운 당신

 

아버지

아버지가 만든 발로 깎은 나무는 의자가 되었습니다

의자의 주인은 없지만

천공을 벗겨 내려앉은

저 빛의 줄기도

감히 바로 앉지 못하는

당신의 훌륭한 의자입니다

 

고요한 푸름이 찾아옵니다

이곳에 앉아 계시던

아름다운 어느 날처럼

 

 

 

 

 

 

[장려상] 나비무덤 / 최다혜

 

할머니의 눈가에는

나만 볼 수 있는

나비무덤이 있다

 

죽은 흰나비의

요람이다

 

나비는 할머니의 눈가를

거닐기도 한다

나비의 발자국은 검버섯이 됐다

 

가끔은 날갯짓을 세게 해서

할머니의 눈가를 젖게 하고

 

가끔은 날갯짓을 적게 해서

할머니의 눈가를 주름지게 한다

 

그 주름 사이로 다니며 할머니와

40년을 보냈다

 

할머니는 오월이

겨울같은 봄이라고 하셨다

죽음같은 봄

 

동네에 향냄새가 그득한 오월이면

흰나비는 요람에서 나오지 않았다

흰나비가 요람에서 나오지 않아도

할머니의 눈빝 반달은 늘 젖어 있었다

 

군복입은 손자를 보며 흠칫하던 할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기덮인 나무관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던 할머니의 마음을 생각한다

잊으라 하면서 떠나지 못하는 흰나비의 

마음을 생각한다

오랫동안 거세된 그 슬픔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의 슬픔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심연의 끝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누구도 그 봄에서 멀어지지 못했다

 

언제쯤 흰나비는 요람에서 잠을 잘까

언제쯤 향냄새 나는 날에도 할머니 눈밑

반달이 메마를까

 

어쩌면, 이 생에, 못이룰, 일 들

 

 

 

 

 

 

[장려상] 탕 안의 전사 / 김동은

 

세월의 깊이가 천장에 붙어

또옥, 똑 떨어지며 비 내리는

공중목욕탕 구석엔

강원도의 굴곡진 철책선을

이마 깊이 착색한 노인이

6월 내내 몸을 닦고 있었다

 

흙의 온도가 피처럼 뜨거워지는 날이면

태백산처럼 굽은 등허리에 돋은 상흔이

가슴 깊이 파고들어 울음조차 토할 수 없다고 했다

한 때 굵은 잔뼈였던 앙상한 둔부를 이끌고

탕으로 기어오르는 노인의 허리춤에는

알 수 없는 이름들이 주름과 함께 늘어져 삐걱거렸다

 

탕에서 피어오르는 자욱한 연기에서

때로 화약 냄새를 맡는다고,

38도C 따뜻한 탕 안의 물결 아래

전우의 얼굴이 발가락 사이를 찰방거리며

늙그수레한 몸의 진땀을 쫙 빼 놓는다고 했다

살갗에 닿는 회상의 파동이 잠잠해질 때면

노인은 탕에서 내려와 끝도 없이 몸을 씻었다

피 냄새가 난다고, 내 몸에서 자꾸 피 냄새가 난다고

 

아득하게 번쩍거리는 총부리와

거칠게 떠안은 책임의 삯은

듬성듬성 빠져 볼품이 없어진

백발의 머리칼을 흩트려 놓았다

희어진 입가에 떨리며 흘러나오는

전설이 된 꽃의 노래는 전사가 되어

돌 뿐인 탕 안에, 낮고 흥건하게 미끄러졌다

 

수건으로 조심스레 떫어진 입가를 훔치고

해독할 수 없는 상처를 보듬어 닦는

노인의 가냘픈 뒷모습은 고독한 숙명처럼 장엄했다

 

 

간판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낡은 목욕탕 출구를 나서며

구식구식 이름을 꿰매어 붙인 노인의 등에는

회수하지 못한 영혼과

빛처럼 흩어진 살점들

속 깊이 허기진 혼잣말

적막한 전사의 마지막 모습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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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개선가 / 김강인


할머니,

이제 생의 군화를 벗고 퇴역하시네


호상이었다

일생 땅에 엎디어 사신 할머니

씨름판에서

황소 한 마리씩 몰고 오던 남편이

구름만 떼로 이끌고

한 줌 군번줄로 귀가한 날부터

임전무퇴의 참전용사였다


가을마다 수확하던

그리움이 할머니의 전투식량

홀어머니 아래서

자식들은 서로를 기르고

종일 깨 줍던 손으로

밥상 꾸리던 날과 밤마다

포화 소리 한 뼘씩 멀어지고

상실은 정물로 굳어갔다

4남 1녀, 막내까지 먹이고

입혀 가르치는 일이 고지였고

논피처럼 솟아나는 외로움이

일생의 주적(主敵)이었으니

퇴로는 없었다

스뎅 밥그릇이 철모요 밥상이 진지인

치열한 전장에도

봄은 어김없이 발발하여

꽃잎이 탄피처럼 흩어졌다

평화가 향기롭게 날리는 등교길에서

큰아들 뒷모습 점차 남편을 닮아갔다

키는 더 크겠지, 하지만

계절마다 벌어지는

궁핍과의 게릴라전

수시로 쌀독이 헛헛했고

허기는 연습할 수 없어서

매 끼니가 실전이었다 그런데도

아들들은 우람했다

그들의 등과 어깨가

최고의 무공훈장이었다

막내딸은 깍지 속의 콩처럼

하냥 뽀얗고 조그맸으나

동네 사내애들과도 드잡이를 했다

과연 용사 부부의 막내였다


시간은 가장 든든한 아군이자

치밀한 적군이었다

할머니의 부대원들은

각개전투를 위해 차례로 출전했다

막내가 제 몫의 운을

총검 대신 들고 떠나간 날

군영은 비고

할머니는 노년의 초소에서

종일 보초를 섰다

전리품은 몇 소쿠리의 적막이었다


혼자 불침번을 서던 새벽

수십 년 전의 남편이

군화 끈을 고쳐 묶으려

꿈의 대청마루에 걸터앉았다

할머니는 헐거운 흑색 끈을

다 풀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꿰었다

아주 천천히, 더디게

포성이 그치고 휴전선이 그이고

막내가 시집가던 늦가을까지 등목

꾸물거리면서

아무도 떠나지 않는 꿈


이제 육신을

묵직한 전투복처럼 벗어두고

가볍게 발돋움하여 떠나는 할머니


한 생의 종전(終戰)을 알리며

바람이 분다

잘생긴 황소 구름 한 마리 끌고

먼저 봄이 된 남편이

하늘 어귀까지 마중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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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불새 / 강윤순


새는 주검으로 태어났다. 이와 이 사이에서 사각울음으로 탄생했다. 사각지대는 아니었다. 소리도 나지 않았다. 고유번호*1446**, 오 형, 전쟁의 그리메, 화약연기 따라 새가 사라질 때 푸른 구름도 사라졌다. 해도 총총 손을 놓았다 풀들은 온몸으로 땅을 치며 누웠고, 꽃봉오리는 그림자를 땅속에 묻었다.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여 안녕, 그대 목에 걸려있는 나는 안녕으로 삼켜주오, 새를 쫓다 가시철사에 걸린 바람이 하얀 피를 쏟았다. 사이렌은 오작동이라고 머리를 흔들었다. 주인 잃은 깃털은 허공을 떠돌았고, 철모는 남은 온기를 레퀴엠으로 싸안았다. 하얀니와 이팝꽃과 불사조, 멀어질수록 또렷해지는 새소리가, 현충원 목백합나무에 걸려 있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온 핏줄을 뽑아 가지 위에 새 둥지를 만들었다. 언제라도 쉬었다 날으렴, 아버지는 언제까지 뒤돌아서서 어둠으로 에세라이트를 태웠다. 나비효과가 카프리 푸른 동굴을 울렸다. 성당의 종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방 하나엔 별들로 채워둘게요, 별 하나 별 둘로 깃털을 날릴게요, 온갖 새 노래가 청공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뜰 안 가득히 풀과 꽃들이 웃고 있었다. 전쟁기념관에 죽어도 죽지 않은 수많은 새 눈물방울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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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지상의 봄 / 허민

 

애인은 현충원에 가자고 했다

 

그곳이야말로 진지하고 고요하게 봄꽃의 깃털들이 지상을 떠나기 위한 비상을 준비할 거라고

 

하얗고 붉은 봄꽃들이 비문 앞에서 흩날리고 있다면

그건 아름다운 생을 슬프게 이륙하는 것일까

깔깔거리는 연인들의 웃음처럼 또 다른 의미로 새롭게 피어나는 걸까

 

많구나

 

살아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과

그보다 더 많이 누워 있는 사람들이

그리고 여기에 있지 못했던

그들의 사랑 같은

보이지 않는 지난 계절들

 

그건, 참 이름이 없어서

여기에 쓰인 죽음들의 문장을 넘어

보이지 않는 시의 행간들처럼

산 자들의 호흡처럼

 

떨어지는 꽃나무 가지 사이사이의 허공

애인은 고개를 숙인 채 꽃잎을 밟지 않았네

저들이 너무 슬퍼서 너를 사랑해

 

셀 수 없는 사연과 사연이 있을 텐데

그들의 나이와 나이를 합하고 그들의 잊혀진 시간들을 모두 합하고 보니

 

우리는 잠시 찰나가 되어

 

이곳의 꽃나무들이 다른 어떤 땅위의 생명보다 눈부시게 느껴지는 건 무얼까

 

현충원을 찾는 상춘객들이 돗자리를 펴고 웃음을 떠들고 저들만의 방식으로

죽음보다 고마운 삶의 여러 방향들을 추모할 때

애인은 꽃잎으로 덮인 아름다운 봄의 비석들 앞에서 한 편의 시를 끄적이네

 

- 봄에도 눈이 오는 그 언덕 길

누군가는 끊어진 삶을 오열하며

걸어갔을 그 길 위에 아이들의 웃음소리 파도처럼 부서진다

 

이제 한 줄의 비문으로 남은 그의 삶이 그저 액자 속 정물처럼 심상해졌기에

산 자는 그 언덕 어디메서 울음처럼 실려 오는 꽃비를 맞는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이 계절처럼 아름답고 어린 내 인생의 간절기를 본다

짧아서 아름답다는 그 명제가

이 휘어진 능수 벚꽃 가지처럼 내 마음을 꺾는대도

오늘은 웃는다

 

너와 맞이한 첫 봄이다-

 

당신과

당신들을 맞이한 나의 첫,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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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보훈문예작품공모전 시부문 당선작] 이태학 외

 

최우수상

가장 아름다운 신부 / 이태학

 

 

아버지, 당신의 마지막 전투가 있던 날

금화지구 골짜기에 퍼붓던 총탄처럼

새벽까지 세차던 빗줄기는 멈추고

새파란 하늘 아래 현충원의 휘장들이

만장으로 휘날리는 오늘

어머니를 당신께 보내 드립니다

산딸나무 하얀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지는 날

육십삼 년의 서러운 그리움으로

아버지의 유산이 되어 무겁게 반짝이는

비석의 문을 열고 보내 드립니다

죽음과 수절이 숨바꼭질하며

가슴을 치던 수많은 날들

스치는 바람이 흔드는 문소리에 행여 당신인가

설레임과 두려움에 문을 열던

어린 남매와 청상의 트라우마를 지우고

오늘 어머니를 보내 드립니다

탁자 없이 의자만 있는 거실처럼

늘 어색하고 허전했던 긴 세월들

보이지 않는 눈총에 쉽게 마음 다치고

주눅 들던 유년의 날들보다 더 초라했던

우리의 구멍가게와 어머니가 누워 계셨던

호스피스 병동은 기억하지 마십시오

오늘 육십이 넘은 아들의 친구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당신의 신부를 운구하여

한 삽의 부토를 얹습니다

어머니의 애틋한 새벽기도와 찬송이 멈추었듯

아버지의 간절한 외출도 휴가도 끝나

귀대 시간이 다가오는 병사의 근심은 없어도 됩니다

아버지, 이제 무거운 짐을 놓으시고

긴긴 날 그리웠던 당신의 신부와 함께

새로운 설레임으로 조국을 지켜봐 주소서

영원한 푸른 병장의 군모를 쓰고

현충원의 길목에 나부끼는 휘장처럼

펄펄 웃으며 어머니를 맞아 주소서

 

 

 

 

우수상

태극기 / 박세령

 

 

그것은 불그스름한 해 위에 어렴풋이 놓여

있기도 하고

때론 새벽녘 시퍼런 안개 위에 놓여 있기도

합니다

 

그것은 세상을 시꺼멓게 보이게도 하고

때론 새하얗게 보이게도 합니다

 

그것은 당신과 꿈을 그렸던 곳과도 닮았고

때론 당신의 이름을 적었던 곳과도 닮아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 어깨에 고인 빗물과도 닮았고

때론 따듯한 난로 같은 당신의 손과도 닮아

있습니다

 

남들은 나에게 사랑을 하냐고 묻습니다

 

아니요

 

저는 약은 사랑보다

어리숙한 그리움이 더 좋습니다

 

불타 없어지는 게 사랑이기에

물처럼 고여 있는 그리움이 더 좋습니다

 

과거에 묶여 현재에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그리워하여 현재에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 믿기에

나는 아직도 그를 많이 그리워합니다

 

   

 

 

우수상

진혼곡 듣다 / 윤옥란

 

 

참매미 한 마리가

골 파인 대추나무를 움켜잡고

날개 밑 꽁무니를 바짝바짝 들어 올린다

 

몇 번은 목 메인 소리 내다가

한 번은 할아버지 퉁소 소리처럼 길게 뽑아내는 매미,

날개를 수백 번 부딪치며 빠져나갔을 붉은 목청이

잠시 삼매경에 든 것인가

 

저리 가늘게 떨면서

하소연하듯 울어 대는 것은

한쪽 다리 절룩거리는 큰아들 한숨소리 같다고

 

군용 지프에 깔려 돌아가신 할머니의 원성 같다고

할아버지 퉁퉁 부은 눈으로 대추나무를 바라보신다

 

참매미 입이 갈라지고

눈이 튀어나오도록 우는 것도

먼저 간 이름들을 외우며

마흔아홉 번씩 염불 올리는 것이라고

 

찢어진 날개를 달고

영가 천도재 올리는 것이라고

매미 울음 끝나는 말복 때까지

대추나무를 찾아온 할아버지

 

등 휜 대추나무 밑에서

먼저 간 이름들 부르며 진혼곡 들으신다

 

   

 

 

우수상

전선야곡戰線夜哭 / 박준일

 

 

숨 막힐 듯 고요한 밤에 철책선을 앞에 두고

그 너머 북녘 땅을 멍하니 바라본다.

어깨 위의 보름달이 머리까지 올라와

한 줄기 월광 되어 나를 비출 때,

고요한 적막 속 내 가슴의 목소리는

그날의 함성 되어 온 산을 깨운다.

저 산 너머 고지를 지키려 울부짖던 전우들의 목소리,

가족과 조국을 위해 쏟아낸 그들의 피눈물이

새하얀 얼굴 위에 흐드러져 내리고,

그날에 멈춰 버린 표정으로 여전히 바라보고만 있다.

그 빛 속 담겨 있는 기억은 내 표정마저도 그날로 멈추게 하는데,

그날의 기억된 내 가슴의 목소리만이

신념으로 남아 흘러가고 있다.

 

적막을 가득 채운 그날의 기억처럼

머리 위의 달은 저물어 가지만,

여전히 흘러가는 내 가슴의 목소리는

언제나 멈춰 있을 그날의 얼굴로

다른 이들의 가슴에 떠오르기를

 

   

 

 

장려상

6월의 환/ 안지숙

 

 

소년은 잃어버린 얼굴을 하나씩 뒤집어쓰고

하얗고 차가운 이마를 반짝이며

군화에 묻은 혈흔을 닦아 낸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탄환의 울림과

눈앞에서 사라져 간 영혼들의 눈물

우리는 작은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풍선인가

호명하는 이름마다 선혈이 그득한 밤

 

검붉은 입 속에 잠든 혀처럼

침묵 속에서 역사는 반드시 피어나리

유폐된 목소리들이 모두 모여서

숭고한 죽음으로 길을 닦는다

 

축축한 살 안쪽으로 고이는 어둠

수없이 흔들리며 가라앉는 교복의 이름표

발목에 매달린 그림자를 잘라 내자

허전한 자리마다 날개가 돋아난다

 

 

소년은 작고 까만 눈으로

단단한 어둠을 부른다

가족을 가슴에 묻고,

나라를 가슴에 품고,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군화를 닦는다

 

수없이 떨어지는 탄환들

암흑을 뚫고 나아가는 학도병들

그들이 지나는 자리마다

처절하게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난다

 

꽃잎을 물고 날아가던 새 한 마리,

붉은 노을 속으로 투신한다

흩날리던 꽃잎들이

봄을 수놓는 밤이다

 

 

 

 

장려상

송시送詩 / 박현주

청춘에서 굳어 버린 공덕을 기리며

 

 

이내 뜨거운 것이 눈앞을 가린다.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내뻗은 다리엔 아무 힘도 없었다.

비어 버린 탄창은 먼지만을 드리운 채 아쉬워하고

사신처럼 다가오는 육중한 전차의 궤도 진동은

손바닥이 터지도록 쏟아부은 포탄이 무색한 채 드리운다.

낙동의 강 너머 무사할지 모르는 가족들은

그토록 지키고 싶은 단 하나의 열망

지옥불의 아귀마냥 모든 걸 집어삼킬

흉포한 포탄의 총구 아래

가장 미약하나 신성한 단 하나의 방패가 되어 굳어 버렸다.

반세기가 넘도록 맹수는 짖기를 멈추지 않고

결연한 의지는 아들을 넘어 손자에게로 이어진다.

아버지가 자신이 있던 곳에 아들을 보내며 보는 것은,

그를 닮은 등판에 역사처럼 새겨진

굳어 버린 아버지의 의지,

그 한 자락.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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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나의 임이여 / 김주희

 

처마 끝 고드름이 녹아 낙숫물이 떨어집니다

그물이 흙바닥을 치고 또 치더니

그렇게 물웅덩이가 되었습니다

 

고드름 녹기 전 돌아온다던 당신의 말이

이내 맘에도 눈물 웅덩이가 되었습니다

 

텃밭 끝자리에는

민들레가 새치름하게 어여쁜 빛깔 물들이고

내 양 볼에는 세월이 깊게 파고들어 튀튀한빛이 물들었습니다

임자 고운모습 고이 담고 떠난다던 당신의 뒷모습이

깊게 패인 살사이 물 흐르는 소리로 허공에 흩어집니다

 

내 가슴팍에 파고들어

어미의 젖을 찾던 우리 아가는

당신이 쌓은 돌담만치 훌쩍 자랐습니다

 

아가는 까치발을 들지 않아도 돌담너머를 기웃이는데,

그 너머 끝 총탄 소리에 가려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나의님이여,

울부짖는 나라가 부르는 그 소리를 듣고

무거운 발걸음 가벼이 가신 나의님이여

 

달력에는 의미 없는 숫자만 야속하게 넘어가는데

뱃고동 소리 나는 어떤 이의 심장에

장전한 두 눈으로 총을 겨누어

해 뜨는 아침도 긴 밤이 되었습니까

 

아침이 오지 않아도

언제나처럼 하늘에는 뜨거운 빛이 물드는데

아침 알리는 암탉의 소리는 아니 들리고

귀를 찌르는 총칼소리가 아지랑이로 피어납니다

 

조약돌 나지막한 그 길에는

탄피가 삐죽히 자리 잡아

아이들 공깃돌이 되었습니다

 

긴 밤 임이 드리워진 군모 쓴 그림자 위에

무릎 꿇고 핏물어린 정화수에

총칼을 내려놓은 두 손을 모아 소원해봅니다

 

이 땅의 아침을 위해 힘겨운 발자국 남긴 나의님이여

군살 박힌 손에 태극기 쥐고서

끈 풀린 군화에 자욱한 먼지 털어내고

찬란한 태양 길 따라 걸어오는 임의 이마에 맺힌 아침이슬이

이 땅에 축복으로 가득해지기를

 

 

 

 

[장려상]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 표성배

- 육이오 전사자 유해 발굴에 부쳐

 

이 골짜기를 타고 넘는 바람이

왜 숨을 죽이는지

이 들판을 가로지르는 날짐승들이

왜 날갯짓을 멈추는지

이리도 생생히 살아 있는 그대 앞에 서고서야

알겠습니다

 

그대 흘린 피 얼마나 뜨거웠으면

대지(大地)는 온통 황토 빛으로 빛나기만 했던가를

아직도 벗지 못한 군복이 하늘처럼 푸르러

반도의 산하(山河)는 이리도 미치게 푸르기만 한가를

 

그대 잃어버린 꿈이 무엇인지

이루고자 했던 소망이 무엇인지

수천 년 한 결 같이 흐르기만 하는 강물이

끊임없이 저 산맥을 타고 넘는 바람이

오늘은 대답을 준비 해야만 합니다

 

녹슨 철모를 반듯하게 닦아 봅니다

손대면 푸르게 푸르게 물들 것만 같은 군복을

가만히 어루만져 봅니다

 

조국 산천에 깃발처럼 나부끼던 그대 함성을

내 온 몸으로 듣는 중입니다

 

꼭 살아 돌아오마던 맹세를 지키기엔

참으로, 너무나 너무나 긴 시간이었습니다

기다림의 한숨이

저 산을 넘고 강을 건너기를 수십 년

그러나, 한 번도 잊은 적 없습니다

그대 흘린 피가 이 조국(祖國) 산하를

더욱더 푸르게 만든다는 것을

 

어찌 그 맹세가 거짓이겠습니까

아직도 스무 살 청춘인걸요

 

힘차게 밀려왔다 밀려가는

쪽빛 바닷물처럼

산하를 내달리는 말발굽 소리처럼

끊이지 않는 포성(砲聲) 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한 발 한 발 전진하는

그대 모습이 눈에 선하게 어립니다

 

이제 내려놓으십시오 홀가분하게,

붉게 녹슨 철모를

두 발을 붙들고 있는 군화를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소총을

저희들이 대신 그대들의 철모를 군화를 소총을

단단히 쥐겠습니다

 

조국은 언제나 그대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니, 조국은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반백년이 흐르도록 조국은

그대들을 편히 쉬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

편히 감지 못한 두 눈 앞에 무릎 꿇고

이제야 고합니다

이 푸른 유월의 쪽빛 바다를

높고 높은 푸른 하늘을 마음껏 가슴에 품고

다시 꾸고 싶은 꿈이 있다면

강물처럼 바람처럼 꾸십시오

이제야 그대들을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한

이 못난 저희들을 꾸짖어 주십시오

 

뚜벅 뚜벅 걸어서라도 가고자 했던

그대들의 꿈, 그 꿈을 꾸는

푸른 유월입니다

 

 

 

 

 

[장려상] 동작동에서 / 양해극

 

다부동

1950년

무너진 가슴안고

 

오뉴월

질긴 햇살

양산으로 가린 모정

 

두 손을

모은 명치에

한강수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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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아버지의 귀 / 최희명

 

무엇이 궁금했을까

평생을 갸우뚱하던 아버지

막노동 하루의 끝에서 불사두주 꽃필 때만

펴지고 꺾이던 아버지의 갸우뚱한 고개

쫑긋 세우고도 알아듣지 못하던 세상

肝간보다 일찌감치 경화되어

얼어붙은 청천강 건너 전진하던 운산 어디쯤인가

뙤놈들에 밀려 청천강 되 건너오던 길에선가

폭탄 터져 까맣게 잃어 버린 아버지의 한쪽 귀

전교일등 상장 바짝 내밀며 약속했던 운동화

사달라는 작은 딸년 검정고무신 못 본채

돌아서 걸어가던 아버지의 기우뚱한 빈 어깨

머리맡 물 주전자 얼어붙던 밤 따뜻하던 아버지의 품

사람이 좋아 사람만 보면 술을 권하던 당신의 텅 빈 괴춤

얼근하게 술기 오르면 어김없이 풀어내던 전쟁담

후퇴하는 전선 칼바람 속에서

목숨 걸고 치룬 불꽃 튀긴 백병전

미군들과 전진하며 ‘전우여 잘있거라’를 불렀다는

간경화로 복수 뽑아낼 때쯤 뒤섞여버린 사십년 전설

당신의 에너지, 당신의 명예, 사나이 죽어도 좋을 사랑

전우들 목숨 값어치, 그리하여 반 토막이라도 지켜낸 나라

반 토막이라 더욱 애절한 조국

이제는 내 아들이 눈 푸르게 지키는 아버지의 중부전선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보고 싶은

하나 된 아버지의 대한민국

 

 

 

 

 

[우수상] 푸른 걸음 / 김형미

- 아들의 군화

 

푸른 시간을 기억하는 군화 한 켤레

씩씩한 걸음을 멈추어

신발장 구석 기운 몸으로 서 있다

 

한 곳으로 방향을 모으기 위해

사방으로 내딛던 발목을 견디느라

고단했을 군화의 목을 어루만져본다

울대 안에 고인 침묵이 또 하나의 그리움인 듯

귀를 대고 걸음의 내력을 들어본다

 

나의 품을 떠나

너의 무릎으로 서던 날부터

꺾일 줄 모르고 넘어지기 몇 번이더냐

질풍노도의 바람에 쏠려 비틀거리다

군장의 무게에 휘청대던 발목

살갗이 벗겨진 통점의 시간들

높은 산 너른 강을 건너

여기까지 왔구나

목이 긴 신발은 진취적이다

 

뼈마디 시린 추위, 거친 자갈길

고단한 행군에도 너를 외면한 적 없는

군화의 기운 몸을 세우고

구두약으로 빛나는 눈빛을 여니

고결한 충정을 쫓던 그 길에

푸른 시간이 돋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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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조국을 위하여 / 하태근

  

우리의 핏줄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던 용사들의 피가 흐른다

 

진정한 조국을 위하여

백두산 천지가 넘치도록 흘린

그분들의 피와,

그분들의 눈물과,

주적들을 미처 몰아내지 못한,

그분들의 울분이

우리의 핏줄에 흐른다

 

우리는 언제라도

진정한 조국을 위하여

반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머리 정중앙이 처참하게 뚫린 채,

장렬하게 삭아가는 철모를

왕관처럼 쓸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는 언제라도

진정한 조국을 위하여

치열한 피를 흘리고,

장엄한 눈물을 흘리고,

혈관에 흐르는 옛 용사들의 울분을

맹렬하게 토해낼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는 언제라도

세차게 뛰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조국을 위하여 몸을 바친 그분들의 힘찬 함성을 느끼며,

아침의 영광처럼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목이 터지도록 애국가를 부를 준비가 되어있다

 

진정한 조국을 바라보며

뜨겁게 흘릴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그 뜨거운 한 방울이,

우리는 언제라도,

언제라도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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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참배를 하는 밤 / 김요안

 

고즈넉한 밤, 잠자리에 들며 일상에 짓눌린 호흡을 길게 한다.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버릇처럼 인터넷을 하는 내 손가락 끝에

걸린 국립현충원 사이버추모관 app....... 누운 채로 다운로드받고

별다른 기대감 없이 관광객처럼 손가락터치로 여기저길 둘러본다.

 

둥근 와이파이안테나가 피투성이 함성 위로 봉분처럼 솟아올랐다.

신화 속 아킬레스의 흉갑 입고 납작 엎드린 무덤들의 푸른색 뗏장.

아기살처럼 무른 그 하드웨어 속에 든 딴딴한 정신의 소프트웨어가

밝힌 하얀 비석들은 메이드 인 코리아 LED처럼 시리도록 눈부시다.

 

입구에서 마주친 현충지에서 무리 중에 일곱 살고 넷은 뼈 없는

주검이 된 비단잉어들의 지느러미가 물빛을 붉은 핏물로 물들이고

충성거북상의 등껍질을 더듬듯이 갑자기 더뎌진 스마트 폰은

웹페이지를 못 찾는다는 21세기 판 갑골상형문자를 표시한다.

 

때마침 피 냄새 실린 태양풍이 분다. 깃발의 찢긴 소요와 무쇠의

끓는점으로 치닫는 치열한 전투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다 말았다.

두꺼운 전파교란을 뚫고서 충성분수대로 진격하며 거듭 스트리밍한다.

5.3인치 LED스크린 망막 위로 조국의 아픔이 선혈처럼 번져간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아무도 피와 눈물로 답변하지 않았다면 열강들의 독소조항과

장사치의 약정 없는 무제한데이터의 권리를 허용 받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태생적 자유를 여태 단 몇 바이트도 전송받지 못했을 것이다.

 

북쪽하늘은 전리층 너머 저 멀리 순국영령들의 본향 길로 통하고

동쪽하늘엔 겹겹이 둘러싸인 고층아파트 3G 전파 길이 트이고

남쪽하늘은 통일조국을 염원하는 망명객들의 행복한 비행길이고

서쪽하늘엔 초승달모양 묽은 와이파이안테나가 새살처럼 돋아난다.

 

나는 따뜻한 초승달 네 개를 손에 그러쥐고 정상적으로 로그아웃이

되지 않은 푸른 이마들이 누운 차디찬 묘지들을 찬찬히 굽어보며

새로 전원을 일으키듯 입술을 길게 깨물어 잠든 정신을 일깨운다.

내 정신과 영혼의 GPS현재위치를 추모정신으로 재설정한다.

 

내 정신의 고도는 에베르트산보다 높아지고, 내 영혼의 깊이는

마리아나해구보다 깊어진다. 나침반바늘은 용사들의 심장으로부터

내 심장으로 옮겨와 예리하게 가리키며 일상의 각질이 덕지덕지

낀 내 양심의 혈관을 뚫어대고 꽉 막힌 심장을 박동하게 만든다.

 

용사들의 피의 값으로 선불된 무제한데이터의 자유를 누리는 내가

부담한 의무부가서비스는 고작 2년 2개월, 그러나 나의 로그기록은

1974년 이후 계속 갱신되고 있음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고결한 넋들의 짧은 로그기록들을 손끝으로 더듬어 마음에 저장한다.

 

망혼들의 명예와 용기에 존경과 감사를 표하며 경건히 참배를 한다.

사이버분향이지만 향냄새는 짙다. 신경망을 통해 전율을 일으키며

온몸으로 리얼하게 퍼져간다. 입술에서 절로 진혼의 기도가 나온다.

선열들이여! 고이 잠드소서. 부디 이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소서.

 

모두가 잠든 밤, 어느 틈에 나는 벌떡 일어나 방안을 서성인다.

갑갑한 일상에 숨구멍 하나가 크게 나선 창문처럼 활짝 열려있다.

한 차례 시원스레 숨을 내쉰다. 나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이 공기!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며 순례객은 app을 종료한다.

 

 

 

 

 

이 땅에 묻힌 꽃 / 김주희

 

할아버지 자개농 깊숙이 손가락을 뻗어본다.

할머니 옥비녀의 매끈한 감촉 뒤에

까슬까슬한 왕골바구니 하나가 만져진다.

 

바구니 뚜껑을 떨리는 손으로 열어본다.

네 모서리가 다 닳은 뭉툭한 사진 한 장이 누워있다.

고된 세월에 한잠 청하듯 그렇게 누워있다.

 

덩그러니 누워있는 사진 한 장을 깨워본다.

 

그때 그날로,

해찬솔 간조롱한 이 땅에 매캐한 포탄 소리 울리던 그때 그날로.

 

검게 그을린 얼굴로

하얗게, 너무나 하얗게 웃는다.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가는

화약 냄새로 코끝이 찡한

가살어린 전장 속에서

그들은 하얀 한 떨기 국화꽃처럼 하얗게 웃는다.

 

찰칵.

셔터소리가 짧게 들린다.

 

핏빛 전장에서 일각의 평안도 짧게 끝났다.

 

한 땀 한 땀 수놓은 태극기에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은 사진 한 장에

흐느끼는 마음 조용히 감춰놓는다.

 

총칼을 쥔 그들의 손에 힘줄이 선다.

 

붉게 물들어가는 전장으로 돌진한다.

가슴 깊숙이 새겨진 그 이름을 부르며 돌진한다.

 

메아리치던 그 이름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부르던

어느 국화꽃들의 군번줄은 차갑게 식어갔다.

 

흐느끼는 마음 한 번 얼러주지 못하고

어느 국화꽃들은 허리가 꺾였다.

 

만개(滿開)하는 청춘을 이 땅에 바친 그들은

꺾인 자신을 아랑곳 않고

이 땅의 결실을 위해 그렇게 낙화 하였다.

 

 

 

 

 

금낭화 피는 유월에 / 김지연

 

단지 멋진남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남인수 선생의 애수의 소야곡이 흐르는 명동거리에서

버튼 2개 달린 최신유행 싱글슈트 걸치고

생각보다 일찍 모여든 사람들 사이로

매너좋은 실례합니다로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다시한번 좌석을 확인하며 영화 자유부인을 즐기다

주머니속 지폐몇장을 고민어린 손으로 만지작 거렸을 당신

전문학교를 졸업하면 무얼할지 설레는 걱정뿐이지만

고향옛집 삐걱거리던 대청마루부터 꼭 고쳐드리자 했지요

 

다만 집으로 가는길 보다 나라의 길을 먼저 걸어가셨습니다

이른봄 매화지고 그 자리에 열리는 매실

유월 딱 한달 동안만 허락한 귀한 열매로

당신의 눈물로 발효시킨 어머니의 매실청은 이미 다 익었습니다

우물속 시원한 샘물로 국수 면발 철철 헹궈내어

참으로 알맞게 소금 간한 별미콩국수 내어놓고

당신을 기다리던 착한 누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랑이귀 닮아 ‘범의귀’라 불리는 그 하얗게 생긴꽃이

온몸을 뒤 덮어 버리는 안개속 같은 꿈 꾼 다음날

포탄소리에 정신이 번쩍들어 이제사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유월의 수국이 담장넘어 먼길까지 마중을 나와주어서

반가운 맘으로 어서 어서 수국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담장뒤로 장독뒤로 돌아도 돌아도

잠들은 듯이 깨어있는 듯이 걸어도 걸어도 고향집은 나오지 못하고

그만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한 절벽밑 돌부리에 도착한 당신은

연홍빛 줄기를 따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피가 흐르는 심장같이 생긴 금낭화 꽃이 되셨습니다

 

나는 몰랐습니다

금낭화의 꽃말이 당신의 뜻에 따르겠어요 인지

그 뜻에 따라 당신이 금낭화가 되셨는지

오늘도 내일도 눈감지 못하고

당신의 영혼은 영원히 집으로 기울어지지 못한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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